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2)

장자(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天其運乎
하늘은 움직이는가?
땅은 멈추어 있는가?
해와 달은 자리를 다투는가?
혹 그 누군가 이 일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 누군가 천지일월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으며, 그 누군가 스스로 무위無爲의 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지일월을 밀어서 움직이는 것인가?
其有而不得已邪
혹 기계에 묶여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인가?
意者 其運轉而不能自止邪
아니면 저절로 굴러가기 때문에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것인가?
雲者 爲雨乎
구름이 저절로 내려 비가 되는 것인가?
雨者 爲雲乎
비가 스스로 올라가 구름이 되는 것인가?
孰居無事하야
혹은 누군가 이 운우雲雨의 순환을 맡아서 처리하며 누군가 무위無爲의 일에 머물러 조화造化음악淫樂에 빠진 채 이것을 권하는 것인가?
起北方하야 一西一東하며 하나니 孰居無事하야
바람은 북방에서 일어나 한 번은 서쪽으로 불고 한 번은 동쪽으로 불며 또 높이 올라가 이리저리 방황하는데, 누군가 이 바람을 호흡하며 누군가 무위無爲의 일에 머물러 이 바람을 부채질하는 것인가?
敢問何故
감히 묻노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무함巫咸하여 말하였다.
하라
“이리 오라.
호리라
내 그대에게 일러 주겠노라.
천지자연의 세계에는 여섯 개의 근원적인 법칙[六極]과 다섯 개의 불변의 법칙[五常]이 있다.
제왕이 육극오상六極五常를 따르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이 를 어기면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治成德備하야 어든 하리니 이니라
〈제왕이〉 구주낙서九疇洛書의 일을 평화롭게 잘 다스리고 덕을 갖추어 아래 세상을 비추면 천하가 떠받들 것이니 이것을 일러 최고의 제왕[上皇]이라 한다.”
역주
역주1 天其運乎 地其處乎 : 하늘은 움직이고 있으며 땅은 멈추어 있는가. 運은 움직임. 陸德明은 《爾雅》와 《廣雅》를 인용하여 運을 옮김[徙]와 구름[轉]으로 풀이했다. 處는 멈추어 있음. 郭象은 止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寧‧靜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타당한 견해이다. 한편 呂惠卿은 “하늘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나는 참으로 그런지는 알 수 없고 땅은 여전히 머물러 있지만 나는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다[天猶運也 而吾不知其眞爲運也 地猶處也 而吾不知其眞爲處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하늘의 운행은 하루에 한 바퀴를 도는데 하늘이 스스로 운행하는 것인가? 땅에는 사방과 상하가 있는데 어찌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겠는가?[天行一日一周 天之自運乎 地有四遊上下 豈一定而處乎].” 하고 묻는 것으로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池田知久는 林希逸의 주석을 더 좋게 보아 “도대체 하늘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땅은 스스로 멈추어 있는 것일까.”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은 또한 朱得之의 지적처럼 《楚辭》 〈天問〉편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赤塚忠, 池田知久).
역주2 日月其爭於所乎 : 해와 달은 자리를 다투는가. 呂惠卿은 “해와 달은 여전히 자리를 다투지만 나는 정말 자리를 다투는지는 알 수 없다[日月猶爭於所也 而吾不知其眞爲爭於所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날이 가고 달이 오는 것을 일하는 것으로 부른 것이니 마치 사람이 서로 쫓아가서 차례를 빼앗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日往月來 却喚作事 其所言 如人相追奪也].”이라고 풀이했다.
역주3 孰主張是 : 누군가 이 일을 주재하고 있는건가. 기존의 주석은 대부분 무엇이 주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했지만 여기서는 무엇이 주재하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주재 여부조차 의심하는 표현으로 보고, 주재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하 마찬가지. 만약 누가 주재하는지에 대한 의심이라면 누가 이 일을 주재하는가로 번역해야 한다. 成玄英은 “누가 주재하면서 베푸는가[誰爲主宰而施張乎].”라고 풀이했다. 陸樹芝는 “과연 누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지 알지 못한다[不知其果孰使之然也].”라고 풀이했다. ‘孰主張是’의 主張은 主宰로 번역하였으며, 是는 ‘이 일’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일이란 天地日月의 운행을 말한다.
