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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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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有魚하니 其名爲이니
북녘 검푸른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이 물고기가 변신을 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이라고 한다.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로다
이 붕새의 등 넓이는 이 또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而飛 其翼하니
온몸의 힘을 다해 날면 그 활짝 편 날개는 하늘 한쪽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是鳥也 則將徙於하나니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끝의 검푸른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南冥者
남쪽 바다란 하늘의 못, 천지天池이다.
志怪者也
제해齊諧라고 하는 사람은 괴이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諧之言
제해齊諧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하고 而上者九萬里하야
이 남쪽 바다로 날아 옮겨 갈 때에는 〈그 큰 날개로〉 바다의 수면水面을 3천 리나 치고서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리하여 여기 북쪽 바다 상공을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아지랑이와 티끌은 〈천지 사이의〉 살아 있는 생물들이 입김을 서로 내뿜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그 본래의 제 빛깔인가.
其遠而無所至極邪
아니면 끝없이 멀고 멀기 때문일까.
其視下也 亦若是니라
이 〈9만 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하니
그런데 물이 괴어 쌓인 것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다.
覆杯水於之上 則芥爲之舟하나 置杯焉則膠하나니
그러니 한 잔의 물을 마루의 움푹 패인 자리 위에 엎지르면 기껏 티끌 정도가 그 위에 떠서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뜨지 못하고 바닥에 닿고 만다.
水淺而舟大也일새니라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하니
바람이 두터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짊어져 띄울 만한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의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붕의 큰 날개를 지탱할 만한〉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쌓이게 된다.
而後에야 乃今하고 背負靑天而 而後에야 乃今將하나니라
그런 뒤에 이제서야 붕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채 갈 길을 막는 장애障碍가 하나도 없게 된 뒤에 비로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도모하려고 한다.
笑之하야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而飛하야
楡枋호대 而已矣로니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르되, 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붕새는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而反하야도 腹猶하고 適百里者 하고 適千里者 三月聚糧하나니
가까운 교외郊外의 들판에 나가는 사람은 세 끼니의 밥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아직 부르고,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식량을 방아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3개월 전부터 식량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이 두 벌레가 〈이처럼 큰 일에는 큰 준비가 필요한 이치를〉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
小知 不及大知하며 小年 不及大年하나니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무엇으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하며 하나니 此小年也
조균朝菌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짧은 수명의 이다.
楚之南하니 以五百歲 爲春하고 五百歲 爲秋하며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5백 년을 봄으로 하고 5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
옛날 상고上古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으니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乃今 以久 特聞이어늘 하나니 不亦悲乎
그런데 팽조彭祖는 지금 장수로 유독 유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기를 바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나라의 임금이 현자賢者로 이름 높은 에게 물어서 들은 내용도 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有冥海者하니 天池也
“초목이 나지 않는 불모지의 북녘에 검푸르고 어두운 바다가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못, 천지天池입니다.
有魚焉하니 其廣 數千里 未有知其하니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는 수천리이고 그 길이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其名爲鯤이라
그 이름을 이라고 합니다.
有鳥焉하니 其名爲鵬이니
거기에 새가 있으니 그 이름을 이라고 합니다.
背若하고 翼若垂天之雲하니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 한 쪽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습니다.
〈이 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의 뿔처럼 빙글빙글 선회하면서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絶雲氣하며 負靑天 然後圖南하야 且適南冥也하나니라
구름 위로 뚫고 나가 푸른 하늘을 짊어진 연후에 남쪽으로 가기를 도모하며 바야흐로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가려고 합니다.
笑之曰 彼且奚適也
메추라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것인가.
我騰躍而上호대 不過數而下하야 하노니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몇 길을 지나지 않고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닐 뿐이다.
此亦
이것이 또한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최상의 경지이다.
而彼且奚適也오하니
그런데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 가〉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此小大之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저 지식知識은 한 관직을 맡아 공적을 올릴 만하고 행실은 한 고을의 인망人望비합比合하며 능력은 군주의 마음에 들어 한 나라에 쓰여지는 사람들도 그 스스로를 보는 것이 이 메추라기와 같을 것이다.
笑之하야
그런데 송영자宋榮子는 이런 자기 만족의 인물들을 빙그레 비웃는다.
그리하여 그는 온 세상이 모두 그를 칭찬하더라도 더 힘쓰지 아니하며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비난하더라도 더 가 꺾이지 아니한다.
그러니 그는 자기의 내면內面과 밖의 외물外物의 구분을 확립하고 영예나 치욕 따위가 바깥 경역境域의 일임을 변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할 뿐이다.
彼其於世 로다마는 雖然이나 로다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하기는 하나 비록 그러나 아직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주체성이 수립樹立되지 않고 있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조종하여 하늘을 날아다녀 가뿐가뿐 즐겁게 잘 날아서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
彼於 未數數然也니라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의 행복을 구하는 일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此雖免乎行이나 猶有所待者也니라
그러나 이런 사람은 비록 걸어다니는 번거로움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아직 무엇엔가 의존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저 〈바람 정도가 아닌〉 하늘과 땅의 바른 를 타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조종하여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것이겠는가.
그래서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공적이 없고 성인聖人은 명예가 없다’고 한다.
역주
역주1 北冥 : 북쪽 바다, 곧 北海. 冥은 溟으로 된 판본도 있다(《釋文》). 東方朔의 《十洲記》에는 “바닷물이 검푸른 것을 명해라 하니 바람이 없는데도 큰 파도가 백 길이나 인다[水黑色 謂之冥海 無風洪波百丈].”고 했고, 嵆康은 ‘아득하여 끝이 없는 뜻을 취한 것[取其溟漠無涯也]’이라고 풀이했고, 梁의 簡文帝는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에 冥이라 한 것[窅窅無極 故謂之冥]’이라고 풀이했다. 이들 주석을 종합해 보면 北冥의 冥은 ‘暗黑色’의 뜻과 ‘아득하여 끝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北溟은 저 북쪽 끝의 검푸른 바다를 가리킨다. 아래 문장에도 ‘窮髮之北有冥海者’라는 구절이 보인다. 東方朔은 前漢 武帝 때 사람으로 전설에 의하면 仙術에 능했다고 하며 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長壽를 누렸다고 한다. 嵆康은 魏‧晉 때의 인물로 竹林七賢의 한 사람(223~262). 梁 簡文帝의 梁은 南北朝시대 南朝의 나라 이름. 《釋文》은 唐의 陸德明(육덕명, 556~627)의 《經典釋文》을 말함.
