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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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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하고 하더니
當是時也하야 하니라
하야 하며 禽獸 成群하며 草木 遂長하니
及至聖人 하며 하야는 而天下始疑矣니라 하며 하야는니라


그 때문에 지덕至德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유유자적悠悠自適했으며 눈매 또한 밝고 환했다.
그때는 산에는 지름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다.
만백성이 무리 지어 살면서 사는 고을을 함께했으며 금수禽獸들이 무리를 이루었고 초목이 마음껏 자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짐승들을 끈으로 묶어서 끌고 다니며 놀 수 있었고 새 둥지를 손으로 끌어당겨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덕의 시대에는 짐승들과 함께 살면서 무리 지어 만물과 나란히 살았으니 어찌 군자君子소인小人의 차별을 알았겠는가.
함께 무지無知하니 그 덕을 떠나지 않았으며, 함께 무욕無欲하니 이를 일러 소박素樸이라 한다.
소박함을 지키면 사람의 본성이 유지된다.
성인이 억지로 노력하여 인을 행하고 발돋움하여 의를 행함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의심하게 되었고, 질펀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번거롭게 예를 시행함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무릇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해치지 않고서 누가 희준犧樽 같은 제기를 만들 수 있으며, 백옥白玉을 훼손하지 않고서 누가 규장珪璋을 만들 수 있으며, 도덕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인의仁義를 채택할 수 있으며, 타고난 성정을 떠나지 않고서 어떻게 예악을 쓸 수 있으며, 오색五色을 어지럽히지 않고서 누가 문채를 만들 수 있으며, 오성五聲을 어지럽히지 않고 누가 육률六律에 맞출 수 있겠는가.
무릇 통나무를 해쳐서 그릇을 만든 것은 기술자들의 죄이고, 도덕을 훼손하여 인의를 만들어 낸 것은 성인의 과실이다.


역주
역주1 至德之世 : 지극한 덕이 유지되던 시대. 世를 君으로 바꾼 인용이 있지만 王叔岷과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옳지 않다.
역주2 其行塡塡(전) : 걸음걸이가 유유자적함. 塡塡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여기서는 거동이 여유 있고 느긋한 모양을 나타낸다. 陸德明은 질박하고 중후한 모양[質重貌]으로 풀이했고, 崔譔은 중후하고 느린 모양[重遲也]으로 풀이했다.
역주3 其視顚顚(진) : 눈매가 밝고 환함. 顚은 瞋(눈 부릅뜰 진)의 假借로 눈을 크게 뜬 모양, 맑은 눈을 뜻한다. 崔譔은 한결같은 모양[專一也]으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곧게 바라보는 모습[直視之貌]으로 풀이했다.
역주4 山無蹊隧 澤無舟梁 : 산에는 지름길이나 굴이 없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음. 蹊는 지름길(李頤). 崔譔은 隧를 길[道]로 풀이했지만 〈《春秋左氏傳》 隱公 1년조에〉 鄭 莊公과 어머니 姜氏가 굴을 파서 서로 만났다[隧而相見]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굴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梁은 橋梁이다. 大意는 林希逸이 육로와 수로가 아직 통하지 않음[路未通也 水路未通也]이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池田知久는 이 부분이 “《老子》 80장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시하게 하여 멀리 이사하지 않게 하며 비록 배나 수레가 있다 하더라도 타지 않게 한다[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라고 한 것의 근원이며, 오히려 《老子》보다 비현실적이고 유토피아性이 강하다.”라고 지적하였다.
역주5 萬物群生 : 만백성이 무리 지어 삶. 萬物은 백성을 가리킨다. 群生은 무리 지어 산다는 뜻인데, 《荀子》 〈富國〉편에 “사람이 살아감에 무리 짓지 않을 수 없다[人之生 不能無羣].”라고 하면서 인간의 군거성을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 파악한 사회사상과는 다른 맥락의 공동체 사회사상이다.