역주4 孰維綱是 : 그 누군가 천지일월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가. 維綱은 밧줄을 매서 붙들어 두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고 정연하게 움직이도록 질서를 부여한다는 뜻. 維綱이 綱維로 표기된 판본과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王敔가 “밧줄을 만들어 붙들어 맨다[爲綱以維繫].”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5 孰居無事推而行是[孰居無事而推行是] : 그 누군가 스스로 無爲의 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지일월을 밀어서 움직이는 것인가. 郭象은 “하는 일 없이 이것을 밀어서 움직이는 이는 누구인가? 각자 움직일 뿐이다[無事而推行是者誰乎哉 各自行耳].”라고 풀이했다. 또 王叔岷은 郭象의 注에 ‘無事而推行’으로 된 것을 기준으로 ‘無事推而行是’를 ‘無事而推行是’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奚侗‧陶鴻慶‧王叔岷 등이 ‘無事推而行是’를 ‘無事而推行是’로 하여야 한다고 하나, 꼭 그렇게 고칠 것까지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池田知久). 陸德明은 司馬彪본에는 推자가 誰자로 표기되어 있다고 했는데 오류인 듯하다. 《老子》 제2장에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물러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라고 하여 이와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6 意者 : 혹시. 혹은. 池田知久는 王引之의 《經傳釋詞》에 의거, 추측을 나타내는 疑詞로 抑者, 或者와 같다고 하고 있다. 우리말의 ‘혹시, 혹은, 아니면’ 등에 해당한다. 이 문장에서는 意者가 두 번 보이는데 앞의 意者는 ‘혹’으로, 뒤의 意者는 ‘아니면’으로 번역하였다.
역주7 機緘 : 기계에 묶임. 機는 機關. 成玄英은 ‘關’으로 풀이했다. 緘은 司馬彪본에 咸으로 되어 있는데 陸德明이 ‘引’으로 풀이한 것처럼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廣雅》 〈釋器〉에서 “緘은 索이다.”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묶여 있다’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池田知久의 注를 참조할 것). 馬叙倫은 感의 假借字라 했고 赤塚忠은 撼의 가차자라 하여 모두 움직인다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미흡하며, 成玄英은 關이 잠금장치라는 점에 착안하여 “닫아걸다[閉也].”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자연의 운행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적절치 않다. 褚伯秀가 “혹시 기계에 묶여서 돌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인가[意其有機緘運轉不能自止邪].” 하고 풀이한 것이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고 있다(池田知久).
역주8 孰隆施是 : 혹은 누군가 이 雲雨의 순환을 맡아서 처리하는 것인가. 是는 雲雨의 순환. 앞의 雲者爲雨와 雨者爲雲을 받는다. 隆施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지만 隆施는 일으키고 베푼다는 뜻으로 〈天道〉편 제6장에 ‘雲行而雨施矣’라고 했을 때의 行施와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兪樾은 隆자를 降자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降으로 표기된 인용문도 있기도 하다(馬叙倫). 또 羅勉道처럼 “구름에 대해서는 내린다고 말했고 비에 대해서는 베푼다고 말했다[雲言降 雨言施].”라고 하여 隆을 降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본래의 隆자 그대로 읽어도 충분히 맥락에 맞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는다. 이 외에 成玄英은 “隆은 일으킴이고 施는 그만두게 함이다[隆 興也 施 廢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隆은 일어남이고 施는 그침이다[隆 起也 施 止也].”라고 풀이한 다음 “隆施는 張弛와 같은 뜻이니 어떤 경우는 일어나고 어떤 경우는 그치는데 누가 그렇게 하는가 하고 말한 것이다[與張弛同 言或作或止 孰爲之也].”라고 부연했다. 또 王叔岷을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이 施자가 弛자로 표기된 판본이나 인용이 있는 점이나 陸德明이 音을 弛라고 한 점 등을 들어 弛의 뜻으로 풀이하지만 施와 弛는 통용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굳이 고치거나 음을 바꿔 읽을 필요는 없다. 다시 정리하면 孰隆施是는 “누가 이 雲雨의 순환 - 구름을 일으키고[隆], 비를 내리는 것[施] -을 맡아서 처리하는 것인가.”이다.
