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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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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남곽자기南郭子綦가 팔뚝을 안석에 기대고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쉬는데, 멍하니 몸이 해체된 듯이 자기 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육체는 진실로 시든 나무와 같아질 수 있으며 마음은 진실로 불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는 것입니까?
로소이다
지금 안석에 기대고 계신 모습은 이전에 책상에 기대 계시던 모습이 아니십니다.”
子綦曰
자기子綦가 이렇게 대답했다.
不亦善乎
아, 너의 질문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今者 호니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는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女聞하고 而未聞 女聞地籟하고 而未聞인저
너는 인뢰人籟는 들었어도 아직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을 것이며 지뢰는 들었어도 아직 천뢰天籟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子游曰
자유子游가 이렇게 물었다.
하노이다
“감히 그 방법에 대해 묻겠습니다.”
子綦曰
자기子綦가 대답했다.
其名爲風이니
“대지가 숨을 내쉬면 그것을 일러 바람이라고 한다.
이언정 作則萬竅하나니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낸다.
獨不聞之
너만 유독 ‘윙윙’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似鼻하며 似口하며 似耳하며하며하며 似臼하며하며하니
험하고 높은 산림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 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기둥 받치는 가로 지른 나무 같고, 나무 그릇 같고, 절구통 같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것, 얕은 웅덩이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바람 소리는 물 부딪치는 듯한 급격한 소리, 씽씽거리며 화살 날으는 것처럼 높은 소리, 꾸짖는 듯 질타하는 소리, ‘헉헉’ 들이마시는 것 같은 소리, 외치는 소리, 볼멘 듯한 소리, 웃는 듯한 소리, 귀여운 소리이다.
그런데 앞의 바람이 웅웅 불어대면 뒤의 바람이 따라서 윙윙 소리를 낸다.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을 하는데, 만일 크고 매운 바람이 그치면 곧 모든 구멍들이 텅 비어서 고요해진다.
너만 유독 〈바람이 지나간 뒤에 나뭇가지들이〉 흔들흔들거리고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子游曰
자유가 이렇게 말했다.
地籟 則衆竅是已 人籟 是已어니와 敢問天籟하노이다
지뢰地籟는 곧 여러 구멍에서 나온 소리가 바로 이에 해당하고, 인뢰人籟비죽比竹 같은 악기에서 나온 소리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줄 알겠습니다만 감히 천뢰天籟란 무엇인지 묻겠습니다.”
子綦曰
자기가 이렇게 대답했다.
“무릇 불어대는 소리가 일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그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인데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구멍으로 하여금〉 힘찬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그 누구인가.”
하고 하며 하고 이로다
대지大知는 한가하고 너그럽지만 소지小知는 사소한 일이나 또박또박 따지며, 대언大言은 담담하여 시비是非에 구애받지 않지만 소언小言은 수다스럽기만 하다.
〈세속적인 인간은〉 잠들어서도 꿈을 꾸어 마음이 쉴 사이가 없고, 깨어나서는 신체가 외계外界의 욕망을 받아들여 사물과 접촉해서 분쟁을 일으켜 날마다 마음 속에서 싸운다.
小恐 大恐하야
〈이같은 자기 주장의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자기상실의 신음 소리는〉 어떤 경우는 너그럽게 마음 쓰고, 어떤 경우는 심각하게 마음 쓰며, 어떤 경우는 세밀하게 마음을 써서 〈결국은〉 깜짝깜짝 놀라는 작은 두려움이 아니면 생기 잃은 큰 두려움이 되고 만다.
활틀에 건 화살과 같이 〈모질게〉 튕겨나가는 것은 시비是非를 따져대는 것을 말함이고, 맹서盟誓한 사람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자기의 승리를 지켜나가려는 〈끈덕진〉 고집을 말함이고, 가을과 겨울에 낙엽 떨어지듯 쇠퇴衰退해 가는 것은 날로 소멸消滅해 감을 말함이니 이처럼 세속에 빠져버린 행위는 돌이키게 할 수 없다.
也如 以言其 이라 니라
마음을 봉함封緘한 것처럼 덮어버리는 것은 늙어서 욕심이 넘침을 말함이니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인지라 다시 살아나게 할 수가 없다.
喜怒哀樂 이로다
하는 마음의 작용은 음악 소리가 피리구멍[虛]에서 나오고 수증기가 버섯을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호대 而莫知其所하나니
〈이런 감정의 변화가〉 밤낮으로 서로 교대하며 앞에 나타나는데도 그 감정이 일어나는 근거[萌]를 알지 못하니 그만둘지어다.
已乎어다
그만둘지어다.
아침 저녁으로 이것을 얻으니, 〈이처럼 저절로 생기는 것이〉 감정의 변화가 말미암아 생기는 원인일 것이다.
저것이 아니면 나라는 주체를 확인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는 주체가 없어진다.
是亦近矣하며
이같은 견해는 진실에 가깝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참다운 주재자主宰者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조짐을 알 수 없으며, 작용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은 아주 분명하지만 그 형체形體는 볼 수 없으니 작용의 진실성[情]은 있으나 그 구체적 증거[形]는 없다.
〈인간의 몸에도〉 1백 개의 뼈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과 여섯 개의 장부臟腑를 갖추고 있는데 나는 그중 어느 것과 가장 가까운가.
그대(子遊)는 그것들 모두를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그중 어느 하나만을 사사로이 사랑할 것인가.
이와 같다면(만약 신체의 어느 하나가 전체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면) 그것들 모두를 신첩臣妾으로 삼을 것인가?
신첩은 서로 다스리기에는 부족한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서로 군주가 되고 신첩이 될 수도 있는가?
아니면 어디엔가 참다운 지배자[眞君]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 실상[情]을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은 참다운 진실[眞]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一受其하면 이어늘 하야하야 而莫之能止하나니 不亦悲乎
〈사람은〉 한번 〈백해百骸구규九竅육장六藏을 갖춘〉 몸[成形]을 받으면 곧장 죽지는 않더라도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공연히 사물과 더불어 서로 다투어서 소진시키는 것이 말달리는 것과 같아서 멈추게 하지 못하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호대 而不見其成功하며 호대하나니 可不哀邪
일생一生을 악착같이 수고하면서도 그 성공成功은 기약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고생하면서도 돌아가 쉴 곳(죽음)을 알지 못하니 또한 애처롭지 아니한가.
어떤 사람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니 可不謂大哀乎
그 육체가 죽어서 다른 사물事物로 변하면 그 마음도 육체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니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人之生也 固
인생人生이란 참으로 이처럼 어두운 것인가.
其我獨芒이오 而人 亦有不芒者乎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둡고 남들은 어둡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
성심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유독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생성변화生成變化이법理法(代)을 알아서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 자라야만 이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함께 이것[成心]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마음에 아직 성심成心이 생기지 않았는데 시비是非를 따진다면 이는 ‘오늘 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비록 신묘神妙한 지혜를 발휘했던 임금이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니, 난들 유독 이를 어찌할 것인가.
사람의 말은 바람 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댄 果有言邪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유독 확정할 수 없다면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말이 있지 않은 것인가.
〈사람의 말은〉 막 태어난 새끼 병아리의 〈무의미한〉 울음소리와 다르다고 하지만 그 또한 구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별이 없는 것인가.
참된 는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가 있게 되었으며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로 갈리게 되었는가.
참된 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어버렸고, 참된 말은 화려한 꾸밈 때문에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시비是非가 생겨나게 되어 상대학파相對學派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상대학파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欲是其所非 而非其所是인댄이니라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명석明晳인식認識(明)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모든 존재[物]는 저것[彼]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의 입장에서는 〈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故曰 라하노라
그래서 ‘에서 나오고 는 또한 에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그렇지만 나란히 하고 나란히 하고 나란히 하고 나란히 하고, 나란히 하고 나란히 불가不可하며 나란히 불가不可하고 나란히 하여 에 말미암고 에 말미암으며 에 말미암고 에 말미암는다는 주장(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
是以 하고 而照之於天하나니
그래서 성인聖人은 〈혜시惠施피시방생彼是方生을〉 따르지 않고 〈시비에 대한 판단을〉 자연[天]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 또한 〈상대적인 가 아닌 절대적인〉 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처럼 구분區分무화無化된 상태에서는〉 또한 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가 될 수 있으므로 도 또한 시비是非가 하나로 〈무화無化〉된 것이며 도 또한 시비是非가 하나로 〈무화無化〉된 것이다.
果且有彼是乎哉
그렇다면 과연 의 구분이 있는 것인가.
과연 의 구별이 없는 것인가.
가 상대를 얻지 못하는 것을 ‘의 지도리[道樞]’라고 한다.
지도리가 비로소 고리 가운데의 효용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도 또한 하나의 무궁無窮이고 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다.
故曰莫若以明이라하노라
그래서 명석明晳인식認識(明)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고,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천지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만물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런데 세속의 사람들은〉 나에게 한 것을 하다고 하고, 나에게 불가不可한 것을 불가不可라 고집한다.
길은 사람이 걸어다녀서 만들어지고 은 사람들이 불러서 그렇게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는가.
이니라 惡乎不然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는 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데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커다란 긍정肯定의 세계에서는〉 모든 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한 바가 있으니 어떤 이든 그렇지 않는 바가 없으며 어떤 이든 하지 않는 바가 없다.
그 때문에 이를 위해서 풀줄기[弱]와 큰기둥[强], 문둥이[醜]와 서시西施[美]를 들어서 세상의 온갖 이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해서 하나가 되게 한다.
하나인 분열分裂하면 상대세계의 사물事物성립成立되고,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成立되면 그것은 또 파괴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를 막론하고 〈에 의해〉 다시 통해서 하나가 된다.
하야
오직 통달한 사람이라야만 해서 하나가 됨을 안다.
이 때문에 〈인간 세계의 습관이나 편견偏見을〉 쓰지 않고, (常住不變의 자연自然)에 맡긴다.
이란 작용作用이고, 작용이란 함이고 통함은 자득自得함이니 자득의 경지에 나아가게 되면 에 가깝다.
절대絶對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라고 한다.
신명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何謂朝三
무엇을 조삼朝三이라 하는가.
할새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라한대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衆狙皆怒어늘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曰 然則朝四而暮三이라한대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衆狙皆悅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개라는 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의 를 따라야 할 것이다.
