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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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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늘 弔之호대 한대
弟子曰
曰然하다
然則弔焉호대
하다
向吾入而弔焉한대 有老者哭之호대 如哭其子하며 少者哭之호대 如哭其母하니
이라하더니라
이면 哀樂 不能入也하노니
古者 謂是 라하더니라


노담老聃이 죽었는데 진일秦失이 조문하러 가서 세 번 호곡하고는 나와 버렸다.
노담의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친구분이 아니십니까?”
진일이 대답했다. “그렇다.”
제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조문을 이렇게 해도 됩니까?”
진일이 말했다.
“그렇다.
처음에 나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다.
조금 전에 내가 들어가 조문했는데, 늙은이는 마치 자기 자식을 잃은 듯 울며, 어린 아이들은 마치 자기 어미를 잃은 듯 울었다.
저 노담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데에는 반드시 〈말로는〉 위로하는 말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위로하는 말을 하게 하고, 〈말로는〉 곡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곡하게 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천리天理를 저버리고 인정에 어긋나 하늘로부터 받은 바를 잃어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이것을 일러 천리를 저버리는 죄라고 했다.
〈그가〉 때마침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였기 때문이고, 때마침 세상을 떠난 것은 갈 때였기 때문이니,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편안히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 따위의 감정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옛날에는 이것을 일러 ‘꼭지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가리키는 뜻은 땔나무가 다 타버려도 불은 다른 나무로 옮겨가기 때문에 결코 꺼질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老聃 : 老子. 노자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司馬遷이 《史記》 〈老莊申韓列傳〉에서 기록한 것처럼 李耳라는 주장, 老聃이라는 주장, 老萊子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장자》의 경우 〈天運〉편에서 ‘老聃曰’과 ‘老子曰’을 혼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의 老聃이 곧 老子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2 秦失(일) : 老子의 벗. 成玄英은 “姓은 秦이고 이름은 失인데, 道를 간직한 선비로 어느 곳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姓秦 名失 懷道之士 不知何許人也].”고 했다. 또 馬敍倫은 失은 佚로 되어 있는 텍스트도 있다는 《釋文》의 注를 따르면서 失은 佚의 初文(처음 글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역주3 三號而出 : 세 번 호곡하고 나와 버림. 형식적으로 조문하고 나와 버렸다는 뜻.
역주4 非夫子之友邪 : 선생님의 친구분이 아니십니까? 여기서 夫子를 老聃으로 보느냐, 秦失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당신은 우리 선생님의 친구분이 아니십니까?”는 夫子를 老聃으로 본 것이고, “그 분(老聃)은 선생의 친구가 아니십니까?”는 夫子를 秦失로 본 것이다. 본문의 번역은 前者를 따랐다.
역주5 然則弔焉 若此可乎 : 그렇다면 조문을 이렇게 해도 됩니까? 진일이 형식적으로 세 번 호곡하고 나와 버린 것에 대한 질의.
역주6 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 처음에 나는 〈노담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님. 其人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林希逸, 福永光司, 池田知久, 安東林 등은 그럴 만한 큰 인물, 곧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본문의 해석은 이들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文如海本에는 ‘至人’으로 되어 있다(郭慶藩)는 견해를 참고하면 이들의 주장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곽상의 경우는 其人이 노자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곡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金谷治는 앞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면서 老聃의 인물을 貶下해서 哭泣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生死 자체를 초월한 秦失의 입장과 맞지 않는다. 또 《太平御覽》의 引用에서는 今非也가 ‘今非人也’로 되어 있으므로 “처음에는 사람으로 교제하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異說은 安東林의 정리처럼 이 章에서 老聃을 훌륭한 인물로 결론짓느냐 아니냐의 관점으로 귀결된다. 其人을 老聃으로 볼 경우, “노담이 ‘훌륭한 인물’인 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아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곽상처럼 其人을 ‘모여든 衆人’으로 볼 경우, 衆人들이 노담을 흠모하여 모여들어 곡하였지만 그 슬퍼함은 속된 인정에 의한 것일 뿐, 노담은 결코 죽음 따위를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에 따라 生死를 초월한 심경에 있었다고 하여 노담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또 方勇‧陸永品은 이 구절을 노담을 폄하하는 내용으로 보면 장자가 〈天下〉편에서 老聃을 博大眞人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金谷治와 같이 “처음에는 노자를 세속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아니다.”는 식으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장자의 경우 공자를 평가할 때도 어떤 경우에는 높이고 어떤 경우에는 낮추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이 구절이 노담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역주7 彼其所以會之 : 저 노담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데에는. 이 부분 역시 彼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먼저 彼를 老聃으로 보고 之를 ‘조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보아, ‘노담이 조문객들을 모이게 한 데에는’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張黙生, 福永光司, 安東林 등이다. 한편 成玄英이 彼를 衆人으로 주석한 이래 ‘조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보아, ‘저들이 노담의 빈소에 모인 데에는’으로 보는 이들이 王叔岷, 曹礎基, 池田知久 등이다. 앞의 견해를 따르면, 조문객들이 모여 위로의 말이나 곡을 하도록 은연중에 시킨 노담이 遁天倍情한 것이 되므로 이 구절은 노담을 비판하는 내용이 된다. 번역은 일단 이것을 따랐다. 그러나 뒤의 견해를 따르면, “저 모인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위로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위로하는 말을 하고, 곡하고 싶지 않은데도 곡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遁天倍情’하는 행위이다.”라고 번역하여, 조문객들이 노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遁天倍情’에 해당하는 행위가 된다. 앞의 경우 〈列禦寇〉편 첫장에서 列禦寇와 伯昏暓人의 문답 가운데, 열자의 집에 사람들이 벗어 놓은 신이 문밖에까지 가득할 정도로 모여든 것을 백혼무인이 꾸짖는 대목과 같은 맥락으로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조문 온 자들이〉 위로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위로하는 말을 하게 하고 곡하고 싶지 않은데도 곡하게 함”으로 번역함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또 會를 모이다로 보지 않고 感會로 보는 견해(林希逸, 陳鼓應)가 있지만 채택하지 않는다.
