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4)

춘추좌씨전(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七年春 郯子來朝하다
[經]夏四月注+稱牲 旣卜日也 卜郊 又非禮也 하다
[經]小邾子來朝하다
[經]城費注+南遺假事難而城之 하다
[經]秋 季孫宿如衛하다
[經]八月注+無傳 爲災故書 하다
[經]冬十月 衛侯使孫林父來聘하다
壬戌 及孫林父盟하다
[經]楚公子貞帥師圍陳하다
[經]十有二月 公會晉侯宋公陳侯衛侯曹伯莒子邾子于鄬注+謀救陳 陳侯逃歸 不成救 故不書救也 鄬 鄭地 하다
[經]鄭伯髡頑如會 未見諸侯하고 丙戌 卒于鄵注+實爲子駟所弑 以瘧疾赴 故不書弑 稱名爲書卒 同盟故也 如會 會於鄬也 未見諸侯 未至會所而死 鄵 鄭地 不欲再稱鄭伯 故約文上其名於會上 하다
[經]陳侯逃歸注+畏楚 逃晉而歸 [附注] 林曰 自是凡會同無陳矣 하다
[傳]七年春 郯子來朝하니 始朝公也
[傳]夏四月 三卜郊호되 不從이어늘 乃免牲하다
孟獻子曰 吾乃今而後知有卜筮로라
夫郊祀后稷 以祈農事也注+郊祀后稷以配天 后稷 周始祖 能播殖者
是故啓蟄而郊하고 郊而後耕이어늘 今旣耕而卜郊하니 宜其不從也注+啓蟄 夏正建寅之月 耕 謂春分 로다
[傳]南遺爲費宰注+費 季氏邑 하다 叔仲昭伯爲隧正注+隧正 主役徒 昭伯 叔仲惠伯之孫 하야 欲善季氏하야 而求媚於南遺하야 謂遺請城費注+使遺請城 하라
吾多與而役하리라
故季氏城費注+傳言祿去公室 季氏所以强 [附注] 林曰 而 汝也 我多與汝徒役 하다
[傳]小邾穆公來朝하니 亦始朝公也注+
[傳]秋 季武子如衛하야 報子叔之聘하고 且辭緩報非貳也注+子叔聘 在元年 言國家多難 故不時報
[傳]冬十月 晉韓獻子告老하고 公族穆子有廢疾注+穆子 韓厥長子 成十八年 爲公族大夫 將立之注+代厥爲卿 한대
辭曰 詩曰 注+詩言雖欲早夜而行 懼多露之濡己 義取非禮不可妄行 라하고 又曰 弗躬弗親이면 庶民弗信注+詩小雅 譏在位者 不躬親政事 則庶民不奉信其命 言己有疾 不能躬親政事 이라하니이다
無忌不才하니 讓其可乎ᄂ저
請立起也注+無忌 穆子名 起 無忌弟宣子也 하소서
與田蘇游러니 而曰好仁注+田蘇 晉賢人 蘇言起好仁 이니이다
詩曰 注+靖 安也 介 助也 景 大也 詩小雅 言君子當思不出其位 求正直之人 與之竝立 如是 則神明順之 致大福也 이라하니이다
恤民爲德注+靖共其位 所以恤民 이오 正直爲正注+正己心 이오 正曲爲直注+正人曲 이오 參和爲仁注+德正直三者 備乃爲仁 이니
如是 則神聽之하야 介福降之리니 立之 不亦可乎注+言起有此三德 故可立 잇가
庚戌 使宣子朝하고 遂老注+韓厥致仕 하다
晉侯謂韓無忌仁이라하야 使掌公族大夫注+爲之師長 [附注] 林曰 掌 主也 穆子初爲公族大夫 今使主之 爲之師長也 하다
[傳]衛孫文子來聘 且拜武子之言注+緩報非貳之言 하고 而尋孫桓子之盟注+盟在成三年 하다
注+禮 登階 臣後君一等 한대 叔孫穆子相이러니 趨進曰 諸侯之會 注+敵體竝登 이어늘 今吾子不後寡君하니 寡君未知所過로라 吾子其注+安 徐也 하라
孫子無辭하고
亦無悛容注+悛 改也 하다
穆叔曰 孫子必亡이로다
爲臣而君注+[附注] 林曰 爲人臣而與國君抗禮 하고 過而不悛 亡之本也
詩曰 退食自公하니 注+委蛇 順貌 詩召南 言人臣自公門入私門 無不順禮 라하니 謂從者也注+從 順也
衡而委蛇하니 必折注+衡 橫也 橫不順道 必毁折 爲十四年林父逐君起本 이리라
[傳]楚子囊圍陳이어늘 會于鄬以救之注+晉會諸侯 하다
[傳]鄭僖公之爲太子也 於成之十六年注+魯成公 할새 不禮焉하고 又與子豐適楚 亦不禮焉注+子豐 穆公子 하다
及其元年하야 朝于晉注+鄭僖元年 魯襄三年 이어늘 子豐欲愬諸晉而廢之하니 子罕止之하다
及將會于鄬 子駟相이러니 又不禮焉한대 侍者諫하니 不聽하고 又諫하니 殺之하다
及鄵하야 子駟使賊夜弑僖公하고 而以瘧疾赴于諸侯注+傳言經所以不書弑 하다
簡公生五年이러니 奉而立之注+僖公子 하다
[傳]陳人患楚注+楚圍陳故 하니
