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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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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晉 杜預元凱序〉
두예원개서杜預元凱序
春秋者 魯史記之名也注+朱曰 春秋者 魯國史官記事 本有此名 非孔子始名之也
춘추春秋》는 나라 사서史書의 명칭이다.注+: 《춘추春秋》는 나라 사관史官기사記事로 본래부터 《춘추春秋》라는 명칭이 있었고,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記事者 以事繫日注+朱曰 繫者 以下綴上之辭 言於此日而有此事 故以事綴於日하고 以日繫月하고 以月繫時하고 以時繫年하니 所以紀遠近別同異也注+朱曰 凡此所以紀理年月遠近 而分別事之同異也
사건事件을 기록하는 자가 사건을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에 매어 기록하고,注+: 는 밑에 있는 것을 위에 이어 붙이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니, 이 날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그 날에 매었다는 말이다. 날짜를 그 달에, 달을 그 철에, 철을 그 해에 매어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 연월年月원근遠近을 기록하여 사건의 이동異同을 구별하기 위함이다.注+: 이렇게 하는 것은 연월年月원근遠近을 기록하여 사건의 이동異同을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故史之所記 必表年以年首事注+朱曰 表 顯也 首 始也하니 年有四時
그러므로 사관史官의 기록은 반드시 연대를 표시하여 기사記事를 시작하였다.注+: 는 드러내는 것이고, 는 시작하는 것이다.
故錯擧以爲所記之名也注+朱曰 四時不可徧擧 故交錯互擧春秋二字 以爲史記之名 蓋言春則可兼夏 言秋則可見冬也니라
그러나 에는 사시四時가 있기 때문에 를 엇섞어 기록한 책의 명칭名稱으로 삼은 것이다.注+: 사시四時를 다 들어 책의 명칭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만을 엇섞어 사기史記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니, 이는 만 말하여도 를 겸할 수 있고, 만 말하여도 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周禮 有史官注+朱曰 周禮春官之屬 有大史小史內史外史御史之官하야 掌邦國四方之事하고 達四方之志注+朱曰 하며 諸侯에도 亦各有國史注+朱曰 言上文史官 是天子之史 至於諸侯之國 亦各自有史官하야 大事 書之於策하고 小事 簡牘而已注+朱曰 니라
주례周禮》에 의하면 천자天子의 나라에는 사관史官이 있어서注+: 《주례周禮》에 춘관春官의 소속에는 태사太史소사小史내사內史외사外史어사御史 등의 관직官職이 있다. 방국邦國사방四方의 일을 맡고, 사방에 서명書名전달傳達하였으며,注+: 소사小史방국邦國(諸侯國)의 기록을 맡고, 내사內史사방四方에서 보고해 온 사건을 성독聲讀하여 하고, 외사外史는 사방의 기록과 사방에 서명書名을 전달하는 일을 맡는다. 제후국諸侯國에도 각기 국사國史(史官)가 있어,注+: 윗글에 말한 사관史官천자天子사관史官이다. 제후국諸侯國에도 각각 따로 사관史官이 있다. 큰 사건은 에 기록하고 작은 사건은 간독簡牘에 기록했을 뿐이다.注+: 은 대쪽을 이어 붙인 것이다. 여러 개의 대쪽을 이어 붙였기 때문에 이라 이름한 것이다. 대사大事에 기록된 사건이다. (竹片)이니 대나무로 만든 것이고, 이니 나무로 만든 것이다. 소사小事에 기록된 사건이다.
孟子曰
楚謂之檮杌注+朱曰 檮杌者 四凶之一 言頑凶無儔匹也 楚國之史 名曰檮杌 以記惡爲主也이오 晉謂之乘注+朱曰 乘 車乘也 古者賦田出車 晉國之史 名曰乘者 以田賦爲主也이오 而魯謂之春秋 其實 一也注+朱曰 三者其名雖異 其實爲諸侯之史則一也
라하고
맹자孟子》에 “ 나라에서는 사서史書를 ‘도올檮杌’이라 하고,注+: 도올檮杌사흉四凶 중의 하나이니, 그 흉악凶惡함을 견줄 곳이 없다는 말이다. 나라의 사서史書를 ‘도올檮杌’이라 이름한 것은 악행惡行을 기록하는 데에 주안점主眼點을 두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이라 하고,注+: 거승車乘이다.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전지田地를 주어 조세租稅병거兵車를 내도록 하였다. 나라의 사서史書를 ‘’이라 이름한 것은 전부田賦를 기록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나라에서는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똑같은 사서史書이다.注+: 세 나라의 사서史書가 그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내용은 동일한 제후諸侯사서史書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韓宣子適魯注+朱曰 韓宣子 晉大夫 名起 諡曰宣 適魯 在昭公二年하야 見易象與魯春秋曰 周禮盡在魯矣注+朱曰 易象者 周易爻彖之辭 文王作彖辭 周公作爻辭 春秋遵周公之典以序事 故曰 周禮盡在魯矣로다
한선자韓宣子나라에 가서注+: 한선자韓宣子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이고 시호諡號이다. 나라에 간 것은 노소공魯昭公 2년에 보인다. 역상易象》과 《노춘추魯春秋》를 보고서 “주례周禮가 모두 나라에 있구나.注+: 《역상易象》은 《주역周易》의 효사爻辭단사彖辭이다. 문왕文王단사彖辭를 짓고 주공周公효사爻辭를 지었다. 《춘추春秋》는 주공周公구전舊典에 따라 일을 서술한 것이므로 “주례周禮가 모두 나라에 있다.”고 한 것이다.
吾乃今에야 知周公之德與周之所以王注+朱曰 易象春秋 是文王周公之所制 故見春秋 則知周公之德 見易象 則知周之所以王이라하니 韓子所見 蓋周之舊典禮經也注+朱曰 韓宣子所見魯春秋 蓋是周之舊日正典禮之大經也
내 이제서야 주공周公나라가 왕자王者가 된 까닭을 알았도다.”라고 하였으니,注+: 《역상易象》과 《춘추春秋》는 문왕文王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므로 《춘추春秋》를 보면 주공周公을 알 수 있고, 《역상易象》을 보면 나라가 왕자王者가 된 까닭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한자韓子가 본 것은 아마도 나라의 옛 전장典章대경大經(大法)이었을 것이다.注+: 한선자韓宣子가 본 《노춘추魯春秋》는 아마도 나라의 옛 정전正典(典章)에 관한 대경大經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周德旣衰 官失其守注+朱曰 史官失其職守하고 上之人不能使春秋昭明注+朱曰 在上之人 又非賢聖 故不能使春秋褒貶勸戒昭明하야 赴告策書注+朱曰 赴告 謂告於隣國也 崩薨曰赴 禍福曰告 赴告然後載於冊書 諸所記注注+朱曰 與夫其他所記之事 多違舊章注+朱曰 赴告記注 多與舊典禮經相違일새
나라의 쇠퇴衰頹하자 사관史官이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注+: 사관史官이 그 직분職分을 잃었다는 말이다. 위에 있는 사람(임금)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勸戒‧포폄褒貶)를 밝히지 못하여,注+: 윗자리에 있는 사람도 현자賢者성자聖者가 아니었기 때문에 포폄褒貶권계勸戒하는 《춘추》의 의리를 밝히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부고赴告책서策書注+: 부고赴告는 이웃 나라에 통고通告하는 것인데, 을 알리는 것을 ‘’라 하고, 화복禍福을 알리는 것을 ‘’라 한다. 부고赴告해 온 뒤에야 사책史策에 기록한다. 모든 기주記注注+: 기타의 기록된 일들을 이름이다. 대부분 옛 법도와 어긋났다.注+: 부고赴告기주記注가 대부분 구전舊典예경禮經과 어긋났다는 말이다.
仲尼因魯史策書成文하야 考其眞僞하고 而志其典禮注+朱曰 考 謂校勘也 眞者因之 僞者改之 志 謂記識也 合典法者褒之 違禮度者貶之하야 上以遵周公之遺制하고 下以明將來之法하니라
그러므로 중니仲尼(孔子)가 나라 사관史官에 기록한 성문成文에 의거하여 그 진위眞僞교감校勘하고 그 전례典禮를 기록하여注+: ‘’는 교감校勘이니 참된 것은 그대로 두고 거짓된 것은 개정改正하는 것이다. ‘’는 기록이니 전법典法에 맞는 것은 포장褒獎하고 예도禮度에 어긋난 것은 폄하貶下하는 것이다. 위로는 주공周公이 남긴 법제法制를 따르고 아래로는 장래의 법을 밝히셨다.
其敎之所存注+朱曰 謂名敎善惡 義存於此事이나 文之所害注+朱曰 若文無褒貶以示勸戒 則是文之害敎 則刊而正之하야 以示勸戒注+朱曰 刊削舊策 改而正之 以示後人 使聞善而知勸 見惡而自戒하고 其餘 則皆卽用舊史하니 史有文質하야 辭有詳略注+朱曰 文則其辭詳 質則其辭略하니 不必改也
구사舊史에 기재된 사건 중에 교훈이 될 만한 점이 있으나注+: 명교名敎(名分을 바로잡는 예교禮敎)와 선악善惡의 의리가 이 사건에 있는 것을 이른다. 문사文辭가 교훈을 해친 곳은注+: 만약 문사文辭권계勸戒를 보일 만한 포폄褒貶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문사文辭교훈敎訓을 해친 것이다. 문단文段삭제削除하고 시정是正하여 권계勸戒의 뜻을 보였고,注+: 옛 사책史策의 기록을 삭제하고 개정改正해 후인들에게 보여주어, 을 듣고 권면勸勉하며 을 보고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그밖에는 모두 구사舊史를 따랐으니, 이는 사관史官에는 문화文華한 사람도 있고 질박質朴한 사람도 있어서 말이 자세한 경우도 있고 간략한 경우도 있으니注+: 사람됨이 문화文華하면 그 말이 상세하고, 사람됨이 질박質朴하면 그 말이 간략하다. 고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故傳曰 其善志注+朱曰 引左傳之言以證之 此傳 在昭公三十一年 言春秋之書 善於志記也라하고 又曰 非聖人이면 孰能脩之注+朱曰 此傳 在成四年리오하니 蓋周公之志注+朱曰 傳言善志者 蓋周公記事之法也 仲尼從而明之注+朱曰 傳言非聖人孰能修之 蓋孔子能修春秋 使之昭明也니라
그러므로 에 “뛰어난 기술記述이다.”고 하였고,注+: 《좌전左傳》의 말을 이끌어 이를 증명하였다. 이 말은 소공昭公 31년 에 보이는데, 《춘추春秋》의 글이 기술記述을 잘하였다는 말이다. 또 “성인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편수編修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으니,注+: 이 말은 성공成公 4년 에 보인다. 주공周公기사법記事法注+: 의 ‘선지善志’(뛰어난 기술記述)라는 말은 주공周公기사법記事法을 이른다. 중니仲尼께서 따라 밝히신 것이다.注+: 의 “성인聖人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편수編修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춘추》를 편수하여 포폄褒貶권계勸戒대의大義를 밝혔다는 말이다.