역주2 鯤(곤) : 물고기 이름. 淸 郭慶藩은 方以智의 견해를 따라 “곤은 본래 작은 물고기의 이름인데 장자는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썼다[鯤本小魚之名 莊子用爲大魚之名].”고 풀이했다. 곧 알에서 막 자란 작은 물고기인 鯤을 더할 수 없이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에서 齊物의 뜻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의 鯤은 작은 것을 큰 것에 비유한 것이라면, 〈齊物論〉편 제1장의 “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고 한 것은 큰 것을 작은 것에 비유한 표현이다. 李頤는 鯤을 ‘큰 물고기 이름[大魚名也]’이라고 풀이했다.
역주3 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 곤의 크기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음. 唐 成玄英은 《玄中記》를 인용하여, “동방에 큰 물고기가 있는 데 지나가는 사람이 하루 종일 걸려서 魚頭를 통과하고 7일 걸려서 魚尾를 통과하며 또한 이 물고기가 出産하는 3일 동안은 푸른 바다가 이 때문에 붉게 변한다[東方有大魚焉 行者一日過魚頭 七日過魚尾 産三日 碧海爲之變紅].”고 풀이했다. 1里는 약 400미터. 韓元震은 “곤과 붕의 큼은 지인의 도가 큼을 비유한 것이고, 아래에서 또 야마와 진애, 조구와 척안 같은 작은 사물을 든 것은 곤과 붕이 지극히 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鯤鵬之大 以喩至人之道大 其下又引野馬塵埃蜩鳩斥鷃之小 以見鯤鵬之至大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 化而爲鳥 : 변신을 해서 새가 됨. 化는 변화, 변신, 轉生의 뜻. 《莊子(上‧下)》(日本, 學習硏究社)의 저자 池田知久는 化란 어떤 物이 그 物로서는 죽지만 그에 의해서 다른 物로 태어나는 것, 즉 轉生이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轉生 사상은 《장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이며 여기서 붕새를 鯤(물고기)에서 鵬(새)로 변화한 것으로 표현한 것은 곤이나 붕이 아무리 거대한 존재일지라도 결국은, 만물을 化하게 하는 道일 수는 없고 化의 대상인 物에 불과함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다(池田知久).
역주5 其名爲鵬 : 그 이름을 鵬이라 함. 鵬은 전설상의 靈鳥. 崔譔은 ‘鵬은 鳳의 古字[鵬卽古鳳字]’라고 풀이했다.
역주6 : 온몸의 힘을 다함. 淸 林雲銘은 《莊子因》에서 “온몸에 힘을 꽉 집어넣는다[用力之意].”는 뜻으로 풀이했고 民國 馬叙倫은 힘쓴다[勉]는 뜻으로 풀이했다. 여기의 怒와 유사한 용례는 〈齊物論〉편 제1장의 ‘怒者其誰邪’와 〈人間世〉편 제3장의 ‘汝不知夫螳螂乎 怒其譬當以車轍’에 보인다(池田知久).
역주7 垂天之雲 : 하늘에 드리운 구름. 垂는 드리운다는 뜻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을 표현. 司馬彪는 “구름이 하늘 한 곁에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若雲垂天旁].”고 풀이했다.
역주8 海運 : 바다가 움직임. 육덕명, 성현영 등은 運을 轉으로 풀이했고, 곽경번은 《玉篇》을 근거로 運을 行의 뜻으로 풀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이래로 懸吐되어 읽혀 왔던 南宋 林希逸의 《莊子口義》에서는 運을 動의 뜻으로 보고[海運者 海動也], “바다가 움직이면 반드시 大風이 있다[海動 必有大風].”고 풀이했는데 여기서는 임희일의 견해를 따랐다.
역주9 南冥 : 남쪽 바다. 이 글 첫머리의 ‘北冥’과 여기의 南冥은 〈應帝王〉편 제7장의 ‘北海’‧‘南海’와 마찬가지로 物이 존재하는 無限한 空間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붕새가 북명으로부터 남명으로 옮겨 가려고 나는 것은 무한한 존재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飛翔임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붕새가 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北에서 南으로 옮겨 가는, 곧 物이 존재하는 세계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物에 불과함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역주10 天池 : 하늘의 못. 성현영은 “큰 바다와 넓은 하천은 자연의 造化에 근본하여 이룩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天池라고 한 것이다[大海洪川 原夫造化 非人所作 故曰天池也].”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北冥도 역시 天池임을 알 수 있다(安東林, 《莊子》, 현암사). 이는 아래 문장의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에 의해서도 분명하다(池田知久).
역주11 齊諧 : 人名. 또는 書名. 林希逸은 “제해는 책 이름이다. 여기에 記述되어 있는 내용은 모두 지금의 《山海經》과 같은 유의 괴이하고 상식에 벗어난 일들이다[齊諧書名也 其所志述者 怪異非常之事 如今山海經之類)].”라고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司馬彪, 崔譔, 成玄英, 池田知久 등의 견해를 따라 사람 이름으로 보았다. 齊가 姓, 諧가 이름. 그러나 여기의 齊는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齊物論〉편의 ‘齊同’이나 ‘齊一’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齊나라 사람이란 뜻으로 齊를 성으로 하고, 諧讔(수수께끼, 우스갯소리)의 뜻을 따서 諧를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司馬彪, 崔譔, 成玄英 및 池田知久 등의 견해 참조). 志는 인명일 경우에는 記(기억한다)나 知(안다)의 뜻이고, 서명일 경우에는 記述의 뜻.
