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이 似鼻
하며 似口
하며 似耳
하며 似
하며 似
하며 似臼
하며 似
者
하며 似
者
하니
地籟
는 則衆竅是已
오 人籟
는 則
이 是已
어니와 敢問天籟
하노이다
은 其
也
요 其
如
은 요 은 以言其日消也
요 는 오
一受其
하면 이어늘 하야 其
하야 而莫之能止
하나니 不亦悲乎
아
호대 而不見其成功
하며 호대 而
하나니 可不哀邪
아
남곽자기南郭子綦가 팔뚝을 안석에 기대고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쉬는데, 멍하니 몸이 해체된 듯이 자기 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육체는 진실로 시든 나무와 같아질 수 있으며 마음은 진실로 불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고 계신 모습은 이전에 책상에 기대 계시던 모습이 아니십니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는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너는 인뢰人籟는 들었어도 아직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을 것이며 지뢰는 들었어도 아직 천뢰天籟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지가 숨을 내쉬면 그것을 일러 바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낸다.
너만 유독 ‘윙윙’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험하고 높은 산림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 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기둥 받치는 가로 지른 나무 같고, 나무 그릇 같고, 절구통 같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것, 얕은 웅덩이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바람 소리는 물 부딪치는 듯한 급격한 소리, 씽씽거리며 화살 날으는 것처럼 높은 소리, 꾸짖는 듯 질타하는 소리, ‘헉헉’ 들이마시는 것 같은 소리, 외치는 소리, 볼멘 듯한 소리, 웃는 듯한 소리, 귀여운 소리이다.
그런데 앞의 바람이 웅웅 불어대면 뒤의 바람이 따라서 윙윙 소리를 낸다.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을 하는데, 만일 크고 매운 바람이 그치면 곧 모든 구멍들이 텅 비어서 고요해진다.
너만 유독 〈바람이 지나간 뒤에 나뭇가지들이〉 흔들흔들거리고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지뢰地籟는 곧 여러 구멍에서 나온 소리가 바로 이에 해당하고, 인뢰人籟는 비죽比竹 같은 악기에서 나온 소리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줄 알겠습니다만 감히 천뢰天籟란 무엇인지 묻겠습니다.”
“무릇 불어대는 소리가 일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그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인데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구멍으로 하여금〉 힘찬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그 누구인가.”
대지大知는 한가하고 너그럽지만 소지小知는 사소한 일이나 또박또박 따지며, 대언大言은 담담하여 시비是非에 구애받지 않지만 소언小言은 수다스럽기만 하다.
〈세속적인 인간은〉 잠들어서도 꿈을 꾸어 마음이 쉴 사이가 없고, 깨어나서는 신체가 외계外界의 욕망을 받아들여 사물과 접촉해서 분쟁을 일으켜 날마다 마음 속에서 싸운다.
〈이같은 자기 주장의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자기상실의 신음 소리는〉 어떤 경우는 너그럽게 마음 쓰고, 어떤 경우는 심각하게 마음 쓰며, 어떤 경우는 세밀하게 마음을 써서 〈결국은〉 깜짝깜짝 놀라는 작은 두려움이 아니면 생기 잃은 큰 두려움이 되고 만다.
활틀에 건 화살과 같이 〈모질게〉 튕겨나가는 것은 시비是非를 따져대는 것을 말함이고, 맹서盟誓한 사람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자기의 승리를 지켜나가려는 〈끈덕진〉 고집을 말함이고, 가을과 겨울에 낙엽 떨어지듯 쇠퇴衰退해 가는 것은 날로 소멸消滅해 감을 말함이니 이처럼 세속에 빠져버린 행위는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마음을 봉함封緘한 것처럼 덮어버리는 것은 늙어서 욕심이 넘침을 말함이니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인지라 다시 살아나게 할 수가 없다.
희喜‧노怒‧애哀‧락樂과 여慮‧탄嘆‧변變‧집慹과 요姚‧일佚‧계啓‧태態하는 마음의 작용은 음악 소리가 피리구멍[虛]에서 나오고 수증기가 버섯을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이런 감정의 변화가〉 밤낮으로 서로 교대하며 앞에 나타나는데도 그 감정이 일어나는 근거[萌]를 알지 못하니 그만둘지어다.
