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1)

장자(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자연自然이 운행하는 이치를 알고 사람이 해야 할 바를 아는 사람은 지극한 존재이다.
知天之所爲者 知人之所爲者 하야 者 是 니라
자연이 운행하는 이치를 아는 사람은 자연의 도를 따라 살고, 사람이 해야 할 바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길러서 천수天壽를 다 마쳐 중도에 요절夭折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은 가 성대한 사람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계가 있으니, 라고 하는 것은 기다리는 바가 있은 뒤라야 합당하게 되는데 기다리는 바가 유독 일정하지 않다.
그러니 어찌 내가 자연이라고 말한 것이 인위人爲가 아니며 내가 인위라고 말한 것이 자연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참다운 사람이 있은 뒤라야 참다운 앎이 있는 것이다.
何謂眞人
무엇을 일러 진인眞人이라 하는가.
古之眞人 하며 하며 하더니
옛날의 진인은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으며, 을 이루어도 뽐내지 아니하며,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若然者 하나니라
그 같은 사람은 실패失敗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하며, 일이 합당하게 이루어져도 우쭐거리지 않는다.
그 같은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아니하니, 이것은 지식이 의 경지에 오름이 이와 같은 것이다.
古之眞人 하며 하며 하며 하니라
옛날의 진인은 잠잘 때에는 꿈을 꾸지 않았고, 깨어 있을 때에는 근심이 없었으며, 먹을 때에는 달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숨은 길고 길었다.
진인의 숨은 발뒤꿈치까지 미치는데, 보통 사람의 숨은 목구멍까지 미칠 뿐이다.
남에게 굴복屈服하는 사람은 목메인 듯 아첨하는 말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고, 욕망이 깊은 사람은 자연의 기틀이 얕다.
옛날의 진인眞人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라서,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죽음을 거부하지도 아니하여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며, 홀가분하게 〈세상에〉 태어날 따름이다.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생명을 받아서는 그대로 기뻐하고, 생명을 잃게 되어서는 대자연으로 돌아간다.
是之謂이라하나니 是之謂眞人이니라
이것을 일컬어 심지心知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행위로 무리하게 자연의 운행을 조장助長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그 같은 사람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모습은 고요하며, 이마는 넓고 평평하니, 서늘함은 가을과 같고 따스함은 봄과 같아서, 희로喜怒의 감정이 사계절四季節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려서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성인聖人이 군사를 움직일 때는 나라를 멸망시키더라도 인심을 잃지 아니하며, 이익과 혜택을 만세에 미칠 정도로 베풀어도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물과 통하는 것을 즐기면 성인이 아니며, 친애함이 있으면 인인仁人이 아니며, 천시天時에 〈일부러〉 맞추려고 하면 현인賢人이 아니며, 이로움과 해로움을 하나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며, 명예를 추구하여 자기를 잃어버리면 선비가 아니며, 자기 몸을 죽여 참된 본성을 저버리면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호불해狐不偕, 무광務光, 백이伯夷, 숙제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과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겨 스스로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古之眞人 其狀
而不하야 하며 하며 니라
옛날의 진인眞人은, 그 모습이 높이 솟은 산처럼 당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부족한 것 같지만 남에게서 받지 않으며,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하면서도 고집하지 않으며, 넓고 크게 마음을 비운 듯하면서도 꾸미지 않았다.
환하게 밝은 모습으로 마치 기쁜 일이 있는 듯하며, 임박臨迫해서 움직여 마지못한 듯하며, 가득하게 자기 안색을 나타내는 일도 있지만 몸가짐이 법도에 맞아 자신의 참다운 에 머물며, 넓은 도량으로 세속과 함께하는 듯 하지만 오연傲然히 제약받지 않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감추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무심히 모든 말을 다 잊어버린다.
형벌刑罰을 정치의 본체로 삼고, 예교禮敎를 보조수단으로 삼고, 지식으로 시의時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을 따라야 할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以刑爲體者 以禮爲翼者
형벌을 본체로 삼는다는 것은 관대하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고, 예교를 날개로 삼는다는 것은 〈진인의 정치가〉 세상에 행해지기 위한 것이다.
以知爲時者
지식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부득이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以德爲循者 言其어든라하나다
덕을 따라야 할 준칙準則으로 삼는다는 것은 다리가 있는 보통 사람과 함께 걷다 보니 〈저절로〉 언덕에 도달한 것과 같은데, 사람들은 참으로 부지런히 걸어서 도달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며 其一也이며 其不一也이라
그 때문에 〈진인眞人은〉 좋아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치一致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치一致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긴다.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고,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다.
할새 是之謂眞人이니라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지 않을 때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死生 命也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다.
〈죽고 사는 것에〉 밤낮처럼 일정함이 있는 것은 자연인지라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사물의 참다운 모습이다.
저 사람들은 단지 하늘을 부모로 여겨서 자기 몸으로 그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빼어난 존재[道]이겠는가.
特以有君으로 爲愈乎己라하야 而身猶死之따녀
사람들은 단지 세속의 군주君主가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서 몸으로 목숨을 바치는데 하물며 진군眞君이겠는가.
이어든 魚相與處於陸하야 하나니 하니라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땅위에 남아서 서로 습기를 뿜어내며 서로 거품으로 적셔 주지만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고 사느니만 못하다.
임금을 찬양하고 걸왕桀王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도와 일체가 되느니만 못하다.
하며 하며 하며 息我以死하나니
대자연大自然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그 때문에 나의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기 위한 것이다.
산골짜기에 배를 간직하며 연못 속에 산을 간직하고서 단단히 간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밤중에 힘이 센 자가 그것을 등에 지고 도망치면 잠자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은 것과 큰 것을 간직하는 데는 각기 마땅한 곳이 있으나 그래도 훔쳐서 도주할 곳이 있지만, 천하를 천하에 간직하면 훔쳐서 도주할 곳이 없다.
이것이 일정불변一定不變하는 만물의 큰 진실인데 〈세속 사람들은〉 사람의 형체를 훔쳐서 세상에 나와서도 오히려 그것만을 유독 기뻐한다.
사람의 형체와 같은 것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여 처음부터 일정함이 없으니 그 즐거움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聖人 하나니라
그 때문에 성인은 장차 사물을 훔쳐서 도주할 수 없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세계에 노닐어 모두 보존한다.
일찍 죽는 것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오래 사는 것도 좋은 것으로 여기며, 삶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죽음도 좋은 것으로 여겨 이조차도 사람들이 본받는 바인데, 하물며 만물이 매여 있고 일체의 변화가 의지하는 이겠는가.
은 있지만 작용이나 형체는 없는지라, 전해 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으며,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근본으로 삼아 아직 천지天地가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이미 엄연히 존재하여 온 것이다.
귀신과 상제上帝신령神靈하게 하며, 천지를 생성하며, 태극太極보다 앞서서 존재하면서도 높은 체하지 않으며, 육극六極의 아래에 머물면서도 깊은 체하지 않으며, 천지보다 앞서 존재하면서도 오래된 체하지 않으며, 상고上古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은 체하지 않는다.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日月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야 하며 得之하야 하며 得之하야 以相하야 하야하니라
희위씨狶韋氏는 그것을 얻어서 천지를 손에 쥐었으며, 복희씨伏戲氏는 그것을 얻어서 의 근원을 취했으며, 북두성北斗星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어긋나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쉬지 않으며, 감배堪坏는 그것을 얻어서 곤륜산을 받아들였으며, 풍이馮夷는 그것을 얻어서 황하에서 노닐었으며, 견오肩吾는 그것을 얻어서 태산에 머물렀으며, 황제黃帝는 그것을 얻어서 운천雲天에 올랐으며, 전욱顓頊은 그것을 얻어서 현궁玄宮에 거처하였으며, 우강禺强은 그것을 얻어서 북극의 바다에 섰으며, 서왕모西王母는 그것을 얻어서 소광산小廣山에 앉아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그 마침을 알 수 없으며, 팽조彭祖는 그것을 얻어서 위로는 유우씨有虞氏에게 미치고 아래로는 오패五覇에 미쳤으며, 부열傅說은 그것을 얻어서 무정武丁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였으며 동유성東維星을 타고 기성箕星미성尾星을 몰아 열성列星과 나란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知天之所爲 : 하늘이 하는 것을 앎. 天之所爲는 뒤에 나오는 ‘夜旦之常’과 같은 자연의 일정한 법칙성을 지칭한다(方勇‧陸永品). 곧 자연이 운행하는 이치[道]를 안다는 뜻. 郭象과 成玄英 모두 ‘天은 자연을 말한 것[天者 自然之謂]’이라고 했다. 韓元震은 ‘천도의 자연[天之所爲 天道之自然]’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朴世堂은 이같은 사람을 《孟子》 〈盡心 下〉의 性之者(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실천한 堯舜같은 사람)와 같다[知天之所爲者 猶所謂性之者]고 비유했다.
역주2 知人之所爲 : 사람이 하는 것을 앎. 人之所爲는 뒤에 나오는 ‘以刑爲體 以禮爲翼 以知爲時 以德爲循’과 같은 인위적인 활동을 지칭한다(方勇‧陸永品). 곧 사람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안다는 뜻이다. 韓元震은 ‘인사의 마땅함[人之所爲 人事之當然也]’이라고 풀이했다. 또 朴世堂은 이같은 사람을 역시 《孟子》 〈盡心 下〉에 나오는 反之者(본성을 잃었다가 회복한 湯武같은 사람)와 같다[知人之所爲者 猶所謂反之者]고 비유했다.
역주3 至矣 : 지극함. 자연이 운행하는 이치를 알고 사람이 해야 할 바를 알면 지극한 경지에 나아간 사람이라는 뜻.
