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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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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 謂無爲謂하야
予欲有問乎若하노라
知 不得問하야 하야之上而睹하야
知 以之言也 問乎狂屈한대 狂屈曰
予 知之하노니
將語若호리라 하야늘
知 不得問하야 反於하야 見黃帝而問焉한대 黃帝曰
無思無慮라야 始知道하고 無處無服이라야 始安道하고 하리라
知 問黃帝曰
我與若 知之 彼與彼 不知也 其孰是邪
黃帝曰
彼無爲謂 眞是也 狂屈 似之하고 我與汝 終不近也하니라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이오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이리오
라하니 聖人 貴一하나니라
知 謂黃帝曰
吾問無爲謂호니 無爲謂 不應我하니
非不我應이라 不知應我也니라
吾問狂屈호니 狂屈 中欲告我而不我告하니
非不我告 中欲告而忘之也니라
今予 問乎若호니 知之하니 奚故 不近
黃帝曰
予與若 終不近也 以其知之也니라


가 북쪽으로 현수 물가에 놀러 가서 은분隱弅의 언덕에 올랐다가 마침 무위위無爲謂를 만났다.
지가 무위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도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일해야 도에 편안할 수 있으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말미암아야 도를 터득할 수 있는가?” 하고 세 가지를 물었는데 무위위가 대답하지 않았는데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백수의 남쪽으로 돌아가서 호결狐闋 위에 올라서 광굴狂屈을 보았다.
지가 그 이야기를 가지고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자 광굴이 말했다.
“응!
내가 그것을 안다.
너에게 일러 주겠다.” 하고는 말을 막 하려던 중에 말하고자 하던 것을 잊어버렸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황제黃帝의 궁궐로 돌아가서 황제를 만나 물어보자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되고 처신하지 말고 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에 편안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말미암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나와 당신은 도에 대해서 알고 저 무위위와 광굴은 알지 못하는데 누가 옳은 것일까요?”
황제가 말했다.
“저 무위위는 정말 제대로 아는 자이고 광굴은 비슷하게 아는 자이고 나와 당신은 끝내 도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무릇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니 그 때문에 성인은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도는 이르게 할 수 없고 덕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 뒤에 덕을 말하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인이 나타나게 되고 인을 잃어버린 뒤에 의를 말하게 되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니 예란 도를 거짓으로 꾸민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으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인뿐일 것이다.
삶이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누가 그 끝을 아는가.
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니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게 되는 것이니 만약 삶과 죽음이 같은 무리임을 안다면 내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무릇 만물은 매한가지인데 자기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냄새나고 썩었다고 하지만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바뀌고 신기한 것이 다시 냄새나고 썩은 것으로 바뀐다.
그 때문에 ‘천하를 통틀어 일기一氣일 뿐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니 성인은 그 때문에 하나를 중시한다.”
황제黃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무위위無爲謂에게 물어보았더니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꾸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았더니 광굴이 나에게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잊어버리고〉 나에게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에게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일러 줄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신은 그것을 아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에 가깝지도 못하다 하시는지요.”
황제黃帝가 말했다.
“저 무위위無爲謂가 참된 도를 터득한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이고 저 광굴狂屈이 도와 비슷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며 나와 그대가 끝내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광굴狂屈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를 두고 말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역주
역주1 : 가공의 인명. 人知를 의인화하여 우언으로 표현하였다.
역주2 北遊於玄水之上 : 북쪽으로 현수 물가에 놀러 감. 玄水는 물 이름. 아래의 白水와 상대되는 표현이다. 玄자가 元으로 표기된 판본이 많다(方勇‧陸永品). 李頤는 “현수는 물 이름이다[玄水 水名].”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北은 어두운 곳이고 물 또한 어두운 지방이다[北是幽冥之域 水又幽昧之方].”라고 풀이했다. 司馬彪와 崔譔본에는 上자가 北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아래의 白水之南과 상대되는 표현으로 본다면 北자가 맞을 듯하지만 그대로 두어도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 않는다.
역주3 登隱弅之丘而適遭無爲謂焉 : 은분의 언덕에 올랐다가 마침 무위위를 만남. 隱弅은 가공의 지명. 弅(분)은 높은 언덕. 盆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王叔岷). 成玄英은 “隱은 깊고 멀어서 알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隱則深遠難知].”라고 풀이했다. 無爲謂는 知와 마찬가지로 寓意를 담은 가공의 인명. 林自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도이다[無爲無謂者 道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適은 ‘그때 마침’.
역주4 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則得道 :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도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일해야 도에 편안할 수 있으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말미암아야 도를 터득할 수 있는가. 服은 일하다는 뜻. 成玄英은 ‘服勤’으로 陳壽昌은 ‘事’로 풀이했고 阮毓崧은 ‘行’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무난한 풀이이다. 何道의 道는 奚侗이 ‘由’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뒤에 宣穎과 陳壽昌 등이 奚侗의 견해를 따랐다. 成玄英은 말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앞의 從자와 병렬관계에 있으므로 奚侗의 견해가 더 정확하다.
