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3)

장자(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가을이 되자 물이 불어나 모든 물이 황하로 흘러들어 출렁이는 물결의 광대함이 양쪽 기슭에서 〈건너편〉 물가에 있는 소와 말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於是焉 自喜하야라하야
이런 때에 황하의 하백河伯흔연欣然히 스스로 기뻐하여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야 至於하야 東面而視하니 이어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가서 북해北海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았더니 〈아무리 보아도 망망대해가 보일 뿐〉 물의 끝을 볼 수 없었다.
於是焉 河伯하야 (하고)而歎曰
이때에 하백河伯이 비로소 그 얼굴을 돌려 멍한 눈으로 북해北海 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有之하니하고 以爲莫己若者 我之謂也로다
“세간의 속담에 이르기를 ‘에 대해 조금 들었다고 세상에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우쭐댄다.’고 했는데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일찍이 중니仲尼견문見聞을 적다 하고 백이伯夷로운 행동을 가벼이 여기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믿지 않았더니만, 지금 나는 그대의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광대廣大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에 이르지 않았던들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나는 〈하마터면〉 대도大道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길이 비웃음을 당할 뻔했습니다.”
北海若曰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이 머무는 곳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버러지에게 얼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것은 〈여름 버러지가〉 자신이 사는 때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며, 곡사曲士에게 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것은 〈곡사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교리敎理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今爾 하야 觀於大海하고 하니 로다
이제 그대는 황하의 양쪽 기슭 사이에서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 마침내 그대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알았으니, 그대와는 함께 커다란 도리道理에 관해 이야기할 만하다.”
天下之水 莫大於海하니
천하天下의 물은 바다보다 넓은 것이 없다.
호대 不知何時止而不盈하며 호대 不知何時已而不虛하며 하며 하나니
온갖 하천의 물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어느 때에 그치는지 알 수 없지만 가득 차지 않으며 미려尾閭로 빠져나가는데 어느 때에 그치는지 알 수 없지만 고갈되지 아니하며 봄이나 가을의 계절에 따라 변화하지 않으며 홍수가 나든 가뭄이 들든 그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 따위의 흐름보다 나은 정도는 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많다고 자랑하지 않는 까닭은 스스로 생각건대 내가 천지天地 사이에 형체를 의탁하고 음양陰陽에게 기를 받은 존재인지라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바로 작다는 것이 드러나니 또 어찌 스스로 많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사해四海〈에 둘러싸여 있는 이 세계〉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을 헤아려 본다면 개미구멍이 큰 소택沼澤 가에 있는 것 같지 아니한가.
중국이 해내海內에 있는 것을 따져 본다면 돌피의 낟알이 커다란 창고에 있는 것 같지 아니한가.
號物之數하야 謂之萬이나 하며 하고 하니
사물의 수를 만이라고 일컫지만 사람은 그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이 구주九州에 살면서 곡식이 자라고 배와 수레가 소통하는 공간 가운데 개인이 차지하는 것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만물과 견주어 본다면 털끝 하나가 말 몸에 붙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오제五帝가 서로 이어 계승해 오고 삼왕三王이 서로 쟁탈하고 어진 사람이 근심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이 수고한 것이 모두 이 작은 인간사회의 일을 극진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백이는 그것을 사양하여 명예를 얻었고 중니仲尼는 그것을 말하여 박식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니 백이伯夷중니仲尼가 이 같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까 그대가 스스로 물이 많다고 자랑한 것과 같지 아니한가.”
河伯曰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천지를 크다 여기고 털 끄트머리를 작다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北海若曰
북해약北海若이 말하였다.
“아니다.
대저 사물이란 양에 한이 없이 무한히 크며 시간은 멈춤이 없이 영겁永劫이며 주어진 분수는 일정하게 정해진 몫이 없으며 마침과 시작에는 고정됨이 없다.
是故 大知라야 觀於遠近
이런 까닭에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원대한 도리道理와 비근한 일상의 사물을 볼 수 있다.
그 까닭에 작아도 그것을 적다 여기지 않고, 커도 그것을 많다 여기지 않으니 사물의 양에 한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야)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과거와 현재를 밝게 안다.
하나니(하야) 일새니라(니라)
그 까닭에 먼 미래의 일이 명백하지 않더라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빨리 지나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버둥대지 않으니, 시간에 멈춤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察乎盈虛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살펴서 잘 안다.
得而不喜하며 失而不憂하나니(하야) 知分之無常也일새니라(니라)
그 까닭에 얻었다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잃었다고 근심하지 않으니 분수에 일정한 몫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평탄한 대도大道를 분명히 안다.
生而不說하며 하나니(하야)
그 까닭에 태어나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그것을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새니라(니라)
마침과 시작에 일정함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는 것을 따지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음만 못하며 태어나서 살아 있는 시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의 장구함만 못하다.
〈이렇듯〉 지극히 작은 것을 가지고 지극히 큰 것을 궁구하려 하나니, 이 때문에 미혹되고 어지러워져 스스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또 어찌 털 끄트머리가 지극히 작은 것 중에서 가장 끝에 해당한다고 결정하기에 족하겠으며 또 어찌 천지가 지극히 큰 세계의 극한이라고 하기에 충분함을 알 수 있겠는가.”
河伯曰
하백河伯이 말했다.
“〈혜시惠施 또는 명가名家들을 비롯한〉 세상의 논객들은 모두 지극히 작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지극히 큰 것은 밖에서 에워쌀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사실입니까?”
北海若曰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무릇 작은 것을 기준으로 큰 것을 보면 다 보지 못하고 큰 것을 기준으로 작은 것을 보면 분명히 보지 못하니 대저 지극히 작은 것[精]이란 작은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고 극대의 것[垺]은 큰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크니 작으니 하는 것은〉 본시 편의상의 구별일 뿐이니, 이것은 각각의 사물이 놓여진 상황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대저 작다 크다 하는 것도 형체가 있는 대상을 예상해서 한 말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수량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고 에워쌀 수 없는 것은 수량으로 궁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만물 가운데 큰 것[粗]이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만물 가운데 작은 것[精]이니,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작다 크다 하는 것을 초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인大人의 행동은 남을 해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으나 인혜은덕仁惠恩德을 베푸는 행위를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대인大人의〉 행동은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으나 〈이익을 위해서〉 성문의 문지기 노릇까지 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지도 아니하며, 〈대인大人은〉 재산 때문에 남하고 다투지 아니하나 그렇다고 해서 겸양의 미덕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대인大人은〉 일을 할 때 남의 힘을 빌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력自力으로 먹는 것을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청렴함을 지키고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욕스럽고 더러운 사람이라고 하여 천하게 여기지도 아니하며, 〈대인大人은〉 행동을 세속과 달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사람과 크게 다름(辟異)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대인大人은〉 대중을 따라 행동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권장하기에 부족하며 형륙刑戮과 수치로도 욕되게 하기에 부족하니 그것은 〈대인大人이〉 를 가릴 수 없고 의 한계를 그어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니하고 하고 라하나니(니) 니라(라하도다)
듣건대, 를 터득한 사람은 명성이 세상에 들리지 않고,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으로 칭송할 수 없고, 대인大人자기自己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곧 〈, 의〉 구별을 버린 극치이다.”