是以 聖人 하나니
이 때문에 성인聖人시비是非를 조화해서 천균天鈞에서 편안히 쉰다.
是之謂이니라
이것을 일컬어 양행兩行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곳까지 이르렀다.
어디에까지 이르렀는가.
처음에 사물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지극하고 극진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구별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 다음은 사물과 사물의 구별은 있지만 아직 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비가 나타나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까닭이고 가 무너지는 것은 사사로운 사랑이 생성되는 까닭이다.
果且有成與虧乎哉
그렇다면 과연 성립과 파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립과 파탄이 없는 것인가.
성립[成]과 파탄[虧]이 있는 것은 저 소씨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고 성립과 파탄이 없는 것은 저 소씨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사광師曠금주琴柱를 조절하여 조율하고, 혜시惠施가 오동나무 책상에 기대어 변론함에 그들 세 선생의 재지才知는 거의 완성의 지경에 가까웠는지라 모두 자기 분야의 완성자였다.
하니라
그래서 후세에 그 이름이 실려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좋아한 것은 저 의 경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其好之也 하니
그들은 그것을 좋아함으로써 의 경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는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밝히려 하였다.
그 때문에 〈혜시惠施는〉 견백론堅白論 같은 궤변詭辯을 일삼는 우매愚昧함으로 몸을 마쳤는데, 〈소문昭文은〉 그 아들 또한 아버지 소문昭文의 거문고 연주 기술만으로 그쳐 종신토록 를 이룸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고서 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 범인凡人들 또한 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若是而不可謂成乎인댄
이와 같이 하고서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저들 세 사람[物]과 우리 범인들 모두 를 이룸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희미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그윽한 빛은 성인聖人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않고 불변의 자연自然에 맡긴다.
이니라
이것을 일컬어 ‘명석明晳한 지혜로 밝힌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어떤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진리와 유사類似한지 진리와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유사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서로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면 저것(비진리)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雖然이나 호리라
비록 그렇지만 시험삼아 한 번 말해 보고자 한다.
처음[始]이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無始]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도 아직 있지 않았다[無無始]는 말이 있다.
라는 말이 있으며, 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無無]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無無無]이 있다.
〈이처럼 언어표현言語表現이 생기자〉 이윽고 가 있게 된 것이다.
而未知케라
그런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 것인지를.
로니 而未知케라
이제 내가 이미 말함이 있는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말함이 없는 것인가.
천하天下에는 가을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은 가장 작다.
일찍 죽은 아이보다 장수長壽한 사람이 없고 8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팽조彭祖는 가장 일찍 죽은 것이다.
만물제동萬物齊同세계世界에서는〉 천지天地도 나와 나란히 하고 만물萬物도 나와 하나이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면 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하나[一]’라고 말하였다면 또 말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과 말이 가 되고 이 된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아무리 역법曆法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계산해 낼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보통사람이겠는가.
그 때문에 로부터 로 나아가도 이 됨에 이르니, 하물며 로부터 로 나아감이겠는가.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절대의 (道의 자연自然)를 따를 뿐이다.
역주
역주1 南郭子綦 : 人名으로 가공의 철학자를 지칭한다. 南郭의 郭은 ‘內城外郭’의 郭으로 남곽은 城郭의 남쪽 지역을 말한다. 고대에는 內城에는 주로 上層部의 사람들이 살았고 外郭에는 주로 下層民들이 모여 살았다. 子綦의 이름 중 綦는 基‧紀와 同音으로 事物의 根本, 우주의 본질을 의미한다. 또 城中人인 顔成子游와 상대되는 인물로 설정된 것을 참고할 때 남곽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郭南에 살면서 道의 근본을 체득한 사람이라는 아이러닉한 寓意를 담아 설정한 인물로 추정된다(赤塚忠). 한편 유사한 명칭으로는 〈人間世〉편과 〈徐無鬼〉편에 ‘南伯子綦’가 보이고 〈大宗師〉편에는 ‘南伯子葵’가 보인다. 成玄英의 疏에는 楚 昭王의 庶弟(一說에는 庶兄이라고 했다)인 公子結(字 子期)이 《國語》와 《左氏傳》에 보이며 《史記》 〈楚世家〉에는 ‘子綦’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사기》에 나오는 子綦는 楚가 吳의 침입을 받아 망국의 위기에 빠졌을 때 昭王의 목숨을 구하는 軍功을 세우고 또 令尹子西를 도와 국가의 재건에 진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바로 《장자》의 남곽자기라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없다.
역주2 隱机(궤)而坐 : 안석에 기대앉음. 隱은 기댄다는 뜻. 机는 팔뚝을 기대는 안석이다.
역주3 仰天而噓(허) :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쉼. 噓는 길게 한숨을 내쉬는 모양.
역주4 荅(답)焉似喪其耦 : 멍하니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듯함. 荅焉은 몸이 해체된 듯한 모습. 林希逸은 ‘無心之貌’라 했다. 耦는 《釋文》에 ‘匹也 對也’라 했고 司馬彪는 ‘身與神爲耦’라 했다. 喪其耦는 自己喪失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처럼 육체를 잃어버리는 자기상실이 있고 반대로 정신을 잃어버리는 세속적인 의미의 자기상실이 있다.
역주5 顔成子游 : 人名. 顔成은 姓이고 子游는 字로 추정된다. 안성자유는 성 안에 사는 출신이 귀한 사람이지만 거꾸로 성 밖의 피지배계층인 남곽자기에게 도를 물었다는 역설적인 우언이다. 赤塚忠은 공자의 제자 子游를 풍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바로 뒤에 이름이 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司馬遷의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의하면 孔子의 제자 子游는 姓이 言이고 이름이 偃이다[言偃 吳人 字子游].
역주6 立侍乎前 : 앞에서 모시고 서 있음. 立侍는 侍立과 같다.
역주7 何居(기)乎 : 어찌된 일입니까. 居는 어조사로 乎보다도 강하게 회의하는 뜻을 표시한다. 일설에 居를 故와 같이 쓰이는 글자로 보기도 한다.
역주8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 形은 形體 곧 肉身을 의미하며 心은 心志 곧 精神을 의미한다. 郭象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而를 順接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고 있지만 逆接으로 보아서 “육체는 고목처럼 정지시킬 수 있지만 정신도 불꺼진 재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로 풀이할 수도 있다. 槁木死灰와 비슷한 표현으로 〈庚桑楚〉편에 ‘身若槁木之朽 而心若死灰’라는 표현이 보인다. 또 《文子(僞書)》 〈道原〉편에는 老子의 말로 ‘形如槁木 心如死灰’란 말이 보인다. ‘靜寂無心’을 이상으로 여기는 도가적 삶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표현은 도와 일체가 되는 槁木死灰의 경지에 도달한 眞人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이다(池田知久).
역주9 今之隱机者 : 지금 안석에 기대 있는 사람. 곧 槁木死灰와 같은 남곽자기의 현재 모습.
역주10 昔之隱机者 : 평소에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 있던 모습을 형용함. 다른 사람이 안석에 기대어 있는 모양이라고 풀이한 주석이 있지만 취하지 않는다.
역주11 : 顔成子游의 이름.
역주12 而問之也 : 而는 2인칭으로 안성자유를 지칭한다. 而之問也가 倒置된 형태.
역주13 吾喪我 :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림. 곧 卽自的 의미의 나[吾]가 對自的 의미의 나[我]를 잃어버렸음을 상징하고 있다. 韓元震은 “喪我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음을 말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면 천지만물을 일체로 보아 다시 저와 나의 구분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喪我 言忘其身也 忘其身 則視天地萬物爲一 不復知有彼我之分也].”고 풀이했다. 또 “상아 두 글자는 제물론 말미의 물화 두 글자와 서로 종시를 이룬다[喪我二字 與篇末物化二字相爲終始].”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4 汝知之乎 : 너는 그것(吾喪我의 경지)을 알고 있느냐. 모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묻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역주15 人籟 :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 곧 인간이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 韓元震은 “人籟, 地籟, 天籟의 籟는 소리이다. 인뢰는 사람이 부는 것이니 比竹의 소리가 그에 해당하고, 지뢰는 땅이 부는 것이니 뭇 구멍의 소리가 그에 해당하고 천뢰는 하늘이 부는 것이니 뭇사람들의 말이 그에 해당한다[人籟地籟天籟 籟聲也 人籟 人之所吹也 比竹之聲是也 地籟 地之所吹也 衆竅之聲是也 天籟 天之所吹也 衆口之言是也].”고 풀이했다.
역주16 地籟 : 대지가 부는 퉁소 소리. 곧 뭇 구멍에서 바람이 불 때 일어나는 소리.
역주17 天籟 :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 곧 하늘의 음악. 우주의 음악.
역주18 敢問其方 : 감히 그 이치를 여쭙습니다. 方은 正, 道, 義, 理 등과 통용한다. 여기서는 理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人籟, 地籟, 天籟의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질문.
역주19 : 어조사.
역주20 大塊 : 큰 땅 덩어리. 大地. 여기서는 대자연 곧 道를 상징하는데 〈大宗師〉편에도 같은 표현이 보인다.
역주21 噫(애)氣 : 숨을 내쉼. 트림함. 《說文》에 “배불리 먹고 트림하는 것이다[飽食息也].”라고 했다.
역주22 是惟無作 :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是惟無作則已의 생략. 是는 바람을 지칭.
역주23 怒呺(효) : 힘차게 소리를 지름.
역주24 翏翏(료) : 긴 바람 소리[長風之聲]. 휙휙 부는 바람 소리. 郭象은 “바람 소리가 멀리 들리는 모양이다[風聲遠聞之貌].”라고 했다.
역주25 山林之畏隹(최) : 높고 험한 산림 속. 畏隹는 嵔崔의 假借字(王先謙)로 높고 험한 모양을 나타낸다(馬敍倫).
역주26 大木百圍之竅穴 :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는 나무의 구멍. ‘百圍大木之竅穴’이 도치된 표현이다(蔣錫昌).
역주27 枅(계) : 동자기둥을 받치고 있는 가로나무.
역주28 : 棬의 假借字로 나무를 구부려서 만든 그릇[杯圈]이다.
