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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4)

장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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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하며 不顧於慮하며 不謀於知하며 於物 無擇하야 與之俱往이니 古之道術 有在於是者어늘 하니라
하야호대 能覆之호대 而不能載之하며 能載之호대 而不能覆之하고
라하며 知萬物 皆有所可하며 有所不可하니
曰 選則不徧이라 敎則不至어니와
道則無遺者矣라하노라
하고 舍是與非하야 苟可以免하며 不師知慮하며 不知前後하야 魏然而已矣
何故 夫無知之物
無建己之患하며 無用知之累하며 動靜 不離於理 是以 終身無譽니라
호대 至於若無知之物而已 無用賢聖이니
夫塊 不失道라호늘 豪桀 相與笑之하야호대 愼到之道 非生人之行이라
而至死人之理 適得怪焉이라하니라
田騈 亦然하야
彭蒙之師 曰 古之道人 至於莫之是하며 莫之非而已矣
常反人하고 不聚觀이나 而不免於魭斷하니
彭蒙田騈愼到 不知道하나 雖然이나 槩乎인댄 皆嘗有聞者也니라


공정하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하여 사사로움이 없고, 마음을 비워 아집이 없으며, 사물을 대할 때 둘로 나누어 차별하지 아니하며, 사려思慮하여 주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지혜를 써서 계책을 꾸미지 아니하며, 외물을 대할 때 가리지 아니하며, 사물과 함께 가니 옛 도술道術 중에 이런 학문이 있었는데, 팽몽彭蒙전병田騈신도愼到가 그러한 학풍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고 그것을 으뜸가는 주장으로 삼아서 말하기를 “하늘은 만물을 덮을 수는 있지만 실을 수는 없고, 땅은 만물을 실을 수는 있지만 덮을 수는 없다.
위대한 조차도 만물을 하나로 포괄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변별할 수는 없다.”라고 했는데 그로써 만물이 모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만물을 선택하면 두루 미치지 못하게 되고 불가不可를 따져서 차별하면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참다운 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버리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신도愼到는 지혜를 버리고 사심을 제거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도리를 따라 외물에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도리道理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도愼到는 말하기를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장차 그 에 억압당해 해침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일정한 책임을 지는 일없이 천하 사람들이 현자賢者를 숭상하는 것을 비웃으며, 방종放縱 일탈逸脫하여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온 천하가 존중하는 대성인大聖人을 비난하였다.
〈그러면서도〉 모난 데를 치고 두드리고 깎고 끊어서 〈행동을〉 원만하게 조정하여 외물과 함께 변화하고, 의 판단을 버리고 진실로 재앙을 면할 수 있었으며 사려분별을 스승으로 삼지 아니하고, 일의 앞뒤도 알지 못하고 홀로 높다랗게 서 있었을 뿐이다.
떠밀린 뒤에 나아가고 끌려야 비로소 가는데, 그것은 마치 세찬 바람이 회오리쳐 도는 것 같기도 하고 깃털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며, 마치 방앗간의 맷돌이 회전하는 것 같아서 완전무결하여 그릇됨이 없었고, 움직이건 가만히 있건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었는지라 일찍이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지혜가 없는 자연물은 자기를 내세우는 근심이 없고, 지혜를 쓰는 번거로움이 없고, 움직이건 가만히 있건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죽을 때까지 명예를 얻는 일이 없다.
그래서 신도愼到는 말하기를 “나는 무지無知의 자연물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뿐, 현인이니 성인이니 하는 것은 필요가 없다.
저 흙덩어리라면 를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재지才知가 뛰어난 호걸들이 서로 함께 이것을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신도愼到는 살아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사인死人의 도리에 도달하였으니, 마침 기괴한 것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전병田騈도 그러하였다.
그는 팽몽彭蒙에게 배워 가르치지 않는 것을 체득하였다.
팽몽彭蒙의 스승은 말하기를 “옛날 의 체득자는 무엇을 옳다고 함이 없었고 무엇을 그르다고 함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 학풍은 고요하니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상식에 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도 하지 않았으나 만사萬事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깎고 끊는 작위作爲를 면치는 못했다.