左丘明受經於仲尼하고 以爲經者 不刊之書也
좌구명左丘明중니仲尼에게 해 받고서 삭제削除할 수 없는 글이라고 여겼다.
하고注+朱曰 左氏作傳解經 或先經爲文 以始後經之事 或後經爲文 以終前經之義하며 或依經以辯理하고 或錯經以合異注+朱曰 하야 隨義而發하니라
그러므로 을 지음에 있어, 혹은 경문經文에 앞서 을 붙여 뒤에 나오는 경문의 배경背景을 설명하기도 하고, 혹은 경문 뒤에 을 붙여 앞 경문의 뜻을 종결終結하기도 하고,注+: 좌씨左氏을 지어 해석解釋함에 있어 혹은 경문經文 앞에 전문傳文을 붙여 뒷 경문에 실린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기도 하고, 혹은 경문 뒤에 을 붙여 앞 경문의 뜻을 종결終結하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혹은 경문에 의거해 사리事理변론辨論하기도 하고, 혹은 경문經文을 섞어 뜻은 같은데 서법書法이 다른 것을 모으기도 하여,注+: 혹은 의 말에 의거依據해 이 사리事理를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경문經文을 섞어 글을 만들어서 이 경문에 서법書法이 다른 것들을 모으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뜻에 따라 을 지었다.
注+朱曰 例 卽五例也 此言左氏皆隨經義 而發明春秋五例之所重者 舊史遺文일새 略不盡擧하니 非聖人所脩之要故也注+朱曰 ᄅ새니라
가 중복된 것은注+: 는 바로 오례五例이다. 이것은 좌씨左氏가 모두 의 뜻에 따라 《춘추》의 중요한 오례五例를 드러내 밝혔다는 말이다. 구사舊史유문遺文이므로 생략省略하고 다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聖人께서 편수하신 요지要旨가 아니기 때문이다.注+: 《춘추》에는 공자孔子께서 삭제削除개정改正하지 않은 구사舊史유문遺文이 많은데도 좌씨左氏가 이를 생략省略하고 다시 을 내지 않은 것은 이는 모두 구사舊史유문遺文일 뿐이고, 공자孔子께서 편수編修하신 요지要旨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身爲國史하야 躬覽載籍하고 必廣記而備言之注+朱曰 漢藝文志云 左丘明 魯史也 所見旣博 故春秋所不書之事 亦必廣記而備言之ᄅ새
좌구명左丘明은 자신이 나라의 사관史官이 되어 몸소 많은 서적을 보고서 에 기록되지 않은 일까지 반드시 널리 기록하고 자세히 말하였다.注+: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좌구명左丘明나라 사관史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널리 보았기 때문에 《춘추》에 기록되지 않은 일까지 반드시 널리 기록하고 자세히 말했다는 말이다.
其文緩하고
其旨遠注+朱曰 言左氏爲文辭不迫切 而其旨意却深遠
하니라
그러므로 그 문사文辭완곡婉曲하고 그 뜻이 심원深遠하다.注+: 좌씨左氏문사文辭를 만든 것은 박절迫切하지 않고 그 뜻은 매우 심원深遠하다는 말이다.
將令學者 原始要終注+朱曰 推原其事之始 要截其事之終하고 尋其枝葉하야 究其所窮注+朱曰 因枝葉而究極根本之所窮하야 注+朱曰 言左氏富博其文 以寬舒學者之心 使自求索其高意 又精華其大義 以飽足學者之好 使自奔趨其深致하니라
좌씨左氏는 학자들로 하여금 그 사건의 시원始原추구推究하여 그 사건의 결과을 추단推斷하고注+: 그 사건의 시원始原추구推究하여 그 일의 결과를 추단推斷하는 것이다. 지엽枝葉을 찾아 그 본원本原궁극窮極탐구探究하게 하기 위하여,注+: 지엽枝葉을 이용하여 그 근본의 궁극窮極을 탐구하는 것이다. 문사文辭를 풍부하게 기록해 학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스스로 뜻을 찾게 하고, 그 대의大義정수精髓를 기록해 학자들의 기호嗜好를 충족시켜 스스로 심오深奧한 뜻을 탐구하게 하였다.注+: 좌씨左氏가 그 문사文辭를 풍부하게 기록해 학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스스로 높은 뜻을 찾게 하고, 또 그 대의大義정수精髓를 기록해 학자들의 기호嗜好를 충족시켜 스스로 깊은 뜻을 찾게 하였다는 말이다.
若江海之浸하고 膏澤之潤하니 渙然冰釋하고 怡然理順然後 爲得也注+朱曰 譬如江海以水深之 故所浸者遠 如膏澤以雨多之 故所潤者博 以喩傳之廣記備言 亦欲浸潤經文 使義理通洽也 故學者之心 渙然解散 如春氷之釋 怡然喜悅 而衆理皆順然後 眞有所得也
그러기 위해 강해江海대지大地를 잠기게 하고 고택膏澤이 만물을 적시듯이, 널리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여 경문經文을 그 속에 담아 의리義理가 충분히 통하게 하였으니, 학자學者들은 의심이 봄 얼음처럼 풀리고 모든 조리條理가 자연스럽게 통한 뒤에야 참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注+: 비유하자면 강해江海는 물이 깊기 때문에 광원廣遠한 땅을 잠기게 하고, 고택膏澤은 비가 많기 때문에 널리 수분水分을 공급하듯이, 에 널리 기록하고 자세히 말한 것도 속에 담아 의리義理가 충분히 통하게 하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의심疑心이 봄 얼음처럼 풀리고 마음에 즐거움이 일어 모든 조리條理가 자연스럽게 통한 뒤에야 참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其發凡以言例注+朱曰 自此以下至一經之通體 此一節 說舊發例也 左傳之中 發凡言例 如隱公七年 凡諸侯同盟 於是稱之類 有五十條 皆以凡字 發明類例 皆經國之常制 周公之垂法 史書之舊章 仲尼從而脩之하야 以成一經之通體注+朱曰 仲尼作經 不過因周公垂法史書舊章 從而修明之耳 故春秋一經之通體 由此而成也니라
좌전左傳》에 ‘’字를 써서 를 말한 것들은注+: 여기서부터 ‘일경지통체一經之通體’까지의 한 단락段落구사舊史에 드러난 를 설명한 것이다. 《좌전左傳》 중에 ‘’字를 써서 를 말한 것은 은공隱公 7년 에 “대체로[凡]제후諸侯동맹同盟했어야 이에 이름을 칭한다.”라고 한 와 같은 것이다. 이런 유가 모두 50 조항이 보이는데, 이는 모두 ‘’자를 써서 를 드러내 밝힌 것이다.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불변不變제도制度주공周公이 전한 법과 사서史書의 옛 전장典章중니仲尼께서 그대로 따라 편수編修하여 《춘추》 일경一經통체通體(전체의 체제體制)로 삼은 것이다.注+: 중니仲尼을 지은 것은 주공周公이 전한 법과 사서史書의 옛 법도를 그대로 따라 포폄褒貶권계勸戒의 뜻을 천명闡明한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춘추》 일경一經통체通體가 이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注+朱曰 自此以下至曲而暢之也 此一節 說新意也 此言左氏作傳 於經之顯明者 微而隱之 幽隱者 闡而明之 所以裁制而成義理倫類者 皆據舊例而發義하고 指行事以正褒貶注+朱曰 皆是據舊典凡例 而起發經義 指其人行事是非 以正春秋之褒貶이라
그리고 에 드러낸 일은 세미細微하게 기록하고 에 숨긴 일은 드러내 밝혀서 의례義例를 만든 것은,注+: 여기서부터 ‘곡이창지야曲而暢之也’까지의 한 단락段落신의新意를 설명한 것이다. 이 말은 좌씨左氏을 지으면서 에 드러내 밝힌 일은 간략하게 기록해 숨기고, 에 숨긴 일은 분명하게 기록해 드러낸 것은 알맞게 안배按排하여 의리義理차서次序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모두 구례舊例에 의거해 의 뜻을 드러내고 행사行事시비是非를 지적해 포폄褒貶을 바룬 것이다.注+: 이는 모두 구전舊典범례凡例에 의거해 의 뜻을 드러내고, 그 사람의 행사行事시비是非를 지적해 《춘추》의 포폄褒貶을 바루었다는 말이다.
