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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4)

춘추좌씨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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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九年春王正月 諸侯盟于祝柯注+前年圍齊之諸侯也 祝柯縣今屬濟南郡 하다
晉人執邾子注+稱人以執 惡及民也 하다
公至自伐齊注+無傳 하다
[經]取邾田하야 自漷水注+取邾田 以漷水爲界也 漷水出東海合鄕縣 西南經魯國至高平湖陸縣入泗 하다
[經]季孫宿如晉하다
[經]葬曹成公注+無傳 하다
[經]夏 衛孫林父帥師伐齊하다
[經]秋七月辛卯 齊侯環卒注+世子光三與魯同盟 하다
[經]晉士匄帥師侵齊하야 至穀하야 聞齊侯卒하고 乃還注+詳錄所至及還者 善得禮 하다
[經]八月丙辰 仲孫蔑卒注+無傳 하다
[經]齊殺其大夫高厚하다
[經]鄭殺其大夫公子嘉하다
[經]冬 葬齊靈公注+無傳 하다
[經]城西郛注+魯西郭 하다
[經]叔孫豹會晉士匄于柯注+魏郡內黃縣東北有柯城 하다
[經]城武城注+泰山南武城縣
[傳]十九年春 諸侯還自沂上하야 盟于督揚曰 大毋侵小注+督揚 卽祝柯也 하라
[傳]執邾悼公하니 以其伐我故注+伐魯在十七年
遂次于泗上하여 疆我田注+正邾魯之界也 泗 水名 할새 取邾田하야 自漷水歸之于我注+邾田在漷水北 今更以漷爲界 故曰取邾田 하고 晉侯先歸하다
公享晉六卿于蒲圃注+六卿過魯 할새 賜之三命之服하고 軍尉司馬司空輿尉候奄 注+如鞍戰還之賜 唯無先輅 하다
賄荀偃束錦乘馬호되 先吳壽夢之鼎注+荀偃 中軍元帥 故特賄之 五匹爲束 四馬爲乘 壽夢 吳子乘也 獻鼎於魯 因以爲名 古之獻物 必有以先 今以璧馬爲鼎之先 하다
荀偃癉疽하야 生瘍於頭注+癉疽 惡創 [附注] 林曰 瘍疽屬在頭曰瘍 荀偃旣患惡創 又生瘍於頭 러니 濟河하야 及著雍注+[附注] 林曰 及著雍之地 하야하야 目出注+[附注] 林曰 因病痛而目睛努出 하니 大夫先歸者皆反注+[附注] 林曰 晉大夫之先歸者皆反見 하다
士匄請見하니 弗內하고 請後하니注+士匄 中軍佐 故問後也 鄭甥 荀吳 其母鄭女 라하다
二月甲寅 하다
注+目開口噤 [附注] 朱曰 目不閉 口噤不受飯 이라
宣子盥而撫之曰 事吳 敢不如事主릿가 猶視注+大夫稱主 [附注] 林曰 言不合其心 目猶開視 하다
欒懷子曰 其爲未卒事於齊故也乎注+懷子 欒盈 아하고 乃復撫之曰 主苟終 所不嗣事于齊者 有如河라하니 乃瞑하고 受含注+嗣 續也 [附注]하다
宣子出曰 吾淺之爲丈夫也注+自恨以私待人 [附注] 朱曰 自愧以私心度荀偃謂念其子而不瞑目也 라하다
[傳]欒魴帥師從衛孫文子伐齊注+爲懷子之言故也 欒魴 欒氏族 不書 兵幷林父 不別告也 經書夏 從告 하다
[傳]季武子如晉拜師注+謝討齊 하니 晉侯享之하다
范宣子爲政注+代荀偃將中軍 이러니 賦黍苗注+黍苗 詩小雅 美召伯勞來諸侯 如陰雨之長黍苗也 喩晉君憂勞魯國 猶召伯 한대 季武子興하야 再拜稽首曰
小國之仰大國也 如百穀之仰膏雨焉하니 若常膏之 其天下輯睦하리니 豈唯敝邑이리오하고 賦六月注+六月 尹吉甫佐天子征伐之詩 以晉侯比吉甫 出征以匡王國 하다
季武子以所得於齊之兵作林鐘하야 而銘魯功焉注+林鐘 律名 鑄鐘 聲應林鐘 因以爲名 [附注] 林曰 銘魯國勝齊之功 한대 臧武仲謂季孫曰 非禮也注+[附注] 朱曰 武仲 臧孫紇也
夫銘 注+天子銘德不銘功 하고 諸侯言時計功注+擧得時 動有功 則可銘也 하고 大夫稱伐注+銘其功伐之勞 이라 今稱伐이면 則下等也注+從大夫故
計功이면 則借人也注+借晉力也 言時 則妨民多矣注+[附注] 朱曰 妨民農務 何以爲銘이리오
且夫大伐小하고 取其所得하야 以作彝器注+彝 常也 謂鐘鼎爲宗廟之常器 하야 銘其功烈하야 以示子孫 昭明德而懲無禮也注+[附注] 朱曰 一則以昭吾國之明德 一則以懲敵國之無禮 어늘 今將借人之力以救其死하니 若之何銘之리오
小國幸於大國注+以勝大國爲幸 하야 而昭所獲焉以怒之 亡之道也注+爲城西郛武城傳
