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五年春 公矢魚于棠注+書陳魚 以示非禮也 書棠 譏遠地也 今高平方與縣北 有武唐亭 魯侯觀魚臺 [附注] 林曰 棠魯地하다
[經]夏四月 葬衛桓公하다
[經]秋 衛師入郕注+將卑師衆 但稱師 此史之常也하다
[經]九月 考仲子之宮하고 初獻注+成仲子宮 安其主而祭之 惠公以仲子手文 娶之 欲以爲夫人 諸侯無二嫡 蓋隱公成父之志 爲別立宮也 公問羽數 故書羽 婦人無諡 因姓以名宮하다
[經]邾人鄭人 伐宋注+邾主兵 故序鄭上하다
[經]螟注+無傳 虫食苗心者 爲災 故書 하다
[經]冬十有二月辛巳 公子彄 卒注+大夫書卒不書葬 葬者 臣子之事 非公家所及 하다
[經]宋人伐鄭하야 圍長葛注+潁川長社縣北 有長葛城 [附注] 林曰 此書圍之始也 伐國不言圍邑 僖之前書之하다
[傳]五年春 公將如棠한대諫曰 凡物不足以講大事注+臧僖伯 公子彄也 僖 諡也 大事祀與戎하고 其材不足以備器用이면 則君不擧焉注+材 謂皮革齒牙骨角毛羽也 器用 軍國之器이니이다
君將納民於軌物者也注+[附注] 林曰 軌 法也 物 采也 可法謂之軌 可采謂之物 言君之所爲 將納民於可法可采之中
講事以度軌量注+[附注] 林曰 講習大事 以準度軌法 非苟然而講事 謂之軌注+[附注] 林曰 此申明軌字之義 合度量而後 謂之軌
取材以章物采注+[附注] 林曰 取鳥獸之材 以章明物采 非苟然而取材 謂之物注+[附注] 林曰 此申明物字之義 可采飾而後 謂之物
이요 不軌不物 謂之亂政이니 亂政亟行 所以敗也注+言器用衆物 不入法度 則爲不軌不物 亂敗之所起니이다
故春蒐夏苗秋獮冬狩注+蒐 索 擇取不孕者 苗 爲苗除害也 獮 殺也 以殺爲名 順秋氣也 狩 圍守也 冬物畢成 獲則取之 無所擇也 皆於農隙하야 以講事也注+隨時事之間 [附注] 林曰 古者藏兵於農 故四時之田 皆於農事之間隙 恐其妨農니이다
三年而治兵하고 入而振旅注+雖四時講武 猶復三年而大習 出曰兵 始治其事 入曰振旅 治兵禮畢 整衆而還 振 整也 旅 衆也하며 歸而하야 以數注+飮於廟 以數車徒器械及所獲也 [附注] 朱曰 歸則告至於宗廟 因而飮酒也이니이다
昭文章注+車服旌旗 [附注] 林曰 昭 著也 君大夫士 車服旌旗 各有文章하야 明貴賤注+[附注] 林曰 田獵之制 貴者先殺 此所以明君大夫士庶人之貴賤하고 辨等列注+等列 行伍 [附注] 林曰 辨上下之等第行列 坐作進退 皆是也하야 順少長注+出則少者在前 還則在後 所謂順也 [附注] 林曰 出則少者在前 趨敵之義 還則少者在後 之義 習威儀也注+[附注] 林曰 有威而可畏 謂之威 有儀而可象 謂之儀니이다
鳥獸之肉不登於俎注+俎 祭宗廟器 [附注] 林曰 不足登於俎以共祭祀어나 皮革齒牙骨角毛羽不登於器注+謂以飾法度之器 [附注] 林曰 有毛曰皮 去毛曰革 小齒曰齒 頷上大齒曰牙 翼上長毛曰羽 則公不射 古之制也니이다
若夫山林川澤之實 器用之資 皂隷之事 官司之守 非君所及也注+士臣皂 皂臣輿 輿臣隷 言取此雜猥之物 以資器備 是小臣有司之職 非諸侯之所親也니이다
公曰 吾將略地焉注+孫辭以略地 略 摠攝巡行之名 傳曰 東略之不知 西則否矣이라하고 遂往하여 陳魚而觀之注+陳 設張也 公大設捕魚之備而觀之하다
僖伯稱疾不從하다
書曰公矢魚于棠이라하니 非禮也 且言遠地也注+矢 亦陳也 棠實他竟 故曰遠地니라
[傳]曲沃莊伯以鄭人邢人伐翼注+曲沃 晉別封成師之邑 在河東聞喜縣 莊伯 成師子也 翼 晉舊都 在平陽絳邑縣東 邢國 在廣平襄國縣 [附注] 林曰 晉亂 分爲二 故以翼與曲沃別之이어늘 王使尹氏武氏助之하니 翼侯奔隨注+尹氏武氏 皆周世族大夫也 晉內相攻伐 不告亂 故不書 傳具其事 爲後晉事張本 曲沃及翼本末 見桓二年 隨 晉地 하다