역주29 洼(와) : 窪의 假借字로 깊은 웅덩이이다.
역주30 : 窏의 假借字로 얕은 웅덩이이다.
역주31 : 물이 부딪치는 것처럼 급격한 소리.
역주32 謞(효) : 화살이 날아가는 듯한 높은 소리[若箭去之聲].
역주33 : 질타하는 듯한 소리.
역주34 : 숨을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
역주35 : 외치는 듯한 소리. 司馬彪는 ‘若叫呼聲也’라 했다.
역주36 : 볼멘소리. 哭하는 것 같은 소리.
역주37 宎(요) : 요상한 소리. 웃는 듯한 소리. 馬敍倫은 笑의 誤字로 보고 웃음소리로 풀이했다.
역주38 咬(교) : 귀여운 소리.
역주39 前者唱于 而隨者唱喁 : 앞선 바람이 ‘웅웅’하고 울면 뒤따르는 바람이 ‘윙윙’하고 화답함. 于와 喁는 모두 바람 소리를 나타내는 擬聲語.
역주40 泠(영)風則小和 : 산들바람이 불면 작게 화답함. 泠風은 맑은 바람, 곧 산들바람.
역주41 飄風則大和 :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함. 飄風은 司馬彪는 疾風이라고 했고 《爾雅》에는 回風(회오리바람)이라고 했다.
역주42 厲風濟 : 세찬 바람이 그침. 厲風은 烈風(郭象, 向秀) 또는 大風(司馬彪). 濟는 止로 그친다는 뜻(向秀).
역주43 衆竅爲虛 : 뭇 구멍이 비어서 고요해짐. 본래의 정적으로 되돌아간다는 뜻. 韓元震은 “뭇 소리가 무에서 생겼다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衆聲生於無 而復歸於無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4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조) : 너 만이 유독 이 흔들거리고 이 살랑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너도 나뭇가지가 흔들거리고 살랑거리는 것은 보았겠지’라는 뜻이다. 而는 ‘너’의 뜻. 調調刁刁는 크게 흔들거리는 것을 調調, 작게 흔들거리는 것을 刁刁라 한다. 之는 둘 다 是, 此의 뜻. 다만 調調之刁刁의 之를 而와 같다고 보아 調調而刁刁로 읽는 주석(赤塚忠)도 있으나 따르지 않는다. 李珥의 〈天道策〉에 《장자》의 이 구절을 활용하여 ‘調調刁刁’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다.
역주45 比竹 : 대나무를 나란히 붙여서 만든 피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만든 악기의 例로 비죽을 든 것이다.
역주46 吹萬不同 : 불어대는 소리가 만 가지로 저마다 다름. 韓元震은 “吹萬은 바로 뭇사람들의 말이니 이른바 物論(뭇사람들의 논의)이다. 天은 眞宰를 말한 것이니 뭇사람들의 말은 진재가 부는 것이 아님이 없다. 그 때문에 뭇사람들의 논의를 천뢰라 한 것이다. 피리소리가 같지 않지만 다 같이 사람이 부는 데서 나오고, 뭇 구멍의 소리가 같지 않지만 다 같이 땅이 부는 데서 나오며, 뭇사람들의 말이 같지 않지만 다 같이 진재가 부는 데서 나온다. 다른 것이 본래는 같은 것이니 세 가지(천뢰, 지뢰, 인뢰)가 모두 그렇다[吹萬 卽衆口之言 而所謂物論也 天以眞宰言 衆口之言 莫非眞宰之所吹 故以物論爲天籟 蓋比竹之聲不同 而同出於人之所吹 衆竅之聲不同 而同出於地之所吹 衆口之言不同 而同出於眞宰之所吹 異者本同 三者皆然也].”고 하여 뭇사람들의 어지러운 논의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했다.
역주47 使其自己也 : 그 소리로 하여금 스스로 말미암게 함. 自는 ‘~로부터’, 己는 自己를 의미함.
역주48 咸其自取 : 모두 그 스스로 소리를 취함. 곧 모든 구멍이 자신의 구멍에 맞게 소리를 낸다는 뜻.
역주49 怒者其誰邪(야) : 소리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怒는 힘찬 바람 소리가 나게 하는 것. 〈逍遙遊〉편 제1장의 ‘怒而飛’의 怒와 같은 뜻. 邪는 의문형 助辭. 여기서는 反語를 나타내는 助辭로도 볼 수 있다. 앞 구절과 연결하여 ‘咸其自取 怒者其誰邪’를 ‘怒者其誰邪 咸其者取’의 倒置形文章으로 보아 “소리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모두 스스로 취하는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즉 이 해석은 바람 소리나는 것이 모두 자기 원인에 의해 그런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배후의 主宰者가 따로 없다는 뜻이다. 郭象의 注가 이와 같은 해석의 源流인데 곽상은 “物은 그것이 生하여 나오도록 하는 원인이 따로 없이 自生한다. 이것이 天道(自然의 道)이다[物各自生而無所出焉 此天道也].”라고 하고 또 “物은 각각 自得할 따름이다. 누가 그것을 그렇도록 소리나게 主宰하는가. 이것은 天籟를 거듭 밝힌 것이다[物皆自得之耳 誰主怒之使然哉 此重明天籟也].”라고 하였다. 주재가 따로 없이 모두가 자기 원인에 의해 自生自化하는 것으로 보는 이 郭象 流의 주석을 따르면 下文에 보이는 ‘眞宰’도 이것을 流轉變化하는 現象界의 밖에 따로 實在하는 주재자로 보지 않고 天 즉 自然(저절로 그러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된다. 현대의 주석 가운데도 “소리를 내게 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그러한 자는 있지 않다)”라고 하여 곽상의 해석을 따르는 譯注가 있다(金谷治). 또 福永光司는 곽상에 근거하여 莊子의 道는 현상세계의 배후에 있는 주재자가 아니라 變化의 흐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까지 말하고 莊子를 中國哲學史에서 氣哲學의 源流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와 반대로 ‘怒者其誰邪’를 反語文이 아닌 단순한 의문문으로 보고 下文에 보이는 ‘其所爲使’ ‘眞君’ ‘眞宰’ 같은 것이 있음을 暗示하는 문장으로 이해하는 주석도 만만치 않게 많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읽은 林希逸 《莊子口義》의 현토본이나 朴世堂의 주석이 여기에 속하고 赤塚忠, 森三樹三郞, 池田知久도 이같은 해석을 취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郭象의 해석을 莊子에 대한 叛逆으로까지 極言하는 견해도 있다. 朴世堂은 “使其自己 咸其自取는 구멍이 있으면 곧 거기서 나는 소리가 있어 모든 物이 그 자체로는 스스로 취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에 바람이 없다면 비록 구멍이 있다고 할지라도 바람 소리가 날 수 없으니 이것은 본시 그렇도록 시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怒者其誰邪는 구멍이 소리나게 하는 것은 바람이고 바람은 곧 하늘의 所爲임을 말한다[使其自己 咸其自取 言有是形卽有是聲 物莫不於己而自取之 然非天之有風 則雖有其形 而無所取其聲 是固有使之者也 怒者其誰耶 言竅怒者風 而風卽天之所爲也].”라고 하여 天을 주재자로 보고 있다. 이 견해를 반드시 따르지 않더라도 참고할 만한 주석이다.
역주50 大知 : 큰 지혜. 大智와 같다. 《釋文》에서 知는 智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역주51 閑閑 : 너그럽고 여유 있음. 成玄英은 寬裕로 풀이했고 《釋文》에서 簡文帝는 ‘廣博之貌’라 했다. 그러나 赤塚忠의 경우, 이 篇에는 人知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大知는 小知와 상대가 되는 개념으로 날마다 마음 속에서 싸우는[日以心鬪]一端(宋 呂惠卿, 王雱說)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大知를 ‘심하게 악독한 지혜’로 해석하고 閑閑도 悍悍의 假借字로 보아 사납다는 뜻[悍悍]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赤塚忠의 주장을 기준으로 해석하면 ‘大知閑閑 小知閒閒’을 “인간의 악독한 지혜는 사납고, 잔 지혜는 남의 틈이나 엿본다[覵覵].”로 번역하여 ‘대지’와 ‘소지’를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뒤의 ‘大言炎炎 小言詹詹’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齊物論〉편에서는 ‘大道不稱 大辯不言 大仁不仁’ 등 大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赤塚忠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한편 朴世堂은 ‘閑은 관대하고 여유있는 모양[閑 寬暇之貌]’이라고 풀이했는데, 성현영, 간문제의 견해와 유사하다.
역주52 小知 : 작은 지혜. 세속적인 지혜. 小智와 같다.
역주53 閒閒(간) : 엿보고 살핌. 閒은 間, 覗, 覵, 瞯과 통한다. 모두 엿본다는 뜻. 成玄英은 시비를 分別하는 태도로 풀이했다. 朴世堂은 ‘분석하는 모양[分析之貌]’으로 풀이했다.
역주54 大言 : 큰 말. 훌륭한 말.
역주55 炎炎(담담) : 담담함. 담백하여 시비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 《釋文》에서 李頤는 淡淡으로 풀이했다. 또 簡文帝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美盛貌]’으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猛烈로 풀었으나 취하지 않는다. 朴世堂 또한 성현영과 마찬가지로 ‘크게 타오르는 모양[熾大之貌]’으로 풀이했다.
역주56 小言 : 작은 말. 하찮은 말.
역주57 詹詹(첨) : 쓸데없이 수다스러움. 成玄英은 ‘쓸데없이 말이 많은 태도[詞費]’로 풀이했고, 《釋文》에서 李頤는 ‘자잘하게 따지는 모양[小辯之貌]’으로 풀이했다. 한편 朴世堂은 ‘말이 재빠른 모양[捷給之貌]’으로 풀이했다.
역주58 其寐也魂交 : 잠들면 꿈을 꾸어 마음이 쉴 새가 없음. 魂交는 정신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꿈을 꾼다는 뜻이지만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에 꿈을 꾼다는 의미에서 꿈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司馬彪는 魂交를 ‘정신이 뒤섞이는 모습[精神交錯]’으로 풀이했다. 이와 유사한 ‘其寢不夢 其覺無憂’라는 말이 〈大宗師〉편, 〈刻意〉편 등에 보인다.
