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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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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於莊子曰
莊子曰
無所不在하니라
東郭子曰
莊子曰
하니라
何其下邪
在稊稗하니라
何其愈下邪
在瓦甓하니라
何其愈甚邪
하니라
東郭子不應이어늘
莊子曰
夫子之問也 이로다
無往焉이라 而不知其所至하며 去而來 而不知其所止하니 吾已往來焉而이라 하야 而不知其所窮이니라
謂盈虛衰殺라하나니 彼爲盈虛언정 非盈虛 彼爲衰殺언정 非衰殺 彼爲本末이언정 非本末이며 彼爲積散이언정 非積散也니라


동곽자東郭子장자莊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른바 도는 어디에 있는지요?”
장자莊子가 대답했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동곽자가 말했다.
“꼭 찍어 말씀해 주셔야 알아듣겠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그리 낮은 곳에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돌피나 피 따위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 아래로 내려가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기왓장이나 벽돌 조각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 심해지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똥이나 오줌 속에 있다.”
동곽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했다.
“그대가 물은 것은 본디 본질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돼지 잡는 정획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을 때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아보는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사물에 도가 있느냐고 꼭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도가〉 어떤 물건에서든 떠날 수 없을 것이니 지도至道는 이와 같고, 훌륭한 말도 또한 그러하다.
‘두루’, ‘널리’, ‘모두’ 이 세 가지는 명칭은 다르지만 실제의 내용은 같으니 그 뜻은 마찬가지이다.
무하유無何有의 궁궐에 노닐면서 만물을 같은 것으로 보고 말하면 끝남이 없을 것이다.
늘 함께 무위하며 담담히 고요하며 아득히 맑을 것이며 고르고 한가할지어다.
그렇게 하면 내 뜻이 고요해질 것이니 갈 곳이 없어지는지라 이를 곳을 알지 못하며 떠나서 옴에 머물 곳을 알지 못하니 내가 이미 가고 옴에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는지라 커다란 빙굉馮閎에서 방황하여 큰 지혜가 들어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사물을 사물로 있게 하는 것은 사물과 사이에 경계가 없으니 사물과 사이에 경계가 있는 것은 이른바 사물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경계가 없는 경계는 경계가 경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라 차고 비며 쇠락함이 있지만 저 도는 차고 비지만 실제로 차고 비는 것이 아니며 쇠락함이 있지만 쇠락하는 것이 아니며 저 도는 근본根本이 되기도 하고 지말枝末이 되기도 하지만 근본이나 지말이 아니며 저 도는 쌓이고 흩어짐이 있지만 쌓이고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주
역주1 東郭子 : 인명. 〈田子方〉편에 나온 田子方의 스승인 東郭順子와 동일 인물로 추정. 李頤는 “성 외곽 동쪽에 살았다[居東郭也].”고 풀이했는데 南郭子綦의 경우와 같은 寓意를 붙인 작명이다. 成玄英은 “無擇의 스승, 東郭順子이다[無擇之師 東郭順子也].”라고 풀이했는데 無擇은 바로 田子方의 이름이다.
역주2 所謂道惡乎在 : 이른바 도는 어디에 있는지요? 道安在로 표기되어 있는 인용문이 있다(劉文典). 〈天下〉편 제1장에서 “옛날 이른바 도술이라고 한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古之所謂道術者 果惡乎在].”라고 표현한 것과 유사한 맥락의 질문이다(池田知久).
역주3 期而後可 : 꼭 찍어 말씀해 주셔야 알아듣겠음. 期는 꼭 찍어서 말해 준다는 뜻. 林希逸은 “期所를 지정한 뒤에 알아들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言指定期所而後可].”라고 풀이했고, 羅勉道는 “지정해서 말함이다[指定言之也].”라고 풀이했는데 羅勉道의 견해가 간명하다.
역주4 螻蟻 : 땅강아지와 개미. 땅바닥을 기는 하찮은 생물에 비유함으로써 道가 無所不在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하의 사물들도 마찬가지.
역주5 屎溺(시뇨) : 똥과 오줌. 屎가 矢로 표기되어 있는 판본이 있다(陸德明). 溺는 尿와 통한다.
역주6 固不及質 : 본디 본질에 미치지 못함. 質은 본질. 成玄英은 ‘實’로 풀이했다. 아래 문장에 나오는 實과 같다.
역주7 正獲之問於監市 : 돼지 잡는 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음. 正獲은 도축을 담당하는 관리. 成玄英이 “正은 관호이니 지금의 市令이고 獲은 이름이다[正 官號也 則今之市令也 獲 名也].”라고 풀이한 것처럼 正이 관호이고 獲은 사람의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監市는 시장을 관리하는 사람. 李頤는 “시장의 우두머리이다[市魁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요즘의 屠卒이다[今屠卒也].”라고 풀이했는데 李頤의 견해를 따른다.
