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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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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老子而問曰
聞夫子 聖人也라하고
而來願見하야
而不敢息호니
老子 한대
士成綺 明日 復見曰
昔者 호니 로소니
老子曰
夫巧知神聖之人 하노라
라하고 呼我馬也어든 而謂之馬로라하니
士成綺 하야 而問호대
修身 若何잇고
老子曰
하며 而目하며하며 而口하며 而狀혼대 하며
하며 하며 察而審하며 知巧而하니


사성기士成綺가 어느 날 노자老子를 뵙고 이렇게 물었다.
“저는 선생이 성인聖人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일부러 먼 길을 마다 않고 와서 뵙고자 했습니다.
백일 동안 발에 못이 수없이 박히면서도 감히 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선생의 모습을 보건대 선생은 성인이 아니십니다.
쥐구멍에 먹다 남은 쌀 알갱이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니 어질지 못한 짓입니다.
날것과 익힌 것들이 눈앞에 잔뜩 남아 있는데도 한없이 재물을 쌓고 거두어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노자老子는 조용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성기士成綺가 다음 날 다시 노자를 뵙고 말했다.
“어저께 저는 선생을 헐뜯었는데 지금은 제 마음이 바르게 되어 그런 생각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요?”
노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거나 신성神聖한 사람의 경지를 나는 스스로 벗어났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어제 나를 소라고 불렀다면 나도 스스로 소라고 했을 것이고 나를 말이라고 불렀다면 나도 말이라고 했을 것일세.
만일 그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시 더 큰 재앙을 받을 것이니 내가 승복하는 것은 늘 그렇듯 떳떳하게 승복하는 것이지 복종하기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네.”
사성기士成綺가 노자를 비스듬히 뒤따라 걸으며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걸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몸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자가 말했다.
“자네의 얼굴은 깎아지른 듯 모나며 자네의 눈은 똑바로 쏘아보고, 자네의 이마는 높이 솟아 있고, 자네의 입은 크게 벌려져 있고, 자네의 풍채는 높은 산처럼 위압적인 모습이어서 마치 내달리는 말을 억지로 묶어 멈추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움직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네만 일단 튕기면 움직임이 쇠뇌같이 빠르고 살피는 일은 상세하고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데다 마음의 교만함이 밖으로 드러나 보인다.
이런 태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니 변경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을 ‘도둑놈’이라 하더군.”


역주
역주1 士成綺(사성기) : 인명. 가공의 인물. 寓意는 자세하지 않다. 陸德明은 “사람의 성명이다[人姓名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士成綺는 성은 士이고 자가 成綺인데 어느 곳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士成綺 姓士 字成綺 不知何許人].”라고 풀이했다. 아마도 춘추시대 晉의 귀족이었던 士氏의 一族일 것이다.
역주2 吾固不辭遠道 : 내가 정말 일부러 먼 길을 마다 않았음. 固는 ‘정말, 참으로’의 뜻. 張之純, 馬叙倫 등은 固를 故의 가차자로 보았는데 ‘일부러’라는 뜻까지 가미하여 번역하였음.
역주3 百舍重趼 : 백일 동안 발에 못이 수없이 박힘. 舍는 군대가 하루 동안 행군하는 거리. 1舍는 30리, 약 10㎞라는 설이 있다. 하루 행군하고 쉰다는 뜻에서 舍자를 쓴 것이다. 舍가 하루 동안 행군하는 거리로 쓰이는 용례는 《春秋左氏傳》에 자주 보인다. 司馬彪는 百舍를 “백일 동안 머물러 잠잠이다[百日止宿也].”라고 풀이하여 舍를 館舍에 머문다는 뜻으로만 본 듯한데 잘못이다. 趼은 司馬彪가 ‘굳은살[胝]’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4 今吾觀子非聖人也 : 지금 내가 당신의 모습을 보니 성인이 아님. 〈天地〉편 제6장에서 華 땅의 封人이 堯에게 “처음에 나는 당신을 성인이라 여겼더니 지금 보니 그저 그런 군자이다[始也 我以女爲聖人邪 今然君子也].”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이 장 전체의 서사구조는 〈應帝王〉편 제5장에 나오는 鄭나라의 무당 季咸과 列子, 그리고 열자의 스승 壺子의 이야기와 비슷한 구성이다.
