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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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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四年春王二月 莒人伐杞하야 取牟婁注+無傳 書取 言易也 例在襄十三年 杞國本都陳留雍丘縣 推尋事跡 桓六年 淳于公亡國 杞似幷之 遷都淳于 僖十四年 又遷緣陵 襄二十九年 晉人城杞之淳于 杞又遷都淳于 牟婁 杞邑 城陽 諸縣東北有婁鄕 [附注] 林曰 此伐國取邑之始하다
[經]戊申 衛州吁弑其君完注+稱臣弑君 臣之罪也 例在宣四年 戊申 三月十七日 有日而無月 하다
[經]夏 公及宋公遇于淸注+遇者 草次之期 二國各簡其禮 若道路相逢遇也 淸 衛邑 淸北東阿縣 有淸亭 [附注] 林曰 此特相遇之始하다
[經]宋公陳侯蔡人衛人伐鄭注+[附注] 林曰 此諸侯會伐之始 亦東諸侯分黨之始 於是齊鄭一黨也 魯宋陳蔡衛一黨也 東諸侯分黨 而天下始多故矣하다
[經]秋 翬帥師會宋公陳侯蔡人衛人伐鄭注+公子翬 魯大夫 不稱公子 疾其固請 强君以不義也 諸外大夫貶 皆稱人 至於內大夫貶 則皆去族稱名 於記事之體 他國可言某人 而己之卿佐 不得言魯人 此所以爲異也 翬溺去族 傳曰 疾之 叔孫豹則曰 言違命 此其例也 [附注] 林曰 此大夫專將之始 於是翬得兵而循至於弑君하다
[經]九月 衛人殺州吁于濮注+州吁弑君而立 未列於會 故不稱君 例在成十六年 濮 陳地水名 [附注] 林曰 於是州吁不稱公子 石碏得書人 討賊之義著矣하다
[經]冬十有二月 衛人立晉注+衛人逆公子晉而立之 善其得衆 故不書入於衛 變文以示義 例在成十八年 [附注] 林曰 桓公弟宣公立하다
[傳]四年春 衛州吁弑桓公而立하다
公與宋公爲會하야 將尋宿之盟이러니 未及期하야 衛人來告亂하다
公及宋公遇于淸注+宿盟在元年 [附注] 林曰 因衛亂而簡其禮以相見하다
[傳]宋殤公之卽位也 公子馮出奔鄭하니 鄭人欲納之하다
及衛州吁立注+謂二年鄭人伐衛之怨하고 而求寵於諸侯하야 以和其民注+諸簒立者 諸侯旣與之會 則不復討 故欲求此寵하야
使告於宋 曰 君若伐鄭以除君害注+害 謂宋公子馮 君爲主하야 敝邑以賦 與陳蔡從하리니
則衛國之願也注+言擧國之[附注] 林曰 敝邑 衛自謂 言以衛國之賦調 與陳蔡之兵 從宋라하니 宋人許之하다
於是陳蔡方睦於衛注+蔡今汝南上蔡縣 故宋公陳侯蔡人衛人伐鄭하야 圍其東門이라가 五日而還하다
公問於衆仲曰 衛州吁其成乎注+衆仲魯大夫 對曰 臣聞以德和民이오 不聞以亂注+亂 謂阻兵而安忍이니이다
以亂 猶治絲而棼之也注+絲見棼縕 益所以亂 [附注] 林曰 治絲之道 以和緩爲先 棼 猶紛也 若棼之 益見亂而難治 和民之道 猶是니이다
夫州吁 阻兵而安忍注+[附注] 朱曰 阻 恃也 言恃其兵威而安於殘忍하니 阻兵이면 無衆이오 安忍이면 無親이니
衆叛親離 難以濟矣注+恃兵則民殘 民殘則衆叛 安忍則刑過 刑過則親離리이다
夫兵 猶火也하야 不戢이면 將自焚也注+[附注] 林曰 若不戢止 將自焚其身리이다
夫州吁弑其君而虐用其民注+[附注] 林曰 用其民以爭戰 朱曰 又以刑威 虐用其民하고 於是乎不務令德 而欲以亂成하니 必不免矣注+[附注] 朱曰 令 善也 德可和民 而州吁不務之 亂不可和民 而州吁乃作亂以圖成事 必不能免於討也리이다
[傳]秋 諸侯復伐鄭할새 宋公使來乞師注+乞師不書 非卿어늘 公辭之注+從衆仲之言하다
羽父請以師會之注+羽甫 公子翬어늘 公弗許한대
固請而行하다
故書曰 翬帥師라하니 疾之也
諸侯之師敗鄭徒兵하고 取其禾而還注+時鄭不車戰하다
[傳]州吁未能和其民하니 厚問定君於石子注+石子 石碏也 以州吁不安 諮其父한대
石子曰 王覲爲可注+[附注] 朱曰 若能朝覲天子 得其寵命 乃可安也니라 曰 何以得覲이리잇가
曰 陳桓公方有寵於王注+[附注] 林曰 此時 陳桓公尙存 未應有諡 左氏追書之하고 陳衛方睦하니 若朝陳使請이면 必可得也리라 厚從州吁如陳注+[附注] 林曰 如 往也하다