諸稱書 不書 先書 故書 不言 不稱 書曰之類注+朱曰 承上文發義而言有此七類也 左氏作傳 有稱書者 有稱不書者 有稱先書者 有稱故書者 有稱不言者 有稱不稱者 有稱書曰者 皆所以起新舊發大義注+朱曰 言此七者之類 皆所以起新舊之例 令人知發凡是舊例 七者是新發明經中之大義也 謂之變例注+朱曰 以發凡是正例 故知七者爲變例也
에 ‘’‧‘불서不書’‧‘선서先書’‧‘고서故書’‧‘불언不言’‧‘불칭不稱’‧‘서왈書曰’이라고 칭한 들은注+: 상문上文의 ‘발의發義(經의 뜻을 드러냄)’를 이어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유형類型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좌전左傳》에는 ‘’라 칭한 곳도 있고, ‘불서不書’라 칭한 곳도 있으며, ‘선서先書’라 칭한 곳도 있고, ‘고서故書’라 칭한 곳도 있으며, ‘불언不言’이라 칭한 곳도 있고, ‘불칭不稱’이라 칭한 곳도 있고, ‘서왈書曰’이라 한 곳도 있다. 모두 신구新舊를 일으켜 대의大義를 드러낸 것이니,注+: 이 일곱 가지 유형은 모두 신구新舊를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발범發凡(’凡‘字를 싸서 를 드러냄)’은 구례舊例이고, 이 일곱 가지는 새로 속의 대의大義를 드러내 밝힌 것임을 알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를 ‘변례變例’라 한다.注+: ‘발범發凡’이 정례正例이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가 변례變例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注+朱曰 又有舊史元來不書 正合仲尼之意 遂卽以爲義 不復增改者하니 注+朱曰 此結上文兩節之意
구사舊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공자孔子가 곧 의리에 맞는다고 여긴 것이 있으니,注+: 또 구사舊史에 원래 기록하지 않은 것이 중니仲尼의 뜻에 부합符合하는 것이 있으면 에 맞는다고 여겨 다시 더 보태거나 개정改正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대체로 《춘추》의 신의新意이다.注+: 이것은 상문上文의 두 단락段落의 뜻을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에 ‘’을 말하지 않고 자세히 말하여 그 뜻을 통하게 하였다.注+: 좌씨左氏가 《춘추》 신의新意에 대해 일마다 을 달면서 ‘’字로 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자세히 말하여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注+朱曰 此一節 說經無義例者 蓋國有大事 史必皆因其行事而書之 左氏於此 但言其指歸趣向而已 非褒貶之例也
경문經文의례義例가 없이 행사行事에 따라 말한 것은 에서도 포폄褒貶하지 않고 그 결과結果만을 말했을 뿐이니, 이는 ‘비례非例’이다.注+: 이 한 문단文段의례義例가 없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사관史官이 반드시 모두 그 행사行事에 따라 기록하는데, 좌씨左氏가 이에 대해 그 결과만을 말한 것은 포폄褒貶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故發傳之體有三注+朱曰 發凡正例 一也 新意變例 二也 歸趣非例 三也하고 而爲例之情有五注+朱曰 言經有此五情 故傳爲經發例 亦以此五者也니라
그러므로 을 기술한 체제體制는 세 가지가 있고,注+: ‘’자를 써서 정례正例를 드러낸 것이 첫째이고, 신의新意를 드러낸 것이 둘째이고, ‘귀취歸趣(결과만을 말한 것)가 셋째이다. 유형類型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注+: 에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유형類型이 있기 때문에 을 위해 를 일으킨 것도 이러한 다섯 가지 체제體制가 있다는 말이다.
一曰 微而顯注+朱曰 此五曰五句 見成公十四年傳 微而顯者 謂辭微而義顯也으로 文見於此注+朱曰 辭之所以微也로되 而起義在彼注+朱曰 義之所以顯也 稱族尊君命 舍族尊夫人 梁亡 城緣陵之類 是也注+朱曰 引三事以證微而顯之說 成公十四年經曰 秋叔孫僑如 如齊逆女 九月僑如以夫人婦姜氏至自齊 此文見於此也 傳釋之曰 稱族 尊君命也 舍族 尊夫人也 蓋叔孫 是族氏 僑如 是名 方其奉君命而逆女 則君命爲尊 故稱叔孫 及其與夫人俱還 則夫人爲尊 故舍其族而但稱其命 此起義在彼也 僖公十九年經 書梁亡 十四年經 書諸侯城緣陵 此文見於此也 傳釋之曰 不書其主 自取之也 又曰 不書其人 有闕也 蓋秦人滅梁而但書梁亡 所以見取之者無罪 齊率諸侯城緣陵而但書諸侯 所以見諸侯之有闕 亦起義在彼也
첫째는 문사文辭세미細微하게 기록하여 뜻을 드러낸 것으로注+:‘미이현微而顯’‧‘지이회志而晦’‧‘완이성장婉而成章’‧‘진이불오盡而不汙’‧‘징악이양선懲惡而揚善’이라 한 다섯 글귀는 성공成公 14년 에 보인다. ‘미이견微而見’은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뜻은 드러났다는 말이다. 문사文辭는 여기에 보이나注+: 문사文辭를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일으킨 뜻은 저기에 있는 것이니,注+: 를 드러낸 것이다. 을 칭한 것은 군명君命을 높인 것이다.”와 “을 칭하지 않은 것은 부인夫人을 높인 것이다.”와, “나라가 망하였다.”와, “연릉緣陵에 성을 쌓았다.”는 가 이에 해당한다.注+: 이 세 가지 일을 인용해 ‘미이현微而顯’의 을 증명하였다. 성공成公 14년 에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나라로 가서 여자를 맞이하였다.”고 기록한 것과, “9월에 교여僑如부인夫人부강씨婦姜氏를 모시고 나라로부터 나라로 돌아왔다.”고 기록한 것이 ‘문견어차文見於此’이고, 그 에 “한 것은 임금의 을 높인 것이고, 을 칭하지 않은 것은 부인夫人을 높인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숙손叔孫은 그의 족씨族氏이고 교여僑如는 그의 이름인데, 그가 임금의 을 받들어 여자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임금의 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숙손叔孫이라고 을 칭하고, 그가 부인夫人을 모시고 함께 돌아올 때에는 부인夫人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을 칭하지 않고 교여僑如라고 이름만을 칭했다는 말이니, 이것이 ‘기의재피起義在彼’이다. 희공僖公 19년 에 “나라가 하였다.”고 기록한 것과, 희공僖公 14년 에 “제후諸侯연릉緣陵을 쌓았다.”고 기록한 것이 ‘문견어차文見於此’이고, 그 에 “나라를 멸망滅亡시킨 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멸망을 자초自招했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희공僖公 14년 에 “을 쌓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을 견고하게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해석하였으니, 이는 진인秦人나라를 멸망시켰는데도 에 “나라가 하였다.”고만 기록한 것은 나라를 나라에 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고, 나라가 제후諸侯를 거느리고서 연릉緣陵을 쌓았는데도 에 ‘제후諸侯’라고만 기록한 것은 제후諸侯들이 을 제대로 쌓지 않은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는 뜻이니, 이것이 ‘기의재피起義在彼’이다.
二曰 志而晦注+朱曰 志 記也 晦 隱也 謂約言以記事 事敘而文隱也 約言示制하야 推以知例注+朱曰 約言記事 以示法制 所謂志也 推尋其事 以知其例 所謂晦也 參會不地 與謀曰及之類 是也注+朱曰 引此事以證志而晦之說 二年經曰 公及戎盟于唐 公至自唐 傳例曰 特相會 往來稱地 讓事也 自參以上 則往稱地 來稱會 成事也 蓋唐 地名也 二人共會 則相讓而莫肯爲主 會事不成 故書至自某地也 三國以上共會 則一人爲主 會事有成 故書至自會而不書其地 故曰參會不地也 宣公七年經曰 公會齊侯伐萊 傳例曰 凡出師 與謀曰及 不與謀曰會 蓋彼我共謀征伐 則以相連及爲文而書曰及 彼不與我謀 不得已而往應命 則以相會合爲文而書曰會 故曰與謀曰及也 凡此二者 皆約於一字以示法制 因此推尋 可知其例 所謂志而晦者也
둘째는 사실史實을 기록하여 뜻을 심오深奧하게 한 것으로注+: 는 기록함이고, 은미隱微함이다. 간략한 말로 일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사실史實은 서술되었으나 문사文辭은미隱微하다는 말이다. 간략한 말로 법제法制를 보여 이를 미루어 그 를 알게 한 것이니,注+: 간략한 말로 사건을 기록하여 법제法制를 보였다는 말은 ‘’를 이름이고, 그 일을 미루어 그 를 알게 하였다는 말은 ‘’를 이름이다. “세 나라 이상의 임금이 회합한 경우에는 회합한 지명地名을 칭하지 않는다.”와 “모의謀議에 참여한 경우에는 이라고 칭한다.”는 가 이에 해당한다.注+: 이 일을 인용하여 ‘지이회志而晦’의 을 증명하였다. 환공桓公 2년 에 “에서 결맹結盟하고서, 에서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그 전례傳例에 “한 나라의 임금이 다른 한 나라의 임금과 단 둘이 회합한 경우에는 이 쪽 임금이 다른 나라로 갔거나 다른 나라 임금이 이쪽 나라로 왔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회합會合지명地名만을 기록하니, 이는 회의會議주재자主宰者가 되기를 서로 사양하여 회합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고, 세 나라 이상의 임금이 회합한 경우에는 이쪽 임금이 다른 나라로 갔으면 회합한 지명地名을 칭하고, 다른 나라 임금이 이쪽 나라로 왔으면 회합했다고 칭하니, 이는 회합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명地名이다. 두 사람만이 함께 회합會合하면 서로 사양하여 회의會議주재자主宰者가 되려하지 않기 때문에 회합會合의 일이 이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 곳에서 돌아왔다.’고만 기록하고, 세 나라 이상이 함께 회합하면 한 사람이 회의會議주재主宰하여 회합의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회합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그 지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 나라 이상이 회합한 경우에는 지명地名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선공宣公 7년 에 “제후齊侯와 회합하여 토벌討伐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전례傳例에 “모든[凡]출병出兵에는 모의謀議에 참여한 경우에는 ‘’이라고 기록하고,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경우에는 ‘’라고 기록한다.”고 하였다. 피아彼我정벌征伐할 것을 공모共謀한 경우에는 연급連及으로 글을 만들어 ‘’이라고 기록하고, 저들이 우리와 공모共謀하지 않았으나, 우리가 마지못해 가서 저들의 요구에 응한 경우에는 회합으로 글을 만들어 ‘’라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모의에 참여한 경우에는 ‘’이라 기록한다.’고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간략하게 한 글자로 법제法制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미루어 그 를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지이회志而晦’라는 것이다.
