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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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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댄 是未明天地之理 萬物之情者也
이라 其不可行 明矣어늘
河伯曰
然則我何爲乎 何不爲乎
北海若曰
하리라
何少何多리오
無一而行이어다
하리라
道無終始어니
物有死生이라 하며
時不可止 消息盈虛 하니 是所以語
하나니 何爲乎 何不爲乎리오
河伯曰
北海若曰
河伯曰
何謂天이며 何謂人
北海若曰


대들보와 마룻대 같은 큰 나무로는 성벽城壁을 쳐부술 수는 있지만 조그만 구멍을 틀어막을 수는 없으니 이는 도구의 용도가 다름을 말한 것이다.
기기騏驥, 화류驊騮와 같은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 잡는 일에는 살쾡이만도 못하니 이는 가지고 있는 기능이 다름을 말한 것이다.
올빼미는 캄캄한 밤에도 벼룩을 잡을 수 있고 털끝을 살필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도 커다란 산과 언덕을 보지 못하니 이는 타고난 본성이 다름을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생각건대 옳은 것을 스승으로 삼고 그른 것은 무시해 버리며 를 존숭하고 은 무시해 버리면 좋지 않은가.” 하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천지의 이치와 만물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자이다.
말하자면 하늘을 스승으로 삼아 땅은 업신여기며 음을 스승으로 삼아 양을 무시하는 것과 같아서 성립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런데 또 계속 말하여 그만두지 않으니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속이는 자이다.
제왕들은 선양禪讓하는 방법을 달리했으며 삼대의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도 달랐으니 그 시대와 다르고 그 풍속과 어긋나는 자는 찬탈한 자라 일컫고 그 시대에 합당하고 그 풍속을 따른 자는 의로운 무리라고 일컬었으니 하백河伯이여, 아무 말 없이 침묵할지어다.
그대가 어찌 귀천을 구별하는 문이 어디에 있고 를 구별하는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가 사양하고 받고 달려가고 그만둠을 나는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으니〉 무엇을 귀하다 하고 무엇을 천하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반연反衍(구별이 없는 혼돈渾沌)이라 하니, 너의 뜻을 〈귀천을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게 할지어다.
〈만약 구애되면〉 와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무엇을 적다 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사시謝施(境界 없는 의 모습)라 하니, 너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만 한정하지 말지어다.
〈만약 한정하면〉 와 일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엄연嚴然하게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처럼 사사로운 은덕 없이 공평하게 다스리며, 넉넉히 마치 토지신土地神이 제사에 강림하듯 사사로운 복을 베풀지 않고 공평하게 복을 내려 주며, 넓디넓게 마치 사방이 끝이 없는 것처럼 한정된 구역을 만들지 말지어다.
만물을 모두 포용하는데 그 누구를 사사로이 비호庇護하고 도와줄 것인가.
이것을 일러 어느 한쪽으로 구애되지 아니한 무한정無限定이라고 한다.
만물은 구별 없이 동일한 존재인데 어느 것을 짧다 하고 어느 것을 길다 할 것인가.
에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그러나 사물事物에는 사멸도 있고 생성도 있는지라 사물事物성취成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공허하게 비었다가는 가득 차기도 하여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며 시간의 추이는 멈추게 할 수 없는지라 소멸消滅하였다가 생식生息하고(衰하였다가 번영하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어 마치게 되면 곧 시작이 있으니 이것이 〈작은 절의節義를 뛰어넘는〉 커다란 정의正義방도方道를 말하고 〈개개의 사물事物이 아닌〉 만물 전체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다.
사물의 생성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은지라 늘 움직여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어느 때고 옮겨 가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은 하겠으며 무엇은 하지 않겠는가.
본디 스스로 변화하는 법이다.”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권도權道에 밝고 권도에 밝은 사람은 외물外物로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불로 뜨겁게 할 수 없고 물에 빠뜨릴 수 없으며 추위와 더위가 해치지 못하며 짐승들이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편안하고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잘 살피며 화와 복을 편안히 여기며 거취를 삼가는지라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천성天性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인위人爲는 사람의 몸 밖에 있으며 참다운 덕은 천성을 따르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니 (자연)과 (인위)의 를 잘 인식하고 천성에 근본하고 참다운 의 경지에 머물며 머뭇거리면서 구부리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하게 되면 근원의 로 되돌아가고 궁극의 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백河伯이 물었다.