그가 이른바 는 참다운 가 아니고, 그가 말하는 정의正義도 그릇됨을 면치 못했다.
팽몽彭蒙, 전병田騈, 신도愼到를 알지 못했지만 비록 그러하나 크게 보아서는 모두 일찍이 가 무엇인지 들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역주
역주1 公而不當 易而無私 決然無主 : 공정하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등하여 사사로움이 없고, 마음을 비워 아집이 없음. 易는 ‘평탄할 이’. 여기서는 평등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決然無主는 마음을 비워 주장이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아집이 없다는 의미이다. 決然은 ‘속을 도려낸 모양’으로 決은 缺과 같고, 空虛의 뜻이다(〈天下篇講疏〉). 無主는 無心과 같다. 林希逸은 “사사로운 뜻을 결연히 없애서 갖추어 주장하는 바가 없음이다[決去私意 無所備主].”라고 다소 추상적인 뜻으로 풀이했다. 崔譔본에는 公而不當의 當자가 黨으로 표기되어 있다(陸德明).
역주2 趣物而不兩 : 사물을 대할 때 둘로 나누어 차별하지 아니함. 趣는 ‘향할 추’, ‘나아갈 추’로 여기서는 ‘對’와 같은 뜻이다. 음은 ‘취’가 아니라 ‘추’로 읽는다.
역주3 彭蒙田騈愼到聞其風而悅之 : 彭蒙과 田騈과 愼到가 그러한 학풍을 듣고 기뻐함. 彭蒙은 傳記가 자세치 않은데, 《尹文子》의 기록에 따르면 田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尹文子》에는 “田騈은 彭蒙에게서 배웠는데 가르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였다[田騈學於彭蒙 得不敎焉].”라고 한 기록이 나온다. 成玄英은 “彭蒙은 姓이 彭이고 이름이 蒙이며, 田騈은 姓이 田이고 이름이 騈이며, 신도는 姓이 愼이고 이름이 到이다. 모두 제나라의 은사로 함께 직하에서 교유하였다. 각각 저서가 몇 편이 있는데 본성이 법과 부합되었다. 그 때문에 그 같은 학풍을 듣고 기뻐한 것이다[姓彭 名蒙 姓田 名騈 姓愼 名到 並齊之隱士 俱游稷下 各著書數篇 性與法合 故聞風悅愛也].”라고 풀이하였다. 도가와 법가의 분화가 일어나기 전 공통의 근원으로 추정된다.
역주4 齊萬物以爲首 : 만물을 평등하게 보고 그것을 으뜸가는 주장으로 삼음. 齊萬物은 〈齊物論〉의 사상에 가깝다.
역주5 大道能包之而不能辯之 : 위대한 道조차도 만물을 하나로 포괄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변별할 수는 없음. 林希逸은 大道를 道家의 學者로 보았다. 또 “단지 포용하여 하나로 통일할 줄만 알았지 분변하는 바가 없었다[但知包容爲一 而無所分辨].”라고 풀이했는데 不能辯之의 不能을 ‘~하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은 적절치 않다.
역주6 愼到棄知去己 而緣不得已 泠汰於物 以爲道理 : 愼到는 지혜를 버리고 사심을 제거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도리를 따라 외물에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道理라고 함. 愼到棄知는 知의 부정. 그러나 이 장의 작자가 知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去己는 私心의 除去를 의미한다. 郭象은 “泠汰는 聽放이다[泠汰 猶聽放也].”라고 풀이했는데 聽放은 자연에 맡김, 방임한다는 뜻이다. 道理는 《韓非子》 〈解老〉편과 〈喩老〉편에 자주 보이는데 道와 같은 뜻으로 쓰인 경우이다.