역주4 天而生也 : 자연의 도에 순응하면서 살아감. 天은 자연의 도를 따른다는 뜻으로 〈刻意〉편의 ‘循天之理’와 같은 의미이다. 韓元震은 “이 내용은 《中庸》 제20장의 生而知之와 같고, 아래의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는 역시 《中庸》 제20장의 學而知之와 같고, 不中道夭는 《中庸》 제11장의 半途而廢 吾弗能已矣와 같은 의미인 중도에 그만두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天而生者 中庸所謂生知也 以其所知 養其不知 如中庸所謂學知也 不中道夭 言不半途而廢也].”라고 풀이했다. 또 朴世堂은 “天而生은 性之(堯舜처럼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를 일컫는다[天而生者 卽性之之謂也].”고 풀이했다.
역주5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 자기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기름. 곧 자신이 아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을 기른다는 뜻이다. 宣穎은 “지식으로 아는 것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기술이고,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살 수 있는 햇수이다[知之所知 衛生之術 知之所不知 年命之數].”라고 했는데, 바로 뒤의 ‘終其天年而不中道夭’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 풀이가 타당하다. 곧 자신이 알고 있는 養生法을 통해 몸을 잘 간수하는 것이 지식으로 아는 것이고, 자연의 道가 부여한 天年(天壽)은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역주6 終其天年而不中道夭 : 天壽를 마쳐서 중도에 요절하지 않음. 天年은 天壽와 같다.
역주7 知之盛也 : 知가 성대함. 知識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라는 뜻.
역주8 雖然有患 : 비록 그렇지만 근심거리가 있음. 곧 앞의 조건을 충족시켜서 천수를 다 마치려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는 뜻. 患은 患難의 뜻.
역주9 知有所待而後當 : 지식은 기다리는 바가 있은 뒤에 합당해짐. 인간의 지식은 반드시 일정한 대상이 있어야 타당한 認識이 가능하다는 뜻. 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의 불완전성을 지적한 내용이다.
역주10 其所待者 特未定也 : 그 기다리는 바가 유독 일정하지 않음. 곧 지식의 대상이 固定不變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流轉變化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역주11 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 : 어찌 내가 自然이라고 말한 것이 人爲가 아니며 내가 인위라고 말한 것이 자연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庸詎는 어찌. 知는 확신한다는 뜻. 인간의 인식능력은 天과 人의 구분조차 확실히 알기 어려울 정도로 불완전하다는 뜻.
역주12 有眞人而後 有眞知 : 대상으로서의 지식보다 실천의 주체인 眞人이 앞선다는 뜻.
역주13 不逆寡 : 적은 것을 거절하지 않음. 곧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逆境이나 실패에 처해서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屈復은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음이니 이른바 善이 작다고 해서 아니하지 말라[不以少而拒之 所謂勿以善小而不爲也].”고 풀이했다. 逆은 拒絶하다는 뜻.
역주14 不雄成 : 공을 이루어도 뽐내지 않음. 林希逸은 “공이 비록 이루어져도 자랑하지 않는다[功雖成亦不以爲夸].”고 풀이했다. 雄은 자랑하다, 뽐내다의 뜻.
역주15 不謨士 :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음. 모든 일을 자연에 맡긴다는 뜻이다. 謨는 謀와 같고, 士는 事와 같다(林希逸). 陶鴻慶은 郭象이 士를 본래 글자 그대로 보고 群士로 풀이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說文解字》에서 “士는 事이다[士事也].”라고 풀이한 것과, 《管子》 〈君臣〉편의 ‘官謨士’를 근거로 삼아 謨士는 곧 謀事라고 주장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역주16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 일이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으며 일이 합당하게 이루어져도 우쭐대지 않음. 곧 일의 成敗 때문에 후회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의 성패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得은 得計 또는 得意의 뜻.
역주17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 :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아니함. 〈逍遙遊〉편의 ‘之人也 物莫之傷 大浸稽天而不溺 大旱金石流 土山焦而不熱’과 〈達生〉편의 ‘至人潛行不窒 蹈火不熱 行乎萬物之上而不慄’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18 知之能登假(격)於道者也 若此 : 지식이 道의 경지에 오름이 이와 같음. 登假의 假은 ‘격’으로 읽으며 도달하다[至]는 뜻이다(陸德明). 郭象은 오르다[登至]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같은 견해이다. 屈復은 登假을 《論語》 〈憲問〉편에 나오는 ‘下學而上達’의 “上達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登假 猶言上達也].”고 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登假의 경우는 〈德充符〉편 ‘擇日而登假’에 이미 나왔지만 ‘擇日而登假’의 登假는 昇遐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로 읽고, 여기의 登假은 道의 경지에 오르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격’으로 읽어야 한다. 王叔岷의 경우에도 〈德充符〉편에서는 ‘하’로 읽었고 여기의 경우는 ‘격’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견해가 타당하다. ‘하’로 읽는 경우는 〈德充符〉편 ‘擇日而登假’의 역주 참조. 若此의 此는 앞의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을 받는 대명사.
역주19 其寢不夢 : 잠잘 때에는 꿈을 꾸지 않음. 마음과 몸이 外界 事物에 끌려다니지 않기 때문에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郭象은 상념[意想]이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꿈꾸지 않는 것은 정신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不夢 神定也].”라고 풀이했고, 釋德淸은 “꿈은 망상에서 생기는데 망상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夢發於妄想 妄想不生 故寢無夢].”고 풀이했다.
역주20 其覺(교)無憂 : 깨어 있을 때에는 근심이 없음. 郭象은 “만난 바를 합당하게 여겨서 편안하다[當所遇而安也].”고 풀이했다.
역주21 其食不甘 : 먹을 때에는 달게 여기지 않음. 스스로 도를 즐기기 때문에 세속적인 맛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 成玄英은 “인간 세상에 뒤섞여 티끌과 함께 하면서 먹으니 맛있는 음식을 耽溺하지 않기 때문에 그 좋은 맛을 알지 못한다[混迹人間 同塵而食 不耽滋味 故不知其美].”고 풀이했다. 《老子》 제35장의 ‘淡乎其無味’, 제63장의 ‘味無味’와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22 其息深深 : 숨이 길고 긺.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숨이 조급하지 않다는 뜻. 釋德淸은 “깊다는 것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뜻이다. 숨이 거칠고 얕으면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眞人은 마음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외물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 숨이 깊고 깊다[深者 綿綿之意 息粗而淺 則心浮動 眞人心泰定而不爲物動 故其息深深].”고 풀이했다.
역주23 眞人之息以踵 : 眞人은 발뒤꿈치로 숨쉼. 곧 숨이 발뒤꿈치까지 미친다는 뜻. 숨이 길고 편안함을 뜻한다. 宣穎은 “호흡이 발바닥의 涌泉穴까지 통함이니 깊음을 말한 것이다[呼吸通於涌泉 言深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4 衆人之息以喉 :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쉼. 곧 숨이 가쁘고 조급하여 목구멍까지만 미친다는 뜻. 向秀는 “헐떡이는 숨은 목구멍을 마디로 삼는다[喘悸之息 以喉爲節].”고 풀이했다.
역주25 屈服者 其嗌(익)言若哇(와) : 남에게 굴복하는 사람은 목메인 듯 아첨하는 말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음. 《孟子》 〈滕文公 下〉의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날 밭두둑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고생스럽다[脅肩諂笑 病于夏畦].”고 한 것처럼 비굴하게 아첨하는 사람의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宣穎은 屈服을 ‘의논이 다른 사람에게 굴복당한 자[議論爲人所屈者]’로 풀이하여 논쟁에서 지는 경우로 이해했는데, 논쟁에서 패배한 사람을 두고 嗌言若哇와 같은 모욕적인 표현으로 卑下할 만한 맥락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는 羅勉道가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여 아첨하고 잘 보이려 하는 자[屈服諂媚於人者]’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嗌言은 목메인 말소리. 嗌은 익(益)으로 읽는다(陸德明). 林希逸은 嗌을 목이 메다[咽]는 뜻으로 풀이했고, 朱桂曜와 馬敍倫은 풀이는 같지만 噎의 假借字로 보았는데 이 두 견해를 따랐다. 哇는 吐(林希逸), 嘔(簡文帝)의 뜻으로 토하다는 의미. 한편 成玄英은 “嗌은 목구멍이고 哇는 막힘이다[嗌 喉也 哇 碍也].”로 풀이하여 “목구멍에서 나는 말소리가 막힌 듯하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적절치 않다.
역주26 耆欲深者 其天機淺 : 욕망이 깊은 사람은 자연의 기틀이 얕음. 耆는 嗜의 假借字(朱桂曜)로 耽欲의 뜻. 天機는 자연의 기틀로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본을 뜻한다. 곧 嗜欲과 天機는 서로 反比例 관계에 있으므로 기욕을 줄이는 것이 천기를 지속시키는 방법이라는 맥락이다. 林希逸은 ‘嗜欲은 人欲, 天機는 天理[嗜欲者 人欲也 天機者 天理也]’로 풀이하여 “인욕을 막고 천리를 둔다[遏人欲 存天理].”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지만 적절치 않다.
역주27 不知說(열)生 不知惡(오)死 : 生을 기뻐(좋아)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 모름. 장자는 상식 세계의 속인들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을 《장자》 전편의 여러 곳에서 비판하고 있다. 〈至樂〉편의 해골[髑髏]과의 대화에서는 오히려 죽음의 세계가 찬양되고 있으며 〈齊物論〉편에서는 悅生惡死가 미혹[惑]된 태도임을 지적하고 있다. “내 어찌 生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내 어찌 죽은 사람이 처음에 살기를 바란 것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라고 하였다(제4장).