역주5 鼠壤有餘蔬 : 쥐구멍에 먹다 남은 쌀 알갱이가 있음. 수채 구멍에 쌀 알갱이가 버려져 있다는 뜻으로 음식을 아끼지 않는 태도를 비난하는 표현이다. 鼠壤은 쥐구멍의 흙덩어리. 편의상 쥐구멍으로 번역했다. 蔬는 쌀 알갱이. 푸성귀라는 견해도 있으나 의미상 쌀 알갱이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成玄英은 鼠壤을 ‘쥐구멍의 흙 속이다[鼠穴土中].’라고 풀이했고, 《廣雅疏證》에 의하면 齊魯之間의 방언이다. 餘蔬는 司馬彪가 ‘蔬는 糈(서)로 읽어야 하니 쌀 알갱이이다. 쥐구멍 속에 버려진 쌀 알갱이가 있는 것이니 지나치게 더러운 것이다[蔬讀曰糈 糈粒也 鼠壤內有遺餘之粒 穢惡過甚也].’라고 풀이했다. 成玄英은 ‘채소가 남아 있음이다[有餘殘蔬菜].’라고 하여 쌀 알갱이로 보지 않고 채소라고 보았다. 馬叙倫은 蔬자는 疏가 옳으며, 疏는 정미하지 않은 거친 쌀[麤米]을 말한다고 했다.”라고 함.
역주6 棄妹不仁也 : 아랑곳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니 어질지 못함. 棄妹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버려 둠. 棄와 妹는 같은 뜻이고 妹는 抹의 가차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妹를 昧자로 보고 쌀 알갱이가 어두운 곳에 방치되어 있는데 거두지 않으니 불인하다고 비난하는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 책의 저본으로 채택한 郭慶藩의 《莊子集釋》에 之者 두 글자가 있어 ‘棄妹之者’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之者’ 두 글자가 없는 쪽을 취해서 삭제하였다. 王叔岷에 의하면 현재도 ‘棄妹之者’로 된 판본이 있다고 하는데 역시 취하지 않는다. 한편 呂惠卿은 妹자를 글자 그대로 少女의 뜻으로 보고 “쥐구멍 흙 속에 남은 푸성귀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막내 여동생이 굶주리는 것을 구휼할 수 있는데 소녀를 버렸으니 불인한 행위이다. 妹는 少女이다[鼠壤有餘蔬 則可以振季女之斯飢 而棄妹 則不仁也 妹 少女也].”라고 했는데 앞의 허무맹랑한 낭설일 뿐이다. 羅勉道, 林雲銘, 張之純, 馬叙倫도 비슷비슷하다(池田知久). 만약 노자에게 누이동생이 있었고 노자가 그것을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면 士成綺가 이제 와서 새삼 그 사실을 거론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 정도의 과실이라면 이어지는 노자의 말처럼 두루뭉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대충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글쓴이 나름의 논리가 갖추어질 수 없다. 이 장의 내용이 허구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 해도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林希逸은 “채소를 먹고 남은 것들을 쥐구멍 어두운 곳에 버림이다. 妹는 昧와 같으니 어둡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는 음식물을 아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불인이라 한 것이다[食蔬之餘 棄於鼠壤暗昧不明之地 妹與昧同 暗也 是不愛物也 故以爲不仁].”라고 풀이했는데 蔬를 채소로 본 것은 적절치 않지만 음식물을 아끼지 않는 행위를 비난한 것으로 본 것이 상식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참고할 만하다. 다만 妹자를 昧자로 본 것은 여전히 미흡하다. 朱得之도 같은 의견이다. 이 외에 褚伯秀는 “채소의 뿌리만 먹고 끄트머리는 버렸으니 이것은 음식물을 아끼지 않는 행위이므로 불인에 가깝다[取蔬之本而棄其末 是不惜物 近於不仁].”라고 번역했는데 너무 소심한 해석이다. 馬其昶은 妹는 昧의 가차이고 “棄와 妹 두 글자는 같은 뜻이다[棄妹二字同義].”라고 했는데 池田知久가 말하였듯이 이것이 옳다. 특히 妹를 抹의 가차자로 보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된다. 王先謙과 奚侗, 楊樹達 등도 조금씩 다르지만 馬其昶과 같은 방향의 견해를 제시했다(池田知久). 다만 楊樹達은 妹자를 投자와 같다고 보고 妹와 投의 고음이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특이한 견해로 참고할 만하다.