石碏使告于陳曰 衛國褊小하고 老父耄矣하야 無能爲也
此二人者 實弑寡君하니 敢卽圖之注+八十曰耄 稱國小己老 自謙以委陳 使因其往就圖之하라
陳人執之하야 而請涖於衛注+請衛人自臨討之어늘 九月 衛人使右宰醜涖殺州吁于濮注+[附注] 林曰 右宰 官名 醜 衛臣하고 石碏使其宰獳羊肩涖殺石厚于陳注+[附注] 朱曰 宰 家臣也 獳羊肩 宰之姓名하다
君子曰
石碏 純臣也
惡州吁而厚與焉하니 大義滅親 其是之謂乎注+子從弑君之賊 國之大逆 不可不除 故曰 大義滅親 明小義則當兼子愛之 [附注] 林曰 伸君臣之大義 而滅父子之私親 合於古語大義滅親之說ᄂ저
[傳]衛人逆公子晉于邢하다
冬十二月 宣公卽位注+公子晉也하다
書曰 衛人立晉이라하니 衆也니라


4년 봄 2월에 거인莒人를 쳐서 모루牟婁를 취하였다.注+이 없다. 라고 기록한 것은 힘들이지 않고 쉽게 얻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양공襄公 13년에 보인다. 기국杞國의 본래의 도읍都邑진류陳留옹구현雍丘縣이다. 사적事跡을 더듬어 보면 환공桓公 6년에 순우공淳于公이 나라를 망치자 기사杞似순우淳于합병合倂하고서 나라가 순우淳于천도遷都하였으며, 희공僖公 14년에 또 연릉緣陵으로 천도遷都하였고, 양공襄公 29년에 진인晉人나라의 순우淳于을 쌓으니 가 또 순우淳于천도遷都하였다. 모루牟婁기읍杞邑이다. 성양城陽제현諸縣동북東北누향婁鄕이 있다. [부주]林: 이것이 나라를 토벌하고서 탈취奪取한 시초이다.
무신일에 나라 주우州吁가 그 임금 시해弑害하였다.注+신하가 임금을 시해弑害했다고 칭한 것은 신하의 죄를 드러낸 것이다. 그 선공宣公 4년에 보인다. 무신일은 3월 17일이다. 날짜만 기록하고 달은 기록하지 않았다.
여름에 은공이 송상공宋殤公에서 만났다.注+는 갑자기 만나는 것이다. 두 나라가 각기 그 예절禮節을 간소히 하여 도로道路에서 우연히 서로 만난 것처럼 한 것이다. 위읍衛邑이다. 제북濟北동아현東阿縣청정淸亭이 있다. [부주]林: 이것이 외국外國특상우特相遇한 시초이다.
송공宋公진후陳侯채인蔡人위인衛人이 함께 정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부주]林: 이것이 제후諸侯연합聯合하여 한 나라를 토벌한 시초이고, 또 동방東方제후諸侯들이 편을 가른 시초이기도 하다. 이때 이 한편이고, 가 한편이었다. 동방의 제후들이 편을 가르자 천하에 비로소 사고事故가 많아졌다.
가을에 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송공宋公진후陳侯채인蔡人위인衛人연합聯合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공자公子나라 대부大夫이다. 공자公子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그가 굳이 청하여 불의不義의 일로 임금에게 강요한 것을 미워해서이다. 모든 외국의 대부大夫폄하貶下하는 경우에는 모두 이라고 칭하고, 내국內國대부大夫폄하貶下하는 경우에는 모두 을 버리고 이름을 칭한다. 기사記事체제體制타국他國의 대부는 모인某人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기 나라의 경좌卿佐노인魯人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 점이 기록이 다른 이유이다. 을 버리고 이라고 기록한 것에 대해 장공莊公 3년 에 “미워서 그런 것이다.”고 하고, 숙손표叔孫豹에 대해서는 양공襄公 27년 에 “을 어겼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이다. [부주]林: 이것이 대부大夫가 제멋대로 군사를 거느린 시초이다. 이때 병권兵權을 잡아 점차 세력을 키워 임금을 시해하는 데 이르렀다.
