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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3)

춘추좌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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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八年春 晉侯使韓穿來言汶陽之田歸之于齊注+齊服事晉 故晉來語魯 使還二年所取田 하다
[經]晉欒書帥師侵蔡하다
[經]公孫嬰齊如莒하다
[經]宋公使華元來聘하다
[經]夏 宋公使公孫壽來納幣注+昏聘不使卿 今華元將命 故特書之 宋公無主昏者 自命之 故稱使也 公孫壽 蕩意諸之父하다
[經]晉殺其大夫趙同趙括注+傳曰 原屛 咎之徒也 明本不以德義自居 宜其見討 故從告辭而稱名 하다
[經]秋七月 天子使召伯來賜公命注+ 八年乃來 緩也 天子天王 王者之通稱 하다
[經]冬十月癸卯 杞叔姬卒注+前五年來歸者 女旣適人 雖見出棄 猶以成人禮書之 終爲杞伯所葬 故稱杞叔姬 하다
[經]晉侯使士燮來聘하다
[經]注+先謀而稱會 盟主之命 不同之於列國 하다
[經]衛人來媵注+古者諸侯取適夫人及左右媵 廣繼嗣也 魯將嫁伯姬於宋 故衛來媵之 하다
[傳]八年春 晉侯使韓穿來言汶陽之田歸之于齊하다
季文子餞之注+餞 送行飮酒 할새 私焉注+私與之言 曰 大國制義라야 以爲盟主
是以諸侯懷德畏討하야 無有貳心이라
謂汶陽之田 敝邑之舊也라하야 而用師於齊하야 使歸諸敝邑注+用師 鞍之戰 이러니 今有二命曰 歸諸齊
小國所望而懷也어늘 信不可知하고 義無所立注+[附注] 林曰 或與或奪而信不可知 奪魯與齊而義無所立 이면 四方諸侯 其誰不解體注+言不復肅敬於晉 리오
詩曰 女也不爽이어늘 士貳其行이로다
士也罔極하야 二三其德注+爽 差也 極 中也 詩 衛風 婦人怨丈夫不一其行 喩魯事晉 猶女之 不敢過差 而晉有罔極之心 反二三其德 이라하야늘 七年之中 一與一奪하니 二三孰甚焉
士之二三 猶喪妃耦 而況霸主
霸主將德是以注+以 用也 어늘 而二三之 其何以長有諸侯乎
詩曰 猶之未遠이라
是用大簡注+猶 圖也 簡 諫也 詩 大雅 言王者圖事不遠 故用大道諫之 이라하니 行父懼晉之不遠猶而失諸侯也
是以敢私言之하로라
[傳]晉欒書侵蔡注+六年未得志故 하고 遂侵楚하야 獲申驪注+申驪 楚大夫 하다
楚師之還也注+謂六年遇於繞角時 晉侵沈하야 하니 從知范韓也注+繞角之役 欒書從知莊子范文子韓獻子之言 不與楚戰 自是常從其謀 師出有功 故傳善之 沈國 今汝南平與縣 [附注] 林曰 沈屬楚小國 沈子名揖
君子曰 從善如流하니 宜哉注+宜有功也 如流 喩速 ᄂ저
詩曰 愷悌君子 作人注+遐 遠也 作 用也 詩 大雅 言文王能遠用善人 不 語助 이리오하니 求善也注+[附注] 林曰 求善人而用之也 ᄂ저
作人이면 斯有功績矣
是行也 鄭伯將會晉師注+會伐蔡之師 라가 門于許東門하야 大獲焉注+過許 見其無備 因攻之 하다
[傳]聲伯如莒하니 逆也注+自爲逆婦而書者 因聘而逆
[傳]宋華元來聘하니 注+穆姜之女 成公姊妹 爲宋共公夫人 聘不應使卿 故傳發其事而已
[傳]夏 宋公使公孫壽來하니 禮也注+納幣應使卿
[傳]晉趙莊姬爲趙嬰之亡故 譖之于晉侯注+趙嬰亡在五年 曰 原屛將爲亂이라하니 欒郤爲徵注+欒氏郤氏 亦徵其爲亂 하다
六月 晉討趙同趙括注+[附注] 林曰 卽原同屛括 하다
武從姬氏畜于公宮注+趙武 莊姬之子 莊姬 晉成公女 畜 養也 하다
以其田與祁奚注+[附注] 林曰 以趙氏之田邑 與晉大夫祁奚 하니 韓厥言於晉侯曰 成季之勳 宣孟之忠注+成季 趙衰 宣孟 趙盾 [附注] 林曰 趙衰有從晉文公出亡之勳 趙盾有相晉擁立靈成之忠으로 而無後 爲善者 其懼矣리이다
