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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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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者也 而與으로 이러니
子産 謂申徒嘉曰
其明日 又與合堂同席而坐하야 子産 謂申徒嘉曰
我先出則子止하고 子先出則我止라호니 今我將出하노니 可以止乎
其未邪
申徒嘉曰
先生之門
先生也로대 而猶出言 若是하니 不亦過乎
子産曰
申徒嘉曰
하면 中央者 中地也
以其全足으로 笑吾 不全足者 多矣어든
吾與夫子로대러니
子與我 호대 而子하나니 不亦過乎
子産


신도가申徒嘉는 절름발이인데 정나라 자산子産과 함께 백혼무인伯昏無人을 스승으로 모셨다.
〈병신과 나란히 걷는 것이 싫어서〉 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겠네.”
그 다음날에 또 같은 집에 모여 자리를 함께하고 앉아 있었는데, 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겠다고 말했는데, 지금 내가 나가려 하니, 자네가 남아 있어 주겠는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
또 자네는 집정자執政者를 보고도 피하지 않으니, 자네가 집정자와 같은 신분인가?”
신도가가 말했다.
“선생님의 문하에서도 참으로 이와 같이 집정자니 뭐니 하는 구분이 있는가?
자네는 바로 자신의 권력을 믿고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듣건대, ‘거울이 깨끗하면 티끌이나 때가 붙지 않는다.
티끌이나 때가 붙으면 그 거울은 밝게 비추지지 못한다.’라고 하니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진다.
지금 자네가 큰 를 배우겠다고 모시는 사람은 바로 선생님인데, 아직도 이와 같이 말을 하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자산이 말했다.
“자네가 이미 이와 같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임금과 더불어 을 다투려 드니, 자네의 을 헤아려 본다면 〈그런 말을 해서 좋은지 나쁜지를 충분히〉 스스로 반성할 수 있지 않은가.”
신도가가 말했다.
“〈자기의 잘못으로 발 잘리는 형벌에 처해지고서도〉 스스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의 말을 꾸며 대어 발이 잘려 없어지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고, 〈잘못을 인정하여〉 자신의 잘못을 꾸며대지 않고서 발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 〈오히려〉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다.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서 마치 운명처럼 그것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羿가 활쏘는 사정권射程圈 안에서 놀면, 그 과녁의 한가운데는 화살이 적중하는 자리이다.
그런데도 화살에 맞지 않는 것은 운명이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온전한 발을 가지고 온전치 못한 내 발을 비웃는 자들이 많다.
그때 나는 발끈하고 성을 내다가도 선생님이 계신 곳에만 가면 깡그리 잊어버리고 본래의 평정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니, 선생님께서 훌륭한 로 나를 인도해주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깨우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선생님과 노닌 지 19년이 되었는데, 한번도 내가 절름발이임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나와 육체의 내면에서 교유交遊하고 있는데도, 그대는 나를 육체의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찾고 있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자산이 깜짝 놀라면서 얼굴색을 바꾸고 태도를 고치고서 말했다.
“자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네.”


역주
역주1 申徒嘉(신도가) : 人名. 成玄英은 姓은 申徒, 이름은 嘉, 鄭나라의 賢者라고 했는데 역시 架空의 人物이다.
역주2 鄭子産 : 人名. 成玄英은 姓은 公孫, 이름은 僑, 字는 子産, 鄭나라의 현명한 大夫라고 했다. 子産은 春秋時代 後期의 뛰어난 정치가로, 당시 楚나라와 晉나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압박받던 鄭나라를 교묘한 外交政策과 內政改革을 통해 유지함으로써 공자에 의해 군자로 칭송되었다. 鄭나라는 子産 등이 활약하던 시대가 지나가자 점차 쇠퇴해져서, 戰國時代 초기 韓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따라서 이 문답이 쓰여진 무렵에는 이미 鄭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池田知久).
역주3 同師於伯昏無人 :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모심. 伯昏無人은 人名. 가공의 인물로, 〈田子方〉편, 〈列禦寇〉편에는 列子의 선생으로 나오며, 〈列禦寇〉편에는 伯昏瞀人으로 되어 있다.
역주4 我先出則子止 子先出則我止 :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겠네. 郭象은 “刖刑을 받은 절름발이와 함께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羞與刖者並行].”라고 풀이했다.
역주5 見執政而不違 : 執政者를 보고도 피하지 않음. 執政은 執政者, 곧 宰相인 子産이 스스로를 세력을 지닌 권력자라고 일컬은 호칭이다. 不違는 자리나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는 뜻.
역주6 子齊執政乎 : 자네가 집정자와 같은 신분인가. 齊는 齊準의 뜻으로 가지런함. 여기서는 신분이 동등함을 뜻한다.
역주7 固有執政焉 如此哉 : 참으로 이와 같이 집정자니 뭐니 하는 구분이 있는가. 郭象은 “이곳은 덕을 논의하는 곳이지 지위를 따지는 곳이 아니다[此論德之處 非計位也].”라고 말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역주8 子而說(열)子之執政 而後人者也 : 자네는 바로 집정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믿고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사람임. 子而는 子乃와 같고, 說은 기뻐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恃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後人은 “다른 사람을 뒤로 여기다.”는 뜻으로 남을 업신여긴다는 의미. 林希逸은 “남을 뒤로 하는 자는 자신을 앞세운다. 자신을 앞세우고 남을 뒤로 하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後人者 先己也 先己而後人 則貴我而賤物].”고 풀이했다.