[傳]夏 葬衛桓公하다
衛亂이라 是以緩注+有州吁之難 十四月乃葬 傳 明其非慢也하다
[傳]四月 鄭人侵衛牧注+牧 衛邑 經書夏四月葬衛桓公 今傳直言夏 而更以四月附鄭人侵衛牧者 於下事宜得月 以明事之先後 故不復備擧經文 三年 其義亦同 他皆放此하야 以報東門之役注+東門役 在四年하니 衛人以燕師伐鄭注+南燕國 今東郡燕縣하다
鄭祭足原繁洩駕以三軍軍其前注+[附注] 軍其前 攻其前也 羅與盧戎兩軍之 鄭子罕宵軍之 皆此義也 하고 使曼伯與子元潛軍軍其後하다
燕人畏鄭三軍而不虞制人注+北制 鄭邑 今河南成皐縣也 一名虎牢 [附注] 林曰 制人 曼伯子元之軍也 不虞 不料度也이어늘
六月 鄭二公子以制人敗燕師于北制注+二公子 曼伯子元也하다
君子曰
不備不虞 不可以師注+[附注] 林曰 不備禦不虞度 不可以行師니라
[傳]曲沃叛王하니 王命虢公伐曲沃注+[附注] 林曰 西虢君 仕于王朝者也하고 而立哀侯于翼注+春 翼侯奔隨 故立其子光하다
[傳]衛之亂也 郕人侵衛
故衛師入郕注+郕 國也 東平剛父縣西南 有郕鄕하다
[傳]九月 考仲子之宮하고 將萬焉注+萬 舞也 [附注] 朱曰 禮 諸侯無二嫡 不應立廟 故曰 宮也하야 公問羽數於衆仲注+問執羽人數한대
對曰 天子用八注+八八六十四人하고 諸侯用六注+六六三十六人하고 大夫四注+四四十六人하고 士二注+二二四人 士有功 賜用樂니이다
夫舞 所以節八音而行八風注+八音 金石絲竹匏土革木也 八風 八方之風也 以八音之器 播八方之風 手之舞之 足之蹈之 節其制而敍其情 [附注] 朱曰 八風 東方谷風 東南淸明風 南方凱風 西南凉風 西方閶闔風 西北不周風 北方廣莫風 東北融風也 八音皆奏而舞曲齊之 故舞所以節八音也 八方風氣 由舞而行 故舞所以行八風也이라
故自八以下注+唯天子得盡物數 故以八爲列 諸侯則不敢用八니이다 公從之하야
於是初獻하니 始用六佾也注+魯唯文王周公廟得用八 而他公遂因仍僣而用之 今隱公特立此婦人之廟 詳問衆仲 衆仲因明大典 故傳亦因言始用六佾 其後季氏舞八佾於庭 知唯在仲子廟用六
[傳]宋人取邾田하니 邾人告於鄭曰 請君釋憾於宋이시면 敝邑爲道注+釋四年再見伐之恨 [附注] 林曰 敝邑 邾自謂 道 向導也하리이다
鄭人以王師會之注+王師不書 不以告也 [附注] 林曰 鄭莊 尙爲王卿 故得用周師伐宋하야 入其郛하야 以報東門之役注+郛 郭也 東門役在四年 하다
宋人使來告命注+告命 策書 [附注] 朱曰 來魯告受伐 이어늘 公聞其入郛也하고 將救之하야 問於使者曰 師何及 對曰 未及國注+忿公知而故問 니이다 公怒하야 乃止하고 辭使者曰
君命寡人하야 同恤社稷之難이어늘 今問諸使者하니 曰師未及國이라하니 非寡人之所敢知也注+爲七年公伐邾傳로다
[傳]冬十二月辛巳 臧僖伯卒하니 公曰 叔父有憾於寡人注+諸侯稱同姓大夫 長曰伯父 少曰叔父 有恨 恨諫觀魚不聽 寡人不敢忘이라하고 葬之加一等注+之等하다
[傳]宋人伐鄭圍長葛하야 以報入郛之役也하다


5년 봄에 은공이 으로 가서 물고기 잡는 장비裝備를 벌여 놓고 구경하였다.注+고기 잡는 장비를 벌여 놓았다고 기록하여 가 아님을 드러냈고, 을 기록하여 먼 곳까지 간 것을 나무랐다. 지금 고평高平방여현方與縣 북쪽에 무당정武唐亭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노후魯侯관어대觀魚臺이다. [부주]林: 나라 땅이다.