“무엇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人爲라 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대답했다.
“소와 말에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을 일러 천성이라 하고 말의 머리에 낙인烙印을 찍고 소의 코뚜레를 뚫는 것을 인위人爲라 한다.
그 때문에 인위로 천성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인간의 의도로 천명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허명虛名을 얻기 위해 타고난 을 잃어버리지 말아서 삼가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천진天眞의 본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梁麗可以衝城 而不可以窒穴 言殊器也 : 대들보와 마룻대 같은 큰 나무로는 城壁을 찔러 쳐부술 수는 있지만 조그만 구멍을 틀어막을 수는 없으니 이는 도구의 용도가 다름을 말한 것이다. 司馬彪는 梁麗를 작은 배라고 하지만 부적당하며, 崔譔이 ‘마룻대’라고 한 것이 좋으나, 成玄英이 “梁은 대들보이고 麗는 마룻대이다[梁 屋梁也 麗 屋棟也].”라 함이 더 낫다(池田知久). 梁은 대들보, 麗는 마룻대, 衝은 찌른다, 찔러 쳐부수다의 뜻이고, 窒穴은 조그만 구멍을 틀어막는다는 뜻이다.
역주2 騏驥驊騮 一日而馳千里 捕鼠 不如狸狌(리성) 言殊技也 : 騏驥, 驊騮와 같은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 잡는 일에는 살쾡이만도 못하니 이는 가지고 있는 기능이 다름을 말한 것이다. 李頤는 騏驥驊騮를 “모두 준마이다[皆駿馬也].”라 하고, 成玄英은 “모두 옛날의 양마이다[竝古之良馬也].”라 하였는데 모두 적절하다. 陳鼓應, 曹礎基가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陸德明은 捕를 “어떤 本에서는 또 搏이라고 하였다[本又作搏].” 하고 있으며, 王叔岷에 의해 두 글자는 통한다(池田知久). 狸狌은 너구리와 살쾡이, 여기서는 살쾡이로만 번역하였음. 技는 각기 장기로 삼는 기능을 말한다.
역주3 鴟鵂(치휴) 夜撮蚤 察豪末 晝出 瞋目而不見丘山 : 올빼미는 캄캄한 밤에도 벼룩을 잡을 수 있고 털끝을 살필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도 커다란 산과 언덕을 보지 못함. 鴟鵂는 올빼밋과에 속하는 새. ‘치’를 올빼미, ‘휴’를 부엉이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두 글자를 합해서 ‘올빼미’라고 번역하기로 한다. 撮은 陳壽昌이 《莊子正義》에서 “撮은 捉이다.”고 함이 옳다. 捉은 잡을 착. 蚤는 벼룩. 또 郭慶藩은 “瞋은 혹 瞑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는데, 생각건대 瞑으로 표기함이 옳을 것이다[瞋或作瞑 疑作瞑者是也].”고 하여 瞑이 옳다고 주장하나 부적당하다(王叔岷). 瞑은 瞋의 잘못(王叔岷)이며 蘇輿에 의해 瞋이 옳다(池田知久).
역주4 言殊性也 : 타고난 본성이 다름을 말한 것임. 池田知久는 “梁麗 이하의 취지는, 세 종류의 物(대들보와 마룻대, 천리마, 올빼미)의 實例를 들어 각각 能(잘함)하고 능치 못함이 있는 사실을 관찰하면서 物의 全一性을 분해하여서는 아니 되고 더구나 그 잘하는 쪽(可以衝城)만을 들고 잘못하는 쪽(不可以窒穴)을 看過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쪽의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 다른 쪽엔 아주 劣等한 것의 비유는 〈逍遙遊〉편 제5장에도 狸狌과 斄牛의 예가 보인다.
