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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4)

장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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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대
我 知天下之中央하노니
이오
이오
이오
이오
辯者 以此 與惠施 相應하야 終身無窮하니라
飾人之心하며 易人之意하야 能勝人之口 不能服人之心하니 辯者之囿也
이나 이로라하야
南方 有倚人焉하니 曰黃繚
惠施 不辭而應하며 不慮而對하야 徧爲萬物說하야 說而不休하며 多而無已호니
猶以爲寡하야 益之以怪하야
以反人으로 爲實 而欲以勝人으로 爲名이라
是以 與衆으로 不適也하니 니라
由天地之道 觀惠施之能컨대 其猶一蚊一虻之勞者也이온 其於物也 何庸이리오
惠施 不能以此 自寧 散於萬物하야 而不厭하야 卒以善辯으로 爲名하니 惜乎


혜시惠施는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추구하여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으나, 그 도리道理가 잡박하여 그 말이 적중하지 못했다.
그는 사물의 의미를 차례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일컬어 대일大一이라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일컬어 소일小一이라 한다.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올릴 수는 없으나, 그 넓고 큼은 천리 사방에 미친다.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낮고 산과 못은 둘 다 평평하다.
해는 중천에 떠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하고, 사물은 생기는 동시에 죽어간다.
크게는 같으면서 작게는 다른 것을 조금 다르다[小同異]고 하고, 만물이 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고, 개별로서는 다 다른 것을 일러 크게 다르다[大同異]고 한다.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
나는 천하의 중앙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중앙이다.
두루 만물을 사랑하면 사물의 차별이 없어지고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된다.
혜시惠施는 이상의 명제(歷物十事)를 뛰어난 것으로 자부하여, 이것을 천하에 공표하여 논리학자들을 설득하였다.
그래서 천하의 논리학자들이 모두 서로 더불어 이것을 즐거워하였다.
알에 털이 있다.
닭에는 세 개의 발이 있다.
초나라 서울 에 천하가 있다.
개는 양이 될 수 있다.
말은 알을 깐다.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
불은 뜨겁지 않다.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수레바퀴는 땅에 붙어 있지 않다.
눈은 보지 못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까지의 길이는 끊어지지 않는다.
거북이는 뱀보다 길다.
곱자로 네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
구멍에 꽂아 넣은 장부를 구멍이 꽉 둘러싸고 있지 않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살촉이 붙은 화살이 빨리 날아가더라도 날아가지도 머물지도 않을 때가 있다.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
황색 말과 검은 소는 합해서 셋이다.
흰 개는 검다.
어미 없는 망아지는 본시 어미가 없다.
한 자 길이의 채찍을 매일 절반씩 자르면 영원토록 다 자를 수 없다.
당세當世변자辯者들은 이상의 명제(辯者二十一事)를 가지고 혜시惠施와 함께 서로 응수하면서 죽을 때까지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환단桓團공손룡公孫龍은 변자의 무리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쓸데없이 꾸며대게 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여 사람들의 입을 이길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변자辯者의 한계이다.
혜시는 날마다 지혜를 쏟아 사람들과 변론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천하天下변자辯者들과 기괴한 의론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들의 본질이다.
그러나 혜시의 구변은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천지는 참으로 장대하구나!”라고 하였다.
혜시가 품은 생각은 웅대하였으나 실제로 실천할 방법은 없었다.
남쪽 땅에 기인奇人이 있었으니 이름이 황료黃繚이다.
그가 〈혜시에게〉 하늘과 땅이 추락하지 않고 꺼지지 않는 이유와 비, 바람, 천둥이 일어나는 까닭을 물었다.
혜시는 사양하지 않고 응답하여 잘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대답하여 두루 만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을 그치지 않았으며 수다를 떨며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도 오히려 그것을 적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괴이한 말까지 보탰다.
그리하여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을 오히려 진실이라 하고, 말로 남을 이기는 것으로 명성을 얻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과 적절하게 지내지 못했으니 도덕道德을 추구하는 데는 빈약하고 외물外物을 추구하는 데는 강했으니 그가 나아간 길은 협소했다.