역주59 其覺(교)也形開 : 잠에서 깨어나면 신체가 욕망의 문을 열고 外物을 받아들임. 形은 形體, 곧 身體이다. 司馬彪는 開를 “눈이 열리고 뜻이 생긴다[目開意悟].”는 뜻으로 보았다. 覺는 깨달을 각, 꿈깰 교, 여기서는 ‘교’로 발음.
역주60 與接爲構 : 외물과 접촉하여 분쟁(감정)을 일으킴. 與接은 與物接의 생략. 司馬彪는 “기쁨과 사랑 등의 감정이 형성된다[構結驩愛].”는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61 日以心鬪 : 날마다 마음 속에서 싸움. 以는 위치를 나타내는 조사로 쓰였다. 福永光司는 《莊子》의 이와 같은 묘사를 두고 “장자는 인간정신의 소란스러움과 알력의 소리, 자기 주장의 아비규환과 자기상실의 신음소리를 묘사하면서 그 叫喚과 呻吟의 소리를 또한 그대로 하늘의 퉁소소리 즉 ‘天籟’로서 들을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역주62 縵(만) : 마음을 넓게 쓰는 모양. 簡文帝는 寬心으로 풀이했다.
역주63 窖(교) : 깊이 생각하는 모양. 成玄英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저장하는 것[穴地藏穀]으로 깊이 감춘다.”는 뜻이라고 했고, 簡文帝는 ‘마음을 깊이 쓰는 것[深心]’이라고 했다.
역주64 : 세밀하게 마음을 쓰는 모양.
역주65 惴惴(췌) : 깜짝깜짝 작게 놀라는 모습. 成玄英은 怵惕으로 풀이하였다.
역주66 縵縵(만) : 멍하게 생기 잃은 모습. 成玄英은 ‘근심스런 모습[沮喪]’으로 풀이하였다. 李頤는 ‘生과 死가 나란한 모습[齊死生貌]’으로 풀이했다.
역주67 其發若機栝(괄) : 그 움직임이 마치 쇠뇌의 오늬처럼 빠름. 機栝은 쇠뇌의 오늬(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로 여기서는 모질게 튀어나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역주68 司是非之謂 : 시비를 판단함을 일컬음. 위의 ‘其發若機栝’과 연결하여 시비를 따지는 것이 쇠뇌의 오늬처럼 모질다는 뜻이다. 司는 담당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시비의 판단을 담당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69 : 까닥하지 않음. 마음이 전연 동요하지 않는 모양. 끈덕진 고집을 뜻한다.
역주70 詛(저)盟 : 맹세한 것처럼 함. 오로지 남을 이기는 데 집착하는 태도를 비유함. 詛와 盟은 같은 뜻.
역주71 其守勝之謂也 : 자신의 승리를 지켜 끝까지 떠나지 않음을 일컬음.
역주72 其殺(쇄)若秋冬 :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시드는 것과 같음. 殺는 衰와 같다.
역주73 其溺之所爲之 : 빠져 버린 행위가 이룬 결과. 溺은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道의 세계를 망각하고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세속적 가치에 빠져 버린 것을 의미한다.
역주74 不可使復之也 : 〈세속에 빠져 버린 자의 마음은〉 다시 회복하게 할 수 없음.
역주75 厭(엽) : 덮어버림. 욕망에 빠짐. 욕망에 집착하는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역주76 緘(함) : 봉함함. 봉함한 것처럼 견고하다는 뜻.
역주77 老洫(혁) : 늙어서 욕심이 넘침. 늙을 수록 욕심이 더 심해진다는 뜻. 《釋文》에 洫은 溢(일)과 같다고 했다.
역주78 近死之心 : 죽음에 가까운 마음. 近死는 近於死의 줄임.
역주79 莫使復陽也 : 〈그런 사람의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음. 成玄英은 陽은 生의 뜻이라고 했다.
역주80 慮嘆變慹(접) : 억측, 탄식, 변심, 집착의 네 가지 태도. 成玄英은 “慮는 미래에 대한 억측, 嘆은 과거에 대한 탄식, 變은 옛 일에 대해 마음을 바꾸는 변심, 慹은 욕망에 굴복 당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慮則抑度未來 嘆則咨嗟已往 變則改易舊事 慹則屈服不伸].”로 풀이했다. 音은 접. 집으로 발음할 때는 두려워한다는 뜻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不動貌]의 뜻일 때에는 접으로 발음한다.
역주81 姚(조)佚啓態 : 경망스러운 행동, 사치스럽고 방종한 행동, 욕심을 부리는 행위, 교태를 부리며 야하게 용모를 꾸미는 행위. 成玄英은 ‘姚則輕浮躁動 佚則奢華縱放 啓則開張情慾 態則嬌淫妖冶’로 풀이했다. 姚는 경솔하다는 뜻으로 읽을 때에는 音 조.
역주82 樂出虛 蒸成菌 : 음악이 빈 공간에서 나오고 습기가 버섯을 자라게 함. 피리 따위의 빈 구멍에서 음악 소리가 나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습기가 버섯을 자라게 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이나 감정 변화도 구체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뜻. 蒸은 水蒸氣.
역주83 日夜相代乎前 : 밤낮으로 이런 감정의 변화가 끊임없이 앞에 나타남.
역주84 : 싹트는 곳. 곧 온갖 감정의 변화가 싹트는 원인을 뜻한다.
역주85 已乎 : 그만둘지어다. 止의 뜻(成玄英). 궁극의 原因을 알지 못하는 데 대한 탄식.
역주86 旦暮得此 其所由以生乎 : 아침 저녁으로 이것을 얻으니(저절로 생겨나니) 〈이것이〉 바로 말미암아 생기는 원인일 것이다. 어떤 원인이 있어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뜻. 崔大華의 《莊子岐解》에는 ‘此’를 郭象은 ‘그 저절로 生함을 말함[言其自生]’이라 하였고, 林希逸은 ‘조물자를 말함[此者造物也]’이라고 했음을 잘 대비 설명하고 있다.
역주87 非彼無我 : 저것이 아니면 나라는 주체를 확인할 수 없음. 彼는 喜怒哀樂의 감정을 지칭한다.
역주88 非我無所取 : 喜怒哀樂의 감정이 깃들 수 있는 주체가 사라진다는 뜻.
역주89 不知其所爲使 :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주재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 저절로 그러해서 그러할 따름[自然而然耳]이기에 그렇게 시켜서[使] 하는[爲] 바[所]를 알지 못한다는 뜻.
역주90 眞宰 : 참다운 주재자. 결국 아래 글의 道를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도를 직접 말하지 않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만 드러낸 것이다.
역주91 特不得其眹(짐) : 다만 그 조짐(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음. 眹(눈동자 진)은 朕의 假借字. 林希逸의 현토본에는 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眹을 ‘짐’으로 읽기로 한다.
역주92 可行已信而不見其形 : 그것이 작용할 가능성은 매우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형체는 볼 수 없음. 可行은 조물자의 작용[行]이 있을 가능성. 즉 참다운 주재자가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참다운 주재자를 직접 볼 수는 없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어 異說이 많은 부분이다.
역주93 有情而無形 : 情은 있지만 形은 없음. 곧 작용 그 자체의 사실은 나타나지만 그런 사실이 있게 한 道의 구체적인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
역주94 百骸九竅六藏 : 백 개의 골절,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
역주95 賅而存焉 : 인간의 몸에 갖추어져 있음. 焉은 於此의 줄임말로 여기서 此는 인간의 신체를 지칭한다.
역주96 吾誰與爲親 : 내가 그 중에서 무엇을 가장 가까이할 것인가?
역주97 皆說(열)之乎 : 모두 좋아할 것인가. 百骸, 九竅, 六藏을 모두 좋아할 것이냐는 뜻. 說은 悅로 읽어야 한다(《釋文》).
역주98 其有私焉 : 아니면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좋아할 것인가? 여기서 其는 抑과 같은 뜻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구실을 한다.
역주99 如是 : 이와 같이 한다면. 곧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면.
역주100 皆有爲臣妾乎 : 모두 臣妾이 되게 할 것인가? 신첩은 주재자 아닌 피지배자의 뜻.
역주101 其臣妾 不足以相治乎 : 신첩끼리는 서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인가. 지배자 없는 데서 신첩(피지배자)만으로는 서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인가라는 뜻.
역주102 其遞相爲君臣乎 : 서로 돌아가면서 군신이 되게 할 것인가.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고정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君主와 臣下가 될 것이냐는 뜻.
역주103 其有眞君存焉 : 참다운 존재[眞君]가 있는 것인가. 이 글은 긍정문으로 읽는 독법 등 異說이 많다. 韓元震은 眞君을 心君, 곧 마음으로 풀이했다.
역주104 如求得其情與不得 : 그 실상을 알든 모르든 간에. 情은 진군의 존재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실상을 뜻한다. 得其情與不得은 得其情與不得其情의 줄임.
역주105 無益損乎其眞 : 참다운 존재를 보태거나 덜어낼 수 없음. 곧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거나 못하거나 참다운 진실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 福永光司는 “요컨대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營爲하는 배후에는 그 영위를 지배하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것 같으나, 그 절대자는 ‘有情而無形’한 작용 그 자체, 變化 그 자체이며 이른바 眞宰란 自然(天)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 그대로가 바로 眞宰요, 변화의 흐름 그 자체가 바로 道이다.”라고 하여 郭象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異說이 많다. 韓元震은 “백 개의 골절과 아홉 개의 구멍이 모두 바라는 것이 있지만 바라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모두 마음의 참다움을 덜어내거나 보탤 수 없다[百骸九竅 各有所求 而得與不得 俱無損益於心君之眞也].”고 풀이했다.
역주106 成形 : 이루어진 형체. 곧 사람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본래의 신체를 의미한다.
역주107 不忘以待盡 : 곧장 죽지는 않더라도 다하기를 기다림. 당장 죽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신체의 기능이 소진되어 죽는다는 뜻. 忘은 亡과 통하며 化의 뜻과 같다. 〈田子方〉편에 공자와 안회의 대화 중에 ‘吾一受其成形 而不化以待盡 效物而動 日夜無隙 而不知其所終’ 하는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역주108 與物相刃相靡 : 외부의 사물과 서로 거슬리고 갉아먹는 부정적인 관계를 맺음. 외부의 욕망을 따라간다는 뜻.