[傳]齊侯娶于魯하니 曰 顔懿姬 無子하고
其姪鬷聲姬生光하니 以爲大子注+兄子曰姪 顔鬷皆二姬母姓 因以爲號 懿聲皆諡 하다
諸子仲子戎子 戎子嬖注+諸子 諸妾姓子者 二子 皆宋女 하니 仲子生牙하야 屬諸戎子注+屬 託之 [附注] 林曰 仲子以戎子嬖幸 故以所生子託之 하다
戎子請以爲大子하니 許之注+齊侯許之 하다
仲子曰 不可하다
廢常이니 不祥注+廢立嫡之常 이오 間諸侯注+事難成也 [附注] 林曰 間諸侯之列 事難成也 이라
光之立也하야 注+列諸侯之會 어늘 今無故而廢之 注+謂光已有諸侯之尊 而以難犯不祥也 君必悔之리다
公曰 在我而已라하고 遂東大子光注+廢而徙之東鄙 하고 使高厚傅牙하야 以爲大子하고 夙沙衛爲少傅하다
齊侯疾 崔杼微逆光하야 하다
光殺戎子注+終言之 [附注] 林曰 崔杼使微服迎故大子光 靈公疾病 而立光以爲君 光怨戎子廢己 故殺之 하야 尸諸朝하니 非禮也
注+無黥刖之刑 이오 雖有刑이라도 不在朝市注+謂犯死刑者 猶不暴尸
夏五月壬辰晦 齊靈公卒注+經書七月辛卯 光定位而後赴 하니 莊公卽位注+大子光也 하다
執公子牙於句瀆之丘하다
以夙沙衛易己라하니 衛奔高唐以叛注+光謂衛敎公易己 高唐在祝柯縣西北 하다
[傳]晉士匄侵齊하야 及穀이라가 聞喪而還하니 禮也注+禮之常 不必待君命 [附注] 林曰 禮不伐喪 故善其還師 不待君命
[傳]於四月丁未注+於此年四月 鄭公孫蠆卒하니 赴於晉大夫하다
范宣子言於晉侯하니 以其善於伐秦也注+十四年晉伐秦 子蟜見諸侯師 而勸之濟涇
六月 晉侯請於王한대 王追賜之大路하야 使以行하니 禮也注+大路 天子所賜車之總名 以行葬禮 傳言大夫有功 則賜服路
[傳]秋八月 齊崔杼殺高厚於灑藍하고 而兼其室注+灑藍 齊地 하다
書曰齊殺其大夫라하니 從君於昏也注+傳解經不言崔杼殺 而爲國討文 [附注] 林曰 以高厚從靈公昏謬之政 廢光立牙 不能諫止故也
[傳]鄭子孔之爲政也專注+專權 하니 國人患之하야 乃討西宮之難注+十年 尉止等作難西宮 子孔知而不言 與純門之師注+前年 子孔召楚師至純門 하다
子孔當罪하니 以其甲及子革子良氏之甲守注+以自守也 하다
甲辰子展子西帥國人伐之하야 殺子孔而分其室하다
書曰鄭殺其大夫라하니 專也注+亦以國討爲文
子然子孔 宋子之子也注+子然 子革父 士子孔 圭嬀之子也注+宋子圭嬀 皆鄭穆公妾 士子孔 子良父
圭嬀之班亞宋子하야 而相親也注+亞 次也 하니 子孔 注+[附注] 林曰 二母相愛 故士子孔與子然子孔 亦甚相親愛 하다
僖之四年 子然卒注+鄭僖四年 魯襄六年 하고 簡之元年 士子孔卒注+魯襄八年 하니 實相子革子良之室注+司徒孔與二父相親 故相助其子 [附注] 林曰 司徒孔 卽子孔 하야 三室如一注+言同心 하다
故及於難注+故二子幷及難 하니라
子革子良出奔楚러니 子革爲右尹注+子革 卽鄭丹 하다
鄭人使子展當國하고 子西聽政하고 立子産爲卿注+簡公猶幼 故大夫當國 하다
[傳]齊慶封圍高唐하야 弗克注+夙沙衛以叛 故圍之 하니 冬十一月 齊侯圍之하다
見衛在城上하고 號之하니 乃下注+衛下與齊侯語 하다
問守備焉한대 以無備告어늘
注+齊侯以衛告誠 揖而禮之 欲生之也 衛志於戰死 故不齊侯之揖 而還登城 하다
聞師將傅하고注+[附注] 林曰 聞齊師將會食 高唐人
이어늘
注+因其會食 二子 齊大夫 하야 醢衛于軍注+[附注] 林曰 執夙沙衛醢之以爲葅 하다
[傳]城西郛하니 懼齊也注+前年與晉伐齊 又鑄其器爲鐘 故懼
[傳]齊及晉平하야 盟于大隧注+大隧 地闕 하다
故穆叔會范宣子于柯注+齊晉平 魯懼齊 故爲柯會以自固 하다
穆叔見叔向하고 賦載馳之四章注+四章曰 控于大邦 誰因誰極 控 引也 取其欲引大國以自救助 하니 叔向曰 肸敢不承命注+叔向度齊未肯以盟服 故許救魯 이리오
穆叔歸曰 注+[附注] 林曰 齊猶未服於晉 不可以不懼라하고 乃城武城하다
[傳]衛石共子卒注+石買 悼子不哀注+買之子石惡 하니 孔成子曰 注+蹶 猶拔也 이니 必不有其宗注+爲二十八年石惡出奔傳 하리라


19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제후諸侯축가祝柯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제후諸侯전년前年나라를 토벌討伐제후諸侯이다. 축가현祝柯縣이 지금은 제남군濟南郡하였다.
