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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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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之也者 恐天下之 宥之也者 恐天下之니라
天下不淫其性하며 不遷其德이면
昔堯之治天下也 케하니 桀之治天下也 케하니 不愉也
夫不恬不愉 非德也 非德也하니라
하고 大怒邪에는 毗於陰하나니 陰陽 竝毗하면 四時 不至하며 寒暑之和 不成하야 其反傷人之形乎인저
使人으로 喜怒 失位하며 居處 無常하며 思慮 不自得하며 하야 於是乎 天下 而後에야 하나니
天下之大로도 不足以賞罰이어늘 自三代以下者 하나니 何暇 安其리오
인댄 是 淫於色也 說聰邪인댄 是 淫於聲也 說仁邪인댄 是 亂於德也 說義邪인댄 是 悖於理也 說禮邪인댄 說樂邪인댄 說聖邪인댄 說知邪인댄 니라
天下 將安其性命之情인댄 之八者
天下 將不安其性命之情인댄 之八者 乃始而亂天下也이어늘
而天下乃始尊之惜之하나니 甚矣 天下之惑也
以言之하며 하며 하나니 吾若是何哉
君子 인댄 莫若無爲
無爲也而後에야 安其性命之情하리라
하리며 愛以身於爲天下 則可以寄天下리라


천하를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천하를 있는 그대로 두는 까닭은 천하 사람들이 〈작위作爲때문에〉 타고난 본성本性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이고, 놓아두는 까닭은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덕을 바꿀까 염려해서이다.
천하 사람들이 자기 본성을 어지럽히지 않고 자신의 덕을 바꾸지 않는다면 〈따로 특별히〉 천하를 다스릴 일이 있겠는가.
옛날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작위적으로 즐기게 했으니 이는 편안하게 한 것이 아니고, 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고달프게 자신의 본성을 괴롭히게 했으니 이는 즐겁게 한 것이 아니다.
편안하지 않고 즐겁게 하지 못한 것은 타고난 덕이 아닌데 타고난 덕이 아니고서 장구할 수 있는 경우는 천하에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기뻐하면 자연계의 양기陽氣가 손상되고 지나치게 화를 내면 자연계의 음기陰氣가 손상되는데 음양陰陽이 모두 손상되면 사계절이 제때에 이르지 않으며 자연계의 춥고 더운 계절의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사람의 몸을 손상하게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노여워함에 마땅함을 잃어버리게 하고 거처함에 일정함이 없게 하고 생각함에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게 하고 중용의 도리를 아름답게 이루지 못하게 하니 이렇게 되자 천하 사람들이 비로소 거만한 태도로 남을 나무라고 사람들에게 사납게 굴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뒤에 도척盜跖이나 증삼曾參, 사추史鰌와 같은 자들의 행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온 천하의 재물을 다 동원하여 잘하는 이에게 상을 주어도 〈다 상 주기에〉 부족하며 온 천하의 형벌을 다 동원해서 악한 자들을 처벌해도 〈다 처벌하기에〉 부족하다.
이처럼 천하의 광대함으로도 상 주고 벌 주기에 부족한데도 삼대 이후의 위정자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서 끝내 상벌을 일삼으니 저들이 어느 겨를에 타고난 성명性命의 자연스런 실정實情에 마음 편안히 머물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눈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색깔을 탐닉耽溺하는 것이고, 귀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소리를 탐닉하는 것이고, 을 좋아한다면 이는 사람이 본래 타고난 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를 좋아한다면 이는 자연의 조리를 어기는 것이고, 를 좋아한다면 이는 기교技巧조장助長하는 것이고, 악을 좋아한다면 이는 넘침을 조장하는 것이고, 성인을 좋아한다면 이는 재주를 조장하는 것이고, 지식을 좋아한다면 이는 헐뜯음을 조장하는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性命의 실정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면 이 여덟 가지(明‧)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의 정을 편안히 누리지 못한다면 이 여덟 가지는 비로소 서로 얽히고설켜서 번거롭게 흔들어 대며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런데도 천하 사람들은 마침내 그것을 높이고 애석히 여기니 천하 사람들의 미혹됨이 심하다.