천지의 를 기준으로 혜시惠施의 재능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한 마리 모기나 한 마리의 등에가 수고롭게 날아다님과 같으니, 사물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를 일단一端에 충당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를 더욱 존귀하게 했다고 말한다면 위험하다.
혜시는 이 정도를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아니하고 산만하게 외물을 추구하여 싫증내지 않아서 끝내 말 잘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혜시의 재능은 멋대로 행동하여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으며 만물을 쫓아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메아리를 멈추게 하고자 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몸이 그림자와 경주하면서 그림자에게서 떨어지려 하는 것이니 슬픈 일이다.


역주
역주1 惠施多方 其書五車 其道舛駁 其言也不中 : 惠施는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추구하여 藏書가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으나, 그 도리가 잡박하여 그 말이 적중하지 못했음. 其書五車는 惠施가 소장했던 藏書가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다는 뜻(成玄英). 林希逸과 池田知久는 ‘書’를 ‘혜시의 著書’로 보았으나 취하지 않는다. 惠施의 생몰 연대는 侯外廬의 고증에 의하면 B.C.370에 태어나 B.C.310년까지 살았다(《中國思想通史》 제1권).
역주2 歷物之意 : 사물의 의미를 차례로 검토함. 成玄英은 “마음이 만물과 함께 노니는지라 차례대로 살펴서 구분할 수 있었다[心遊萬物 厤覽辯之].”라고 풀이했다. 《經典釋文》에는 厤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陸德明은 厤이 歷으로 표기된 판본이 있으며, 厤은 歷의 古字라고 풀이했다.
역주3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일컬어 大一이라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일컬어 小一이라 함. 〈秋水〉편 제1장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지극히 큰 것은 밖에서 에워쌀 수 없다[至精無形 至大不可圍].”고 한 것, 〈則陽〉편 제9장에서 “작기로는 견줄 것이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크기로는 둘러쌀 수 있는 것이 없는 極大에까지 이를 것이다[精至於無倫 大至於不可圍].”라고 한 대목과 거의 같다(高亨, 蔣錫昌). 다만 이것을 각각 大一과 小一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것은 이 〈天下〉편뿐이다.
역주4 無厚 不可積也 其大千里 :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올릴 수는 없으나, 그 넓고 큼은 천리 사방에 미침. 어떤 사물을 두께가 없을 정도로 평평하게 펴면 그 크기가 천리에 이를 것이라는 명제이다. 이설이 분분한 대목이다. 馮友蘭은 《중국철학사》에서 “두께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얇다는 것이다. 지극히 얇아서 두께가 없어짐에 이르는 것은 기하학에서 이른바 ‘面’이다. 두께가 없는 것은 체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면적은 있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그 크기가 천리에 이를 수 있다.”라고 풀이했는데(方勇‧陸永品) 적절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成玄英은 “이치가 이미 정미하여 잡아도 잡을 수 없고 형색이 절묘하니 어찌 두께가 있겠는가. 그 때문에 쌓아서 포갤 수 없다. 유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무가 되지도 않는다. 有와 無는 서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크기가 천리에 이른다[理旣精微 搏之不得 妙絶形色 何厚之有 故不可積而累之也 非但不有 亦乃不無 有無相生 故大千里也].”라고 풀이했는데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역주5 天與地卑 山與澤平 :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낮고 산과 못은 둘 다 평평함. 하늘보다 더 높은 것들과 비교하면 하늘도 낮은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명제이다. 또 산은 높이 솟아있지만 산보다 더 높이 솟은 것들과 비교하면 산도 평평한 것이고, 연못은 움푹 패여 있지만 더 깊이 패인 것들과 비교하면 연못도 평평한 부류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동일한 논리가 〈齊物論〉 제1장에서 “천지도 손가락 하나와 같고 만물도 한 마리 말과 같다[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고 한 데서도 나왔다. 《荀子》 〈不苟〉편에는 惠施와 鄧析의 주장으로 “산과 연못은 다 같이 평평하고 하늘과 땅은 다 같이 낮다[山淵平 天地卑].”라고 한 대목이 있고, 〈正名〉편에도 ‘山淵平’이라는 명제가 보인다.