진인晉人주자邾子구금拘禁하였다.注+’이 (拘禁)하였다고 한 것은 주자邾子악행惡行이 백성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양공襄公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나라의 땅을 하여 곽수漷水경계境界로 삼았다.注+나라의 땅을 하여 곽수漷水경계境界로 삼은 것이다. 곽수漷水동해東海합향현合鄕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나라를 경유經由하여 고평高平호륙현湖陸縣에 이르러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계손숙季孫宿나라에 갔다.
조성공曹成公장사葬事 지냈다.注+이 없다.
여름에 나라 손임보孫林父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였다.
가을 7월 신묘일辛卯日제후齊侯하였다.注+나라 세자世子이 세 차례 나라와 동맹同盟하였다.
나라 사개士匄가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침공侵攻하여 곡읍穀邑에 이르러 제후齊侯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돌아왔다.注+이른 곳과 돌아온 것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에 맞은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8월 병진일丙辰日중손멸仲孫蔑하였다.注+이 없다.
나라가 그 대부大夫고후高厚를 죽였다.
나라가 그 대부大夫공자公子를 죽였다.
겨울에 제영공齊靈公장사葬事 지냈다.注+이 없다.
서성西城외곽外郭수축修築하였다.注+나라 서곽西郭이다.
숙손표叔孫豹나라 사개士匄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위군魏郡내황현內黃縣 동북쪽에 가성柯城이 있다.
무성武城을 쌓았다.注+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무성현武城縣이다.
19년 봄에 제후諸侯기수沂水 가에서 돌아와 독양督揚에서 맹약盟約하기를 “대국大國소국小國침범侵犯하지 말라.”고 하였다.注+독양督揚은 바로 축가祝柯이다.
주도공邾悼公구금拘禁하였으니 그가 우리나라를 침벌侵伐하였기 때문이었다.注+나라가 나라를 친 일은 양공襄公 17년에 있었다.
진군晉軍은 드디어 사수泗水 가에 주둔駐屯하여 우리나라 영토領土경계境界획정劃定하면서注+나라와 나라의 경계境界를 바로잡은 것이다. 수명水名이다. 주전邾田(邾나라 땅)을 하여 곽수漷水이북以北의 땅을 우리나라에 귀속歸屬시키고서注+주전邾田곽수漷水이북以北에 있는 땅이다. 지금 다시 곽수漷水경계境界로 삼았기 때문에 ‘주전邾田하였다.’고 한 것이다. 진후晉侯는 먼저 귀국歸國하였다.
양공襄公포포蒲圃에서 나라 육경六卿접대接待하며注+나라 육경六卿나라를 방문訪問[過]하였기 때문이다.삼명三命거복車服하사下賜하고, 군위軍尉사마司馬사공司空여위輿尉후엄候奄도 모두 일명一命거복車服을 받았다.注+전쟁戰爭에서 돌아왔을 때 하사下賜한 것과 같이 주었고, 단지 선로先路(수레 이름)만이 없을 뿐이다.
순언荀偃에게는 속금束錦가벽加璧승마乘馬를 먼저 주고 이어 나라 수몽壽夢을 주었다.注+순언荀偃중군中軍원수元帥였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히 재화財貨를 준 것이다. 비단 다섯 필이 ‘’이고, 말 네 필이 ‘’이다. 수몽壽夢오자吳子(吳君) 이다. 수몽壽夢나라에 을 바쳤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라 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옛날에 남에게 물건을 바칠 때 반드시 한 것을 바치기에 앞서 가벼운 것을 먼저 바쳤다. 그러므로 지금 옥벽玉璧과 말[馬]을 에 앞서 준 것이다.