9월에 위인衛人주우州吁에서 죽였다.注+주우州吁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서 즉위하였으나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 그 성공成公 16년에 보인다. 나라 땅에 있는 수명水名이다.[부주]林: 여기에서 주우州吁공자公子라고 칭하지 않고 석작石碏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역적逆賊을 토벌한 의리가 드러났다.
겨울 12월에 위인衛人을 임금으로 세웠다.注+위인衛人공자公子을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가 대중大衆의 마음을 얻은 것을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에 로 들어갔다고 기록하지 않아, 성공成公 18년에 보인다. [부주]林: 환공桓公의 아우 선공宣公이 즉위하였다.
4년 봄에 나라 주우가 환공을 시해하고서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은공이 송상공宋殤公과 회합하여 宿에서의 결맹結盟중수重修하려 했었는데, 기일이 되기 전에 위인衛人이 와서 반란叛亂이 일어났음을 고하였다.
여름에 공이 송공宋公에서 만났다.注+宿에서의 결맹은 은공隱公원년元年에 있었다. [부주]林: 나라의 난리로 인하여 그 예절禮節간소簡素히 하여 서로 만난 것이다.
송상공宋殤公이 즉위함에 미쳐 공자公子나라로 도망가니, 정인鄭人이 그를 도와 귀국歸國시켜 임금이 되게 하려 하였다.
주우州吁가 위나라의 임금이 된 뒤에, 정나라에 대한 선군先君의 원한을 보복하고서注+은공隱公 2년에 정인鄭人나라를 친 원한을 이른다. 제후들에게 총애寵愛를 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다.注+임금의 자리를 찬탈簒奪해 임금이 된 자에 대해 제후諸侯가 이미 그와 회맹會盟하였으면 다시 토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애寵愛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송나라에 고하기를 “께서 만약 정나라를 쳐서 임금님의 걱정거리注+(걱정거리)는 공자公子을 이름이다.를 제거하신다면 맹주盟主로 모시고서 폐읍蔽邑이 군대를 일으켜 나라‧나라와 함께 종군從軍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위나라의 소원所願입니다.注+온 나라의 부조賦調를 말한다.[부주]林: 폐읍蔽邑나라가 스스로 자기 나라를 이른다. 나라의 부조賦調를 거느리고서 의 군사와 함께 나라를 따라 출전出戰하겠다는 말이다.”라고 하니, 송인宋人이 허락하였다.
이때에 나라와 나라가 바야흐로 나라와 화목和睦하였기 때문에注+는 지금의 여남汝南상채현上蔡縣이다.송공宋公진후陳侯채인蔡人위인衛人나라를 쳐서 그 동문東門포위包圍하였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은공隱公중중衆仲에게 “나라 주우州吁성공成功하겠는가?”라고 물으니,注+중중衆仲노대부魯大夫이다. 대답하기를 “신은 으로써 백성을 화합和合시킨다는 말은 들었으나 으로써 백성을 화합시킨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注+병력兵力을 믿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여기는 것을 이른다.
으로써 백성을 화합시키는 것은 실을 정리整理하려다가 엉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注+실이 엉키면 더욱 어지러워진다.[부주]林: 실을 정리하는 방법은 엉킨 곳을 느슨하게 만들어 천천히 푸는 것이 제일이다. 과 같다. 만약 엉키게 하면 더욱 어지러워져서 정리하기 어렵다. 백성을 화합시키는 방법도 이와 같다.
주우는 병력兵力을 믿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하니,注+[부주]林: 는 믿음이니, 군대의 위력威力을 믿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한다는 말이다. 병력을 믿으면 대중大衆을 잃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하면 친근한 사람을 잃게 됩니다.
대중이 배반背叛하고 친근한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注+병력을 믿으면 백성이 쇠잔衰殘하고 백성이 쇠잔하면 대중이 배반하며, 잔인한 짓을 편안히 하면 형벌刑罰이 지나치고 형벌이 지나치면 친근한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
병력은 불과 같아서 억제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注+[부주]林: 만약 억제하지 않으면 장차 스스로 자기의 몸을 태우게 된다는 말이다.
주우는 그 임금을 시해하고 그 백성을 포학暴虐하게 부리면서注+[부주]林: 그 백성을 사용하여 전쟁하는 것이다. : 또 형벌과 위력威力으로 포학暴虐하게 그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영덕令德을 힘쓰지 않고 도리어 으로써 성공하고자 하니, 반드시 화난禍難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注+[부주]林: 이다. 만이 백성을 화합시킬 수 있는데 주우는 덕을 힘쓰지 않고, 으로는 백성을 화합시킬 수 없는데 주우는 을 일으켜 성사成事하기를 도모하였으니, 반드시 토벌討伐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가을에 제후가 다시 나라를 토벌討伐할 때 송상공宋殤公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출병出兵해주기를 요청하니注+걸사乞師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사신이 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은공隱公이 사절하였다.注+중중衆仲의 말을 따른 것이다.