역주6 連屬其鄕 : 사는 고을이 이어져 있음. 王叔之는 “이미 나라와 집안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 고을이 연속되어 있다[旣無國異家殊 故其鄕連屬].”라고 풀이했고, 成玄英 또한 이를 답습하고 있다. 한편 林希逸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고을을 따라 살기 때문에 저절로 고을이 이어지고 한 고을 안에서는 저절로 어른과 아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있게 되어 서로 이어져 있다[人各隨其鄕而居 自爲連屬 一鄕之中 自有長幼上下 相連屬也].”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林雲銘과 宣穎 등의 주석가들도 모두 유토피아의 무정부주의적 성격을 묘사하는 글로 해석한 것 같다. 連屬其鄕은 거주하는 영역의 경계를 설치하지 않는 뜻으로 풀고 있는 견해가 많지만, 각각 살고 있는 곳에 自他의 구별 없이 화합하여 생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王夫之).
역주7 禽獸可係羈而遊 鳥鵲之巢 可攀援而闚 : 짐승들을 끈으로 묶어서 끌고 다니며 놀 수 있고, 새 둥지를 손으로 끌어당겨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음.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서로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짐승들이 사람과 함께 어울려 놀고, 새들이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다는 뜻으로 앞에 나온 連屬其鄕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다. 鳥자는 烏자로 되어 있는 인용이 많다(馬叙倫, 王叔岷). 예를 들어 《荀子》 〈哀公〉편에는 “까마귀나 까치의 둥지에 머리를 들이밀고 엿볼 수 있었다[烏鵲之巢 可俯而窺也].”는 내용이 나오며, 《淮南子》 〈氾論訓〉편에도 “까마귀나 까치의 둥지에 머리를 들이밀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었다[烏鵲之巢 可俯而探也].”는 내용이 나온다. 援은 《經典釋文》에서 陸德明이 《廣雅》를 인용하여 이끄는 것[牽也, 引也]으로 풀이했다. 또 闚자가 窺로 된 인용이 있지만 본래 통용하는 글자이다(王叔岷). 한편 劉文典은 可자가 而자로 된 인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의에 차이는 없다. 이 부분의 대의에 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지덕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機心이 없어서 다른 사물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물도 잘 따른 것이라는 해석으로 郭象이나 林疑獨 등이 이 견해를 따른다. 또 無心하여 다른 사물과 더불어 서로 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褚伯秀의 경우 “禽獸를 묶을 수 있고 새 집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無心으로 物과 동화됨을 말한다.”라고 했고, 陳祥道는 “남을 자기와 같이 보고 자신을 남과 같이 보기 때문에 物과 같이한다. 그 때문에 物과 我를 함께 잊고 안과 밖의 구별[間]이 없게 된다. 그래서 짐승의 무리에 들어가도 무리가 어지러워지지 않고 새들 속으로 들어가도 행동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라고 했다(崔大華).
역주8 同與禽獸居 族與萬物竝 : 짐승들과 함께 살면서 무리 지어 만물과 나란히 살았음. 사람과 짐승, 사람과 만물의 차별이 없었다는 뜻이다. 族은 무리 짓다는 뜻. 林希逸은 모여 산다는 뜻[聚]으로 풀이했다. 〈齊物論〉 제1장의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과 같은 뜻으로 萬物齊同의 哲學을 社會化, 政治化한 표현이다(池田知久).
역주9 惡乎知君子小人哉 : 어찌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알았겠는가. 孟子나 荀子가 군자와 소인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데 대항하여 지덕의 시대에는 君子와 小人의 차별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無階級社會야말로 이상적 사회임을 주장한 내용이다(池田知久).