어찌 지나다 들러 보기만 하고 그냥 떠나가겠는가.
〈들러 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리면 그래도 괜찮은데〉 마침내 재계하여 그것을 말하고, 꿇어앉아 그것을 〈위정자들에게〉 올리고, 북 치며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찬양하니 내가 이것을 어찌하겠는가.
그 때문에 군자君子가 어쩔 수 없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무위無爲보다 나은 것이 없다.
무위한 뒤에야 타고난 성명性命의 정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천하를 돌보는 것보다 중시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으며 자기 몸을 천하를 돌보는 것보다 아끼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
그 때문에 군자가 자신의 오장五藏을 해부하지 않고 자기의 총명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 있다면 직무를 방기放棄하고 가만히 있어도 용처럼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며 깊은 물처럼 침묵하고 있어도 우레처럼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정신이 움직이면 천지가 따라서 조용히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만물이 저절로 생육될 것이니 내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역주
역주1 在宥天下 : 천하를 있는 그대로 놓아둠. 在는 成玄英이 “在는 있는 그대로를 따르는 것이다[在 自在也].”라고 한 풀이를 따라 “있는 그대로 놔둔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宥도 같은 뜻. 司馬彪, 章炳麟, 張之純 등은 모두 在를 살핀다[察]는 뜻으로 풀이했고, 馬叙倫은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存의 뜻으로 “근심하면서 묻는다[恤問也].”는 뜻으로 풀이했으며, 李勉은 맡긴다는 뜻으로 任의 잘못이라고 풀이했지만 근거가 충분치 않을 뿐더러 천하를 다스리지 않고 방임한다는 이 편 전체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다. 陸德明은 宥를 너그러움[寬]으로 풀이했고, 郭象은 “있는 그대로 놔두면 다스려지고 억지로 다스리면 어지러워진다[宥使自在則治 治之則亂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 不聞治天下也 :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음. 王叔岷은 ‘未聞理天下也’로 된 인용이 있다고 소개하고, 劉文典은 治자 위에 在가 있는 引用을 따르는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지적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3 淫其性也 : 타고난 본성을 어지럽힘. 呂惠卿은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淫이라 하며 또 耽溺하는 것을 淫이라 한다[失性曰淫 又耽滯曰淫].”라고 풀이했고, 馬叙倫은 나무가 흔들린다는 뜻인 榣자의 假借라고 풀이했지만, 林希逸이 “어지럽힘이다[亂也].”라고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사람들이 知와 欲과 作爲의 과잉 속에서 타고난 自然의 本性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주4 遷其德也 : 타고난 덕을 바꿈. 遷에 대해서 呂惠卿은 “덕을 잃어버리는 것을 遷이라 한다[失德曰遷].”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외물에 의해 옮겨지는 것이다[爲外物所遷移也].”라고 풀이했는데 여기서는 阮毓崧이 “바꿈이다[變易也].”라고 풀이한 것이 가장 간명하다.
역주5 有治天下者哉 : 천하를 다스릴 일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본성을 어지럽히지 않고 타고난 덕을 변질시키지 않는다면 따로 천하를 다스릴 일이 없다는 뜻. 《經典釋文》에 소개된 崔譔본에는 이 구절이 ‘有治天下者材失’로 되어 있고 “억지로 다스리면 재질을 잃어버리게 된다[强治之 是材之失也].”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于鬯은 材는 哉와 通하고 失은 夫의 잘못이라고 했는데 馬叙倫도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역주6 使天下欣欣焉 人樂其性 :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즐기게 함. ‘使天下之人 欣欣焉 樂其性’이 도치된 표현. 馬叙倫은 天下 아래에 人자가 있는 引用을 소개하고 있고 劉文典은 그것을 衍文으로 보았는데 人자가 두 번 들어간 인용문은 도치된 문장을 필사하다 생긴 오류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또 人樂其性의 人을 굳이 해석한다면 ‘사람마다’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구절은 요임금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자신의 본성을 즐기게 하였다는 뜻으로 자연스럽지 않게 작위적으로 즐기게 하였음을 비판한 내용이다.