역주7 知不知 將薄知而後鄰傷之者也 :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장차 그 지에 억압당해 해침을 당할 것임. 知不知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함(方勇‧陸永品). 薄은 迫으로 억압당한다, 핍박당한다는 뜻이다(林希逸). 郭象은 “知力이 淺薄하면 자연에 맡길 줄 모른다[謂知力淺 不知任其自然].”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知를 천박하게 함이다[薄淺其知].”라고 하여 薄을 ‘淺薄’의 뜻으로 풀이했지만 취하지 않는다. 鄰은 磷의 가차자(馬叙倫). 鄰傷은 磷傷으로 해친다는 뜻이다. 蔣錫昌은 “이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형세상 장차 知에 핍박당해 다시 해침을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此言人欲知所不知 勢將被知所迫 復被磷傷].”라고 풀이했다.
역주8 謑髁無任하야 而笑天下之尙賢也 :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일정한 책임을 지는 일 없이 천하 사람들이 賢者를 숭상하는 것을 비웃음. 謑는 ‘욕보일 혜’, ‘바르지 않을 혜’. 無任의 任은 ‘책임을 갖는 확실한 일, 훌륭한 일’이라는 뜻이다. 謑髁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모두 확실치 않다. 陸德明이 “그릇되고 비뚤어져 올바르지 못한 모양이다[訛倪不正貌].”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게으르게 산다.’라고 번역하였다. 訛倪는 謑髁를 거꾸로 발음한 것으로 道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는데, 아래 문장의 縱脫과 비슷한 뜻이다.
역주9 縱脫無行而非天下之大聖 : 방종 일탈하여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온 천하가 존중하는 大聖人을 비난함. 縱脫은 放縱逸脫의 뜻. 無行은 ‘제대로 된 행동을 하지 않음’. 郭象은 “그 자취를 없애서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않게 함이다[欲壞其跡 使物不殉].”라고 풀이했다.
역주10 椎拍輐斷 與物宛轉 : 모난 데를 치고 두드리고 깎고 끊어서 〈행동을〉 원만하게 조정하여 외물과 함께 변화함. 宛轉은 외물을 따라 원만하게 변한다는 뜻이다. 椎는 ‘칠 추[打也]’. 輐은 ‘깎을 완’. 輐斷은 아래의 魭斷과 같이 뾰족한 것을 없애서 원만하게 조정하는 모양이다. 魭斷은 모나지 않은 모양. 郭象은 魭斷을 “모난 뿔이 없음이다[無圭角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魭斷은 모난 뿔이 없는 모양이다[魭斷 無圭角貌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1 若飄風之還하며 若羽之旋하며 若磨石之隧하야 全而無非하며 動靜無過라 未嘗有罪 : 마치 세찬 바람이 회오리쳐 도는 것 같기도 하고 깃털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것 같기도, 마치 방앗간의 맷돌이 회전하는 것 같아서 완전무결하여 그릇됨이 없었고, 움직이건 가만히 있건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었는지라 일찍이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음. 還은 ‘돌 선’. 隧는 ‘돌 수’. 若磨는 맷돌. 全而無非는 完全無缺을 의미한다. 動靜은 動作.
역주12 學於彭蒙 得不敎焉 : 彭蒙에게 배워 가르치지 않는 것을 체득함. 不敎는 不敎之敎. 곧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 한편 敎를 校로 보고 不校를 ‘比較하여 差別하지 않는다.’고 풀이하는 견해도 있는데, 得不敎를 萬物齊一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池田知久).
역주13 其風이 窢然이어니 惡可而言 : 그 학풍은 고요하니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窢은 侐(고요할 혁)과 같다. 向秀와 郭象은 “역풍 소리이다[逆風聲].”라고 풀이했다(陸德明). ‘신속한 모양’이라는 견해(成玄英)도 있다.
역주14 其所謂道非道 而所言之韙不免於非 : 그가 이른바 道는 참다운 道가 아니고, 그가 말하는 正義도 그릇됨을 면치 못함. 韙는 ‘옳을 위’, ‘아름다울 위’. 郭象과 成玄英, 陸德明은 모두 “韙는 옳음이다[韙 是也].”라고 풀이했다.

장자(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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