역주109 行盡如馳 : 消盡시킴이 말달리는 것과 같음. 자신이 타고난 신체의 기능을 맹렬히 소진시킨다는 뜻.
역주110 終身役役 : 종신토록 수고함. 役役은 고생하는 모습.
역주111 苶(날)然疲役 : 고달프게 수고하고 애씀. 苶은 고달픈 모양.
역주112 不知其所歸 :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함. 곧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고생한다는 뜻.
역주113 人謂之不死奚益 : 어떤 사람은 사람이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곧 生과 死가 다를 것이 없음을 말함이다. 不死는 不死之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郭象은 “실제로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實如死同].”고 풀었다.
역주114 其形化 其心與之然 : 형체가 변화하면 그 마음도 그와 함께 변화함. 육신이 죽으면 정신도 그와 함께 소멸된다는 뜻. 化는 변해서 다른 사물이 된다는 뜻으로 死滅과 같은 뜻이다.
역주115 若是芒乎 : 이처럼 미혹된 것인가. 芒은 몽매함. 成玄英은 闇昧로 풀었다. 朴世堂은 ‘芒은 멍하니 무지한 모양[芒 昏然無知之貌]’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16 隨其成心而師之 : 成心을 따라서 그것을 스승으로 삼음. 郭象은 “마음이 충분히 일신의 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을 成心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成心을 스승으로 삼으면 모든 사람에게 스승이 있게 된다[夫心之足以制一身之用者 謂之成心 人自師其成心 則人各自有師矣].”고 풀이하여 성심을 긍정적인 의미로 파악했으며 朴世堂도 “성심은 하늘의 정해진 이치가 나에게 부여된 것이다[成心 天有定理 所賦於我者也].”라고 풀이했다. 인간 본유의 마음을 성심으로 파악하는 주석은 이밖에도 많다(福永光司, 森三樹三郞 등). 그러나 성심을 부정적인 관념으로 보고 “한쪽의 편견을 고집하는 것을 성심이라 한다[執一家之偏見者 謂之成心].”고 본 주석도 있다(成玄英). 安東林, 오강남, 金谷治, 赤塚忠도 마찬가지인데, 成心을 부정적으로 보는 어느 주석에서는 《老子》 49장의 ‘聖人無常心’의 常心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下文의 ‘未成乎心’과 대비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따랐다.
역주117 誰獨且無師乎 : 누군들 유독 스승이 없겠는가. 곧 모든 사람이 성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시비를 판단할 것이라는 뜻.
역주118 奚必知代 而心自取者有之 : 어찌 꼭 生成變化의 理法을 알아서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자라야만 이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代는 交代로 변화를 뜻한다. 林希逸은 心自取者를 ‘마음 속에 소견이 있는 것[心有所見]’으로 풀었다.
역주119 愚者與有焉 : 어리석은 자도 함께 가지고 있음. 곧 어리석은 사람들도 똑같이 성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역주120 未成乎心而有是非 : 有는 是非를 따진다는 뜻.
역주121 今日適越而昔至也 : 오늘 越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함. 〈天下〉편에 惠施의 주장으로 나오는 명제로 언어는 성립하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궤변을 말한다. 昔은 昨日(陸德明).
역주122 以無有爲有 : 無有를 有라고 함. 곧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주장하는 억지 논리를 말한다.
역주123 無有爲有 : 앞의 ‘以無有爲有’와 같다.
역주124 神禹且不能知 : 신묘한 지혜를 발휘했던 禹임금조차도 알 수 없음. 且는 조차도.
역주125 吾獨且奈何哉 : 난들 유독 이를 어찌할 것인가. 世人의 迷惑과 錯亂의 모습을 거듭 개탄하는 南郭子綦(莊子)의 말이다.
역주126 夫言非吹也 : 말은 바람 소리가 아님. 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한 바람 소리와는 다르다는 뜻.
역주127 言者有言 : 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음. 有言은 有所言之志의 줄임.
역주128 其所言者 特未定也 :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유독 확정할 수 없음. 곧 의미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서 시비를 확정할 수 없다는 뜻.
역주129 果有言邪 其未嘗有言邪 :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말이 있지 않은 것인가. 두 命題를 의문형의 문장으로 병렬하여 後者 즉 말이 없는 것이라는 쪽을 긍정하는 文法이다. 아래의 ‘亦有辯乎 其無辯乎’도 마찬가지.
역주130 其以爲異於鷇(구)音 : 그것은 새끼 병아리의 울음소리와는 다르다고 여겨짐. 곧 인간의 말은 무의미한 새소리와는 다르다고 여겨짐.
역주131 亦有辯乎 其無辯乎 : 구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분이 없는 것인가. 사람의 말이나 새끼 병아리의 울음소리나 차이점이 없다는 뜻. 辯은 辨과 같다(假借字).
역주132 道惡乎隱而有眞僞 : 참된 도는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眞과 僞가 있게 되었는가.
역주133 言惡乎隱而有是非 :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是非가 있게 되었는가.
역주134 道惡乎往而不存 : 참된 道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는가.
역주135 言惡乎存而不可 :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역주136 道隱於小成 : 도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음. 여기서 작은 성취란 價値的偏見을 말한다.
역주137 言隱於榮華 : 말은 꾸밈 때문에 숨음. 榮華는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며서 본래의 뜻을 가려버리는 문화적 僞善을 의미한다.
역주138 故有儒墨之是非 : 儒家와 墨家의 시비가 있게 됨. 유가와 묵가가 서로 상대방이 그르고 자신이 옳다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는 뜻.
역주139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 그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 하고,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 함. 其所非는 상대학파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말함이고 其所是는 상대학파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칭한다.
역주140 莫若以明 : 明晳한 認識(明)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음. 韓元震은 莫若以明 한 구절은 이 편의 관건이 되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도를 마땅히 밝혀야 함을 말한 것이다[言道之當明].”로 풀이했고, 朴世堂은 “천리의 밝음으로 비추어 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莫若照之以天理之明].”는 뜻으로 풀이했다. 下文의 ‘此之謂以明’에 대한 註를 참조할 것.
역주141 物無非彼 物無非是 : 모든 사물은 저것[彼]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是] 아닌 것이 없음. 지금 나를 이것[是]이라 부르고 그를 저것[彼]이라 할 때, 그를 彼라 부르는 나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그[彼]이므로 모든 존재는 이것[是]이기도 하고 저것[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물(존재)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결국 모든 존재는 저것인 동시에 이것이다. 곧 모든 존재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고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저것으로 지칭할 수 있기 때문에 彼此(彼是)의 구분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
역주142 自彼則不見 : 彼의 입장에서 보면 彼가 보이지 않음. 곧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하지 않는 한 상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彼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
역주143 自知則知之 : 스스로 알게 되면 그것을 알게 됨. 곧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彼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
역주144 彼出於是 是亦因彼 : 彼는 是에서 나오고 是 또한 彼에 따름. 彼와 是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구분은 상대적인 것임을 밝힌 명제.
역주145 彼是方生之說也 : 彼와 是가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 論理學者 惠施의 주장으로 彼와 是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기준에 따라 때로 彼가 是로 되기도 하고 是가 彼로 되기도 하므로 彼와 是는 相卽的이며 相互規定的으로 성립하는 相對的 槪念이라는 주장이다.
역주146 方生方死 方死方生 : 나란히 생기고 나란히 소멸되며, 나란히 소멸되고 나란히 생김. 是가 생기는 순간에 彼가 생기고 彼가 생기는 순간에 是가 생기므로 두 개념은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
역주147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 나란히 옳고 나란히 옳지 않으며 나란히 옳지 않고 나란히 옳음. 위의 ‘方生方死 方死方生’과 같은 내용.
역주148 因是因非 因非因是 : 是에 따르고 非에 따르며, 非에 따르고 是에 따름. 상호의존적으로 是非가 생긴다는 뜻. 하지만 뒤의 ‘聖人不由’와 연결시켜 이 문장의 맥락을 따져보면 惠施의 이와 같은 명제[彼是方生之說]를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성에 대한 지적만으로 그쳤기 때문에 진리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莊子가 주장하는 萬物一體는 是와 非를 둘 다 잊은 忘言忘知의 경지에서 道와 노니는 것[遊]을 말하는데 비해 惠施는 어디까지나 言知를 사용하는 論理的 分析에 시종하고 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天下〉편에 보이는 惠施의 ‘歷物十事’이하의 문장도 참조할 것.
역주149 聖人不由 : 성인은 말미암지 않음. 성인은 惠施의 ‘彼是方生之說’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
역주150 照之於天 亦因是也 : 하늘에 비추어 보니 이 또한 是에 말미암는 것이다. 곧 자연의 도에 비추어 시비를 판단하므로 이 또한 절대의 是에 말미암는 것이라는 뜻. 그러므로 因是는 상대적인 是를 초월하여 절대의 是에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자연 그대로 맡긴다는 의미이다. 成玄英은 天을 自然으로[天 自然也] 풀이했다.
역주151 是亦彼也 彼亦是也 : 是 또한 彼가 될 수 있으며 彼 또한 是가 될 수 있음. 곧 是와 非의 區分이 無化된 상태에서는 시와 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뜻. 郭象은 이 부분을 “나 또한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彼가 되고 상대 또한 스스로를 是라고 여긴다[我亦爲彼所彼 彼亦自以爲是].”고 풀이했다. 成玄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만 또한 상대가 그르다고 여기는 입장이 되며, 나는 상대를 그르다고 여기지만 상대 또한 스스로 옳다고 여긴다[我自以爲是 亦爲彼之所非 我以彼爲非 而彼亦以自爲是也].”고 하여 피차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했다.
역주152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 彼도 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이며 是도 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임. 一是非를 “시비를 하나로 여겨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면 이 해석이 타당하다. 특히 바로 뒤의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를 연결하여 맥락을 따져 보면 이 해석을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다. 이를테면 郭象은 “此 또한 스스로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여기고, 彼 또한 스스로가 옳고 此가 그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此와 彼는 각각 자기 속에 是非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此亦自是而非彼 彼亦自是而非此 此與彼各有一是一非於體中也].”고 풀이했다. 이 의견을 따르면 상대 또한 시비의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고 나 또한 시비의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역주153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 과연 彼와 是가 있는가. 과연 彼와 是가 없는가. 彼와 是의 有無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彼와 是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 앞 문단의 ‘果有言邪 其未嘗有言邪’의 譯註 참조.