역주28 其出不訢(흔) 其入不距 :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죽음을 거부하지도 아니함. 訢은 흔(欣)으로 읽으며 기쁘다[喜]는 뜻이고 距는 拒逆하다는 뜻으로 拒와 같다(陸德明). 出은 出生, 入은 入死의 뜻.
역주29 翛(소)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 홀가분하게 떠나며, 홀가분하게 태어날 따름임. 곧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뜻. 翛然은 홀가분한 모습. 翛는 소(蕭)로 읽으며 儵然으로 된 판본도 있다(陸德明). 司馬彪는 儵然으로 보고 빠른 모양[疾貌]이라고 풀이했지만 맥락상 적절치 않다. 본문 해석은 成玄英이 ‘얽매임이 없는 모양[無係貌]’으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郭象과 崔譔은 ‘往來함에 어려워하지 않는 모양[往來不難之貌]’이라고 풀이했는데 成玄英의 풀이와 같은 맥락이다. 유사한 표현이 〈庚桑楚〉편에도 ‘翛然而往 侗然而來’로 나온다.
역주30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음. 생명의 근원, 곧 道를 삼가 지키고 죽을 때를 미리 알려고 억지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 不忘其所始는 〈德充符〉편의 ‘保始之徵’과 유사한 맥락이다. 屈復은 “하늘에서 받은 것을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는다[受於天者 守而不失].”로 풀이했다. 전체의 뜻은 成玄英이 “始는 삶이고 終은 죽음이다. 生死를 모두 떠나 보내서 일찍이 집착함이 없으니 어찌 다만 삶의 시작만 잊어버리고 죽는 때만을 알려고 하겠는가. 마침과 시작을 똑같이 대해서 만난 바에 꼭 맞게 한다[始生也 終死也 生死都遣 曾無滯著 豈直獨忘其生而偏求於死邪 終始均平 所遇斯適也].”고 풀이한 것을 따랐다. 馬敍倫, 武延緖, 曹受坤 등은 忘을 忌의 誤字로 보았고, 錢穆, 王叔岷 등은 志의 誤字로 보았지만 취하지 않는다(池田知久). 不忘其所始와 不求其所終이 정확하게 對句를 이루고 있고 忘과 求가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역주31 受而喜之 忘而復之 : 받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돌아감. 곧 생명을 받으면 기뻐하고 생명을 잃게 되면 대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 陸西星은 “이미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 생명을 받으면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위의 不說生(古之眞人 不知說生)을 이어서 말한 것이고, 여기서 생명을 받으면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생명을 받은 뒤에 항상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애초부터 슬퍼하거나 불만스러워하는 뜻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旣曰 其出不訢 又曰 受而喜之 却不相反 蓋不訢 卽承上不說生而言 曰受而喜之 是言有生之後 常自歡喜快樂 初無戚戚不滿之意].”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忘은 亡의 假借字라는 견해(馬敍倫, 赤塚忠)가 있다. 그러나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亡의 誤字는 아니다. 而는 則과 같다.
역주32 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 : 心知로 道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행위로 무리하게 자연의 운행을 助長하지 않음. 捐에 대해서는 揖(郭象, 吳汝綸, 章太炎), 楫(崔譔), 偝‧背(兪樾), 損(朱桂曜, 武延緖, 王叔岷) 등 諸說이 분분하고, 그 중에서도 損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본래의 捐자 그대로 풀이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굳이 본문을 損자로 바꿀 것까지는 없다. 여기서는 成玄英이 ‘捐은 棄[捐 棄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捐자를 그대로 두고, 損傷시키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助는 《孟子》 〈公孫丑 上〉의 ‘勿助長’의 助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王敔).
역주33 其心志 : 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음. 마음 씀씀이가 한결같다는 뜻으로 오로지 道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志는 한결같다[專一]는 뜻(王敔, 方勇‧陸永品). 趙以夫, 褚伯秀 등은 忘자로 보았고, 忘자로 된 판본도 있으나 옳지 않다(王敔). 劉武는 “志字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만약 忘字라면, 마음을 이미 잊어버렸는데 어떻게 아래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희로의 감정이 사계절과 통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志字不誤 如作忘 心旣忘矣 安能如下文 喜怒通四時 與物有宜乎].”라고 지적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따라서 여기의 志字는 《論語》 〈里仁〉편에서 “참으로 仁에 뜻을 둔다면 악이 없을 것이다[苟志於仁矣 無惡也].”, 《孟子》 〈告子 上〉의 “배우는 사람 또한 반드시 활을 당기는데 집중한다[學者 亦必志於彀].”고 했을 때의 志와 같이 專一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역주34 其容寂 : 모습이 고요함. 움직임이 고요하다는 뜻. 釋德淸은 “용모가 고요함이니 바로 내면은 담담하고 외모는 안정되어 있음이다[容貌寂然 乃內湛而外定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5 其顙頯(규) : 이마가 넓고 평평함. 頯는 넓고 평평한 모양. 郭象은 ‘아주 소박한 모양[大朴之貌]’이라고 했지만 추상적인 의미로 풀이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는 羅勉道가 ‘넓고 평평하여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음[廣平不蹙也]’이라고 풀이한 견해를 따라 眞人은 소박한 상태를 지키기 때문에 이마조차도 꾸밈(주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36 凄然似秋 煖(훤)然似春 : 서늘함은 가을과 같고 따스함은 봄과 같음. 煖은 훤(暄)으로 읽는다(陸德明). 郭象은 “만물을 죽이지만 위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며 만물을 살리지만 仁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다[殺物非爲威也 生物非爲仁也].”라고 풀이했다. 凄然은 서늘한 모양, 煖然은 따스한 모양. 煖然似春은 〈德充符〉편의 ‘與物爲春’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37 喜怒通四時 : 희로의 감정이 사계절과 통함. 희로의 감정이 春夏秋冬 사계절의 推移와 같이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바로 위의 ‘凄然似秋 煖然似春’을 풀이한 내용이다. 《淮南子》 〈本經訓〉에는 ‘喜怒和于四時’로 나온다.
역주38 與物有宜 :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림. 곧 온갖 사물을 차별없이 대하여 사물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郭象은 “무심하게 사물을 대하기 때문에 사물의 마땅함을 빼앗지 않는다[無心於物 故不奪物宜].”고 풀이했다.
역주39 莫知其極 : 그 끝을 알지 못함.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뜻. ‘極’은 窮極, 곧 끝이다. 한편 宣穎은 極을 痕迹으로 보고 “일에 따라 마땅함에 부합되기 때문에 자취를 찾을 수 없다[隨事合宜 而無迹可尋].”고 풀이하였고, 方勇‧陸永品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極은 眞人의 감정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사계절과 통한다는 본문의 맥락을 따져 볼 때, 공간적인 의미의 자취라기보다는 시간의 끝, 단절, 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유사한 〈德充符〉편의 ‘日夜無郤 而與物爲春’에서도 郤이 틈의 뜻으로 쓰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眞人이 만물과 어울리는 과정 속에서 인위적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 의미는 취할 만하다. 眞人이란 이처럼 自由自在한 無心의 境地를 스스로의 心境으로 삼는 인간이다.
역주40 聖人之用兵也 : 성인이 군사를 움직일 때는. 聞一多는 이하의 내용이 錯簡이라고 주장했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근거가 박약하다.
역주41 亡國而不失人心 : 나라를 멸망시켜도 인심을 잃지 않음. 崔譔은 “敵國을 멸망시켜도 그 백성들의 인심을 얻는다[亡敵國而得其人心].”고 풀이했다.
역주42 利澤施乎萬世 不爲愛人 : 이익과 혜택을 만세에 미칠 정도로 베풀어도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지 않음. 愛는 惠와 같다. 林希逸은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천하를 해치는 것이고 은택을 베푸는 것은 천하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모두 무심히 시행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자도 원망하지 않고 그 은혜를 입은 자 또한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다[用兵 毒天下也 施澤 愛天下也 皆以無心行之 則亡國者亦不怨 被其德者 亦曰帝力於我何有].”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이 편의 6장과 〈天道〉편에 ‘澤及萬世而不爲仁’으로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王叔岷).
역주43 樂通物 非聖人也 : 사물과 통하는 것을 즐기면 성인이 아님. 곧 사물과 통하는 것을 즐거워해서 인위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이 아니라는 뜻. 釋德淸은 “억지로 사물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데에 마음을 두면 자연이 아니다[有心要通於物 非自然矣].”라고 풀이했다. 한편 馬敍倫은 《列子》 〈仲尼〉편의 張註에 樂窮 두 글자가 연이어 나오는 것을 근거로 여기의 樂通을 樂窮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窮자를 衍文으로 보는 楊伯峻의 견해가 적절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池田知久).
역주44 有親非仁也 : 친애함이 있으면 仁人이 아님. 여기서의 親은 차별적인 사랑을 뜻한다. 《老子》 제79장의 ‘夫天道無親’의 親과 관계가 있을 것(池田知久)이며, 《淮南子》 〈詮言訓〉에도 ‘大仁無親’이라는 내용이 보인다(王叔岷). 仁은 仁人.