三代之令王 皆數百年保天之祿하니 夫豈無辟王이리오 賴前哲以免也注+言三代亦有邪辟之君 但賴其先人以免禍耳 니이다
周書曰 不敢侮鰥寡라하니 所以明德也注+周書 康誥 言文王不侮鰥寡 而德益明 欲晉侯之法文王 니이다 乃立武하고 而反其田焉하다
[傳]秋 召桓公來賜公命注+召桓公 周卿士 하다
[傳]晉侯使申公巫臣如吳할새 假道于莒하다
與渠丘公立於池上注+渠丘公 莒子朱也 池 城池也 渠丘 邑名 莒縣有蘧里 曰 城已惡注+[附注] 林曰 言莒之城壁已壞 이니이다 莒子曰 辟陋在夷하니 其孰以我爲虞注+虞 度也 [附注] 林曰 其孰虞度思竝我國 리오
對曰 夫狡焉注+狡猾之人思啓封疆以利社稷者 何國蔑有릿가
唯然이라 故多大國矣注+[附注] 朱曰 唯其如此 所以互相呑倂 而大國日多也 이니이다
唯或思或縱也注+世有思開封疆者 有縱其暴掠者 莒人當唯此爲니이다
勇夫重閉 況國乎注+爲明年莒潰傳 [附注] 朱曰 假使匹夫之勇 猶且重閉門關以自固 況有國家者而可恃陋而不備乎 잇가
[傳]冬 하다
來歸自杞 故書注+愍其見出來歸 故書卒也 若更適大夫 則不復書卒
[傳]晉士燮來聘하야 言伐郯也注+[附注] 林曰 召魯會師伐郯하니 以其事吳故注+七年郯與吳成
公賂之하야 請緩師注+[附注] 林曰 請緩伐郯之師期 하니 文子不可注+文子 士燮 曰 君命無貳注+[附注] 朱曰 言奉君命者 不受他人之命 이니 失信不立注+[附注] 林曰 失信於君 則無以自立 이니이다
禮無加貨注+[附注] 林曰 朝聘有贈賄之禮 無有加貨 況受賂乎 事無二成注+公私不兩成 이니 君後諸侯注+[附注] 是寡君不得事君也注+欲與魯絶 리이다
燮將復之注+[附注] 林曰 將以魯請緩師 復命於晉君 하리이다 季孫懼하야 使宣伯帥師會伐郯하다
[傳]衛人來媵共姬하니 禮也
凡諸侯嫁女 同姓媵之어니와 異姓則否注+必以同姓者 參骨肉至親 所以息陰訟


8년 봄에 진후晉侯한천韓穿을 보내 와서 문양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였다.注+나라가 나라에 복종服從해 섬겼기 때문에 나라의 사자使者가 와서 나라에 말하여, 성공成公 2년에 문양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게 한 것이다.
나라 난서欒書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공손公孫영제嬰齊나라에 갔다.
송공宋公화원華元을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여름에 송공宋公공손公孫를 보내 와서 납폐納幣하였다.注+혼빙昏聘(婚娶)에는 사자使者로 보내지 않는 것인데, 지금 화원華元송공宋公을 받들고[將命] 왔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송공宋公주혼자主婚者가 없이 직접 하였기 때문에 ‘使’라고 칭한 것이다. 공손公孫탕의제蕩意諸의 아버지이다.
나라가 그 대부大夫조동趙同조괄趙括을 죽였다.注+선공宣公 12년 원동原同병괄屛括구지도咎之徒(禍를 당할 선곡先縠과 같은 무리)라고 하여, 그들이 본래 덕의德義자처自處하지 않았으니 징벌懲罰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고사告辭에 따라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가을 7월에 천자天子소백召伯을 보내 와서 성공成公에게 작명爵名하사下賜하였다.注+제후諸侯즉위卽位하면 천자天子명규命圭를 주어 합서合瑞하게 하는 것인데, 즉위卽位한 지 8년이 되어서야 와서 주었으니, 늦었다. 천자天子천왕天王왕자王者통칭通稱이다.