그러자 우보羽父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제후의 군대와 연합聯合하기를 청하니注+우보羽甫공자公子이다. 은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보는 굳이 청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갔다.
그러므로 에 “가 군대를 거느렸다.”고 기록했으니, 이는 그를 미워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제후의 군대가 나라 보병步兵패퇴敗退시키고서 정나라의 벼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注+이때 나라는 차전車戰을 하지 않았다.
주우가 그 백성을 화합시키지 못하니, 석후石厚석자石子에게 군위君位를 안정시킬 방법에 대해 물었다.注+석자石子석착石錯이다. 주우의 군위君位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 아비에게 안정시킬 방법을 자문諮問한 것이다.
석자石子가 “천왕天王조근朝覲하여 제후諸侯로 인증을 받는다면 군위君位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注+[부주]林: 만약 천자께 조근朝覲하여 천자의 총명寵命을 받는다면 군위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고 하니, 석후가 “어떻게 해야 천왕天王조근朝覲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석자가 말하기를 “진환공陳桓公이 바야흐로 천왕天王총애寵愛를 받고 있고,注+[부주]林: 이때 진환공陳桓公이 생존하였으니 시호諡號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시호를 쓴 것은 좌씨左氏추후追後에 기록했기 때문이다.나라와 나라는 바야흐로 화목하니, 만약 주우가 진환공에게 조현朝見하여 을 시켜 대신 천왕天王에게 요청하게 한다면 반드시 천왕을 조현朝見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석후는 주우를 수종隨從하여 진나라로 갔다.注+[부주]林: 는 가는 것이다.
그러자 석작이 진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하기를 “우리 나라는 지역이 협소하고 나는 이미 늙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실로 우리 임금을 시해한 자들이니, 저들이 에 가는 즉시 주살誅殺하기를 감히 청합니다.”라고 하였다.注+80세를 라 한다. 나라는 작고 나는 늙었다고 칭한 것은 스스로 겸양謙讓하여 나라에 맡겨 그들이 간 기회를 이용하여 주살誅殺하게 한 것이다.
진인陳人이 그들을 체포逮捕하고서 위나라에게 사람을 보내어 처리하기를 청하니,注+위인衛人이 직접 와서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것이다. 9월에 위인衛人우재右宰를 보내어 에서 주우를 죽이고,注+[부주]林: 우재右宰관명官名이고, 나라의 신하이다. 석작이 자기의 누양견獳羊肩을 보내어 석후를 에서 죽였다.注+[부주]朱: 가신家臣이다. 누양견獳羊肩성명姓名이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석작은 충순忠純한 신하이다.
주우를 미워하여 석후石厚까지 죽였으니,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注+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따르는 아들도 역적이니 나라의 대역大逆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고 말하여, 소의小義라면 아들을 자애慈愛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부주]林: 군신君臣대의大義를 지켜 부자父子사친私親을 끊은 것이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고어古語부합符合한다는 말이다.
위인衛人에서 공자公子을 맞이하였다.
겨울 12월에 선공宣公이 즉위하였다.注+공자公子이다.
에 “위인衛人을 세웠다.”고 기록한 것은 선공을 세운 것이 대중의 뜻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文套를……나타내었다 : 成公 18년 傳에 “대체로 [凡] 나라를 떠나 있었으나 國人이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우는 것을 ‘入’이라고 하고, 임금으로 있던 자가 들어와서 君位를 회복하는 것을 ‘復歸’라 하고, 諸侯가 도와 歸國시켜 임금이 되게 하는 것을 ‘歸’라 하고, 무력으로 밀고 들어와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것을 ‘復入’이라 한다.”고 하였다. 莊公 9년 經에 “齊小白入于齊”라고 기록한 例와 같이 ‘晉入于衛’라고 기록하는 것이 마땅한데, 문투를 변경하여 ‘衛人立晉’이라고 기록한 것은 孔子께서 그가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것을 높이 평가하여 常例를 고쳐 기록해서 뜻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역주2 : 報復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3 賦調 : 租稅인데, 여기서는 군대의 뜻으로 쓰였다. 《論語》 〈公冶長〉 可使治其賦也章集注에 “賦는 兵이니, 옛날에는 田賦를 계산해 兵士를 差出했기 때문에 兵을 賦라 한다.”고 하였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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