역주9 淫樂而勸是 : 造化의 淫樂에 빠진 채 이것을 권하는 것인가. “無爲의 즐거움, 또는 雲隆雨施의 造化의 즐거움 속에 耽溺해 있으면서 이 天地日月의 운행을 추진하고 있는 것인가.”의 뜻. 淫樂이란 宣穎이 “雲雨는 陰陽이 서로 화합한 기가 이룬 것이기 때문에 조화의 음락이라고 말한 것이다[雲雨乃陰陽交和之氣所成 故以爲造化之淫樂].”라고 풀이한 것처럼 雲雨之樂을 표현한 것이다. 奚侗이나 馬叙倫 등은 《說文解字》 등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淫을 湛과 같은 글자로 보았고 章炳麟은 廞의 가차자라 했지만 번거로운 견해일 뿐 모두 옳지 않다. 陸德明은 司馬彪본에는 勸자가 倦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면서 “勸자를 隨자로 읽어야 한다[讀曰隨].”라고 하여 勸을 ‘따른다’는 뜻으로 풀이하지만 본래의 글자 그대로 ‘권고한다, 권장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무난하다. 林希逸은 “돕는다[助也].”라고 풀이했는데 이 또한 본래 글자 그대로 풀이한 것이다. 池田知久도 林希逸 注를 옳다고 하고 있다.
역주10 有上 : 높이 올라감. 有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조사. ‘또[又]’ 정도의 뜻. 池田知久에 의하면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 인용한 張君房본에는 有자가 在자로 표기되어 있고 唐寫本에도 在로 되어 있다(寺岡龍含). 이에 근거해서 奚侗, 劉文典, 王叔岷 등은 在가 옳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보다 먼저 陳祥道, 褚伯秀, 朱得之 등이 “어떤 판본에는 在자로 되어 있다[或作在].”라고 풀이했고, 王敔 또한 “有上은 在上과 같다[有上 猶在上也].”라고 했지만 굳이 고칠 것까지는 없다(池田知久). 羅勉道, 吳汝綸, 陶鴻慶 등은 又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기도 하다. ‘朞三百有六旬有六日(《書經》 〈堯典〉편)’이라 할 때의 有와 같다.
역주11 彷徨 :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 陸德明은 司馬彪본에는 旁皇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成玄英은 “회전하는 모양이다[迴轉之貌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오가는 모양이다[往來之貌].”라고 풀이했다. 內篇에서는 逍遙와 함께 장자의 자유사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쓰였지만 여기서는 바람의 움직임에 일정한 방향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바람의 움직임이 득도자의 자유방임하는 태도를 비유하는 것일 수는 있다. 〈逍遙遊〉편에 “彷徨乎無爲其側”이라고 나오며 그 외에도 〈大宗師〉편, 〈達生〉편 등에도 나온다.
역주12 噓吸 : 숨을 내쉬고 들이쉼. 呼吸과 같다. 成玄英은 “吐納과 같다[猶吐納也].”라고 풀이했는데 호흡과 같은 뜻이다. 바람을 호흡으로 표현한 비슷한 비유는 〈齊物論〉 제1장에서 “대지가 숨을 내쉬면 그것을 일러 바람이라고 한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라고 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福永光司).