역주5 故曰蓋師是而無非 師治而無亂乎 : 그 때문에 “생각건대 옳은 것을 스승으로 삼고 그른 것은 무시해 버리며 治를 존숭하고 亂은 무시해 버리면 좋지 아니한가.”라고 말한다면. ‘故曰……乎’는 ‘그 때문에 ……라고 말한다면’의 뜻이고, 蓋는 ‘대개’ 또는 ‘생각건대……이 좋다’ 정도의 뜻인데, 蓋자에 대해서는 異說이 있다. 蓋를 盍과 같은 ‘어찌……하지 않는가[何不]’의 뜻으로 보고 音까지도 ‘합’으로 읽는 독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故曰蓋……’로 읽으면 그 뜻은 “그 때문에 ‘어찌 옳은 것을 스승으로 삼아 그른 것을 무시해 버리지 아니하고, 治를 존숭하여 亂을 무시하지 아니하는가.’라고 말한다면.”의 뜻이 된다. 蓋를 盍의 뜻으로 본 것은 王敔가 처음인데 楊樹達의 ‘何不也’ 등 그를 따르는 주석도 많다. 그러나 이상의 두 번역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개’로 읽든 ‘합’으로 읽든 결국 내용은 같은 것이 된다. 여기서는 ‘개’로 읽는 독법에 따라 번역하였다. 師는 스승으로 삼고 존숭한다는 뜻.
역주6 是未明天地之理 萬物之情者也 是猶師天而無地 師陰而無陽 : 이는(이런 사람은) 아직 천지의 이치와 만물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자이다. 이는(말하자면) 하늘을 스승으로 삼아 땅은 업신여기며 음을 스승으로 삼아 양을 무시하는 것과 같음. 池田知久는 “天地, 萬物의 세계에 天도 없으면 地도 없고 陰도 없으면 陽도 없음을 말한다. 比喩라는 형태를 취해 서술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표현이 되고 있지는 않으나 아래 문장의 ‘女惡知貴賤之門 小大之家’ 등에서 판단하여 이 같은 萬物齊同을 제창한 것이다.”고 주석하고 있다.
역주7 其不可行 明矣 然且語而不舍 非愚則誣也 : 성립할 수 없음이 명백한데 또 계속 말하여 그만두지 않으니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속이는 자이다. ‘以物觀之’ 등으로 대표되는 物의 立場에서 발언하는 言論을 비난한 문장(池田知久). 舍는 捨와 같음. ‘非愚則誣也’는 《韓非子》 〈顯學〉편에도 보인다(劉文典, 池田知久).
역주8 帝王殊禪 三代殊繼 : 제왕들은 선양하는 방법을 달리했으며 삼대의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도 달랐음. 위 문장의 物에 각각 殊器, 殊技, 殊性만이 있었듯이 帝王, 三代에도 다만 殊禪과 殊繼가 있었던 데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의 하나하나에 禪讓이니, 放伐이니, 또는 簒이니 義니 하는 價値(와 反價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池田知久를 要 참조).
역주9 差其時 逆其俗者 謂之簒夫 : 그 시대와 다르고 그 풍속과 어긋나는 자는 찬탈한 자라 일컬음. 差는 다르다, 어기다, 등지다, 배반하다 등의 뜻. 《莊子闕誤》에서 인용한 張君房본에는 簒之夫로 표기되어 있고, 奚侗, 王叔岷, 金谷治가 그것을 따르나 적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劉文典, 池田知久 참조).
역주10 當其時 順其俗者 謂之義之徒 : 그 시대에 합당하고 그 풍속을 따른 자는 의로운 무리라고 일컬음. 義之徒의 之자가 없는 판본(馬叙倫, 王叔岷 《莊子校釋》 부록, 王孝魚, 金谷治)이 있으나 그대로 있는 것이 좋다(池田知久). 郭慶藩의 《莊子集釋》에서는 之字가 없던 것을 世德堂本에 의거해서 보충하였다고 하고 있다.
역주11 黙黙乎河伯 女惡知貴賤之門 小大之家 : 河伯이여, 아무 말 없이 침묵할지어다. 그대가 어찌 귀천을 구별하는 문이 어디에 있고 小와 大를 구별하는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黙은 馬叙倫이 謐의 가차라 한다. 제2장 梁麗 可以衝城 이하 小大之家까지의 내용의 大意를 池田知久의 說을 참조 정리하여, “천지 만물은 그 가운데 크고 작고 있고 없는 大小有無의 사실의 구별과 귀하고 천하고 옳고 그른 貴賤然非의 가치의 구별이 없는 萬物齊同의 세계인데, 여기에 접근하기 위하여는 物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道의 입장에서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람은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입을 다물고 침묵할 필요가 있다.”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한다.