慶虎慶寅謂楚人曰 吾使公子黃往하리니 而執之注+二慶 陳執政大夫 公子黃 哀公弟 하라 楚人從之注+爲執黃 하다
二慶使告陳侯于會注+鄬之會 曰 楚人執公子黃矣
君若不來 群臣不忍社稷宗廟하야 懼有二圖注+背君屬楚 라하니 陳侯逃歸注+鄬會 所以不書救 하다


7년 봄에 담자郯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여름 4월에 세 차례 복교卜郊하였으나 불길不吉하니 을 놓아주었다.注+’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미 점을 쳐서 날짜를 정한 것인데, 교제郊祭를 지내는 것이 한지의 여부를 점친 것은 가 아니다.
소주자小邾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비읍費邑을 쌓았다.注+남유南遺가 일이 어렵다는 핑계로 을 쌓은 것이다.
가을에 계손숙季孫宿나라에 갔다.
8월에 황충蝗蟲재해災害발생發生하였다.注+이 없다.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겨울 10월에 위후衛侯손임보孫林父사신使臣으로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임술일壬戌日손임보孫林父결맹結盟하였다.
나라 공자公子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포위包圍하였다.
12월에 양공襄公진후晉侯송공宋公진후陳侯위후衛侯조백曹伯거자莒子주자邾子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나라 구원救援하는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는데, 진후陳侯가 도망해 돌아갔기 때문에 구원救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진救陳’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나라 땅이다.
정백鄭伯곤완髡頑회합會合에 갔으나 제후諸侯를 만나 보지 못하고 병술일丙戌日에서 하였다.注+사실은 자사子駟에게 시해弑害된 것인데, 학질瘧疾로 죽었다고 부고하였기 때문에 ‘시해弑害’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칭해 ‘’로 기록한 것은 동맹同盟하였기 때문이다. ‘회합會合에 갔다’는 것은 회합會合에 간 것이다. ‘제후를 만나 보지 못했다’는 것은 회합會合하는 장소場所에 도착하기 전에 죽은 것이다. 나라 땅이다. 정백鄭伯을 거듭 칭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요약要約하여 그 이름을 회합會合의 위로 올린 것이다.
진후陳侯가 도망해 돌아갔다.注+나라를 두려워하여, 나라가 주관主管하는 회합會合에서 도망해 돌아간 것이다. [부주]林: 이때부터 모든 회동會同나라는 참여하지 않았다.
7년 봄에 담자郯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처음으로 양공襄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
여름 4월에 세 번 교제郊祭길흉吉凶을 점쳤으나 불길하니 희생犧牲을 놓아주었다.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야 복서卜筮영험靈驗하다는 것을 알았다.
남교南郊에서 후직后稷에게 제사하는 것은 농사農事풍년豊年을 빌기 위함이다.注+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때 후직后稷배향配享한 것이다. 후직后稷나라 시조始祖로 곡식의 씨앗을 뿌려 잘 가꾼 자이다.
