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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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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曰 何謂
太公調曰
丘里者 合十姓百名 而以爲風俗也
是故 丘山 積卑而爲高하며 江河 合水而爲하나니라
歲成하며 五官殊職하나 君不私 國治하며 文武 大人 不賜 德備하며 萬物殊理하나 道不私 無名하며 無名이라 無爲하니 無爲而無不爲니라
時有終始하며 世有變化하며
有所拂者 而有所宜하며 하니
百材皆度하며 觀於大山 호니 此之謂丘里之言이니라
少知曰
然則謂之道足乎
太公調曰
不然하니라
是故 天地者 形之大者也 陰陽者 氣之大者也 道者 爲之公이니라
因其大하야 而號以讀之 則可也
少知曰
四方之內 六合之裏 萬物之所生 惡起
太公調曰
安危相易하며 禍福 相生하며 緩急 相摩하야 聚散 以成하나니
此名實之可紀 精微之可志也니라
隨序之相理 橋運之相使 窮則反하고 終則始하나니 此物之所有
言之所盡이며 知之所至 極物而已니라
覩道之人 不隨其所廢하며 하나니
此議之所止니라
少知曰
太公調曰
斯而析之 精至於無倫이며 大至於不可圍하리니
或之使 莫之爲 未免於物 而終以爲過니라
死生非遠也 理不可覩로다
或之使 莫之爲 로다
無窮無止 하리라
或使莫爲함은 言之本也 與物 終始로다
或使莫爲 이어니 夫胡爲於大方이리오


소지少知태공조太公調에게 물었다.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태공조太公調가 말했다.
“향촌이란 열 개의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과 백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풍속을 형성하고 있는 집합체이다.
다른 것을 합하여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을 분산시켜 다른 것이 되니 지금 말[馬]의 백체百體를 각각 따로 지적하여 명명命名하면 말이 될 수 없겠지만 눈앞에 매어져 있는 말의 백체百體를 총체적으로 모아서 말하면 그것을 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이나 산은 낮은 토지가 쌓여서 높게 된 것이고, 장강長江황하黃河는 작은 물이 모여서 크게 된 것이고, 대인大人은 만물의 ‘’를 하나로 병합하여 공평하게 베푼 것이다.
그리하여 〈대인大人은〉 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들을 때 〈스스로의 마음속에〉 주관을 확립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는 않으며, 안에서 밖으로 말을 발출할 때 올바름을 지키지만 거부당하지는 않는다.
춘하추동의 사시四時한서寒暑를 달리하나 자연[天]은 그중 어느 한 계절에만 혜택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일 년이 이루어지며, 나라의 다섯 관직은 각각 직무를 달리하나 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한 관직만을 사사로이 중시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문사文事[知]와 무사武事[力]는 각각 그 기능이 다르나 대인大人은 그 어느 하나에만 마음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대인大人은〉 문무文武를 겸비하며, 만물은 각각 속성을 달리하나 는 그중 어느 하나만 사사로이 사랑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는〉 이름이 없으며, 이름이 없으므로 무위無爲하니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때에는 끝과 시작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의 추이推移가 있다.
그리하여 유행반복流行反覆해서 나타나는지라 마음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맞는 경우도 있으며, 각자가 자기 생각을 쫓아 행동하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른지라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게 된다.
비유하자면 커다란 연못에 있는 여러 가지의 소재素材가 모두 그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인 것과 같고, 큰 산을 볼 때 나무와 돌이 똑같이 산을 이루는 기반인 것과 같으니 이 같은 것을 일러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 한다.”
소지少知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丘里之言]을 라고 말해도 좋겠습니까?”
태공조太公調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지금 사물의 를 헤아려 보면 그 수가 일만一萬에 그치지 않거늘, 그런데도 그것을 만물이라고 대략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수 가운데 많은 숫자인 ‘’을 가지고 불러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 가운데 제일 큰 것이고, 음양이라는 것은 중에서 제일 큰 것이고, 라는 것은 이것들을 다 포괄하는 보편자[公]이다.