三曰 婉而注+朱曰 婉曲其辭 以成章篇으로 曲從義訓하야 以示大順注+朱曰 이니 諸所諱辟 璧假許田之類 是也注+朱曰 引諸及許田事 以證婉而成章之說 春秋以諱國惡爲禮 多有諱避而不直述其事者 故言諸以摠之也 公元年經曰 鄭伯以璧假許田 傳釋之曰 爲周公祊故也 蓋許田 是魯國 因創周公別廟焉 祊田 是鄭國 二者皆天子所賜也 鄭伯因地勢之便 欲兩相易 而代魯祀周公 而祊田之薄 不足當許 故加璧以易之 然魯不宜聽鄭祀周公 又不宜擅易祊田 春秋諱之 但書璧假許田 若進璧以假田 非久易也 此皆委曲以示大順 所謂婉而成章也
셋째는 완곡婉曲하게 기술하여 장법章法(法則)을 이룬 것으로注+: 문장을 완곡하게 기술하여 문장文章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문사文辭를 완곡하게 기술하여 의훈義訓을 따라 대순大順의 도리를 보인 것이니,注+: 문사文辭를 완곡하고 자세하게 기술하여 의훈義訓을 따른 것이 이른바 ‘’이고, 대순大順의 도리를 보인 것이 이른바 ‘성장成章’이다. 모든 휘피諱避와 “을 주고 를 빌렸다.”는 가 이에 해당한다.注+: 모든 휘피諱避허전許田의 일을 인용해 ‘완이성장婉而成章’의 을 증명하였다. 《춘추》에는 국악國惡하는 것을 로 여겨 그 일을 숨기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든[諸] ’이라는 말로 전체를 묶은 것이다. 환공桓公 원년 에 “정백鄭伯(玉)을 얹어 주고서 허전許田을 빌렸다.”라고 하였는데, 그 에 “주공周公 때문이었다.”고 해석하였다. 허전許田나라의 조숙읍朝宿邑이므로 그 곳에 주공周公별묘別廟를 세웠고, 팽전祊田나라의 탕목읍湯沐邑인데, 이 두 은 모두 천자天子하사下賜이다. 허전許田나라 가까이에 있고 나라 영역領域 안에 있으므로 정백鄭伯지세地勢의 편의에 따라 두 을 서로 교환交換하고서 나라를 대신해 주공周公제사祭祀를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팽전祊田허전許田에 비해 작기 때문에 (玉)을 더 얹어 주고서 교환交換한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나라가 주공周公제사祭祀지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고, 또 천자天子가 내리고 대대로 지켜온 환공桓公이 멋대로 팽전祊田교환交換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춘추》에 그 사실을 숨기고 다만 ‘벽가허전璧假許田’이라고만 기록하여, 마치 을 주고서 허전許田을 임시로 빌린 것이지 영원히 바꾼 것이 아닌 것처럼 글을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문사文辭를 완곡하게 기술하여 대순大順의 도리를 보인 것으로 이른바 ‘완이성장婉而成章’이다.
四曰 盡而不汙注+朱曰 直盡其言 無所汙曲 直書其事하고 具文見意注+朱曰 直書其事 所謂盡也 具爲其文 以見其譏意 所謂不汙也 丹楹刻桷 天王求車 齊侯獻捷之類 是也注+朱曰 引三事以證盡而不汙之說 莊公二十三年經 書丹桓宮楹 二十四年經 書刻桓宮桷 傳曰 皆非禮也 桓公十五年經 書天王使家父來求車 傳曰 諸侯不貢車服 天子不私求財 莊公三十一年經 書諸侯來獻戎捷 傳例曰 諸侯不相遺俘 凡此三者 皆直書其事 具爲其文 以見譏誚之意 所謂盡而不汙也
넷째는 사실을 다 기록하여 왜곡歪曲하지 않은 것으로注+: 솔직하게 다 말하고 왜곡歪曲한 바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문사文辭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기풍譏諷(넌지시 나무람)의 뜻을 보인 것이니,注+: 그 사실을 솔직하게 기록한 것이 이른바 ‘’이고, 문사文辭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기풍譏諷의 뜻을 보인 것이 이른바 ‘불오不汙’이다. “기둥에 붉은 칠을 하였다.”와 “서까래에 조각彫刻을 하였다.”와 “천왕天王이 수레를 요구하였다.”와 “제후齊侯전리품戰利品을 바쳤다.”는 가 이에 해당한다.注+: 이 세 가지 일을 인용해 ‘진이불오盡而不汙’의 을 증명하였다. 장공莊公 23년 에 “환궁桓宮(桓公의 )의 기둥에 붉은 칠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24년 에 “환궁桓宮의 서까래에 조각彫刻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에 “모두 비례非禮이다.”고 해석하였고, 환공桓公 15년 에 “천왕天王가보家父나라에 보내어 수레를 요구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에 “제후諸侯는 수레와 의복을 바치지 않고 천자天子는 사사로이 재물財物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고 해석하였으며, 장공莊公 31년 에 “제후齊侯나라에 와서 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戰利品을 바쳤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전례傳例에 “제후諸侯끼리는 서로 전리품戰利品을 주지 않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그 사실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문사文辭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기풍譏諷의 뜻을 보인 것이니 이른바 ‘진이불오盡而不汙’이다.
五曰 懲惡而勸善으로 求名而亡하고 欲蓋而章注+朱曰 爲惡者 欲求得名而名反亡沒 欲掩蓋其名而名反章露이니 書齊豹盜 三叛人名之類 是也注+朱曰 引四事以證懲惡勸善之說 昭公年經 書盜殺衛侯之兄縶 襄公二十一年經 書邾庶其以漆閭丘來奔 昭公五年經 書莒牟夷以牟婁及防玆來奔 三十一年經 書邾黑肱以濫來奔 蓋春秋之例 非命卿 不書其名 齊豹 衛國之卿也 忿衛侯之兄而殺之 欲求不畏彊禦之名耳 而春秋抑之 但書曰盜 則是求名而亡也 邾庶其黑肱莒牟夷三人 皆非命卿 不當書名 其以邑來奔 求食而已 不期名之著於春秋也 而春秋故書其名 所謂欲蓋而彰也 此二者 皆懲惡之事 懲惡所以勸善也
다섯째는 을 징계하고 을 권장한 것으로 명성名聲을 구하고자 한 자에게는 그 이름을 묻어버리고, 오명惡名을 은폐하고자 한 자에게는 그 이름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니,注+: 명성名聲을 얻으려고 악행惡行을 저지른 자에게는 도리어 그 이름을 묻어버리고 오명惡名을 숨기려 한 자에게는 도리어 그 이름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제표齊豹’를 ‘’라고 기록한 것과, 세 반인叛人의 이름을 기록한 가 이에 해당한다.注+: 이 네 가지 일을 인용하여 ‘징악권선懲惡勸善’의 설을 증명하였다. 소공昭公 20년 에 “위후衛侯살해殺害하였다.”고 기록하고, 양공襄公 21년 에 “주서기邾庶其칠려구漆閭丘를 가지고 나라로 도망해 왔다.”고 기록하고, 소공昭公 5년 에 “거모이莒牟夷모루牟婁방자防玆를 가지고 나라로 도망해 왔다.”고 기록하고, 소공昭公 31년 에 “주흑굉邾黑肱남읍濫邑을 가지고 나라로 도망해 왔다.”고 기록하였다. 《춘추》의 명경命卿(天子가 임명任命제후諸侯)이 아닌 경우에는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제표齊豹나라의 으로 위후衛侯에게 분노하여 그를 살해한 것은 강어彊禦(權勢를 가진 사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성名聲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에는 그를 깎아내려 ‘’라고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명성名聲을 구하기 위해 악행惡行을 한 자에게는 도리어 그 이름을 묻어버린다는 것이다. 주서기邾庶其흑굉黑肱거모이莒牟夷 등 세 사람은 모두 명경命卿이 아니니, 《춘추》에 그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들이 을 가지고서 도망해 온 것은 祿을 구한 데 불과했을 뿐이니, 자기들의 오명惡名이 《춘추》에 드러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에 굳이 그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욕개이장欲蓋而章’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징계懲戒한 일이다. 징계懲戒하는 것이 바로 권장勸獎하는 것이 된다.
推此五體하야 以尋經傳注+朱曰 前言情有五 此言五體者 情 言其意 體 言其狀 其實一也하야 觸類而長之하야 附于二百四十二年行事 王道之正 人倫之紀 備矣리라
이 다섯 가지 체제體制를 미루어 의 뜻을 찾아注+: 앞에서는 ‘정유오情有五’라 말하고 여기서는 ‘오체五體’라고 말하였으나, 은 그 뜻을 말한 것이고 는 그 상태狀態를 말한 것이니, 그 내용은 한 가지이다. 유사한 일에 미루어 2백 42년 간의 행사行事에 대비해 보면 왕도王道정법正法인륜人倫기강紀綱완비完備될 것이다.