역주9 聞之曰 : 내가 듣건대. 이하의 인용구를 成玄英, 郭慶藩, 曹礎基, 福永光司 및 林希逸注의 현토본 등은 ‘久與賢人處則無過’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여기서는 赤塚忠, 池田知久 등의 견해를 따라 ‘止則不明也’까지로 보고 이하의 내용은 인용구에 대한 설명으로 본다.
역주10 鑑明則塵垢不止 : 거울이 깨끗하면 티끌이나 때가 붙지 않음. 鑑明은 거울이 밝다는 뜻으로 인간의 마음을 비유한 표현이고, 塵垢는 티끌과 때로 過誤를 비유한 것이다. 止는 付着의 뜻.
역주11 止則不明也 : 티끌이나 때가 붙으면 밝게 비추지지 못함. 不明은 거울이 흐려진다는 뜻.
역주12 久與賢人處則無過 :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짐.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머물면 때를 씻어내게 됨을 비유.
역주13 今子之所取大者 : 지금 자네가 큰 道를 배우겠다고 모시는 사람. 所取大者는 ‘大道를 取하는 바의 사람’, 곧 도를 배우겠다고 모시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위대하다고 여겨서 따르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大를 大道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14 子旣若是矣 : 자네가 이미 이와 같이 됨. 곧 刖刑을 받아 절름발이 신세가 된 신도가의 처지를 비천하게 여기는 표현이다.
역주15 猶與堯爭善 : 여전히 堯임금과 더불어 善을 다툼. 成玄英, 赤塚忠 등은 자산이 자신을 堯임금에 비겨서 말한 것이라 했고, 曹礎基 등은 堯를 子産의 이름인 僑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견해를 따르면 與堯爭善을 ‘나(子産)와 선을 다툰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선 宣穎이 “堯임금은 善이 지극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들어 말한 것이다[堯乃善之至者 故以爲言].”고 풀이한 것을 따랐다.
역주16 計子之德 不足以自反邪 : 자네의 덕이 부족함을 헤아려 본다면 그런 말 해서는 아니됨을 충분히 반성할 수 있지 않은가. 신도가를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덕이 높은 사람과 견주는 사람으로 비하한 표현.
역주17 自狀(상)其過 以不當亡者衆 不狀其過 以不當存者寡 : 스스로 자신의 과실을 꾸며 다리가 잘려 없어지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고, 자신의 과실을 꾸미지 않고 다리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음. 郭象은 “대부분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상황을 변명하면서 자기가 죽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가 많고, 말없이 자기 잘못을 알고서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는 적다[多自陳其過狀 以己爲不當亡者衆也 黙然知過 自以爲應死者少也].”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狀을 ‘陳述하는 것,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으로 보고 亡과 存은 발을 두고 말한 것이라는 林希逸의 견해가 적절하다. 朴世堂 또한 “狀은 꾸미는 것[狀 文飾也]”이라고 풀이하여 임희일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역주18 知不可奈何 而安之若命 :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서 마치 운명처럼 그것을 편안히 여김. 成玄英은 若을 따르다[順也]는 뜻으로 보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운명을 따른다는 뜻으로 풀어 若命을 順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나 安에 順의 의미가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에 安之如命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역주19 唯有德者能之 :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음. 신도가가 스스로 덕이 있는 사람임을 주장하는 내용. 林雲銘은 “子産이 네 덕을 헤아려 보라고 한 구절에 대해 답한 것이다[答他計子之德句].”라고 풀이했다.
역주20 遊於羿(예)之彀(구)中 : 예가 활쏘는 사정권 안에서 놀다. 羿는 人名. 陸德明은 “활 잘 쏘는 사람으로 唐‧夏시대에 있었다. 일설에는 有窮의 임금으로 夏를 찬탈한 사람이라고도 한다[善射人 唐夏有之 一云 有窮之君簒夏者也].”고 했다. 예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오며 또 각각 다른 시대에 걸쳐 나오는데, 王夫之의 견해처럼 고대에 실제로 활 잘 쏘는 사람인 예가 있었고, 그 이후 활 잘 쏘는 사람을 모두 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四書稗疏》). 彀는 활을 당기는 것(陸德明), 과녁(高亨)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곽상이 ‘화살이 미치는 곳이 彀中’이라고 한 대의에는 변함이 없다. 林希逸은 “彀中은 바로 반드시 적중하는 곳으로 세상의 위험이 이와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하물며 전국시대에는 이 말이 더욱 마음에 절실했을 것이다[彀中乃必中之地 喩世之危如此 況在戰國之時 此語尤切心].”라고 풀이했다. 이 앞뒤의 趣旨는 褚伯秀가 “예의 사정권 안에서 놀면 적중하지 않는 곳이 없다. 설령 적중하지 않더라도 요행이 면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세간에 사는 것도 우환 아닌 것이 없으니 만일 우환을 면한다 하더라도 역시 요행일 뿐이다[遊羿彀中 莫非中地 設有不中 幸免耳 人處世間 莫非憂患 苟得免患 亦幸耳].”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池田知久).