역주45 天時非賢也 : 天時에 〈일부러〉 맞추려고 하면 賢人이 아님. 王闓運은 天을 失의 誤字로 보았고, 王叔岷은 時天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하면서 待天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본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면 술어‧동사가 없어서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견해를 참고할 만하다. 여기서는 일단 ‘時를 天으로 함은 賢이 아니다’로 읽어, 자연의 때에 일부러 맞추려고 하면 賢人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역주46 利害不通 非君子也 : 이로움과 해로움을 하나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아님. 郭象은 “시비의 길을 하나로 여기지 못하여 이익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피하면 덕을 손상시키고 외물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不能一是非之塗而就利違害 則傷德而累當矣].”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利害不通을 “이해를 합쳐서 하나로 여기지 못함이다[未能通利害爲一].”로 풀이했다. 王叔岷은 “〈齊物論〉편에서 ‘성인은 …… 이익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해로움을 피하지 않는다[聖人……不就利 不違害]’고 한 것이 바로 ‘通利害’이므로 通利害는 비단 군자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역주47 行名失己 非士也 : 명예를 추구하여 자기를 잃어버리면 선비가 아님. 行名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다. 方勇‧陸永品은 ‘거짓을 저질러 명예를 추구함[矯行求名]’으로 풀이하여 行을 거짓을 저지르다는 뜻으로 보았고, 吳汝綸, 聞一多, 王叔岷 등은 行자가 徇자와 자형이 비슷하기 때문에 徇의 잘못된 글자로 보았으나 모두 옳지 않다. 여기의 行名은 爲名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孟子》 〈梁惠王 上〉의 ‘爲民父母行政’의 行政은 ‘爲政’과 같은 표현이며, 〈離婁 下〉의 ‘非仁無爲也 非禮無行也’의 ‘爲’와 ‘行’은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또 《論語》 〈學而〉편의 ‘有所不行’은 ‘有所不爲’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行과 爲는 통용되는 글자이기 때문에 본문의 글자를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爲名失己’와 같이 명예를 위해서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역주48 亡身不眞 非役人也 : 자기 몸을 죽여 참된 본성을 저버리면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님. 곧 자신의 참된 본성을 지키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을 부리는 眞人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郭象은 “스스로 자기 본성을 잃어버리고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따르게 되면 부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어찌 사람을 부릴 수 있겠는가[自失其性而矯以從物 受役多矣 安能役人乎].”라고 풀이했다.
역주49 : 林希逸 懸吐본에는 若이 없다. 植字할 때 脫字된 것 같다.
역주50 狐不偕 : 인명. 司馬彪는 옛날의 賢人[古賢人也]이라 했고, 成玄英은 “姓은 狐이고 字가 不偕이며 옛날 현인이다. 또 堯임금 때의 현인으로 요임금의 禪讓을 받지 않고 河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姓狐 字不偕 古之賢人 又云 堯時賢人 不受堯讓 投河而死].”고 풀이했다. 《韓非子》 〈說疑〉편에는 ‘狐不稽’로 나온다.
역주51 務光 : 인명. 陸德明은 皇甫謐의 말을 인용하여 “黃帝 때의 사람이며 귀의 길이가 七寸이었다[黃帝時人 耳長七寸].”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황제 때의 사람이며 신장이 七尺이었다. 또 夏나라 때 사람으로 약을 먹고 養生하였으며 鼓琴을 좋아했다. 湯이 천하를 선양했지만 받지 않고 스스로 돌을 짊어지고 廬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黃帝時人 身長七尺 又云 夏時人 餌藥養性 好鼓琴 湯讓天下不受 自負石沈於廬水].”고 풀이했는데, 務光을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헌에 湯임금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夏나라 末期의 인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方勇‧陸永品). 湯의 禪讓과 務光에 대한 기록은 〈外物〉편과 〈讓王〉편에 보이고, 《荀子》 〈成相〉편에는 ‘牟光’으로 나오며, 《史記》 〈伯夷列傳〉에도 務光의 이름이 보인다.
역주52 伯夷 叔齊 : 두 인명. 司馬彪는 “孤竹國 君主의 두 아들이다[孤竹君之二子].”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백이와 숙제는 遼西 고죽군의 두 아들이며 神農氏의 후손으로 성은 姜씨이다. 아버지가 죽자 형제가 서로 나라를 양보하여 임금 자리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西伯(文王)이 훌륭한 정치를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삼아 그에게로 가서 살폈는데, 문왕이 죽고 武王이 紂王을 정벌하는 상황을 만나 말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무왕이 듣지 않자 마침내 河東의 首陽山에 은거하여 곡식을 먹지 않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伯夷叔齊 遼西孤竹君之二子 神農之裔 姓姜氏 父死 兄弟相讓 不肯嗣位 聞西伯有道 試往觀焉 逢文王崩 武王伐紂 夷齊扣馬而諫 武王不從 遂隱於河東首陽山 不食其粟 卒餓而死].”고 풀이했다.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은 《論語》, 《孟子》, 《韓非子》, 《莊子》를 비롯한 先秦古文獻에는 물론이고, 《史記》 〈伯夷列傳〉에도 자세한 내용이 전한다.
역주53 箕子 : 인명. 成玄英은 “殷나라 紂王의 賢臣으로 주왕의 무도함을 말렸지만 주왕이 따르지 않아 마침내 노예로 부려지는 辱을 당했다[殷紂賢臣 諫紂不從 遂遭奴戮].”고 풀이했다. 〈外物〉편에도 나온다.
역주54 胥餘 : 인명. 司馬彪, 崔譔 등은 모두 箕子의 이름이라고 했고, 陸德明은 “어떤 사람은 比干의 이름이라고 했다.”고 했으며, 成玄英은 箕子의 이름이라는 견해와 함께 楚나라 大夫 伍奢의 아들 伍子胥를 말한 것이라는 異說을 소개하고 있지만 자세하지 않다.
역주55 紀他 : 인명. 成玄英은 “姓은 紀이고 이름이 他이며 湯임금 때의 逸人이다. 湯이 務光에게 禪讓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제자들을 이끌고 窾水에 빠져 죽었다[姓紀名他 湯時逸人也 聞湯讓務光 恐及乎己 遂將弟子陷於窾水而死].”고 풀이했는데 이 이야기는 〈外物〉편에 나온다.
역주56 申徒狄 : 인명. 崔譔본에는 司徒狄으로 되어 있는데(陸德明), 이 경우 司徒는 官職名이고 狄이 이름이다. 成玄英은 “신도적도 기타의 소식을 듣고 河水에 빠져 죽었다[申徒狄聞之 因以踣河].”고 풀이했는데, 이 이야기 또한 〈外物〉편에 나온다.
역주57 役人之役 適人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 :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겨 스스로 자기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임. 適은 ‘꼭 맞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즐거움’을 뜻한다. 狐不偕를 비롯한 위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참된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부리는 眞人(役人)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비판한 내용이다. 郭象은 “이것들은 모두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본받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따르고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이다[斯皆舍己效人 徇彼傷我者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이 몇 사람들은 모두 감정을 속이고 거짓된 행위를 저질러 뜻을 높이고 명성을 세워, 자기 본분 이외의 일에 어지럽게 움직였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 굶고 스스로 빠져서 수명을 재촉하고 목숨을 끊어서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명예가 사적에 전해졌지만, 바로 이것이 그들이 부림을 당한 까닭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겠는가. 중인들의 耳目을 기쁘게 해 주려고 했으니 어찌 스스로 자기 본성에 꼭 맞게 할 수 있었겠는가[此數子者 皆矯情僞行 亢志立名 分外波蕩 遂至於此 自餓自沈 促齡夭命 而芳名令譽 傳諸史籍 斯乃被他驅使 何能役人 悅樂衆人之耳目 焉能自適其情性耶].”라고 풀이했다. 憂患意識이 바탕에 깔려 있는 儒家의 先憂後樂사상과 달리 장자의 경우에는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할 줄 아는 自適其適의 自由意識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福永光司는 “역사상 淸廉潔癖의 인물로 추앙받는 인물들을 타인에 의해 뒤흔들리고 타인의 慰安(즐거움)거리가 된 自己喪失者들이라고 장자가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참다운 자기의 인생(자기에게 꼭 맞는 자기의 즐거움)을 자기의 인생으로서 산 自由人은 아니었다는 비판으로 장자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역주58 義(峨)而不朋(崩) : 높이 솟은 산처럼 당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함. 郭象은 “外物과 더불어 마땅한 관계를 유지하되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與物同宜而非朋黨].”고 풀이했고, 成玄英, 曹礎基 등이 이를 따르고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을 형용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兪樾과 馬敍倫의 고증을 따라 義를 峨, 朋은 崩으로 고쳐서 높이 솟은 모양[峨]과 무너지다[崩]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天道〉편의 ‘而狀義然’의 義然도 峨然과 같은 의미이다(兪樾).
역주59 : 峨
역주60 : 崩
역주61 若不足而不承 : 부족한 것 같지만 남에게서 받지 않음. 外物에 의지하지 않고 獨立한 모습을 형용한 표현이다. 王敔는 “承은 받는다는 뜻이다. 부족하면 반드시 남에게서 물건을 받게 되는데, 부족한 듯하지만 실제로 부족한 것이 아니니 어찌 다시 자잘한 물건을 받겠는가[承受也 不足者必受物 若不足 非不足也 寧更受小物耶].”라고 풀이했다.