河伯曰
하백河伯이 말했다.
“혹 사물의 밖에서건 혹 사물의 안에서건 어디에 이르러 의 구분이 성립되며, 어디에 이르러 의 구별이 성립합니까?”
北海若曰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다.
以物 觀之컨댄 自貴而相賤하고 以俗으로 觀之컨댄 貴賤 不在己하니라
그런데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상대를 천시하고,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귀천이 나에 있지 않게 된다.
차별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각자 크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어떤 사물을 크다고 하면 만물이 크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작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어떤 사물을 작다고 하면 만물이 작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천지가 돌피알처럼 작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호말毫末이 언덕이나 산처럼 큰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차별의 이치[差數]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컨댄 因其所有而有之 則萬物 莫不有하고 因其所無而無之 則萬物 莫不無하니
효용效用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각자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물을 유용하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유용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무용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물을 무용하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무용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西가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서로 없어서는 아니 됨을 알면 사물 각각의 효용성이 명확하게 될 것이다.
취향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각자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 만물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자기를 그렇다고(옳다고) 하고 상대방을 그렇지 않다고(그르다고) 여기는 것을 알게 되면 취향의 근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은 임금 자리를 사양함으로써 제왕이 되었는데, 재상宰相 자지子之연왕燕王 자쾌子噲(자쾌)는 같은 방법으로 나라를 멸망시켰다.
탕왕湯王무왕武王은 무력으로 다툼으로써 왕이 되었는데, 나라의 백공白公은 같은 방법으로 다투고서 살해당해 자멸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다툼[放伐]과 선양禪讓의 행동은 어떤 것을 한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을 하게 여김이 때에 따라 다른지라 그 어느 하나를 일정한 법칙으로 삼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秋水時至 : 가을이 되어 때맞추어 물이 불어남. 번역문에서는 ‘때맞추어[時]’라는 번역어를 생략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李頤는 “물은 봄에 생기고 가을에 성대해진다[水生於春 壯於秋].”고 풀이했는데 宣穎, 王先謙, 阮毓崧 등이 이 견해를 따랐다. 成玄英은 보다 상세하게 “큰물은 봄에 생기고 가을에 왕성해진다. 가을철에는 음기가 성대해져 궂은비를 내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을철이 되면 물이 지극해진다[大水生於春而旺於秋 素秋陰氣猛盛 多致霖雨 故秋時而水至也].”고 풀이했고 福永光司, 金谷治, 赤塚忠도 거의 같은 견해를 제시했지만 이는 오행론에 기초한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물이 많아지는 현상을 풀이한 것으로 다소 과장된 견해이다. 時至는 물이 때에 맞춰 불어남. 李勉은 “때에 맞춰 이름이다[及時而至也].”고 풀이했다.
역주2 百川灌河 : 모든 물이 황하로 흘러듦. 百川은 백 가지 하천, 곧 모든 하천을 표시하는 수사이다. 阮毓崧은 灌을 “물을 댐이다[注聚也].”고 풀이했다. 또한 呂惠卿은 이 두 구절의 의미를 “배움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단계여서 아직 대도에 이르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學自外至 而未達乎大道之譬].”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3 涇流之大 : 출렁이는 물결의 광대함. 《經典釋文》 崔譔본에는 涇자가 徑으로 표기되어 있고, 또 經으로 표기된 인용문도 있지만(奚侗, 馬叙倫), 이들은 서로 통용하는 글자이다(王叔岷, 池田知久). 崔譔은 “곧게 흘러가는 것을 徑이라 한다[直度曰徑].”고 풀이했는데 武延緖, 奚侗, 阮毓崧, 赤塚忠, 曹礎基 등도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 또 司馬彪는 “涇은 通함이다[涇 通也].”고 풀이했고, 成玄英, 陳壽昌, 王先謙, 錢穆 등이 司馬彪의 견해를 따라 풀이했다. 아울러 林希逸은 “탁함이다. 황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면 혼탁해져서 양쪽 기슭에 들이치기 때문에 출렁이는 물결의 광대함이 양쪽 기슭을 들이친다고 말한 것이다[濁也 黃河之水 驟至而濁 拍滿兩岸 故曰 涇流之大兩涘].”라고 해석하고, 羅勉道, 林雲銘, 王敔, 宣穎, 陸樹芝 등이 이것에 따른다. 또 池田知久에 의하면, 章炳麟은 巠의 가차로 보아 《說文解字》의 ‘巠 水脈也’에 의거 涇을 ‘水脈’으로 보는 새로운 설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에는 馬叙倫, 陳鼓應, 李勉, 福永光司 등이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역주4 兩涘 : 양쪽 기슭. 涘는 기슭. 陸德明은 涘를 涯로 풀이했고, 成玄英은 岸이라 풀이했는데 大同小異하다.
역주5 渚涯之間 : 물가. 渚는 모래톱. 涯는 물가. 司馬彪는 “물속에 머물 수 있는 곳을 渚라 한다[水中可居曰渚].”고 풀이했다. 成玄英, 林希逸, 陳壽昌, 王先謙, 張之純, 馬叙倫, 李勉, 森三樹三郞, 陳鼓應, 金谷治, 曹礎基 등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를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定說이다. 그러나 福永光司는 “渚涯는 渚岸과 같다. 岸邊을 말한다.”고 하여 약간 다르게 풀이했고, 赤塚忠도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으며, 池田知久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陸德明은 涯자가 厓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고 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여러 판본에도 厓로 표기된 경우가 있고 厓로 표기된 인용문도 적지 않다(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한편 林希逸은 “渚涯는 하수 안에 있는 모래톱이다. 渚와 涯, 두 글자의 의미는 같다. 만약 涯자를 際(사이)의 뜻으로 풀이한다면 間자가 붙을 수 없다[渚涯 河中洲渚也 渚涯兩字 一般輕重 若以涯訓際 則間字下不得].”고 하여 기존의 풀이에 반대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6 不辨牛馬 : 소나 말을 구별하지 못함. 어떤 물체가 소인지 말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워낙 멀어서 소나 말처럼 큰 사물들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陸德明은 “구별함이다. 광대하기 때문에 바라보아도 구별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別也 言廣大 故望不分別也].”고 풀이했는데 정확한 견해이다. 成玄英은 좀 더 자세하게 “마침내 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 바라보면 소와 말을 구분할 수 없게 한다[遂使隔水遠看 不辨牛之與馬也].”고 풀이했다. 이것이 정설이다(池田知久).
