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3)

장자(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하고 오대 而不知其然하나니 性也
어늘 人則從而命之也하나니라
生而美者 人與之鑑하나니 不告則不知其美於人也하리라
若知之하고 若不知之하며 若聞之 若不聞之라도 其可喜也 終無已 人之好之 亦無已하리니 性也
聖人之愛人也 與之名하나니 不告 則不知其愛人也하리라
若知之 若不知之하며 若聞之 若不聞之라도 其愛人也終無已 人之安之 亦無已하리니 性也
이라 이니 其以爲事也 若之何리오
夫聖人 未始有天하며 未始有人하며 未始有始하며 未始有物하니 與世偕行而不替하여 所行之備而不洫하나니 其合之也 若之何리오
하야 爲之傅之하야 하야 得其隨成하고이어늘 하니


성인聖人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일에 통달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一體]을 두루 다 구명究明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줄 알지 못하니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명으로 돌아가 고요하게 있거나 성대하게 움직일 때 자연自然을 스승으로 삼아 그것을 따를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뒤따라가 〈성인聖人이다 뭐다 하고〉 이름 붙인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하는 일이 늘 어느 때고 멈추는 일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예를 들어〉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사람은 남이 그에게 거울을 주어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어보게 할 것이니 〈만일 남이 그의 아름다움을〉 일러주지 않으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혹 그것을 알거나 혹 그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혹 그것을 듣거나 듣지 못했건 간에 자기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이 그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가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니 만일 사람들이 그에게 일러주지 않으면 자기가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인聖人이 혹 그것을 알거나 혹 그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혹 그것을 듣거나 듣지 못했건 간에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끝내 그만둘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서 유랑하는 사람은〉 고국의 옛 국도國都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크게 기쁨이 일어날 것이니 비록 언덕이나 초목에 열에 아홉이 가려 조금만 보이더라도 오히려 크게 기쁨이 일어날 것인데 하물며 〈 안으로 들어가〉 옛날에 보던 것을 보고 옛날에 듣던 것을 듣는 경우이겠는가.
열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여러 사람 사이에 매달아놓은 것처럼 분명할 것이다.
옛날 제왕 염상씨冉相氏는 고리 가운데를 얻어서 만물의 생성 변화에 그대로 맡겨 사물과 더불어 끝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기일期日도 없고 때도 없이 함께 하였으니 매일매일 사물事物과 더불어 변화해 가는 자는 실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니 어찌 시험 삼아 이러한 경지에 몸을 두지 않을 것인가.
무릇 억지로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그것을 따라가려 하면 결국 자연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지라 외계의 사물과 함께 모두 희생되고 말 것이니 이런 생각으로 일을 하려 한다면 어찌 할 것인가.
무릇 성인聖人은 본시 자연(天)도 없고 인위도 없으며 시작도 없으며 사물의 존재도 따르지 않았으니 세상과 함께 추이推移하면서 포기하지 않아서 행동이 완비되어 한계가 없으니 그에게 부합하려 하면 어찌 할 것인가.
옛날 탕임금이 사어司御이자 문윤門尹이었던 등항登恒을 등용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아 따르기는 했지만 그에게 속박되지는 아니하여 만물의 생성 변화에 맡길 수 있었고 명칭을 부여하는 일을 맡아서 그 이름으로 인해 〈없는 게 오히려 나을〉 군더더기의 방법이 생겨나서 결국 이름과 방법 두 가지가 나타나게 되었다.
중니仲尼도 그것을 극진히 생각하여 남의 스승 노릇을 했다.
용성씨容成氏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하루를 제하면 일 년은 성립되지 않고 내면의 나(자아)가 없으면 외면의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주
역주1 聖人達綢繆 : 聖人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일에 통달함. 현상세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복잡하게 서로 인과로 연결되어 있는데 성인은 그런 복잡한 현상세계의 일에 통달했다는 뜻이다. 綢繆는 이리저리 얽혀 있는 모양.
역주2 周盡一體矣 : 존재하는 모든 것[一體]을 두루 다 究明함. 周盡은 모두 통달함. 一體는 일체의 사물,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一體를 만물과 일체가 된다는 뜻으로 풀이한 견해도 있다(方勇‧陸永品).
역주3 復命搖作 而以天爲師 : 천명으로 돌아가 고요하게 있거나 성대하게 움직일 때 自然을 스승으로 삼음. 움직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자연인 天을 스승으로 삼아 따른다는 뜻이다. 林疑獨은 “復命은 고요히 머묾이고 搖作은 움직임인데 모두 天을 스승으로 삼음이다[復命者靜 搖作者動 皆以天爲師也].”라고 풀이했고, 宣穎은 “復命은 고요히 머묾이고 搖作은 움직임이다. 성인은 動靜을 모두 天에 의거한다[復命靜也 搖作動也 聖人動靜 皆依乎天].”라고 풀이했다.
역주4 憂乎知而所行恒無幾時其有止也 : 지혜가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하는 일이 늘 어느 때고 멈추는 일이 없음. 褚伯秀는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할까 염려하여 행동이 항상 어느 때고 멈추는 일이 없다[世人乃憂乎知之不足 而所行恒無幾時其有止也].”라고 풀이했다.