역주7 是不恬也 : 이는 편안하게 한 것이 아님. 恬은 安靜의 뜻으로 억지로 노력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하는 것. 成玄英은 恬을 고요함[恬 靜也]이라고 풀이했다. 〈盜跖〉편에는 恬愉가 붙어서 熟語로 쓰이는 예가 나온다. 《淮南子》 〈原道訓〉편의 高誘 注에는 恬愉를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는 것[無所好憎也].”이라고 풀이했는데 이를 따르면 恬愉는 억지로 좋아하거나 억지로 싫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성을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역주8 使天下瘁瘁焉 人苦其性 :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고달프게 자신의 본성을 괴롭히게 함. 위의 使天下欣欣焉 人樂其性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使天下之人 瘁瘁焉 苦其性’이 도치된 표현. 또한 여기서도 人苦其性의 人을 굳이 逐字解한다면 ‘사람마다’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陸德明은 瘁瘁를 병든 것[病也]이라 풀이하고 《廣雅》를 인용하여 근심하는 것[憂也]이라 했다. 또 崔譔본에는 醉로 되어 있으나 옳지 않다. 한편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顇는 顦顇함이다[顇 顦顇也].”라고 한 것을 따라 瘁瘁를 顦顇, 곧 고달픈 모습으로 풀이했는데 적절하다.
역주9 可長久者 天下無之 : 장구할 수 있는 경우는 천하에 없음. 馬叙倫과 王叔岷은 可가 求로 되어 있고, 之 아래 也가 있는 引用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편의 맥락상 적절치 않다.
역주10 人大喜邪(야) 毗於陽 : 사람들이 지나치게 기뻐하면 자연계의 양기가 손상됨. 武延緖는 人자를 夫자가 잘못된 것이라 했는데 일리가 있으나 그대로 둔다. 毗자에 대해서는 ‘도와준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와 ‘손상시킨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陸德明의 《經典釋文》에는 司馬彪가 도와준다[助也]는 뜻으로 풀이한 견해와 일설에 함께한다는[並也]는 뜻으로 풀이한 견해를 나란히 소개하고 있는데 宋의 羅勉道나 淸의 林雲銘 등은 司馬彪의 견해를 따르고, 陸長庚 등은 일설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 외에 林希逸이 “毗는 보태 준다는 뜻이니 의학서에 이른바 남아서 생기는 병이다[毗 益也 醫書所謂有餘之病也].”라고 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池田知久의 說에 따라, 兪樾이 《淮南子》 〈原道訓〉의 “사람이 너무 노여워하면 陰을 파괴하게 되고 너무 기뻐하면 陽을 떨어뜨린다[人大怒破陰 大喜墜陽].”라고 한 내용과 같은 의미로 본 견해를 따라 傷의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馬叙倫과 阮毓崧 등도 같은 견해.
역주11 中道不成章 : 중용의 도리를 아름답게 이루지 못함. 羅勉道가 “일을 함에 중도에 이르러 조리를 이루지 못함을 말한 것[言作事至中道 而不成條理].”이라고 풀이한 이래 陸樹芝, 陳壽昌, 阮毓崧, 福永光司, 森三樹三郞 등이 이 견해를 따랐으나 부적절하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林希逸 懸吐本에는 이와 달리 “中道 不成章”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林希逸이 “문장을 이룬다는 것은 조리가 있음이니 문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중도를 잃어버린 것이다[成章 有條理也 不成章 則失中道矣].”라고 주해한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중도를 일의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 羅勉道 이하의 견해와는 달리 중용의 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본문의 번역은 林希逸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물론 中道를 중용의 도리로 본 주석가는 林希逸 이 외에도 呂惠卿이 平易中正으로 풀이한 것, 또 赤塚忠이 《禮記》 〈中庸〉편의 中和로 풀이했는데 같은 의미이다. 成章은 福永光司, 池田知久가 지적한 것처럼 《論語》 〈公冶長〉편의 斐然成章을 참조할 것.