겨울 10월 계묘일癸卯日기숙희杞叔姬하였다.注+지난 5년에 돌아온 자이다. 공실公室의 딸이 이미 출가出嫁하였으면 비록 버림을 받아 쫓겨 왔어도 오히려 성인成人로 기록한다. 결국結局에는 기백杞伯장사葬事를 지냈기 때문에 ‘기숙희杞叔姬‘라고 칭한 것이다.
진후晉侯사섭士燮을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숙손교여叔孫僑如나라 사섭士燮, 제인齊人, 주인邾人회합會合하여 담국郯國토벌討伐하였다.注+먼저 모의謀議하였는데 ‘’로 기록한 것은, 맹주盟主이라서 열국列國동등同等하게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인衛人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잉녀媵女로 주었다.注+옛날에 제후諸侯적부인適夫人좌우잉左右媵할 때 각각 질제姪娣를 데리고 갔는데, 모두 동성국同姓國여인女人으로 나라마다 세 명씩 갔으니 모두 아홉 명이다. 그 이유는 계사繼嗣를 넓히기 위함이다. 나라가 백희伯姬나라에 시집보내기로 하였기 때문에 나라 여인女人이 와서 이 된 것이다.
8년 봄에 진후晉侯한천韓穿을 보내 와서 문양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였다.
계문자季文子한천韓穿전송餞送할 때注+은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며 술을 먹이는 것이다. 사사로이注+사사로이 그와 말한 것이다. 말하기를, “대국大國처사處事도의道義에 맞아야 맹주盟主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후諸侯들이 사모思慕하고 징벌懲罰을 두려워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귀국貴國문양汶陽의 땅이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領土라 하여 나라에 병력兵力사용使用나라로 하여금 우리에게 돌려주게 하더니,注+용사用師전쟁戰爭을 이른다. 이제 다시 ‘나라에 돌려주라.’는 다른 명령命令을 내리셨습니다.
대국大國으로써 도의道義실행實行하고, 도의道義로써 명령命令완성完成하기를 소국小國이 바라고 생각하는 바인데, 대국大國을 알지 못하고 수립樹立하지 않는다면注+[부주]林: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하여 신의信義를 모르고, 나라에서 빼앗아 나라에 주어 수립樹立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 사방의 제후諸侯가 누군들 마음이 떠나지 않겠습니까?注+제후諸侯들이 다시는 나라를 공경恭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경詩經》에 ‘여자는 잘못이 없는데 사내는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하네.
사내는 준칙準則[極]이 없어 그 행동[德]을 이랬다저랬다 하네.’注+은 허물이고, 중정中正이다. 는 《시경詩經》 〈위풍衛風맹편氓篇〉이다. 부인婦人이 남편의 행위行爲가 한결같지 않은 것을 원망怨望인데, 나라가 나라를 섬김에 여자女子가 남편을 섬기듯이 감히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나라는 부정不正[罔極]한 마음을 가지고서 도리어 그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7년 안에 한번 주었다가 한번 빼앗으니, 이랬다저랬다 함이 이보다 심함이 어디 있습니까?
사내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오히려 아내를 잃게 되는데, 하물며 패주霸主이겠습니까?
패주霸主해야 하는데,注+사용使用하는 것이다.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어찌 길이 제후諸侯추대推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詩經》에 ‘계모計謀원대遠大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크게 한다.’注+도모圖謀이고, 함이다. 는 《시경詩經》 〈대아大雅판편板篇〉이다. 왕자王者가 일을 도모圖謀하는 것이 원대遠大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도大道로써 한다는 말이다. 고 하였으니, 나는 나라의 계모計謀원대遠大하지 못하여 제후諸侯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사사로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라 난서欒書나라를 침공侵攻하고,注+성공成公 6년에 나라가 나라를 침공侵攻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친 것이다. 드디어 나라를 침공侵攻하여 신려申驪를 사로잡았다.注+신려申驪나라 대부大夫이다.