여름 4월에 위환공衛桓公장사葬事 지냈다.
가을에 나라 군대가 나라로 쳐들어갔다.注+장수將帥의 계급은 낮으나 군사가 많으면 ‘’라고만 칭하는 것이 사서史書상례常例이다.
9월에 중자의 (廟)을 완성完成하고서 처음으로 육우六羽를 바쳤다.注+중자仲子완성完成한 뒤에 그 신주神主봉안奉安하고서 제사를 지낸 것이다. 혜공惠公중자仲子수문手文(손의 무늬) 때문에 그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제후는 두 적부인嫡夫人을 둘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적부인嫡夫人으로 삼지 못하고 죽었다. 은공隱公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해 따로 중자仲子을 세운 것이다. 은공隱公를 물었기 때문에 의 수를 기록한 것이다. 부인婦人시호諡號가 없으므로 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주인邾人정인鄭人나라를 쳤다.注+나라가 군대를 통솔하였기 때문에 순서를 나라의 위에 둔 것이다.
명충螟虫재해災害가 있었다.注+이 없다. 벼 줄기의 속을 파먹는 벌레이다.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겨울 12월 신사일에 공자公子하였다.注+대부大夫의 죽음은 기록하지만 장사葬事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장사는 신자臣子의 일이어서 공가公家에서 관여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송인宋人이 정나라를 쳐서 장갈長葛을 포위하였다.注+영천穎川장사현長社縣 북쪽에 장갈성長葛城이 있다.[부주]林: 이것이 ‘’를 기록한 시초이다. 벌국伐國에는 위읍圍邑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희공僖公 이전에는 그렇게 기록하였다.
5년 봄에 은공이 에 가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려 하자, 장희백臧僖伯하기를 “물건이 대사大事강습講習하기에 부족하거나注+장희백臧僖伯공자公子이다. 시호諡號이다. 대사大事는 제사와 전쟁이다.재료材料기용器用을 만들기에 부족하면 임금은 거동擧動하지 않습니다.注+이다. 기용器用군국軍國용기用器이다.
임금은 백성을 ‘’와 ‘’로 들도록 인도하는 사람입니다.注+[부주]林: 이고 이다. 법이 될 만한 것을 라 하고, 가 될 만한 것을 이라 한다. 임금의 일은 백성들을 법과 채 속으로 들도록 인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사大事를 강습하여 궤량軌量을 헤아리는 것을注+[부주]林: 대사大事를 강습함은 궤법軌法을 헤아리기 위함이고 부질없이 일을 강습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라 하고,注+[부주]林: 이는 거듭 궤자軌字의 뜻을 밝힌 것이다. 도량度量에 맞은 뒤에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재료를 하여 물채物采를 드러내는 것을注+[부주]林: 조수鳥獸재료材料를 취함은 물채物采를 밝히기 위함이고 부질없이 재료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이라 하고,注+[부주]林: 이는 거듭 ‘’字의 뜻을 밝힌 것이다. 채색으로 꾸밀 만한 뒤에야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에 맞지 않는 것을 난정亂政이라 하니, 난정亂政을 자주 행하는 것이 패망敗亡의 원인입니다.注+기용器用 등의 물품이 법도에 맞지 않으면 불궤不軌불물不物이 되니, 이것이 난정亂政이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봄 사냥[蒐], 여름 사냥[苗], 가을 사냥[獮], 겨울 사냥[狩]을注+’는 찾는 것이니 잉태孕胎하지 않은 짐승을 골라 잡는 것이다. ‘’는 곡식의 를 위해 해물害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은 죽이는 것이니 죽이는 것으로 이름한 것은 가을의 기운을 따른 것이다. ‘’는 포위해 지키는 것이니 겨울에는 동물動物이 모두 성장成長하였기 때문에 잡히는 대로 취하고 선택하는 바가 없다. 모두 농한기農閑期에 실시하여 무사武事강습講習하는 것입니다.注+각각 그 철의 일을 하고난 여가餘暇를 이용한다는 말이다. [부주]林: 옛날에는 병사兵士농민農民이었기 때문에 사시四時의 사냥을 모두 농한기農閑期에 하였으니, 이는 농사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해서이다.