역주6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 해는 중천에 떠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하고, 사물은 생기는 동시에 죽어감. 종결되는 시점, 곧 해가 떨어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해는 떠오르자마자 기울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죽는 시점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사물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睨는 ‘기운다[傾]’는 뜻(高亨). 李頤는 睨를 “흘겨보는 모양이다[側視貌].”라고 풀이했는데 옳지 않다. 〈齊物論〉편의 ‘方生方死’와, 〈秋水〉편의 ‘道無終始’의 주장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7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 크게는 같으면서 작게는 다른 것을 조금 다르다[小同異]고 함. 이설이 분분한 대목이다. 〈德充符〉편에서 “다른 것을 기준으로 보면 간과 쓸개도 그 차이가 楚나라와 越나라처럼 멀고, 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라고 했는데, ‘다른 것을 기준으로 보면 간과 쓸개도 그 차이가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다.’고 한 맥락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大同은 ‘크게는 같다.’는 뜻. 小同異는 ‘작게는 다름’. 同異는 ‘같고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뜻으로 결국 ‘다르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물정을 분별하게 되면 봄에 다름이 있게 되니 이는 작게 다름이다[物情分別 見有同異 此小同異也].”라고 풀이했다.
역주8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 만물이 물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고, 개별로서는 다 다른 것을 일러 크게 다르다[大同異]고 함. 역시 이설이 분분한데 위의 小同異와 마찬가지로 〈德充符〉편의 인용문 중 ‘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라고 한 맥락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9 南方無窮而有窮 :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음. 방향을 지칭하는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이라는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끝이 있다는 뜻이다. 방향을 가리키는 사방은 끝이 없다. 司馬彪와 李頤 모두 “사방은 끝이 없다[四方無窮].”고 풀이했다. 陸德明은 一說을 인용하여 “홀로 南方이라고만 말하면 남쪽의 한 지역만을 든 것이다[獨言南方 擧一隅也].”라고 풀이했다. 같은 표현이지만 지시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有窮과 無窮의 차이가 있게 됨을 말한 대목이다.
역주10 今日適越而昔來 : 오늘 越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함. 〈齊物論〉 제1장에 나오는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今日適越而昔至也].”고 한 논변과 다를 것이 없다. 문장으로서는 성립하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역주11 連環可解也 :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 이어진 고리는 고리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뜻이다. 成玄英이 “고리를 서로 꿰뚫을 때 빈 공간을 꿰뚫는지라 고리 자체를 꿰뚫은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두 고리가 서로 빈 공간을 꿰뚫어서 서로 다른 고리 속으로 파고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통해서 움직일 수 있다. 그 때문에 풀 수 있는 것이다[夫環之相貫 貫於空處 不貫於環也 是以兩環貫空 不相涉入 各自通轉 故可解者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한편 《戰國策》 〈齊策〉에는 제나라 왕이 秦에서 보내온 連環을 群臣들이 누구도 풀지 못함을 보고 망치로 때려 부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명제는 망치로 깨부수는 폭력적인 해법에 대하여 궤변에 의한 관념적인 해결법을 제시한 것이라는 견해(池田知久)가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2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越之南是也 : 나는 천하의 중앙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 燕나라의 북쪽과 越나라의 남쪽이 바로 중앙이다. 燕나라는 중국의 북쪽에 있는 나라. 越나라는 남쪽에 있는 나라. 천하의 크기는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천하의 입장에서 보면 燕나라와 越나라의 차이는 크지 않으므로 연나라 북쪽이건 월나라 남쪽이건 모두 중앙이 될 수 있다는 뜻. 이설이 분분한 대목이다. 