순언荀偃악성종양惡性腫瘍을 앓아 머리에 종기腫氣가 났는데,注+단저癉疽악창惡瘡(惡性腫瘍)이다. [부주]林: 머리에 나는 종기腫氣를 ‘’이라 한다. 순언荀偃이 이미 악창惡瘡을 앓았는데, 또 머리에 종기腫氣가 난 것이다. 하수河水를 건너 저옹著雍에 이르러注+[부주]林: 저옹著雍 땅에 도착到着한 것이다. 종기腫氣가 심해져서 눈이 튀어나오니,注+[부주]林: 병통病痛(疾病)으로 인해 눈알이 튀어나온 것이다. 먼저 돌아갔던 대부大夫들이 모두 되돌아왔다.注+[부주]林: 먼저 돌아갔던 나라 대부大夫들이 모두 되돌아와서 본 것이다.
사개士匄가 뵙기를 하니 들이지 않고, 후계자後繼者를 물으니 ‘정생鄭甥을 세우라.’注+사개士匄중군좌中軍佐였기 때문에 순언荀偃에게 후계자後繼者를 물은 것이다. 정생鄭甥순오荀吳(荀偃의 아들)인데, 그 어머니는 나라 여자女子이다. 고 하였다.
2월 갑인일甲寅日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입을 굳게 다물어 반함飯含을 할 수 없었다.注+눈은 뜨고 입은 다문 것이다. [부주]朱: 눈은 감지 않고 입은 다물어 반함飯含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선자宣子가 손을 씻고서 순언荀偃시체屍體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순오荀吳 섬기기를 어찌 감히 (荀偃을 이름) 섬기듯이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여전히 눈을 감지 않았다.注+대부大夫를 ‘’라 한다. [부주]林: 사개士匄의 말이 순언荀偃의 마음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눈을 여전히 뜨고 있는 것이다.
난회자欒懷子가 말하기를 “나라 치는 일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注+회자懷子난영欒盈이다. 라고 하고, 다시 그 시체屍體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께서 돌아가신 뒤에 만약 의 뒤를 이어 나라를 토벌討伐하지 않는다면 하수河水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곧 눈을 감고 입을 벌려 반함飯含을 받았다.注+계속繼續이다. [부주]林: 순언荀偃이 진실로 죽더라도 뒤를 이어 나라 정벌征伐하는 일을 이루지 않는다면 하수河水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선왈先曰 그 눈을 비로소 감고 그 입을 비로소 다물어 반함飯含을 받아들인 것이다.
선자宣子가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대장부大丈夫를 안 것이 참으로 천박淺薄하였다.”注+사심私心으로 사람을 대우待遇한 것을 스스로 한탄恨歎한 것이다. [부주]朱: 사심私心으로 순언荀偃이 그 아들을 염려念慮해 눈을 감지 못한 것으로 여긴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이다. 고 하였다.
난방欒魴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 손문자孫文子를 따라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회자懷子의 말 때문이다. 난방欒魴난씨欒氏족속族屬이다. 난방欒魴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의 군대를 손임보孫林父의 군대에 통합統合시키고 따로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 ‘’로 기록한 것은 통고通告에 따른 것이다.
계무자季武子나라에 가서 나라를 위해 출병出兵해 준 것에 대해 배사拜謝하니,注+나라를 토벌討伐한 것에 대해 배사拜謝한 것이다.진후晉侯연회宴會를 열어 접대하였다.
이때 범선자范宣子국정國政을 담당하였는데注+순언荀偃의 뒤를 이어 중군中軍을 거느린 것이다. 서묘편黍苗篇〉을 읊자,注+서묘黍苗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소백召伯제후諸侯노래勞來(恩德으로 위로慰勞해 오게 함)한 것이 마치 비가 기장 싹을 자라게 한 것과 같다고 찬미讚美인데, 진군晉君나라를 위해 근심하고 괴로워한 것이 소백召伯과 같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계무자季武子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소국小國대국大國에게 기대期待하는 것이 백곡百穀이 단비를 기대하는 것과 같으니, 만약 항상 단비와 같은 은택恩澤을 내려 주신다면 천하天下화목和睦할 것이니 어찌 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유월편六月篇〉을 읊었다.注+유월六月(《시경詩經》 〈소아小雅〉)은 윤길보尹吉甫천자天子보좌輔佐정벌征伐한 것을 서술敍述인데, 진후晉侯출정出征왕국王國을 바로잡은 윤길보尹吉甫에 비유한 것이다.