역주5 三問 : 세 가지를 물음. 같은 물음을 세 차례 반복해서 물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則得道’의 세 가지를 물은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역주6 非不答 不知答也 :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임. 대답하기 싫어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대답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로 無爲謂는 이름의 뜻 그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역주7 反於白水之南 : 백수의 남쪽으로 돌아옴. 陸德明은 물 이름[水名]으로 풀이했다. 成玄英은 “흰색은 깨끗한 색이고 남쪽은 밝게 드러난 방향이다[白是潔素之色 南是顯明之方].”라고 풀이했고, 呂惠卿은 “백수 남쪽으로 돌아간 것은 다시 밝은 곳에 쫓아가 답을 구한 것이다[反於白水之南 又趨明以求之].”라고 풀이했다. 反은 돌아옴. 返과 같다.
역주8 狐闋(호결) : 가공의 언덕 이름(司馬彪, 李頤). 陳景元은 “여우는 의심을 나타내고 闋은 쉰다는 뜻이다[狐者疑也 闋者息也].”라고 우의를 풀이했는데 褚伯秀와 宣穎 등이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역주9 狂屈 : 역시 가공의 인명. 陳景元은 “狂은 망령됨이고 屈은 구부림이다[狂 妄也 屈 曲也].”고 우의를 풀이했다.
역주10 中欲言而忘其所欲言 : 말을 막 하려던 중에 말하고자 하던 것을 잊어버림. ‘中欲’이 ‘中’으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寺岡龍含).
역주11 帝宮 : 황제의 궁궐. 呂惠卿은 “황제의 궁이니 뜻이 있는 곳을 뜻한다[黃帝之宮 意之所在].”고 풀이했다.
역주12 無從無道 始得道 :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말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터득할 수 있음. 〈達生〉편에 “마음에 動搖가 없고 외물에 끌려가는 일이 없는 것은 기회에 꼭 맞기 때문이다[不內變 不外從事 會之適也].”라고 한 대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역주13 知者不言 言者不知 :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함. 《老子》 제56장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역주14 聖人行不言之敎 : 성인은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풂. 《老子》 제2장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역주15 道不可致 : 도는 이르게 할 수 없음. 도는 人知로 궁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 成玄英은 ‘致’를 ‘得’으로 풀이하여 도를 터득하다, 얻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阮毓崧은 “바로 招致의 致이다. 취하여 배운다는 뜻이다[卽招致之致 有取學意].”라고 풀이하여 招來의 뜻으로 이해했는데 뒤의 德不可至와 대구임을 감안한다면 阮毓崧의 견해가 보다 유력하다 할 수 있다.
역주16 德不可至 : 덕은 이를 수 없음. 至는 到 또는 及의 뜻으로 도달하다는 뜻. 德은 언어로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역주17 仁可爲也 義可虧也 禮相僞也 : 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임. 인, 의, 예는 도와 덕에 비해 인위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 이 부분은 《老子》 제38장의 원형으로 추정된다(池田知久).
역주18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禮者道之華而亂之首也 : 道를 잃어버린 뒤에 德을 말하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仁이 나타나게 되고 인을 잃어버린 뒤에 義를 말하게 되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禮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니 禮란 道를 거짓으로 꾸민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으뜸이다. 《老子》 제38장에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라고 하여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19 爲道者 日損 損之又損之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也 : 道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역시 《老子》 제48장에 “배우는 일은 날마다 보태지만 도를 닦는 일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라고 하여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0 今已爲物也 欲復歸根 不亦難乎 :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미 순박한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도 매우 어렵다는 뜻(方勇‧陸永品). 《老子》 제16장에 ‘夫物芸芸 各復歸其根’이라고 하여 유사한 대목이 나오지만 취지는 상당히 다르다.
역주21 其易也 其唯大人乎 :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인뿐임. 대인은 도를 터득한 사람. 때로 眞人, 至人, 聖人 등으로 표현되는 이상적 인간을 지칭한다.
역주22 生也 死之徒 死也 生之始 孰知其紀 : 삶이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누가 그 끝을 아는가.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순환하여 끝이 없다는 뜻. 紀는 窮極의 뜻(方勇‧陸永品). 成玄英은 ‘紀’를 ‘紀綱’으로 풀이했지만 方勇‧陸永品의 지적처럼 문의가 통하지 않는다.
역주23 是其所美者 爲神奇 其所惡者 爲臭腐 : 자기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냄새나고 썩었다고 함. 세상 사람들이 悅生惡死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역주24 臭腐 復化爲神奇 神奇 復化爲臭腐 :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바뀌고 신기한 것이 다시 냄새나고 썩은 것으로 바뀜.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순환 반복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역주25 通天下一氣耳 : 천하를 통틀어 일기일 뿐임. 通은 貫通의 뜻(曹礎基). 林希逸은 “고금에 걸쳐 오고 가는 것은 단지 일기일 뿐이다[亘古窮今 來來往往 只此一氣而已].”라고 풀이했다. 臭腐와 神奇가 모두 一氣임을 지적한 내용이다. ‘通天地一氣耳’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陳景元).
역주26 彼其眞是也 以其不知也 此其似之也 以其忘之也 : 저 無爲謂가 참된 도를 터득한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이고, 저 狂屈이 도와 비슷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임. 彼는 無爲謂를 지칭하고 此는 狂屈을 지칭한다.
역주27 狂屈聞之 以黃帝爲知言 : 狂屈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를 두고 말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김. 知言의 수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황제를 두고 겨우 말귀 정도는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제한적으로 평가한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고, ‘황제야말로 참으로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칭송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따랐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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