3년마다 치병治兵하고, 치병을 마친 뒤에 국도國都로 들어와 진려振旅하고서,注+철마다 무사武事를 강습하였으나, 다시 3년마다 한 차례씩 대대적으로 훈련訓練하였다. 나가는 것을 치병治兵이라 하니, 비로소 그 일을 다스리는 것이고, 들어오는 것을 진려振旅라 하니, 치병治兵를 마치고서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오는 것이다. 은 정돈하는 것이고 는 군사이다.종묘宗廟귀환歸還을 고한 다음 음지飮至하고서, 군실軍實을 계산합니다.注+종묘에서 술을 마시고서 거병車兵보병步兵의 무기 및 노획물鹵獲物을 계산하는 것이다. [부주]朱: 돌아오면 종묘에 (돌아온 것)를 고하고서 이어 술을 마시는 것이다.
치병治兵할 때 문장文章을 드러내어注+이다. [부주]林: 는 드러냄이다. 대부大夫에는 각자의 문장이 따로 있다.귀천貴賤을 밝히고,注+[부주]林: 사냥하는 제도에 한 자가 먼저 짐승을 잡는 것은 대부大夫서인庶人귀천貴賤을 밝히기 위함이다.등렬等列(등급)을 분변分辨하여注+등렬等列항오行伍이다. [부주]林: 상하의 등급等級항렬行列을 분변하는 것이니, 좌작진퇴坐作進退 따위가 모두 그것이다.장유長幼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注+나갈 때엔 젊은 자가 앞서가고, 돌아올 때엔 뒤에 오는 것이 이른바 ‘’이다. [부주]林: 나갈 때에 젊은 자가 앞에 가는 것은 을 향해 달려가는 뜻이고, 돌아올 때에 젊은 자가 뒤에 오는 것은 전사殿師의 뜻이다. 위의威儀강습講習하는 것입니다.注+[부주]林: 위엄威嚴이 있어 경외敬畏할 만한 것을 라 하고, 예의禮儀가 있어 본받을 만한 것을 라 한다.
고기가 에 오를 수 없거나注+종묘宗廟제기祭器이다. [부주]林: 에 담아 제사에 올릴 만하지 못한 것이다. 가죽‧이빨‧뼈‧뿔‧털‧깃 등이 기용器用재료材料로 쓰일 수 없는 조수鳥獸注+그것으로 법도의 그릇을 꾸미는 것을 이름이다. [부주]林: 털이 있는 것을 ‘’라 하고, 털을 제거한 것을 ‘’이라 한다. 작은 이를 ‘’라 하고, 턱 위에 난 큰 이를 ‘’라 하며, 날개 위에 난 긴 털을 라 한다. 임금이 쏘아 잡지 않는 것이 옛날의 제도制度입니다.
만약 저 산림山林천택川澤에서 생산되는 물품物品기물器物을 만드는 재료라면 조예皂隷의 일이고 관사官司직분職分이니, 임금이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注+를 신하로 부리고 輿를 신하로 부리고 輿를 신하로 부린다. 이런 잡다한 물건을 취하여 기용의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소신小臣유사有司가 맡아 할 일이고 제후가 직접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은공은 “나는 그 지방地方를 순시하련다.注+겸손한 말로 그 지방을 순시하려 한다고 한 것이다. 은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순행巡行하는 명칭名稱이다. 희공僖公 9년 에 “동방東方경략經略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방西方은 아니다.”고 하였다.”고 하고서, 마침내 가서 고기 잡는 장비를 늘어놓고서 구경하였다.注+은 벌여 놓는 것이다. 공이 물고기 잡는 장비를 대대적으로 벌여 놓고서 구경했다는 말이다.