역주62 與乎其觚而不堅也 :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하면서도 고집하지 않음.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林雲銘이 “지키는 것은 方正하지만 고집하지 않음이다[所守方而不固執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與乎는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는 모양. 觚는 모난 그릇으로 여기서는 모난 그릇처럼 태도가 단정함을 뜻한다. 不堅을 고집하지 않음, 또는 완고하지 않음으로 풀이하는 데에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지만, 與와 觚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向秀는 與를 ‘의심스러워하는 모양[疑貌]’으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방황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容與自得]’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音을 豫로 읽고, 《老子》 제15장 ‘豫焉若冬涉川’의 豫와 같은 의미로 본 듯하지만 觚(두 사람 모두 孤의 뜻으로 본 듯하다.)의 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觚에 대해서 陸德明은 音을 孤로 기록하고 있고, 崔譔은 棱으로 풀이했다. 王叔之는 “홀로 서서 어울리지 않는다[特立不群也].”는 뜻으로 풀이했고 羅勉道는 ‘도구 중에서 모서리가 있는 것[器之有棱者]’으로 풀이했다. 이 중 觚에 대한 풀이는 羅勉道의 견해를 따를 만하지만, 그 또한 與를 成玄英과 같이 容與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與와 觚에 대한 해석의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 구절의 與는 觚의 모습을 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아래의 ‘與乎止我德也’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止我德’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므로 ‘몸가짐이 단정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 이하의 구절은 眞人의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모두 ‘~하면서도 ~하지는 않는다’, ‘~한 것 같지만 ~하지 않다’, ‘~하지만 ~하지는 않는다’는 맥락으로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與乎其觚而不堅也는 아래의 ‘邴邴乎其似喜乎’의 경우처럼 ‘與與乎其似觚而不堅也’를 축약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서는 與를 《論語》 〈鄕黨〉편의 ‘與與如也’의 與與와 같은 표현으로 보고 ‘與與를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는 모양[威儀中適之貌]”이라고 풀이한 朱熹의 견해와, 《論語》 〈雍也〉편의 ‘觚不觚 觚哉觚哉’에서 역시 주희가 “觚는 모서리이니 酒器라고도 하고 木簡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도구 중에서 모서리가 있는 것[觚棱也 或曰酒器 或曰木簡 皆器之有棱者也]”이라고 한 견해를 따라, 與乎는 몸가짐이 법도에 맞는 모양이고 觚는 모난 그릇처럼 태도가 단정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63 張乎其虛而不華也 : 넓고 크게 마음을 비운 듯하면서도 꾸미지 않음. 張은 넓고 큰 모양. 成玄英은 ‘넓고 큰 모양[廣大貌也]’으로 풀이했다. 不華는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다는 뜻. 成玄英은 ‘쓸데없이 꾸미지 않음[不浮華]’으로 풀이했다. 위의 與乎其觚를 與乎其似觚로 본 것처럼 아래의 邴邴乎其似喜乎에 근거하여 張乎其似虛而不華也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64 邴邴乎其似喜乎 : 환하게 밝은 모습으로 마치 기쁜 일이 있는 듯함. 邴邴은 환하게 밝은 모양, 곧 기뻐하는 모양. 向秀와 成玄英은 ‘기뻐하는 모양[喜貌]’으로 풀이했고 簡文帝는 ‘밝은 모양[明貌]’으로 풀이했는데 大意에 큰 차이는 없다. 嚴靈峯은 上下文의 例에 따라 邴邴에서 한 글자를 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물의 모습을 형용하는 副詞로 쓰이는 경우 이처럼 疊語로 표현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고, 실제로 陳景元이 지적한 것처럼 아래의 ‘崔乎’가 崔崔乎로 된 판본도 있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다. 其似喜乎의 乎가 也로 된 판본도 있다(陳景元).
역주65 崔乎其不得已乎 : 임박해서 움직여 마지못한 듯함. 崔는 임박한 모양으로 不得已한 모습을 표현. 向秀는 ‘움직이는 모양[動貌]’으로, 簡文帝는 ‘빠른 모양[速貌]’으로 풀이했지만 적절치 않다. 陳啓天은 催의 가차로 보고 재촉하다[促], 임박하다[迫]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이 견해가 적절하다. 이 구절 역시 崔乎其似不得已乎가 축약된 형태로 보고 其不得已乎를 “마지못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崔乎가 崔崔乎로 된 판본도 있고, 其不得已乎의 乎가 也로 된 판본도 있다(陳景元).
역주66 滀(축)乎進我色也 : 가득하게 자기의 안색을 나타냄. 곧 자신의 기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다는 뜻. 滀은 가득한 모양으로 자기 얼굴색을 드러내는 모습[進我色]을 형용한 표현. 으로 된 판본도 있다(陸德明). 司馬彪는 ‘얼굴색이 憤起하는 모양[色憤起貌]’으로 풀이했고, 簡文帝는 ‘모이다[聚]’는 뜻으로 풀이했으며, 林希逸은 簡文帝가 모이다[聚]는 뜻으로 본 것을 따르면서 ‘기쁨이 충만한 모양[充悅之貌]’이라고 풀이했다. 進은 안색을 가득하게 드러낸다는 뜻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止我德’의 止와 상반되는 표현이다.
역주67 與乎止我德也 :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자신의 참다운 덕에 머무름. 與乎는 위의 ‘與乎其觚’와 같이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한 모습을 의미한다. 止는 위의 進과 상반되는 표현으로 자신의 덕을 안으로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68 厲(廣)乎其似世乎 : 넓은 도량으로 세속 사람들과 함께하는 듯함. 厲乎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崔譔본에는 厲乎가 廣乎로 되어 있고 “포용함이 넓다[苞羅者廣也].”고 풀이했는데(陸德明), 여기서는 崔譔본을 따라 廣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한편 成玄英은 厲를 危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엄하고 굳센 뜻[嚴毅之意]’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본래 글자 그대로 보고 풀이한 것이지만 世자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다. 世자에 대해서도 이설이 분분하다. 郭象과 成玄英은 본래 글자 그대로 풀이했지만, 王闓運은 紲와 같다고 보았고, 兪樾은 泰의 假借字로, 聞一多는 泄로 赤塚忠은 抴의 假借字로 보았지만, 상반된 의미를 나타내는 뒤의 ‘謷乎其未可制也’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모두 취하지 않고, 본래 글자 그대로 世俗 또는 世人의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69 : 廣
역주70 謷乎其未可制也 : 오연히 제약받지 않음. 謷乎는 傲然히 초월한 모양. 謷는 傲와 통하는 글자(方勇‧陸永品). 司馬彪는 ‘뜻이 먼 모양[志遠貌]’이라고 풀이했다. 未可制는 세속적인 규범으로 제약할 수 없다는 뜻.
역주71 連乎其似好閉也 :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감추기를 좋아하는 듯함. 마치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감추는 듯하다는 뜻이다. 連乎는 諸注가 모두 명확하지 않다. 우선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모습으로 번역하였다. 閉는 閉藏으로 감춘다는 뜻. 羅勉道는 “연면히 닫히고 막혀서 엿볼 수 없다[連綿閉塞 無可窺焉].”고 하였다.
역주72 悗(문)乎忘其言也 : 무심히 모든 말을 다 잊어버림.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悗乎는 無心한 모양. 王敔는 “悗은 心자와 免자로 구성된 글자로 마음 속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悗從心從免 不系於心也].”라고 했는데 적절한 풀이이다.
역주73 以刑爲體 以禮爲翼 : 형벌을 정치의 본체로 삼고, 예교를 보조수단으로 삼음. 體는 정치의 본체. 郭象은 “형벌은 정치의 본체이니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刑者 治之體 非我爲].”라고 풀이했다. 翼은 새의 날개로 여기서는 보조수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張黙生은 이 구절부터 ‘所以行於世也’까지의 내용은 장자의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지만 지나친 견해이다. 비록 이하의 내용이 《장자》 내편의 일반적인 주장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내편이 장자의 自著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黃老 사상이나 法家 사상이 皇帝 권력의 强化에 대한 支持나 追認을 위해 개입된, 前漢初期 道家思想의 展開로 보면 무리가 없다(池田知久).
역주74 以知爲時 以德爲循 : 지식으로 時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덕을 따라야 할 準則으로 삼음. 時는 時宜를 판단하는 기준. 循은 따라야 할 준칙.
역주75 綽乎其殺也 : 관대하게 죄인을 죽임. 綽은 관대한 모양. 崔譔본에는 淖으로 되어 있고(陸德明), 郭象과 成玄英 모두 너그럽다[寬]는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76 所以行於世也 : 세상에 행해지기 위해서임. 곧 애초부터 禮敎를 수립하는 데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眞人의 정치를〉 세상에 베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예교를 제정한다는 뜻이다. 아래의 不得已於事也와 같은 맥락.
역주77 不得已於事也 : 일에 부득이하기 때문임. 곧 實務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역주78 與有足者 至於丘也 : 다리가 있는 보통 사람과 함께 걷다 보니 〈저절로〉 언덕에 도달한 것과 같음. 다리 가진 사람과 함께 걷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無爲自然의 정치를 의미한다. 陳詳道는 “《장자》 본문에서 山으로 道를 비유하고 언덕으로 德을 비유한 경우가 많다[經中多以山喩道 丘喩德].”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르면 다리[足]는 언덕에 이르는 길[道] 즉 수단을 비유한 것이라 할 것이다(池田知久).
역주79 人眞以爲勤行者也 : 사람들은 참으로 부지런히 걸어서 도달한 것이라고 여김. 人은 세속 사람들. 馬敍倫은 人眞을 眞人이 잘못된 것이라고 풀이했는데 그럴 경우 眞人이 부지런히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이 되므로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勤行이 《老子》 41장에 보이는 ‘上士聞道 勤而行之’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誤解이다.
역주80 其好之也一 其弗好之也一 : 좋아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김. 이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맥락이 분명하지 않다. 그 중 林希逸의 견해가 大意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하기 때문에 이 문단 전체를 林希逸의 풀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林希逸은 이 문단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一은 자연이며 조화이다. 好와 不好는 바로 好惡이다. 其一은 好惡가 같음을 말한 것이고 其不一은 好惡가 다름을 말한 것이다. 好惡에 異同이 있는 것은 모두 조화의 밖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일치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일치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긴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 好惡를 같은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이는 하늘을 아는 자이다. 그 때문에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好惡를 다른 것으로 여기면 사람만 알고 하늘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 때문에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이겨도 옳지 않으며 하늘이 사람을 이겨도 또한 옳지 않다. 眞人은 好도 없고 惡도 없으며 異도 없고 同도 없어서 天과 人을 구분함이 없이 단지 자연을 따를 뿐이다[一自然也 造化也 好與不好 卽好惡也 其一 同也 其不一 異也 好惡之有異同 皆不出乎造化之外 故曰 其一也一 其不一也一 人能以好惡爲同 則知天者也 故曰 其一與天爲徒 若以好惡爲異 則知人而不知天者 故曰 其不一與人爲徒 以人勝天 不可也 以天勝人 亦不可也 眞人則無好無惡 無異無同 無分於天人 但循自然而已].” 여기서 ‘한 가지로 여긴다’는 것은 모든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자연의 道와 一體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자연을 따를 뿐[循自然而已]이라는 뜻이다.