역주10 同乎無知 其德不離 同乎無欲 是謂素樸 : 함께 무지하여 그 덕을 떠나지 않았으며 다 같이 욕심이 없으니 이를 일러 소박이라 한다. 林希逸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기 때문에 함께 무욕하다고 한 것[擧世皆然 故曰同乎無欲].”이라고 풀이했는데 同을 다 같이 그러한 모양[同然]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편 馬叙倫은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同을 惷으로 보고 어리석은 모양[愚]으로 풀이했고, 陸德明도 동을 侗으로 보고 무지한 모양이라고 풀이했는데, 〈山木〉편에 侗乎其無識과 같은 표현이 나오므로(方勇‧陸永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의 풀이로는 적절치 않다.
역주11 素樸而民性得矣 : 소박함을 지키면 사람의 본성이 유지됨. 福永光司는 이 부분이 《老子》 제28장의 ‘常德不離……復歸於樸’, 제19장의 ‘見素抱樸 少私寡欲’, 제3장의 ‘常使民無知無欲’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至德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自他의 差別이나 彼我의 대립 의식, 인간중심적이고 自己中心的인 價値判斷 등이 없으므로 인간도 鳥獸와 함께 생활하고 萬物과 함께 群居한다. 이처럼 만물과 일체가 된 생활에서는 만물 속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一面的인 가치관에 의해 다시 君子니 小人이니 하고 구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愚者처럼 無知하며 無爲自然의 道를 그대로 따르고 白痴처럼 無欲하니 《老子》의 이른바 素朴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無知無欲의 素朴, 곧 人知人欲에 어지럽혀지지 않은 樸과 같은 純白한 마음을 지켜야 비로소 萬民의 本性이 완수된다.”라고 해설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2 蹩躠(별설)爲仁 : 억지로 노력하여 인을 행함. 蹩躠은 억지로 걷는 모양. 《經典釋文》에 의하면 向秀본과 崔譔본에는 蹩자가 弊자로 되어 있고, 躠자는 殺자로 되어 있으며, 躠자가 薛자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했다. 成玄英은 蹩躠을 “힘을 쓰는 모양[用力之貌].”으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억지로 행하는 모양[勉强而行之貌].”이라고 했으며, 羅勉道는 “발돋움하여 바라보고 힘써 행함[跂望而勉行].”이라고 했는데 모두 비슷한 뜻이다.
역주13 踶跂爲義 : 발돋움하여 의를 행함. 踶跂의 踶는 심력을 기울이는 모양이고 跂는 발돋움하는 모양, 곧 힘들게 행한다는 뜻으로 앞의 蹩躠과 같은 뜻이다. 《經典釋文》에서 李頤는 “蹩躠과 踶跂는 모두 마음을 써서 인의를 행하는 모양이다[蹩躠踶跂 皆用心爲仁義之貌].”라고 풀이했다. 이 외에 “가고 서 있음[行立]에 안정되지 못한 모양(林希逸)”, “발돋움하고 억지로 행하는 모양[企足而强行].”이라는 주장(羅勉道), “踶는 발을 붙이고 머물러 힘을 쓰는 것이고, 跂는 발을 들어 바라보는 것이니 미칠 수 없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踶 駐足用力也 跂 擧足望也 不可及而企及].”이라는 주장(王敔), “蹩躠踶跂는 글자가 모두 발[足]을 따르는데, 머뭇거리고 불안한 모양[蹩躠踶跂 字皆從足 蓋踟躕不安之意].”이라는 주장(林雲銘), “발을 들어 힘쓰는 모양[起足用力貌].”이라는 주장(宣穎), “발로 힘을 쓰는 모양[足用力之貌].”이라는 주장(陳壽昌), “踶趹의 잘못으로 빨리 달리는 모양.”이라는 주장(劉師培) 등 이설이 분분하지만 대의에는 큰 차이가 없다.
