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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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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有兀者하더니 한대
仲尼曰
하야 로소니 雖今한들 何及矣리오
無趾曰
吾唯하야 이어니와
今吾來也 하니 吾是以 務全之也하노라
夫天無不覆하며 地無不載하나니
孔子曰
丘則陋矣
請講以所聞호리라
커늘 孔子曰
弟子 勉之어다
夫無趾 兀者也로대 猶務學하야 이온따녀
無趾 語老耼하야
老耼曰
無趾曰


나라에 절름발이인 숙산무지叔山無趾란 사람이 있었는데 중니仲尼를 찾아와 뵈었다.
중니가 말했다.
“그대는 이전에 행동을 삼가지 않아 이미 죄를 범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비록 지금 나에게 와서 배운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숙산무지叔山無趾가 말했다.
“나는 다만 세상의 일에 힘쓸 줄 몰라 내 몸을 함부로 하였으니 내가 이 때문에 발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허나 지금 내가 온 것은 아직 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 내가 이 때문에 그것을 보존하려고 애씁니다.
하늘은 덮어주지 아니함이 없으며, 땅은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나는 선생님을 하늘과 땅이라고 여겼는데 어찌 선생님이 이 같을 줄 알았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제가 생각이 얕았습니다.
선생께서는 들어오십시오.
청컨대 제가 들은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숙산무지가 나가고 나자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은 힘쓸지어다.
숙산무지는 절름발이인데도 오히려 배움에 힘을 써서 다시 이전에 저지른 과오를 보완하려 하는데 하물며 덕이 온전한 사람이겠는가.”
숙산무지가 노담老耼에게 말했다.
공구孔丘지인至人의 경지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자꾸만 선생에게 배우려고 하는 걸까요.
그는 또 수수께끼나 속임수 따위의 명성으로 소문나기를 바라는데, 지인은 그런 명성을 자신의 질곡桎梏으로 여긴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다만 그로 하여금 죽고 사는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며, 옳고 옳지 않은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게 하여 그 질곡桎梏을 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무지가 말했다.
“하늘이 그에게 형벌을 내렸는데,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


역주
역주1 叔山無趾 : 人名. 架空의 人物. 無趾는 발가락이 잘려서 없는 사람을 뜻한다. 成玄英은 叔山이 字라고 했지만 굳이 짜 맞출 필요가 없다.
역주2 踵見(현)仲尼 : 중니를 찾아와 뵘. 踵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다. 郭象과 成玄英은 ‘踵은 자주라는 뜻[踵頻也]’이라고 풀이했고, 崔譔은 “발가락이 없기 때문에 발뒤꿈치로 걸어간 것이다[無趾故踵行].”라고 풀이했으며, 林希逸은 따라오다[繼], 朱桂曜는 이르다[至], 赤塚忠은 《說文解字》의 ‘踵 追也’에 근거하여 쫓아가다는 뜻으로 보았다. 그러나 《孟子》 〈滕文公 上〉에 ‘踵門而告文公’이라는 구절이 있고, 踵門은 “발이 문에 닿다[足至門也].”는 뜻(朱熹)으로 ‘자주’라는 의미나 발걸음의 모양과는 전혀 상관 없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 또한 “발걸음이 문 앞에 당도하여 중니를 뵈었다[踵門而見仲尼].”의 뜻으로 이해하고 “중니를 찾아와 뵈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뒤에 공자가 “어째서 들어오지 않으십니까[夫子胡不入乎].”하고 말한 내용을 보면 숙산무지가 중니의 집 문 앞에 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주3 不謹前 : 이전에 행동을 삼가지 않음. 前은 前行. 이 구절은 子不謹에서 끊고 前을 뒷구절에 연결하여 ‘前旣犯患若是矣’로 보는 견해(成玄英, 劉武, 赤塚忠 등)도 있으나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다음 문장에 ‘前行之惡’이라는 구절이 나오므로 ‘子不謹前’으로 끊는 것이 옳다. 林希逸注의 현토본에서도 ‘子不謹前하야’로 끊고 있다.