초군楚軍이 돌아갈 때注+성공成公 6년에 진군晉軍초군楚軍요각繞角에서 만났을 때를 이른다. 진군晉軍심국沈國침공侵攻하여 심자沈子읍초揖初를 사로잡았으니, 이는 지장자知莊子, 범문자范文子, 한헌자韓獻子계략計略을 따랐기 때문이다.注+요각繞角전쟁戰爭난서欒書지장자知莊子, 범문자范文子, 한헌자韓獻子의 말을 따라 나라와 전쟁戰爭하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난서欒書는 항상 세 사람의 계모計謀를 따라 출병出兵할 때마다 전공戰功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문傳文에 이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심국沈國은 지금의 여남汝南평여현平與縣이다. [부주]林: 나라에 한 작은 나라이고, 심자沈子의 이름이 이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논평論評하기를, “선언善言을 받아들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으니, 공적功績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注+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물 흐르듯이 한다는 것은 빠름을 비유比喩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개제愷悌(성품이 온화하고 태도가 겸손함)한 군자君子여, 어찌 인재人才등용登用하지 않겠는가?’注+이고, 이다. 는 《시경詩經》 〈대아大雅한록편旱麓篇〉이다. 이는 문왕文王이 멀리에 있는 선인善人등용登用한 것을 말한 것이다. 어조사語助辭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인善人하여 등용登用한 것을 말한 것이다.注+[부주]林: 선인善人을 구해 등용登用했다는 말이다.
사람을 등용登用하면 공적功績을 이루는 것이다.”고 하였다.
나라의 이번 출병出兵정백鄭伯진군晉軍회합會合하기 위해 가다가注+나라를 토벌討伐하는 진군晉軍회합會合하는 것이다. 나라의 동문東門공격攻擊하여 부로俘虜를 많이 잡았다.注+나라를 지나다가 방비防備가 없는 것을 보고서 그 기회期會이용利用공격攻擊한 것이다.
성백聲伯나라에 갔으니, 이는 자기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注+자기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간 것인데도 에 이를 기록한 것은 빙문聘問하는 사신使臣으로 간 기회期會를 이용해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화원華元이 와서 빙문聘問하였으니, 이는 공희共姬송공宋公부인夫人으로 맞이하기 위함이었다.注+공희共姬목강穆姜의 딸이고 성공成公자매姊妹송공공宋共公부인夫人이 되었다. 혼취婚娶[聘]에는 사자使者로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 그 일을 말한 것이다.
여름에 송공宋公공손公孫를 보내 와서 납폐納幣하였으니, 이다.注+납폐納幣에는 사자使者로 보낸다.
나라 조장희趙莊姬조영趙嬰망명亡命한 일로 조동趙同조괄趙括진후晉侯에게 참소讒訴하기를,注+조영趙嬰망명亡命성공成公 5년에 있었다.원동原同병괄屛括반란叛亂을 일으키려 합니다.”고 하니, 난씨欒氏극씨郤氏가 이를 입증立證하였다.注+난씨欒氏극씨郤氏도 그들이 반란叛亂을 일으킬 것이라고 증언證言한 것이다.
6월에 나라가 조동趙同조괄趙括주살誅殺하였다.注+[부주]林: 바로 원동原同병괄屛括이다.
조무趙武희씨姬氏(莊姬)를 따라가서 진후晉侯궁중宮中에서 양육養育되었기 때문에 하였다.注+조무趙武장희莊姬의 아들이다. 장희莊姬진성공晉成公의 딸이다. 양육養育하는 것이다.
진후晉侯조씨趙氏토지土地기해祁奚에게 주자,注+[부주]林: 조씨趙氏전읍田邑나라 대부大夫기해祁奚에게 준 것이다. 한궐韓厥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성계成季(趙衰)의 공훈功勳선맹宣孟(趙盾)의 충성으로注+성계成季조쇠趙衰이고 선맹宣孟조돈趙盾이다. [부주]林: 조쇠趙衰진문공晉文公출망出亡(亡命)했을 때 시종侍從공훈功勳이 있고, 조돈趙盾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어 영공靈公성공成公옹립擁立충성忠誠이 있다. 후사後嗣가 없다면 을 행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삼대三代의 어진 임금들이 모두 수백 년 동안 하늘의 복록福祿보지保持하였으니, 그 중에 어찌 사벽邪辟군왕君王이 없었겠습니까만 현성賢聖선왕先王[前哲]의 을 힘입어 한 것입니다.注+삼대三代 때에도 사벽邪辟군왕君王이 있었지만 그 선인先人공덕功德에 힘입어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주서周書〉에 ‘감히 환과鰥寡를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양宣揚[明]하기 위함이었습니다.”注+주서周書는 〈강고康誥〉이다. 문왕文王환과鰥寡를 업신여기지 않아서 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을 말하여, 진후晉侯로 하여금 문왕文王을 본받게 하고자 한 것이다. 고 하니, 곧 조무趙武조씨趙氏후사後嗣로 세우고서 조씨趙氏토지土地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가을에 소환공召桓公이 와서 성공成公에게 작명爵名하사下賜하였다.注+소환공召桓公나라 경사卿士이다.
