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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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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問仁於한대
(商)의 태재大宰 이 장자에게 에 대해 물었다.
莊子曰
장자가 대답했다.
“호랑이와 이리가 입니다.”
태재가 물었다.
何謂也
“무슨 말입니까?”
莊子曰
장자가 대답했다.
父子 相親이어니
“호랑이와 이리는 부자간에 서로 친합니다.
何爲不仁이리오
어찌 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탕이 물었다.
請問至仁하노라
“최고의 에 대해 묻겠습니다.”
莊子曰
장자가 대답했다.
“최고의 은 친함이 없습니다.”
大宰曰
태재가 물었다.
호니 無親則不愛하고 不愛則不孝라호니
“나는 듣건대 친함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게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인至仁이란 불효라 해도 괜찮습니까?”
莊子曰
장자가 말했다.
不然하니라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夫至仁 尙矣
지인至仁이란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 최상의 경지입니다.
효는 진실로 그 지인至仁의 경지를 말하기에 부족합니다.
지인至仁불효不孝라는〉 이 〈당신의〉 말은 보다 나은 말이 아니라 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입니다.
夫南行者 至於하야 北面而不見하논든 是何也
무릇 남쪽으로 여행하는 나그네가 초나라 서울 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아도 나라의 명산冥山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일새니라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고 以愛하며 以愛하고 하며 忘親하고 使親으로 忘我 難하며 使親으로 忘我하고 兼忘天下 難하며 兼忘天下하고 使天下 兼忘我 難하니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를 실천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효를 실천하기는 어려우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효를 실천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어버이를 잊기는 어려우며 어버이를 잊기는 그래도 쉽지만 어버이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려우며 어버이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천하의 모든 사람을 잊기는 어려우며 천하의 모든 사람을 잊기는 쉽지만 천하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란 어렵다.’
지인무친至仁無親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요순堯舜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더라도 새삼 나서서 일하지 않으며, 은택이 만세에 미치더라도 천하의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다만 저 세속 사람들처럼 크게 탄식하면서 이다 다 하고 말할 뿐이겠습니까.
此 皆自勉하야 不足多也니라
무릇 효제인의孝悌仁義충신정렴忠信貞廉 따위의 가르침은 모두 스스로 억지로 힘쓰게 해서 본래의 참다운 덕을 부리는 것인지라 족히 존중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호대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귀至貴는 나라에서 주는 작위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고, 지부至富는 나라에서 주는 재물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고, 지원至願은 세속적인 명예를 물리쳐 돌보지 아니한다.’ 이 때문에 참된 무위자연의 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商[宋]大宰蕩 : 宋나라 태재 蕩. 蕩은 人名. 大는 ‘태’로 읽으며 太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王叔岷). 아래 大息의 ‘大’도 마찬가지이다. 司馬彪는 “商은 宋이다. 大宰는 官名이다. 蕩은 字이다[商 宋也 大宰 官名也 蕩 字也].”라고 풀이했다. 大宰는 春秋戰國시대에 各國이 설치하고 있었던 官名으로 百官을 총괄하는 재상격에 해당하는 요직이다. 상나라 시대에는 태재라는 관명이 없었으므로 商은 宋으로 보는 것이 옳다. 宋나라에 大宰의 官職이 있었던 것은 《韓非子》 〈說林 上‧下〉, 〈內儲說 上‧下〉, 《史記》 〈宋世家〉, 《春秋左氏傳》 桓公 2년조 등의 문헌에 보인다(池田知久).
역주2 莊子 : 莊周를 말함. 이 문답도 寓言일 것이지만 宋은 B.C.286년에 滅亡했으므로 作者는 당연히 이 일을 그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된다(池田知久).
역주3 虎狼仁也 : 호랑이와 이리가 仁임. 가장 사나운 것으로 보이는 범과 이리가 사실은 仁을 행하는 짐승들이라는 뜻의 역설. 〈胠篋〉편 제2장에서 ‘도둑에게도 道가 있습니까[盜亦有道乎]?’ 이하의 내용과 유사하다(池田知久).
역주4 至仁無親 : 최고의 仁은 친함이 없음. 〈齊物論〉 제2장의 “大仁不仁”과 〈天地〉편 제13장에서 “지덕의 시대에는……서로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仁이라 자랑할 줄 몰랐다[至德之世……相愛而不知以爲仁].”라고 한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고(福永光司, 池田知久), 《老子》 제38장의 “上仁爲之而無以爲”라고 한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赤塚忠, 池田知久). 이 章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결국 至親無親, 大仁不仁의 경지에 가야 비로소 儒家의 孝悌仁義와 忠信貞廉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주5 蕩聞之 : 나(蕩)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陸德明의 《經典釋文》에서는 一本에는 蕩자가 ‘盈’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崔譔본도 같다고 하면서 或說을 인용하여 盈자를 大宰의 字라고 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역주6 無親則不愛 不愛則不孝 謂至仁不孝可乎 : 친함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게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至仁이란 불효라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論語》 〈學而〉편의 “효와 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한 내용과 〈顔淵〉편의 “번지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樊遲問仁 子曰 愛人]라고 했다.”라고 한 儒家의 사상을 천박하다고 야유한 표현이다(池田知久). 赤塚忠은 여기서 인용된 문장은 《孟子》 〈盡心 上〉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親親 仁也].”라고 한 문장과 〈離婁 下〉의 “인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仁者愛人].”라고 한 문장이라고 했다.