역주4 旣犯患若是矣 : 이미 죄를 범해서 이 지경이 됨. 若是는 이와 같이 되다, 곧 刖刑을 받은 신세가 되었다는 뜻.
역주5 不知務 : 나는 다만 세상의 일에 힘쓸 줄 모름. 임희일은 ‘세상일에 어둡다는 것과 같은 말[猶言不曉事也]’이라고 풀이했고, 宣穎은 “세상일을 잘 모른다[不知世務].”고 풀이했다. 또 務 다음에 學을 붙여 “도를 배우는데 힘쓰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馬叙倫, 安東林)이 있으나, “세상 물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앞의 견해가 보다 簡明하다.
역주6 輕用吾身 : 내 몸을 가벼이 씀. 처신을 함부로 했다는 뜻.
역주7 吾是以亡足 : 내 이 때문에 발을 잃어버림. 是以는 앞의 唯와 呼應하여 ‘다만 이 때문에’의 뜻이다.
역주8 猶有尊足者存 : 아직 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음. 尊足者은 尊於足者의 줄임. ‘有~存’은 남은 것이[存] 있다[有]는 뜻.
역주9 以夫子爲天地 : 선생님을 하늘과 땅이라고 여김. 하늘과 땅이 차별없이 덮어주고 실어주는 것처럼 포용해 줄 줄 알았다는 뜻. 夫子는 孔子를 지칭.
역주10 安知夫子之猶若是也 : 어찌 선생님이 이 같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 같이 박절하게 거절할 줄 몰랐다는 뜻.
역주11 丘則陋矣 夫子胡不入乎 : 제가 생각이 얕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 들어오지 않으십니까. 陋는 賤陋로 식견이 얕고 좁음을 의미한다(曹礎基). 이 구절의 夫子는 숙산무지에 대한 孔子의 敬語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懸吐본에서만, 夫를 앞문장에 붙여 ‘丘則陋矣夫 子胡不入乎’로 絶句하였는데, 아마도 孔子가 다른 사람에게 夫子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아서 의도적으로 絶句를 달리한 듯하다.
역주12 無趾出 : 무지가 공자의 말을 듣고 난 뒤에 나감. 郭象은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갔다[聞所聞而去].”고 풀이했다. 한편 成玄英은 “무지가 듣기 싫었기 때문에 아무 말 않고 나가버렸다[無趾惡聞 故黙然而出也].”고 풀이했고, 宣穎은 “곧바로 나가버린 것[徑去]”, 曹礎基는 “공자가 들어오기를 청하였지만, 무지는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떠나버렸으니, 아예 공자를 상대하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孔子請入 無趾不但不入 反而出 表示根本看不起孔丘].”라고 풀이했다. 張黙生, 王叔岷 등도 같은 견해이다. 공자와 숙산무지가 나누었을 법한 이후의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견해가 나온 듯하다. 그러나 《論語》 〈八佾〉편에서도 儀封人이 공자를 만나고 나와서 제자들에게 말할 때에도 공자와 의봉인이 나눈 대화를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에 숙산무지와 공자가 따로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이다. 또 出이라는 표현은 일단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표현이며, 만약 숙산무지가 들어오지도 않고 가버린 것이라면 不入이나 去 등의 표현을 썼을 것이다. 더욱이 다음의 문장에서 孔子가 숙산무지를 칭찬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숙산무지가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나갔다.”는 郭象의 견해가 옳다.
역주13 以復(부)補前行之惡 : 다시 이전에 저지른 과오를 보완하려 함. 補는 결함을 보충한다는 뜻. 復는 여기서는 ‘다시 부’로 보았으나 復補로 읽는 독법도 可하다.
역주14 況全德之人乎 : 하물며 덕이 온전한 사람이겠는가. 全德之人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아서 덕이 온전한 사람. 全德을 全體(釋德淸) 또는 全形(張黙生)으로 보고 몸이 온전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절름발이[兀者]와 온전한 사람[全體‧全形]의 대비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간명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全德之人을 ‘몸이 온전한 사람’으로만 국한시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맥락을 놓친 견해이다. 池田知久의 경우 全德을 全體(釋德淸) 또는 全形으로 보면 作者의 孔子에 대한 야유가 약해질 뿐만 아니라, 〈天地〉편과 〈田子方〉편에도 각각 ‘全德之人’과 ‘全德之君子’가 나오므로, 全德을 全體 또는 全形으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고 비판했는데, 이 견해를 따른다.