역주12 然則我何爲乎 何不爲乎 吾辭受趣舍 吾終奈何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가 사양하고 받고 달려가고 그만둠을 나는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계의 齊同性의 인식에 도달한 者(河伯)가 현실 사회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의 실천적인 질문이다. 知識論으로부터 實踐論으로의 이와 같은 전개는 初期道家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상이다(池田知久).
역주13 以道觀之 何貴何賤 : 道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무엇을 귀하다 하고 무엇을 천하다 하겠는가. 道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다는 뜻. ‘以道觀之 何貴何賤’은 위 문장의 ‘以道觀之 物無貴賤’을 계승한 것이다(福永光司, 池田知久). 다만 後者가 주로 知識論的이었던 데 비해, 前者가 주로 實踐論的이어서 “何爲乎 何不爲乎”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池田知久).
역주14 是謂反衍 : 이것(貴賤)을 일러 反衍이라 함. 反衍은 〈齊物論〉편 제4장에 보이는 “변화에 자기 자신을 맡긴다[因之以曼衍].”의 曼衍과 같은 뜻인데, 因之以曼衍의 因은 맡긴다는 뜻이고 만연은 변화 또는 無極(司馬彪)의 뜻이다. 여기서는 ‘끝없는 변화’ ‘限定이나 구별이 없는 끝없는 渾沌’ 등의 해석 가운데서 ‘구별이 없는 渾沌’의 뜻을 취했다. 이밖에 赤塚忠은 《老子》 제40장과 제25장을 인용하여 “反은 復歸하는 것이고 衍은 반대로 펴지고 넓혀지는 것으로 《老子》의 逝와 遠에 해당한다. 즉 人生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反衍은 貴賤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연스런 循環에 맡기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池田知久). 참고할 만한 주석이다.
역주15 無拘而志 : 너의 뜻을 구속되지 않게 할지어다. 귀천을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말라는 뜻. 而는 이인칭 대명사.
역주16 與道大蹇 : 道와 크게 어긋나고 말 것임. 만약 귀천을 구별하는 생각에 구애되면 道와 어긋나게 된다는 뜻.
역주17 何少何多 是謂謝施(이) : 무엇을 적다 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것(적고 많음)을 일러 謝施라 함. 謝施는 위의 反衍과 마찬가지로 境界 없는 道의 모습을 뜻한다. 謝는 교대한다는 뜻으로 변화를 의미하며 施는 뻗어간다는 뜻으로 移와 같다. 따라서 謝施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인위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대상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 司馬彪는 “謝는 교대함이고 施는 작용이다[謝 代也 施 用也].”고 풀이했고, 崔譔은 정반대로 “그 덕을 바꾸지 아니함을 일러 ‘謝施’라 한다[不代其德 是謂謝施].”고 풀이했는데, 司馬彪의 견해를 보충하여 위의 反衍과 같은 뜻으로 풀이한 方勇‧陸永品의 견해가 가장 근사하다.
역주18 無一而行 與道參差 : 너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만 한정하지 말지어다. 〈만약 한정하면〉 道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而는 위 문장의 無拘而志의 而와 마찬가지로 이인칭. 成玄英에 의거 “汝也”. 또한 池田知久에 의하면, 이 文章의 作者는 세계의 齊同性(천지 만물에 貴賤과 少多가 없는 것)을 道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역주19 嚴乎若國之有君 其無私德 : 嚴然하게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처럼 사사로운 은덕 없이 공평하게 다스림. 嚴은 儼의 의미이며, 이는 陸德明이 魚檢反이라고 音을 단 이래의 통설(阮毓崧을 참조).
역주20 繇繇(유유)乎若祭之有社라 其無私福 : 넉넉히 마치 土地神이 제사에 강림하듯 사사로운 복을 베풀지 않고 공평하게 복을 내려주며. 繇繇乎는 悠然히, 만족하게, 넉넉히의 뜻. 成玄英은 “느리고 긴 모양이다[賖長之貌也].”고 풀이했다.