아침 저녁으로 이것을 얻으니, 〈이처럼 저절로 생기는 것이〉 감정의 변화가 말미암아 생기는 원인일 것이다.
저것이 아니면 나라는 주체를 확인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는 주체가 없어진다.
이같은 견해는 진실에 가깝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참다운 주재자主宰者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조짐을 알 수 없으며, 작용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은 아주 분명하지만 그 형체形體는 볼 수 없으니 작용의 진실성[情]은 있으나 그 구체적 증거[形]는 없다.
〈인간의 몸에도〉 1백 개의 뼈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과 여섯 개의 장부臟腑를 갖추고 있는데 나는 그중 어느 것과 가장 가까운가.
〈아니면〉 그중 어느 하나만을 사사로이 사랑할 것인가.
이와 같다면(만약 신체의 어느 하나가 전체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면) 그것들 모두를 신첩臣妾으로 삼을 것인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서로 군주가 되고 신첩이 될 수도 있는가?
아니면 어디엔가 참다운 지배자[眞君]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 실상[情]을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은 참다운 진실[眞]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람은〉 한번 〈백해百骸‧구규九竅‧육장六藏을 갖춘〉 몸[成形]을 받으면 곧장 죽지는 않더라도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공연히 사물과 더불어 서로 다투어서 소진시키는 것이 말달리는 것과 같아서 멈추게 하지 못하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일생一生을 악착같이 수고하면서도 그 성공成功은 기약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고생하면서도 돌아가 쉴 곳(죽음)을 알지 못하니 또한 애처롭지 아니한가.
어떤 사람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육체가 죽어서 다른 사물事物로 변하면 그 마음도 육체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니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둡고 남들은 어둡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
성심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유독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생성변화生成變化의 이법理法(代)을 알아서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 자라야만 이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함께 이것[成心]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마음에 아직 성심成心이 생기지 않았는데 시비是非를 따진다면 이는 ‘오늘 월越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비록 신묘神妙한 지혜를 발휘했던 우禹임금이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니, 난들 유독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유독 확정할 수 없다면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사람의 말은〉 막 태어난 새끼 병아리의 〈무의미한〉 울음소리와 다르다고 하지만 그 또한 구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별이 없는 것인가.
참된 도道는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진眞과 위僞가 있게 되었으며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시是와 비非로 갈리게 되었는가.
참된 도道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도道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어버렸고, 참된 말은 화려한 꾸밈 때문에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유儒와 묵墨의 시비是非가 생겨나게 되어 상대학파相對學派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상대학파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명석明晳한 인식認識(明)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모든 존재[物]는 저것[彼]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피彼의 입장에서는 〈피彼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피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피彼는 시是에서 나오고 시是는 또한 피彼에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피彼와 시是가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그렇지만 나란히 생生하고 나란히 사死하고 나란히 사死하고 나란히 생生하고, 나란히 가可하고 나란히 불가不可하며 나란히 불가不可하고 나란히 가可하여 시是에 말미암고 비非에 말미암으며 비非에 말미암고 시是에 말미암는다는 주장(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혜시惠施의 피시방생彼是方生의 설說을〉 따르지 않고 〈시비에 대한 판단을〉 자연[天]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 또한 〈상대적인 시是가 아닌 절대적인〉 시是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처럼 시是와 비非의 구분區分이 무화無化된 상태에서는〉 시是 또한 피彼가 될 수 있으며 피彼 또한 시是가 될 수 있으므로 피彼도 또한 시비是非가 하나로 〈무화無化〉된 것이며 차此도 또한 시비是非가 하나로 〈무화無化〉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피彼와 시是의 구분이 있는 것인가.
피彼와 시是가 상대를 얻지 못하는 것을 ‘도道의 지도리[道樞]’라고 한다.
지도리가 비로소 고리 가운데의 효용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是도 또한 하나의 무궁無窮이고 비非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다.
그래서 명석明晳한 인식認識(明)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고,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천지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만물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런데 세속의 사람들은〉 나에게 가可한 것을 가可하다고 하고, 나에게 불가不可한 것을 불가不可라 고집한다.
길은 사람이 걸어다녀서 만들어지고 물物은 사람들이 불러서 그렇게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다.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는 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데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커다란 긍정肯定의 세계에서는〉 모든 물物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물物은 가可한 바가 있으니 어떤 물物이든 그렇지 않는 바가 없으며 어떤 물物이든 가可하지 않는 바가 없다.