역주8 必有不蘄(기)言而言 不蘄哭而哭者 : 반드시 〈평소에 말로는〉 위로하는 말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위로하는 말을 하게 하고, 〈말로는〉 곡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곡하게 함이 있었을 것임. 앞의 ‘必有……者’는 ‘彼其所以會之’와 연결되어 ‘저 노담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데에는 반드시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뜻. 이 또한 彼를 노담으로 보느냐 조문객들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조문객으로 볼 경우의 해석은 앞의 주석 참조). 蘄는 바라다의 뜻.
역주9 是遯(遁)天倍情 忘其所受 : 이것은 천리를 저버리고 인정에 어긋나 하늘로부터 받은 바를 잃어버린 것임. 遁은 달아나다, 피하다의 뜻. 遯으로 된 본도 있다. 倍는 背叛. 天은 天理(自然의 道). 情은 人情. 忘其所受는 ‘天으로부터 받은 자기 生命의 本質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는 것’. 朴世堂은 “노자가 평소에 반드시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것이 말하지 않는 가운데 나타나 곡하는 사람들이 곡하기를 기약하지 않고도 저절로 곡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천도를 어기고 성정의 올바름을 저버린 것이니 죄인이 됨을 면치 못한다[老子平日 必有惜生畏死之心 形於不言 使哭者不期於哭而自哭 此其反天道之常 而倍性情之眞 未免爲戮人也].”고 풀이했다.
역주10 古者謂之遁天之刑 : 옛날에는 이것을 일러 천리를 저버리는 죄라고 함. 刑은 罪. 遁天之刑은 ‘하늘을 배반한 죄’, ‘진리 도피의 죄’로 〈列禦寇〉편에도 보인다(王先謙, 王叔岷).
역주11 適來夫子時也 適去夫子順也 : 때마침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였기 때문이고, 때마침 세상을 떠난 것은 갈 때였기 때문임. 夫子는 모두 노담을 지칭한다. 適來는 때마침 올 때[適來之時], 適去는 때마침 갈 순서[適去之順]. 결국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의미한다.
역주12 安時而處順 :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편안히 따름. 곧 生이라 기뻐하지 않고 死라고 슬퍼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역주13 帝之縣解 : 꼭지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임. 縣解는 倒懸(거꾸로 매달림)에서 풀려난다는 뜻. 이 구절의 해석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帝를 上帝, 또는 天으로 보고 “상제, 또는 하늘이 인류에게 내린 거꾸로 매어다는 형벌, 곧 天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帝자의 字義를 ‘꽃과 꼭지[花蒂 華蔕]의 상형’으로 보는 근거가 있고(宋 鄭樵, 淸 吳大澂), 꽃이 꼭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양[倒縣]이므로, 이 구절을 ‘꽃이 꼭지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生死는 마치 초목의 생성‧영락처럼 자연스러운 일임을 비유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경우 이처럼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인간의 삶을 비유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人間世〉편의 迷陽도 거짓 미친 척함이나 움직이지 않음 따위의 추상적인 의미로 보는 것보다는 ‘가시풀’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縣解는 《孟子》 〈公孫丑 上〉에 ‘解倒懸’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에는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倒懸]에서 풀려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14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 〈이 말이〉 가리키는 뜻은 땔나무가 다 타 버려도 불은 다른 사물로 옮겨가기 때문에 결코 꺼질 줄을 모른다는 것임. 異說이 분분한 대목이다. 곽상의 경우는 指를 손가락으로 보고, 爲薪을 땔나무를 앞으로 밀어낸다[前薪]는 뜻으로 보아 “다 타 버리려고 하는 땔나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밀어나가면, 불은 새로운 땔나무에 옮겨 붙어서 꺼지는 일이 없다.”고 풀이하여, 적당한 양생의 도를 터득하기만 하면 사람의 생명도 다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는 郭象과 成玄英 이래의 전통적인 해석이며, 이러한 해석에 입각하여 장자가 靈魂不滅이나 宗敎的 永生思想을 주장한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장자의 경우 不滅은 변화의 흐름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지 生滅하는 개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견해이다. 〈大宗師〉편에 이와 같은 莊子 死生觀의 眞面目이 보인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만물의 유전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짐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새 학설이 있다. “다 타고 나면 없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 나무에〉 막상 불이 옮겨 붙어 올 때에는 불이 언젠가는 다할 것이라는 達觀을 할 줄 모른다.”고 하여 老聃이 이러한 達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을 비판한 내용으로 보는 해석(池田知久)이다. 이 해석의 경우에는 指는 손가락이 아니고 ‘지적한다’, ‘지적해서 안다’는 뜻이 되어 ‘指窮於爲薪’은 “땔나무 지피는 것에서[於爲薪] 다함[盡]을 지적해 알고 있으면서도”가 되고, ‘火傳也’는 “불이 다른 땔나무에 옮겨 전해졌을 때에”의 뜻이 되고 ‘不知其盡也’는 “불이 새 땔나무에 옮겨 붙어 활활 타는 것만 보고 생명이란 언젠가는 다[盡]하여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다는 窮, 즉 다함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生死에 哀樂의 감정이 움직인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취하지 않았으나 특이한 新說로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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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4장(1)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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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4장(2) 641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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