역주12 喬詰卓鷙 : 거만한 태도로 남을 나무라고 사람들에게 사납게 굴다. 喬, 詰, 卓, 鷙 네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주석가마다 이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喬詰은 고압적인 태도로 남을 책망하는 태도를 뜻하고 卓鷙는 孤高함을 뽐내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남에게 사납게 구는 모양으로 풀이하고 있다. 崔譔은 “喬詰은 뜻이 고르지 않음이고 卓鷙는 행동이 고르지 않음[喬詰 意不平也 卓鷙 行不平也].”이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喬는 속임이고 詰은 문책함이고 卓은 홀로이고 鷙는 사나움이다…… 속이고 힐책하며 홀로 서서 무리들과 어울리지 아니하여 홀로 사나운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다[喬 詐僞也 詰 責問 卓 獨也 鷙 猛也……喬僞詰責 卓爾不群 獨懷鷙猛 輕陵於物].”라고 풀이했다. 또 呂惠卿은 “喬는 고원함을 숭상함이고 詰은 끝까지 따짐이고 卓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움이고 鷙는 어울리지 못함이니 모두 평이하고 중정한 도리가 아니다[喬則尙高 詰則窮盡 卓則難及 鷙則不群 皆非平易中正].”라고 풀이했는데 林雲銘도 거의 같다. 한편 林希逸은 “喬는 고원함을 정도에 지나치게 좋아함이고 詰은 의논함에 서로 힐책함이고 卓은 홀로 섬이고 鷙는 사나움이다. 이 네 글자는 모두 조화롭지 못한 뜻을 형용한 것이다[喬 好高而過當也 詰 議論相詰責也 卓 孤立也 鷙 猛厲也 此四字皆形容不和之意].”라고 풀이했다. 또 羅勉道는 “喬, 詰, 卓, 鷙는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다[喬詰卓鷙 不可制馭之貌].”라고 풀이했고, 宣穎은 “喬는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고, 詰은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것이고, 卓은 자랑하는 것이고, 鷙는 사나움이다[喬 自高 詰 責人 卓 矜異 鷙 猛戾].”라고 풀이했다. 이 외에 胡文英, 陸樹芝, 張之純, 馬叙倫, 楊樹達, 赤塚忠 등이 약간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 대의에 큰 차이는 없다.
역주13 有盜跖曾史之行 : 도척이나 증삼, 사추와 같은 자들의 행위가 나타나게 됨. 馬叙倫은 아래의 문장에 근거하여 盜跖은 桀跖의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金谷治의 지적처럼 桀은 이미 위 문장에서 堯와 대비하여 등장하였으므로 여기는 그대로 盜跖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도척은 큰 도적의 이름이고 曾參‧史鰌는 作爲的 賢者로 일컬은 것이다.
역주14 擧天下 以賞其善者 不足 擧天下 以罰其惡者 不給 : 온 천하의 재물을 다 동원하여 잘하는 이에게 상을 주어도 〈다 상 주기에는〉 부족하며 온 천하의 형벌을 다 동원해서 악한 자들을 처벌해도 〈다 처벌하기에는〉 부족함. 앞의 천하는 상을 주는 수단이므로 온 천하의 재물을 뜻하며, 뒤의 천하는 악을 벌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하므로 온갖 수단의 형벌을 뜻한다. 不足의 足과 不給의 給은 같은 뜻. 賞其善者는 其자가 없는 인용이 있다(馬叙倫).