그 때문에 이를 위해서 풀줄기[弱]와 큰기둥[强], 문둥이[醜]와 서시西施[美]를 들어서 세상의 온갖 이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도道는 통通해서 하나가 되게 한다.
하나인 도道가 분열分裂하면 상대세계의 사물事物이 성립成立되고,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成立되면 그것은 또 파괴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를 막론하고 〈도道에 의해〉 다시 통해서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이라야만 통通해서 하나가 됨을 안다.
이 때문에 〈인간 세계의 습관이나 편견偏見을〉 쓰지 않고, 용庸(常住不變의 자연自然)에 맡긴다.
용庸이란 작용作用이고, 작용이란 통通함이고 통함은 자득自得함이니 자득의 경지에 나아가게 되면 도道에 가깝다.
절대絶對의 시是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신명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일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하루에 일곱 개라는 명名과 실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의 시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은 시비是非를 조화해서 천균天鈞에서 편안히 쉰다.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곳까지 이르렀다.
처음에 사물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지극하고 극진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구별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 다음은 사물과 사물의 구별은 있지만 아직 시是와 비非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비가 나타나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까닭이고 도道가 무너지는 것은 사사로운 사랑이 생성되는 까닭이다.
성립[成]과 파탄[虧]이 있는 것은 저 소씨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고 성립과 파탄이 없는 것은 저 소씨昭氏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사광師曠이 금주琴柱를 조절하여 조율하고, 혜시惠施가 오동나무 책상에 기대어 변론함에 그들 세 선생의 재지才知는 거의 완성의 지경에 가까웠는지라 모두 자기 분야의 완성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좋아한 것은 저 도道의 경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좋아함으로써 도道의 경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도道는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밝히려 하였다.
그 때문에 〈혜시惠施는〉 견백론堅白論 같은 궤변詭辯을 일삼는 우매愚昧함으로 몸을 마쳤는데, 〈소문昭文은〉 그 아들 또한 아버지 소문昭文의 거문고 연주 기술만으로 그쳐 종신토록 도道를 이룸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고서 도道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 범인凡人들 또한 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고서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저들 세 사람[物]과 우리 범인들 모두 도道를 이룸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희미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그윽한 빛은 성인聖人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않고 불변의 자연自然에 맡긴다.
이것을 일컬어 ‘명석明晳한 지혜로 밝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진리와 유사類似한지 진리와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유사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서로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면 저것(비진리)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시험삼아 한 번 말해 보고자 한다.
처음[始]이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無始]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도 아직 있지 않았다[無無始]는 말이 있다.
유有라는 말이 있으며, 무無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무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無無]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무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無無無]이 있다.
〈이처럼 언어표현言語表現이 생기자〉 이윽고 무無가 있게 된 것이다.
유有와 무無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 것인지를.
이제 내가 이미 말함이 있는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말함이 없는 것인가.
천하天下에는 가을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은 가장 작다.
일찍 죽은 아이보다 장수長壽한 사람이 없고 8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팽조彭祖는 가장 일찍 죽은 것이다.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세계世界에서는〉 천지天地도 나와 나란히 생生하고 만물萬物도 나와 하나이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면 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하나[一]’라고 말하였다면 또 말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일一과 말이 이二가 되고 이二와 일一이 삼三이 된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아무리 역법曆法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계산해 낼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보통사람이겠는가.
그 때문에 무無로부터 유有로 나아가도 삼三이 됨에 이르니, 하물며 유有로부터 유有로 나아감이겠는가.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절대의 시是(道의 자연自然)를 따를 뿐이다.
1
제1장(1)
695
2
제1장(2)
573
3
제1장(3)
730
4
제1장(4)
903
5
제1장(5)
564
6
제1장(6)
569
7
제1장(7)
502
8
제1장(8)
420
9
제1장(9)
1002
10
제1장(10)
537
11
제1장(11)
514
12
제1장(12)
128
13
제1장(13)
578
14
제1장(14)
542
15
제1장(15)
481
16
제1장(16)
826
17
제1장(17)
732
18
제1장(18)
178
19
제1장(19)
570
20
제1장(20)
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