계무자季武子나라와의 전쟁戰爭에서 노획鹵獲병기兵器를 녹여 임종林鐘을 만들어 나라의 무공武功을 새기려 하자,注+임종林鐘(六律 육려六呂)의 이름이다. 주조鑄造의 소리가 임종林鐘에 맞으므로 이로 인해 임종林鐘으로 명칭名稱을 붙인 것이다. [부주]林: 나라가 나라를 이긴 을 새기려 한 것이다. 장무중臧武仲계손季孫에게 말하기를 “가 아닙니다.注+[부주]朱: 무중武仲장손흘臧孫紇이다.
명문銘文천자天子는 아름다운 덕행德行하고,注+천자天子덕행德行을 새기고 공적功績을 새기지 않는다. 제후諸侯거동擧動한 때를 말하고 이룬 하고,注+거행擧行한 일이 때에 맞고 거동擧動하여 이 있으면 새길 수 있다. 대부大夫정벌征伐한 일을 하는 것이니,注+공적功績을 세운 노고를 새기는 것이다. 지금 정벌征伐하면 대부大夫등급等級을 낮추는 것입니다.注+대부大夫를 따르기 때문이다.
공로功勞를 계산하면 남에게 힘을 빌린 것이고,注+나라의 힘을 빌린 것이다. 거동擧動한 때를 말하면 농사農事방해妨害한 것이 많으니,注+[부주]朱: 백성들의 농사農事방해妨害한 것이다. 무어라고 명문銘文을 짓겠습니까?
대국大國소국小國정벌征伐하여 노획鹵獲병기兵器이기彝器(宗廟에 상용常用하는 그릇)를 만들어注+이니, 종묘宗廟상용常用하는 그릇임을 이른 것이다. 공적功績을 새겨 자손子孫에게 보이는 것은 자기의 밝은 선양宣揚하고 적국敵國무례無禮징벌懲罰하기 위함인데,注+[부주]朱: 하나는 우리의 밝은 선양宣揚하기 위함이고, 하나는 적국敵國무례無禮징벌懲罰하기 위함이다. 지금 남의 힘을 빌려 죽음을 구제救濟하였으니, 어찌 이것을 명문銘文으로 새길 수 있겠습니까?
소국小國대국大國을 이긴 것을 다행으로 여겨注+대국大國을 이긴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노획물鹵獲物과시誇示하여 대국大國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注+서부西郛무성武城을 쌓은 의 배경이다. 고 하였다.
제후齊侯(靈公)가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 이름이 안의희顔懿姬인데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그 조카딸 종성희鬷聲姬을 낳으니, 제후齊侯는 그를 태자太子로 삼았다.注+의 자식을 ‘조카’라 한다. 은 모두 두 희녀姬女모성母姓이므로 인하여 로 삼은 것이다. 은 모두 이다.
제자諸子(姓이 자씨子氏인 여러 ) 중에 중자仲子융자戎子가 있었는데 융자戎子총애寵愛를 받으니,注+제자諸子자씨子氏을 가진 제첩諸妾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나라 여자女子이다. 중자仲子는 아들 를 낳아 융자戎子에게 맡겼다.注+은 부탁하는 것이다. [부주]林: 융자戎子총애寵愛를 받기 때문에 중자仲子는 자기의 아들을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융자戎子제후齊侯에게 태자太子로 삼기를 하니 제후齊侯허락許諾하였다.注+제후齊侯허락許諾한 것이다.
그러자 중자仲子제후齊侯에게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상도常道를 버리는 것이니 상서롭지 못하고注+적자嫡子를 세우는 상도常道폐기廢棄하는 것이다. 제후諸侯[間]하는 것이니 성공成功하기 어렵습니다.注+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다. [부주]林: 제후諸侯에 참여한 사람을 [間]하는 것은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 이미 태자太子로 서서 〈나라를 대표代表회맹會盟에 참가해〉 제후諸侯에 끼었는데,注+제후諸侯회맹會盟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지금 까닭 없이 그를 한다면 이는 멋대로 행동하여 제후諸侯를 얕보는[黜] 것이고,注+에게 이미 제후諸侯존귀尊貴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루기 어려운 일로 상서롭지 못함을 하는 것이니, 께서는 반드시 후회後悔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제영공齊靈公은 “이 일은 나에게 달렸을 뿐이다.”고 하고서, 드디어 태자太子을 동쪽 변읍邊邑으로 보내고,注+폐출廢黜해 그를 동쪽 변읍邊邑으로 옮긴 것이다. 태자太子로 삼고서 고후高厚태부太傅로, 숙사위夙沙衛소부少傅로 삼았다.
제후齊侯을 앓자, 최저崔杼은밀隱密을 맞이해 와서 제후齊侯위독危篤하자 그를 다시 태자太子로 세웠다.