역주7 河伯 : 황하의 神. 陸德明은 “성은 馮이고 이름은 夷이다. 일명 冰夷라 하기도 하고 또 馮遲라 하기도 하는데 〈大宗師〉편에 이미 나왔다. 어떤 사람은 성은 呂이고 이름은 公子이다. 馮夷는 공자의 아내라 했다[姓馮 名夷 一名冰夷 一名馮遲 已見大宗師篇 一云 姓呂 名公子 馮夷是公子之妻].”라고 풀이했는데, 河伯은 문자 그대로 황하를 관장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므로 굳이 사람의 성명을 꿰어 맞출 필요는 없다. 李勉, 陳鼓應 등도 伯을 長의 의미로 보았다(池田知久).
역주8 欣然 : 기뻐하는 모양. 王雱은 “河伯이 기뻐하는 것은 제자백가의 사상가들이 자신의 도를 시행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고자 한 것이다[夫河伯欣然者 所以況諸子喜其道之得行也].”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9 天下之美爲盡在己 :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함. 成玄英은 “황하가 이미 광대해졌기 때문에 흔쾌히 기뻐한 것이니 천하의 영화와 성대한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河旣曠大 故欣然懽喜 謂天下榮華盛美 盡在己身].”고 풀이했다.
역주10 順流而東行 :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감. 呂惠卿은 “이치를 따라 찾으면 반드시 돌아갈 곳을 찾게 될 것[言循理而求 則必得其所歸].”이라고 했는데 池田知久의 견해처럼 다소 추상적인 해석이다.
역주11 北海 : 북쪽 바다. 李頤는 “동해의 북쪽이 이에 해당한다[東海之北 是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지금의 萊州가 이에 해당한다[今萊州 是].”고 풀이했고, 赤塚忠은 渤海를 가리킨다고 했다. 지리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발해를 지칭한다고 한 赤塚忠의 견해가 가장 근사하나 굳이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해역의 명칭으로 보기보다는 황하가 맞닿아 있는 동해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池田知久의 注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王雱은 이 부분을 두고 “제자백가의 사상가들이 비록 자신의 도를 시행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줄 알지만 어찌 성인의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이것이 장자가 河伯이 동쪽으로 흘러갔다가 북해에 이르는 이야기를 한 까닭이다[諸子雖喜其道之得行 安知有聖人之道在焉 此莊子所以有河伯東行而至於北海之言也].”라고 풀이했고, 陳祥道도 “장자가 북해를 가지고 성인의 도를 비유했고 황하의 가을 물을 가지고 백가의 학술을 비유했다[莊子所以以北海喩聖人之道 秋河喩百家之術].”고 하여 유사한 견해를 제시했다. 池田知久처럼 이 같은 견해를 槪念的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지만 《孟子》 〈盡心 上〉에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 보시고는 노나라를 좁다고 여겼고 태산에 올라 보시고는 천하를 좁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관해 말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닌 사람에게는 훌륭한 말을 하기가 어렵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의 비유로 이해한다면 무리한 해설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역주12 不見水端 : 물의 끝이 보이지 않음. 成玄英의 “물의 끝이 보이지 않음이다[不見水之端涯].”라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林希逸은 “물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음이다[不知水之自來也].”라고 풀이했는데 특이한 견해로 참고할 만하다.
역주13 旋其面目 : 얼굴을 돌림. 成玄英은 “비로소 면목을 돌림이다[方始迴旋面目].”고 풀이했으며, 한편 阮毓崧은 “동쪽을 바라보다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을 바라봄이다[由東轉餉北也].”라고 풀이했는데 成玄英의 해석과 비슷한 견해이다.
역주14 望洋 : 멍한 눈으로 바라봄. 陸德明의 《經典釋文》에는 望자가 ‘盳’으로 표기되어 있다. 陸德明은 이어서 “어떤 판본에는 望으로 표기되어 있다[本一作望].”고 소개 했는데 王敔에 의하면 盳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한다. 池田知久의 注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陳鼓應은 望洋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첫째, 司馬彪와 崔譔은 “盳洋은 望羊과 같고 우러러보는 모양이다[盳洋 猶望羊 仰視貌].”라고 풀이했는데, 王先謙, 吳汝綸, 錢穆 등이 이 견해를 따랐다. 둘째, 의미는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洋이나 羊을 陽의 가차로 보는 郭慶藩의 주장이 있는데, 奚侗, 阮毓崧 등이 이 견해를 따랐다. 세 번째 馬叙倫은 두 번째 견해를 비판하고 望洋을 疊韻으로 보고 “멀리 아득하게 바라봄이다[遠視茫茫也].”고 풀이했는데, 본래 羅勉道의 견해에서 시작되었고, 福永光司, 森三樹三郞, 曹礎基, 池田知久 등도 이 견해를 따랐다. 넷째, 陳鼓應 스스로는 洋을 海洋의 뜻으로 보았는데 林希逸의 견해에서 비롯되었고, 林希逸 이후 宣穎, 陸樹芝, 陳壽昌, 李勉 등이 이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이 견해는 洋을 羊이나 佯이라고 쓰는 예(奚侗, 馬叙倫)에 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역주15 : 海神의 이름. 司馬彪는 ‘海神’이라고 했는데 이 견해가 적절하다.
역주16 野語 : 야인들이 하는 말. 俗語. 李勉은 “속어이다[俗語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7 聞道百 : 도를 백 가지 정도 들음. 도에 대해 조금 안다는 뜻. 百은 조금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며 정반대의 뜻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池田知久가 정리한 바에 의하면, 李頤가 “만분의 일이다[萬分之一也].”라고 풀이한 이래, 成玄英, 林希逸, 林雲銘, 陳壽昌, 吳汝綸, 張之純 등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를 따라 ‘聞道百’을 “도를 조금 얻어 들었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淸末에 郭嵩燾가 “百은 많다는 말이다[百者 多詞也].”라는 견해를 처음으로 주장했고, 阮毓崧, 李勉, 陳鼓應, 曹礎基 등이 이 견해를 따라 “도를 많이 들었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두 가지 ‘조금 들었다’와 ‘많이 들었다’의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 첨가해 말하면 郭慶藩은 百을 博의 가차라고 주장하였고, 이어서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溥는 大이다[溥 大也].”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溥의 가차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陳鼓應이 찬성하고 있다. 池田知久는 赤塚忠의 견해에 따라 ‘어느 정도 많이 들음’의 뜻이 좋을 것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도에 대해 조금 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8 我嘗聞少仲尼之聞 而輕伯夷之義者 : 일찍이 仲尼의 見聞을 적다 하고 伯夷의 義로운 행동을 가벼이 여기는 이야기를 들음. ‘少仲尼之聞’은 張之純이 “仲尼의 博聞을 적다고 여김이다[以仲尼博聞爲少].”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19 今我睹子之難窮也 : 지금 내가 그대의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크기를 봄. 睹는 본다는 뜻으로 覩와 같다. 池田知久의 注에서 지적했듯이, 陸德明은 睹를 “구음은 覩이다. 《說文解字》를 살펴보건대 睹는 요즘의 글자이고 覩는 옛글자이다. 睹는 본다는 뜻이다[舊音覩 案說文 睹今字 覩古字 睹 見也].”라고 풀이했다. 子는 이인칭으로 여기서는 北海若을 지칭한다.