역주12 摶(단)扶搖 : 회오리바람을 탐. 摶은 ‘바람 風’자와 합하여 摶風이라 할 때는 빙 돌며 날다, 새가 바람을 타고 날쌔게 날아오르다의 뜻. 王叔岷의 《莊子校詮》에서는 “摶과 搏은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 잘못 쓰여졌을 것이며, 搏은 拍(날개로 친다)과 같다.”고 풀이했다. 安東林도 같은 견해. 실제로 《老子》에서도 摶과 搏이 판본에 따라 혼동되고 있는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摶之不得 名曰微 《老子》제14장). 扶搖는 회오리바람[旋風]. 《爾雅》 〈釋天〉의 郭璞(276~324) 註에는 “세찬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부는 것이다[暴風從下上也].”라 하였다.
역주13 去以六月息者也 :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쉼. 以六月은 ‘6개월 동안 즉 반년을 난 뒤’라는 뜻이고 息은 숨쉰다는 뜻. 晉 郭象(?~312?)은 “큰 새는 한 번 떠나면 반년을 날아 천지에 이르러 쉬고, 작은 새는 한 번 날면 반나절을 날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이르러 그친다[夫大鳥一去半歲 至天池而息 小鳥一飛半朝 搶楡枋而止].”고 풀이했는데 小鳥 이하의 내용은 아래에 이어지는 장자의 본문에 보인다. 또 林希逸은 “이 새가 왕래할 때에는 〈한 번 움직여 날아오른 뒤에〉 반드시 반년 동안 휴식해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此鳥之往來 必歇住半年 方可動也].”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르면 “鵬은 남쪽 바다로 날아간 뒤에 반년 동안의 휴식을 취한다.”고 해석해야 한다(여기서는 不取). 한편 淸 宣穎은 息을 風으로 보고, 六月息을 6월의 大風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去以六月息者也는 6월의 태풍(큰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安東林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그런데 《장자》의 이 글이 인용된 《太平御覽》에는 息 위에 ‘一’자가 있고, 李白의 〈大鵬賦〉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王叔岷), 六月息을 六月의 息(대풍)으로 읽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池田知久).
역주14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 이 세 구절은 ‘A와 B는 C이다’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古來로 이설이 분분하다. “아지랑이인가[野馬也], 티끌 먼지인가[塵埃也], 살아 있는 생물들이 내뿜는 입김이던가[生物之以息相吹也].”로도 읽을 수 있지만 우선 통설을 따라 번역하였다. 安東林이 Burton Watson의 英譯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참조할 만하다.
역주15 野馬 : 아지랑이. 郭象은 ‘野馬는 일렁거리는 기[野馬者 游氣也]’라고 풀이했는데, 원래는 말[馬]의 일종이다. 《爾雅》 〈釋畜〉의 郭璞 註에는 “말과 같은 생김새이지만 말보다 작고 변방지역 밖에서 난다[如馬而小 出塞外].”고 풀이했고, 《穆天子傳》에도 “야마는 오백 리를 달린다[野馬走五百里].”고 한 기록이 있는데, 郭璞은 역시 “야마는 또한 말과 같지만 그보다 작다[野馬亦如馬而小].”고 풀이했다. 池田知久는 崔譔의 註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野馬의 재빠른 내달림과 비슷해서 이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6 塵埃 : 티끌. 野馬와 塵埃를 동일시하여 野馬를 塵埃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굳이 池田知久가 인용한 北宋 沈括(1030~1094)의 《夢溪筆談》을 끌어대지 않더라도 野馬와 塵埃는 별개의 것으로 ‘野馬와 塵埃’로 읽는 것이 옳다.
역주17 生物之以息相吹也 : 살아 있는 생물들이 입김을 서로 내뿜는 데서 생겨남. 生物은 〈人間世〉편 제3장에서도 살아 있는 생물의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池田知久), 살아 있는 생물로 번역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朴世堂(1629~1703)의 경우는 《南華經註解刪補》에서 대붕은 〈크기 때문에〉 큰 바람을 타야 날 수 있지만 아지랑이나 티끌 따위는 〈작기 때문에〉 생물체가 내뿜는 숨에 의해서도 움직인다는 뜻으로 보았다. 崔譔 등이 吹를 動으로 풀이하고 있고, 또 아래의 문장에 “바람이 두터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박세당의 이 견해는 대단히 유력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이 구절은 “생물체가 숨쉬는 대로 따라 움직인다.”로 번역해야 한다.
역주18 天之蒼蒼 其正色邪 :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그 본래의 제 빛깔인가. 邪는 의문형 종결사. 이 구절은 〈齊物論〉편 제3장의 ‘正處’, ‘正味’, ‘天下之正色’의 논의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19 則已矣 : 단정의 뜻을 타나내는 종결사. 則은 而와 통용, 곧 而已矣와 같다.
역주20 坳堂(요당) : 마루의 움푹 패인 자리. 坳는 깊이 패인 곳 [陷也 凹也]. 林希逸은 ‘坳堂 堂上坳深處也’라 주해하고 있다.
역주21 九萬里則風斯在下矣 : 9만 리의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쌓이게 됨. 이 부분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步行의 번거로움을 초월한 列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람[風]이라고 하는 그 무엇엔가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초연(超然)이라고 볼 수 없다는 아래 문장의 표현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상식을 뛰어 넘은 9만 리의 높이에서 태풍과 같은 엄청난 큰 바람에 날개 치며 天空을 나는 雄渾壯大한 大鵬의 飛翔에 대한 찬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福永光司는 이 부분을 두고 “이 경우 이 大鵬이 일체의 땅 위에서의 꿈틀거림과 인간적인 卑小함을 超克하여 커다란 세상을 활보하는 至大한 人間, 즉 絶對者를 象徵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莊子에 있어서의 절대자는 超越者 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福永光司, 《莊子》, 日本, 朝日新聞社).