그러므로 경칩驚蟄이 되면 교제郊祭를 지내고 교제郊祭를 지낸 뒤에 농사農事를 시작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미 농사를 시작한 뒤에 교제郊祭길흉吉凶을 점쳤으니 그 점이 불길不吉한 것이 당연하다.”注+계칩啓蟄(驚蟄)은 하정夏正건인지월建寅之月(正月)이고, 춘분春分을 이른 것이다. 고 하였다.
남유南遺비읍費邑읍재邑宰가 되니,注+계씨季氏사읍私邑이다.숙중소백叔仲昭伯수정隧正이 되어注+수정隧正역도役徒주관主管하는 관원官員이다. 소백昭伯숙중혜백叔仲惠伯의 손자이다. 계씨季氏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남유南遺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 남유南遺에게 “비읍費邑을 쌓으라.注+남유南遺로 하여금 계손숙季孫宿에게 하여 을 쌓게 한 것이다.
내 그대에게 역부役夫를 많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씨季氏비읍費邑을 쌓은 것이다.注+전문傳文祿(政權을 뜻함)이 공실公室을 떠났고 계씨季氏하게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너)이니, 내가 너에게 역도役徒를 많이 주겠다는 말이다.
소주목공小邾穆公이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그 또한 처음으로 양공襄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注+담자郯子를 이른 것이다.
가을에 계무자季武子나라에 가서 자숙子叔빙문聘問보빙報聘하고, 또 보빙報聘이 늦은 것이 나라에 두마음이 있어서가 아님을 해명解明하였다.注+자숙子叔빙문聘問양공襄公원년元年에 있었다. 국가國家에 어려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제때에 보빙報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겨울 10월에 나라 한헌자韓獻子(韓厥)가 치사致仕하고서 고질痼疾이 있는 큰아들 공족公族목자穆子注+목자穆子한궐韓厥장자長子성공成公 18년에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었다.(無忌)를 후계後繼로 세우려 하자,注+한궐韓厥의 뒤를 이어 이 되게 하려 한 것이다.
목자穆子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아침저녁으로 가고 싶지 않으랴만 길에 이슬이 많아 옷을 적실까 두렵네.’注+의 뜻은 비록 아침저녁으로 가고 싶지만 많은 이슬이 내 옷을 적실까 두렵다는 말이다. 가 아니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한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정사政事를 직접 주재主宰하지 않으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注+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절남산편節南山篇〉의 시구詩句이다. 관위官位에 있는 자가 몸소 정사政事처리處理하지 않으면 서민庶民이 그 명령命令신봉信奉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말이다. 나는 이 있어 몸소 정사政事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저는 재능才能이 없으니 사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韓宣子)를 세우소서.注+무기無忌목자穆子의 이름이다. 무기無忌의 아우 선자宣子이다.
전소田蘇교유交遊하였는데, 전소田蘇가 ‘그는 을 좋아한다.’注+전소田蘇나라의 현인賢人이다. 전소田蘇가 “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다. 칭찬稱讚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너의 직위職位성실誠實[靖]히 봉행奉行[共]하여 정직正直한 사람을 좋아하면 신명神明이 그것을 알고서[聽] 너를 큰 으로 도우리라.’注+이고, 이고, 이다. 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소명편小明篇〉의 시구詩句이다. 군자君子는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위치位置를 벗어나지 않으니, 정직正直한 사람을 구하여 그와 함께 관직官職에 서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신명神明이 그의 뜻에 따라 큰 을 준다는 말이다. 고 하였습니다.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이고,注+자기의 직위職位성실誠實봉행奉行하는 것이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이고,注+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이고,注+남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세 가지가 조화調和된 것이 입니다.注+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신명神明이 그것을 알고서 큰 복을 내릴 것이니, 를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注+에게 이 세 가지 이 있기 때문에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헌자獻子경술일庚戌日선자宣子(起)에게 조정朝廷에 나아가 진후晉侯를 뵙게 하고서, 헌자獻子는 드디어 치사致仕하였다.注+한궐韓厥치사致仕한 것이다.