역주21 不中者命也 : 화살에 맞지 않는 것은 운명임. 자산이 형벌에 걸리지 않고 두 발을 보존하게 된 것은 그의 덕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요행히 면한 것일 뿐임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22 怫(불)然而怒 : 발끈하고 성을 냄. 怫然은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는 모양으로 勃然과 통한다(方勇‧陸永品). 이 句의 앞에 보이는 ‘笑吾不足全者多矣’의 多는 世德堂本 등 다른 텍스트에는 象으로 되어 있다. 불연은 비연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역주23 適先生之所 : 선생님이 계신 곳에 감. 適은 나아간다는 뜻. 先生之所는 선생이 계신 곳.
역주24 廢然而反 : 깡그리 잊어버리고 본래의 평정한 마음으로 돌아옴. 廢然은 깡그리 잊어버리는 모양. 反은 발끈하고 성을 냈다가 본래의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
역주25 不知先生之洗我以善邪 〈吾之自寤邪〉 : 잘 모르겠구나. 선생님께서 훌륭한 道로 나를 인도해주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깨우친 것인지. 吾之自寤邪의 다섯 글자는 陳景元이 張君房本에 근거하여 보충한 것을 따랐다. 곽상은 “선생님이 나를 좋은 도리로 씻어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돌이킬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不知先生洗我以善道故耶 我爲能自反耶].”고 풀이했고, 成玄英도 “선생님이 좋은 물로 나를 씻어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성정이 스스로 돌이킬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不知師以善水洗滌我心 爲是我之性情能自反覆].”고 풀이했는데, 郭注와 成疏에 ‘我爲能自反耶’와 ‘我之性情能自反覆’이라는 구절이 있는 걸로 보아 郭象과 成玄英이 본 판본에는 吾之自寤邪의 다섯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不知는 不識과 통용하며, 문장 맨 앞에서 “~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쓰인다. 不識의 경우는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不識有諸].” (《孟子》 〈梁惠王 上〉) “과인이 뵐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不識可使寡人得見乎].” (《孟子》 〈公孫丑 下〉), “지금쯤 도착했을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不識能至否乎].” (《孟子》 〈公孫丑 下〉) 등에 보인다. 만약 吾之自寤邪의 다섯 글자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번역하면 不知를 “~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일 것이다.”는 추측의 의미로 보아 “아마도 선생님께서 훌륭한 덕으로 나를 씻어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로 번역해야 한다. 洗는 奚侗이 先의 假借字로 본 것을 따라 ‘인도하다’로 번역하였다.
역주26 十九年 : 〈養生主〉 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道를 터득하는데 걸리는 오랜 시간을 뜻한다.
역주27 未嘗知吾兀者也 : 한번도 내가 절름발이임을 의식하지 않음. 이 문장의 주어를 伯昏無人으로 보느냐, 申徒嘉 자신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생님은 한번도 내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한번도 나 자신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한 적이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未嘗知의 知자를 ‘自覺하다’는 뜻으로 보면 후자의 경우가 비교적 적절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대의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선 成玄英과 福永光司 등의 견해를 따라 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28 遊於形骸之內 : 육체의 내면에서 교유함. 形骸之內는 외형에 구애되지 않는 정신 세계를 뜻한다.
역주29 索我於形骸之外 : 나를 육체의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찾음. 索은 찾는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자산이 신도가의 외형, 곧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기준으로 규정하고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韓元震은 “形骸之外는 바로 밖에 있는 육체를 말한 것이니 外字는 形骸와 차이가 없다[形骸之外 卽形骸之在外者 外字與形骸者 無辨].”고 풀이했다.
역주30 蹴然 : 깜짝 놀라는 모습. 성현영은 ‘놀라고 부끄러워하는 모양[驚慚貌]’이라고 풀이했다.
역주31 改容更(경)貌 : 얼굴색을 바꾸고 태도를 고침. 容은 容色, 貌는 體貌.
역주32 子無乃稱 : 자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네.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겠다는 뜻. 자산이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하는 표현이다. 乃는 王闓雲, 奚侗, 馬叙倫, 武延緖 등 모두 仍자로 보고 再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無乃는 ‘더이상 …하지 말라’는 의미. 韓元震은 “無乃稱은 일컬을 수 없다는 뜻이니 《論語》에서 이른바 백성들이 일컬을 수 없다고 한 것과 같다[無乃稱 無得以稱也 猶論語所謂民無得以稱焉者也].”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는 이 부분을 《論語》 〈泰伯〉편에서 “세 번 천하를 사양한 태백의 지극한 덕을 백성들이 일컬을 수 없었다[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고 한 내용과 같다고 보고 子産이 申徒嘉를 극찬한 말로 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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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장(1)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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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장(2)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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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장(3)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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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2장(4)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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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장(5) 51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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