成玄英의 풀이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司馬彪가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는 일정한 수치가 있지만 남쪽과 북쪽의 멀기는 한이 없다. 한이 없는 쪽에서 일정한 수치가 있는 쪽을 보면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는 처음부터 구분이 있지 않다. 천하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에 어디든 있는 곳이 중앙이 될 수 있고, 순환하여 끝이 없기 때문에 어디든 있는 곳이 시작이 될 수 있다[燕之去越有數 而南北之遠無窮 由無窮觀有數 則燕越之間未始有分也 天下無方 故所在爲中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고 풀이한 것이 비교적 적절한 풀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이 대목을 두고 장자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논변을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역주13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 두루 만물을 사랑하면 사물의 차별이 없어지고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됨. 〈齊物論〉편에 나온 “萬物은 나와 하나이다[萬物與我爲一].”라고 한 대목과 유사하다. 그러나 池田知久가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을 成玄英처럼 《莊子》의 齊物論 철학과 같다고 하는 자가 많으나, 엄밀하게 같은 것은 아니고 장자의 제물론 사상에 영향을 준, 선구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울러 바로 이 점이 혜시의 ‘歷物十事’가 〈天下〉편에 실린 이유라 할 것이다. 한편 福永光司는 “혜시가 주장하는 氾愛는 묵자가 주장하는 氾愛, 兼利(〈天下〉편 제2장)와 유사하지만, 묵자가 하늘의 뜻[天志]에 의해 兼愛를 이끌어내는 데 비해, 혜시는 萬物一體를 우주론적으로 귀납하여 氾愛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또 혜시는 天地一體라 하여 萬物一體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만물일체의 주장은, 〈齊物論〉 제1장에 나오는 ‘天下에는 가을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太山은 가장 작다. 일찍 죽은 아이보다 長壽한 사람이 없고 8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彭祖는 가장 일찍 죽은 것이다. 天地도 나와 나란히 生하고 萬物도 나와 하나이다[天下 莫大於秋毫之末 而太山爲小 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라고 한 대목과 유사하다. 그러나 〈齊物論〉에 나오는 萬物一體의 주장이 是와 非를 둘 다 잊은 忘言忘知의 경지에서 道와 노니는 것을[遊] 말한 것에 비해, 혜시의 만물일체론은 어디까지나 言知를 써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인식론적으로 근거를 부여하려는 점에서 다르다. 즉 혜시가 지적 분석을 중시하는 논리학자인데 비해, 장자는 체험적 진실을 사랑하는 철인이었다.”라고 설명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4 惠施以此爲大 觀於天下而曉辯者 : 혜시는 이상의 명제(歷物十事)를 뛰어난 것으로 자부하여, 이것을 천하에 공표하여 논리학자들을 설득하였음. 以此爲大는 자신의 주장을 최고라고 생각함. 成玄英은 “혜시는 이 도리를 가지고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변론가들을 깨우쳤다[惠施用斯道理 自以爲最 觀照天下 曉示辯人也].”라고 풀이했다. 또 成玄英은 ‘惠施以此爲大 觀於天下而曉辯者’로 大에서 絶句했는데, 陸德明과 林希逸은 大에서 절구하지 않고 ‘惠施以此 爲大觀於天下而曉辯者’로 절구하였다. 林希逸은 “大觀이란 이 이론을 가지고 홀로 천하에서 가장 고명하다고 생각했음을 말함이다. 그 때문에 그 주장을 가지고 변론을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쳤다[大觀者 言以此爲獨高於天下也 故以其說敎學辯之人].”라고 풀이했다.
역주15 天下之辯者相與樂之 : 천하의 논리학자들이 모두 서로 더불어 이것을 즐거워함. 成玄英은 “좋아하는 것이 이미 같아서 성정이 서로 감응했다. 그 때문에 域中의 변론가들이 즐거이 배웠다[愛好旣同 情性相感 故域中辯士 樂而學之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6 卵有毛 : 알에 털이 있다. 닭이나 새에는 깃털이 있는데 알에 털이 없다면 닭이나 새의 깃털이 어디에서 생겼겠느냐는 반론적 논리에 근거한 주장이다. 또 시간의 무한성을 기준으로 말하면 알에서 닭으로 변화하는 시간은 無와 같기 때문에 닭의 알에 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荀子》 〈不苟〉편에서는 惠施와 鄧析의 궤변으로 들고 있다.
역주17 鷄三足 : 닭에는 세 개의 발이 있다. 실재하는 닭의 발 둘에다, 닭의 발이라는 말[言]을 합치면 모두 셋이 된다는 주장이다. 《公孫龍子》 〈名實〉편에 “닭의 발이라고 하면 일단 하나이고, 발의 수를 헤아리면 둘이다. 발은 둘이면서 또 다른 말로서의 발이 있기 때문에 셋이다[謂之雞足則一 數足則二 二而一 故三].”라고 한 대목과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아울러 〈齊物論〉편 제1장에 “하나와 말이 합쳐지면 둘이 된다[一與言爲二].”라고 한 논리와 같다.