역주20 吾非至於子之門則殆矣 : 내가 당신의 門에 이르지 않았던들 위태로울 뻔함. 宣穎, 陸樹芝는 ‘殆矣’를 아래 구에 연결하여 가깝다[幾乎]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殆자를 幾의 뜻으로 본 것은 일리가 있지만 ‘矣’자는 종결사로 쓰이기 때문에 문법상 무리이다(池田知久).
역주21 吾長見笑於大方之家 : 大道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길이 비웃음을 당할 뻔함. 司馬彪는 大方을 大道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方은 道와 같다[方 猶道也].”고 풀이했다.
역주22 井鼃 不可以語於海者 :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님.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해주어야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 정확한 해석이다. ‘鼃’에 대하여는 鼃를 魚로 作한 판본이 있는 등 구구한 주석이 있으나 여기서는 ‘蛙’와 같은 글자로 보아 ‘우물 안 개구리’로 번역하였음.
역주23 拘於虛也 : 자신이 머무는 곳에 얽매임. 拘는 구애된다는 뜻. 虛는 장소로 墟와 같다. 林希逸은 拘를 “자기가 머무는 곳에 국한됨을 말한 것이다[言局於其所居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局은 促이다[局 促也].”라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局의 가차자라고 풀이했다. 曹礎基가 ‘局限’으로 풀이한 것도 같은 견해이다.
역주24 夏蟲不可以語於冰者 篤於時也 : 여름 버러지에게 얼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것은 〈여름 버러지가〉 자신이 사는 때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임. 林希逸은 夏蟲을 〈逍遙遊〉편에서 “쓰르라미나 씽씽매미는 1년의 길이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은 종류[蟪蛄不知春秋之類].”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篤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司馬彪는 篤을 “깊이 믿는다[厚信].”는 뜻으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이를 따르지만, 郭慶藩이 《爾雅》에서 “篤은 固이다[篤 固也].”고 풀이한 것을 따라 위 문장의 拘나 아래 문장의 束과 같은 뜻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이다. 王先謙을 비롯 阮毓崧, 錢穆, 陳鼓應, 金谷治, 曹礎基, 池田知久 등이 모두 이 견해를 따랐다. 池田知久는 篤을 制約되어 있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林希逸은 “아는 것이 한때에 그침을 말한 것이다[言所知止一時也].”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5 曲士 不可以語於道者 : 曲士에게 道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까닭. 曲士는 전체를 모르고 일부만 아는 사람이라는 뜻. 司馬彪는 “시골구석의 선비[鄕曲之士也].”라 풀이했고, 王先謙과 李勉이 이를 따르고 있는데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치는 않다. 成玄英은 “일부만 아는 선비이자 치우친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이다[曲見之士 偏執之人].”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가 타당하다. 〈天道〉편 제5장과 〈天下〉편 제1장에 보이는 ‘一曲之人’과 같다. 陳鼓應은 《荀子》 〈解蔽〉편의 ‘曲知之人’과도 같다고 했는데 池田知久의 언급처럼 유익한 지적이다.
역주26 束於敎也 : 敎理에 속박됨. 曲士가 敎理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뜻. 成玄英은 “名敎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爲束縛於名敎故也].”고 풀이했는데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좋다. 呂惠卿은 “교리에 속박되면 方術에 의해 제한된다. 천하 사람들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束於敎 則方術之所制 天下所以不得逍遙者以此].”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7 出於崖涘 : 황하의 양쪽 기슭 사이에서 벗어남. 崖은 涯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孫毓修, 馬叙倫). 福永光司와 陳鼓應 등은 ‘崖涘’는 위 문장의 ‘兩涘渚涯’를 이어받은 것이라 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曹礎基는 “황하를 지칭한다[指河].”고 풀이했는데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한 설명은 아니다(池田知久).
역주28 乃知爾醜 : 마침내 그대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앎. 成玄英은 “큰 바다가 무궁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에 비로소 작은 물의 하찮음을 낮추어 봄이다[詳觀大壑之無窮 方鄙小河之陋劣].”고 풀이했다.
역주29 爾將可與語大理矣 : 그대와는 함께 커다란 道理에 관해 이야기할 만함. 爾는 이인칭. 將자에 대해 阮毓崧은 ‘其’와 같다고 풀이했고, 赤塚忠은 ‘爾를 특별히 제시하는 뜻’이라고 하지만, 앞으로에 해당하는 부사로 보는 것이 간편하므로 굳이 어렵게 해석할 것이 없다. 大理는 커다란 도리. 池田知久의 주석에도 인용되어 있듯이, 呂惠卿은 “황하의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았으니 국한된 곳을 벗어나 끝없는 바다의 모습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커다란 도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出涯涘而觀大海 則脫其拘限 而與於無方之觀 故可以語大理也].”고 풀이했고, 林自는 “지금 河伯이 황하의 물가를 벗어나 바다를 보았으니 한 모퉁이에 가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커다란 도리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今河伯出涯涘而觀海 則不蔽於一曲 可以語大理矣].”고 풀이했다.
역주30 萬川歸之 : 온갖 하천의 물이 바다로 흘러듦. 萬川이 百川으로 표기되어 있는 인용문도 있다(王叔岷).
역주31 尾閭泄之 : 尾閭로 빠져나감. 尾閭는 이설이 분분한데 일단 바닷물이 빠지는 곳으로 번역하였다. 崔譔은 尾閭를 “바다 동쪽의 물 이름이다[海東川名].”라고 풀이했고, 司馬彪는 “바닷물이 빠져서 바깥으로 나가는 곳이다[泄海水出外者也].”라고 풀이했다. 成玄英도 “尾閭는 바닷물이 빠지는 곳이다[尾閭者 泄海水之所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2 春秋不變 : 봄이나 가을에 따라 변화하지 않음. 봄에는 비가 적고 가을에는 비가 많지만 그로 인해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 成玄英은 “봄에는 비가 적고 가을에는 비가 많다[春雨少而秋雨多].”고 풀이했다.
역주33 水旱不知 : 홍수가 나든 가뭄이 들든 변화를 알 수 없음. 수량의 변화가 없다는 뜻. 不知는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뜻. 劉文典은 知자가 加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음을 들어 加자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지만 ‘不知’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成玄英이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도 증감을 알 수 없다[水旱不知其增減].”라고 풀이한 것이 정확하다.