역주5 舊國舊都 望之暢然 : 〈고향을 떠나서 유랑하는 사람은〉 고국의 옛 國都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크게 기쁨이 일어날 것임. 暢然은 크게 기뻐하는 모양. 陸德明은 暢然을 “기뻐하는 모양이다[喜悅貌].”라고 풀이했다.
역주6 雖使丘陵草木之緡 入之者十九 : 비록 언덕이나 초목에 열에 아홉이 가려 조금만 보이더라도. 緡은 가려짐. 郭象은 ‘合’으로 司馬彪는 ‘盛’으로 풀이했는데(陸德明), 兪樾은 이 견해를 종합하여 ‘掩蔽’의 뜻으로 보았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역주7 況見見聞聞者也 : 하물며 〈城 안으로 들어가〉 옛날에 보던 것을 보고 옛날에 듣던 것을 듣는 경우이겠는가. 見見聞聞은 옛날에 보던 것을 직접 보고 옛날에 듣던 것을 직접 듣는다는 뜻이다. 劉鳳苞는 “하물며 국도 한가운데에서 일찍이 보던 것을 직접 보고 일찍이 듣던 것을 직접 듣는 경우이겠는가. 본성 전체를 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況見所嘗見 聞所嘗聞於國中者乎 喩見性之全體].”라고 풀이했다.
역주8 以十仞之臺 縣衆閒者也 : 열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여러 사람 사이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분명할 것임. 范耕硏은 “본성의 밝음은 마치 높은 누대를 여러 사람 사이에 매달아 놓아서 함께 보고 함께 듣지 않음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喩本性之明 猶高臺縣衆間 無不共見共聞].”라고 풀이했다. 閒자가 閑으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
역주9 冉相氏 : 고대의 제왕. 郭象은 “옛날의 성왕이다[古之聖王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삼황 이전 시대에 무위했던 황제이다[三皇以前無爲皇帝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0 得其環中 以隨成 : 고리 가운데를 얻어서 만물의 생성 변화에 그대로 맡김. 環中은 〈齊物論〉편에 “지도리가 비로소 고리 가운데의 효용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것이다[樞始得其環中].”라고 한 표현을 빌어 도를 비유한 것이다. 隨成의 成은 만물의 생성 변화.
역주11 與物 無終無始 無幾無時 : 사물과 더불어 끝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期日도 없고 때도 없이 함께 함. 어느 때고 사물과 함께 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뜻이다. 郭象은 “홀연히 사물과 함께 간다[忽然與之俱往].”라고 풀이했다.
역주12 闔嘗舍之 : 어찌 시험 삼아 이러한 경지에 몸을 두지 않을 것인가. 闔은 何不로 盍과 같다. 成玄英은 闔을 何, 曷로 풀이했고, 馬叙倫은 曷의 假借라고 주장했지만 郭象이 何不로 풀이한 것이 옳다. 舍는 머물다는 뜻. 成玄英은 舍離로 풀이했지만 闔을 何不로 풀이하지 않고 何로 풀이한 데 따른 오류이다.
역주13 師天而不得師天 : 억지로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그것을 따라가려 하면 결국 자연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게 됨. 郭象은 “오직 스승으로 섬김이 없어야만 비로소 天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唯無所師 乃得師天].”라고 풀이했다.
역주14 與物皆殉 : 사물과 함께 모두 희생되고 말 것임. 殉은 따라가서 희생된다는 뜻. 成玄英은 “殉이란 쫓아감이니 구함이다[殉者 逐也 求也].”라고 풀이했고, 王敔는 “사물과 사생을 함께 함이다[與物同其死生].”라고 풀이했다. 林希逸은 ‘順’으로 풀이했는데 殉을 긍정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주15 湯得其司御門尹登恒 : 탕임금이 司御이자 門尹이었던 登恒을 등용함. 司御와 門尹은 관직의 명칭. 登恒은 도를 아는 사람.
역주16 從師而不囿 : 자연을 따르고 자연을 스승으로 삼되 속박되지는 아니함.
역주17 之名嬴法 : 그 이름으로 인해 〈없는 게 오히려 나을〉 군더더기의 방법이 생겨남. 嬴은 남아도는 것. 林希逸은 剩으로 풀이했다.
역주18 得其兩見 : 이름과 방법 두 가지가 나타나게 됨. 兩은 名과 法(陳壽昌).
역주19 仲尼之盡慮 爲之傅之 : 仲尼도 그것을 극진히 생각하여 남의 스승 노릇을 함. 공자 또한 이름과 방법이라는 두 가지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뜻이다.
역주20 容成氏 : 인명. 成玄英은 “容成은 옛날의 성왕이다[容成 古之聖王也].”라고만 풀이했고, 陸德明은 “容成은 노자의 스승이다[容成 老子師也].”라고 풀이했는데 어디에 근거한 주장인지 알 수 없고, 兪樾, 王先謙 등이 황제 때 역법을 만든 인물이라고 풀이한 것이 내용상 적절하다.
역주21 除日無歲 無內無外 : 하루하루를 제하면 일 년은 성립되지 않고 내면의 나(자아)가 없으면 외면의 만물은 존재하지 않음. 林雲銘은 “한 해가 해가 될 수 있는 까닭은 360일을 쌓아서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만약 하루를 제거해 버린다면 해가 없을 것이다[歲之所以爲歲者 而三百六十日積而名之 若除去日 則無歲矣].”라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