융자戎子를 죽여注+제후齊侯(靈公)가 죽은 뒤의 일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최저崔杼가 사람을 보내어 미복微服(變裝)하고 가서 태자太子을 맞아 오게 하여, 영공靈公위중危重하자 을 세워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융자戎子가 자기를 폐출廢黜한 것을 원한怨恨하였기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다. 시체屍體조정朝廷진열陳列하였으니 가 아니다.
부인婦人에게는 시행施行하는 형률刑律이 없고,注+경형黥刑(刺字)과 월형刖刑이 없다는 말이다. 비록 사형死刑한다 하더라도 그 시체屍體시장市場이나 조정朝廷진열陳列하지 않는다.注+사죄死罪하여 사형死刑해진 자라 하더라도 시체屍體를 늘어놓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름 5월 그믐 임진일壬辰日제영공齊靈公하니注+에 7월 신묘일辛卯日로 기록한 것은 군위君位한 뒤에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이다. 장공莊公즉위卽位하였다.注+장공莊公태자太子이다.
구독句瀆의 언덕에서 공자公子체포逮捕하였다.
장공莊公숙사위夙沙衛가 자기를 폐출廢黜되게 하였다고 여기니, 숙사위夙沙衛고당高唐으로 달아나서 배반背叛하였다.注+숙사위夙沙衛영공靈公에게 자기를 바꾸도록 가르쳤다고 여긴 것이다. 고당高唐축가현祝柯縣 서북쪽에 있다.
나라 사개士匄나라를 침공侵攻하여 에 이르렀다가 나라에 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환군還軍하였으니 에 맞았다.注+을 듣고 환군還軍하는 것은 상경常經(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不變도리道理)이므로 임금의 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부주]林: 이 난 나라를 토벌討伐하지 않는 것이 이기 때문에 사개士匄군명君命을 기다리지 않고 환군還軍한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4월 정미일丁未日注+이해 4월에 한 것이다.나라 공손公孫(子蟜)가 하니 나라 대부大夫에게 부고赴告하였다.
범선자范宣子진후晉侯에게 그의 죽음을 말하였으니, 이는 그가 나라 정벌征伐을 세운 것을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이다.注+양공襄公 14년에 나라가 나라를 토벌討伐할 때 자교子蟜제후군諸侯軍을 보고서 경수涇水를 건너도록 하였다.
6월에 진후晉侯주왕周王하자, 주왕周王이 그에게 대로大路추사追賜하여 장례葬禮거행擧行하게 하였으니 에 맞았다.注+대로大路천자天子하사下賜하는 수레의 총칭總稱이다. 그 수레로 장례葬禮를 거행하게 한 것이다. 전문傳文이 있는 대부大夫에게 복로服路(王事에 종사從事하는 자가 타는 수레)를 하사下賜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을 8월에 나라 최저崔杼쇄람灑藍에서 고후高厚를 죽이고서 그의 가산家産겸병兼倂하였다.注+쇄람灑藍나라 땅이다.
에 ‘나라가 그 대부大夫를 죽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고후高厚가 임금의 혼류昏謬(도리에 어긋남)한 을 따랐기 때문이다.注+전문傳文최저崔杼가 죽였다고 말하지 않고 국토國討(國家가 죽임)로 글을 만든 이유를 해석解釋한 것이다. [부주]林: 고후高厚영공靈公혼류昏謬정령政令순종順從하여 하고 를 세우는 것을 하여 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 자공子孔집정執政이 되어 국정國政전횡專橫하니注+정권政權을 마음대로 부린 것이다.나라 사람들은 이를 걱정하여 서궁西宮반란叛亂注+양공襄公 10년에 위지尉止 등이 서궁西宮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켰을 때에 자공子孔은 그 일을 사전事前에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 순문純門전쟁戰爭추구追咎(지난 추궁追窮함)하였다.注+전년前年자공子孔초군楚軍을 불러 순문純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자공子孔행위行爲해당該當한 것으로 판명判明되니 자공子孔은 자기의 갑사甲士자혁子革자량씨子良氏갑사甲士를 거느리고서 자신을 보위保衛하였다.注+갑사甲士를 거느리고서 자신을 지킨 것이다.
갑진일甲辰日자전子展자서子西국인國人을 거느리고 토벌討伐하여 자공子孔을 죽이고서 그 가산家産을 나누어 가졌다.
에 ‘나라가 그 대부大夫를 죽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가 국정國政전횡專橫하였기 때문이었다.注+이 또한 국토國討로 글을 만들었다.
자연子然자공子孔송자宋子의 아들이고注+자연子然자혁子革의 아버지이다.사자공士子孔규규圭嬀의 아들이다.注+송자宋子규규圭嬀는 모두 정목공鄭穆公이다. 사자공士子孔자량子良의 아버지이다.
규규圭嬀서열序列송자宋子의 다음이어서 서로 하였으므로注+는 버금이다. 자공子孔도 서로 하였다.注+[부주]林: 두 어머니들이 서로 친애親愛했기 때문에 사자공士子孔자연子然자공子孔과 매우 서로 친애親愛한 것이다.