역주14 澶漫爲樂 : 질펀하게 음악을 연주함. 《經典釋文》에는 澶자가 儃자로 된 판본도 있으며 向秀본과 崔譔본에는 但자로 되어 있다고 했다. 또 向秀본과 崔譔본에는 漫자가 曼자로 되어 있다고 했다. 李頤는 澶漫을 방탕함과 같다[猶縱逸也]고 풀이했고 崔譔은 넘쳐 흐르다[淫衍也]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經典釋文》에는 끌다[牽引也]로 풀이한 주석도 소개하고 있다. 이후 林希逸은 “방만함이니 흘러서 질탕하다는 뜻[卽汗漫也 流蕩之意].”으로 풀이했고, 羅勉道는 범람(氾濫)으로 풀이했다. 또 王敔는 “澶은 방탕하여 넘치는 것이고, 漫은 華美한 것이다. 번거롭고 복잡한 뭇 소리의 아름다움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澶 縱衍也 漫 靡也 煩雜衆聲 靡靡娛人].”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李頤의 주장을 답습한 것이다. 한편 馬叙倫은 澶을 墠자의 가차로 보고 제사 지낼 때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로 풀이했고, 赤塚忠은 澶을 誕자와 儃자의 가차로, 漫을 謾의 가차로 풀이했는데 지나친 천착이다.
역주15 摘僻爲禮 : 번거롭게 예를 시행함. 摘僻은 번거롭게 구속되는 모습. 摘僻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李頤는 “간사하고 치우친 것을 들추어내면서 禮를 행한다[糾擿邪辟而爲禮也].”라고 풀이했고, 崔譔은 “예절이 많은 것[擿僻 多節].”이라고 풀이했다. 이 외에 成玄英은 “손을 구부리는 모양[曲拳之行].”으로, 林希逸은 “손발을 움직이는 모양.”으로 풀이했다. 馬叙倫은 “摘을 들추어낸다는 뜻인 擿의 가차자로 보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李頤의 견해를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편 宣穎은 “구속되어 끌려가는 것[拘牽-拘碍하여 끌려 들어감].”이라 했고, 郭嵩燾는 “번잡한 것을 이른 것[謂其煩雜也].”이라고 했는데 본문의 번역은 이 두 사람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崔譔이 多節로 풀이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주16 天下始分矣 : 천하가 비로소 나누어짐. 천하가 상하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다는 뜻. 成玄英은 “우내가 분리된다[宇內分離].”는 뜻으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마음이 처음으로 나뉘어 순일하지 못함을 말한 것[言其心迹始分矣 則不純一矣].”이라고 풀이했고, 張之純은 “分은 紛의 借字로 어지럽고 말썽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풀이했지만 충분치 않다. 池田知久는 이 부분을 무정부주의의 유토피아 理想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荀子류가 禮樂에 의한 身分秩序의 형성을 강조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지적했는데 본문의 번역은 이 견해를 따랐다.
역주17 純樸不殘 :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해치지 않음. 成玄英이 “온전한 나무[全木也].”로 풀이했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역주18 犧尊 : 희생 소를 장식으로 그린 술통. 犧는 희생 소. 尊은 樽을 생략한 글자로 술통. 司馬彪는 “희생용 소의 모습을 그려서 술잔을 장식했다[畵犧牛象以飾樽].”라고 풀이했고, 王肅은 “소머리를 새긴 것[刻爲牛頭].”이라고 풀이했다. 희준은 〈天地〉편 15장에도 “百年之木 破爲犧樽(《淮南子》 〈俶眞訓〉편에도).”이라 하여 보인다(池田知久).
역주19 珪璋 : 珪와 璋. 모두 玉으로 만든 홀의 명칭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李頤는 “모두 도구의 이름이다. 위가 좁고 뾰족하며, 밑부분이 길게 네모난 것을 珪라 하고, 珪의 절반 크기를 璋이라 한다[皆器名也 銳上方下曰珪 半珪曰璋].”라고 풀이했다. 赤塚忠은 “珪는 ‘圭’와 같다. 公的 儀式에 참가하는 귀인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지니는 玉으로, 윗부분은 뾰족하고 아랫부분은 얇고 긴 長方形으로 되어 있다. ‘璋’은, 珪를 세로 방향으로 절반을 자른 모양의 笏로, 용도는 珪와 같다.”라고 해설했다.