역주13 披拂 : 부채질하여 바람을 일으킴. 披拂은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陸德明은 “바람이 부는 모양[風貌].”이라고 풀이했고, 司馬彪본에는 拂자가 ‘翇’자로 표기되어 있다고 했다. 成玄英은 “부채질함과 같다[猶扇動也].”라고 풀이했는데 본문의 번역은 이 견해를 따른 것이다. 한편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拔은 꺼냄이다[拔 擢也].”라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拂’과 ‘翇’을 모두 拔의 가차자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지만 굳이 따르지는 않는다.
역주14 巫咸祒 : 무당 咸이 告함. 巫는 무당이고 咸은 무당의 이름. 祒는 告한다는 뜻으로 舞樂에서 귀신을 내려 귀신을 섬기고 祓禳(푸닥거리)이나 祈禱나 豫言을 行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의 注解는 거의 池田知久의 설을 근거로 이루어지는데, 池田知久에 의하면 咸은 그 이름으로, 동일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미 〈應帝王〉편 제5장에 鄭나라의 神巫인 季咸에서 보인다. 또 《列子》 〈黃帝〉편과 《淮南子》 〈精神訓〉편에도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 巫咸은 古文獻에 자주 등장하는 극히 유명한 인물로 예를 들면 《書經》 〈君奭〉편에는 “태무의 시대에는 이척이나 신호 같은 신하가 있어서 상제에 도달했으며 무함이 왕가를 다스렸다[在太戊 時則有若伊陟臣扈格于上帝 巫咸乂王家].”라고 한 기록에서처럼 殷의 賢臣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史記》 〈殷本紀〉, 〈封禪書〉, 〈燕世家〉와 《竹書紀年》에도 나온다. 陸德明도 《經典釋文》에서 李頤가 “무함은 은나라의 재상이었다[巫咸 殷相也].”라고 풀이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를 殷代의 甲骨卜辭에 보이는 咸戊(戊는 巫와 같은 글자로 본다)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역시 池田知久에 의하면, 한편 그를 대표적인 巫者로 보는 견해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는데 《韓非子》 〈說林〉편에 “세상의 말에 이르기를 무함이 비록 축원을 잘했지만 스스로를 액땜하지는 못했고 진나라 의원이 비록 병을 잘 다스렸지만 자신의 병을 떨치지는 못했다[諺曰 巫咸雖善祝 不能自祓也 秦醫雖善除 不能自彈也].”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枚乘(漢 淮陰人. 字는 叔. 吳王 濞와 梁 孝王을 섬겼고 저서로 《七發》과 세 편의 賦가 있다.)의 《七發》에도 “지금 편작은 안을 다스리고 무함은 밖을 다스리고 있다[今扁鵲治內 巫咸治外].”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山海經》 〈大荒西經〉에서도 巫咸의 이름이 巫卽 등 열 명의 무당과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또 《呂氏春秋》 〈勿躬〉편에는 “무함이 주역점을 만들었다[巫咸作筮].”는 기록이 보인다. 祒자가 柖자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馬叙倫, 朱得之). 祒를 巫咸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정확한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宣穎, 馬叙倫, 福永光司 등은 招의 訛傳이나 假借字라고 주장하여 巫咸祒曰을 “무당 咸이 손짓하여 불러 말하였다.”로 번역하지만 陳壽昌, 赤塚忠 등의 견해를 따라 詔의 뜻, 곧 告한다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한편 金谷治는 “巫咸은 《楚辭》와 그 밖에 보이는 은나라의 巫이며 大臣이다. 祒는 그의 이름이다.”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5 來吾語女 : 이리 오라. 내 그대에게 일러 주겠노라. 〈在宥〉편 제3장에도 “이리 오라. 내 그대에게 지극한 도에 관해 일러 주겠다[來 吾語女至道].”라고 한 표현이 있다. 또 “來 余語女”라고 한 경우도 보인다.