역주34 過江河之流 : 강물이나 하수 따위의 흐름보다 나은 정도. 過는 낫다는 뜻. 여기서는 수량이 많다는 뜻으로 쓰였다. 成玄英의 疏에는 江河가 江海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35 不可爲量數 : 수로 헤아릴 수 없음. 산술적으로 헤아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는 뜻. 數자 아래에 計자가 붙어 있는 인용문도 있다(王叔岷).
역주36 自以比形於天地 : 스스로 생각건대 천지 사이에 내가 형체를 의탁함. 以는 ‘생각건대’의 뜻이고, 比는 의탁한다는 뜻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受氣於陰陽의 受자와 같은 맥락이다. 比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지만 일단 高亨이 《方言》에서 “庇는 寄託함이다[庇 寄也].”고 풀이한 것을 따라 庇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陳鼓應도 高亨의 견해를 따랐다. 林希逸은 “바다를 천지에 견주어 보면 단지 작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찌 큼을 알 수 있겠는가[以海比之天地 但見其小 豈知其大].”라고 풀이하여 比較의 뜻으로 보았으며, 이 밖에 福永光司는 “줄지어 늘어놓다. 나란히 하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池田知久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37 受氣於陰陽 : 음양에게 氣를 받음. 천지음양에게서 氣를 부여받아 이루어진 존재라는 뜻이다.
역주38 吾在於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음. 위의 自以의 以를 ‘생각건대’로 읽고 이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로 이어서 이해하여, 이것을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로 번역하였음. ‘吾在於天地之間’에서 於자가 없는 판본도 있다(孫毓修, 馬叙倫, 池田知久).
역주39 方存乎見少 : 바로 작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됨. 바로 작다는 것이 보임, 또는 바로 작다는 것이 드러남의 뜻. 《莊子》에서 存자는 存在의 뜻과 存置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存자를 일단 존재한다는 뜻으로 보고 ‘~에 해당한다, ~하게 된다,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赤塚忠은 存을 “살펴서 안다[察知].”는 뜻이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見은 알게 된다는 뜻. 李勉은 見을 己의 잘못이라 했는데 지나친 견해이다.
역주40 又奚以自多 : 또 어찌 스스로 많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多는 많다고 여겨 자랑한다는 뜻. ‘以’는 ‘~을 가지고’, 곧 ‘바다를 가지고’의 뜻.
역주41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 사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을 헤아려 봄. 四海는 사해에 둘러싸여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역주42 不似礨(뢰)空之在大澤乎 : 개미구멍이 큰 沼澤 가에 있는 것 같지 아니한가. 礨空은 개미구멍. 礨자는 壘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고, 空자는 罌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陸德明은 “崔譔은 礨를 壘로 읽었다. 空은 孔으로 읽으니 壘孔은 작은 구멍이다[崔音壘 空音孔 壘孔 小穴也].”라고 풀이했다. 이 외에 陸德明은 “李頤는 ‘작은 언덕’이라 했고, 어떤 이는 ‘개미산’이라 했다[李云 小封也 一云 蟻冢也].”고 하여 다른 견해를 소개하고 있고, 또 林希逸은 “작은 구멍이니 벌집의 구멍이다[小穴也 蜂窠之類].”라고 풀이하고, 羅勉道는 “돌의 구멍이다[石穴也].”고 풀이하는 등 이설이 많지만 저본의 글자 그대로 개미구멍으로 보아도 의미가 충분히 통하기 때문에 굳이 穿鑿할 것이 없다.
역주43 計中國之在海內 : 중국이 해내에 있는 것을 따져 봄. 計자가 諸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고(劉文典), 內자 밑에 也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王叔岷, 楊明照).
역주44 不似稊米之在大(태)倉乎 : 돌피의 낟알이 커다란 창고에 있는 것 같지 아니한가. 稊米는 돌피의 낟알. 司馬彪는 稊米를 “작은 쌀알[小米也].”이라 했고, 李頤는 “돌피의 풀이다[稊草也].”고 풀이했으며, 陸德明은 “稊는 稗와 비슷하다[稊似稗].”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稊는 풀의 모양은 稗와 비슷하지만 낟알은 더욱 가늘고 작다[稊 草似稗而米甚細少也].”고 풀이했다. 大倉은 커다란 곡식창고. 陸德明은 大倉의 大는 음이 泰라고 했다. 太로 표기하고 있는 인용문도 많다(吳汝綸, 劉文典, 李勉, 赤塚忠). 赤塚忠은 “천하로부터 貢納된 穀物을 收藏하는 큰 창고”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45 人處一焉 : 사람은 그중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음. 사람은 만물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위의 人處一焉(號物之數 謂之萬 人處一焉)은 인류는 만물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한 것이고 아래의 人處一焉(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은 개인은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林希逸은 “사람은 만물 중에서 단지 한 가지 사물일 뿐이다[人在萬物之中 只爲一物之數].”고 풀이했고, 陳鼓應은 “위의 人處一焉은 人類를 만물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고 아래의 人處一焉은 개인을 衆人에 對하여 말한 것이다.”고 풀이했는데 陳鼓應의 견해를 따른다. 이 견해는 陳鼓應 이전에 이미 陸樹芝, 馬其昶, 于鬯이 제기한 바 있다(池田知久). 한편 馬叙倫은 아래의 人處一焉은 잘못 끼어든 衍文이라 하여 삭제했고 金谷治와 曹礎基가 이 견해를 따랐고, 赤塚忠은 아래의 人處一焉을 亦處一焉으로 고쳤지만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池田知久).
역주46 人卒九州 : 사람들은 구주에 살고 있음. 이설이 분분한 대목이지만 우선 司馬彪는 人卒에서 卒을 “衆也.”라고 풀이한 견해를 따라 人卒을 사람들로 번역하였다. 成玄英, 林自, 林希逸, 劉文典, 王叔岷, 李勉, 陳鼓應, 曹礎基 등이 이 설을 따른다. 또 崔譔은 “다함이다[盡也].”고 풀이했고, 王敔, 宣穎, 陳壽昌, 郭嵩燾, 王先謙, 武延緖, 張之純, 阮毓崧 등이 崔譔의 견해를 따랐다.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崔譔의 이 견해는 卒을 동사로 보는 데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세 차례 나오는 人卒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무리가 있다. 또 福永光司와 森三樹三郞 등은 九州를 “州를 아홉으로 한다.”는 뜻으로 보았으나 이는 九州가 위 문장의 中國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한 것임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池田知久의 견해가 타당하지만 “人卒과 九州는”으로 읽는 讀法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기 때문에 우선 司馬彪의 견해를 따랐다.
역주47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 곡식이 자라는 바와 배와 수레가 소통하는 바에 사람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 곡식이 자라고 배와 수레가 소통하는 공간 가운데 개인이 차지하는 것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生은 生育이니 자란다는 뜻.
