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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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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元年春王正月 公卽位注+嗣子位定於初喪 而改元必須踰年者 繼父之業 成父之志 不忍有變於中年也 諸侯每首歲 必有禮於廟 諸遭喪繼位者 因此而改元正位 百官以序 故國史亦書卽位之事於策 桓公簒立 而用常禮 欲自同於遭喪繼位者 釋例論之備矣 [附注] 林曰 春秋自隱至文 六君 惟桓文書卽位 亦惟桓文書錫命 請命之禮 廢矣 成公以後 皆書卽位 而無錫命 王室感諷諸侯之意 不復講也하다
[經]三月 公會鄭伯于垂하니 鄭伯以璧假許田하다
[經]夏四月丁未 公及鄭伯盟于越注+公以簒立 而修好於鄭 鄭因而迎之 成禮於垂 終易二田 然後結盟 垂 犬丘 衛地也 越 近垂地名 鄭求祀周公 魯聽受祊田 令鄭廢泰山之祀 知其非禮 故以壁假爲文 時之所隱하다
[經]秋 注+書 災也 傳例曰 凡平原出水爲大水하다
[經]冬十月이라
[傳]元年春 公卽位하야 修好于鄭注+[附注] 林曰 修隱公之好于鄭하다
鄭人注+事在隱八年하니 公許之하다
三月 鄭伯以璧假許田하니 注+魯不宜聽鄭祀周公 又不宜易取祊田 犯二不宜以動 故隱其實 不言祊 稱壁假 言若進壁以假田 非久易也 [附注] 林曰 周公 祊 二事也
[傳]夏四月丁未 公及鄭伯盟于越하니 結祊成也注+結成易二田之事也 傳以經不書祊 故獨見祊
盟曰 渝盟注+渝 變也이면 無享國하리라
[傳]秋 大水하다
凡平原出水 爲大水注+廣平曰原
[傳]冬 鄭伯拜盟注+鄭伯若自來 則經不書 若遣使 則當言鄭人 不得稱鄭伯 疑謬誤 [附注] 林曰 拜謝于越之盟하다
[傳]宋華父督見孔父之妻于路注+華父督 宋戴公孫也 孔父嘉 孔子六世祖하고 目逆而送之注+[附注] 林曰 目迎其來 而送其去曰 美而豔注+色美曰豔이라


원년元年주왕周王 정월에 환공桓公이 즉위하였다.注+사자嗣子초상初喪군위君位에 오르지만 반드시 그 해가 넘기를 기다려 개원改元하는 것은 아비의 을 계승하고 아비의 뜻을 이루려면 차마 연중年中연도年度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제후諸侯는 매년 세수歲首에 반드시 종묘宗廟알현謁見하는 가 있으니, 을 당해 군위君位에 오른 자는 이때를 이용해 정식으로 즉위하여 개원改元하고 백관百官위차位次를 정한다. 그러므로 국사國史(나라의 사관史官)도 즉위한 일을 사책史策에 기록한다. 환공桓公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서 그 자리를 빼앗았으면서도 상례常禮를 사용하여 을 당해 군위君位를 계승한 것처럼 하고자 하였다. 즉위에 대한 는 《석례釋例》에 자세히 논하였다.[부주]林: 《춘추春秋》에 은공隱公에서 문공文公까지 여섯 임금 중에 오직 환공桓公문공文公에게만 즉위를 기록하고, 또 환공‧문공에게만 석명錫命을 기록한 것은 나라가 청명請命를 폐지하였기 때문이고, 성공成公 이후는 모두 즉위만 기록하고 석명이 없는 것은 왕실王室에서 제후諸侯감풍感諷(感化시키기 위해 완곡婉曲한 말로 권면勸勉함)하려는 뜻을 다시 강구講究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에 환공桓公정백鄭伯에서 회합하니, 정백이 팽읍祊邑(玉)을 더 얹어 주고서 허전을 가차假借하였다.
여름 4월 정미일에 환공桓公정백鄭伯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환공桓公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그 자리를 빼앗은 임금으로 나라에 수호修好를 요청하니, 정나라는 환공을 맞이하여 에서 회합會合를 마치고 마침내 허전許田팽전祊田을 바꾸고 나서 결맹結盟하였다. 견구犬丘이니 나라 땅이다. 근방의 지명이다. 정나라가 주공周公을 제사지내겠다고 요구하자, 나라는 팽전을 받아들여 나라로 하여금 태산泰山의 제사를 폐지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당시의 사관史官이 이를 숨기기 위해 ‘벽가璧假’(벽을 주고서 빌렸다.)로 글을 만든 것이다.