역주21 泛泛乎 : 넓디넓은 모습. 成玄英은 “널리 존재하는 모양[普遍之貌也].”이라고 풀이했다. 陸德明은 “汎자로 된 경우도 있다[字又作汎].”고 했는데 지금도 汎으로 표기되어 있는 판본이 있다. 池田知久도 지적하였듯이, 福永光司는 《老子》 제34장 “대도는 넓게 흘러서 왼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大道氾兮 其可左右].”고 한 표현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유익한 견해로 참고할 만하다.
역주22 其無所畛域 : 한정된 구역을 만들지 말지어다. 成玄英은 畛域을 각각 경계[畛界]와 한정된 구역[限域]으로 풀이했는데 무난한 견해이다.
역주23 兼懷萬物 其孰承翼 : 만물을 모두 포용하는데 그 누구를 사사로이 庇護하고 도와줄 것인가. 대의는 林希逸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만물을〉 모두 포용함이요, 사사로운 편애가 없음이다. 그래서 ‘그 누가 사사로이 비호하고 도와줄 것인가’ 라고 말한 것이다. 承翼은 두 손 맞잡고 붙들어 주는 것이니, 이 두 글자는 私愛하는 뜻을 형용한 것이다[萬物皆備於我 是兼懷也 而無所私愛 故曰其孰承翼 承翼拱扶之也 此二字形容私愛之意].”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역주24 是謂無方 : 이것을 일러 어느 한쪽으로 구애되지 아니한 無限定이라고 함. 林希逸은 “無方은 곧 無心이다. 내가 이미 無心하게 되면 物에 短과 長이 없고 또한 生과 死도 없게 된다[無方 卽無心也 我旣無心 則物無短長 亦無生死].”라고 풀이했는데 다소 무리한 견해이다(池田知久).
역주25 萬物一齊 孰短孰長 : 만물은 구별 없이 동일한 존재인데 어느 것을 짧다 하고 어느 것을 길다 할 것인가. 이른바 萬物齊同 사상의 한 표현이다. 〈齊物論〉 제1장의 ‘道通爲一’에 由來한다(福永光司). 단 〈天運〉편 제4장의 ‘變化齊一’은 관계가 희박하다.
역주26 不恃其成 : 事物은 成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음. 物의 세계에서 事物의 一時적 成就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뜻. 林希逸은 〈大宗師〉편 제1장의 ‘不雄成’과 같다고 풀이했다.
역주27 一虛一滿 不位乎其形 : 때론 공허하게 비었다가는 때론 가득 차기도 하여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지 못함. 한 번 비었다가 한 번 찼다 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定着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뜻. 楊樹達은 滿자는 원래 盈이었는데 漢나라 惠帝의 이름을 피해서 滿으로 고친 것이라고 하여 滿을 盈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나 근거가 박약하다(池田知久).
역주28 年不可擧 :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음. 王夫之의 《莊子解》에는 不可擧를 “미리 들어 이를 예측할 수가 없음.”이라고 풀이했고, 郭象은 “이를 들어 보내버리려 해도 불가능함.”이라고 풀이하는 등 이설이 많다. 여기서는 馬叙倫의 《莊子義證》에 “擧는 歫(막을 거)의 借字.”라 한 설이 있어 그것을 택하였다. ‘歫’는 拒와 통용된다.
역주29 終則有始 : 마치게 되면 곧 시작이 있음. 池田知久는 馬叙倫과 丁展成의 견해를 따라 有자가 又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文選》 注에도 ‘有’가 ‘又’로 되어 있음을 들어 又로 읽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有’가 ‘又’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여러 문헌에 자주 보인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는 이 책의 〈知北遊〉편 제5장에도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其終則復始也].”라고 하여 비슷한 부분이 있다(福永光司).
역주30 大義之方 論萬物之理也 : 이것이 〈작은 節義를 뛰어넘는〉 커다란 正義의 方道를 말하고 〈개개의 事物이 아닌〉 만물 전체의 이치를 논하는 것임. 大義之方은 萬物之理와 함께 결국은 道를 가리킨다(池田知久). 林希逸이 “바로 大道이다[卽大道也].”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역주31 物之生也 若驟若馳 : 사물의 생성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음. 사물의 생성 변화에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 또한 빠르다는 뜻이다.