역주15 匈匈焉終以賞罰爲事 :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서 끝내 상벌을 일삼음. 成玄英은 匈匈을 “시끄럽게 떠들어 댐이니 앞다투어 쫓아감을 말함이다[讙譁也 競逐之謂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奚侗 또한 《說文解字》에서 “詾은 다툼이다[詾 訟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匈을 詾의 가차로 보았다. 馬叙倫도 마찬가지. 이 밖에 陸樹芝는 匈匈을 물살이 세찬 모양을 표현한 洶洶과 같다고 본 견해, 陳壽昌이 不安한 모양으로 본 견해 등이 있다. 한편 吳汝綸은 終을 終日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명확한 근거가 없다.
역주16 性命之情 : 타고난 성명의 자연스러운 實情. 性은 타고난 그대로, 內的인 타고남을 말하고, 命은 運命, 外的인 自然必要性을 말한다. 〈騈拇〉편 제2장에 이미 나왔다. 人情과 거의 같은 뜻으로 볼 수도 있음.
역주17 而且說(열)明邪(야) : 뿐만 아니라 눈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而且는 그런데, 또한, 뿐만 아니라의 뜻이고, 說은 기뻐하다는 뜻으로 열로 읽는다. 이하의 내용은 〈騈拇〉편의 제1장, 제5장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과 유사하다. 또는 《老子》 제12장의 “아름다운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입맛을 해치고 말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어긋나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배를 채우지 눈의 욕망을 채우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저것은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라고 한 내용과도 유사하다.
역주18 是相於技也 : 기교를 조장하는 것임. 相은 돕는다는 뜻으로 郭象, 林希逸 모두 돕는다[助也]는 뜻으로 풀이했다. 곧 相은 도울 상, 조장할 상. 특히 林希逸은 “도와주어서 더욱 심해짐이다[助益之而愈甚也].”라고 풀이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데 정확한 견해이다. 王敔와 宣穎 등은 풀이하는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대의는 같다. 이 외에 馬叙倫, 楊樹達 등은 傷의 假借로 보고 빠지다, 실수하다의 뜻으로 풀이하지만 적절치 않다.
역주19 是相於淫也 : 넘침을 조장하는 것임. 耽溺을 助長한다는 뜻. 淫은 馬叙倫이 아래 문장의 藝와 바꾸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일리는 있지만 굳이 고칠 필요는 없다. 池田知久도 같은 견해. 또 馬叙倫은 淫을 婬의 假借라고 풀이했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넘침으로 풀이하는 宣穎 등의 견해가 무난하다.
역주20 是相於藝也 : 재주를 조장하는 것임. 다재다능의 만능주의를 조장한다는 뜻. 藝는 재능이 많은 것을 뜻한다. 《論語》 〈雍也〉편에 “염구는 재능이 많다[求也 藝].”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王叔岷).
역주21 是相於疵也 : 헐뜯음을 조장하는 것임. 남의 결점이나 남이 뒤지게 조장한다는 뜻. 池田知久는 ‘說聖邪 是相於藝也’는 《論語》 〈子罕〉편의 ‘子云 吾不試 故藝’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하였으며, 疵는 赤塚忠이 말하는 것처럼 訾의 假借로 보고 헐뜯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22 存可也 亡(무)可也 :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亡는 無와 같은 뜻으로 음도 무.