역주154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 彼와 是가 상대를 얻지 못하는 것을 道樞라 함. 곧 도의 입장에서 보면 彼와 是라는 대립이 무화되어 일체의 차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뜻. 道樞를 ‘차별상을 안고 초월한 實在의 眞相’이라고 풀이하는 주석도 있다(福永光司).
역주155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 지도리가 비로소 環中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음. 지도리는 문을 여닫는 중심 軸이다. 環中은 지도리의 빈 구멍. 곧 지도리가 고리의 구멍을 얻게 되면 絶對的인 ‘一’의 경지가 되어 무궁하게 千變萬化하는 현상계에 自由自在로 대응할 수 있다는 뜻. 《老子》 11장의 “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轂(곡:바퀴통)을 함께 한다. 바귀통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때문에 수레의 쓰임이 있게 된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는 말과 유사한 비유이다.
역주156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 是도 또한 하나의 無窮이고 非도 또한 하나의 무궁임. 곧 是와 非가 모두 무궁한 千變萬化를 하나로 包越한 것이라는 뜻.
역주157 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 喩指之非指也 :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함. 指는 手指 곧 손가락이다(成玄英). 萬物齊同의 입장에서는 손가락은 손가락이면서 손가락 아닌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公孫龍의 ‘親指非指論’처럼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역주158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 喩馬之非馬也 : 公孫龍의 ‘白馬非馬論’처럼 말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함.
역주159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 萬物齊同의 경지에서 바라보면 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과 같고, 萬物도 한 마리의 말과 같다는 뜻.
역주160 可乎可 不可乎不可 : 나에게 可한 것을 可하다고 하고, 나에게 不可한 것을 不可하다 함. 세속의 사람들은 본래 하나인 만물을 可와 不可로 나누어 습관적인 사고와 주관적인 편견에 따라 可와 不可를 판단한다는 뜻. 劉文典과 池田知久는 이 텍스트와는 달리 ‘可乎可 不可乎不可’를 삭제하고 다음 節의 ‘不然於不然’과 ‘物固有所然’의 사이에 ‘惡乎可 可乎可 惡乎不可 不可乎不可’를 삽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판본을 따른다.
역주161 道行之而成 : 길은 사람이 걸어다녀서 저절로 이루어짐. 곧 반드시 특정한 곳에 길이 생길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길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다니다 보니 길이 생기게 되었다는 뜻.
역주162 物謂之而然 : 사물의 명칭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붙여짐. 길이 사람들의 습관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이름도 그런 식으로 인간의 가치적 편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
역주163 惡乎然 : 어째서 그렇다고 하는가. 곧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느냐는 뜻.
역주164 然於然 : 그렇다고 하는 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그렇다고 판단한다는 뜻.
역주165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 역주 163) 164) 참조.
역주166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 모든 사물은 본래 그러한 바를 지니고 있고 모든 사물은 본래 可한 바를 지니고 있음. 곧 어떤 사물이든 모두 然과 可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습관과 편견을 기준으로 然과 可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이 ‘物固有所然’ 이하 아래의 ‘無物不可’까지는 萬物齊同의 입장에서 보는 견해이다. 만물제동의 경지, 다시 말하여 天地가 一指이고 萬物이 一馬인 ‘一’의 세계에서는 可도 없고 不可도 없고 然도 없고 不然도 없으므로, 모든 사물이 然과 可로 肯定될 뿐만 아니라 可와 然을 否定하는 不可와 不然도 無不可 無不然으로 再否定되어 커다란 肯定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福永光司의 설명을 참고할 것.
역주167 無物不然 無物不可 : 어떤 사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떤 사물도 불가한 것이 없음. 위의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와 같은 의미.
역주168 爲是 : 이를 위해서. 곧 萬物齊同의 커다란 肯定을 위해서.
역주169 擧莛與楹 厲與西施 : 풀줄기와 큰기둥, 문둥이와 西施를 예든 것임. 곧 弱한 것과 强한 것, 醜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예로 든다는 뜻. 莛은 풀줄기. 成玄英 등은 司馬彪의 주석을 따라 莛을 屋梁(대들보)이라고 했는데 대들보는 가로로 받쳐져 있고 기둥[楹]은 세로로 세워져 있다는 데서 대조적인 두 사물의 일례로 들었다는 의미로 보았지만, 《說文》에서 莛을 莖(풀줄기)으로 풀이한 것을 볼 때 司馬彪의 주장은 莊子의 본의가 아닌 듯하다(兪樾). 朴世堂 또한 ‘莛은 풀줄기[莛 草莖也]’라고 풀이했다. 厲(라)는 司馬彪에 따르면 나병환자 곧 문둥이[病癩]이다. 音은 라(나).
역주170 恢恑憰怪 : 엄청나게 큰 것, 법도에 어긋난 것, 속임수, 괴이한 것. 모두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의미한다. 成玄英은 “恢는 寬大한 것을 일컬음이고 恑는 奇變을 일컬음이고 憰은 속이는 마음이고 怪는 妖異한 사물이다[恢者寬大之名 恑者奇變之稱 憰者矯詐之心 怪者妖異之物].”라고 했다.
역주171 道通爲一 : 道는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함. 곧 도의 입장에서 보면 위의 莛, 楹, 厲, 西施, 恢, 恑, 憰, 怪 등의 차별상을 모두 포용하여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는 뜻. 곧 道 앞에서는 모든 차별적인 것이 하나가 된다는 뜻.
역주172 其分也成也 : 하나인 道가 분열하면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는 것임. 이것은 “하나의 사물이 나누어지는 것은 또 다른 사물이 성립되는 것임. 곧 하나의 사물이 해체되어 소멸되는 현상은 새로 생성되는 다른 사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생성되는 현상이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앞의 해석을 취한다.
역주173 其成也毁也 :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면 성립된 그것은 곧 파괴된다는 뜻.
역주174 凡物無成與毁 : 모든 사물은 성립이니 파괴니 할 것 없이, 성립과 파괴를 막론하고의 뜻. 이것은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가 없음. 위의 논리에 따라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므로 본질적인 의미의 성립과 파괴는 없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으나 앞의 해석을 취한다. 따라서 현토본에 ‘凡物無成與毁하니’로 현토한 것을 ‘凡物無成與毁히’로 고쳤다.
역주175 復通爲一 :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됨. 通은 合과 같은 뜻.
역주176 達者 : 통달한 사람. 도를 터득한 사람을 지칭한다.
역주177 知通爲一 : 모든 사물이 통하여 하나가 됨을 아는 것.
역주178 爲是不用而寓諸庸 : 이 때문에 쓰지 않고 庸에 맡김.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편견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자연의 도에 맡긴다는 뜻. 朴世堂은 “庸은 두루 통하여 막히지 않음이니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도이다[庸者 周通不滯 可常之道也].”라고 풀이했는데 《中庸》의 庸을 平常으로 풀이한 朱熹의 견해를 따른 듯하다. 번역문에서는 ‘常住不變의 自然’이라고 하였다.
역주179 庸也者用也 : 庸이란 作用한다는 뜻임. 용을 작용의 뜻으로 풀이한 내용.
역주180 用也者通也 : 작용이란 通한다는 뜻임. 작용을 통한다는 뜻으로 풀이한 내용.
역주181 通也者得也 : 통한다는 것은 스스로 터득한다는 뜻임. 곧 주관적인 편견을 쓰지 않고 저절로 마음 속에 이해되는 것이 통의 뜻임을 밝힌 표현이다.
역주182 適得而幾矣 : 得에 나아가면 가까워짐. 自得하는 경지에 나아가면 道에 가까워진다는 뜻. 幾는 幾於道의 줄임. 而는 ‘곧’이라는 의미의 助字.
역주183 因是已 : 絶對의 是를 따름. 是는 곧 道로 因是는 위의 ‘不用而寓諸庸’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역주184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 그렇게만 할 뿐이고 그렇게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도라고 일컬음. 已는 그뿐이라는 뜻.
역주185 勞神明 : 신명을 수고롭게 함. 곧 공연히 정신을 피곤하게 한다는 뜻.
역주186 爲一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 무리하게 萬物齊同의 ‘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朝三이라고 한다. 萬物齊同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無爲自然이 아닌 人爲的인 행동으로 무리하게 하는 부질없는 행위를 朝三으로 비유하였다.
역주187 狙公 :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 成玄英은 狙를 獼猴라 했고 《釋文》에서 崔譔은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養猨狙者也]’이라고 했다. 반면 李頤는 《釋文》에서 ‘늙은 원숭이[老狙]’라고 했지만 《列子》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적절치 않다.
역주188 賦芧(서) : 도토리를 나누어 줌. 成玄英은 司馬彪의 말을 따라 芧를 橡子(상수리 나무의 열매, 도토리)라 했다.
역주189 朝三而暮四 :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줌. 朝三暮四의 故事는 《列子》에도 보인다. 흔히 간사하고 얕은 꾀로 속이는 행위를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도리어 그런 꾀에 속는 어리석은 무리를 비유하고 있다. 司馬彪는 三과 四를 각각 세 되와 네 되[朝三升 暮四升也]로 보아 아침에 도토리를 세 되 주고 저녁에 네 되 준다고 풀이했다. 韓元震은 朝三暮四는 “시비의 실제 내용은 본래 같은데 시비의 쓰임은 다를 때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朝三暮四 以喩是非之實本同 而是非之用有異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90 名實未虧而喜怒爲用 : 名과 實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함. 곧 하루에 일곱 개라는 名과 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공연히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뻐하고 노여워한다는 뜻.
역주191 亦因是也 : 또한 눈 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절대의 是, 道를 따라야 함. 곧 원숭이들처럼 어리석지 않으려면 절대의 是를 따라야 한다는 뜻. 福永光司가 이와같은 해석을 하고 있음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郭象과 成玄英을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狙公 또한 “원숭이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른 것이다[此亦同其所好 自以爲是].”라고 하여 ‘是’를 절대의 是가 아닌 是非상대의 是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亦因是也’는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또한 상대적 是非의 是를 따랐기 때문이다.”라고 보아야 한다.
