至陰
은 肅肅
하고 至陽
은 赫赫
하니 肅肅
은 出乎天
하고 赫赫
은 發乎地
니 호대 하며 消息滿虛
와 一晦一明
이 日改月化
하야 日有所爲而莫見其功
하며
夫得是면 至美至樂也니 得至美而遊乎至樂을 謂之至人이라하나니라
得其所一而同焉이면 則四肢百體 將爲塵垢며 而死生終始 將爲晝夜라 而莫之能滑이온 而況得喪禍福之所介乎따녀
夫子는 德配天地하난대 而猶假至言하야 以修心하시니 古之君子는 孰能脫焉이리오
若天之自高와 地之自厚와 日月之自明은 夫何脩焉이리오
공자孔子가 노담老聃을 만났는데 노담老聃은 그때 막 새로 머리를 감고 나서 바야흐로 머리를 풀어헤친 채 햇볕에 말리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꼼짝도 않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람 같지가 않았다.
공자孔子는 물러나 기다리고 있다가 잠시 뒤에 뵙고 말하기를 “제 눈이 먼 걸까요.
아까 선생의 형체는 우뚝 서 있는 마른나무와 같아서 만물萬物을 잊고 인간세계를 떠나서 홀로 서 계신 것 같았습니다.”
“마음을 아무리 괴롭혀도 알 수 없으며, 입을 아무리 크게 열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험 삼아 그대를 위해 그 대략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순수한 음기는 고요하고 차며 순수한 양기는 밝게 빛나고 뜨거우니, 고요하고 찬 음기는 하늘에서 나와 땅으로 내려오고 밝게 빛나고 뜨거운 양기는 땅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니, 이 지음至陰과 지양至陽의 두 기氣가 서로 통해서 혼합하여 화합을 이루어 만물이 생기는데, 무엇인가 혹 처음을 이루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으며, 만물이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되풀이하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함이 날로 바뀌고 달로 변화하여 날마다 작용이 있지만 그 공功을 볼 수 없습니다.
생성生成되는 사물은 싹트는 바가 있고 사멸死滅해가는 사물은 돌아가는 곳이 있어서, 처음과 마침(生과 사死)은 끝이 없는 데에서 서로 반전反轉(生은 사死로, 사死는 생生으로, 시始는 종終으로, 종終은 시始로)하여 그 궁극의 끝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지음至陰과 지양至陽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노닌다고 함은 무슨 뜻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릇 이 지음至陰과 지양至陽을 얻으면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즐거워지니 지극한 아름다움을 체득하여 지극히 즐거운 경지에 노니는 사람을 일러 지인至人이라 합니다.”
“초식동물은 수풀 바꾸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물속에 사는 동물은 물 바꾸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행동이 조금 변해도 커다란 〈삶의〉 원칙을 잃어버리지는 않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흉중에 침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천하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일체로 존재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일체一體를 얻어서 동화하면 〈나의〉 사지四肢와 온몸은 장차 티끌이나 때와 다를 것이 없는 존재가 되며 사생종시死生終始가 장차 낮과 밤과 같은 자연의 순환으로 여겨져 아무 것도 어지럽힐 수 없게 되는데, 하물며 득실得失이나 화복禍福 따위가 개입할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있어서〉 노예를 버리는 사람이 마치 진흙을 버리듯 함은 자기 몸이 노예보다도 귀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이 나의 마음속에 있으면 변화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육체는 천변만화千變萬化해서 애초에 끝이 있는 것이 아니니 대저 무엇이 마음을 괴롭히기에 충분하겠습니까?
이미 도道를 닦은 지인至人이라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덕이 천지와 짝하는데도 오히려 지언至言을 빌려서 마음을 닦고 있으니, 옛날의 군자가 이런 방법을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릇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은 아무런 작위가 없이 재질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고, 지인至人이 덕德을 체득함에는 수양이라는 작위가 없어도 만물만민萬物萬民이 〈그를 사모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이 저절로 높고 땅이 저절로 두텁고 해와 달이 저절로 밝은 것 같은 것에 무슨 닦음이 있겠습니까.”
“내가 도道에 대해 아는 수준은 아마도 항아리 속의 초파리와 같다고 할 것이다.
노담 선생이 나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지자연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