역주32 無動而不變 無時而不移 : 늘 움직여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어느 때고 옮겨가지 않음이 없음. 불변의 사물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역주33 何爲乎 何不爲乎 夫固將自化 : 무엇은 하겠으며 무엇은 하지 않겠는가. 본디 스스로 변화하는 법이다. 《老子》 제37장에서 “道의 不變의 모습은 人爲的인 作爲가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王侯가 만일 이 無爲의 道를 지켜 나간다면 萬物은 저절로 그 덕에 감화되어 나갈 것이다. 만일 감화되고서도 다시 有爲의 욕심을 일으킨다면, 나는 장차 이것을 無名의 樸(無爲의 道의 소박)으로서 이것을 진정시킬 것이다. 無爲의 道의 소박함에는 또한 장차 有爲의 욕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니, 有爲의 욕심을 갖지 않아 마음이 안정되면 천하는 장차 저절로 바르게 다스려질 것이다[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라고 한 부분, 그리고 제57장에서 “그러므로 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無爲하면 民은 저절로 감화되고, 내가 淸靜을 좋아하면 民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無爲無事하면 民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無欲하면 民은 저절로 순박하게 된다.’고 하였다[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라고 한 부분과 유사한 사상적 표현이다. 이 부분은 內篇 《莊子》에서 道를 통해 萬物의 근원적 齊同性을 강조하는 맥락을 답습한 표현으로 莊子가 萬物의 自生自化를 道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池田知久).
역주34 然則何貴於道邪 : 그렇다면 道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道를 귀하게 여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뜻. 앞에서 北海若이 말한 대로 만물은 본래 아무런 차별이 없다면 道를 중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成玄英은 “이미 변화의 저절로 그러한 데 맡겼는데, 또 무엇 때문에 道를 중시할 것이 있겠는가[旣任變化之自然 又何貴於至道].”라고 하였다. 貴於道는 도를 존숭한다는 뜻.
역주35 知道者 必達於理 達於理者 必明於權 :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權道에 밝음. 權은 權道. 權道는 常道와 상대되는 말로 때에 따라 변통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한다. 상황에 따른 바른 對處라는 뜻의 時中之道와 같은 뜻. 池田知久는 權자를 설명하면서 《孟子》 〈梁惠王 上〉에 보이는 “저울로 달아본 뒤에 무게를 알 수 있고, 자로 재 본 뒤에 길이를 알 수 있다[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고 한 맹자의 설명을 들고 있는데 여기서의 權은 저울로 헤아려 본다는 기본적인 뜻만을 전해 주기 때문에 권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아니다. 권도의 뜻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례는 《孟子》 〈離婁 上〉에서 “남녀 간에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은 평상시의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고 구원하는 것은 權道이다[男女授受不親 禮也 嫂溺 援之以手者 權也].”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역주36 不以物害己 : 外物로 자기를 해치지 않음. 河伯의 질문에 답하여 道를 아는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효용을 서술한 문장으로 ‘不以物害己’가 작자의 실천적인 최종목표.
역주37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弗能賊 :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불로 뜨겁게 할 수 없고 물에 빠뜨릴 수 없으며 추위와 더위가 해치지 못하며 짐승들이 해치지 못함. 〈逍遙遊〉편 제3장에서 “이 사람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아니하니, 큰 홍수가 나서 하늘에까지 닿을 지경이 되어도 물에 빠지지 아니하며 크게 가물어 金石이 녹아 흐르고 土山이 타버리더라도 불에 타지 아니한다[之人也 物莫之傷 大浸稽天而不溺 大旱金石流 土山焦而不熱].”라고 藐姑射山에 사는 神人들의 덕을 설명한 말들을 참조할 것. 또한 〈大宗師〉편 제1장에 보이는 “그 같은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아니하다[若然者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고 한 옛 眞人에 대한 설명 문장도 함께 참조할 것(福永光司).
역주38 非謂其薄之也 :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님. 水火나 寒暑, 禽獸 등을 등한히 여겨서 함부로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成玄英이 “薄은 가벼이 여김이다[薄 輕也].”라고 한 것이 좋다.