역주192 和之以是非 休乎天鈞 : 시비를 조화시켜서 天鈞에 편안히 쉼. 곧 시비를 따져서 대상을 차별하지 않고 저절로 균등해지는 천균의 세계인 자연에 맡긴다는 뜻. 成玄英은 天鈞을 ‘저절로 균등해지는 이치[自然均平之理也]’로 풀었다. 鈞은 均과 같다.
역주193 兩行 : 두 가지가 다 시행됨.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시비를 나누지 않고 천하의 시비를 따르기 때문에 是와 非가 모두 인정된다는 뜻. 모순과 대립이 동시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모순이 없는 경지를 비유한 것이다. 곽상은 “천하의 시비에 맡긴다[任天下之是非].”는 뜻으로 풀었고 成玄英은 “시비를 떠나지 않으면서 시비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가 다 시행된다고 말한 것이다[不離是非而得無是非 故謂之兩行].”로 풀었다.
역주194 古之人 : 옛사람. 道를 깨우친 사람. 林希逸은 “옛사람은 옛날 道를 알았던 사람이다[古之人者 言古之知道者].”라고 했다.
역주195 其知 : 그 지혜. 知는 智와 같다.
역주196 有所至矣 : 지극한 바가 있음. 곧 지극한 경지에 나아감. 成玄英은 至를 “지극한 곳에 나아감을 일컬은 것이다[造極之名].”라고 했다.
역주197 惡乎至 : 어느 곳에 이르렀는가. 惡는 何와 같으며 여기서는 何處의 뜻.
역주198 以爲未始有物 : 아직 사물이 있지 아니하다고 생각함. 곧 구체적인 사물이 아직 없다고 생각함. 일체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道人의 경지를 비유함.
역주199 至矣盡矣 不可以加矣 : 지극하고 극진하여 더할 나위가 없음. 加는 加於此의 줄임.
역주200 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也 : 사물은 있지만 아직 구별이 있지 않다고 생각함. 사물의 존재는 인식하였지만 일체의 구분과 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비유. 封은 원래 토지와 토지의 경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앞의 ‘古之人’부터 ‘其次以爲有物矣’까지는 〈庚桑楚〉편에도 보인다.
역주201 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 : 사물과 사물의 구별은 있지만 아직 시비는 있지 않다고 생각함. 사물을 是와 非로 나누어 차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價値判斷이 없는 경지를 비유.
역주202 是非之彰也 道之所以虧也 : 시비가 드러나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까닭임. 곧 是非의 가치판단이 加해지자 道가 분열‧파탄되어 道의 生命이 끊어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萬物齊同의 입장을 버리고 시비를 따지기 시작하면 도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의미이다. 이상은 愛憎好惡와 같은 인간의 妄執이 생겨나는 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福永光司). 4단계란 ① 未始有物 ② 未始有封 ③ 未始有始非 ④ 道虧愛成의 네 단계를 말함이다.
역주203 道之所以虧 愛之所以成 : 도가 무너지는 것은 인간의 私愛가 성립되는 까닭임. 만물제동의 입장을 버리면 사사로이 만물을 차별적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愛憎好惡의 妄執이 생김을 비유.
역주204 果且有成與虧乎哉 果且無成與虧乎哉 : 道에는 과연 성립과 파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립과 파탄이 없는 것인가. 道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성립과 파탄이 없다는 뜻.
역주205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 성립과 파탄이 있는 것은 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음. 곧 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여 한 곡을 이루는 것[成]은 무한한 다른 곡들을 잃게 되는 것[虧]과 같다는 뜻. 여기서 성립은 인간의 愛憎好惡의 妄執이 생긴다는 뜻이고 虧는 道의 破綻을 의미한다. 곧 成은 앞구절의 ‘愛之所以成’과 같고 虧는 ‘道之所以虧’에 해당한다. 赤塚忠은 故를 夫로 보아 어조사로 처리했으며, 王引之는 則으로 보았고, 章炳麟은 《墨子》의 〈天志〉편에 근거하여 此와 같다고 보았고, 故를 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赤塚忠의 입장을 따라 故昭氏를 ‘저 昭氏’로 번역하였다. 번역에 ‘저’를 삭제하여도 무방하다. 昭氏는 아래의 昭文이다. 成玄英은 “姓은 昭이고 이름이 文이며 옛날 거문고를 잘 연주했던 사람이다[姓昭名文 古之善鼓琴者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주206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 성립과 파탄이 없는 것은 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는 것과 같다. 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소리 없는 소리[無聲之聲]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곡들을 다 들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
역주207 師曠之枝策也 : 師曠이 거문고를 조율함. 枝策에 대해서는 기둥[策]을 세워[枝] 연주한다는 뜻(馬敍倫), 지팡이를 세우고 그 지팡이에 기대어 假寐한다는 뜻(郭象), 지팡이를 들고 박자를 맞추었다는 뜻(崔譔), 악기를 치는 물건[策]을 가지고[枝] 연주한다는 뜻(林希逸) 등 諸說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成玄英이 “소문은 거문고를 잘 연주하고, 사광은 음율을 잘 알았으며, 혜시는 명리를 논하기를 좋아했다[昭文善能鼓琴 師曠妙知音律 惠施好談名理].”는 주석을 따랐다. 사광은 晉 平公 때의 太師이다(成玄英).
역주208 惠子之據梧也 : 惠施가 오동나무로 만든 안석에 기대어 변론함. 司馬彪는 梧를 거문고라 했지만, 成玄英은 惠施가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없음을 들어 “據梧라고 함은 오동나무로 만든 안석에 기대어 변론한 것이니 〈남곽자기의〉 隱几와 같다[言據梧者 只是以梧几而據之談說 猶隱几者也].”로 풀이했는데 이를 따랐다.
역주209 三子之知幾乎 : 세 사람의 才知는 거의 완성의 경지에 가까움.
역주210 皆其盛者也 : 모두 자기 분야의 완성자임. 盛은 成의 假借字이다(馬敍倫).
역주211 載之末年 : 후세에 그 이름이 실려 있음. 崔譔은 載之末年을 “지금까지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書之於今].”고 하여 載를 記載되어 있다는 뜻으로, 末年을 後世로 풀이했다.
역주212 唯其好之也 : 그들이 그것을 좋아함. 昭文, 師曠, 惠施가 각각 연주, 조율, 변론을 좋아함을 지칭한다.
역주213 以異於彼 : 저것[道]과는 달리함. 곧 道의 경지와는 달랐다는 뜻. 彼에 대해서는 諸說이 분분하다. 郭象은 衆人으로 보아 세 사람이 “스스로 보통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自以殊於衆人].”는 뜻으로 풀었고, 林希逸도 “스스로 천하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自以爲異於天下之人].”고 풀었으나 부적당하다. 여기서는 赤塚忠과 池田知久의 견해를 따랐다.
역주214 欲以明之 : 그것을 밝혀 내고자 함. 곧 도를 밝히려 했다는 뜻. 之는 道를 지칭한다.
역주215 彼非所明而明之 : 그것은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밝히려 함. 곧 道는 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기술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이 억지로 밝히려 했다는 뜻. 彼는 道를 지칭한다. 成玄英은 彼를 衆人으로 보고 밝히고자 한 것은 道術이라고 보아 “세 사람의 道術은 衆人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세 사람이 억지로 밝히려 했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216 以堅白之昧終 : 堅白論 같은 어리석은 견해로 일생을 마침. 곧 惠施의 경우는 “단단하고 흰 돌[堅白石]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라고 詭辯을 일삼는 愚昧함으로 몸을 마쳤다는 뜻.
역주217 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 그 자식도 또 昭文의 기술로 그쳐 종신토록 이룸이 없었음. 郭象은 綸을 綸緖로 보아 “昭文의 자식도 소문이 남긴 기술[緖]를 따라 생을 마쳤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綸을 緖로 풀이했다. 그러나 兪樾은 高誘의 注를 인용하여 綸을 知, 明 등과 같다고 보고 바로 위의 구절 ‘堅白之昧 終’과 이 구절을 對句로 보아 以文之綸終을 “소문의 지혜로 끝나고 말았다[以文之明終].”는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218 若是而可謂成乎 雖我亦成也 : 이와 같이 하고서 道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 凡人들 또한 道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임. 郭象은 “세 사람처럼 하고서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록 내가 이루지 못한 것도 또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若三子而可謂成 則雖我之不成亦可謂成也].”라 하여 我를 ‘이루지 못한 나’로 풀었다. 成玄英은 我를 衆人이라고[我衆人也] 하여, “만약 세 사람처럼 중인들과 달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중인들이 세 사람과 달리한 것 또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若三子異於衆人 雖自以爲成 而衆人異於三子 亦可謂成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19 物與我無成也 : 物과 나 모두 道를 이룸이 없음. 곧 저들 세 사람과 우리 범인들 모두 이룸이 없다는 뜻. 物은 昭文, 師曠, 惠施의 세 사람을 지칭하고 我는 衆人을 지칭한다.
역주220 滑(골)疑之耀 : 희미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그윽한 빛. 분명하게 판별하기 어려운[疑] 그윽한[滑] 빛을 말한다. 滑은 어지러이 질서 없는 혼돈을 의미하므로 희미하고 혼돈한 가운데 감춰진 그윽하고 어두운 밝음, 不明之明이다. 司馬彪는 滑疑를 亂으로 풀었지만 여기서의 亂은 어지럽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작은 지혜로 밝힐 수 없는 혼돈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므로 그윽한 빛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주221 聖人之所圖也 : 성인이 추구한 것임. 圖는 도모함, 곧 求와 같은 뜻.
역주222 爲是不用而寓諸庸 : 앞의 ‘故爲是 擧莛與楹’ 구절의 역주 178)을 참조할 것.