가을에 큰물이 졌다.注+이를 기록한 것은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례傳例에 “평원平原에 물이 솟는 것을 큰물이라 한다.”고 하였다.
겨울 10월이다.
원년 봄에 환공이 즉위하여 정나라와 수호修好하였다.注+[부주]林: 은공隱公 때에 맺은 나라와의 우호友好중수重修한 것이다.
정인鄭人이 다시 주공周公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거론하며 허전許田팽전祊田의 교환을 종결하자고 요청하니,注+이 일은 은공隱公 8년에 있었다. 환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3월에 정백鄭伯을 주고서 허전을 가차假借하였으니, 이는 주공周公 때문이었다.注+나라가 정나라에게 주공周公을 제사하도록 허락한 것도 부당하고, 또 허전을 팽전과 바꾼 것도 부당하다. 그런데 두 가지 부당不當함을 범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관史官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전을 팽전과 바꾸었다고 말하지 않고 벽을 주고 빌렸다고 칭하여, 마치 노나라에 을 바치고서 허전을 빌린 것이고 영원히 바꾼 것이 아닌 것처럼 말한 것이다.[부주]林: 두 가지 부당不當함은 주공周公을 제사하는 것과 허전을 팽전과 교환한 두 가지 일을 이름이다.
여름 4월 정미일에 환공桓公정백鄭伯에서 결맹하였으니, 이는 팽전祊田의 교환 문제를 종결終結하기 위함이었다.注+허전을 팽전과 바꾸는 일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특별히 을 드러낸 것이다.
맹서盟誓하기를 “이 맹약을 변경하면注+는 변경하는 것이다. 나라를 향유享有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가을에 큰물이 졌다.
평원平原에 물이 솟는 것을 큰물이라 한다.注+넓고 평탄한 곳을 이라 한다.
겨울에 정백鄭伯이 노나라에 와서 결맹에 대해 배사拜謝하였다.注+정백鄭伯이 만약 직접 온 것이라면 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사신을 보낸 것이라면 ‘정인鄭人’이라고 말해야 하고 정백鄭伯이라고 칭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오류誤謬가 있는 듯하다.[부주]林: 4월에 에서 결맹해 준 데 대해 배사拜謝한 것이다.
나라 화부독華父督공보孔父의 아내를 길에서 보고는注+화부독華父督송대공宋戴公의 손자이다. 공보가孔父嘉공자孔子의 6세조世祖이다. 눈으로 맞이해 눈으로 보내면서注+[부주]林: 그가 올 때부터 눈을 떼지 않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것이다. “아름답고도 곱구나.注+얼굴이 아름다운 것을 이라 한다.”라고 감탄하였다.


역주
역주1 大水 : 이에 대해 조선의 李惟樟은 “임금이 德을 닦으면 和氣가 應하여 雨暘(비가 내리는 날과 볕이 나는 날)이 순조로운 것인데, 桓公은 道德에 거슬린 행위를 하였으니, 陰沴(陰氣가 調和를 일어 발생하는 災害)를 부른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역주2 請復祀……祊田 : 은공 8년에 정나라가 주공의 제사를 지내겠다는 핑계로 祊田과 許田의 교환을 요구하며 팽전을 魯나라에 주었으나, 노나라는 팽전만 접수하고 허전을 정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정이 다시 그 일을 거론한 것이다.
역주3 爲周公祊故也 : 鄭나라가 魯나라에 璧을 준 것은 주공의 제사와 祊田의 교환을 위해서이다. 사실은 바꾼 것인데 《춘추》에 ‘벽을 주고서 빌렸다’고 기록한 것은, 鄭이 주공의 자손이 아니므로, 魯는 정이 주공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해서도 안 되고, 또 천자께 하사받아 대대로 물려온 허전을 팽전과 바꾸어도 안 되는데, 이번에 이 두 가지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史官이 그 사실을 諱(사실을 입밖에 내기를 꺼림)하여, 바꾸었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정나라가 벽을 노나라에 바치고서 허전을 잠시 빌린 것처럼 말하였다. 璧을 준 것은 팽전은 작고 허전은 커서 맞바꿀 경우, 魯가 손해이므로 벽을 더 얹어 준 것이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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