진후晉侯한무기韓無忌하다고 여겨 공족대부公族大夫을 맡게 하였다.注+공족대부公族大夫장관長官으로 삼은 것이다. [부주]林: 주관主管하는 것이다. 목자穆子가 전에 이미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었으므로 지금 공족대부公族大夫들을 주관主管하게 하기 위해 그를 장관長官으로 삼은 것이다.
나라 손문자孫文子가 와서 빙문聘問한 것은 계무자季武子의 말에 배사拜謝하고,注+〈지난 가을에 계무자季武子나라에 가서〉 “늦게 보빙報聘한 것이 나라에 두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고 한 말을 이른다.성공成公 3년에 손환자孫桓子나라에 와서 맺은 맹약盟約중수重修하기 위함이었다.注+결맹結盟성공成公 3년에 있었다.
양공襄公이 뜰의 한 층계層階를 오를 때마다注+계단階段을 오를 때 신하는 임금보다 한 등급等級 뒤에서 오르는 것이 이다. 그도 양공襄公과 나란히 층계層階를 오르자, 이때 숙손목자叔孫穆子이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그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회합會合에 우리 임금께서 위군衛君의 뒤에 오른 적이 없었는데,注+지위地位대등對等하기 때문에 함께 나란히 오른 것이다. 지금 그대는 우리 임금의 뒤에 오르지 않으니, 우리 임금께서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대에게 이런 경시輕視를 당하는지를〉 모르신다.
그대는 조금 천천히 올라 가라.”注+(천천히)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손문자孫文子해명解明도 하지 않고 뉘우쳐 고치려는 모습도 없었다.注+은 고침이다.
목숙穆叔이 말하기를 “손문자孫文子는 반드시 할 것이다.
신하臣下가 되어 임금처럼 행동行動하고,注+[부주]林: 신하가 되어 국군國君대등對等하게 한 것을 말한 것이다. 허물을 짓고도 고치지 않는 것은 하는 장본張本이다.
시경詩經》에 ‘조정朝廷에서 물러 나와 밥을 먹으니 그 모습 자연스럽고 침착하네.’注+위이委蛇한 모양이다. 는 《시경詩經》 〈소남召南고양편羔羊篇〉의 시구詩句이다. 신하가 공문公門(朝廷을 뜻함)에서 물러나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기까지 를 따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께 순종順從하는 것을 이른 것이다.注+순종順從이다.
그런데 손문자孫文子는 도리를 어기면서도 자연스럽게 행동하였으니 반드시 꺾일 것이다.”注+도리道理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하는 것이다. 도리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하니 반드시 훼절毁折(헐고 부러짐)할 것이라는 말이다. 양공襄公 14년에 손임보孫林父위군衛君축출逐出장본張本이다. 고 하였다.
나라 자낭子囊나라를 포위包圍하자, 제후諸侯에서 회합會合하여 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나라가 제후諸侯를 불러 회합會合한 것이다.
정희공鄭僖公태자太子로 있던 성공成公 16년에注+노성공魯成公을 이른다.자한子罕과 함께 나라에 갔을 때 자한子罕대우待遇하지 않았고, 또 자풍子豐과 함께 나라에 갔을 때도 자풍子豐대우待遇하지 않았다.注+자풍子豐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희공僖公즉위卽位원년元年에 미쳐 조현朝見하기 위해 나라로 가자,注+정희공鄭僖公원년元年노양공魯襄公 3년이다. 자풍子豐진군晉君에게 그의 무례無禮고소告愬하여 폐위廢位시키고자 하니, 자한子罕이 말렸다.
에서 회합會合하려 할 때에 자사子駟이었는데 또 자사子駟대우待遇하지 않자, 그 시종侍從하니 듣지 않고 재차 하니 그 시종侍從을 죽였다.
조읍鄵邑에 이르러 자사子駟자객刺客을 시켜 밤에 희공僖公시해弑害하고 학질瘧疾로 죽었다고 제후국諸侯國부고赴告하였다.注+전문傳文에 ‘’로 기록하지 않은 배경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다섯 살 된 간공簡公을 받들어 임금으로 세웠다.注+간공簡公정희공鄭僖公의 아들이다.