가 크다고 하는 데 말미암아 이것을 〈 또는 라고〉 통칭해서 말하면 우선 괜찮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이름 붙여진 가 이미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이름 붙여진 를 가지고 장차 참다운 에 견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만일 이름 붙여진 를 가지고 변론을 해나간다면, 그것은 비유하자면 를 개나 말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과 같을 것이니 참다운 에는 미치지 못함이 한참 멀다.”
소지少知가 말했다.
“동서남북 사방의 지상세계와 상하사방[六合]의 무한한 우주 속에서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태공조가 말했다.
“음양의 이기二氣가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거나 서로 도와주며,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서로 교대하여 서로 다음 계절을 낳고 서로 앞의 계절을 소거消去하는 순환을 계속하는데, 애증호악愛憎好惡의 감정과 그에 따른 退의 운동이 이에 번갈아 일어나며, 〈음양의 조화를 구하는〉 암컷과 수컷, 남녀의 결합이 여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의 생활환경은〉 안락과 위난이 번갈아 바뀌고 〈우리의 운명은〉 재난과 행복이 서로 인과가 되어 생기고 〈우리의 시대상황은〉 완만함과 급박함이 서로 겨루어 다가와서 여기에 모임(국가사회의 흥륭興隆)과 흩어짐(쇠망)이 성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명칭)과 (형체)의 전부(현상세계의 모든 현상)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묘함과 미세함의 전부이다.
만물의 순환변화의 순서가 서로 조정하여 어지러워지지 아니함과 번갈아 일어나는 운동이 서로 소장消長을 이루는 모든 현상이 궁극에까지 가면 곧 다시 돌아오고 마치면 곧 다시 시작하니 이것이 에 갖추어진 성질이다.
그러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로 다 아는 것은 〈기껏〉 만물의 성질을 구명究明한 것일 따름이다.
참다운 를 통찰하는 사람은 만물이 사멸死滅해가는 이 세상 밖의 것을 추수追隨하지 않고 만물이 생성해 나오는 기원起源을 탐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논의論議가 멈추어야 할 영역이다.”
소지少知가 말했다.
계진季眞이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막위莫爲설’과 접자接子가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혹사或使설’, 이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사실에 맞고 어느 쪽이 도리에 벗어난 것일까요?”
태공조가 말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과 같은 일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비록 큰 지혜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전화轉化해 온 것인지 언어로 말할 수는 없으며 또 그것이 장차 무엇으로 전화轉化하게 될지 뜻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을 분석해나가면 작기로는 견줄 것이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크기로는 둘러쌀 수 있는 것이 없는 극대極大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주재자가 있다는 주장과 그렇게 하도록 시킨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주장은 〈현상에 얽매인〉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결국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접자接子의 주장처럼 ‘시키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 되고 계진季眞의 주장처럼 ‘주재자가 없다.’고 하면 곧 에 빠지고 만다.
명칭이 있고 실질이 있으면 이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명칭도 없고 실질도 없으면 사물이 공허함에 떨어지고 마니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뜻으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나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더욱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는 것을〉 싫다고 기피할 수 없으며, 이미 죽고 난 뒤에 〈죽는 것을 싫다고〉 거부할 수 없으니, 생사生死의 문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도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의심한 끝에 도달한 가설假說에 불과하다.
내가 〈만물 생성의〉 근원을 관찰해보건대 그것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한이 없고, 또 〈만물 전개의〉 끝을 추구해보건대 그 미래의 시간은 멈춤이 없다.
〈생성 변화의 이법理法이〉 이처럼 무궁무한하니, 말이 없게 되어야만 만물과 더불어 생멸 변화의 이법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언어言語를 근본으로 생겨난 표현이니 사물과 더불어 마쳤다 시작했다 하는 것이다.
참다운 란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라는 명칭도 〈실은〉 빌려서 통용通用하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이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물의 일부분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을 가지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대도大道를 닦을 수 있겠는가.