역주18 郢有天下 : 초나라 서울 영에 천하가 있다. 우주공간은 무한히 크므로 그 무한대의 우주공간에서 보면 작은 郢이나 크고 넓은 천하 전체와의 大小의 차는 無와 같다. 따라서 ‘천하 속에 郢이 있다.’고 할 것을 ‘郢 속에 천하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역주19 犬可以爲羊 : 개는 양이 될 수 있다. 개와 양은 모두 네발짐승이라는 점에서 同類이기도 하다. 〈德充符〉편 제1장에서 “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라고 한 논리와 같다. 또 이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를 양이라 부를 수 있고, 양을 개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역주20 馬有卵 : 말은 알을 깐다. 상식적으로 말은 胎生동물이다. 조류와 같은 卵生동물은 아니다. 그러나 胎生동물도 卵生동물도 동물이라고 하는 데에서는 같다. 역시 〈德充符〉편 제1장에서 “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라고 한 것과 같은 논리. 말이든 조류든 같은 동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말이 알을 깐다고 할 수도 있다는 맥락.
역주21 丁子有尾 :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 丁子는 개구리로 楚나라 지역의 방언. 成玄英은 “초나라 사람들은 개구리를 丁子라 부른다[楚人呼蝦蟆爲丁子也].”라고 풀이했다. 상식적으로 개구리에게는 꼬리가 없고 올챙이에게 꼬리가 있다. 하지만 올챙이가 變化成育한 것이 개구리이다. 그런데 꼬리가 있는 올챙이로부터 꼬리 없는 개구리로 변화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커다란 우주의 시간에 비유하면 無이다. 따라서 그 시간을 무시하면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개구리와 올챙이는 이름은 다르나 실질은 같다. 그래서 名을 무시하고 實만을 취하면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역주22 火不熱 : 불은 뜨겁지 않다. 불 그 자체는 뜨겁지 않다.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다. 불을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감각, 지각의 작용이므로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은 뜨겁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福永光司는 이 명제가 뒤에 위진 시대의 嵆康이 ‘聲無哀樂論’에서 ‘음악의 歌曲 그 자체는 哀樂의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哀樂의 감정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3 山出口 :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커다란 山 조차도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다. 이 명제는 《荀子》 〈不苟〉편에서 ‘卵有毛’와 함께 惠施와 鄧析의 궤변으로 인용되고 있다. 거대한 산도 사람의 작은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형체를 갖는 것들에서 보이는 大小의 차이는 무한대의 우주공간에서 보면 無와 같으므로. 〈齊物論〉편에서 “天下에는 가을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太山은 가장 작다[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太山爲小].”라고 하는 주장이 가능하다. 成玄英은 “산은 본래 이름이 없고 산이란 이름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山本無名 山名出自人口].”라고 풀이했는데 山이란 말[言]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이해한 주장이다. 또 司馬彪. 馬叙倫. 王叔岷. 高亨, 金谷治, 安東林 등은 山도 입의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메아리를 그 예로 들고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4 輪不蹍地 : 수레바퀴는 땅에 붙어 있지 않다. 만약 수레바퀴가 땅에 붙어 있다면 바퀴가 굴러갈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지면에 접한 어느 순간(점)과 다음의 같은 순간(점)까지의 사이에는 중간 상태, 곧 땅에 붙지 않는 상태가 존재한다. 따라서 전후의 접점을 무시하고 중간적인 상태만을 문제 삼는다면 ‘輪不蹍地’ 즉 수레바퀴는 지면에 접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성립한다(成玄英. 福永光司).
역주25 目不見 : 눈은 보지 못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知覺 작용을 하는 정신이 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곧 사물을 보는 작용은 감각기관인 눈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눈, 빛, 그리고 지각 작용이 일체가 되어 비로소 성립된다. 비슷한 논의가 《墨子》 〈經說 下〉, 《公孫龍子》 〈堅白〉편 등에 보인다.