역주20 道德不廢 安取仁義 : 도덕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인의를 채택할 수 있겠는가. 廢는 廢棄의 뜻. 安은 어찌. 《老子》 제18장에 “大道廢 有仁義”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와 유사하다. 한편 《老子》의 이 구절은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서노자》에는 ‘大道廢 安有仁義’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본래 “대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인의가 생겨나게 되었다[大道廢 有仁義].”는 의미로 풀이하던 종래의 견해를 바꾸어 “대도가 무너졌다면 어찌 인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大道廢 安有仁義].”로 풀이하는 견해가 나타나게 되었고, 다시 ‘安’을 어찌로 새기지 않고 ‘焉’과 통용한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대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에[焉] 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는 등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역주21 性情不離 安用禮樂 : 타고난 성정을 떠나지 않고서 어떻게 예악을 쓸 수 있겠는가. 性情은 情性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馬叙倫은 陸德明의 음의에 情性으로 되어 있다고 했고 成玄英의 疏에서도 情을 먼저 풀이하고 性을 나중에 풀이했음을 들어 여기의 性情은 情性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적절하다. 또 褚伯秀의 南華眞經義海纂微 도장본에 나오는 呂惠卿의 인용구에서도 情性으로 되어 있으므로 呂惠卿본 또한 情性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方勇‧陸永品). 한편 赤塚忠은 “性情은 위의 性 또는 德에 해당하는 말로, 天性의 자연스런 작용을 가리키며 不離는 후천적인 일로 쓸모없게 만들지 않음을 말한다.”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역주22 五色不亂 孰爲文采 五聲不亂 孰應六律 : 오색을 어지럽히지 않고서 누가 문채를 만들 수 있으며, 오성을 어지럽히지 않고 누가 六律에 맞출 수 있겠는가. 五色은 靑‧黃‧赤‧白‧黑의 다섯 가지 색깔. 五聲은 宮‧商‧角‧徵‧羽로 五音과 같다. 六律은 黃鐘‧太簇‧姑洗‧蕤賓‧無射‧夷則의 다섯 가지 음계. 《老子》 제12장에서 “五色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五音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五味는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하고,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올바른 행실을 방해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배를 채우고 눈의 욕망을 채우지 않으니, 그래서 저것은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라고 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金谷治가 지적한 것처럼 《莊子》의 이 부분은 五色과 五聲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앞의 〈騈拇〉편과 뒤의 〈天地〉편이나 《老子》의 경우와는 다르다.
역주23 夫殘樸以爲器 工匠之罪也 : 통나무를 해쳐서 그릇을 만든 것은 기술자들의 죄임. 王叔岷은 爲자가 成자로 된 인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의미의 차이는 없다. 이 부분의 내용은 《老子》 제28장에서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樸散則爲器].”라고 한 구절과 유사하다.
역주24 毁道德以爲仁義 聖人之過也 : 도덕을 훼손하여 인의를 만들어 낸 것은 성인의 과실임. 焦竑은 이 구절을 두고 “쭉정이나 기왓장 속에도 도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하면서 유독 인의예악만 버리는 것은 莊子의 뜻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가 스스로 한 말에도 ‘멀리 있지만 가서 머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義이고 작지만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그가 한 가지 주장을 한 것만 알고 또 다른 주장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穅粃瓦礫 道無不在 獨棄絶仁義禮樂 明乎非蒙莊之意矣 彼其自言有之 遠而不可不居者 義也 節而不可不積者 禮也 學者知其一說 不知其又有一說也].”라고 하여 이 구절은 장자를 배우는 사람들의 과격한 표현일 뿐이지 장자의 본래 뜻이 아니라고 했다(王叔岷).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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