역주23 臠卷獊囊 : 서로 얽히고설켜서 번거롭게 흔들어 댐. 馬叙倫은 臠卷과 獊囊은 모두 疊韻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어라 했는데 적절한 지적이다. 崔譔본에는 臠자가 欒으로 되어 있다. 奚侗은 《說文解字》에서 “攣은 엮임이다[攣 係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攣의 假借라 풀이했고, 馬叙倫은 臠과 欒이 모두 《說文解字》에서 䜌은 어지러움이다[䜌 亂也]고 풀이한 것을 따라 䜌의 假借라 풀이했고, 王叔岷은 崔譔과 奚侗의 견해를 따라 臠을 欒자로 보고 攣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비슷한 견해이다. 司馬彪와 崔譔은 “臠卷은 펴지지 못한 모양[臠卷 不申舒之狀也].”이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구속된 모습[拘束之貌].”이라 했는데 역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獊囊의 獊은 崔譔본에는 戕으로 되어 있고 “戕囊은 搶攘과 같다[戕囊 猶搶攘].”라고 풀이했으며, 呂惠卿은 “獊은 쌓여서 흩어지지 않음이고 襄은 맺혀서 풀리지 않음이다[獊 積而不散 襄 結而不解].”라고 풀이했다. 王叔岷에 따르면 囊은 儴으로 된 인용이 있고 《說文解字》에 “孃은 번거롭게 흔들어 댐이다[孃 煩擾也].”라고 했으므로 이것을 따라 孃의 假借로 보았는데 본문의 번역은 王叔岷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역주24 豈直過也而去之邪 : 어찌 지나다 들러 보기만 하고 떠나가겠는가. 그냥 지나가지 않고 떠받든다는 뜻. 陸德明은 “崔譔본에는 오직 이 부분에만 邪자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咫자로 되어 있다[崔本唯此一字作邪 餘皆作咫].”라고 했는데 이로 인해 王念孫과 奚侗은 아래의 言之, 進之, 儛之의 아래에도 邪자가 붙어 있었을 것이라 했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陸德明이 말한 것은 위 문장의 說明邪, 說聰邪 등을 두고 한 말일 것이므로 옳지 않다.
역주25 齊戒 : 齋戒함. 齊는 齋와 같다. 齊와 齋를 통용하는 경우는 非一非再.
역주26 跪坐以進之 : 꿇어앉아서 그것을 〈위정자들에게〉 올림. 羅勉道는 《老子》 제62장의 “앉아서 이 도를 바침만 못하다[不如坐進此道].”라고 한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淮南子》 〈本經訓〉편에도 “꿇어앉아서 그것을 말하고 북 치고 노래하면서 그것을 춤춘다[危坐而說之 鼓歌而舞之].”라고 하여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7 鼓歌以儛之 : 북을 치며 노래하며 춤을 춤. 찬양한다는 뜻. 馬叙倫은 儛를 舞의 俗字라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28 不得已而臨莅天下 : 어쩔 수 없이 천하를 다스리게 됨. 臨과 莅는 모두 군림, 곧 군주로서 다스린다는 뜻.
역주29 故貴以身於爲天下 則可以託天下 : 그러므로 자기 몸을 천하를 돌보는 것보다 중시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음. 《老子》 제13장에 “그러므로 자기 몸을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중시하면 곧[若] 이런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아끼면 곧[若] 이런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라고 한 내용과 같다. 池田知久는 以身의 以를 爲의 뜻으로 보았고 福永光司는 用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以를 爲자의 뜻으로 쓰는 경우는 《論語》 〈爲政〉편의 ‘視其所以’ 등에서도 보인다. 王念孫과 奚侗은 於爲天下의 於를 爲와 같다고 풀이하고 爲자는 필사자가 잘못 붙인 것으로 보았지만 여기의 於자는 비교를 나타내는 조사로 보는 것이 적절하므로 爲天下의 爲를 잘못 끼어든 글자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淮南子》 〈道應訓〉에도 “그 때문에 노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기 몸을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중시하면 이에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아끼면 이에 천하를 맡길 수 있다[故老子曰 貴以身爲天下 焉可以託天下 愛以身爲天下 焉可以寄天下矣].”라고 한 내용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陶鴻慶은 故를 故曰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적절치 않다.