역주81 其一 與天爲徒 :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임. 天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好, 不好도 같은 것이며, 好不好의 일치와 好不好의 불일치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
역주82 其不一 與人爲徒 :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임.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好와 不好는 다른 것이며, 일치와 불일치도 다른 것이라는 의미.
역주83 天與人 不相勝也 :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지 않음. 天과 人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한 내용이다.
역주84 其有夜旦之常 天也 : 〈죽고 사는 것에〉 밤낮처럼 일정함이 있는 것은 자연임. 其는 앞의 死生을 지칭한다. 夜旦은 晝夜, 밤낮을 의미한다. 본문 번역은 有를 본래 글자 그대로 보고 번역하였지만 吳汝綸은 有를 猶의 假借字로 보았는데 참고할 만하다. 〈至樂〉편의 ‘死生爲晝夜’, 〈田子方〉편의 ‘死生終始將爲晝夜’도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85 人之有所不得與(예) :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바가 있음. 死生의 문제는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與는 《論語》 〈泰伯〉편의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의 與와 마찬가지로 예(預)로 읽고, 관여하다, 참여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86 皆物之情也 : 모두 사물의 참다운 모습임. 곧 사람에게 생사가 있고 자연의 운행에 밤낮이 있는 것은 모두 사물의 實狀이라는 뜻. 情은 實情으로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뜻한다.
역주87 彼特以天爲父而身猶愛之 : 저 사람들은 단지 하늘을 부모로 여겨서 자기 몸으로 그를 사랑함. 彼는 彼人으로 하늘을 부모로 여기는 사람들. 褚伯秀는 “사람들은 하늘을 어버이로 여겨서 존경하고 사랑한다[人以天爲父而猶尊愛之].”고 풀이했고, 劉武는 “목숨이 하늘에서 생겼기 때문에 하늘을 어버이로 여긴다[命生於天 故以天爲父].”고 풀이했다. 한편 以天爲父를 以父爲天이 잘못된 것으로 보고 “어버이를 하늘로 여기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견해(陶鴻慶, 宣穎 등)도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뒷구절의 君과 대구가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본래 그대로 두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다.
역주88 況其卓乎 : 하물며 그보다 더 빼어난 존재[道]이겠는가. 卓은 우뚝한 모양. 곧 道를 지칭한다(劉武). 道를 더 사랑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
역주89 況其眞乎 : 하물며 眞君이겠는가. 앞의 君은 세속 세계의 군주를 의미하고 여기의 眞은 眞君, 곧 道를 지칭한다. 眞君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뜻. 眞君은 〈齊物論〉편 제1장의 ‘其有眞君 存焉’ 참조.
역주90 泉涸(학) : 샘이 마름. 陸德明은 《爾雅》를 인용하여 涸은 다하다[竭]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역주91 相呴以濕 相濡以沫 : 서로 습기를 뿜어내며 서로 거품으로 적셔 줌. 呴는 토해낸다는 뜻.
역주92 不如相忘於江湖 :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느니만 못함. 이상의 내용은 〈天運〉편의 孔子와 老聃의 대화 중 老聃의 말로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若相忘於江湖’로 나오며, 이 편 제4장의 孔子와 子貢의 대화 중에도 孔子의 말로 ‘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이 나온다.
역주93 與其譽堯而非桀也 不如兩忘而化其道 : 堯임금을 찬양하고 桀王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道와 일체가 되느니만 못함. 곧 요임금을 찬양하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둘 다 잊고 道와 일체가 되는 것이 낫다는 뜻. 化其道는 道와 일체가 된다는 뜻. 郭象은 “변화와 일체가 된다[與變化爲一].”고 풀이했고, 釋德淸은 “道와 일체가 된다[與道爲一].”고 풀이했다. ‘與其~ 不如~’는 “~하는 것은 ~하느니만 못하다.”는 뜻의 구문.
역주94 大塊 : 큰 땅덩어리. 大地. 여기서는 대자연 곧 道를 상징한다. 〈齊物論〉편에 이미 나왔다. 褚伯秀는 “大塊는 본래 땅을 말한 것이지만 이 經의 뜻에 근거한다면 造物者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大塊 本以言地 據此經意 則指造物].”고 풀이했다. 이 구절부터 다음 문단 ‘其爲樂 可勝計邪’까지는 《淮南子》 〈俶眞訓〉에도 실려 있다.
역주95 載我以形 : 형체로 나를 실어 줌. 곧 육체를 주었다는 뜻. 吳汝綸은 載를 成으로 풀이했지만, 여기의 載는 땅이 만물을 실어서 살게 해 주는 것처럼, 나의 정신이 깃들 수 있는 육체로 나를 실어 주었다는 뜻이므로 다른 글자로 바꾸어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주96 勞我以生 :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함. 勞는 수고롭게 하다, 일하게 하다는 뜻.
역주97 佚我以老 :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함. 佚은 安佚로 편안하게 하다는 뜻. 《淮南子》 〈俶眞訓〉에는 ‘逸我以老’로 되어 있다.
역주98 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 나의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좋은 것으로 여기기 위한 것이다. 곧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죽음 또한 좋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 다음 문단의 ‘善夭善老 善始善終’과 같은 맥락.
역주99 藏舟於壑 藏山於澤 : 산골짜기에 배를 간직하며 연못 속에 산을 간직함. 山을 汕(오구)의 假借字로 보는 견해(兪樾), 또 車의 깨진 글자로 보는 견해(王叔岷)가 있지만, 이 구절의 내용은 스스로의 知와 힘을 過信하는 인간들의 약은 꾀가 때로 奇想天外할 정도에 이른다는 의미이므로 본문을 바꾸지 않고, 문자 그대로 연못 속에 산을 간직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郭象, 成玄英 모두 본래 글자 그대로 풀이했다.
역주100 謂之固矣 : 단단히 간직했다고 말함. 인간들이 자기의 지혜를 과신하여 배를 골짜기 사이에 감추고 산을 연못 속에 감추면 절대로 도난당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
역주101 夜半 : 한밤중. 成玄英은 ‘진리의 심오함[眞理玄邃]’을 비유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02 有力者 : 힘이 있는 자. 힘이 센 사람. 郭象은 有力을 無力之力으로 보고 變化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造化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했다.
역주103 負之而走 : 그것을 등에 지고 도망침. 成玄英은 “조화의 힘이 짊어지고 달려 간다[造化之力 擔負而趨].”고 풀이했다.
역주104 昧者不知也 : 잠자는 사람은 알지 못함. 昧者는 잠자는 사람, 곧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 成玄英은 心靈이 愚昧한 사람으로 풀이했다.
역주105 藏小大有宜 : 작은 것과 큰 것을 간직하는 데는 각기 마땅한 곳이 있음. 福永光司나 池田知久는 藏小大를 藏小於大로 보고 ‘작은 것을 큰 것에 감추는 것은 마땅한 조치인 것 같지만’으로 번역하였으나 본문의 내용은 도리어 큰 것은 큰 곳에 작은 것은 작은 곳에 감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赤塚忠도 小大를 작고 큰 여러 가지 物의 뜻으로 보았다. 成玄英은 “산골짜기에 배를 간직하며 연못 속에 산을 간직하는 것은 큰 것을 간직하는 것이고, 집 안에 사람을 간직하고 그릇 안에 물건을 간직하는 것은 작은 것을 간직하는 것이다[藏舟於壑 藏山於澤 此藏大也 藏人於室 藏物於器 此藏小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06 猶有所遯 : 그래도 도주할 곳이 있음. 훔쳐서 도주할 곳이 있다는 뜻.
역주107 藏天下於天下而不得所遯 : 천하를 천하에 간직하면 훔쳐서 도주할 곳이 없음. 천하의 모든 존재를 천하 속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는 뜻. 而는 則과 같다.
역주108 恆物之大情也 : 일정불변하는 만물의 커다란 진실. 恆은 常과 같이 일정불변함을 의미. 情은 實情, 實相, 本質, 眞實의 뜻.
역주109 特犯人之形而猶喜之 : 사람의 형체를 훔쳐서 세상에 나와 오히려 그것만을 유독 기뻐함. 特은 다만, 오직의 뜻으로 犯人之形을 한정하는 부사로 쓰였다. 곧 오로지 사람의 형체를 얻은 것만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 편의 제3장과 《淮南子》 〈俶眞訓〉에는 特이 一로 되어 있지만 의미의 차이는 없다. 犯人之形은 사람의 형체를 훔쳐서 세상에 태어나다, 곧 사람의 형체로 鑄造되어 세상에 나왔다는 뜻이다. 朱桂曜, 楊樹達 등은 犯을 鑄物을 鑄造한다는 뜻의 範으로 보았고, 王闓運, 奚侗 등은 틀로 본뜨다는 뜻의 笵으로 보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淮南子》에는 ‘範人之形’으로 되어 있고, 이 편의 제3장에서는 天地를 화로에 비유하고 조화를 대장장이로 비유하는 표현(一以天地爲大鑪 以造化爲大冶)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가 타당하다. 또한 여기의 犯은 위의 ‘藏天下於天下而不得所遯’의 藏과 상대되는 글자이며, 동시에 감춰 둔 것을 훔쳐서 도망치다는 뜻의 遯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에 範 또는 笵의 뜻으로 보되, 본문의 글자 犯의 뉘앙스를 살려서 훔쳐서 세상에 나오다로 번역하였다. 猶喜之는 오히려 그것을 기뻐함.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기뻐한다는 뜻.