역주22 培風 : 바람을 탐. 林希逸은 培를 두터울 厚의 뜻으로 보고 “培는 厚이다. 9만 리의 바람이라야 비로소 두터운 바람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이처럼 두터운 바람이라야 비로소 붕새의 날개를 실을 수 있다[培厚也 九萬里之風 乃可謂之厚風 如此厚風 方能負載鵬翼].”고 풀이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재래의 현토본에서도 培를 厚라는 뜻의 관형사로 보기 때문에 ‘乃今培風이며’로 현토하고 있으나 이 해석은 취하지 않는다. 郭慶藩은 淸 王念孫(1744~1832)의 《讀書雜志》(莊子雜志)를 인용하여 培를 馮의 假借字로 보고 乘의 뜻으로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견해를 따라 培를 乘이라는 뜻의 동사로 보고 ‘乃今培風하고’로 현토했다.
역주23 莫之夭閼(알) : 障碍가 하나도 없음. 성현영은 夭는 ‘꺾어짐[折也]’, 閼은 ‘막힘[塞也]’으로 풀이했다. 林希逸도 ‘장애가 없는 것[莫之夭閼 無障礙也]’으로 풀이했는데 같은 견해이다.
역주24 圖南 : 남쪽으로 가는 것을 도모함. 林希逸은 “도남은 북해에서 남쪽으로 옮겨갈 것을 도모함이다. 도는 모이다[圖南 自北海而謀南徙也 圖謀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5 蜩與學鳩 : 매미와 작은 비둘기. 蜩는 매미로 《說文解字》에서는 蟬으로 풀이하고 있다(林希逸). 學은 鷽(학, 小鳩, 작은 비둘기)과 같다(《釋文》). 그래서 學鳩는 통상 小鳩, 곧 작은 비둘기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禮記》 〈月令〉편에 “새매가 비로소 날개짓을 배운다[鷹乃學習].”는 내용이 있고, 〈王制〉편에 “새끼 새가 매가 된 뒤에 그물을 친다[鳩化爲鷹然後設罻羅].”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學에 날개짓을 배운다는 뜻이 있고 鳩에 새끼 새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여기의 學鳩는 막 날개짓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蜩與學鳩는 스스로의 無知와 無力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위대한 자를 비웃는 무리를 상징한다. 三國時代 魏나라의 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었던 阮籍(210~263)의 〈詠懷詩〉에서 “작은 비둘기는 뽕나무나 느릅나무까지 날고 해조는 천지까지 날아간다[鷽鳩飛桑楡 海鳥運天池].”고 한 구절은 바로 《장자》의 이 글에 근거한 것이며(王叔岷), 이 책 〈庚桑楚〉편 제7장에 보이는 ‘蜩與學鳩’도 이 편의 글을 답습한 것이다(池田知久). 〈경상초〉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 같은 자들은 세상에서 쓰여짐을 知라 하고, 세상에 쓰여지지 않음을 愚라 하며, 세상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 주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세상에 쓰여지지 않아 곤궁한 것을 치욕이라 한다. 是非를 내세워 대립하는 자들이 오늘날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미나 작은 비둘기들이 大鵬을 비웃는 것과 같은 자들이다[若然者 以用爲知 以不用爲愚 以徹爲名 以窮爲辱 移是 今之人也 是蜩與學鳩同於同也].” 이 문장은 또 아래의 ‘夫知效一官’ 이하의 내용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26 決起 :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오름. 林希逸은 ‘분기하여 나는 것[奮起而飛也]’으로 풀이했다.
역주27 槍(搶)楡枋 :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날아가 머묾. 대본의 槍은 搶과 통하여 이르다, 도달하다, 머물다의 뜻. 林希逸은 搶을 突(부딪치다, 돌진한다)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날아가서 머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역주28 : 搶
역주29 時則不至而控於地 : 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짐. 王念孫은 則을 或으로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랐다. 林希逸은 “때로 그것조차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有時猶不能至].”로 풀이했는데 같은 뜻이다. 控은 떨어진다[投]는 뜻(林希逸, 安東林).
역주30 奚以之九萬里而南爲 : 무엇 때문에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가는가. 之는 가다는 뜻의 동사. ‘奚以…爲’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의 뜻. 爲는 劉淇의 《助字辨略》이나 王引之의 《經傳釋詞》에 의해 反語를 나타내는 助字로 보는 견해(池田知久)가 유력하다. 馬叙倫의 《莊子義證》에서도 爲를 乎로 읽고 있다(安東林). ‘何以…爲’ 또는 ‘何…爲’와 같은 형식의 구문은 이 부분 이외에도 〈德充符〉편 ‘彼何賓賓以學子爲’, 〈外物〉편 ‘死何含珠爲’, 〈應帝王〉편 ‘汝又何帠以治天下感予之心爲’ 등에서도 보이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허사로 쓰였다. 한편 《孟子》에도 〈滕文公 下〉 ‘惡用是鶂鶂者爲哉(爲가 잡아 먹다는 뜻의 실사로 쓰임)’, 〈滕文公 下〉 ‘子何以其志爲哉(爲는 말하다, 간주하다의 뜻)’, 〈離婁 上〉 ‘恭儉豈可以聲音笑貌爲哉(爲는 꾸미다의 뜻)’, 〈萬章 上〉 ‘我何以湯之聘幣爲哉(爲는 마음에 두다의 뜻)’ 등에 爲자가 보이는데, 《장자》와는 달리 대부분 哉자와 함께 쓰이면서 실사로 쓰였다.
역주31 適莽蒼(적망창) : 가까운 郊外의 들판에 나감. 莽蒼은 近郊의 들판.