역주48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 : 이것을 만물과 견주어 본다면 털끝 하나가 말 몸에 붙어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比는 견줌. 비교하다는 뜻. 馬叙倫은 여기의 열여섯 자를 앞의 ‘人處一焉’ 아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金谷治, 赤塚忠, 曹礎基 등이 찬성했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옳지 않다.
역주49 五帝之所連三王之所爭 : 오제가 서로 이어 계승해 오고 삼왕이 서로 쟁탈함. 陸德明은 五帝를 五常으로 표기한 다음 “판본에 따라 五帝로 되어 있기도 하다[本亦作五帝].”라고 풀이했지만, 帝가 올바르다(馬叙倫, 赤塚忠, 池田知久). 陳景元 《莊子闕誤》에서 인용한 江南古藏本에 連은 運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郭嵩燾, 陳鼓應이 이것에 따르고, 馬其昶은 連을 運의 가차로 하지만(錢穆, 李勉이 여기에 따른다), 좋지 않다(赤塚忠, 池田知久를 참조). 司馬彪가 “仁義가 연속됨을 말함이다[謂連續仁義也].”라고 풀이한 것이 대체적으로 올바르다(陳景元도 같다). 〈人間世〉편 제1장의 “禹임금과 舜임금이 기준으로 삼았던 도리이다[禹舜之所紐也].”라고 한 대목을 참조. 連의 對象은 仁義만이 아니고, 더 넓게 인간 일반일 것이다.
역주50 仁人之所憂 : 어진 사람이 근심함. 仁人은 〈騈拇〉편 제2장에 이미 나왔다(福永光司, 池田知久).
역주51 任士之所勞 :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이 수고함. 李頤는 任을 ‘能’으로 풀이했지만(吳汝綸, 陳壽昌, 張之純, 阮毓崧, 福永光司도), 정확하지 않다. 林希逸이 “任士는 일을 담당한 사람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다[任士 任事之人 言治世之士也].”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林雲銘, 陳壽昌, 張之純, 阮毓崧, 福永光司도 거의 같은 견해(池田知久).
역주52 盡此矣 : 모두 이 작은 인간사회의 일을 극진히 한 것임. 모두 한 영역에 국한된 것일 뿐이라는 뜻. 郭象이 “일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出乎一域].”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53 伯夷辭之以爲名 仲尼語之以爲博 : 백이는 그것을 사양하여 명예를 얻었고 仲尼는 그것을 말하여 박식하다고 칭찬을 받음. 成玄英이 “앞서 仲尼의 견문을 적다 여기는 말을 아울러 풀이한 것이다[竝釋前事少仲尼之聞].”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呂惠卿, 陸樹芝, 阮毓崧, 福永光司도 거의 같은 견해이다(池田知久).
역주54 不似爾向之自多於水乎 : 이 같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까 그대가 스스로 물이 많다고 자랑한 것과 같지 아니한가. 林雲銘은 “이 문단은 도의 큼은 본래 끝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此段言 道之大 本無窮極].”라고 풀이했다.
역주55 然則吾大天地而小豪末可乎 : 그렇다면 내가 천지를 크다 여기고 털 끄트머리를 작다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豪는 毫와 같다. 馬叙倫과 王孝魚는 豪자가 毫로 표기된 판본이 있다고 했고, 王敔는 豪, 毫 두 글자가 통한다고 했다. 이 질문의 대의는 앞의 문답을 이어받아 河伯이 진실로 큰 존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참으로 큰 것[大]이란 천지인가라고 묻는 데 있다(池田知久).
역주56 物量無窮 : 사물이란 양에 한이 없음. 양에 한이 없이 무한히 크다는 뜻. 赤塚忠에 의해서 “夫物은 이 이하의 네 句에 연결되어 있다.”가 오늘날에는 이것이 정설이 되어 있는데, 池田知久도 지적하고 있듯이 林自, 林雲銘, 王敔 등도 이미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量은 아래 문장에 小‧大가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부터 미루어, 공간을 차지하는 크기이어서, 數(金谷治)로 볼 수는 없고, 따라서 物量은 만물 전체의 공간적인 큼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池田知久). 無窮은 無限하게 큰 것. 無窮이 무한히 작은 것까지를 의미하는 일은 이 시대에는 없었다(池田知久).
역주57 時無止 : 시간은 멈춤이 없음. 시간은 멈춤이 없이 永劫이라는 뜻.
역주58 分無常 : 주어진 분수는 일정하게 정해진 몫이 없음. 常은 林希逸 이래로 定의 뜻으로 함이 定說(池田知久). 주어진 분수 즉 分은, 만물 각각에게 주어진 生存의 조건. 貴賤貧富 등을 말한다.
역주59 終始無故 : 마침과 시작에는 고정됨이 없음. 終始는 林自에 의해 “사물의 생사이다[物之死生].”(林雲銘, 王敔)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 故는 高亨이 “固로 읽는다[讀爲固].”고 한 풀이가 통설.
역주60 是故 大知 觀於遠近 故小而不寡 大而不多 知量無窮 : 이런 까닭에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원대한 道理와 비근한 일상의 사물을 볼 수 있다. 그 까닭에 작아도 그것을 적다 여기지 않고, 커도 그것을 많다 여기지 않으니 사물의 양에 한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劉文典은 “知量無窮”을 “知物量之無窮也”로 고치고 있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池田知久).
역주61 證曏今故 :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야〉 과거와 현재를 밝게 앎. 證도 曏도 모두 명백하게 한다는 뜻. 曏에는 지난번, 접때라는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明(명백하게 한다)의 뜻. 今故는 今古와 같다.
역주62 遙而不悶 掇而不跂 : 먼 미래의 일이 명백하지 않더라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빨리 지나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버둥대지 않음. 郭象이 遙를 ‘長’으로 풀이한 것을 따라 遙를 명백하지 않은 먼 미래의 일로 보는 것이 좋다. 悶은 근심한다[憂]는 뜻. 掇은 郭象이 “短과 같다[猶短也].”라고 풀이했는데 짧은 시간에 빨리 지나가는 일이라는 뜻. 跂는 ‘忮’와 같은 글자로 거슬린다는 뜻으로 보거나, ‘企’와 같은 글자로 남을 원망한다는 뜻으로 보는 주석이 있는 등, 異說이 분분하나, 陸樹芝의 “잠깐의 시간이 쉬 지나간다고 해서 버둥대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不以暫之易過 而生跂望之心].”라는 주석이 좋은 것 같다(池田知久도). 그래서 일단 “먼 미래의 일이 명백하지 않더라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短時間에 빨리 지나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버둥대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遙를 長 즉 長壽로, 掇을 短 즉 短命으로 보아 이 글을 “오래 살게 되는 것에 싫증 내지 않고 빨리 죽는 것을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풀이하는 해석도 있음을 참고삼아 소개한다.