장희백臧僖伯은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따라가지 않았다.
에 “공시어우당公矢魚于棠”이라고 기록한 것은 은공의 행위가 에 맞지 않고, 또 먼 곳까지 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注+도 벌여 놓는 것이다. 은 실로 타국他國접경지接境地이기 때문에 먼 곳이라고 한 것이다.
곡옥曲沃장백莊伯정인鄭人형인邢人을 거느리고 을 치자,注+곡옥曲沃나라가 따로 성사成師에게 봉해 준 인데, 하동河東문희현聞喜縣에 있다. 장백莊伯성사成師의 아들이다. 나라 구도舊都인데, 평양平陽강읍현絳邑縣 동쪽에 있다. 형국邢國광평廣平양국현襄國縣에 있다.[부주]林: 나라가 어지러워 둘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곡옥曲沃으로 구별한 것이다.천왕天王윤씨尹氏무씨武氏를 보내어 莊伯을 도우니, 익후翼侯로 도망하였다.注+윤씨尹氏무씨武氏는 모두 나라의 세족대부世族大夫이다. 나라가 국내國內에서 저희끼리 서로 공벌攻伐하면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에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후일後日나라에 사변事變이 발생하게 된 장본張本을 설명하였다. 곡옥曲沃의 본말은 환공桓公 2년에 보인다. 나라 땅이다.
여름에 위환공衛桓公을 장사지냈다.
나라에 난리가 있었기 때문에 늦어진 것이다.注+주우州吁의 난리가 있었기 때문에 14개월 만에야 장사 지낸 것이다. 에 장사가 늦어진 것이 게을러서가 아님을 밝혔다.
4월에 정인鄭人나라 침입侵入하여注+위읍衛邑이다. 에는 “하사월장위환공夏四月葬衛桓公”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지금 에 다만 라고만 기록하고, 다시 4월을 ‘정인침위목鄭人侵衛牧’ 위에 붙인 것은 하항下項기사記事을 표시하여야 일의 선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경문經文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은공隱公 3년의 ‘군씨졸君氏卒’도 그 뜻이 같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동문東門의 전쟁을 보복하니,注+동문東門의 전쟁은 은공隱公 4년에 있었다.위인衛人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공격攻擊하였다.注+남연국南燕國은 지금의 동군東郡연현燕縣이다.
정나라 채족祭足원번原繁설가洩駕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연군燕軍의 전면을 공격하는 한편,注+[부주]林: 군기전軍其前은 그 전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환공桓公 13년 의 ‘나여노융羅與盧戎양군지兩軍之’와 성공成公 16년 의 ‘정자한소군지鄭子罕宵軍之’도 모두 이런 뜻이다.만백曼伯(鄭昭公 . 정장공鄭莊公의 아들)‧자원子元(鄭厲公 . 정장공의 아들)을 시켜 군사를 은밀히 이동하여 그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연인燕人은 앞에 있는 정나라의 3군만을 두려워할 뿐, 배후背後제인制人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豫測도 하지 못하였다.注+북제北制는 정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河南성고현成皐縣이다. 일명 호뢰虎牢라고도 한다. [부주]林: 제인制人만백曼伯자원子元의 군대이다. 불우不虞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6월에 정나라의 두 공자公子제인制人을 거느리고서 연군燕軍북제北制에서 패배시켰다.注+공자公子만백曼伯자원子元이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의외意外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指揮할 수 없다.注+[부주]林: 방어책防禦策을 준비하지 않거나 불의不意재난災難을 미리 생각지 않으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곡옥曲沃주왕周王배반背叛하니 가을에 주왕이 괵공虢公에게 명하여 곡옥을 토벌하고서,注+[부주]林: 괵공虢公서괵西虢의 임금으로 나라 왕조王朝에 벼슬한 자이다.애후哀侯의 임금으로 세우게 하였다.注+봄에 익후翼侯로 도망갔기 때문에 그 아들 을 세운 것이다.