역주26 指不至 至不絶 :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까지의 길이는 끊어지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무한하다. 따라서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고, 지시하는 것이 무한히 이어지므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 이설이 분분한데 어느 견해도 명확하지 않다. 馬叙倫은 《列子》 〈仲尼〉편에 “有指不至 有物不盡”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至不絶’을 ‘物不盡’의 誤寫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金谷治, 安東林 등은 馬叙倫의 견해를 따라 ‘指不至 物不盡’으로 이해하였다.
역주27 龜長於蛇 : 거북이는 뱀보다 길다. 物의 長短의 차이는 ‘무한의 길이’에서 보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북이와 뱀의 長短의 차이는 무시될 수 있다. 〈齊物論〉편 제1장에 나오는 “일찍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이가 없고 팽조는 단명하였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라고 한 대목과 유사한 논의이다. 한편 司馬彪는 “뱀의 모양은 비록 길지만 목숨은 오래가지 못하고 거북이는 모양이 짤막하지만 목숨은 길다[蛇形雖長而命不久 龜形雖短而命甚長].”라고 풀이하여 ‘龜長於蛇’는 겉모습의 길고 짧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수명의 장단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역주28 矩不方 規不可以爲圓 : 곱자로 네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 規矩와 方圓의 상대적 불확실성을 논한 것. 실재하는 사각과 원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가 철학자들이 “그림쇠와 곱자는 네모와 원을 만드는 지극한 표준이고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표준이다[規矩 方圓之至也 聖人 人倫之至也].”라고 하여 보편적 인륜을 강조하는 견해(《孟子》 〈離婁 上〉편)를 반박하는 주장이다. 절대적 方(사각)과 절대적 圓(원형)에 대해 規와 矩는 상대적 불확실성 밖에 못 가진다는 뜻.
역주29 鑿不圍枘 : 구멍에 꽂아 넣은 장부를 구멍이 꽉 둘러싸고 있지 않다. 鑿은 나무나 돌로 뚫은 구멍, 끌[鑿]로 판 장부 구멍. 枘는 한쪽 끝을 다른 쪽 구멍에 맞추기 위해 얼마쯤 가늘게 만든 부분. 林希逸은 “枘가 비록 구멍 속에 있지만 枘가 도는 것은 구멍이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枘雖在鑿之中 而枘之旋轉 非鑿可止 則謂之不圍.”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鑿은 구멍이고 枘는 구멍 속에 집어넣는 나무이다[鑿者 孔也 枘者 內孔中之木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0 飛鳥之景未嘗動也 : 나는 새의 그림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는 적이 없다. 그림자는 결코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는 의존적인 존재이므로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새이다. 새는 움직여도 그림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자는 빛에 의해 생기므로 빛에 의해 지면에 투사되는 새의 그림자는 한 순간 한 순간 지면에 떨어져 정지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 희랍의 철학자 제논이 “나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고 주장한 명제와 같이 시간은 무한히 분할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을 기준으로 말하면 나는 새도 정지된 모습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역주31 鏃矢之疾이 而有不行不止之時 : 살촉이 붙은 화살이 빨리 날아가더라도 날아가지도 머물지도 않을 때가 있다. 鏃矢는 날카롭고 가벼운 화살, 살촉이 붙은 화살. 한 순간 한 순간은 간다[行]고 할 수도 멈춘다[止]고 할 수도 없다. 빠르다고 해도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가는 것은 분명하다. 촉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할하면 動이라고도 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金谷治, 池田知久). 《列子》 〈仲尼〉편에서 公孫龍이 설명하고 있는 弓의 명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일 것이다(福永光司). 《列子》에 나오는 公孫龍이 孔穿을 속인 이야기는 “활의 명인[善射者]은 뒤에 쏜 화살촉을 앞에 쏜 화살의 오늬에 명중시켜 차례로 쏘아서 앞뒤의 화살이 한 줄로 연달아 이어지게 하며, 앞의 화살이 표적에 이르러 적중해서 아직 떨어지지 않았을 때 뒤의 화살이 차례로 이어져 맨 마지막 화살의 오늬는 아직 활시위에 매겨져 있어 마치 일직선처럼 보인다[善射者 能令後鏃中前括 發發相及 矢矢相屬 前矢造準 而無絶落 後矢之括猶銜弦 視之若一焉].”라고 했다.