역주32 飡(손) : 飧의 俗字. 飱도 마찬가지. 우리나라 재래의 林希逸 현토본에서는 ‘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33 果然 : 배부른 모양. 成玄英은 배부른 모양[飽貌]으로 풀이했다. 安東林은 果는 열매를 뜻하는 글자인데 과일의 형태가 둥근 데서 배부름을 뜻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34 宿舂(용)糧 : 전날 밤에 식량을 찧음. 宿은 전날 밤. 舂은 방아를 찧다의 뜻.
역주35 之二蟲又何知 : 이 두 벌레가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 之는 是의 뜻. 이 편의 제3장에도 ‘之人也 之德也’라는 표현이 나오며, 〈則陽〉편 제8장에도 ‘之二人何足以識之’라는 표현이 보인다. 蟲은 벌레이지만 날짐승을 羽蟲이라 하고 길짐승을 毛蟲이라 하는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물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여기서는 작은 동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二蟲은 林希逸이 매미와 비둘기로 본 견해[二蟲者 蜩鳩也]를 따랐다. 그런데 郭象은 二蟲을 〈큰〉 붕새[鵬]와 〈작은〉 매미[蜩]로 보고, 何知를 알 필요가 없다, 알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보아, “〈鵬과 蜩는〉 모두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고 저절로 그럴 따름이다. 저절로 그러함은 작위하지 않음이니 저절로 그러하고 작위하지 않음이야말로 逍遙의 큰 뜻이다[二蟲謂鵬蜩也……皆不知所以然而自然耳 自然耳 不爲也 此逍遙之大意].”라고 풀이했다. 곽상의 이 같은 풀이는 후세에 ‘自然而然’, ‘機自爾’ 등의 철학용어가 생기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는 하나 이 부분 자체의 해석에는 적절치 않다. 淸의 兪樾(1821~1906)이 이미 곽상 해석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유월은 “二蟲은 곧 위 글에서 매미와 비둘기가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鵬을〉 비웃는 것을 이어 말한 것이니, 매미와 비둘기는 지극히 작아서 붕새의 큼을 알지 못함을 두고 말한 것이다. 郭註에서는 二蟲은 붕새와 매미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二蟲卽承上文蜩鳩之笑而言 謂蜩鳩至小 不足以知鵬之大也 郭註云二蟲謂鵬蜩也 失之].”라고 하였다.
역주36 奚以知其然也 : 무엇으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이 句의 해석은 대체로 성현영의 풀이를 따라 “무엇으로, 小知는 大知에 미치지 못하고 小年은 大年에 미치지 못함을 아는가?”의 뜻으로 보거나(安東林), “어떻게 그러한 것을 아는가?”로 번역하는 경우(李基東, 《장자 내편》, 동인서원)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래의 현토본에서는 이 句에 反語의 토를 달아 ‘奚以知其然也리오’로 읽고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어떻게 〈小知‧小年이 大知‧大年의〉 그러함을 알 수 있으리오.”라고 하는 反語의 문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는 우선 일반적인 의문문으로 이해하는 성현영 이래의 통설을 따라 ‘奚以知其然也오’로 현토하였다.
역주37 朝菌不知晦朔 : 朝菌은 한 달의 길이를 알지 못함. 朝菌은 陰濕한 퇴비 위에 아침에 생겨났다가 햇빛을 보면 말라 버리는 버섯. 《淮南子》 〈道應訓〉에는 ‘朝秀’로 되어 있는데 高誘의 註에는 ‘조수는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죽는 벌레[朝秀 朝生暮死之蟲也]’라고 풀이하여 벌레 이름으로 보았지만, 실제 버섯의 식생과 일치하기 때문에 벌레보다는 버섯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晦朔은 그믐과 초하루, 밤과 새벽 등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는 한 달(1개월)의 길이로 보았다.
역주38 蟪蛄不知春秋 : 쓰르라미는 봄, 가을의 길이를 알지 못함. 儒家에서는 평화적 정권이양을 禪讓이라 하고 무력혁명을 통한 정권의 변동을 放伐이라 하며, 禪讓의 堯‧舜과 放伐의 湯‧武를 다같이 古之聖王으로 숭앙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한편 湯‧武의 放伐을 堯‧舜의 禪讓만큼은 盡善하지 못하다고 貶下하는 견해가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茶山 丁若鏞(1762~1836)은 〈湯論(湯王論)〉에서 儒敎的 革命論(放伐當然論)을 전개하여 放伐을 貶下하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글의 末尾를 장자의 이 문구 ‘蟪蛄不知春秋也’로 끝맺고 있다.
역주39 冥靈 : 나무 이름. 李頤, 成玄英, 林希逸 등은 모두 나무 이름[木名也]으로 풀이했다. 한편 羅勉道는 冥海의 靈龜라 하여 거북이의 이름으로 풀이했고, 方以智도 이를 따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앞의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40 大椿 : 나무 이름. 임희일은 나무 이름[亦木名也]으로 풀이하고 “이 역시 寓言이니 반드시 그 실제를 찾을 필요는 없다[此亦寓言 不必求其實].”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寓言〉편의 제1장에는 ‘우언이 열 가운데 아홉[寓言十九]’이라고 할 정도로 《장자》에는 寓言이 많다.
역주41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음. 池田知久는 宋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 인용한 成玄英本에는 이 아래에 ‘此大年也’의 한 句가 더 있다고 지적하고 아마도 그것이 옳을 것이라 하고 있다.
역주42 彭祖(팽조) : 인명. 堯 임금 이래로 殷(商)나라 때까지 7백〈또는 8백〉 세를 살았다는 전설적 長壽者. 崔譔은 “堯의 신하로 殷代에 벼슬하였는데 그 사람의 壽命은 7백 년이다[堯臣 仕殷世 其人甫壽七百年].”라고 풀이했다. 彭祖와 관련된 상세한 古文獻 자료는 池田知久의 《莊子》에 자세하다.