정희공鄭僖公 4년에 자연子然이 죽고注+정희공鄭僖公 4년은 노양공魯襄公 6년이다. 정간공鄭簡公원년元年사자공士子孔이 죽자注+노양공魯襄公 8년이다. 사도司徒자공子孔자혁子革자량子良의 집을 도와注+사도司徒이 두 사람의 아버지와 서로 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들을 도운 것이다. [부주]林: 사도司徒은 바로 자공子孔이다. 세 집이 한 집처럼 친밀親密하게 지냈다.注+한마음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난禍難에 미친 것이다.注+그러므로 두 사람도 함께 화난禍難에 미쳤다는 말이다.
자혁子革자량子良나라로 출분出奔하였는데, 자혁子革나라의 우윤右尹이 되었다.注+자혁子革은 바로 정단鄭丹이다.
정인鄭人자전子展에게 국정國政주재主宰하게 하고, 자서子西에게 정무政務처리處理하게 하고, 자산子産을 세워 으로 삼았다.注+정간공鄭簡公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대부大夫국정國政주재主宰한 것이다.
나라 경봉慶封고당高唐포위包圍하여 이기지 못하니,注+숙사위夙沙衛고당高唐 사람들을 거느리고 배반背叛하였기 때문에 고당高唐포위包圍한 것이다. 겨울 11월에 제후齊侯고당高唐을 포위하였다.
숙사위夙沙衛성상城上에 있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부르니 그가 내려왔다.注+숙사위夙沙衛에서 내려와 제후齊侯와 말을 한 것이다.
제후齊侯숙사위夙沙衛에게 수비守備상황狀況을 물으니 수비守備가 없다고 고하였다.
제후齊侯을 하니 숙사위夙沙衛하고서 으로 올라갔다.注+제후齊侯숙사위夙沙衛성실誠實하게 하므로 하고 예우禮遇하여 그를 살려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숙사위夙沙衛전사戰死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제후齊侯순종順從하지 않고 도로 으로 올라간 것이다.
숙사위夙沙衛제군齊軍공격攻擊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고당高唐 사람들에게 음식을 배불리 먹였다.注+[부주]林: 제군齊軍이 장차 회식會食(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음)하려 한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식작殖綽공루회工僂會가 밤에 밖으로 밧줄을 늘어뜨려 제군齊軍으로 들어오게 하여注+고당인高唐人회식會食하는 기회機會이용利用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숙사위夙沙衛를 잡아 군중軍中에서 젓을 담갔다.注+[부주]林: 숙사위夙沙衛를 잡아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근 것이다.
서쪽 외곽外郭성벽城壁수축修築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보복報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注+전년前年나라와 함께 나라를 토벌討伐하였고, 또 노획鹵獲병기兵器를 녹여 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라가 보복報復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나라가 나라와 화평和平하고서 대수大隧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대수大隧소재지所在地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목숙穆叔범선자范宣子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나라가 나라와 화평和平하니, 나라는 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에서 회합會合하여 스스로 고수固守방책方策강구講究한 것이다.
목숙穆叔숙향叔向을 만나 〈재치載馳〉의 넷째 을 읊으니注+4에 말하기를 “큰 나라를 끌어들이고 싶지만 어떤 나라에 의지[因]하고 어떤 나라에 가야[極] 하나.”라고 하였다. 이니, 대국大國후원국後援國으로 끌어들여 자기 나라를 구조救助하게 하고자 한 뜻을 한 것이다.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을 받들지 않겠습니까?”注+숙향叔向나라가 결맹結盟했다 하여 나라에 복종服從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라를 구원救援하겠다고 허락許諾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목숙穆叔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나라는 여전히 침벌侵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니注+[부주]林: 나라는 여전히 나라에 복종服從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서 무성武城을 쌓았다.
나라 석공자石共子의 죽음에注+석공자石共子석매石買이다. 그 아들 도자悼子가 슬퍼하지 않으니,注+도자悼子석매石買의 아들 석악石惡이다. 공성자孔成子가 말하기를 “이를 일러 그 근본을 뽑아 버리는 짓이라 하니,注+(뽑음)과 같다. 반드시 그 종족宗族보유保有하지 못할 것이다.”注+양공襄公 28년에 석악石惡출분出奔의 배경이다. 고 하였다.


역주
역주1 皆受一命之服 : 成公 2년에 晉軍이 魯나라를 위해 鞍(齊나라 땅)에서 齊軍을 擊破하고서 齊나라에게 汶陽 땅을 魯나라에 되돌려 주게 하였을 때 成公은 晉나라의 세 將帥에게는 先路와 三命의 命服을 내리고, 司馬 등 官員에게는 一命의 命服을 내렸다. 〈成公二年七月傳〉
역주2 加璧 : 加璧은 비단에 玉璧을 얹은 것이다.