역주15 孔丘之於至人 其未邪 : 孔丘는 至人에게는 아직 멀었음. 공구는 아직 지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
역주16 彼何賓賓以學子爲 : 그는 어찌하여 자꾸만 선생에게 배우려고 하는 걸까요. 賓賓은 자주(頻頻)의 뜻(兪樾). 子는 老耼을 지칭(郭象, 成玄英). 何以~爲는 〈逍遙遊〉편에 ‘奚以之九萬里而南爲’에서 이미 나온 표현. 이때 爲는 의문형 종결사. 劉淇와 王引之 등은 反語를 나타내는 助字(《助字辨略》, 《經傳釋詞》)라 했고 曹礎基는 疑問助辭로 풀이했다.
역주17 彼且蘄以諔詭幻怪之名聞 : 그는 또 수수께끼나 속임수 따위의 명성으로 소문나기를 바람. 諔詭幻怪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陸德明은 諔詭를 기이한 것[奇異也] 이라고 풀이했고, 方勇‧陸永品은 〈제물론〉편의 恢恑憰怪와 같은 의미로 보았는데, 恢恑憰怪는 각각 엄청나게 큰 것, 법도에 어긋난 것, 속임수, 괴이한 것으로 모두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兪樾이 諔詭를 〈제물론〉편의 弔詭와 같다고 보는 견해를 따라, 諔詭를 수수께끼, 幻怪를 속임수로 번역하였다. 諔詭는 〈천하〉편에도 보이는데, 章炳麟은 〈천하〉편의 諔詭와 〈제물론〉편의 弔詭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천하〉편의 諔詭는 諔과 詭의 두 가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의 諔詭幻怪도 네 가지로 보기 보다는 諔詭와 幻怪의 두 가지로 보는 것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弔詭는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뜻한다.
역주18 不知至人之以是爲己桎梏邪 : 지인은 그런 명성을 자신의 질곡으로 여긴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 桎은 죄인의 발을 묶는 차꼬이고, 梏은 죄인의 손에 채우는 수갑이다.
역주19 胡不 : 어찌하여 ~하지 않는가. ‘其可乎’까지 연결되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의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역주20 使彼以死生爲一條 以可不可爲一貫者 : 그로 하여금 죽고 사는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며, 옳고 옳지 않은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게 함. 彼는 공자를 지칭한다(成玄英, 張黙生). 一條와 一貫은 條貫으로 같이 쓰이는 경우에서 보듯 모두 條理, 理致의 뜻이다. 成玄英은 이 구절을 “무지가 전에 공자를 만나 이야기하던 날에, 어찌하여 공자로 하여금 仁義를 잊고 생사를 한 가지로 보고 옳고 그름을 가지런하게 보게 하지 않았는가[無趾前見仲尼講談之日 何不使孔丘忘於仁義 混同生死 齊一是非].”로 老耼이 無趾를 힐책한 내용으로 보았다. 본문의 번역은 者를 어조사로 보고 번역했지만, 者를 彼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使彼……者를 ‘저 生死를 같은 이치로 여기며, 옳고 옳지 않은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는 〈萬物齊同의 체득〉자로 하여금’으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王叔岷은 者를 《史記》 〈魏世家〉, 《戰國策》 〈魏策〉, 《文選》의 〈任彦昇爲齊明帝讓宣城郡公表注〉 등에 인용된 문장에 근거하여 邪와 같다고 보았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1 解其桎梏 其可乎 : 그 질곡을 풀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임. 其~乎는 아마도 ~일 것이라는 추측을 나타내는 표현.
역주22 天刑之 安可解 : 하늘이 그에게 형벌을 내렸는데,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 天刑之는 〈養生主〉편의 ‘遁天之刑’과 유사한 의미이다. 之는 孔子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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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장(1)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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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3장(2)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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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3장(3)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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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3장(4)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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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3장(5)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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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3장(6)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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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3장(7) 64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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