만일 말로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서 를 다 구명究明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말로 부족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겨우 이나 다 구명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니 는 만물의 근원이요 궁극적인 것인지라 언어나 침묵이 그것을 싣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언어에 의한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한 침묵도 아닌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궁극의 경지에까지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少知問於太公調 : 少知가 태공조에게 물음. 少知는 적은 知識, 太公調는 위대한 無私와 근원적 調和를 상징. 成玄英은 ‘公正無私’함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역주2 丘里之言 : 鄕村의 말. 한 고을의 여론.
역주3 指馬之百體而不得馬 而馬係於前者 立其百體而謂之馬也 : 말의 百體를 각각 따로 지적하여 命名하면 말이 될 수 없겠지만 눈앞에 매어져 있는 말의 百體를 총체적으로 모아서 말하면 그것을 말이라고 말할 수 있음. 말의 머리, 동체, 다리, 꼬리 등을 각각 따로 지적하여 命名하면 말이 될 수 없겠지만 눈앞에 매어져 있는 말의 머리, 동체, 다리, 꼬리 등의 百體를 총체적으로 모아서 말하면 그것을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주4 大人合竝而爲公 : 大人은 만물의 ‘私’를 하나로 병합하여 공평하게 베푼 것임. 곧 대인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만물의 ‘私’를 하나로 병합하여 공평하게 베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역주5 是以自外入者 有主而不執 : 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들을 때 〈스스로의 마음속에〉 주관을 확립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는 않음. 不執은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6 由中出者 有正而不距 : 안에서 밖으로 말을 발출할 때 올바름을 지키지만 거부당하지는 않음. 距는 거부한다는 뜻으로 拒와 같다.
역주7 四時殊氣 天不賜 : 四時는 寒暑의 氣를 달리하나 자연[天]은 그중 어느 한 계절에만 혜택을 주지 않음. 氣는 氣候의 뜻이다. 賜는 특정한 계절에 사적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赤塚忠, 曹礎基).
역주8 禍福淳淳至 : 禍와 福은 流行反覆해서 나타남. 淳淳은 流動하는 모습. 王叔之는 “유동하는 모양이다[流動貌].”라고 풀이했다. 林希逸, 于鬯, 武延緖, 池田知久, 金谷治, 安東林 등은 禍福淳淳至로 絶句하고, 馬叙倫, 福永光司 등은 ‘禍福淳淳 至有所拂者 而有所宜’로 絶句했는데 앞의 견해를 따른다.
역주9 自殉殊面 有所正者有所差 : 각자가 자기 생각을 쫓아 행동하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른지라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게 됨. 自殉殊面은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역주10 比於大澤 : 커다란 연못에 비유해보면. 成玄英은 “比는 譬喩함이다[譬比 譬也].”라고 풀이했다. 澤은 연못. 陸德明은 “어떤 판본에는 宅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本亦作宅].”라고 풀이했는데, 阮毓崧, 曹礎基, 安東林 등은 이를 따라 澤을 宅地의 뜻이라 하나 적절치 않다.
역주11 木石同壇 : 나무와 돌이 똑같이 산을 이루는 기반임. 壇은 基盤. 成玄英은 “기반이다[基也].”라고 풀이했다. 同壇은 같은 기반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역주12 不止於萬 : 一萬에 그치지 않음. 현토본에는 이 뒤에 物자가 붙어 있는데 아마도 誤字일 것이다.