역주7 生熟不盡於前而積斂無崖 : 날것과 익힌 것들이 눈앞에 잔뜩 남아 있는데도 한없이 재물을 쌓고 거두어들임. 生은 날것. 熟은 익힌 음식. 司馬彪는 生을 膾라고 풀이했다. 林希逸은 “넉넉히 쌓아둠을 말한 것이다. 生熟은 날것과 익힌 것이 눈앞에 잔뜩 남아 다 쓰지 않았는데도 거두어들이고 쌓기를 그치지 않음이다[言其積蓄有餘也 生熟者 生物熟物 在目前者用不盡也 猶且收積不已].”라고 풀이한 것을 따른다(池田知久).
역주8 漠然不應 : 조용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음. 漠然은 嗼然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馬叙倫이 嗼의 가차자라 한 것이 적절하다. 呂惠卿이 “조용히 대꾸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뜻이 소멸되어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물리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漠然不應 乃所以使其意消而心卻也].”라고 풀이했다(池田知久).
역주9 吾有刺於子 : 어저께 저는 선생을 헐뜯었음. 刺는 찌른다, 헐뜯는다는 뜻이고, 於는 ‘…에 대해’, ‘…을’의 뜻. 子는 2인칭 대명사인데 여기서는 ‘선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역주10 吾心 正卻矣 : 내 마음이 바르게 되어 그런 생각을 물리치게 되었음. 正은 마음을 삐딱하게 먹지 않고 올바르게 먹게 되었다는 뜻. 正자를 止(于鬯)나 乏(武延緖), 또는 屈(馬叙倫)자 등의 가차자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근거가 박약하다. 억측을 벗어나지 않는다(池田知久). 또한 池田知久에 의하면, 卻은 陸德明이 “어떤 사람은 그만둠이라고 했다[或云 息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비움이니 그만둠이다[空也 息也].”라고 풀이했지만, 林希逸이 “물리침이다. 지난번에 비웃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 마음이 다하여 물리쳐서 없게 되었으니 이미 노자를 만나 보고 난 뒤에 홀연히 깨닫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退也 向有所譏 今其心盡退然無有 謂旣見之後 忽然有覺也].”라고 한 것이 가장 적절한 풀이라 하였다.
역주11 何故也 : 무슨 까닭입니까? 也는 의문사. 자신의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스스로 몰라서 묻는 말이다. 宣穎은 “노자에 의해서 바뀌게 되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함이다[爲老子所移而不覺].”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2 吾自以爲脫焉 : 나는 스스로 벗어났다고 생각함. 脫은 벗어났다, 超脫하였다는 뜻. 郭象은 “지나감이다[過去也].”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떠남이니 그보다 더 나음을 말한 것이다[離也 言出乎其上也].”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적절하다. 王先謙이 “그대가 나를 성인에 견주었지만 나는 오래전에 그런 경지를 벗어나서 그런 명성은 내가 추구하지 않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言子儗我聖人 吾久自以爲脫免 其名皆我所不居].”라고 풀이한 것이 이 구절의 취지를 잘 설명하고 있어 이 해석을 따른다(池田知久).
역주13 昔者子呼我牛也而謂之牛 : 자네가 어제 나를 소라고 불렀다면 나도 스스로 소라고 했을 것임. 昔者는 여기서는 ‘어제’, ‘어저께’. 〈應帝王〉편 제1장에서 “어느 때에는 자신을 말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자기를 소라고 여긴다[一以己爲馬 一以己爲牛].”라고 한 것을 참조할 것(陸樹芝, 池田知久).