진인陳人나라의 침공侵攻을 근심하였다.注+초군楚軍나라를 포위包圍하였기 때문이다.
경호慶虎경인慶寅초인楚人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자公子을 보낼 것이니, 가거든 그를 잡으라.”注+경씨慶氏나라의 집정대부執政大夫이다. 공자公子진애공陳哀公의 아우이다. 고 하니 초인楚人이 그대로 따랐다.注+경호慶虎경인慶寅을 위해 공자公子을 잡은 것이다.
경호慶虎경인慶寅회합會合에 참여하고 있는 진후陳侯에게 사람을 보내어注+회합會合이다. 하기를 “초인楚人공자公子을 잡았습니다.
임금님께서 오지 않으시면 신하들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다른 생각을 품을까 두렵습니다.”注+임금을 배반背叛하고 나라에 붙겠다는 말이다. 라고 하니, 진후陳侯회합會合에서 도망쳐 돌아갔다.注+회합會合은 〈본래 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함이었으나, 진후陳侯가 도망쳐 돌아갔기 때문에 구원救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 ‘구진救陳’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
역주1 卜郊……免牲 : 본인의 《譯註春秋左氏傳》 僖公 31년 經의 역주] 2번과, 傳의 杜注 4번과 附注를 참고할 것.
역주2 亦郯子也 : 亦은 下文에 上文과 같은 일이 보일 때 쓰는 글자이다. 穆公의 來朝가 郯子의 始朝公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亦(그 또한)’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3 豈不夙夜 謂行多露 : 이 詩句는 《詩經》 〈召南行露篇〉에 보인다. 詩의 原義는 사랑하는 총각이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자고 강요하자, 처녀는 몸이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총각에게 “어찌 아침이고 저녁이고 그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으랴만, 길에 이슬이 많아 옷이 더럽혀질까 두려워 못 가겠다.”고 핑계 댄 것인데, 穆子는 斷章取義하여 몸에 병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朝廷에 나아가 職務를 살필 수 없다는 뜻으로 轉用하였다. 《左氏會箋》에는 “나도 아침저녁으로 官職에 從事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痼疾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官職에 종사할 수 없는 것이 여자가 이슬이 많아 감히 아침저녁으로 갈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杜注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역주4 靖共爾位……介爾景福 : 杜注를 따르지 않았다. 靖은 靜과 같으니 靜에는 誠實의 뜻이 있으므로 誠實로 번역하였고, 共은 供의 假借字로 보아 奉行으로 번역하였다. 자기의 職務를 誠實히 奉行하고 正直한 사람을 좋아하면 神明이 알고서 큰 福으로 도울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5 公登亦登 : 《儀禮》 〈聘禮〉에 의하면 聘問 간 賓은 階段을 오를 때 그 나라 임금이 먼저 두 等級을 오른 뒤에 비로소 한 等級을 오르니, 임금과 한 等級의 거리를 두고서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孫林父는 임금이 한 등급을 오르면 자기도 한 등급을 올라 임금과 나란히 오른 것이다. 옛날에 諸侯의 階段은 七級이었다.
역주6 寡君未嘗後衛君 : 魯君과 衛君은 地位가 같으니, 孫林父가 魯君을 衛君처럼 尊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역주7 小[少] : 저본에는 ‘小’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少’로 바로잡았다.
역주8 委蛇委蛇 : 委蛇는 《毛詩正義》에는 “모든 일이 도리에 맞아 마음이 만족한 모양이다.[委曲自得之貌]”고 하였고, 朱子의 《詩傳集註》에는 “스스로 만족해하는 모양이다.[自得之貌]”고 하였으며, 기타 左傳의 註釋書에도 대부분 자연스럽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모양[從容自得]으로 解釋하였다. 이 詩는 朝廷에서 일 처리와 家庭에서의 處身이 모두 道理에 맞아 행동이 자연스럽고 침착한 君子를 讚美한 것이다. 譯者는 ‘자연스럽고 침착함’으로 번역하였다.
역주9 子罕 : 子罕은 鄭穆公의 아들이다.

춘추좌씨전(4)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