역주110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 사람의 형체와 같은 것은 천변만화하여 처음부터 일정함이 없음. 인간의 형체는 천변만화 중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일정함도 없다는 뜻.
역주111 其爲樂 可勝計邪 : 그 즐거움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앞구절의 내용처럼 변화에 일정함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 또한 헤아릴 수 없다는 뜻.
역주112 將遊於物之所不得遯而皆存 : 장차 사물을 훔쳐서 도주할 수 없는 곳에 노닐어서 모두 보존함. 도주할 수 없는 곳은 萬物齊同의 세계, 곧 자연을 의미한다. 皆存은 모두 보존한다는 뜻으로 만물을 차별없이 긍정함으로써 사람의 형체만을 유독 기뻐하는 세속 사람들과는 달리,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을 모두 보존한다는 뜻이다. 方勇‧陸永品은 存을 ‘대도와 공존함[與大道共存]’으로 풀이하였지만 적절치 않다.
역주113 善妖(夭)善老 善始善終 : 일찍 죽는 것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오래 사는 것도 좋은 것으로 여기며, 삶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죽음도 좋은 것으로 여김. 夭와 老는 각각 일찍 죽고, 오래 산다는 뜻이고, 始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終은 죽는 것을 뜻한다. 妖(夭)는 《釋文》에서 妖를 揭出하고 一本에서는 夭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현재 통행되는 諸本에는 모두 夭로 되어 있음.
역주114 萬物之所係 一化之所待 : 만물이 매여 있는 것과 一化가 의지하는 것. 곧 道를 의미한다. 一化는 앞의 萬物과 상대되는 표현(池田知久)으로 一切의 變化, 모든 변화를 의미한다.
역주115 有情有信 無爲無形 : 情과 信은 있지만 작용이나 형체는 없음. 情과 信은 같은 뜻으로 모두 道가 진실한 존재임을 나타낸 표현이다. 林希逸은 “情은 實이고 信 또한 實이다[情實也 信亦實也].”라고 풀이했고, 朱桂曜도 “情은 實이다. 信과 같은 뜻이다[情實也 與信同義].”라고 풀이했다. 〈應帝王〉편의 ‘其知情信’과 〈秋水〉편의 ‘是信情乎’에서 情과 信이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모두 實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方勇‧陸永品). 無爲無形은 작용이나 형체가 없다는 뜻으로 道의 모습을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음을 형용한 것이다. 成玄英은 “고요하고 적막한 것이 無爲이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無形이다[恬淡寂寞 無爲也 視之不見 無形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16 可傳而不可受 : 〈마음으로〉 전해 줄 수는 있지만 〈손으로 주고〉 받을 수는 없음. 傳은 〈養生主〉편의 ‘火傳也’의 傳과 같은 맥락의 표현으로 여기서는 정신적인 깨달음을 뜻한다. 受는 손으로 물건을 주고 받는다는 뜻. 곧 道는 깨우침을 통해 알 수는 있지만 물건을 주고 받는 것처럼 지식으로 전달받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王元澤은 “정신으로 깨우칠 수 있다[可以神會].”고 풀이했고, 羅勉道는 “손으로 전해줄 수 없다[不可手授].”고 풀이했는데 모두 참고할 만하다.
역주117 可得而不可見 :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음. 곧 마음으로 터득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 대의는 앞의 ‘可傳而不可受’와 같다. 羅勉道는 “마음으로 터득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可心得而不可目見].”고 풀이했다.
역주118 自本自根 : 스스로를 근본으로 삼음. 道의 無限性과 無依存性을 나타내는 표현.
역주119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 아직 천지가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본래 존재함. 未有天地는 未有天地之時, 곧 천지가 있기 이전. 已는 이미, 固는 본디, 엄연히. 道에 앞서는 어떤 사물도 없다는 뜻. 이하의 내용은 모두 道의 無限性과 超越性을 표현한 것이다.
역주120 神鬼神帝 : 귀신과 상제를 신령하게 함. 귀신과 상제의 신령함도 모두 道에 근원하고 있다는 뜻. 王先謙은 “아래 문장의 堪坏와 馮夷 등은 鬼이고 狶韋와 伏戲 등은 帝이니 그들의 신령함은 모두 道가 신령하게 한 것이다[下文堪坏馮夷等 鬼也 狶韋伏戲等 帝也 其神皆道神之].”라고 풀이했다. 또 《老子》 제39장에 “神은 하나를 얻어 신령하다[神得一以靈].”고 한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池田知久).
역주121 生天生地 : 하늘과 땅을 생성함. 萬物을 化育하는 天地조차도 道에서 비롯된 이차적인 존재라는 뜻. 《老子》 제1장의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에서 有名이 天地를 의미하는 것임을 참고할 것.
역주122 在太極之先而不爲高 : 태극보다 앞서서 존재하면서도 높은 체하지 않음. 道는 존재의 位階秩序 중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는 태극보다 더 높은 존재라는 뜻. 兪樾은 이 구절이 아래의 ‘六極之下’와 대구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不爲高의 高자가 높음을 표현한 것임을 근거로 太極之先을 太極之上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池田知久나 方勇‧陸永品 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有力한 說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周易》 〈繫辭傳 上〉에 보이는 太極은 만물에 앞서서 존재하는 根源者로 규정되어 있고, 이 구절의 不爲高는 아래의 ‘不爲深’과 대구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위계질서를 두고 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太極之先, 六極之下 이 둘을 공간적 규정으로만 보고 上下의 의미에 꿰맞추는 것은 도리어 도가 시공간적 규정을 벗어나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원문의 맥락을 놓친 풀이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太極之先은 선후의 문제를 따진 시간적 규정이고, 六極之下는 上下와 內外의 문제를 따진 공간적 규정으로 보고 이 둘을 道의 시공간적 의미를 표현한 대구로 이해하여 원문 그대로 번역하였다. 六極之下는 〈應帝王〉편에는 ‘六極之外’로 나온다.
역주123 在六極之下而不爲深 : 六極의 아래에 머물면서도 깊은 체하지 않음. 만물의 根柢에 자리잡고 있는 근원자라는 뜻. 六極은 〈齊物論〉편의 ‘六合’과 같이 上下東西南北의 뜻. 〈應帝王〉편에도 보인다.
역주124 長於上古而不爲老 : 상고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은 체하지 않음. 앞구절과 함께 道는 時空間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자임을 의미한다.
역주125 狶(시)韋氏 : 인명. 전설 속의 제왕. 陸德明은 狶를 ‘희’(許豈反)로 독음하였으나 여기서는 李頤가 ‘豕’로 표기한 音을 따랐다. 成玄英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상고시대 제왕의 호칭[文字已前遠古帝王號也]”이라고 풀이했다. 兪樾은 李頤가 狶의 音을 豕로 붙인 것을 들어 殷나라의 패자 중의 한 사람인 豕韋가 그 후손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豕韋는 《春秋左氏傳》과 《國語》 등에도 보이며, 朱熹의 《孟子集註》 〈告子 下〉에도 五覇를 풀이하면서, 丁公著가 한 말을 인용하여 “夏나라의 昆吾, 商나라의 大彭과 豕韋, 周나라의 齊桓公과 晉文公을 오패라고 한다[丁氏曰 夏昆吾 商大彭 豕韋 周齊桓晉文 謂之五覇].”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126 以挈(설)天地 : 천지를 동여맴. 挈은 붙잡다, 동여매다, 이루다는 뜻. 崔譔은 이루다[成]로 풀이했다. 成玄英의 一說은 挈을 契로 보고 兩儀(天地)에 부합된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朱桂曜, 馬敍倫, 阮毓崧, 王叔岷 등). 그러나 여기의 天地는 앞뒤의 맥락을 고려할 때 만물을 지배하는 능동적 존재이라기보다는, 道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 대상물, 곧 앞문단의 ‘萬物之所係’의 만물에 가깝기 때문에 “道를 얻어서 천지에 부합된다.”는 식으로 天地를 주개념으로 풀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따라서 挈자의 본래 뜻 그대로 손에 붙잡다, 다스리다, 이루다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成玄英의 一說 또한 ‘天地를 손에 쥠[提挈二儀]’으로 보고 있다.
역주127 伏戲氏 : 인명. 전설 속의 인물로 〈人間世〉편에 이미 나왔다. 다른 諸本에는 氏가 없다.
역주128 以襲氣母 : 氣의 근원을 취함. 襲은 가져오다, 취하다,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孟子》 〈公孫丑 上〉의 ‘非義襲而取之也’의 襲과 같다. 뒤의 ‘以襲崑崙’의 襲도 마찬가지. 崔譔은 取로 풀이했고, 司馬彪는 받아들이다[入]는 뜻으로 풀이했다. 成玄英은 부합되다[合]는 뜻으로 풀이하였지만 적절치 않다. 氣母는 기의 근원, 司馬彪는 元氣之母로 풀이했고, 崔譔은 元氣之本으로 풀이했다.