역주63 知時無止 : 시간에 멈춤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임. 劉文典은 “知時之無止也”로 표기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역주64 明乎坦塗 : 평탄한 大道를 분명히 앎. 成玄英은 坦을 ‘平’으로 풀이했고, 塗을 ‘道’라고 풀이했다. 여기에 따른다.
역주65 死而不禍 : 죽어도 그것을 재앙으로 여기지 않음. 이 두 句의 대의는 〈大宗師〉편 제1장의 “삶을 좋아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不知說生 不知惡死].”와 같다(福永光司, 池田知久).
역주66 知終始之不可故也 : 마침과 시작에 일정함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임. 故는 固와 같다. 일정하다는 뜻.
역주67 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 사람이 아는 것을 따지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음만 못하며 태어나서 살아 있는 시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의 장구함만 못함. 사람이 아는 것은 한계가 있고 알지 못하는 것은 무한히 많으며 사람이 살아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고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닌 그 이외의 시간은 무한히 장구하다는 뜻. 林希逸은 “사람이 아는 것은 사람일 뿐이고 알지 못하는 것은 자연인 天이다……지극히 작은 것은 나이고 지극히 큰 것은 天이다. 지극히 작은 나로서 지극히 큰 天을 궁구하려고 하니 미혹되어 즐겁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人之所知者 人也 其所不知者 天也……至小 我也 至大 天也 以我至小 欲窮至大之天 宜乎迷亂而不樂].”고 풀이했다. 金谷治는 〈養生主〉편의 “나의 삶에는 끝이 있는데 지식은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면 위태로울 뿐이다[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와 같은 의미로 풀이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68 以其至小 求窮其至大之域 是故 迷亂而不能自得也 : 지극히 작은 것을 가지고 지극히 큰 것을 궁구하려 하기 때문에 미혹되고 어지러워져 스스로 茫然自失하지 않을 수 없음. 成玄英은 “지극히 작은 것은 지식이고 지극히 큰 것은 천지 사이의 경계이다[至小 智也 至大 境也].”라고 풀이했다.
역주69 又何以知豪末之足以定至細之倪 又何以知天地之足以窮至大之域 :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또 어찌 털 끄트머리가 지극히 작은 것 중에서 가장 끝에 해당한다고 결정하기에 족하겠으며 또 어찌 천지가 지극히 큰 세계의 극한이라고 하기에 충분함을 알 수 있겠는가. 倪는 끝. 林希逸은 “끝이다[端也].”고 풀이했다.
역주70 世之議者 : 세상의 논객들. 惠施 또는 名家들을 비롯한 논객들을 지칭한다(福永光司, 森三樹三郞, 金谷治, 池田知久).
역주71 至精無形 至大不可圍 : 지극히 작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고 지극히 큰 것은 밖에서 에워쌀 수 없음. 精은 林希逸에 의거 細의 뜻. 〈天下〉편의 惠施의 말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고……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다[至大無外……至小無內].”고 한 명제와 같은 취지이다.
역주72 是信情乎 : 이것이 참으로 사실입니까. 信은 부사로 ‘참으로’의 뜻이고 情은 확실한 것, 사실이라는 뜻이다.
역주73 夫自細視大者不盡 自大視細者不明 : 무릇 작은 것을 기준으로 큰 것을 보면 다 보지 못하고 큰 것을 기준으로 작은 것을 보면 분명히 보지 못함. 대의는, 郭象 注가 올바르게 풀이하고 있다. 池田知久는 “成玄英 疏로 해석하는 자가 많으나, 그렇게 되면 至精‧至大가 무의미하게 되므로 부적당하다.”고 한다.
역주74 夫精 小之微也 垺 大之殷也 : 대저 지극히 작은 것[精]이란 작은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고 극대의 것[垺]은 큰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精은 極小의 뜻. 成玄英은 “微小也”라고 하고 있으며, 垺는 ‘클 부’, 여기서는 極大의 뜻. 成玄英은 “殷은 큼이다[殷大也].”라 하였다. 大之殷也의 ‘殷’은 ‘盛’의 뜻이다.
역주75 故異便 此勢之有也 : 먼저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그러나 본시 便不便을 달리하는 것이니 이것은 각각의 놓여진 형세가 있기 때문이다.”가 되는데, 이는 “그러나 〈크니 작으니 하는 것은〉 본시 편의상의 구별일 뿐이니, 각각의 사물이 놓여진 상황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의 뜻이다. 故는 ‘본시’의 뜻이고, 勢는 情勢‧形勢‧놓여진 상황의 뜻이다.
역주76 夫精粗者 期於有形者也 : 대저 작다 크다 하는 것도 형체가 있는 대상을 예상해서 한 말임. 期는, 成玄英에 의해 期限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가 많은데 여기서는 기약한다, 예상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精은 미세하다, 작다[小]의 뜻이고, 粗는 거칠다, 크다[大]의 뜻.
역주77 無形者數之所不能分也 不可圍者 數之所不能窮也 : 형체가 없는 것은 수량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고 에워쌀 수 없는 것은 수량으로 궁구할 수 없는 것임. 池田知久는 數는 成玄英이 말한 것과 같은 數量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知北遊〉편 제9장의 數와 거의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일단 ‘수량’으로 번역하였으나, 池田知久의 說도 참고할 만하다. 에워쌀 수 없는 것은 境界를 정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역주78 可以言論者 物之粗也 可以意致者 物之精也 :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만물 가운데 큰 것(粗)이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만물 가운데 작은 것(精)임. 論은 논한다, 따진다, 설명한다이고, 致는 成玄英의 ‘致得’을 따라 ‘이해한다’이고, 意는 뜻, 마음.
역주79 言之所不能論 意之所不能察致者 不期精粗焉 :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작다 크다 하는 것을 초월한 데 있는 것임. 不期精粗는 精이니 粗니 하는 것으로 기약되지 않는 것, 즉 精(작다)‧粗(크다)를 초월한 데 있는 것이란 뜻이다.
역주80 是故大人之行 : 그래서 大人의 행동은. 大人은 道를 체득한 위대한 인물이란 뜻. ‘是故大人之行’ 이하 ‘約分之至也’까지의 111字는 문맥이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陳鼓應은 마땅히 삭제해 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池田知久도 “是故는 앞뒤의 논리적 관계를 표시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확실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역주81 不出乎害人 : 남을 해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음. 出은 進과 같다.
역주82 不多仁恩 : 仁惠恩德을 베푸는 행위를 자랑하지도 아니함. 多는 많다고 자랑한다는 뜻. 林希逸은 “비록 다른 사물을 해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을 잘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雖不害物 而亦不以愛物爲能].”라고 풀이했다.