역주32 狗非犬 :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 狗는 강아지. 犬은 成犬. 이 명제는 아마도 墨子學派에서 “狗는 犬이다.”라고 한 정의에 반박을 가한 것일 것이다(福永光司). 묵자학파는 狗와 犬을 ‘實’, 즉 실질적인 면에서 보면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狗와 犬은 이름이 다른 이상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이 명제는 名과 實을 분리하는 궤변으로 아주 적합한 예라 할 수 있다. 司馬彪는 “狗와 犬은 實은 같지만 名이 다르다. 名과 實을 합쳐서 보면 저기서 狗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犬이라 하는 것과 같고, 名과 實을 분리해서 보면 저기서 말하는 狗는 犬과 다르다[狗犬同實異名 名實合 則彼所謂狗 此所謂犬也 名實離 則彼所謂狗 異於犬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3 黃馬驪牛三 : 황색 말과 검은 소는 합해서 셋이다. 驪牛는 〈逍遙遊〉편의 斄牛와 같은 ‘검은 소’. 이 명제는 ‘鷄三足’과 같은 명제이다. ‘同異를 合하는’ 궤변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黃馬와 驪牛는 牛馬(동물)로서 一體를 이루고, 그런 의미에서 동물, 또는 牛馬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개념이고 하나의 단위. 黃馬가 하나의 단위, 驪牛가 하나의 단위, 모두 합해서 셋이 된다는 주장이다.
역주34 白狗黑 : 흰 개는 검다. 白狗와 黑狗는 狗로서는 같다. 또 黑이나 白은 색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같다는 점에서 말하면 白狗는 곧 黑狗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白狗는 검다.”고 할 수 있다. 大同異만 취하고 小同異는 무시한 궤변 중의 하나.
역주35 孤駒未嘗有母 : 어미 없는 망아지는 본시 어미가 없다. 孤駒란 말은 어미가 없어야만 가능한 개념. 따라서 어미가 있다고 말하면 ‘孤’라는 규정과 모순된다. 따라서 어미가 없다고 해야 맞다는 궤변. 金谷治는 어미가 없으므로 孤가 되었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이다. 安東林은 孤駒가 된 순간 그 전의 駒였던 상태와는 절단된 것이라고 했는데 역시 비슷한 견해이다. 또 어미 없는 새끼는 생각할 수 없으나 고아가 된 어린 망아지는 결코 母駒가 없다는 견해(池田知久)도 있다. 이 명제는 《列子》 〈仲尼〉편에도 ‘白馬非馬’와 함께 公孫龍의 궤변으로 실려 있다. 백마가 말이 아니듯이 孤駒도 駒가 아님. 駒면 어미가 있으나 孤駒는 駒가 아니므로 결코 어미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다.
역주36 一尺之捶 日取其半 萬世不竭 : 한 자 길이의 채찍을 매일 절반씩 자르면 영원토록 다 자를 수 없다. 이 대목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한다고 한 희랍의 철학자 제논의 궤변을 상기시킨다. 제논의 궤변이 공간의 무한분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명제도 공간의 무한분할을 전제로 하고 있다. 福永光司에 의하면 六朝시대 불교학자 慧遠도 《大乘大義章》에서 이 명제를 비판하고 있다. 당세의 辯者(궤변논리학자)들은 이상의 명제(辯者二十一事)를 가지고 혜시와 더불어 서로 응수하면서 죽을 때까지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역주37 桓團公孫龍辯者之徒 : 桓團과 公孫龍은 변자의 무리임. 桓團은 《列子》 〈仲尼〉편의 韓檀과 같은 인물(吳汝綸). 公孫龍은 趙의 平原君에게 벼슬한 변론가. 成玄英은 “모두 조나라 사람으로 변사였다. 客으로 평원군의 家에 유세하였고, 공손룡은 守白論을 저술하여 세상에 행해졌다[並趙人 皆辯士也 客游平原君之家 而公孫龍著守白論 見行於世].”라고 풀이했다.