역주43 衆人匹之 : 세상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기를 바람. 임희일은 匹을 “사모하여 그와 비슷하게 되기를 바란다[慕而求似之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4 湯之問棘(극)也是已 : 湯임금이 棘에게 물어서 들은 내용도 이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 湯은 夏王朝의 桀王을 쳐서 새로이 殷王朝를 세운 天子. 棘은 탕왕 때의 賢者. 《釋文》 李頤는 ‘탕임금 때의 현인[湯時賢人]’이라 풀이했고, 成玄英은 ‘극이란 사람은 탕임금 때의 현인[棘者 湯時賢人]’이라고 풀이했다. 《列子》 〈湯問〉편에는 ‘殷湯問夏革曰’로 시작하는 비슷한 내용의 글이 있는데 夏棘의 棘과 革(극)은 음이 가까워 통한다. 비슷한 내용이 革이 대답한 말에 있기 때문에 問棘也를 여기서는 ‘극에게 물〈어서 들〉은 내용’이라고 번역했다. 是已는 이것일 따름이다, 이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
역주45 窮髮之北 : 불모지의 북쪽. 《列子》 〈湯問〉편에는 ‘終髮之北’으로 되어 있다. 窮髮은 초목이 나지 않는 황량한 不毛地.
역주46 : 脩와 同字. 길이. 《方言》에 “脩는 길다는 뜻이다. 陳楚 사이에서 脩라고 한다[脩……長也 陳楚之間曰脩].”라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南方의 方言일 것이다(池田知久).
역주47 太山 : 泰山으로 된 本도 있다.
역주48 摶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 회오리바람을 타고 羊의 뿔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감. 摶扶搖는 앞에 이미 나왔다. 羊角은 司馬彪가 “바람이 양뿔처럼 위로 올라간다[風曲上行若羊角].”고 한 풀이를 따라 ‘羊角처럼 빙글빙글 선회하면서’로 번역하였으나 본시 바람의 이름이다. 扶搖도 회오리바람, 羊角 역시 회오리바람으로 보는 번역문도 많다. 林希逸도 “부요는 바람의 형세이다. 양각 역시 바람이 굴곡하는 형세이다[扶搖 風勢也 羊角亦風之屈曲勢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9 斥鴳(척안) : 메추라기. 林希逸은 “斥은 작은 못이다. 작은 못의 메추라기는 작은 새이다[斥小澤也 斥澤之鷃 小鳥也].”라고 풀이했는데 鴳은 현토본에는 鷃으로 되어 있다. 鷃은 鴳과 같은 字이다.
역주50 仞(인) : 길이의 단위. 한 길[仞]은 7척 또는 8척.
역주51 翶翔蓬蒿之間 :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님. 翶翔은 날아다님, 蓬蒿之間은 쑥대밭 사이.
역주52 飛之至 : 날아다닐 수 있는 최상의 경지. 林希逸은 “飛之至란, 나는 쑥대밭 사이를 날 뿐인데, 그렇게만 날아도 지극히 즐겁다. 어찌 하필 다른 데로 가야 하는가[飛之至者 言我翶翔蓬蒿之間 其飛如此 亦至樂矣 又何必他往哉].”라고 하여 至를 至樂의 뜻으로 풀이했다. 이 견해를 따라 최상의 경지라고 번역하였다.
역주53 : 차이, 구별의 뜻. 辨의 借字(民國 奚侗의 《莊子補注》). 《장자》에서 辯과 辨의 혼용은 이 밖에도 많으며, 현토본에는 아예 辨으로 되어 있다.
역주54 知效一官 : 知識이 한 관직을 맡아 공적을 올릴 만함. 知는 지식. 곧 知가 한 관직을 감당할 만하다, 한 관직에 통달하다는 뜻. 朴世堂은 效를 辦으로 풀이했는데 취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55 行比一鄕 : 행실이 한 고을의 人望에 比合함. 比는 合(《釋文》 李頤) 또는 比合(林希逸, 朴世堂)의 뜻. 임희일은 “그 행실이 한 고을의 人望에 親合해서 사람들을 歸向하게 할 만함을 말한 것이다[言其行可以比合一鄕 而使人歸向也].”라고 풀이했다. 比를 덮는다는 뜻(庇자의 假借字)으로 보는 吳汝綸의 풀이를 따르는 견해(金谷治)도 있으나 취하지 않는다.
역주56 德合一君而徵一國 : 능력은 군주의 마음에 들어 한 나라에 쓰여짐. 德은 능력, 功能의 뜻. 德合一君은 한 나라의 군주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뜻이고, 徵一國은 한 나라에 기용되어 쓰여짐을 말한다. 여기서는 성현영 등의 견해를 따라 而를 접속사로 보았지만 郭慶藩의 경우는 能과 而는 古音이 비슷하여 通用된 것으로, 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安東林은 곽경번의 견해를 따랐으나 여기서는 취하지 않았다.
역주57 其自視也 亦若此矣 : 그 스스로를 보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여김이 메추라기와 같을 것이라는 뜻. 곧 ‘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而徵一國’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卑小함을 자각하지 못함을 말한다. 임희일은 “이 세 무리의 사람은 각각 자기의 능력을 스스로 제일이라 생각하여 그 스스로를 보는 것이 또한 메추라기와 같다[此三等人 各以其所能爲自是 其自視亦如斥鷃之類].”라고 풀이했으며, 朴世堂도 “若此는 매미와 비둘기가 스스로의 飛翔을 최상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若此 言猶蜩鳩之自以爲至也].”라고 풀이했다.
역주58 宋榮子 : 인명. 宋나라의 사상가. 이름(또는 字)은 牼(경, 《孟子》 〈告子 下〉) 또는 銒(견, 《荀子》 〈非十二子〉편, 《莊子》 〈天下〉편). 宋子(《荀子》 〈天論〉‧〈解蔽〉편과 《漢書》 〈藝文志〉), 宋榮子(《莊子》 本篇과 《韓非子》 〈顯學〉편), 또는 子宋子(《荀子》 〈正論〉편)라고 존칭되었다(池田知久). 전쟁의 利롭지 못함을 口號로 한 反戰의 提唱에 대해 “선생의 뜻은 크지만 선생의 구호는 옳지 않다[先生之志則大矣 先生之號則不可].”고 孟子로부터 비판받기도 했으나, 宋榮子의 反戰平和의 주장은 寡欲說과 無抵抗主義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사상의 상세한 소개와 비평은 《장자》의 〈天下〉편을 참조할 것.