或曰 春秋 以錯文見義注+朱曰 謂春秋錯雜文辭 以見意義 文之異者 義亦異焉어늘 若如所論注+朱曰 今如杜預所論 乃謂仲尼因魯史舊文 文害者 刊而正之 不害者 不必改也이면 則經當有事同文異而無其義也니라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춘추》는 문사文辭를 달리하여 뜻을 나타낸 것인데,注+: 《춘추》는 문사文辭를 달리 기록하여 뜻을 드러내었으니, 문사文辭가 다른 곳은 뜻도 다르다는 말이다. 그대의 말대로라면注+: 지금 두예杜預의 말대로라는 것은 이상에 “중니仲尼노사魯史구문舊文에 의거해 문사文辭가 의리를 해친 곳은 삭제하여 바로잡고 해치지 않은 것은 개정改正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 두예杜預의 말을 이른다.에는 당연히 같은 사건에 문사文辭표현表現만을 달리 했을 뿐, 아무 뜻이 없는 곳이 있어야 한다.
先儒所傳 皆不其然하니라 答曰
그러나 선유先儒한 것은 모두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春秋雖以一字爲褒貶이나 然皆須數句以成言이요 非如八卦之爻 可錯綜爲六十四也注+朱曰 八卦各三爻錯綜 重之而六爻 則成六十四卦 然卦之爻也 一爻變則成爲一卦 經之字也 一字異 不得成爲一義 故不可錯綜經文而成義理也 固當依傳以爲斷注+朱曰 事同文異者 左氏不爲發傳 蓋決知仲尼必無異義 所以當依傳而斷經也이니라
“《춘추》가 비록 한 글자로써 포폄褒貶하였으나, 모두 몇 개의 문구文句를 사용하여 말을 만든 것이고, 팔괘八卦를 뒤섞어 64괘를 만든 것과는 같지 않으니,注+: 팔괘八卦는 각각 세 씩이 모인 것인데, 세 에다가 세 를 더 보태면 육효六爻가 되어 64가 된다. 그러나 는 한 가 변하면 다른 한 가 되지만 의 글자는 한 가 다르다 하여 하나의 다른 뜻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경문經文을 뒤섞어 뜻을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진실로 에 의거해 의 뜻을 추단推斷하여야 한다.注+: 동일한 사건에 문사文辭의 표현을 달리한 곳에 대해 좌씨左氏을 달지 않은 것은 중니仲尼께서도 반드시 이의異意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 의거해 의 뜻을 추단推斷하여야 한다.
古今言左氏春秋者 多矣로되 今其遺文可見者 十數家이라
고금古今에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주설注說한 사람이 많으나 오늘날 그 유문遺文이 전해져 볼 수 있는 것은 10여 에 불과하다.
大體轉相祖述일새 進不得爲錯綜經文하야 以盡其變注+朱曰 事同文異 本無他義 而强爲之說 理不可通 所以進不成爲錯綜經文 以盡其變也하고 退不守丘明之傳注+朱曰 已無定見 隨人遷就 故退不能守左氏之說也하니라
그러나 대체로 돌려가며 서로 본받았기 때문에 위로는 경문經文을 종합하여 그 변화를 극진히 설명하지도 못하고,注+: 같은 사건에 문사文辭를 달리한 곳은 본래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억지로 해설하여 사리事理가 통하지 않게 하였으므로 “위로는 경문經文을 종합하여 그 변화를 극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고 한 것이다. 아래로는 좌구명左丘明을 지키지도 못하였다.注+: 자기의 정견定見이 없이 다른 이의 에 따라 영합迎合하였기 때문에 “아래로는 좌구명左丘明을 지키지도 못하였다.”고 한 것이다.
於丘明之傳 有所不通이면 皆沒而不說하고 而更公羊穀梁하니 適足自亂注+朱曰 膚 淺也 公羊氏穀梁氏 皆有春秋傳 其說與左氏不合 今言左氏者 不能硏究其旨 乃反引公羊穀梁淺近之說 以解左氏 適足以自錯亂也이라
그리고 좌구명의 에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모두 덮어두고 설명하지 않은 채, 다시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부인膚引하여 《좌전左傳》을 해석하였으니, 다만 스스로 어지럽혔을 뿐이다.注+: 이다.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도 모두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그 좌씨左氏과 다른데, 지금 《좌전左傳》을 주석註釋한 자들은 좌씨左氏의 뜻을 연구하지 않고 도리어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천근淺近를 인용하여 《좌전左傳》을 해석하였으니, 다만 스스로 어지럽혔을 뿐이다.
預今所以爲異 專修丘明之傳以釋經일새니라
지금 나 두예杜預을 달리하는 이유는 오로지 좌구명左丘明에 따라 해석解釋하였기 때문이다.
經之條貫 必出於傳注+朱曰 條 如木之有條 貫 如繩之能貫 以左傳與經 同條共貫也하고 傳之義例 總歸諸凡注+朱曰 傳之發義 皆有正例 必左傳發凡言例也하니 推變例以正褒貶하고 簡二傳而去異端
조관條貫은 반드시 에서 나오고注+: 는 나무에 가지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은 끈으로 물건을 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좌전左傳》이 과 한 가지로 하고 한 끈에 꿰었다는 말이다. 의례義例는 모두 여러 ‘’으로 귀결歸結하니,注+: 의 뜻을 드러낸 것은 모두 정례正例이므로 《좌전左傳》에 반드시 ‘’字를 써서 를 말하였다. 변례變例를 미루어 포폄褒貶을 바루고, 《공양公羊》‧《곡량穀梁》 두 에서 에 맞는 을 골라 하고 옳지 않은 은 버렸다.
蓋丘明之志也注+朱曰 若有例無凡 則傳有變例 可推之以正褒貶 若左氏不解 則就二傳 而簡用其合義者 黜去其異端者 以此立說 非我臆見 蓋是左氏之本意也니라
이렇게 한 것은 나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좌구명左丘明본의本意이기 때문이다.注+: 만 있고 이 없는 곳은 변례變禮가 있으니 이를 미루어 포폄褒貶을 바룰 수 있고, 좌씨左氏가 해석하지 않은 곳은 두 에서 에 맞는 것은 선택選擇해 취하고 옳지 않은 것은 버렸으니, 이런 내용으로 주설注說을 만든 것은 나의 억견臆見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좌씨左氏본의本意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其有疑錯이면 則備論而闕之하야 以俟後賢注+朱曰 備論其可疑之處 而闕其所不知하니라
에 의심스럽거나 착오錯誤가 있는 곳은 구체적으로 논변論辯하고 알 수 없는 곳은 그대로 남겨 두어 후현後賢을 기다리기로 하였다.注+: 의심스러운 곳은 구체적으로 논변論辯하고, 알 수 없는 곳은 해석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然劉子駿 創通大義하고 賈景伯父子 許惠卿 皆先儒之美者也注+朱曰 劉向之子 名歆 字子駿 漢武帝置五經博士 獨左氏不列學官 劉歆治左氏 始引傳文解經 故曰創通大義 後漢賈逵 字景伯 父徽 字元伯 受業於劉歆 作春秋條例 逵傳父業 作左氏傳訓詁 許惠卿 名淑 易治左氏春秋 三仁 皆先儒之美
그러나 유자준劉子駿은 처음으로 《좌전左傳》의 대의大義를 밝게 통하였고, 가경백賈景伯부자父子허혜경許惠卿도 모두 선유先儒 중에 뛰어난 분들이었다.注+: 유향劉向의 아들 유흠劉歆자준子駿이다. 한무제漢武帝오경五經에 모두 박사博士를 두었으나, 유독 《좌전左傳》만은 학관學官에 끼지 못하였다. 유흠劉歆이 《좌전左傳》을 전공專攻하여 처음으로 전문傳文을 이끌어 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대의大義를 통하였다.”고 한 것이다. 후한後漢가규賈逵경백景伯이다. 그의 아버지 가휘賈徽원백元伯인데, 유흠劉歆에게 수업하여 《춘추조례春秋條例》를 지었고, 가규賈逵는 아버지의 을 이어받아 《좌씨전훈고左氏傳訓詁》를 지었다. 허혜경許惠卿의 이름은 인데, 그 역시 《좌전左傳》을 전공專攻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선유先儒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末有潁子嚴者하니 雖淺近이나 亦復名家注+朱曰 其後又有穎子嚴 名容 比於劉賈許之徒 學識雖復淺近 然亦注述春秋 名爲一家之學
후한後漢 말엽에 또 영자엄潁子嚴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의 학식이 비록 천근淺近하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명가名家였다.注+: 그 뒤에 또 영자엄潁子嚴 (이름은 )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의 학식이 등의 학식에 비해 비록 천근淺近하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춘추》를 주석註釋하여 일가一家을 이룬 사람으로 이름났다. 그러므로 특별히
故特擧劉賈許潁之違하야 以見同異注+朱曰 杜預以先儒之內 四家差長 故擧其議論之違異不同者而參攷之하니라
등의 이 서로 다른 곳만을 들어 이동異同을 나타내었다.注+: 두예杜預선유先儒 중에 이 사가四家만이 약간 뛰어났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의론議論이 서로 달라 같지 않은 것을 들어 참고한 것이다.
分經之年與傳之年相附注+朱曰 左傳本自爲一書 杜預以經傳異處 不便觀覽 乃逐年分析經文 各以其傳 附於本年之下하고 比其義類하야 各隨而解之하고 名曰經傳集解注+朱曰 凡經之義與傳之義 各從其類以相比附 旣解經文 又解傳文 聚集經傳而解之 故以經傳集解爲名라하니라
그리고 의 연대와 의 연대를 연대별로 분리分離해 같은 연대끼리 붙이고,注+: 《좌전左傳》은 본래 《춘추》에 붙어 있지 않고 별개의 으로 있었는데, 이 따로 있으면 열람閱覽하기에 불편하다 하여 두예杜預가 연대별로 을 나누고서 그 을 각각 해당 연대의 밑에 붙인 것이다. 의 뜻과 의 뜻을 종류별種類別로 모아 각각 사항事項에 따라 해석하고서 《경전집해經傳集解》라 이름하였다.注+: 의 뜻과 의 뜻을 각각 그 종류에 따라 한 곳에 모아 경문經文을 해석하고서 또 전문傳文을 해석했다는 말이다. 경문과 전문을 한 곳에 모아 해석하였기 때문에 《경전집해經傳集解》라고 이름한 것이다.
