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요는 더 물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무유無有 선생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 모습은 멀고 텅 빈 듯하여 종일토록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들어보아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손으로 만져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광요光曜가 말했다.
“지극하구나.
그 누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무無가 있는 경지까지만 도달할 수 있고 무無조차 없는 경지에는 도달하여 무무無無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光曜問乎無有 :
光曜가 無有에게 물음. 光曜와 無有는 인명이지만 모두 허구의 인물이다. 成玄英은 “光曜는 볼 줄 아는 智이고 無有는 보이는 경계이다. 智는 비추어 살필 줄 알기 때문에 光曜라는 이름을 빌렸고 경계의 형체는 텅 비고 고요하기 때문에 無有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다[光曜者 是能視之智也 無有者 所觀之境也 智能照察 故假名光曜 境體空寂 故假名無有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終日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 搏之而不得也 :
종일토록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들어보아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손으로 만져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음. 이 구절 또한 《老子》 제14장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微라 한다[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라고 한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다.
역주3予能有無矣而未能無無也 及爲無有矣 何從至此哉 :
나는 無가 있는 경지까지만 도달할 수 있고 無조차 없는 경지에는 도달하여 無無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能有無의 경지는 有無, 곧 없다고 함이 있는 것으로 無를 대상화한 표현으로 無가 ‘있는’ 경지이고 能無無의 경지는 없다고 하는 것조차도 없다는 것으로 無를 無로서 의식하는 것조차 없는 경지, 즉 無와 하나가 된 경지를 뜻한다. 한편 焦竑, 吳汝綸, 武延緖, 劉文典 등은 《淮南子》에 의거하여 無有를 無無로 고치고, 馬叙倫, 楊樹達, 王叔岷, 安東林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으나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