역주16 天有六極五常 : 하늘에는 六極과 五常이 있음. 천지자연의 세계에는 여섯 개의 근원적인 법칙[六極]과 다섯 개의 불변의 법칙[五常]이 있다는 뜻. 六極과 五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제설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이 세계를 차례대로 정렬하는 상하동서남북의 여섯 개의 공간적 기준인 방위와 이 세계를 형성하는 목화토금수의 다섯 개의 原素, 곧 五行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陸德明은 司馬彪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六極을 “사방과 상하이다[四方上下也].”라고 풀이했는데 무난한 견해이다. 六極은 〈大宗師〉편 제1장과 〈應帝王〉편 제3장에 이미 나왔다(福永光司). 五常은 成玄英이 “오행을 말한다[謂五行].”라고 한 견해를 따랐다. 이 밖에 池田知久가 정리한 것을 따르면, 呂惠卿은 六極과 五福으로 풀이했는데 褚伯秀, 兪樾, 武延緖 등이 동의했고, 林希逸은 六氣와 五行으로 풀이했는데 陳治安의 《南華眞經本義》도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또 陸長庚과 張之純은 六氣와 五運, 王夫之와 王敔는 天地日月風雲을 六極으로 풀이하는 등 여러 주장이 있다.
역주17 帝王順之則治逆之則凶 : 제왕이 六極五常의 道를 따르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이 道를 어기면 재앙이 일어날 것임. 〈天道〉편 제6장에서 “옛날 왕으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무엇을 하였는가. 천지자연을 따랐을 뿐이다[古之王天下者 奚爲哉 天地而已矣].”라고 한 언급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대의는 그대가 찾는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 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주18 九洛之事 : 九洛은 九疇와 洛書의 略語. 呂惠卿, 褚伯秀, 楊愼 등이 모두 九洛을 九疇와 洛書로 풀이했다. 九疇는 전국시대 말기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書經》 〈洪範〉편의 九疇로, 九疇는 아홉 개의 정치규범이라는 뜻이다. 《書經》 〈洪範〉의 기록에 따르면 구주는 殷의 賢者 箕子가 周 武王의 물음에 답한 것으로 五行‧五事‧八政‧五紀‧皇極‧三德‧稽疑‧庶徵‧五福六極의 아홉 가지로 주로 五行說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上帝가 夏의 禹에게 啓示한 것이라 한다. 또 洛書는 《周易》 〈繫辭上傳〉의 “河水에서 도판이 나오고 洛水에서 글이 나왔는데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라고 할 때의 洛書이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漢書》 〈五行志〉에 劉歆의 말로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자 하늘이 낙서를 내려 주었는데 그것을 본받아 진술했으니 九疇가 이것이다[禹治洪水 賜洛書 法而陳之 九疇是也].”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前漢 末期 이전에 《書經》의 九疇와 《易經》의 洛書를 결부시키는 思考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成玄英은 ‘九洛之事’를 “九州聚落之事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과 羅勉道 등이 이 견해를 따르지만 적절치 않다(池田知久).
역주19 監照下土 : 아래 세상을 비춤. 세상에 군림한다는 뜻.
역주20 天下載之 : 천하가 떠받듦.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이라는 뜻. 載는 戴의 가차자로 떠받든다는 뜻. 載자가 戴자로 표기된 판본도 있으나(馬叙倫, 車柱環, 王叔岷, 福永光司, 安東林) 상당히 많은 판본이 載자로 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林希逸 注 현토본도 載자로 되어 있다. 물론 음은 ‘대’이다. 조금 큰 漢字사전을 찾아보더라도 載자의 음은 ‘재’와 ‘대’의 두 音이 있다.
역주21 此謂上皇 : 이것을 일러 최고의 제왕[上皇]이라 함. 〈在宥〉편 제3장에서 “나의 도를 체득한 사람은 위로는 皇이 되고 아래로는 王이 될 수 있다[得吾道者 上爲皇 而下爲王].”라고 한 것과 유사한 표현이다(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