又別集諸例及地名譜第歷數하야 相與爲部하니 凡四十部十五卷注+朱曰 諸例 謂不在凡例之內者 地名 謂土地稱號 譜第 謂世族圖譜 歷數 謂六十甲子 此四者 別集爲一書 以類相從 每類爲一部 共四十部 分而爲十五卷이라
그리고 또 따로 제례諸例지명地名보제譜第역수歷數를 모아 분류分類부문部門으로 만든 것이 모두 40에 15권이다.注+: 제례諸例범례凡例 속에 들지 않은 것을 이른다. 지명地名토지土地칭호稱號이고, 보제譜第세족世族도보圖譜이고, 역수歷數육십갑자六十甲子인데, 이 네 가지를 따로 모아 하나의 서적書籍으로 만든 것이다. 종류별로 모으고 매 종류種類를 각각 하나의 로 묶었는데, 모두 40부문部門에 15권이다.
皆顯其異同하야 從而釋之하고 名曰釋例注+朱曰 義例有異同者 皆表顯而出之 又解釋其所以異同之類 以其別集諸例 故以釋例爲名라하니라
그리고 또 모든 의례義例의 이동을 드러내어 그 이동의 원인을 해석解釋하고서 《석례釋例》라고 이름하였다.注+: 의례義例이동異同이 있는 것은 모두 드러내고, 또 이동異同이 있게 된 이유를 해석하기 위해 따로 제례諸例를 한 곳에 모았기 때문에 《석례釋例》라고 이른 것이다.
將令學者 觀其所聚異同之說하야 釋例詳之也하니라
학자學者들로 하여금 모아놓은 것을 보고서 이동異同을 알게 하기 위해 《석례釋例》에 이동에 대해 자세히 언급言及하였다.”고 하였다.
或曰 春秋之作注+朱曰 此問孔子作春秋之早晩 左傳及穀梁無明文注+朱曰 左氏穀梁二傳 皆不曾有明文 惟孔舒元 公羊傳本云 麟孰爲而至 爲孔子之作春秋이어늘
그러자 혹자或者는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은 것에 대해注+: 이것은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은 시기時期에 대해 물은 것이다.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에는 명문明文이 없는데,注+: 《좌전左傳》과 《곡량전穀梁傳》에는 모두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은 시기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는데, 오직 공서원孔舒元(晉나라 때의 학자學者로 이름은 )의 《공양전본公羊傳本》에만 “기린麒麟이 누구를 위해 이르렀는가?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은 것을 위해 이른 것이다.”고 하였다.
說者以爲仲尼自衛反魯하야 脩春秋注+朱曰 自衛反魯 在哀公十一年 說左氏者 謂孔子自衛反魯 便脩春秋 三年文成而致麟하야 立素王注+朱曰 此又問素王素臣之說 素 空也 謂無位而王也 麟爲王者至 今爲孔子至 故知孔子爲素王也하고 丘明爲素臣注+朱曰 孔子脩春秋爲素王 故知丘明傳春秋爲素臣也이라하며
좌전左傳》을 해설한 자는 ‘중니仲尼나라로부터 나라로 돌아와서 《춘추》를 편수編修하여注+: 공자孔子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온 때는 애공哀公 11년이었다. 《좌전左傳》을 해설한 자는 “공자孔子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와서 《춘추》를 편수編修하여 3년 만에 글이 완성되자 기린麒麟이 이르렀다.”고 하였다. 소왕素王이 되고注+: 이는 또 소왕素王소신素臣에 대해 물은 것이다. ‘’는 ‘’의 뜻이니, 제왕帝王의 지위는 갖지 못했으나 제왕帝王을 갖추었음을 이른다. 기린麒麟왕자王者를 위해 이르는 것인데, 지금 공자孔子를 위해 이르렀기 때문에 공자가 소왕素王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구명左丘明을 지어 소신素臣이 되었다.注+: 공자孔子가 《춘추》를 편수하여 소왕素王이 되었기 때문에 《춘추》의 을 지은 좌구명左丘明소신素臣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고,
言公羊者 亦云黜周而王魯注+朱曰 此又問王魯之說 何休註公羊傳 於隱公元年曰 唯王者然後 改元立號 春秋託新王受命於魯 此卽黜周王魯之說也일새 危行言孫하야 以辟當時之害注+朱曰 危險其行 謂黜周而王魯 遜順其言 卽下文所謂微其文隱其義者也 所以言遜者 恐危言以得罪當時而爲己之害也
공양전公羊傳》을 해설解說한 자도 ‘공자孔子가 《춘추》에서 나라를 내치고 나라를 으로 여겼기 때문에注+: 이는 또 나라를 으로 여긴 에 대해 물은 것이다. 《공양전公羊傳은공隱公원년조元年條하휴주何休註에 “오직 왕자王者만이 개원입호改元立號(王이 새로 즉위하여 전왕前王기년紀年을 새 연호로 고쳐 기년紀年하는 것)할 수 있는데, 《춘추》에는 나라 임금의 즉위卽位에 대해 마치 신왕新王천명天命을 받아 왕자王者가 된 것처럼 꾸몄다.”고 한 것이 바로 “나라를 내치고 나라를 으로 여겼다.”는 이다. 행동은 준엄峻嚴히 하였으나 말은 겸손히 하여 당시의 를 피하려 하였다.注+: 그 행동을 위험스럽게 한 것은 ‘출주이왕로黜周而王魯’한 것을 이름이고, 그 말을 겸손히 한 것은 바로 하문下文에 이른 ‘미기문은기의微其文隱其義’를 이른다. 말을 겸손히 한 이유는 말까지 준엄峻嚴하게 하면 당시에 를 얻어 자신에게 가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故微其文하고 隱其義라하니라 公羊 經止獲麟하고 而左氏 經終孔丘卒하니
그러므로 그 문사文辭를 간략하게 만들어 그 뜻을 숨긴 것이다.’고 하였으며, 《공양전公羊傳》에는 이 ‘획린獲麟’에서 끝났는데, 《좌전左傳》에는 이 ‘공구졸孔丘卒’에서 끝났다.
敢問所安注+朱曰 此又問春秋之所止 公羊春秋傳 止哀公十四年 西狩獲麟而止 左氏春秋傳 獲麟之後 更有經文 至書孔丘卒乃止하노라
감히 묻건대 그대는 어느 을 옳다고 여기는가?”라고 물었다.注+: 이는 또 《춘추》가 끝난 곳에 대해 물은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애공哀公 14년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났는데,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획린獲麟 이후에도 경문經文이 더 있어 ‘공구졸孔丘卒’을 기록한 데 이르러서야 끝났다.
答曰 異乎余所聞이로다
내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은 내가 들은 바와는 다르다.
仲尼曰 注+朱曰 文者 道之英華 所以經天緯地者也 孔子言已得文王之道也아하니 此制作之本意也注+朱曰 杜預言孔子制作春秋 正以文王之道自任也
중니仲尼께서 ‘문왕文王이 이미 하셨으니 이 나에게 있지 않은가.注+: 정수精髓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경천위지經天緯地(天下를 경영經營하고 국가國家를 다스림)하는 것이다. 이는 공자孔子 자신이 문왕文王를 얻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춘추》를 지으신 본의本意이다.注+: 두예杜預의 말은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은 것이 바로 문왕文王자임自任한 것이라는 뜻이다.
歎曰 注+朱曰 孔子言今世亂 鳳鳥不復至矣 伏羲時龍馬負圖而出於河 今世亂河不復出圖矣 言世亂無明王 吾道其不行已乎인저하니 蓋傷時王之政也
중니仲尼께서는 또 ‘봉조鳳鳥가 이르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도 펴는 일을 그만두어야겠구나.注+: 공자孔子께서 태호太皞 때에는 봉조鳳鳥가 나타났기 때문에 조명鳥名관명官名으로 삼았고, 복희伏羲 때에는 용마龍馬를 지고 하수河水에서 나왔는데, 지금은 세상이 어지러워 봉조鳳鳥가 다시 이르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이 어지럽고 밝은 임금이 없어서 나의 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탄식하셨으니, 이는 시왕時王(당시의 왕자王者)의 정치가 이런 상서祥瑞를 부를 수 없음을 상심傷心하신 것이다.
麟鳳五靈 王者之嘉瑞也注+朱曰 麟鳳龜龍 謂之四靈 幷白虎而爲五어늘 今麟出非其時하야 虛其應而失其歸注+朱曰 上無明主 則是虛其應也 爲人所獲 則是失其歸也하니 此聖人所以爲感也注+朱曰 孔子先有制作之意 又爲獲麟所感 所以作春秋也
기린麒麟봉황鳳凰 등 5왕자王者의 아름다운 상서祥瑞인데,注+: 을 4이라 하는데, 여기에 백호白虎를 더하여 5이라 한다. 지금 기린麒麟이 때가 아닌 쇠란衰亂한 세상에 나와서 그 응험應驗을 헛되이 하고 사람에게 잡혀 잘못 죽었으니,注+: 위에 밝은 임금이 없는데도 나왔으니 그 응험應驗이 헛된 것이고, 사람에게 잡혔으니, 그 죽을 곳을 잃은 것이다. 이것이 성인聖人께서 느낌이 일어 《춘추》를 짓게 되신 까닭이다.注+: 공자孔子께서 이전부터 《춘추》를 지으려는 뜻을 가진 데다가 또 기린이 잡힌 것에 느낌이 일어 《춘추》를 지으셨다는 말이다.