진후晉侯신공申公무신巫臣나라에 사자使者로 보내며 나라에 길을 빌리게 하였다.
무신巫臣거구공渠丘公과 함께 성지城池 위에 서서注+거구공渠丘公거자莒子이다. 성지城池이다. 거구渠丘읍명邑名이다 거현莒縣거리蘧里가 있다. 말하기를, “귀국貴國이 너무 파괴破壞되었습니다.”注+[부주]林: 나라의 성벽城壁이 너무 파괴破壞되었다는 말이다. 고 하니, 거자莒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멀리 변방邊方에 있는 작은 나라[辟陋]로 만이지방蠻夷地方에 있으니, 그 누가 우리나라를 넘볼 생각을 하겠는가?”注+는 헤아리는 것이다. [부주]林: 그 누가 우리나라를 겸병兼倂하려고 생각하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무신巫臣이 대답하기를, “교활狡猾하여注+교활狡猾한 사람이다. 영토領土개척開拓해 저의 나라를 이롭게 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어느 나라엔들 없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큰 나라가 많이 생긴 것입니다.注+[부주]朱: 오직 이와 같으므로 서로 병탄倂呑하여 대국大國이 날로 많아졌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작은 나라를 침공侵攻국토國土를 넓히기를 생각하는 자도 있고, 대국大國강탈强奪(暴掠)을 방임放任하는 자도 있습니다.注+세상에는 봉강封疆(領土)을 개척開拓하기를 생각하는 자도 있고, 대국의 폭략暴掠(强奪)을 방임放任하는 자도 있으니, 거인莒人은 오직 이것을 경계警戒[命]해야 한다는 말이다.
용감勇敢한 사내도 잠을 잘 때 내외內外을 겹겹이 닫는데, 하물며 나라이겠습니까?”注+명년明年거인莒人궤산潰散배경背景이다. [부주]朱: 가령 필부匹夫용맹勇猛으로도 오히려 문관門關을 겹으로 닫아 자신을 공고鞏固히 지키는데, 하물며 국가國家를 가진 자가 먼 변방邊方에 있는 작은 나라(辟陋)임을 믿고 방비防備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겨울에 기숙희杞叔姬하였다.
버림을 받고 나라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에 기록한 것이다.注+그가 축출逐出되어 돌아온 것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에 그의 을 기록한 것이다. 만약 다시 대부大夫에게 재가再嫁하였다면 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 사섭士燮이 와서 빙문聘問하고서 담국郯國토벌討伐출병出兵할 것을 말하였으니,注+[부주]林: 노군魯君을 불러 군대와 연합하여 담국郯國을 치려 한 것이다. 이는 담국郯國나라를 섬기기 때문이었다.注+성공成公 7년에 담국郯國나라와 화친和親하였다.
성공成公사섭士燮에게 재물財物을 주고서 노군魯軍출병出兵을 늦추기를 하니,注+[부주]林: 담국郯國토벌討伐하는 군대의 출병시기出兵時期를 늦추기를 한 것이다. 문자文子가 안 된다고 하며注+문자文子사섭士燮이다.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命令봉행奉行하는 자는 두 말이 있을 수 없으니,注+[부주]朱: 군명君命봉행奉行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임금에게 신의信義을 잃으면 스스로 존립存立할 수가 없습니다.注+[부주]林: 임금에게 신의信義을 잃으면 스스로 존립存立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빙문聘問에는 규정規定예물禮物 이외에 재화財貨를 더 주는 가 없고,注+[부주]林: 조빙朝聘에는 증회贈賄가 있으나 재화財貨를 더 주는 는 없는데, 하물며 뇌물賂物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일에는 두 가지 일을 함께 이룰 수 없는 것이니,注+공사公私의 일을 둘 다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魯君을 이름)께서 다른 제후諸侯보다 늦게 출병出兵하신다면注+[부주]林: ‘노군魯君이 만약 제후諸侯들의 출병시기出兵時期보다 뒤에 출병出兵한다면’이라는 말이다. 우리 임금께서는 을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注+나라와 국교國交단절斷絶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나는 장차 이를 우리 임금께 복명復命하겠습니다.”注+[부주]林: 사섭士燮나라가 출병시기出兵時期를 늦추기를 한 것을 진군晉君에게 복명復命하겠다고 한 것이다. 고 하니, 계손季孫은 겁이 나서 선백宣伯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군晉軍회합會合하여 담국郯國토벌討伐하게 하였다.
