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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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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1章
性者 生之質也


11章
이 공경하는 것이고, 생명이란 덕이 빛나는 모습이다.
본성이란 생명의 바탕이다.
의 활동을 행위라 하고, 행위가 거짓되면 그것을 상실이라고 일컫는다.
안다는 것은 〈이〉 외물과 접촉하는 것이며 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로써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은 마치 곁눈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뒤에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하고 움직임에 자연의 나 아님이 없는 것을 일러 다스려진 것이라고 하니 이름은 상반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道者 德之欽也 : 道란 德이 공경하는 대상임. 羅勉道는 “欽이란 공경함이니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 있다. 도가 있은 뒤에 덕이 있게 되는지라 도란 덕이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欽者 敬也 有收斂之義 道而後德 故云道者德之欽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 生者 德之光也 : 생명이란 덕이 빛나는 모습임. 呂惠卿은 “생명이 있지 않으면 덕을 볼 수 없다. 그 때문에 생명이란 덕이 빛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不生無以見德 故生者德之光].”라고 풀이했다.
역주3 性之動謂之爲 爲之僞謂之失 : 性의 활동을 행위라 하고, 행위가 거짓되면 그것을 상실이라고 일컬음. 失은 바탕, 곧 性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타고난 본성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거짓이라고 지적한 말이다.
역주4 知者 接也 知者 謨也 : 안다는 것은 〈性이〉 외물과 접촉하는 것이며 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임. 두 개의 知자에 대해 하나는 감성적인 知이고 또 하나는 이성적 知라는 주장을 비롯하여 이설이 분분하지만 모두 후대의 관념으로 덧칠한 것일 뿐, 본문 그대로 앎의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역주5 知者之所不知 猶睨也 : 이러한 知로써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은 마치 곁눈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임. 猶睨也는 곁눈질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 말이다. 睨를 視로 보아 “눈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金谷治) 睨자의 字義를 따져볼 때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또 睨를 倪로 풀이하여 “知로서는 알 수 없는 대상, 곧 지적 인식의 범위 밖의 道와 같은 것에 대하여는 嬰兒와 같이 멍한 태도를 취하면 된다.”로 해석하기도 하나(福永光司) 역시 무리이다.
역주6 動以不得已之謂德 : 어쩔 수 없는 뒤에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함. 스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된 뒤에야 마지못해 움직이기 때문에 비난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일이 임박한 뒤에 움직이고 화답만 하고 창도하지 않으며 어쩔 수 없게 된 뒤에 쓰니 성대한 덕이라고 일컬을 만하다[夫迫而後動 和而不唱 不得已而用之 可謂盛德也].”라고 풀이했다.
역주7 動無非我之謂治 : 움직임에 자연의 나 아님이 없는 것을 일러 다스려진 것이라고 함. 모든 행동이 본성을 어기지 않기 때문에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본성을 따라 움직여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본뜨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이치에 부합된다. 그 때문에 어지러워지지 않는다[率性而動 不捨我效物 合於正理 故不亂].”라고 풀이했다.
역주8 名相反而實相順也 : 이름은 상반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일치함. 겉으로는 피아나 시비의 구분이 있는 것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서로 부합된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저와 나 옳고 그름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상반되지만 저와 나, 옳고 그름의 실제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서로 일치한다[有彼我是非之名 故名相反 無彼我是非之實 故實相順也].”라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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