所謂暖姝者는 學一先生之言 則暖暖姝姝而私自說也하야 自以爲足矣오
羊肉이 不慕蟻라 蟻慕羊肉하나니 羊肉이 羶也일새니라
故
로 無所甚親
하며 無所甚疏
오 하나니 此謂眞人
이니라
하야 以目
으로 視目
하며 以耳
로 聽耳
하며 以心
으로 復心
하니
故로 曰 風之過河也에 有損焉하며 日之過河也에 有損焉하니 請只風與日로 相與守河하니
其反也는 緣功이오 其果也는 待久어늘 而人이 以爲己寶하나니 不亦悲乎아
知
하며 知
하며 知
하며 知
하며 知
하며 知
하며 知
이 至矣
니
大一은 通之하고 大陰은 解之하고 大目은 視之하고 大均은 緣之하고 大方은 體之하고 大信은 稽之하고 大定은 持之하나니라
則其解之也도 似不解之者하며 其知之也도 似不知之也니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유형의 인간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하는 유형의 인간과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유형의 인간이 있다.
이른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민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학설을 배우게 되면 곧 부드럽고 요상하게 스스로를 꾸며 스스로 자기만족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본시 물物이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한다는 것’은 돼지 몸에 붙은 이가 바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
돼지의 거칠고 긴 털을 가려서 그 사이에 머물러 그것을 스스로 넓은 궁궐, 큰 마당이라고 생각하며 돼지의 굽이 갈라진 사이, 다리가 꼬부라진 모퉁이 사이와 젖통 사이,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그것을 스스로 안전한 방, 편리한 거처라고 생각하여
도살자가 어느 날 팔을 걷어붙이고 마른 풀을 깔고 불을 지펴 〈돼지를〉 구워먹으려고 불태우면 곧 자기 자신도 돼지와 함께 모두 타버리게 될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나아가고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물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안일함을 탐하는 자’이다.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다는 것’은 〈고인 가운데〉 순舜과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양고기는 개미에 대해 사모하는 기분이 전혀 없는데 〈다만〉 개미가 양고기를 사모하고 따르니 그것은 양고기가 노린내를 풍기기 때문이다.
순임금은 노린내 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하였다.
그 때문에 세 번 사는 곳을 옮겼는데 그 주위에 도시가 이루어져서 등鄧의 옛 터에 이르러서는 십여만 호戶나 되는 대도시가 출현하였다.
요임금이 순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불모지에서 등용하면서 이르기를 ‘그가 와서 은택을 베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순이 불모지에서 등용될 때 나이가 많았고 총명이 쇠퇴했는데도 돌아가서 쉬지를 못했으니 이른바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자’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신인神人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사람이 오게 되면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고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이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너무 가까이함도 없고 너무 멀리함도 없이 자연의 덕을 품고 하늘의 조화로운 기운을 배양하여 천하 사람들을 따르니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진인眞人은〉 개미가 된 경우에는 양고기를 사모하는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가 된 경우에는 강호에서 서로 잊고 자유로이 헤엄치는 계책을 몸에 붙이고, 양이 되어서는 노린내를 풍겨서 개미를 모으는 의도를 버리고서, 눈으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며 귀로는 귀에 들리는 대로 들으며 마음으로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 같은 이는 그 평탄한 심경은 먹줄을 친 것처럼 반듯하고, 변화할 때에는 자연의 이법을 그대로 따른다.
옛날의 진인은 자연[天] 그대로 사물을 대하는지라 인위적으로 자연[天]에 끼어들지 아니하며 옛날의 진인은 자연[天]을 얻으면 태어나고 자연[天]을 잃으면 죽으며 인위에 빠지면 죽고 인위에서 벗어나면 살아났다.
약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약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씀바귀, 도라지, 가시연, 저령(시령) 따위이다.
이것들이 그때그때의 병 증세에 따라 주약主藥이 되는 것을 어찌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군사 삼천을 끌고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가 농성하였는데 〈그러다가 결국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항복하여 모두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으나〉 오직 대부大夫 종種(文種)만이 지금 월나라의 멸망이 〈장래 월나라가〉 존속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대부大夫 종種(文種)도 〈월나라가 다시 흥한 뒤에 참언讒言을 당하게 되어 구천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월나라가 다시 일어난 것)이 자신의 근심이 되는 원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올빼미의 눈은 그 나름대로 적합함이 있고 학의 다리 또한 나름대로의 적절함이 있는데 눈과 다리를 제거해버리면 올빼미와 학이 슬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이르기를 ‘바람이 하수河水 위를 지나가면 하수가 줄어들고 해가 하수 위를 지나가면 하수가 줄어들지만 도리어 바람과 해로 하여금 함께 하수를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하수는 애초부터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 여기지 않으니 하수는 근원根源에 의지해서 흘러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흐름은 토지의 고저高低‧형상形狀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그림자가 사람의 형체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어떤 사물은 또 다른 사물에 의지함이 긴밀하다.
그러므로 눈이 밝게 보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귀가 분명하게 듣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마음이 지혜로움만 생각하면 위태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은 그 기관의 역할에 국한되면 위태로우니, 이미 위태로움이 이루어지고 나면 고치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하는지라, 화禍가 커져서(화가 화를 불러) 점점 더 많이 모이게 된다.
〈이렇게 화가 더 많아졌을 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성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위태롭기만 한 이목耳目의 총명聰明, 마음의 영지英知를〉 자기의 보물로 여기고 있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군주로서 나라를 망치는 자와 백성으로서 주륙을 당하는 자가 끊임없이 속출續出하는 것은 이것을 물어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발이 땅을 직접 밟는 부분은 협소하지만 직접 밟지 않은 땅을 믿은 뒤라야 넓게 걸어 다닐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천지 우주의 한없는 광대함에 비하면〉 매우 적다.
비록 적으나 알지 못하는 바를 믿은 뒤라야 자연[天]이 가르치는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일大一을 알고 대음大陰을 알고 대목大目을 알고 대균大均을 알고 대방大方을 알고 대신大信을 알고 대정大定을 알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대일大一은 이것을 통하게 하고, 대음大陰은 이것을 분해하고, 대목大目은 이것을 보고, 대균大均은 있는 그대로를 따르고, 대방大方은 이것을 체득하고, 대신大信은 이것을 생각하고, 대정大定은 이것을 유지한다.
이 일곱 가지를 극진히 하면 천도天道가 현현하고, 천天(自然)을 따르면 밝게 비추는 지혜가 있게 되고, 지혜가 작용하지 않는 데에서 명합冥合하면 추요樞要가 있게 되고, 우주의 시원에 저 도道가 있게 된다.
그러니 이 도道를 이해하고 있는 자는 도리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 그 도道를 알고 있는 것도 도리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알지 못하고서 그런 뒤라야 비로소 참으로 도道를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도道에 관해 물으면 그것을 무엇이라 한정지어 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런 한정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도道는〉 위에 있다가 아래에 있다가 또 이리 변하고 저리 돌아서 붙잡을 수 없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이며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변함없이 존속해서 훼손할 수 없으니 세계를 크게 싸안은 커다란 테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어찌하여 또한 이것(道)을 물어보지 않는고?
미혹되지 않은 밝은 지知로 미혹을 풀어서 미혹되지 않은 경지로 돌아가면 이것이 크게 미혹되지 않은 경지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