역주7 至仁尙矣 孝固不足以言之 : 至仁이란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 최상(최고)의 경지입니다. 孝는 진실로 그 至仁의 경지를 말하기에 부족합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孝로는 至仁의 경지를 표현함이 당연히 부족하다는 뜻. 尙은 上 또는 高와 같은 뜻이고, 固는 진실로, 또는 당연하다는 뜻. 褚伯秀가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謂之不及也 宜矣].”라고 풀이한 것이 정확하다(池田知久).
역주8 此非過孝之言也 不及孝之言也 : 〈至仁은 不孝라는〉 이 〈당신의〉 말은 孝보다 나은 말이 아니라 孝에도 미치지 못하는 말이다. 여기서 此는 宋의 태재 蕩이 앞에서 말한 ‘至仁不孝’를 가리킨다. 池田知久는, 이것이 成玄英 疏 이래의 定說이라 하고 羅勉道나 赤塚忠이 “이 말은 至仁은 親함이 없다[至仁無親]라고 하는 〈장자의〉 말이다[此言卽至仁無親之言].”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은 참으로 異說이 분분한 곳인데, 참고로 말하면 福永光司도 此를 “당신[蕩]이 말한 것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역주9 : 춘추전국시대 楚나라의 서울. 지금의 湖北省 江陵縣 西北쪽에 있었다(池田知久). 陸德明의 《經典釋文》에도 “郢은 초나라의 도읍이다. 강릉 북쪽에 있었다[郢 楚都也 在江陵北].”라고 풀이했다.
역주10 冥山 : 산 이름. 司馬彪는 “북해의 산 이름이다[北海山名].”라고 풀이했고, 郭象은 “명산은 북극에 있다[冥山在乎北極].”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池田知久는, 실은 이들 舊說이야말로 문맥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冥山은 《史記》 〈蘇秦列傳〉에 보이고, 《史記索隱》에 ‘이궤는 韓나라에 있다고 말했다[李軌云 在韓國].’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冥山은 당시 韓나라에 속해 있었다. 宋의 서울 商丘에서 冥山까지는 南南西로 약 300㎞ 거리이고 冥山에서 郢까지는 南西로 약 270㎞ 거리이다. 따라서 冥山은 두 곳(宋의 서울 商丘와 楚나라의 郢)의 정중간에 있다. 그러므로 商이 不及孝, 冥山이 세속의 孝(親‧愛), 郢이 過孝(孝보다 뛰어난 ‘至仁無親’)를 각각 비유한 것임이 틀림이 없다.”라고 ‘宋과 冥山과 郢’의 地圖까지 제시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 池田知久의 설을 따르면 뒤의 글 ‘去之遠也’의 해석도 세속의 孝를 멀리 지나와 버렸다는 뜻이 된다.
역주11 去之遠也 :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기 때문임. 앞에 注의 池田知久의 설을 따르면, 宋의 서울 商丘를 떠나 楚나라의 郢까지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冥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宋의 태재 蕩이 말하는 至仁은 不孝라고 하는 孝에도 미치지 못하는 不及孝의 경지를 출발해서 중간 지점인 冥山 즉 세속의 孝(親‧愛)의 경지를 거쳐 다시 멀리 초나라의 서울 郢에 이르는데 여기가 至仁無親의 최고의 경지이다. 따라서 池田知久의 설을 따르면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다는 말은 不及孝에서 출발해서 세속의 孝를 통과하여 至仁無親의 최고의 경지(세속의 孝를 초월한 過孝의 경지)까지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려 세속의 孝 즉 冥山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설에 찬동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만만치 않는 異說이 있다. 곧 이 異說을 따르면 去之를 無爲의 세계, 至仁無親의 세계를 떠난다는 뜻으로 보아, 無爲의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有爲의 세계를 방황하면서 세속적인 孝나 떠들고 다니는 故鄕喪失者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冥山(이 해석에서는 冥山을 至仁無親의 세계로 봄)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역주12 以敬孝易 : 존경하는 禮로 孝를 실천하기는 쉬움. 池田知久는, 《論語》 〈爲政〉편의 “子游 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나 《呂氏春秋》 〈孝行〉편의 “民之本敎曰孝 其行孝曰養 養可能也 敬爲難 敬可能也 安爲難 安可能也 卒爲難”을 의식한 문장일 것이라는 赤塚忠의 설을 소개하고 앞의 冥山에 관한 스스로의 說과 연관지어 이 글을 商으로부터 南行하여 冥山을 거쳐 郢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또 敬과 愛(다음 句)는 外的인 禮[敬]와 內的인 사랑의 心情[愛]으로 대비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3 而忘親難 : 어버이를 잊기는 어려움. 而는 底本에는 以로 되어 있으나 而가 옳기(馬叙倫) 때문에 而로 고친다. 忘은 亡으로 된 인용이 있다.
