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以愛
로 孝
는 難
하며 以愛
로 孝
는 易
하고 하며 忘親
은 易
하고 使親
으로 忘我 難
하며 使親
으로 忘我
는 易
하고 兼忘天下 難
하며 兼忘天下
는 易
하고 使天下
로 兼忘我 難
하니라
송宋(商)의 태재大宰 탕蕩이 장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었다.
“나는 듣건대 친함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게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인至仁이란 불효라 해도 괜찮습니까?”
지인至仁이란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 최상의 경지입니다.
효는 진실로 그 지인至仁의 경지를 말하기에 부족합니다.
〈지인至仁은 불효不孝라는〉 이 〈당신의〉 말은 효孝보다 나은 말이 아니라 효孝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입니다.
무릇 남쪽으로 여행하는 나그네가 초나라 서울 영郢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아도 한韓나라의 명산冥山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효孝를 실천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효를 실천하기는 어려우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효를 실천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어버이를 잊기는 어려우며 어버이를 잊기는 그래도 쉽지만 어버이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려우며 어버이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천하의 모든 사람을 잊기는 어려우며 천하의 모든 사람을 잊기는 쉽지만 천하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란 어렵다.’
〈지인무친至仁無親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덕德이 요순堯舜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더라도 새삼 나서서 일하지 않으며, 은택이 만세에 미치더라도 천하의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다만 저 세속 사람들처럼 크게 탄식하면서 인仁이다 효孝다 하고 말할 뿐이겠습니까.
무릇 효제인의孝悌仁義와 충신정렴忠信貞廉 따위의 가르침은 모두 스스로 억지로 힘쓰게 해서 본래의 참다운 덕을 부리는 것인지라 족히 존중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귀至貴는 나라에서 주는 작위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고, 지부至富는 나라에서 주는 재물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고, 지원至願은 세속적인 명예를 물리쳐 돌보지 아니한다.’ 이 때문에 참된 무위자연의 도道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