역주59 猶然 : 웃는 모습. 林希逸, 朴世堂은 ‘웃는 모습[笑貌也]’으로 풀이했다.
역주60 且擧世……而不加沮(저) : 擧는 皆와 같다(成玄英). 沮는 ‘풀죽은 모습[意氣沮喪]’. 加勸, 加沮는 勸‧沮를 加한다는 뜻이지만, 《孟子》 〈梁惠王 上〉의 ‘隣國之民不加少(인국의 민이 더 적어지지 아니하며)’의 경우와 같이 加하다는 동사로 풀이하는 것보다는 ‘더’라는 부사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 不加勸, 不加沮는 더 우쭐거리지 않고 더 기죽지 않는, 세속의 毁譽褒貶에 초연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斯已矣……猶有未樹也’라 한 것처럼 宋榮子의 이 같은 경지는 아직 절대자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池田知久는 이 부분의 글을 이어받은 《文子》 〈上禮〉편의 “至人은 死生의 뜻이 정해지고 榮辱의 이치에 통해서 온 세상이 기리더라도 더 우쭐대지 않고 온 세상이 비난하더라도 더 저상되지 않아 至道의 要諦를 얻었다[若夫至人 定乎死生之意 通乎榮辱之理 擧世譽之 而不益勸 擧世非之 而不加沮 得至道之要也].”라고 한 문장을 들어 道家의 理想的 人間像을 宋榮子 정도의 수준으로 낮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아래 문장의 ‘斯已矣’에서도 같은 맥락의 내용이 나온다.
역주61 定乎內外之分 : 자기의 內面과 밖의 外物의 구분을 확립함. 宋榮子는 本心이 內이고 모든 物은 外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와 외의 구분을 확실하게 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林希逸).
역주62 辯乎榮辱之境 : 영예니 치욕 따위가 바깥 境域의 일임을 변별함. 辯은 辨의 假借字. 현토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다. 境이 竟으로 된 本도 있다. 경계, 경역의 뜻. 《集釋》에서는 竟과 境은 古字에 통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영예와 치욕의 경역을 변별한다는 의미이지만, 林希逸은 外物의 세계를 좇으면 영예와 치욕이 있게 되고 내면의 本心에 충실하면 영예와 치욕에 초연할 수 있다고 이해하여 “명예와 치욕이 모두 바깥 경역의 일임을 변별한다[能辨榮辱皆外境矣].”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랐다.
역주63 斯已矣 : 이러할 뿐임. 郭象은 “역시 이에서 지나지 못한다[亦不能復過此].”고 풀이했다. 朴世堂도 “三等人은 榮子의 웃음을 사지만, 영자의 道도 이러할 뿐이니, 역시 이로써 自足하는 자이다[三等人乃榮子所笑 而榮子之道 又如斯而已 則亦以此自足者].”라고 풀이했다.
역주64 未數數然也 : 급급해 하지 않음. 곧 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하다는 뜻. 數數은 ‘급급하다[汲汲也]’(《釋文》 司馬彪, 成玄英) 또는 ‘촉박한 뜻[迫促意也]’(《釋文》 崔譔). 급히 서둔다, 허둥지둥한다, 악착스럽다는 뜻. 然은 상태를 나타내는 語助辭. 여기서는 未數數然을 악착스럽지 않다, 超然하다로 풀이한다. 현토본에서는 ‘未數數然也니라’로 현토하였으나 아랫 句와의 연관을 고려하여 ‘未數數然也로다마는’으로 현토하였다.
역주65 猶有未樹也 : 여전히 수립되지 못함. 猶는 아직, 오히려, 여전히의 뜻, 未樹는 수립되지 않았다는 뜻.
역주66 列子 : 인명. 春秋時代 末 혹은 戰國時代 初의 鄭나라 사람. 姓은 列, 이름은 御寇(李頤, 成玄英). 대표적인 道家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虛를 숭상하고(《呂氏春秋》 〈不二〉편과 《尸子》 〈廣澤〉편), 《列子》 8편의 저술을 남겼다(《漢書》 〈藝文志〉)고 전해지는데, 실존 인물 여부를 비롯하여 의문점이 많다. 현재의 《列子》 〈黃帝〉편에 나오는 ‘列子師老商氏 友伯高子進(盡)二子之道 乘風而歸……隨風東西 猶木葉幹(乾)殼 竟不知風乘我邪 我乘風乎’는 《莊子》의 이 부분을 발전시킨 것이다(池田知久).
역주67 御風而行 : 바람을 타고 날아다님. 朴世堂은 “앞에서는 붕새가 북쪽 바다 상공을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난 뒤에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쉬어 휴식한다고 하였으니 〈6개월은〉 1년의 반이고, 지금 여기서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다가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15일은〉 한 달의 반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인데 지금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들 붕새나 列子의 노닒[遊]이 아직 최고의 경지[至]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 것인가[上言去以六月息 一年之半也 此言旬有五日而反 一月之半也 意必有所謂 今不可知 豈謂其所遊猶有未至耶].”라고 하여, 豈라는 추측을 나타내는 부사를 쓰고 있기는 하나, 列子뿐만 아니라 鵬까지도 최고의 경지에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또 池田知久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이 같은 모습의 列子가 宋榮子보다도 윗 등급의 인간으로 파악되면서도 결국은 아직 참으로 主體性을 확립하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은 앞에 ‘그러므로 9만 리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붕새의 큰 날개를 지탱할 만한〉 바람이 아래에 쌓이게 된다. 그런 뒤에 이제 〈붕새는〉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채 갈 길을 막는 장애가 하나도 없게 된다[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 而莫之夭閼者]’로 표현된, 저 터무니없이 壯大한 붕새조차도 결코 아직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고, 作者가 생각하고 있음을 暗示하는 것이다.”고 하고 있다.
