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마치 가마솥 밑의 검댕처럼 홀연히 생기는 것인데 잠깐 사이에 흩어져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뀐다.
시험 삼아 옳음의 기준이 바뀌는 것을 말해보자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러하나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말해본다.〉 섣달 납제사를 지낼 때 소를 희생으로 바치는데 소의 내장과 굽은 따로 나누어야 하지만 〈제사를 지낼 때는 한 마리 온전한 소를 바쳐야 하기 때문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
또 집을 둘러볼 때 침전寢殿과 사당祠堂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는 뒷간을 살펴보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는 일에 해당한다.
시험 삼아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는 것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삶을 근본으로 여기고 앎을 스승으로 받들고서 이것을 따라 시비를 가르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명목과 실질의 분리가 생겨나고 이어서 자기의 기준을 바탕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명절名節(명예)을 인정하게 하고 이어서 죽음으로 그 명절에 보상하니 이 같은 자는 쓰임이 있는 것을 지혜롭다 여기고 쓰이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다 여기며 세상에 통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곤궁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니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이는 〈대붕大鵬을 비웃는〉 매미나 작은 새들이 함께 하는 짓을 같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