역주30 無解其五藏 : 자신의 오장을 해부하지 않음. 解는 陸德明의 풀이대로 해산의 뜻[散也]. 藏은 臟과 통용. 五藏은 〈騈拇〉편 제1장에 이미 나왔다.
역주31 無擢其聰明 : 자기의 총명을 끄집어내지 않음. 자신의 총명을 지나치게 믿고 남용한다는 뜻. 擢은 林希逸이 뽑아내다[抽也]는 뜻으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馬叙倫은 鑿의 假借라 했는데 옳지 않다. 池田知久는 〈騈拇〉편 제1장의 ‘擢德塞性’을 비슷한 용례로 소개하고 있지만 擢德의 탁은 뽑아서 없애 버린다는 뜻이고 여기의 탁은 끄집어내서 활용한다는 뜻이므로 정반대의 의미로 쓰였다.
역주32 尸居而龍見 : 직무를 방기하고 가만히 있어도 용처럼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음. 尸居는 가만히 앉아서 봉록만 받아먹는다는 뜻인 尸祿, 하는 일 없이 관직만 차지한다는 뜻인 尸官, 자리만 차지하고 공밥 먹는다는 뜻인 尸位素餐의 예와 같이 쓰인다. 龍見은 날개 없이 날 수 있는 용처럼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다는 뜻. 羅勉道는 “尸居는 앉을 때 시동같이 가만히 있음이고 龍見은 용이 변화하는 것과 같음이다[尸居 坐如尸也 龍見 如龍之變化也].”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尸居를 尸位에 있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어도 龍見 즉 용처럼 變幻自在로 出現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역주33 淵黙而雷聲 : 깊은 물처럼 침묵하고 있어도 우레처럼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음. 羅勉道는 “淵黙而雷聲은 고요히 깊은 연못과 같지만 들리는 소리는 우레처럼 크다[淵黙而雷聲 黙然如淵之深沈 而若聽雷聲也].”라고 풀이했다. 〈天運〉편 제6장에도 “그렇다면 사람 중에는 참으로 가만히 있어도 용처럼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고 연못처럼 침묵하고 있어도 우레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며 움직임이 천지와 같은 자가 있단 말인가[然則人固有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 發動如天地者乎].”라고 하여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池田知久).
역주34 神動而天隨 : 정신이 움직이면 천지가 따름. 《周易》 〈乾卦 文言傳〉에서 “하늘보다 앞서 움직이면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의 운행보다 뒤에 움직이면 하늘의 때를 받든다[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라고 하여 德合天地를 말한 것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郭象은 “정신은 사물을 따라 움직이고 天은 理를 따라 운행한다[神順物而動 天隨理而行].”라고 풀이했다. 池田知久는 〈天運〉편의 “움직임이 천지와 같다[發動如天地].”라고 한 내용을 참조하라고 지적했다.
역주35 從容無爲而萬物炊累焉 : 조용히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만물이 저절로 생육될 것임. 從容은 陳景元의 풀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自在貌]’을 뜻하는데 〈中庸〉에 나오는 從容中道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무위와 같은 뜻이다. 炊累에 대해서는 諸說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羅勉道가 “만물이 모두 내가 생육하는 가운데 모여서 마치 기가 쌓여서 성숙됨과 같음을 말한 것[謂萬物皆囿吾生育之中 如炊氣積累而熟].”이라 풀이한 것을 따라 생육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역주36 吾又何暇治天下哉 : 내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새삼 천하를 다스릴 필요가 없다는 뜻. 〈逍遙遊〉편 제2장에 “나는 천하를 가지고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予無所用天下爲].”라고 한 내용이 있고 제3장에 “누가 세상일 따위를 기꺼이 일삼으려 하겠는가[孰弊弊焉以天下爲事].”라고 한 내용이 있고, 또 〈讓王〉편에도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없다[未暇治天下也].”는 내용이 있다(福永光司). 이 章 머리의 不聞治天下와 호응함은 물론이다(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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