역주129 維斗 : 北斗星. 維는 한 글자의 명사 앞에 붙이는 어조사. 維에 대해 李頤는 “천하의 중심축[綱維]이기 때문에 維斗라고 표현했다[所以爲天下綱維].”고 풀이했고, 成玄英도 “뭇 별의 중심축[綱維]이기 때문에 維斗라고 했다[爲衆星綱維 故謂之維斗].”고 풀이했다. 王叔岷, 池田知久, 方勇‧陸永品 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으며, 安東林도 ‘세계를 매달아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밧줄’이라고 풀이하는 등 같은 입장이지만 모두 牽强附會이다. 維자에 구체적인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하려면 아래의 東維처럼 斗維, 또는 北維라고 표기되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維斗라고 표기된 것을 보면 이 경우는 東維의 維가 구체적인 의미가 담긴 것과는 달리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의미없이 붙이는 어조사로 維자를 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維자가 명사 앞에 붙는 어조사로 쓰이는 경우는 《詩經》에만도 ‘維葉, 維鵲, 維鳩, 維筐’ 등 수십 차례에 이르며, 특히 〈召南‧小星〉의 ‘維參與昴’의 參과 昴는 별자리 명칭으로 여기의 維斗처럼 별자리 명칭 또는 별의 명칭 앞에 維자를 붙이고 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근거이다.
역주130 終古不忒 : 영원토록 어긋나지 않음. 終古의 古는 옛날, 과거의 뜻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항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崔譔은 오래됨[久]으로 풀이했다.
역주131 終古不息 : 영원토록 쉬지 않음. 息은 그만두다, 종식되다의 뜻.
역주132 堪坏 : 崐崙山의 神. 司馬彪는 ‘神의 이름으로 人面獸形[神名 人面獸形]’이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崐崙山의 神名[崐崙山神名]’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33 以襲崐崙 : 崐崙山으로 들어감. 곧 곤륜산을 다스렸다는 뜻. 여기의 襲은 成玄英도 들어가다[入]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成玄英은 “崐崙은 산 이름으로 북해의 북쪽에 있다[崐崙山名也 在北海之北].”고 풀이했다.
역주134 馮(풍)夷 : 黃河의 신. 곧 河伯. 司馬彪는 《淸泠傳》을 인용하여 “馮夷는 화음 동향 제수사람이다[馮夷華陰潼鄕堤水人也].”라고 풀이했다. 馮夷는 《山海經》에는 ‘氷夷’로 되어 있고, 《穆天子傳》에는 ‘無夷’로 되어 있다(兪樾). 馮은 인명이나 지명에 쓰일 경우 ‘풍’으로 읽는다.
역주135 以遊大川 : 黃河에서 노닒. 大川은 黃河(陸德明, 成玄英). 崔譔본에는 泰川으로 되어 있다(陸德明). 大川은 큰 물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풍이가 다스린 특정 지역의 고유명사로 보고 번역하였다. 뒤의 大山과 雲天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역주136 肩吾 : 태산의 신. 司馬彪는 山神이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道를 얻었기 때문에 동악에 머물러 태산의 신이 되었다[得道 故處東岳爲太山之神].”고 풀이했다. 肩吾는 이미 〈逍遙遊〉편에 나왔으며, 뒤의 〈應帝王〉편과 〈田子方〉편에도 나온다. 池田知久는 견오가 다른 편에서는 보통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이 편에 이르러 神仙化 傾向이 강해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그러나 앞뒤의 맥락을 볼 때 여기의 견오가 다른 편의 견오와는 다른 사람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곧 다른 편의 견오는 連叔이나 接輿, 孫叔敖 등과 같이 춘추시대에 실재했던 인물을 빗댄 표현이고, 여기의 肩吾는 앞의 狶韋氏가 殷나라의 패자 豕韋를 지칭한 것처럼, 夏나라의 패자로 전해지는 昆吾의 假借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昆吾는 《山海經》에는 山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앞서 인용한 朱熹의 《孟子集註》의 註에 인용된 丁公著의 풀이에는 豕韋와 함께 五伯(覇) 중의 일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거명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 伏戲, 黃帝 등은 모두 三皇 중의 일인이고, 顓頊 등은 五帝 중의 일인으로 전설 속의 제왕을 지칭한 것처럼, 狶韋氏와 肩吾 등도 전설 속의 五覇를 지칭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주137 以處大(태)山 : 태산에 머묾. 곧 태산을 다스렸다는 뜻. 大는 ‘태’로 읽는다(陸德明).
역주138 黃帝 : 인명. 전설 속의 帝王. 伏戲, 神農과 함께 三皇의 하나. 成玄英은 軒轅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39 以登雲天 : 雲天에 오름. 雲天은 구름 저쪽의 하늘, 또는 成玄英의 풀이를 따르면 “구름을 타고 龍을 몰아 하늘에 올랐다[乘雲駕龍 以登上天]”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황제가 오른 곳의 고유명사로 간주하고 번역하였다. 崔譔은 “道를 얻어서 하늘에 올랐다[得道而上天也].”고 풀이했다. 皇帝가 하늘에 오른 설화는 이 이외에도 《史記》 〈封禪書〉에 자세하다(池田知久).
역주140 顓頊 : 인명. 전설 속의 제왕. 北方의 神으로 일컬어지며 少昊, 帝嚳, 帝堯, 帝舜과 함께 五帝의 하나이다. 李頤는 “전욱은 帝高陽氏이고 玄宮은 북방의 궁이다[顓頊 帝高陽氏 玄宮 北方宮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황제의 손자 帝高陽으로 玄帝라고도 한다[黃帝之孫 卽帝高陽也 亦曰玄帝].”고 풀이했다.
역주141 以處玄宮 : 현궁에 거처함. 곧 북방의 궁에 거처하여 북방을 다스렸다는 뜻. 玄은 五行의 방위를 기준으로 따지면 북방의 色에 해당한다.
역주142 禺强 : 인명. 전설 속의 신. 司馬彪는 《山海經》을 인용하여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가진[人面鳥身]北海의 神”으로 풀이했고, 簡文帝는 “북해의 신으로 禺京이라고도 하며 황제의 손자이다[北海神 一名禺京 是黃帝之孫也].”라고 풀이했다. 《淮南子》 〈墜形訓〉에는 隅强으로 나오는데 高誘의 주석에는 天神으로 풀이하고 있다(王叔岷).
역주143 立乎北極 : 북극의 바다에 섬. 北海를 다스렸다는 뜻. 司馬彪와 簡文帝의 견해 및 《山海經》의 기록을 따라 禺强을 북해의 신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144 西王母 : 인명. 전설 속의 女神. 陸德明은 《山海經》을 인용하여 “모습은 사람과 같은데 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고, 쑥대강이 모양으로 머리를 장식하였으며 휘파람을 잘 불고 바다의 끝에 거처하였다[狀如人 狗尾 蓬頭戴勝 善嘯 居海水之涯].”고 풀이했다. 지금의 《山海經》에는 “서왕모는 모습은 사람과 같은데 표범의 꼬리에 범의 이빨을 지니고 있었으며 휘파람을 잘 불었고 쑥대강이 모양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다[西王母 其狀如人 豹尾虎齒而善嘯 蓬髮戴勝].”고 되어 있다.
역주145 坐乎少廣 : 소광산에 앉음. 少廣은 세계의 서쪽 끝에 있다고 하는 산의 이름. 司馬彪는 동굴 명칭[穴名]으로 풀이했고, 崔譔은 산 이름[山名]으로 풀이했으며, 成玄英은 ‘서쪽 끝의 산 이름[西極山名]’이라고 풀이했는데, 여기서는 崔譔과 成玄英의 견해를 따라 산 이름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146 莫知其始 莫知其終 :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그 마침을 알 수 없음. 養生의 道를 터득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비유.
역주147 彭祖 : 인명. 〈逍遙遊〉편 참조.
역주148 上及有虞 下及五伯(패) : 위로는 유우씨에게 미치고 아래로는 오패에 미침. 有虞는 舜임금을 지칭하며, 五伯는 흔히 春秋五覇 곧 齊桓公, 晉文公, 宋襄公, 楚莊王, 秦穆公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丁公著가 정리한 것처럼 夏나라의 昆吾, 商나라의 大彭과 豕韋, 周나라의 齊桓公과 晉文公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도 같다.
역주149 傅說(열) : 殷나라 고종의 신하. 司馬彪는 은나라의 재상[殷相]이라고 풀이했다. 《書經》 〈說命 上〉편에는 은나라 高宗이 꿈에 상제가 내려 준 훌륭한 신하를 본 뒤, 그림을 그려서 그를 찾게 하였는데 傅巖에 살고 있던 부열이 그 그림과 닮았기 때문에 등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역주150 武丁 : 殷나라 高宗의 이름. 곧 부열을 등용한 임금이다. 司馬彪는 ‘은나라 왕 고종[殷王高宗也]’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51 奄有天下 : 천하를 모두 소유함. 奄은 모두[盡]의 뜻(蔡沈). 王叔岷은 覆의 뜻으로 풀이했고, 馬敍倫은 弇의 假借字로 보았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
역주152 乘東維 騎箕尾 : 동유성을 타고 기성과 미성을 몲. 동유성은 수레, 기성과 미성은 말에 비유한 표현이다. 따라서 傅說星은 동유성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고(부열이 수레에 타고 있는 모양), 그 앞쪽에 기성과 미성이 나란히 있는 모양(말이 수레를 끄는 모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주153 比於列星 : 열성과 나란히 견줌. 곧 傅說이 죽은 뒤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동영상 재생
1 제1장 369
동영상 재생
2 제1장 346
동영상 재생
3 제1장 399
동영상 재생
4 제1장 566
동영상 재생
5 제1장 542
동영상 재생
6 제1장 362
동영상 재생
7 제1장 356
동영상 재생
8 제1장 438
동영상 재생
9 제1장 231
동영상 재생
10 제1장 605
동영상 재생
11 제1장 199
동영상 재생
12 제1장 444
동영상 재생
13 제1장 530
동영상 재생
14 제1장 491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