역주223 此之謂以明 : 이것을 일컬어 “明晳한 지혜로 밝힌다.”고 함. “明晳한 지혜로 밝힌다[以明].”는 명제는 萬物齊同의 논리와 함께 〈齊物論〉편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이고 본질이다. 흔히 〈齊物論〉편에서는 앞부분의 天籟寓話에 나타난 萬物齊同을 〈齊物論〉편의 代表的 主題로 들고 그 이상을 보지 않는데 이는 잘못이다. 萬物齊同[一]을 깨닫는 思索의 길에 다가가는 明의 강조가 〈제물론〉편의 또 하나의 중요한 力說處이다(福永光司). 上文의 ‘莫若以明’의 注에 보이는 韓元震과 朴世堂의 설을 참조할 것.
역주224 今且有言於此 : 지금 우선 여기에 어떤 말이 있음. 지금 어떤 주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는 뜻. 결국 〈제물론〉편의 작자(莊子)가 萬物齊同의 절대의 一의 세계에는 是도 없고 非도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면서 미리 정당성을 확정하게 되면, 자신의 논리에 어긋나는 모순을 범하게 되기 때문에 에둘러가는 표현이다. 今且는 今과 같이 말머리를 바꿀 때 상투적으로 넣는 표현이다.
역주225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 이것과 유사한지, 이것과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함. 是는 滑疑之耀, 곧 진리[道]를 지칭한다(池田知久). 이 是에 대하여도 세상의 是非의 是로 보는 견해 등 異說이 많다.
역주226 類與不類 相與爲類 : 爲類는 同一한 범주로 分類한다는 뜻.
역주227 與彼無以異矣 : 저것과 다르다 할 수 없음. 彼는 앞의 是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非眞理를 지칭한다.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道를 언어로 표현하고 나면 시비를 일삼는 세속의 논의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으로 莊子 자신 또한 세속의 儒‧墨의 학설 또는 앞의 세 사람처럼 도를 밝히는 데 실패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곧 자신도 그들의 前轍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처럼 道를 언어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는 태도는 《老子》 56장과 《莊子》 〈天道〉편에 보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표현한 것과 《莊子》 〈知北遊〉편에 나오는 “최고의 말은 말을 배제하며 최고의 행위는 행위를 배제한다[至言去言 至爲去爲].”고 한 표현에도 나타난다. 또 〈應帝王〉편에서 王倪가 齧缺에게 네 번 질문받고 네 번 다 모른다고 대답한 것[齧缺問於王倪 四問而四不知]이나, 〈知北遊〉편에서 狂屈이 知에게 “道가 무엇인지 말해주려다가 도중에 잊어버렸다[中欲言而忘其所欲言].”고 한 것도 모두 陶淵明이 〈飮酒〉에서 “말하려다가 이미 말을 잊었다[欲辯已忘言].”고 표현한 것처럼 道의 不可規定性을 나타낸 것이다.
역주228 請嘗言之 : 시험삼아 말해 보고자 함. 嘗은 試와 같다(成玄英). 至言은 去言이라 하고 知者는 不言이라고 하는 莊子의 見地에서 자신의 認識論 省察에 많은 말이 동원된 것에 대한 양해의 말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 ‘請嘗言之’ 이외에도 비슷한 표현이 여러 차례 보인다. ‘嘗試言之’(〈齊物論〉편) ‘嘗試論之’(〈騈拇〉‧〈胠篋〉편) ‘請嘗薦之’(〈天地〉편) ‘請嘗試言之’(〈至樂〉편) 등.
역주229 有始也者 : 처음이라는 말이 있음. 곧 처음이라는 개념이 있음. 也者는 ‘~라고 하는 것’. 곧 ‘~라는 말’, 또는 개념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郭象은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다[有始則有終].”고 풀이하였는데 成玄英은 이 구절이 “가정해서 질문함으로써 지극한 道는 始도 없고 終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此假設疑問 以明至道無始無終].”라고 풀이하였다.
역주230 有未始有始也者 :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음이 있음. 곧 아무리 처음이라고 규정해도 그 이전의 시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 부정개념으로 그 이전의 시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成玄英은 未始를 未曾으로 풀었다.
역주231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 처음에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도 아직 있지 않았음. 앞의 ‘未始有始’라는 말의 부정개념으로서 그것조차 아직 있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최초의 상태를 가정한다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그 이전의 시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논리적 부정이 가능하다는 뜻. 始→無始→無無始로 이어지는 부정의 부정을 말하고 있다.
역주232 有有也者 : 有也者의 也者는 ‘~라고 하는 것’으로 설명을 나타내는 표현.
역주233 有無也者 : 無라는 말이 있음. 곧 그 무엇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이전에 그 무엇이 없었던 때가 있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有의 부정으로서 無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
역주234 有未始有無也者 :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음. 有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無가 다시 논리적으로 부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주235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 : 처음에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無無無]이 있음. 즉 앞의 ‘未始有無’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그조차 없었던 때가 있다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뜻. 앞의 始→無始→無無始로 이어지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有→無→無無→無無無로 이어지는 부정의 부정이다.
역주236 俄而有無矣 : 이윽고 無가 있게 됨. 俄는 이윽고, 얼마 있다가.
역주237 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 아직 알지 못하겠다. 有와 無 중에서 과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孰有孰無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의 뜻.
역주238 今我則已有謂矣 : 지금 내가 이미 말함이 있음. 謂는 言과 같다(成玄英).
역주239 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 其果無謂乎 : 아직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말함이 없는 것인가. 시험삼아 말해보긴 했지만 과연 道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겠다고 한 발 물러서는 표현이다. 언어의 한계성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닉한 상황에서 말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으로 다시 복귀하고자 하는 莊子의 言表. 成玄英은 “학자들이 문자에 얽매일까 염려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함으로써 장자가 다시 말이 없는 태도로 돌아간 것이다[莊生復無言 恐學者滯於文字 故致此辭].”라고 하였다.
역주240 天下莫大於秋毫之末 : 天下에는 가을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음. 가을털은 흔히 가장 작은 사물의 비유로 쓰이지만 위의 始→無始→無無始로 이어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그보다 작은 사물을 들 수 있고 또 그것보다 더 작은 사물을 드는 반복을 통해 보다 작은 사물을 무한히 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도리어 가장 큰 사물이 될 수 있다는 뜻.
역주241 大(태)山爲小 : 태산은 가장 작음. 태산은 반대로 가장 큰 사물의 비유로 쓰이지만 가을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큰 사물을 무한히 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도리어 가장 작은 사물이 될 수 있다는 뜻. 朴世堂은 “가을털의 작음으로 작은 먼지에 비교하면 큰 것이 되고, 태산의 큼으로 천지에 비교하면 작은 것이 된다[秋毫之小而比微塵則爲大 太山之大而比天地則爲小].”고 풀이했다.
역주242 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 : 일찍 죽은 아이보다 長壽한 사람이 없고 8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彭祖는 가장 일찍 죽은 것임. 殤子는 未成年으로 일찍 죽은 아이를 말한다. 成玄英은 “태어나 강보에 싸인 채로 죽은 아이를 殤子라고 한다[人生在於襁褓而亡 謂之殤子].”고 했다.
역주243 天地與我竝生 萬物與我爲一 : 天地도 나와 나란히 生하고 萬物도 나와 하나임. 萬物齊同의 세계에서는 天地와 萬物도 나와 一體라는 뜻. 王夫之는 이 부분의 글을 두고 “道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상식 세계에서는 큰 것[大]과 긴 것[長]이 거꾸로 작은 것[小]과 짧은 것[短]이 되는 것처럼 道는 大小, 長短, 天人, 物我를 포함하여 一로 通하게 하고 있어 言表로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韓元震은 “이 구절은 張載의 〈西銘〉과 같은 뜻이다[天地與我竝生 萬物與我爲一 與張子西銘之意同].”라고 지적하고, 계속해서 “〈西銘〉은 理一에 근거해서 分殊를 미루어 알았지만, 莊周의 齊物은 分殊를 저버리고 理一을 어지럽혔으니 그들의 所見에 虛와 實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然西銘 據理一而推分殊 周之齊物 廢分殊而亂理一 所見有虛實故也].”라고 하여 장자를 비판하고 있는데, 張載의 《正蒙》 〈乾稱〉편의 첫 문장(乾稱父 坤稱母 予茲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과 이 구절의 유사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장재의 이 문장이야말로 도리어 그의 사상이 장자의 이 구절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朴世堂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천지가 있는 줄 모르고, 내 삶이 끝난 뒤에도 또한 천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이것이 천지가 나와 종시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我生之先 不知有天地 我生之後 亦不知有天地 是則天地終始 與也竝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44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 旣와 已는 모두 이미의 뜻.
역주245 旣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 이미 하나라고 말하였다면 또 말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하나라고 말했기 때문에 말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뜻.
역주246 一與言爲二 : 一과 말이 二가 됨. 곧 一이라는 개념과 말이라는 개념이 합쳐서 둘[二]이 된다는 뜻.
역주247 二與一爲三 : 一과 말 그리고 새로 생긴 二라는 개념과 합쳐서 셋이 됨. 이 내용은 《老子》 42장의 “도가 일을 낳고 일이 이를 낳고 이가 삼을 낳고 삼이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는 논리와 유사하다.
역주248 自此以往 : 이로부터 이후로는. 곧 三에서부터 無限의 數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한다. 以往은 以後와 같다.
역주249 巧歷(曆)不能得而況其凡乎 : 역법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계산해 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범인임에랴. 巧曆은 ‘역법을 잘 계산하는 사람[善巧算曆之人]’, 곧 天文曆算에 정통한 사람을 지칭한다(成玄英).
역주250 自無適有 以至於三 而況自有適有乎 : 無로부터 有로 나아가도 三이 됨에 이르니, 하물며 有로부터 有로 나아감이겠는가. 無는 단지 하나일 뿐인데도 그로부터 출발하여 無限의 數에 이르는데 하물며 有는 그 자체가 이미 무한이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뜻.
역주251 無適焉 因是已 :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절대의 是(道의 自然)를 따를 뿐이다. 곧 한없는 分裂의 세계에 나아가지 말고 絶對의 一인 道의 세계에 머물러 절대의 是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無適은 정신을 다른 데로 가게(向하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性理學의 ‘主一無適’과 거의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赤塚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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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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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장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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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장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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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1장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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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1장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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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1장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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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장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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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1장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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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1장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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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1장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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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1장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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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장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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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1장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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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장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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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1장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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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장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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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1장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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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1장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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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1장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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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장 639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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