역주14 苟有其實 人與之名而弗受 : 만일 그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齊物論〉편 제1장에서 “모든 사물은 본래 그렇다고 할 만한 사실을 지니고 있다[物固有所然].”라고 한 것과 같은 思想이다(池田知久). 위 문장에 나온 牛‧馬의 이야기와 함께 만물제동의 철학을 변형한 형태이다. 名‧實은 牛‧馬에 대해 말한 것이다(于鬯, 池田知久). 또 〈逍遙遊〉편 제2장에서 “이름이란 내용의 손님이다[名者 實之賓也].”라고 한 말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阮毓崧, 池田知久).
역주15 吾服也 恒服 : 내가 승복하는 것은 떳떳하게 승복한 것임. 내가 남의 말에 승복하는 것은 一時의 생각이 아니고 늘 그러한, 平常의 承服이라는 뜻.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무심히 승복하는 것이라는 뜻도 된다. 羅勉道가 “服은 따름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바로 일상적으로 복종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단지 복종할 만한 이유가 따로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말이 복종하기에 부족하더라도 또한 복종한다[服從也 吾之服從人 乃乎日常有服從之心 不是止服其有可服者 雖其言不足服 亦服之也].”라고 풀이한 것이 의미가 깊다(池田知久).
역주16 吾非以服 有服 : 복종하기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님. 복종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馬叙倫은 有를 爲의 가차자라 했는데 그렇게 보면 문장이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에 참고할 만하다. 이 편 제1장에서 “聖人이 고요함을 지키는 것은 고요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해서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聖人之靜也 非曰 靜也善 故靜也].”라고 할 때의 의미와 비슷하다(林希逸). 〈齊物論〉편 제1장의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道라고 한다[已而不知其然 謂之道].”라고 한 부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池田知久).
역주17 鴈行避影 : 비스듬히 뒤따라 걸으며 그림자를 피함. 鴈行은 기러기의 행렬처럼 비스듬히 뒤따라 걷는 모양. 避影은 그림자를 피해서 밟지 않는다는 뜻. 모두 상대를 공경하는 태도를 표현한 말이다. 《禮記》 〈王制〉편에 “어버이의 나이에 해당하는 어른과 길을 갈 때는 따라 걷고, 형의 나이에 해당하는 연장자와 길을 갈 때는 비스듬히 뒤따라 걷고 벗들과 함께 갈 때는 서로 앞서지 않는다[父之齒隨行 兄之齒鴈行 朋友不相踰].”라고 했는데 참고할 필요가 있다(福永光司).
역주18 履行遂進 : 천천히 걸어 가까이 다가감. 成玄英은 履行을 “감히 그 자취를 밟지 않음이다[不敢履躡其跡].”라고 풀이했지만 不자가 없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또한 신을 신은 채 걷는다는 異說도 있지만 취하지 않는다. 林希逸이 “조금씩 나아가는 모양이다[漸行漸進之貌].”라고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역주19 而容崖然 : 자네의 얼굴은 깎아지른 듯 모나며. 成玄英이 “스스로 높은 벽이 되어 느긋하게 다른 사람에게 맞추지 못함이다[自爲崖岸 不能舒適].”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呂惠卿은 “마치 다른 사람과 교제하지 않을 듯함이다[若不與物交].”라고 풀이했는데 모난 모양을 잘 설명하고 있다. 郭象은 “달려 나감이 불안한 모습이다[進趨不安之貌].”라고 풀이했는데 맥락상 부적절하다. 而容의 ‘而’는 물론 2인칭 대명사. ‘너’, ‘자네’의 뜻. 以下同.
역주20 衝然 : 똑바로 쏘아보는 모양. 郭象은 “불쑥 튀어나온 모양이다[衝出之貌].”라고 했고, 林希逸은 “눈이 튀어나올 듯 쏘아보는 모양[突視之狀].”이라 했는데 모두 적절한 풀이이다. 成玄英은 “마음이 이미 불안하게 되면 눈 또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다. 그 때문에 좌고우면하고 부릅떠 쳐다봄에 이리저리 막히는 것이다[心旣不安 目亦馳動 故左盼右睇 睢盱充詘也].”라고 풀이했는데 너무 번거로운 해석이다. 呂惠卿은 “바깥으로 외물을 쫓아감이다[逐物於外也].”라고 했는데 맥락을 다소 놓친 듯한 풀이이다.