나라에 난리가 났을 적에 성인郕人이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므로 위나라 군대가 으로 쳐들어간 것이다.注+국명國名이다. 동평東平강부현剛父縣 서남쪽에 성향郕鄕이 있다.
9월에 중자仲子낙성落成하고 만무萬舞를 추고자 하여注+이다. [부주]朱: 제후諸侯는 두 적부인嫡夫人이 없으니, 중자仲子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라고 한 것이다.은공隱公중중衆仲에게 우수羽數를 물었다.注+깃을 들고 춤추는 사람의 수를 물은 것이다.
중중衆仲이 “천자는 팔일八佾,注+8×8 64이다. 제후는 육일六佾,注+6×6 36이다. 대부는 사일四佾,注+4×4 16이다.이일二佾을 사용합니다.注+2×2 4이다. 라도 이 있으면 제사祭祀에 음악을 사용할 수 있는 은전恩典을 내린다.
춤은 팔음八音절주節奏로 삼아 팔방八方풍기風氣를 나타내는 것입니다.注+팔음八音이고, 팔풍八風팔방八方풍기風氣이다. 팔음의 악기樂器팔방八方의 풍기를 전파傳播하며 손과 발로 무도舞蹈하여 황음荒淫하지 않토록 절제節制하고 울결鬱結하지 않토록 감정感情을 발산하는 것이다. [부주]朱: 팔풍八風동방곡풍東方谷風동남청명풍東南淸明風남방개풍南方凱風서남량풍西南凉風서방창합풍西方閶闔風서북부주풍西北不周風북방광막풍北方廣莫風동북융풍東北融風이다. 팔종八種악기樂器가 다 함께 울리면 무곡舞曲이 갖추어지므로 춤은 팔음八音을 절주로 삼는 것이고, 팔방八方의 풍기는 춤으로 인해 펼쳐지므로 춤은 팔방의 풍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무樂舞천자天子만이 팔일八佾을 사용할 수 있고, 제후 이하는 품계品階에 따라 2씩 줄어드는 것입니다.注+오직 천자天子만이 를 다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팔렬八列을 사용하지만 제후는 감히 팔렬八列을 사용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은공隱公중중衆仲의 말에 따라 이에 처음으로 육일무六佾舞를 올렸으니, 나라가 비로소 육일六佾을 사용한 것이다.注+나라는 오직 문왕文王주공周公종묘宗廟에만 팔일八佾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임금의 종묘에도 드디어 그대로 인습하여 참람하게 팔일을 사용하였다. 은공隱公이 특별히 이 부인婦人를 세우고서 중중衆仲에게 자세히 물었기에 중중이 큰 전례典禮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도 “비로소 육일을 사용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 뒤에 계씨季氏가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八佾舞를 추었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오직 중자仲子에만 육일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인宋人나라 땅을 탈취奪取하니, 주인邾人나라에 하기를 “임금께서 송나라에 대한 원한을 보복報復하시겠다면 폐읍敝邑향도嚮導가 되겠습니다.”고 하였다.注+은공隱公 4년에 두 차례 침공侵攻당한 원한을 풀려고 한 것이다.[부주]林: 폐읍敝邑주인邾人이 스스로 자기 나라를 이름이다. 향도嚮導이다.
정인鄭人주왕周王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 군대와 연합聯合하여注+왕사王師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에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정장공鄭莊公이 아직도 주왕周王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군대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공격하여 외곽外郭까지 들어가서 동문東門의 전쟁을 보복報復하였다.注+외곽外郭이다. 동문東門의 전쟁은 은공隱公 4년에 있었다.
송인宋人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전쟁을 고하니,注+고명告命책서策書이다. [부주]朱: 나라에 와서 공격받고 있음을 고한 것이다. 은공은 정나라 군대가 외곽까지 진입進入했다는 말을 듣고는 송나라를 구원救援하고자 하여, 사신에게 “정나라 군대가 어디까지 왔는가?”라고 묻자, 사신이 “아직 도성都城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니,注+사자使者는 은공이 알고 있으면서 고의故意로 묻는 것에 분개하여, 따져 묻는 말로 책망한 것이다. 은공은 노하여 구원하려던 계획을 중지하고서,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사절하였다.
“임금께서 과인寡人에게 하여 사직社稷의 어려움을 함께 근심하자고 하시기에 지금 사자使者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적군이 아직 도성都城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과인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注+이것이 7년에 은공隱公나라를 친 배경이다.