역주13 而期曰萬物者 以數之多者 號而讀之也 : 그런데도 그것을 만물이라고 대략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수 가운데 많은 숫자인 ‘萬’을 가지고 불러서 말하는 것임. 期曰은 약정해서 말하다, 한정해서 말하다는 뜻이다. 林希逸은 “期는 約이니 約定해서 말함이다[期 約也 約言之也].”라고 풀이했다. 讀은 말함. 李頤는 “讀은 語와 같다[讀 猶語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4 已有之矣 乃將得比哉 : 이미 이름 붙여진 道가 이미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이름 붙여진 道를 가지고 장차 참다운 道에 견줄 수 있겠는가? 〈齊物論〉편에서 “이미 하나가 되었다면 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라고 한 표현과 유사하다. 之는 郭象 이래 池田知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道라는 이름’을 지시한 것으로 풀이했는데, 朱得之, 林雲銘, 王敔 등은 ‘丘里之言’으로 보았다. 이 책에서는 郭象의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15 若以斯辯 譬猶狗馬 其不及遠矣 : 만일 이름 붙여진 道를 가지고 변론을 해나간다면, 그것은 비유하자면 道를 개나 말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과 같을 것이니 참다운 道에는 미치지 못함이 한참 멂.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두고 도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하면 이름이 있는 다른 사물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도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宣穎은 “도를 도라고 이름 붙여서 부르는 것은 마치 개를 개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고 말을 말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처럼 한 가지 사물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도에 미치지 못함이 멀다[是道猶狗之名狗 馬之名馬 同於一物 其不及道遠矣].”라고 풀이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安東林은 “즉 이렇게 말한다면 소문과 도는 마치 개와 말(의 차이와) 같아서 도에는 멀리 미치지 못하게 된다.”고 풀이했는데 다소 무리한 견해이다.
역주16 陰陽相照相蓋相治 : 음양의 二氣가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거나 서로 도와줌. 蓋는 해친다는 뜻으로 害와 통용하는 글자이다(兪樾). 治는 돕는다는 뜻이다.
역주17 欲惡去就於是橋起 : 愛憎好惡의 감정과 그에 따른 進과 退의 운동이 이에 번갈아 일어남. 欲惡는 愛憎好惡의 감정. 去就는 그에 따른 進과 退의 처신. 方勇‧陸永品은 欲‧惡‧去‧就는 각각 愛‧憎‧退‧進에 해당한다고 풀이했다. 橋는 번갈아 일어나는 모양. 王叔之는 “高勁이니, 굳세고 빠르게 일어나는 모양이다[高勁 言所起之勁疾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橋는 일어나는 모양이다[橋 起貌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8 雌雄片合 於是庸有 : 암컷과 수컷, 남녀의 결합이 여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남. 片合은 반쪽끼리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林希逸은 암수의 分合이라고 풀이했다. 庸有는 늘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으로 林希逸은 常有로 풀이했다.
역주19 不原其所起 : 만물이 생성해 나오는 起源을 탐구하지 않음. 原은 ‘찾을 원’. 《周易》 〈繫辭 上〉편에 나오는 原始反終의 原과 같다.
역주20 季眞之莫爲 接子之或使 : 季眞이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莫爲설’과 接子가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或使설’. 季眞과 接子는 모두 제나라의 현인. 成玄英은 “季眞과 接子는 모두 제나라의 현인이다. 모두 직하에 노닐었기 때문에 두 현인이 이치에 밝다고 가탁한 것이다[季眞接子 並齊之賢人 俱遊稷下 故託二賢明於理].”라고 풀이했다. 李頤는 “두 사람의 현인이다[二賢人].”라고만 풀이했다.
역주21 孰正於其情 孰偏於其理 : 어느 쪽이 사실에 맞고 어느 쪽이 도리에 벗어난 것일까. 情은 實情.
역주22 鷄鳴狗吠 是人之所知 雖有大知 不能以言 讀其所自化 :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과 같은 일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비록 큰 지혜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轉化해 온 것인지 언어로 말할 수는 없음. 누구나 다 아는 하찮은 일도 그 궁극적인 유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讀은 語와 같다. 앞의 號而讀之也의 讀과 마찬가지.
역주23 又不能以意其所將爲 : 또 그것이 장차 무엇으로 轉化하게 될지 뜻으로 헤아릴 수 없음. 馬叙倫은 成玄英의 疏에 ‘不能用意測其所爲’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意자 아래에 빠진 글자가 있다고 했고, 方勇‧陸永品은 이를 따라 測자를 보충해 넣었지만 그대로 두고도 무리 없는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따르지 않는다.