역주3 鄭甥 : 鄭甥은 鄭出(鄭나라 여자가 낳은 아들)이라는 말과 같다. 荀吳의 어머니가 鄭나라 女子였기 때문에 荀吳를 ‘鄭甥’이라고 한 것이다. 〈楊注〉
역주4 卒而視 不可含 : 荀偃이 죽은 뒤에 눈은 뜨고 입은 다문 것이다. 옛날에 珠玉과 米貝 따위를 死者의 입 안에 넣는 것을 ‘含’이라 하였다. 〈楊注〉
역주5 林曰 言荀偃苟死……其口始合而受飯含 : 이 林注는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先曰’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고, 또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飯含하지 못한 것인데 ‘비로소 입을 다물어 飯含을 받아들였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 글에는 아마도 闕文과 誤字가 있는 듯하다.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는 “荀偃이 病으로 눈이 튀어나왔으니, 처음 죽었을 때는 그 눈이 감기지 않았다가 屍身이 식자 눈이 감긴 것이지 죽은 자가 아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다.”고 한 桓譚의 말을 紹介하고서, 傳에 이를 기록한 것은 異常한 것을 기록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역주6 天子令德 : 杜注에 令德의 令字를 해석하지 않은 것은 해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銘德’은 令德(아름다운 덕)을 새기는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7 列於諸侯矣 : 襄公 3년에 거행한 雞澤의 同盟과 5년에 거행한 戚의 會合과 또 陳나라의 救援과 9년에 鄭나라를 치고서 거행한 戲의 同盟과 10년에 거행한 柤의 會合과 11년에 鄭나라를 치고서 거행한 亳城의 同盟 및 蕭魚의 會合에 太子光이 모두 참여하였기 때문에 ‘列於諸侯’라고 한 것이다. 〈楊注〉
역주8 是專黜諸侯 : 光이 자주 諸侯의 征伐과 會盟에 참여하였으니, 諸侯들로부터 이미 齊나라의 太子임을 公認받은 것인데, 지금 그를 廢한다면 이는 멋대로 행동하여 諸侯를 얕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玉篇〉에 “黜은 下이다.”고 하였다고 한 〈楊注〉의 설을 취해 ‘黜’을 下視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9 疾病而立之 : 立之는 光을 다시 太子로 세운 것이고 임금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下文에 ‘莊公卽位’라고 한 것이다. 光을 太子로 세운 것과 戎子를 죽인 일이 모두 齊侯의 病中에 일어난 일인데, 杜注에 ‘終言之’라 한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아비가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라면 下文의 ‘卽位’ 아래에 기록했을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10 婦人無刑 : 無刑은 오로지 婦女에게만 適用하기 위해 制定한 刑罰條項이 없다는 말이다. 古代에는 五刑 중에 오직 宮刑만이 男女에 適用하는 것이 달랐고, 나머지는 모두 男子의 處罰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婦女에게 罪가 있으면 男子의 罪刑에 비추어 處決하였다. 〈楊注〉
역주11 士[二]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士[二]子孔 亦相親也 : 두 子孔은 바로 公子嘉와 公子志로 배다른 兄弟이다. 그 어머니들이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들도 서로 친했다는 말이다. 〈楊注〉
역주13 司徒孔 : 襄公 10년에 子駟가 鄭나라의 國政을 主宰할 때 子孔이 司徒였기 때문에 ‘司徒孔’이라 한 것이다. 〈楊注〉
역주14 揖之 乃登 : 〈楊注〉에 “옛사람은 남을 나아오게 하거나 남과 헤어지거나 할 때 모두 揖을 하였다. 齊侯가 夙沙衛에게 揖을 하니 그도 答禮로 揖을 한 뒤에 城으로 올라간 것이다.”고 하였으니, 杜注에 “그를 살려 주고자 한 것이다.”고 한 말은 事理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역주15 須[順] : 저본에는 ‘須’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順’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聞師將傅 食高唐人 : 傅는 城 밑에 바싹 붙는 것이니, 곧 攻擊의 뜻인데, 林注에 食를 위로 붙여 句를 떼어 會食으로 解釋한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齊軍이 城을 攻擊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夙沙衛가 齊軍의 攻擊을 防禦하기 위해 高唐人들을 배불리 먹인 것이다.
역주17 殖綽工僂會夜縋納師 : 夙沙衛가 밤에 高唐人을 모아 놓고 飮食을 먹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몰래 들어가 밧줄을 성 밖으로 늘어뜨린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18 齊猶未也 : 侵伐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라고 한 〈楊注〉의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역주19 是謂蹶其本 : 어버이는 내 몸의 근본이니 어버이를 잊는 것은 바로 근본을 뽑아 버리는 것이다. 《左氏會箋》

춘추좌씨전(4)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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