위인衛人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공희共姬잉녀媵女로 주었으니, 에 맞는 일이었다.
제후諸侯가 딸을 시집보낼 경우, 동성국同姓國은 딸을 잉녀媵女로 보내지만 이성국異姓國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注+반드시 동성同姓여인女人잉녀媵女로 삼는 것은 골육骨肉을 나눈 지친至親이므로 암투暗鬪를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역주
역주1 諸侯卽位……與之合瑞 : 賜公命은 莊公元年經의 역주]와 僖公 11년 傳의 역주]와, 文公元年經의 역주]를 參考할 것. 命圭는 諸侯를 처음 封할 때 天子가 信標로 하사하는 玉이다. 公에게는 桓圭, 侯에게는 信圭, 伯에게는 躬圭, 子에게는 穀璧, 男에게는 蒲璧을 하사하고, 이 命圭의 머리에 씌우는 冒玉은 天子가 保管한다. 合瑞는 諸侯가 天子께 朝見할 때 이 命圭를 天子께 바치면 天子는 冒玉을 맞추어 보고 그 眞僞를 證驗하는 것이다.
역주2 叔孫僑如會晉士燮齊人邾人伐郯 : 謀議에 참여하였으면 ‘及’으로 기록해야 한다. 이번에 郯國을 討伐한 일은 士燮이 來聘해서 이미 魯나라와 協議한 것인데도, ‘及’으로 기록하지 않고 ‘會’로 기록한 것에 대해 杜氏는 盟主의 命令이므로 一般諸侯의 경우와 同一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左氏會箋》에는 “세 나라 이상이 會合한 것에 ‘及’으로 기록한 곳이 없고, 또 僖公 이후로는 ‘及’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 戰爭은 季孫이 두려워 宣伯을 보내어 晉軍과 會合하여 郯國을 치게 한 것이니, ‘與謀’라 할 수 있겠는가? 杜氏가 考證을 잘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3 各有姪娣……凡九女 : 옛날에 諸侯는 한 번에 아홉 女人을 아내로 맞았다. 諸侯가 한 나라의 딸을 아내로 娶할 경우, 두 나라의 딸이 와서 媵이 되는데, 適夫人으로 가는 女人과 媵으로 가는 두 女人이 각각 조카 하나와 동생 하나씩을 데리고 간다. 媵으로 가는 女人은 모두 먼저 適夫人이 될 女子의 집으로 와서 함께 夫家로 간다.
역주4 而[以] : 저본에는 ‘而’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以’로 바로잡았다.
역주5 信以行義 義以成命 : 信義를 지킴으로써 處事가 道義에 맞고, 處事가 道義에 맞음으로써 命令을 完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6 〈事夫〉 : 저본에는 ‘事夫’가 없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 獲沈子揖初 : 杜注에는 ‘初’를 ‘自是’로 解釋하여 ‘沈子揖’에서 句를 떼고, ‘初’字를 下句에 붙여 읽었으니, 文義가 통하지 않는다. 〈楊注〉 揖初는 沈子의 이름인데, 杜氏는 ‘初’字를 下句에 붙여 읽었으니, 文義로 보나 條理로 보나 모두 잘못이다. 《左氏會箋》 譯者도 이 두 사람의 說을 取하여 揖初로 飜譯하였다.
역주8 遐不 : 《詩集傳》의 朱註를 取하여 何不로 飜譯하였다.
역주9 聘共姬也 : 來聘의 聘과 聘共姬의 聘은 그 뜻이 다르다. 來聘의 聘은 聘問을 이르고, 聘共姬의 聘은 禮를 갖추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10 納幣 : 男子家에서 女子家로 보내는 禮物이다. 莊公 22년 經 역주] 參考할 것.
역주11 : 杜注의 ‘命’字가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의 林注에는 ‘戒’字로 되어 있다.
역주12 杞叔姬卒 : 叔姬가 杞나라에서 쫓겨나 魯나라로 돌아왔으나 結局에는 杞나라가 그 喪柩를 맞이해 가서 杞夫人의 禮로 葬事 지냈기 때문에 ‘杞叔姬’로 기록한 것이다.
역주13 林曰 魯君若後諸侯之期 : 이 林注는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보이지 않는다.

춘추좌씨전(3)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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