역주24 或使則實 莫爲則虛 : ‘시키는 것이 있다.’고 하면 實이 되고 季眞의 주장처럼 ‘주재자가 없다.’고 하면 곧 虛에 빠지고 맒. 實이 되면 사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虛가 되면 공허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뜻이다.
역주25 有名有實 是物之居 無名無實 在物之虛 : 명칭이 있고 실질이 있으면 이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명칭도 없고 실질도 없으면 사물이 공허함에 떨어짐. 위에서 或使則實 莫爲則虛라고 규정한 명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宣穎은 “實하다고 말하게 되면 이는 사물이 존재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或使설의 문제이고, 虛하다고 말하게 되면 이는 사물이 공허함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莫爲설의 잘못됨이다[說實則是物之所處也 此或使之說之過也 說虛則是物落空也 此莫爲之說之過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6 可言可意 言而愈疏 : 言語로 표현하고 뜻으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나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더욱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됨. 郭象은 “그 때문에 말과 뜻 밖에서 구한 뒤에야 알 수 있다[故求之於言意之表而後至焉].”라고 풀이했다.
역주27 未生不可忌 已死不可阻 :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는 것을〉 싫다고 기피할 수 없으며, 이미 죽고 난 뒤에 〈죽는 것을 싫다고〉 거부할 수 없음. 忌는 꺼림. 阻는 거부함. 成玄英은 “忌는 금지함이고 阻는 막음이다. 돌연히 태어나니 금지할 수 없고 홀연히 죽게 되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忌 禁也 阻 礙也 突然而生 不可禁忌 忽然而死 有何礙阻].”라고 풀이했다.
역주28 疑之所假 : 의심한 끝에 도달한 假說에 불과함. 或使설과 莫爲설은 모두 가정해서 하는 말일 뿐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胡文英은 “或使설과 莫爲설은 가설을 빌려 사람들을 의혹으로 몰아갈 뿐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或使莫爲 不過借以惑人 而非實見其然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9 吾觀之本 其往無窮 吾求之末 其來無止 : 내가 〈만물 생성의〉 근원을 관찰해보건대 그것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한이 없고 또 〈만물 전개의〉 끝을 추구해보건대 그 미래의 시간은 멈춤이 없다. 其往無窮은 과거의 시간이 무궁함을 뜻하고, 其來無止는 미래의 시간이 무궁함을 뜻한다.
역주30 言之無也 與物同理 : 말이 없게 되어야만 만물과 더불어 생멸 변화의 이법을 함께 할 수 있음. 言語가 있을 수 없는 경지, 忘言忘我의 경지에 도달해야 이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역주31 道不可有 有不可無 道之爲名 所假而行 : 참다운 道란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道라는 명칭도 〈실은〉 빌려서 通用하는 것일 뿐임. 成玄英은 “지극한 道는 단절할 수 없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기 때문에 유의 입장을 지키든 무의 입장을 지키든 둘 다 옳지 않다[夫至道不絶 非有非無 故執有執無 二俱不可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2 在物一曲 : 사물의 일부분에 존재할 뿐임. 或使설이나 莫爲설은 사물의 일부분만 드러낼 뿐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근원인 도를 드러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역주33 言而足 則終日言而盡道 言而不足 則終日言而盡物 : 만일 말로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서 道를 다 究明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말로 부족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겨우 物이나 다 구명하는 데 그침. 언어가 참다운 道를 구명하는 충분한 수단이라면 하루 종일 말을 해서 道를 다 究明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언어가 道를 구명하는 데 충분한 수단이 못 된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겨우 物이나 다 구명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뜻이다.
역주34 道物之極 言黙不足以載 : 道는 만물의 근원이요 궁극적인 것인지라 언어나 침묵이 그것을 싣기에는 부족함. 載는 記載. 여기서는 표현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35 非言非黙 議其有極 : 언어에 의한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한 침묵도 아닌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궁극의 경지에까지 논의할 수 있음. 도는 언어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郭象은 “자연의 극치이기 때문에 언어나 침묵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極於自爾 非言黙而議之也].”라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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