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三月戊戌
에 齊侯陽生卒
注+以疾赴 故不書弑 하다
[經]衛公孟彄自齊歸于衛
注+無傳 書歸 齊納之하다
[經]吳救陳
注+季子不書 陳人來告 不以名 [附注] 林曰 此延州來季子也 不書 誼不在季子也 吳救陳 諸夏幾於亡也하다
傳
[傳]公會吳子邾子郯子伐齊南鄙
하고 師于鄎
注+鄎 齊地 邾郯不書 兵幷屬吳 不列於諸侯하다
傳
[傳]齊人弑悼公
하고 赴于師
注+以說吳 하니 吳子三日哭于軍門之外
注+[附注] 林曰 擧哀于軍門之外하다
徐承帥舟師將自海入齊
러니 齊人敗之
하니 吳師乃還
注+承 吳大夫하다
傳
[傳]夏
에 趙鞅帥師伐齊
注+經書侵 以侵告에 大夫請卜之
注+[附注] 林曰 晉大夫請卜其吉凶한대 趙孟曰 吾卜於此起兵
注+謂往歲卜伐宋不吉 利以伐姜 故今興兵하니 注+再令 瀆也이오
卜不襲吉
注+襲 重也이니 行也
리라 於是乎取犂及轅
注+犂 一名隰 濟南有隰陰縣 祝阿縣西有轅城하고 毁高唐之郭
하고 侵及賴而還
하다
傳
[傳]秋
에 吳子使來復儆師
注+伐齊未得志故 爲明年吳伐齊傳하다
傳
[傳]冬
에 楚子期伐陳
注+陳卽吳故 한대 吳延州來季子救陳
注+[附注] 林曰 延陵州來 皆季札邑 故曰延州來季子이러니 謂子期曰 二君不務德
注+二君 吳楚而力爭諸侯
하니 民何罪焉
고
我請退
하야 以爲子名
注+[附注] 林曰 以成子期伐陳之名하리니 務德而安民
하라하고 乃還
注+季子 吳王壽夢少子也 壽夢以襄十二年卒 至今七十七歲 壽夢卒 季子已能讓國 年當十五六 至今蓋九十餘하다
10년 봄 주왕周王 2월에 주자邾子익益이 노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애공哀公이
오군吳軍과
회합會合하여
제齊나라를 토벌하였다.
注+‘회會’라고 기록한 것은 ‘불여모不與謀’의 예例를 따른 것이다.
3월
무술일戊戌日에
제후齊侯양생陽生이
졸卒하였다.
注+질병疾病으로 졸卒하였다고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에 ‘시弑’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하夏에
송인宋人이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齊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5월에
애공哀公이
제齊나라 토벌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위衛나라
공맹구公孟彄가
제齊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갔다.
注+전傳이 없다. ‘귀歸’라고 기록한 것은 제齊나라가 그를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설백薛伯이夷가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이름을 기록하여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가을에
벽혜공薜惠公을 장사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겨울에 초楚나라 공자公子결結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陳나라를 토벌하였다.
오吳나라가
진陳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注+계자季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진인陳人이 와서 통고通告할 때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진陳나라를 구원한 것은 연주래延州來의 계자季子이다. 〈그런데도 계자季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이를 기록한〉 의의意義가 계자季子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吳나라가 진陳나라를 구원한 것은 제하諸夏가 거의 망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傳
10년 봄에 주은공邾隱公이 노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그는
제齊나라의
외생外甥(사위)이었기 때문에 드디어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注+끝내 자공子貢의 말과 같이 되었다.
傳
애공哀公이
오자吳子,
주자邾子,
담자郯子와
연합聯合하여
제齊나라 남쪽
변비邊鄙를 토벌하고서
식鄎에 주둔하였다.
注+식鄎은 제齊나라 땅이다. 주자邾子와 담자郯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군대가 오吳나라에 병합倂合되어 제후諸侯에 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傳
제인齊人이
도공悼公을
시해弑害하고서
연합군聯合軍에
부고赴告하니
注+〈도공悼公의 죽음으로써〉 오吳나라에 해명解明[說]하기 위해서이다.오자吳子가 3일 동안
군문軍門 밖에서
곡哭하였다.
注+[부주]林: 군문軍門 밖에서 큰 소리로 곡哭하여 애도哀悼[擧哀]한 것이다.
서승徐承이
주사舟師(水軍)를 거느리고
해상海上에서
제齊나라로 쳐들어가려 하였는데,
제인齊人이 이들을 패배시키니,
오군吳軍은 이에
환군還軍하였다.
注+서승徐承은 오吳나라 대부大夫이다.
傳
여름에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齊나라를 토벌하려 할 때
注+경經에 ‘침侵’으로 기록한 것은 ‘침侵’으로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대부大夫들이 점을 치기를 청하자
注+[부주]林: 진晉나라 대부大夫들이 그 길흉吉凶을 점치기를 청한 것이다. ,
조맹趙孟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제齊나라에 군대를 일으킬 것에 대해 점을 쳤으니
注+작년에 친 점에 송宋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불길不吉하고, 강성姜姓의 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이롭다고 하였기 때문에 지금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는 말이다. , 이 일로 재차 거북에게
명命하지 않을 것이오.
注+재차 〈거북에게〉 명命하는 것은 신神을 모독함이라는 말이다.
점은 거듭
길吉하지 않는 것이니
注+습襲은 중重(거듭)이다. 행사行師(出兵)할 것이오.”라고 하고서, 이에 〈
출병出兵하여〉
이犂와
원轅을
취取하고
注+이犂의 일명은 습隰이다. 제남濟南에 습음현隰陰縣이 있고, 축아현祝阿縣 서쪽에 원성轅城이 있다. 고당高唐의
외곽外郭을 헐고
뇌賴에까지
침입侵入하였다가
환군還軍하였다.
傳
가을에
오자吳子가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다시
출병出兵할 것을
고계告戒하였다.
注+제齊나라 토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명년明年에 오吳나라가 제齊나라를 친 전傳의 배경이다.
傳
겨울에
초楚나라
자기子期가
진陳나라를 토벌하자
注+진陳나라가 오吳나라에 붙었기 때문이다.,
오吳나라
연주래延州來의
계자季子가
진陳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가서
注+[부주]林: 연릉延陵과 주래州來는 모두 계찰季札의 식읍食邑이다. 그러므로 연주래延州來의 계자季子라고 한 것이다. ,
자기子期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 임금이
덕행德行은 힘쓰지 않고
注+이군二君은 오군吳君과 초군楚君이다. 무력武力으로
제후諸侯와 전쟁하기만을 힘쓰니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는
퇴군退軍하여 그대로 하여금 〈승리하였다는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얻게 할 것이니
注+[부주]林: 자기子期가 진陳나라를 토벌한 명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이다. ,
덕행德行을 힘써 백성들을 안정시키십시오.”라고 하고서 이에
환군還軍하였다.
注+계자季子는 오왕吳王수몽壽夢의 작은 아들이다. 수몽壽夢이 노양공魯襄公 12년이 졸卒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77년 전이다. 수몽壽夢이 졸卒하였을 때 계자季子가 나라를 사양한 것으로 보면 그의 나이가 15세나 16세는 되었을 것이니, 지금 그의 나이가 대개 90여 세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