역주8 履狶(시)也 : 돼지를 밟음. 맥락상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李頤는 “狶는 돼지이다. 履는 밟음이다. 시장의 우두머리가 돼지를 밟을 때 넓적다리를 밟는 것은 돼지가 살이 오르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돼지가 살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도를 물을 때에도 또한 낮고 천한 것으로 비유하면 도를 알 수 있다[狶 大豕也 履 踐也 夫市魁履豕 履其股脚 狶難肥處 故知豕肥耳 問道亦況下賤則知道也].”고 풀이했다. 이설이 분분하지만 우선 李頤의 주장을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9 每下愈況 :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쉬움. 況은 더욱 분명해진다는 뜻. 곧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郭象과 陸德明, 李頤 등은 모두 況을 比況의 뜻으로 풀이했지만 분명해지다는 뜻으로 풀이한 林希逸의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林希逸은 “下는 시장을 관리하는 천한 사람이다. 正獲의 관리가 돼지가 살쪘는지 수척한지를 알고 싶을 때 비천한 자에게 물을수록 비유함이 더욱 분명해진다[下 監市之賤者也 正獲之官 欲知狶之肥瘠 若問其卑賤者 其比況說得兪明].”라고 풀이하여 況을 比況의 뜻으로 보면서 愈를 더욱 분명해진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下 또한 돼지의 아래쪽 부분이 아니라 신분이 비천한 사람을 말한다고 풀이한 것도 참고할 만하다.
역주10 汝唯莫必 無乎逃物 : 그대가 어떤 사물에 도가 있느냐고 꼭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도가〉 어떤 물건에서든 떠날 수 없을 것임. 林希逸은 “기필하지 말라는 말은 고집하고 기필하는 뜻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그대에게 만약 고집하고 기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물의 지극한 이치가 모두 도망할 곳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莫必者 無固必之意也 汝若無固必之心 則物之至理 皆無所逃].”라고 풀이했다.
역주11 至道若是 大言亦然 : 至道는 이와 같고, 훌륭한 말도 또한 그러함. 宣穎은 “그대가 앞의 네 가지를 가지고 한 말을 자잘하다 여겼지만 그것은 비록 큰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또한 네 가지와 같을 뿐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汝以我前四言爲瑣小 不知雖大言之 亦與四者同耳].”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2 周遍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 : ‘두루’, ‘널리’, ‘모두’ 이 세 가지는 명칭은 다르지만 실제의 내용은 같으니 그 뜻은 마찬가지임. 成玄英은 “周悉, 普遍, 咸皆에 도가 있다는 것이니 이는 지극한 도는 사물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비록 세 가지 이름의 다름이 있지만 實理가 귀결하는 것은 동일함을 거듭 밝힌 것이다[周悉普遍咸皆有道 此重明至道不逃於物 雖有三名之異 其實理旨歸則同一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3 嘗相與游乎無何有之宮 同合而論 無所終窮乎 : 늘 무하유의 궁궐에 노닐면서 만물을 같은 것으로 보고 말하면 끝남이 없을 것임.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同合而論으로 절구하는 것은 郭象 이래의 정설이지만 無所終窮乎까지를 이어서 완전한 문장으로 삼는 것이 보다 완전하다. 嘗은 常과 통한다. 아래 嘗相與無爲乎의 嘗도 마찬가지.
역주14 嘗相與無爲乎 澹而靜乎 漠而淸乎 調而閒乎 : 늘 함께 무위하며 담담히 고요하며 아득히 맑을 것이며 고르고 한가할지어다. 澹은 고요함을 지키는 모양. 成玄英은 ‘恬淡’으로 풀이했고, 陸樹芝는 ‘淡泊’ 등으로 풀이했는데 대동소이하다. 閒은 한가함. 成玄英은 “느긋하고 한가하고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다[寬閒逸豫].”라고 풀이했다.
역주15 寥已吾志 : 내 뜻이 고요해짐. 吾志寥已의 도치형. 成玄英은 ‘寂寥’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虛’로 풀이했다. 已는 矣와 같다(林希逸).
역주16 不知其所終 :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함. 終은 아래 문장의 窮이 공간적 有限을 나타내는 것에 비해 시간적 有限을 나타낸다(池田知久).
역주17 彷徨乎馮閎 : 커다란 馮閎에서 방황함. 馮閎은 커다란 공간. 馮과 閎은 모두 크다는 뜻. 李頤는 “모두 큼이다[皆大也].”라고 풀이했고, 郭象은 “빈 성곽을 말함이다[虛廓之謂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8 大知入焉 : 큰 지혜가 들어옴. 郭象과 成玄英은 大知之人이 馮閎에 들어온다고 풀이했고, 林希逸, 陸長庚, 陸樹芝 등은 내가 大知 속에 들어간다고 해석했는데, 전후의 맥락상 위대한 大知가 내 안에 들어옴, 또 위대한 大知가 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阮毓崧은 〈人間世〉편에 “도는 빈 곳에 모인다[唯道集虛].”는 표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역주19 物物者 與物無際而物有際者 所謂物際者也 : 사물을 사물로 있게 하는 것은 사물과 사이에 경계가 없으니 사물과 사이에 경계가 있는 것은 이른바 사물의 경계라고 함. 郭象과 成玄英의 견해를 비롯, 이설이 분분하지만 우선 呂惠卿의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20 不際之際際之不際者也 : 경계가 없는 경계는 경계가 경계로 나타나지 않음. 앞 장의 “不形之形 形之不形”과 같다(呂惠卿). 褚伯秀는 “도는 흩어지면 사물이 되고 사물은 온전해지면 도로 돌아간다[道散而爲物也 物全而歸道也].”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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