역주39 言察乎安危 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 무엇이 편안하고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잘 살피며 禍와 福을 편안히 여기며 거취를 삼가는지라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임. 察은 자세히 살펴서 잘 안다는 뜻. 去는 물러난다는 뜻이고 就는 나아간다는 뜻. 寧於禍福은 禍와 福을 편안히 여긴다는 것인데, 寧은 편안히 순응한다는 뜻. 程明道의 “物來順應”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주40 天在內 人在外 : 자연 그대로의 天性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人爲는 사람의 몸 밖에 있음. 몸 밖에 있다는 것은 밖에 依存한다는 뜻. 成玄英은 “천연의 본성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고 인사를 따르는 것은 외부의 행적과 관계된 것인지라 모두 하지 않고 자연에 맡긴다. 그 때문에 어떤 사물도 해치지 못한다[天然之性 韞之內心 人事所順 涉乎外跡 皆非爲也 任之自然 故物莫之害矣].”고 풀이했다.
역주41 德在乎天 : 참다운 德은 天性을 따르는 데 있음. 지극한 德은 自然과 天性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뜻. 成玄英은 “지극한 덕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달려 있다. 만약 제멋대로 인위적인 지식에 의존하게 되면 천성이 흘러서 방탕하게 될 것이다[至德之美 在乎天然 若恣人任知 則流蕩天性].”고 풀이했다.
역주42 知天人之行 : 天(자연‧천성)과 人(인위)의 도를 잘 인식함. 이설이 분분한 대목인데 여기서는 天人을 天과 人(天與人)으로 보는 曹礎基의 注를 참고하였다. 曹礎基는 “天과 人은 天性과 人爲이다[天與人 天性與人爲].”라고 하였다.
역주43 本乎天 位乎得 : 천성에 근본하고 〈참다운〉 德의 경지에 머문다. 位는 成玄英이 ‘居處’라고 한 것을 따라 머문다고 번역하였음. 位乎得을 분수에 넘치지 않는 뜻으로 본 郭象 注 이래로 位를 社會的인 境遇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呂惠卿‧林希逸‧陸樹芝‧馬其昶‧李勉 등은 모두 부적당하다고 池田知久는 말하고 있다. 得은 天性으로 自得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역시 武延緖의 설을 따라 德의 假借字로 보는 것이 定說(池田知久‧福永光司)이라 그것을 따랐음.
역주44 蹢躅(척촉)而屈伸 : 머뭇거리면서 구부리기도 하고 펼치기도 함. 一進一退하면서 進退가 定해지지 않은 모습. 蹢躅은 머뭇거리는 모양. 屈伸은 구부리고 펼치는 동작을 뜻한다.
역주45 反要而語極 : 근원의 道로 되돌아가고 궁극의 도에 대해 말함.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 要와 極은 모두 道를 가리킴. 근원의 도와 궁극의 도. 反은 復, 돌아간다는 뜻이고, 語는 말한다,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
역주46 牛馬四足 是謂天 : 소와 말에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을 일러 천성이라 함.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비유한 표현.
역주47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 : 말의 머리에 烙印을 찍고 소의 코뚜레를 뚫는 것을 인위라 함. 落은 絡의 뜻으로 취하여 絡馬首를 말머리에 고삐를 단다, 재갈 물려 얽어맨다고 풀이하는 것이 定說이나, 落과 烙이 통한다고 보아 烙馬首를 “말머리에 烙印 찍는다.”고 풀이한 해석을 취해 보았다.
역주48 無以人滅天 無以故滅命 無以得殉名 : 인위로 천성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인간의 의도로 천명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허명을 얻기 위해 타고난 德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함. 人은 인위, 天은 천성. 故는 인간의 작위적 의도, 人知가 弄하는 作爲이고, 得은 德과 같다. 殉은 따라 죽는다는 뜻. 〈大宗師〉편 제1장에 있는 眞人의 설명, “心知로 道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행위로 무리하게 자연(天)의 운행을 助長하지 않는다[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를 참조할 것(福永光司).
역주49 謹守而勿失 是謂反其眞 : 삼가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天眞의 본성으로 돌아간다고 함. 反其眞은 〈大宗師〉편 제4장에도 이미 나온 바가 있다. 莫逆한 친구 子桑戶가 죽었을 때 “〈孟子反과 子琴張이〉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기를, ‘아! 桑戶여, 아! 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계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구나.’라고 하였다[相和而歌曰 嗟來桑戶乎 嗟來桑戶乎 而已反其眞 而我猶爲人猗].”를 참조할 것(福永光司). 眞을 道라고 보는 주석도 있으나 반드시 道라고 번역할 필요까지는 없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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