겨울 12월 신사일에 장희백臧僖伯하니, 은공이 말하기를 “숙부叔父과인寡人에게 이 있는 것을 과인은 감히 잊을 수 없다.注+제후諸侯동성대부同姓大夫호칭呼稱할 때 나이가 자기보다 위이면 백부伯父라 하고, 자기보다 아래이면 숙부叔父라 한다. 이 있다는 것은 관어觀魚에 대해 간하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으로 여겼다는 말이다.”고 하고서, 한 등급을 더 올려 장사지내게 하였다.注+명복命服등급等級을 올려 준 것이다.
송인宋人이 정나라를 쳐서 장갈長葛을 포위하여, 지난 4월에 정나라가 송나라의 외곽外郭에까지 쳐들어갔던 전쟁을 보복하였다.


역주
역주1 六羽 : 고대 諸侯의 樂舞. 여섯 사람씩 여섯 열(列)을 지어 추는데 손에 깃을 든다.
역주2 觀魚者 : 魚는 漁의 뜻이니, 곧 물고기를 잡는 器具를 진열해 놓고 구경하고서, 이어 漁夫들이 고기 잡는 것까지 구경하는 것이다.
역주3 臧僖伯 : 魯孝公의 아들이고 惠公의 동생으로 隱公의 叔父이다. 이름은 彄이고 字는 子臧인데, 이 ‘臧’이 그 후손의 氏가 되었다. 隱公 8년 疏에 “제후의 아들을 公子, 공자의 아들을 公孫이라고 칭하지만, 공손의 아들을 다시 공손이라고 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할아비의 字를 氏로 삼는다.”고 하였다.
역주4 講事以度軌量謂之軌 : 度는 헤아림이고, 軌量은 法度이다. 법도를 헤아린다는 것은 治兵‧祭祀의 법도를 익힘을 이름이다. 林氏는 軌와 量을 분리하여, 大事를 講習하여 軌法을 헤아리나니 度量에 맞은 뒤에야 軌라 한다고 풀이하였다.
역주5 取材以章物采謂之物 : 章은 밝힘이고, 物采는 器具의 빛깔이다. 物采를 드러낸다는 것은 鳥獸를 사냥해 그 材料를 취하여 軍國의 器具를 밝게 장식하는 것이다. 林氏는 物과 采를 분리하여, 재료를 취하여 物色을 드러내나니 그 재료가 器具를 采飾할 만한 뒤에야 物이라 한다고 풀이하였다.
역주6 : 대본에는 ‘名’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하여 ‘各’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 대본에는 ‘始’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하여 ‘治’로 바로잡았다.
역주8 飮至 : 임금이 外出에서 돌아오면 종묘에 제사하여 그 事由를 고하고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때 그 음식으로 신하들을 접대하고 從者들을 위로한다.
역주9 軍實 : 軍中의 兵車‧武器 등과 作戰에서 鹵獲한 각종 물건을 이른다.
역주10 殿師 : 退軍할 때 가장 뒤에서 不意의 사태를 대비하는 군대를 이른다.
역주11 君氏卒 : 經에는 ‘夏四月辛卯君氏卒’이라고 기록하였는데, 傳에는 “夏君氏卒”이라고 기록한 것을 이른다.
역주12 林曰 : 내각본 《春秋經傳集解》에는 ‘林’자가 빠져 있는데 《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13 六羽 : 여섯 사람씩 列을 지어 6列로 늘어서서 손에 새깃을 들고 춤추던 제후의 樂舞이다. 杜注에는 8열에는 每列에 8인, 육열에는 6인, 4열에는 4인, 2열에는 2인이라고 하였으나, 丁若鏞은 “杜氏의 말대로라면 二佾은 4인이니, 4인이 어찌 八方의 風氣를 펼칠 수 있겠는가. 列數와 관계없이 모두 8인이다.”고 하였다. 《與猶堂全書春秋考徵》
역주14 責窮辭 : 未詳이다. ‘責難窮詰之辭’라고 한 《左氏會箋》의 說에 따라 이와 같이 번역하였을 뿐이다.
역주15 命服 : 元士로부터 上卿에 이르기까지 爵位에 따라 내리는 衣服이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