역주14 德遺堯舜而不爲也 : 至仁無親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德이 堯舜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더라도 새삼 나서서 일하지 않음. 遺는 成玄英의 “忘棄也”가 좋다. 堯舜을 忘棄한다는 것은 堯舜을 眼中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15 利澤施於萬世 天下莫知也 : 은택이 만세에 미치더라도 천하의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함. 武延緖는 天下를 衍文이라 하나 근거가 없다(池田知久). 〈大宗師〉편 제1장의 “利澤施乎萬世 不爲愛人”을 참조(福永光司).
역주16 豈直大息而言仁孝乎哉 : 어찌 다만 저 세속 사람들처럼 仁이다 孝다 하고 말할 뿐이겠습니까. 至仁無親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크게 한숨 쉬면서 仁과 孝를 떠들고 다닐 정도의 사람들과는 次元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니 짐짓 크게 탄식하면서 仁이니 孝니 하고 떠들어 댈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뜻도 된다. 크게 탄식하면서 仁이다 孝다 하고 말함. 大는 太로 된 판본도 있다. 成玄英의 “猶嗟歎也”, 林希逸의 “嗟歎自誇也”, 褚伯秀의 “歎美”, 阮毓崧의 “詠歎” 등의 설이 있다(池田知久).
역주17 夫孝悌仁義忠信貞廉 : 孝悌仁義와 忠信貞廉 따위의 가르침. “孝悌忠信”이 《孟子》 〈盡心 上〉편에, “仁義忠信”이 〈告子 上〉편에, “貞廉忠信”이 《墨子》 〈號令〉편에 각각 보이는 것을 참조할 것(池田知久).
역주18 役其德者 : 본래의 덕을 부리는 것임. 본래의 덕, 자연의 덕을 酷使한다는 뜻. 〈大宗師〉편 제1장의 “是役人之役”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福永光司, 池田知久).
역주19 至貴國爵幷焉 : 至貴는 나라에서 주는 작위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음. 至貴는 무위자연의 道를 체득한 사람을 지칭한다. 幷은 屛으로 물리친다는 뜻. 幷자가 屛자로 표기된 인용이 있다(奚侗). 陸德明은 “버리고 제거함이다[棄除也].”라고 풀이했다. 呂惠卿, 陸長庚, 王敔, 林雲銘처럼 “겸하여 차지하려는 뜻이다[兼而有之之意].”라고 하여 幷을 아우르다는 뜻으로 본 것은 옳지 않다(池田知久). 奚侗,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姘은 제거함이다[姘 除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姘의 가차자로 풀이했다. 池田知久가 福永光司의 설로 소개하면서 國爵을 《孟子》 〈告子 上〉편의 人爵에 해당한다고 풀이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견해라 할 만하다.
역주20 至富國財幷焉 : 至富는 나라에서 주는 재물 따위는 물리쳐 돌보지 않음. 무위자연의 덕을 갖춘 경우에는 나라에서 주는 재산 따위를 물리쳐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
역주21 至願[顯]名譽幷焉 : 至願은 세속적인 명예를 물리쳐 돌보지 아니함. 무위자연의 도와 덕에 대한 憧憬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는 세속적인 명예를 물리쳐 돌보지 아니한다는 뜻. 그런데 至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없이 최고로 敬慕되는 사람으로 번역하는 주석도 있다. 奚侗, 武延緖, 馬叙倫 등은 願을 顯의 잘못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보다 陶鴻慶이 “願은 慕이다[願 慕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池田知久).
역주22 道不渝(유) : 참된 무위자연의 道는 변하지 않음. 변하기 쉬운 것들, 예를 들어 덧없는 지위‧재산‧명성과는 달리 무위자연의 道는 영원히 변함없는 것이라는 뜻. 成玄英은 渝를 “변함이고 야박함이다[變也 薄也].”라고 풀이했다. 이 불변의 道는 〈騈拇〉편 제3장의 “常然”에 가깝다(林希逸, 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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