역주21 顙頯(규)然 : 이마가 높이 솟아 있는 모양. 이마가 툭 튀어나온 모양으로 거만한 모습을 말한다. 郭象은 “높이 드러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모양[高露發美之貌].”이라 했고 成玄英은 “이마가 높이 솟구쳐 화려한 장식을 드러냄이니 이 같은 몸가짐을 지켜서 다른 사람을 깔봄이다[顙額高亢 顯露華飾 持此容儀 矜敖於物].”라고 풀이한 것이 거만한 태도를 표시하기에 적절하다. 〈大宗師〉편 제1장에도 이미 ‘其顙頯’라고 나와 있다. 거기서는 ‘이마가 넓고 평평하다’고 번역하였다.
역주22 鬫(함)然 : 크게 벌려진 모양. 사람들에게 소리를 크게 질러 댄다는 뜻. 闞은 소리가 크다는 뜻이다. ‘虎怒聲’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많다. 郭象은 “범이 소리지르는 모양이다[虓豁之貌].”라고 했다.
역주23 義然 : 산처럼 위압적임. 義然은 〈大宗師〉편 제1장에 이미 나왔다(郭慶藩). 兪樾과 馬叙倫의 고증을 따라 ‘義’를 峨로 보고 높이 솟은 모양[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24 似繫馬而止也 : 마치 내달리는 말을 억지로 묶어 멈추게 하고 있는 것 같음. 池田知久는 몸은 가만히 있지만 마음은 이리저리 내달리는 모습을 표현한, 〈人間世〉편 제1장에 보이는 坐馬也에 해당한다고 하고 있다(林希逸, 朱得之, 林雲銘, 陳壽昌).
역주25 動而持 : 움직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음. 焦竑은 動而持를 아래의 發也와 연속시켜서 ‘動而持發也 機察而審’으로 구두하고 武延緖도 같은 의견이지만 옳지 않다(池田知久). 이설이 분분하지만 宣穎이 “움직이고 싶지만 억지로 붙들고 있음이다[欲動而强要持].”라고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역주26 發也機 : 일단 튕기면 움직임이 쇠뇌같이 빠름. 〈齊物論〉편 제1장의 “활 틀에 건 화살과 같이 〈모질게〉 튕겨 나가는 것은 是非를 따져 대는 것을 말함이다[其發若機栝 其司是非之謂也].”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林希逸, 林雲銘).
역주27 覩於泰 : 마음의 교만함이 밖으로 드러나 보임. 覩는 見과 같이 ‘드러나 보인다’는 뜻이고 泰는 泰然한 모습으로 여기서는 ‘교만한 모습’을 뜻한다. 郭象은 泰를 “본성보다 많음을 말한 것이다[多於本性之謂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유위로 인해 일이 많아진 것[有爲之多事].”이라 했지만 충분하지 않다. 林希逸이 “스스로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여 교만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남이다[自持其智巧 而驕泰之意 見於外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28 凡以爲不信 : 이런 태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임. 郭象 이래로 ‘以爲’의 主語를 老子로 하는 것이 정설이다. 褚伯秀가 “세속에서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凡俗以余言爲不信].”라고 풀이한 것은 뜬금없는 견해이다. 王敔가 “모두 스스로 믿을 수 없어서 겉으로 인의를 가장한 것이다[皆不能自信 而外假於仁義].”라고 풀이한 것이 맥락을 잘 살린 正解이다(池田知久).
역주29 邊竟有人焉 其名爲竊 : 변경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을 ‘도둑놈’이라 하더군. 사성기의 행동에 대한 풍자이다. 竟자가 境으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王孝魚). 司馬彪는 “먼 곳에 일찍이 이런 사람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言遠方嘗有是人].”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사성기의 행동은 못됨이 또한 그러하니 거동의 사나움이 마치 이 도적과 같다[成綺之行 其猥亦然 擧動睢盱 猶如此賊也].”라고 풀이했다. 馬其昶과 焦竑은 竊을 《論語》 〈陽貨〉편의 ‘穿踰之盜’, 《孟子》 〈盡心 下〉편의 ‘穿踰之類’에 해당한다고 했다(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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