絶筆於獲麟之一句者 所感而起하니 固所以爲終也注+朱曰 孔子感麟 乃作春秋 非是文成而致麟也 旣因感麟而起 所以終於獲麟之一句也 此以上答 春秋止於獲麟之說
획린獲麟’이란 일구一句에서 붓을 놓은 것은 획린獲麟에 느낌이 일어 《춘추》의 저작著作을 시작하셨으니 ‘획린獲麟’으로 끝을 맺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라고 하였다.注+: 공자孔子가 기린이 잡힌 것에 느낌이 일어 《춘추》를 지은 것이지, 《춘추》의 글이 완성되자 기린이 이른 것은 아니다. 이미 기린麒麟이 잡힌 것에 느낌이 일어 《춘추》의 저작著作을 시작하셨으므로 ‘획린獲麟일구一句로 《춘추》를 끝냈다는 말이다. 이 이상은 《춘추》가 ‘획린獲麟’에서 끝난 이유에 대해 대답한 말이다.
曰 然則春秋 何始於魯隱公 答曰 周平王 東周之始王也 隱公 讓國之賢君也
혹자或者가 “그렇다면 《춘추》의 기록을 어째서 노은공魯隱公에서 시작하였는가?”라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주평왕周平王동주東周의 첫 이고, 은공隱公은 나라를 사양한 어진 임금이었다.
考乎其時則相接하고 言乎其位則列國이오 本乎其始則周公之祚胤也注+朱曰 隱公之初 當平王之末 是其時相接也 魯爵爲侯 其地則廣 是其位爲列國也 周公子伯禽 始封於魯 承周公之後者 是其福祚之遺嗣也
그 시기를 따져보면 평왕平王은공隱公에 서로 근접近接하였고, 그 지위地位로 말하면 열국列國이며, 그 시조始祖를 따져보면 주공周公의 후손이다.注+: 은공隱公초기初期평왕平王말기末期에 해당하니, 이것이 그 시기가 서로 근접한 것이고, 나라는 작위爵位후작侯爵이고 영토領土가 넓으니, 이것이 열국列國이 된 것이고,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비로소 나라에 함을 받아 주공周公의 뒤를 이었으니, 이것이 그 복록福祿후사後嗣에게 전해진 것이다.
若平王 能祈天永命하야 紹開中興하고 隱公 能弘宣祖業하야 光啓王室이면 則西周之美 可尋이오 文武之迹 不隊리라
가령 평왕이 하늘에 국명國命장구長久를 빌어 선정善政을 행하여 선왕先王의 뒤를 이어 중흥中興공업功業을 열고, 은공隱公이 조상의 공업功業을 크게 선양宣揚하여 나라 왕실王室광계光啓(先王의 공렬功烈을 빛내고 후손에게 평안平安을 물려줌)하였다면 서주西周 때의 미정美政을 다시 찾을 수 있고, 문왕文王무왕武王업적業迹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是故因其歷數注+朱曰 因其年月之歷數하야 附其行事하고 采周之舊하야 以會成王義하야 垂法將來注+朱曰 采周公之舊典禮經 以會合成就一王之大義니라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그 연월年月역수歷數에 따라注+: 그 연월일年月日역수歷數를 따름이다.행사行事부기附記하고, 주공周公의 옛 채취采取해 모아 왕자王者대의大義를 만들어 장래에 을 전한 것이다.注+: 주공周公구전예경舊典禮經(옛 전례典例대법大法)을 채취해 모아 왕자王者대의大義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所書之王 卽平王也 所用之歷 卽周正也 所稱之公 卽魯隱也 安在其黜周而王魯乎注+朱曰 書王正月 則非是黜周也 於魯書公 則非是王魯也
《춘추》에 기록한 은 바로 평왕平王이고, 사용한 은 바로 주정周正이며, 지칭한 은 바로 노은공魯隱公이니, 중니仲尼께서 나라를 내치고 나라를 으로 삼았다는 뜻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注+: ‘왕정월王正月’이라고 기록하였으니 나라를 내친 것이 아니고, 노군魯君을 ‘’이라고 기록하였으니 나라를 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子曰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ᄂ저하니 此其義也注+朱曰 言春秋之義 正欲興周 何嘗黜周也 此以上 答黜周王魯之說니라
공자孔子께서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이 동방東方나라의 부흥復興시킬 것이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孔子주도周道를 부흥시키려는 뜻이었다.注+: 《춘추》의 뜻은 나라의 부흥復興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으니, 언제 나라를 내친 적이 있었느냐는 말이다. 이 이상은 ‘출주왕로黜周王魯’의 에 대해 대답한 말이다.
若夫制作之文 所以章往考來니라
성인聖人께서 지으신 문사文辭로 말하면 이미 지난 일을 드러내 밝히고 앞으로의 일을 고찰考察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지난 일을 거울삼도록 한 것이다.
情見乎辭하니 言高則旨遠하고 辭約則義微 此理之常이오 非隱之也니라 聖人包周身之防注+朱曰 聖人防患必周 自知無患於身 方始作之하니
성인의 생각을 문사文辭에 드러냈으니, 말이 고상하면 뜻이 심원深遠해지고 문사文辭가 간략하면 뜻이 은미해지는 것은 필연의 이치여서 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니다.
旣作之後 方復隱諱以辟患 非所聞也니라
성인은 환난患難을 염려하여 몸을 철저히 보호하셨으니,注+: 성인은 환난患難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환난이 없을 줄을 안 뒤에 비로소 《춘추》를 저작하였다는 말이다. 《춘추》를 저작하신 뒤에 다시 숨겨서 환난을 피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注+朱曰 此答素王素臣之說이라하니 而云仲尼素王丘明素臣 又非通論也
자로子路문인門人가신家臣으로 삼으려 하자, 공자孔子께서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고 하셨으니,注+: 이는 소왕素王소신素臣에 대해 대답한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중니仲尼소왕素王이 되고 좌구명左丘明소신素臣이 되었다는 은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다.
以爲制作三年 文成致麟 旣已妖妄이오 又引經以至仲尼卒 亦又近誣니라
그리고 ‘저술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춘추》가 완성되자 기린麒麟이 이르렀다.’는 선유先儒의 말은 요망妖妄하기 그지없고, 또 경문經文을 ‘중니졸仲尼卒’에까지 늘인 것도 무망誣罔(거짓)에 가깝다.
據公羊컨대 經止獲麟하고 而左氏 小邾射 不在三叛之數注+朱曰 哀公十四年 書小邾射以句繹來奔 在西狩獲麟之後 若獲麟之後 猶是孔子所脩之經 則小邾射當與庶其黑肱牟夷 同列而爲四叛人矣 今左氏稱三叛人 而小邾射 不在其數 則引經以至孔丘卒者 其誣甚矣하니라
공양전公羊傳》에 의하면 경문經文이 ‘획린獲麟’에서 끝났고, 《좌전左傳》에도 소주역小邾射을 세 반인叛人에 넣지 않았다.注+: 애공哀公 14년 에 “소주역이구역래분小邾射以句繹來奔”을 “서수획린西狩獲麟” 뒤에 기록하였다. 만약 ‘획린獲麟’ 이후도 공자孔子께서 편수編修이라면 소주역小邾射을 당연히 주서기邾庶其흑굉黑肱(昭公 31년 )‧거모이莒牟夷(昭公 5년 ) 등과 같이 취급하여 반인叛人을 넷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좌전左傳》에 세 반인叛人을 칭하면서(昭公 31년 ) 소주역小邾射을 3에 넣지 않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을 ‘공구졸孔丘卒’까지 늘인 것은 매우 심한 거짓이다.
故余以爲感麟而作이라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획린獲麟에 느낌이 일어 《춘추》의 저술를 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作起獲麟이면 則文止於所起 爲得其實이라
저술著述획린獲麟에서 시작하였다면 시작한 일로 문사文辭를 마치는 것이 진실眞實에 맞는다.
至於反袂拭面하며 稱吾道窮 亦無取焉注+朱曰 此又貶駁公羊之說 公羊傳稱孔子聞獲麟 反袂拭面 涕霑袍曰 吾道窮矣 聖人樂天知命 豈復下霑袍之泣 悲吾道之窮矣이라
그리고 ‘기린麒麟이 잡힌 것을 보고 공자가 소매를 뒤집어 얼굴을 닦으며 나의 해지겠구나.’라고 하였다는 도 나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注+: 이는 《공양전公羊傳》의 반박反駁한 것이다. 《공양전公羊傳》에는 “공자孔子기린麒麟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소매를 뒤집어 얼굴을 닦고 옷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나의 해지겠구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성인聖人낙천지명樂天知命(天道에 순응順應하여 자기의 분수分數를 편히 여김)하니 어찌 옷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우리 해질 것을 슬퍼하였겠는가.
역주
역주1 小史‧‧‧‧‧‧四方 : 《周禮》 〈春官小史〉에 “小史는 邦國의 기록을 맡는다.”라고 하였고, 內史에 “사방 諸侯가 보내온 文書를 內史가 聲讀하여 王께 告한다.”라고 하였고, 外史에 “外史는 書名을 사방에 전달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杜氏序에 말한 “掌邦國四方之事”는 小史에서 “掌邦國”을 인용하고, 內史에서 “四方之事”를 인용하여, 兩史의 글을 合成하여 만든 말이다.
역주2 策‧‧‧‧‧‧是也 : 策은 여러 개의 簡(대쪽)을 엮어 만든 冊이고, 簡은 하나의 대쪽이고, 牘은 木版이다. 한 줄로 기록이 가능한 사건은 簡에 기록하고, 몇 줄로 기록해야 할 사건은 牘에 기록하고, 기록할 분량이 많아 牘으로는 다 기록할 수 없는 사건은 策에 기록한다.
역주3 楚謂之檮杌‧‧‧‧‧‧一也 : 《孟子》 〈離婁下〉에는 “晉之乘楚之檮杌魯之春秋一也”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백성에게 토지를 주고서 租稅와 徭役을 부담하도록 하여, 百井(8백 夫)이 兵車 1乘과 甲士 3인, 卒 72인, 말 4 필, 소 12 頭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므로 兵車와 乘馬(駟馬)에서 뜻을 취하여 史書의 이름을 ‘乘’이라 한 것이다. 檮杌은 사나운 짐승으로 惡人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쓰인다. 이를 史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惡行을 기록하여 경계를 보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역주4 傳或先經以始事 : 隱公元年에 “不書卽位”에 앞서 仲子가 魯나라로 시집온 것을 기록하고, 隱公 4년 經의 “衛州吁弑其君完”에 앞서 隱公 3년 傳에 衛莊公이 齊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해 온 것을 기록한 것 등이 바로 經文에 앞서 傳을 붙여 뒤에 나오는 경문의 배경을 설명한 것에 해당한다.