역주68 泠(령)然善也 : 가뿐가뿐 즐겁게 잘 날아다님. 泠은 가벼운 모양. 林希逸은 飄然으로 풀이했지만, 여기서는 곽상이 경묘한 모양[輕妙之貌]으로 풀이한 견해를 따랐다. 朴世堂도 같은 견해. 善은 잘 날아다닌다는 뜻인데 朴世堂은 “善은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말함이다[善謂心樂之也].”라고 부언했다.
역주69 旬有五日而後反 :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옴. 旬은 열흘. 有는 又와 같은 뜻. 旬有五日은 10일 하고도 또 5일, 즉 15일을 말한다. 列子가 하늘을 가쁜가쁜 즐겁게 날아다니다가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福永光司는 15일을 1년의 整數 360일을 24氣로 나눈 1氣의 기간으로 보아, 바람이 바뀌는 15일마다 地上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列子의 飛翔이 자연의 外的 조건에 의존하는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지만, 池田知久의 경우는 《春秋左氏傳》 등의 용례를 들어 24節氣와는 무관한 표현으로 보고 福永光司의 이 같은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한편 韓元震은 이 구절을 두고 “旬有五日而後反은 15일 뒤에는 도와 서로 어긋난다는 뜻이니 마치 안연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지만 석 달 뒤에는 인을 어김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旬有五日而後反 言旬日之後 與道相違也 如顔子三月不違仁 而三月之後 不能無違仁者也].”고 풀이하여 안연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열자도 아직 至人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역주70 致福者 : 복을 구함. 致福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林希逸의 註에 따라 求福으로 보았다.
역주71 天地之正 : 천지의 올바른 氣. 林希逸은 ‘天地之正理’로 보고 있으나 여기서는 하늘과 땅의 바른 氣로 보았다. ‘乘天地之正’은 곧 천지 대자연과 그대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역주72 六氣之辯 : 六氣의 변화. 辯(辨)은, 《韓非子》 〈解老〉편의 ‘四時得之 以御其變氣’, 《管子》 〈戒〉편의 ‘御正六氣之變’, 《楚辭》 〈遠遊〉편의 ‘因氣變而遂曾擧兮 忽神奔而鬼怪’, 《莊子》 〈胠筴〉편 向秀註의 ‘乘天地之正 御日新之變’ 등에 근거하여 變의 假借字로 보는 池田知久의 견해를 따랐다. 六氣는 陰‧陽‧風‧雨‧晦‧朔 등의 자연현상(成玄英, 林希逸 등).
역주73 以遊無窮者彼且惡(오)乎待哉 :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것이겠는가. 끝없는 경지에 노닌다는 뜻의 遊無窮은 〈齊物論〉편 제3장의 ‘乘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外’와 이 편의 제3장 ‘乘雲氣 御飛龍 而遊乎四海之外’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상상을 초월한 터무니없이 巨大한 붕새, 이 붕새도 결국은 物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임을 暗示하고 있는 것은 앞의 역주 67)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장자가 큰 붕새, 大鵬의 逍遙를 묘사한 것이 모든 땅 위의 작은 움직임과 인간의 왜소함을 초월한 어떤 超越者, 絶對者를 상징하기 위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 장자의 絶對者는 ‘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하는 超越者이다. 天地大自然의 生成變化와 그대로 한몸이 되어 모든 時와 空을 초월한 절대자유의 세계에 노니는 자, 이 절대자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그가 대체 무엇에 의존할 것이 있겠는가[彼且惡乎待哉]. 惡는 音 오.
역주74 故曰 : 그래서, 그 때문에. 글의 중간, 또는 글의 末尾에 成語나 成句 또는 앞에 든 글 등을 다시 거론할 때 활용하는 修辭로 《장자》에 많이 보인다.
역주75 至人無己 : 至人은 자기가 없음. 여기 〈소요유〉편 제1장의 말미에 보이는 至人‧神人‧聖人은 莊子에 있어서의 逍遙遊의 실천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자적 소요유의 실천에 있어서의 無己(자기가 없음=자기의 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至人이라 하고, 無功(功績이 없음=공적의 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神人이라 하고, 無名(명예가 없음=名聲의 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聖人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지인‧신인‧성인 사이에 특별히 차등이 설정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至人과 聖人을 同格으로 본 예는 外篇 〈達生〉편(제2장)의 ‘至人潛行不窒’과 ‘聖人藏於天’, 〈知北遊〉편(제2장)의 ‘是故至人無爲 大聖不作’, 雜篇 〈漁夫〉편의 ‘彼非至人 不能下人……故道之所在 聖人尊之’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잡편 〈庚桑楚〉편(제1장)의 ‘吾聞至人尸居環堵之室 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 今以畏壘之細民 而竊竊焉欲俎豆予于賢人(=聖人)之間 我其杓之人邪’라고 한 부분을 읽어보면 분명 至人을 聖人보다도 위 格인 최고의 경지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至人에 대하여는, 超越者이면서 世俗 안으로 들어와 冥合‧玄同하는 至高의 道에 도달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無己는 私欲이 없다던가 我執이 없다던가 하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고, 主體로서의 自我가 天地‧萬物 속에 融卽하여 無化되어 있는 것, 다음의 〈齊物論〉편에서 주로 追求되는 테마의 하나이다(池田知久).
역주76 神人無功 : 神人은 공적이 없음. 神人은 靈妙한 능력의 소유자로 幸‧不幸에 초연한 사람. 無功은 功績의 無化.
역주77 聖人無名 : 聖人은 명예가 없음. 세속의 價値 評價에 무관심한 성인은 名譽가 없음. 즉 성인 앞에서는 세속적 명성 따위는 無化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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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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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장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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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장 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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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1장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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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1장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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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1장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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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장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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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1장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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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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