역주38 惠施日以其知與人之辯 特與天下之辯者爲怪 此其柢也 : 혜시는 날마다 지혜를 쏟아 사람들과 변론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天下의 辯者들과 기괴한 의론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들의 본질임. 爲怪는 ‘기괴한 의론을 만들었다.’는 의미. 柢는 ‘본질’, ‘근본’.
역주39 惠施之口談 自以爲最賢 : 혜시의 구변은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함. 成玄英은 “혜시가 도리를 풀이하는 것은 장자에 버금가니 구변을 더하면 여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니 어찌 여러 사람들이 단지 변론만 할 뿐인 것과 같겠는가를 말함이다[言惠施解理 亞乎莊生 加之口談 最賢於衆 豈似諸人直辯而已].”라고 풀이했다.
역주40 曰 天地其壯乎 : 그리하여 말하기를 ‘천지는 참으로 장대하구나!’라고 함. 오직 천지만이 자기보다 위대하다고 여김. 司馬彪는 “혜시는 오직 천지만이 자기보다 더 장대하다고 여겼다[惠施唯以天地爲壯於己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1 施存雄而無術 : 혜시가 품은 생각은 웅대하였으나 실제로 실천할 방법은 없었음. 存은 마음속에 품은 생각. 無術에서 術은 방법, 방도. 즉 無術은 ‘실제로 장대함을 실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壯은 장대함이고, 術은 방도이다[壯 大也 術 道也].”라고 풀이했다. 司馬彪는 “혜시의 뜻이 남을 이기는 데 있었기 때문에 도리를 실천할 방도가 없었다[意在勝人 而無道理之術].”라고 풀이했다.
역주42 南方有倚人焉 曰黃繚 問天地所以不墜不陷 風雨雷霆之故 : 남쪽 땅에 奇人이 있었으니 이름이 황료이다. 그가 혜시에게 하늘과 땅이 추락하지 않고 꺼지지 않는 이유와 비, 바람, 천둥이 일어나는 까닭을 물었다. 黃繚는 초나라 사람으로 변론에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方勇‧陸永品). 徐廷槐는 《南華簡鈔》에서 “위나라 왕이 혜시를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초나라 사람 중에 변론을 잘하는 황료 같은 무리가 다투어 힐난했다[魏王使惠子於楚 楚中善辯如黃繚輩 爭爲詰難].”라고 풀이했는데 지금의 《戰國策》에는 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方勇‧陸永品). 倚人은 奇人. 倚와 奇는 통용하는 글자(郭慶藩). 畸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陸德明). 故는 ‘원인’.
역주43 弱於德하고 强於物하니 其塗는 隩矣 : 도덕을 추구하는 데는 빈약하고 외물을 추구하는 데는 강했으니 그가 나아간 길은 협소했음. 장자가 혜시를 평가한 말(池田知久). 塗는 道(成玄英). 隩는 ‘깊다’, 또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치우쳐 있다’는 뜻이다. 한편 李頤는 隩를 “깊음이니 혜시의 도가 깊음을 말함이다[深也 謂其道深].”라고 풀이하여 장자가 혜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혜시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적절치 않다. 또 金谷治는 隩를 邊으로 풀이했는데, 혜시의 논변은 핵심을 찾지 못하고 주변에만 맴돌았다는 뜻으로 이해한 견해로 참고할 만하다.
역주44 充一尙可 曰愈貴道 幾矣 : 그를 道의 一端에 충당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道를 더욱 존귀하게 했다고 말한다면 위험함. 幾는 위태로움. 危, 또는 殆와 같다(王夫之). 成玄英은 “幾는 가깝다는 뜻이다[幾 近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치 않다.
역주45 惠施之才 駘蕩而不得 逐萬物而不反 是窮響以聲 形與影競走也 : 혜시의 재능은 멋대로 행동하여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으며 만물을 쫓아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메아리를 멈추게 하고자 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몸이 그림자와 경주하면서 그림자에게서 떨어지려 하는 것임. 駘蕩은 구속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함. 成玄英은 “駘는 放蕩함이다[駘 放也].”라고 풀이했다. 窮響은 소리를 다하게 함, 곧 소리를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以聲은 소리를 지름. 따라서 窮響以聲은 소리를 질러 메아리를 그치게 하려는 어리석은 태도를 말한다. 形與影競走도 같은 맥락이다.

장자(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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