역주5 後經以終義 : 經文 뒤에 傳을 붙인 것은 昭公 22년에 있었던 王室의 난리를 定公 8년 傳에서야 비로소 劉子가 盂邑을 討伐하여 王室을 안정시켰다고 기록하고, 哀公 2년에 있었던 “晉納蒯聵”를 哀公 15년 傳에 비로소 “蒯聵自戚入衛”라고 기록한 것 등이 뒤에 나오는 經文에 傳을 붙여 앞 경문의 뜻을 終結한 것에 해당한다.
역주6 或依經之言 以辯此經之理 : 經文에 의거해 事理를 변론한 것은 그 경문에 어떤 일이 기록되었으면 그 일의 緣由를 변론한 것인데, 隱公元年에 卽位를 기록하지 않고, 邾國과 友好하고자 하여 蔑에서 結盟하였다고 한 傳의 기록이 바로 그 경문에 의거하여 그 뜻을 밝힌 것에 해당한다.
역주7 或錯經爲文 以合此經之異 : 經文을 섞어 뜻은 같은데 書法이 다른 것을 모은 것은, 사건은 同一한데 文辭의 표현이 다른 곳과 문사는 동일한데 사건의 내용이 다른 것을 한데 모은 것으로 地名이 둘일 경우 經과 傳에 각기 다른 지명을 기록하고, 經에는 ‘侵’이라 하였는데 傳에는 ‘伐’이라 하고, 經에는 ‘伐’이라 하였는데 傳에는 ‘侵’이라 한 유가 이에 해당한다.
역주8 其例之所重 : 《左傳疏》에는 重을 중복의 뜻으로 풀었는데, 朱氏는 重要의 뜻으로 보았다. 譯者는 《疏》의 풀이에 따라 중복으로 번역하였다.
역주9 春秋多有‧‧‧‧‧‧要領也 : 桓公元年의 “秋大水”에 대해 傳에 이미 “凡平原出水爲大水”라고 기록하여 그 例를 드러냈기 때문에 莊公 7년의 “秋大水”에는 다시 중복해 例를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左氏가 생략하고 傳을 달지 않은 것이다.
역주10 身爲國史‧‧‧‧‧‧其旨遠 : 《左傳疏》에는 “몸소 많은 書籍을 보고서 取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널리 기록하고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나 직접 經을 해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이 婉曲하고, 聖人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그 뜻이 深遠하다.”라고 하였다.
역주11 優而柔之‧‧‧‧‧‧使自趨之 : 《左傳疏》에는 “優와 柔는 모두 ‘安’의 訓詁로 寬舒(緊張이 풀림)의 뜻이고, 饜과 飫는 ‘飽’의 訓詁로 饒裕(充足)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2 : 대본에는 ‘盟’으로 되어 있으나 ‘名’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13 其微顯闡幽 裁成義類者 : 《疏》에는 ‘其微顯闡幽’의 ‘其’를 經을 가리킨 指示代名詞로 보았으나, 上文의 “其發凡言例”의 ‘其’가 《左傳》의 지시대명사로 쓰였으니, 여기의 ‘其’도 傳을 지시한 대명사로 보는 것이 옳다. ‘微顯闡幽’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으나 大別하면 “經에 드러낸 일은 간략하게 기록해 숨기고, 經에 숨긴 일은 드러내 밝혔다.”는 《孔疏》‧《朱注》의 說과, “經에 드러낸 일은 細微하게 기록하고, 숨긴 일은 드러내 밝혔다.”는 劉炫의 說 등이 있다. 譯者는 後說을 취하여 번역하였다. 《孔疏》에 의하면 僖公 33년에 秦穆公이 殽에서의 敗戰을 자신의 허물로 돌려 후회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 文公元年經에 晉‧宋‧陳‧鄭 등 네 나라 大夫를 貶下하여 ‘人’이라 칭한 類가 善事를 드러낸 것이고, 僖公 14년에 “諸侯城緣陵”에 대해 ‘諸侯’라고 칭하여 罪를 드러내지 않은 것과, 襄公 27년에 ‘豹가 違命’한 일에 대해 ‘叔孫’이란 氏를 제거한 類가 惡事를 드러낸 것인데, 이것이 모두 微顯에 속하고, 晉趙盾(宣公 2년)‧鄭歸生(宣公 4년)‧許止(昭公 19년)가 모두 직접 임금을 弑害한 것이 아니어서 그 罪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孔子께서 經을 修正하면서 ‘弑’字를 써서 그 罪를 드러낸 것이 ‘闡幽’에 속한다고 하였다. 劉炫의 說에 의하면 僖公 28년의 “天王狩于河陽”에 대해 經文만으로 보면 天王이 사냥 나온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天王이 무엇 때문에 멀리 畿外까지 나왔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그 傳에 “晉侯가 天王을 불렀기 때문이다.”고 상세하게 기록하여 晉侯의 罪를 드러낸 것이 微顯이고, 隱公元年의 “鄭伯克段于鄢”에 대해 經文만으로 보면 段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克’이라 칭하였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傳에 “武姜이 段을 寵愛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상세하게 기록하여 ‘克’이라고 칭한 배경을 밝힌 것이 ‘闡幽’이라고 하였다.
역주14 然亦有史所不書 卽以爲義者 : 宣公 10년 經의 “崔氏出奔衛”에 대해 傳에 “崔氏라고 기록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니기 때문에 齊나라가 魯나라에 ‘崔’라는 族으로 通告하고 이름으로 통고하지 않아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름으로 통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舊史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孔子가 經을 改修하면서 그 기록을 그대로 따르고 增減하지 않은 이런 類가 구사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孔子가 義로 여긴 것에 속한다.
역주15 此蓋春秋新意 : 孔子가 《춘추》를 編修하면서 舊史의 誤謬를 삭제해 是正한 것과 舊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義에 맞는다고 여긴 이 두 가지를 新例라 한다.
역주16 言左氏‧‧‧‧‧‧其意也 : 《會箋》에서는 “《춘추》에는 夫子의 特筆도 있고, 史氏의 舊例도 있고, 당시 史官의 異例도 있는데, 凡例는 모두 周公의 禮經이고, 變例는 모두 聖人의 新意라고 한 杜氏의 말은 옳지 않다. 더구나 ‘凡例’라는 말이 원래 杜氏 개인의 말에서 나온 것임에랴.”라 하였다. 《춘추》의 例에 어찌 凡과 不凡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杜氏의 說을 反駁하였다.
역주17 其經無義例‧‧‧‧‧‧非例也 : 말할 만한 善惡이 없는 사건에 대해 그 결과만을 말하고 褒貶의 例를 適用하지 않는 것을 非例라 한다.
역주18 桓公 : 대본에는 ‘桓公’이 ‘威公’으로 되어 있는 것을 經文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19 成章 : 《孔疏》와 《朱注》에는 成章을 篇章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順理成章(도리에 順應하여 법칙을 이룸)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20 屈曲回互‧‧‧‧‧‧所謂成章也 : 左氏가 文辭를 완곡하게 기술하여 孔子가 전한 春秋大義의 敎訓을 이어받아 大順의 도리를 드러냈다는 말이다.
역주21 諱避 : 諱避는 사실을 숨기고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僖公 16년에 僖公이 澮에서 諸侯와 會合하고서 歸國하기 전에 魯나라 군대가 項國을 占領한 일로 齊人에 의해 僖公이 抑留되었다가 17년 9월에서야 비로소 釋放되어 돌아왔는데, 經에 억류된 恥辱을 諱하여 기록하지 않고, “公이 會合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한 類이다.
역주22 : 대본에는 ‘桓公’이 ‘威公’으로 되어 있는 것을 經文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23 朝宿之邑 : 諸侯가 來朝하였을 때 宿泊하도록 서울 近郊에 있는 邑을 下賜한 采地를 朝宿邑이라 한다. 魯나라는 周公의 공로로 許田을 朝宿邑으로 받았다.
역주24 湯沐之邑 : 그 邑에서 徵收하는 구실로 沐浴費用 등에 충당하도록 天子가 諸侯에게 下賜한 采地를 湯沐邑이라 한다. 鄭나라는 武公의 功으로 祊田을 湯沐邑으로 받았다.
역주25 二十 : 대본에는 ‘二十’이 ‘三十’으로 되어 있는 것을 經文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26 膚引 : 膚引은 그 뜻을 깊이 모르면서 남의 說을 함부로 인용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27 : 저본에는 ‘名’으로 되어 있으나 ‘各’의 誤字인 듯 하므로 바로잡았다.
역주28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 이 말은 《論語子罕》篇에 보인다.
역주29 鳳鳥不至‧‧‧‧‧‧吾已矣夫 : 이 말은 《論語》 〈子罕〉篇에 보인다.
역주30 太皥時鳳鳥至 故以鳥名官 : 太皥의 太는 少의 誤字인 듯하다. 少皥가 즉위하였을 때에 마침 鳳鳥가 이르렀기 때문에 各部의 長官의 名稱을 모두 鳥名을 사용해 지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司徒를 祝鳩, 司馬를 鴡鳩, 司空을 鳲鳩, 司寇를 爽鳩라고 한 類이다. 《春秋左氏傳昭公十七年傳》
역주31 河圖 : 伏羲 때에 黃河에서 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周易》 八卦의 바탕이 된 55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역주32 子路欲使門人爲臣 孔子以爲欺天 : 이 말은 《論語》 〈子罕〉篇에 보인다.
역주33 先儒 : 先儒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상고할 수 없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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