역주83 動不爲利 不賤門隷 : 행동은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으나 〈이익을 위해서〉 성문의 문지기 노릇까지 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지 않음. 비록 스스로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이익을 위해서 성문의 문지기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천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 두 句의 대의는, 林希逸의 “내가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으나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그르다고 여기지도 않는다[我不求利 亦不以求利者爲非].”가 거의 올바른 풀이이며 또한 정설(위에 인용한 王敔는 부적당). 李勉이 “이 句는 榮辱에 구분이 없고 貴賤에 구별이 없음[榮辱無分 貴賤無別]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잘못(池田知久). 門隷는 林自의 “관문을 지키는 자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말하는 자이다[抱關而爲貧者也].”가 옳다. 利에 緣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 利를 구하는 사람은 아니다(池田知久).
역주84 不多辭讓 : 겸양의 미덕을 자랑하지 않음. 馬叙倫은 讓을 攘의 가차라 했는데 물건을 받지 않고 물리친다[攘]는 뜻으로 본 것으로 의미의 차이는 거의 없다.
역주85 事焉不借人 不多食乎力 : 일을 할 때 남의 힘을 빌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自力으로 먹는 것을 자랑하지도 아니함. ‘食乎力’의 食力은 自力으로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池田知久).
역주86 不賤貪汙 : 〈청렴함을 지키고 귀하게 여겨 物質的인 탐욕을 갖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욕스럽고 더러운 사람이라고 하여 천하게 여기지도 아니함. 汙는 汚로 표기한 판본이 있다(馬叙倫). 不賤貪汙의 앞에는 한 句가 있었는데 脫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陶鴻慶), 王叔岷은 이것을 ‘守貴淸廉’ 네 글자로 推測하고 있다.(《莊子校釋補錄》) 여기서는 이것을 따라 번역하였음.
역주87 行殊乎俗 不多辟異 : 행동을 세속과 달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사람과 크게 다름을 자랑하지 아니함. 陸德明은 行을 “下와 孟의 반절이다. 아래에 있는 堯桀之行의 行과 같다[下孟反 下堯桀之行同].”라고 풀이했다. 林希逸의 “그의 행실이 사람들과 다르지만 스스로 심하게 달리하지 않음이다……辟은 치우침이다. 辟異는 심하게 달리함이다[其行實異於人 而不自爲崖異……辟 僻也 辟異 崖異也].”의 풀이가 옳다(崖異는 〈天地〉편 제2장의 말). 곧 辟異는 僻異 또는 特異와 같다.
역주88 世之爵祿 不足以爲勸 戮恥 不足以爲辱 : 세상의 작록으로도 권장하기에 부족하며 형륙과 수치로도 욕되게 하기에 부족함. 이상의 七事에 있어서의 大人의 主體性의 확립을 말하는 문장이다(池田知久). 〈逍遙遊〉편에 보이는 “그런데 宋榮子는 〈이런 자기 만족의 인물들을〉 빙그레 비웃는다. 그리하여 그는 온 세상이 모두 그를 칭찬하더라도 더 힘쓰지 아니하며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비난하더라도 더 氣가 꺾이지 아니한다[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 而不加勸 擧世而非之 而不加沮].”를 참조할 것.
역주89 知是非之不可爲分 細大之不可爲倪 : 是와 非를 가릴 수 없고 小와 大의 한계를 그어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임. 倪는 구별, 한계의 뜻인데, 是非之不可爲分과 細大之不可爲倪는 是와 非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고, 大와 小 사이에 절대적인 구별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역주90 道人不聞 : 道를 터득한 사람은 명성이 세상에 들리지 않음. 池田知久에 의하면, 〈山木〉편 제4장에 “至人不聞”이라 있음은 王先謙의 지적이며, 不聞은 林希逸에 의해 ‘無名’의 뜻.
역주91 至德不得 :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德으로 칭송할 수 없음. 得은 郭象, 成玄英 이래로 得失의 得으로 보아왔으나, 福永光司에 의해 德의 뜻으로 읽는 것이 좋다(池田知久). 또, 이 句를 《老子》 38장의 “上德不德”과 같다고 본 것은 成玄英으로부터 시작한다(池田知久).
역주92 大人無己 : 大人은 自己가 없음. 이 句가 〈逍遙遊〉편 제1장의 “至人無己”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은 陸樹芝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池田知久). 福永光司나 赤塚忠은 이것을 〈逍遙遊〉편에 근거한다고 보고 있으나 池田知久는 그 반대로 보고 있다. 修辭도 이쪽이 古朴하고, 〈逍遙遊〉편이 잘 整合된 점에 注意할 필요가 있다고 池田知久는 말하고 있다.
역주93 約分之至也 : 〈是와 非, 小와 大의〉 구별을 버린 극치임. 是와 非, 小와 大 따위의 구별을 버린 극치의 행위라는 뜻. 大意는 呂惠卿의 “사람이 구분을 버리는 극치를 이룰 수 있으면 구별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人能約分之至 至於無所分].”, 羅勉道의 “約은 儉約이라.”는 주석을 취해서 約을 적게 한다, 버린다는 뜻으로 해석한 池田知久를 따랐다. 그러나 約分之至也에는 異說이 있다. 安東林은 “自己本分을 지킨다는 것의 극치.”라고 번역하였으며, 福永光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경우[分]에 적응하는 극치.”라고 번역하였다. 福永光司의 설은 “約은 依也라.”라고 한 成玄英의 주석을 따른 것이다. 참고로 成玄英 疏를 소개한다. “約은 依이고, 分은 限이다. …… 만일 눈이 보는 바를 보고 귀가 듣는 바를 듣고 知는 아는 바에 멈추고 분수 안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자는 이는 德이 지극한 데 이른 자이다[約依也 分 限也……若視目所見 聽耳所聞 知止所知 而限於分內者 斯德之至者也].”
역주94 若物之外 若物之內 惡至而倪(예)貴賤 惡至而倪小大 : 혹 사물의 밖에서건 혹 사물의 안에서건 어디에 이르러 貴와 賤의 구분이 성립되며, 어디에 이르러 小와 大의 구별이 성립합니까? ‘어디에 이르러’는 ‘어떻게 하여’로 번역하여도 可하다. 倪는 한계, 구별의 뜻. 若은 選擇關係를 표시하는 連詞. 物之外는 위 문장의 無形, 不可圍, 物之內는 有形, 可圍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결국 이 부분은 河伯이 “物의 세계 밖으로 想定하건, 物의 세계 안으로 內在시키건, 거기에는 貴와 賤, 小와 大로 구별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 문장이다.
역주95 以道觀之 物無貴賤 : 道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음. 成玄英의 疏에서 “道는 虛通의 妙理이고 物은 質礙의 麤事이다. 麤의 관점에서 妙를 보는 까닭에 大小가 있고 묘의 관점에서 추를 보는 까닭에 貴賤이 없다.”라고 주석한 것이 참고가 된다.
역주96 以差觀之 : 차별이란 관점에서 봄. ‘差’는 成玄英에 의거 ‘別’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以差觀之는 아래 문장의 “以功觀之” “以趣觀之”와 함께 위 문장의 “以物觀之”의 구체화이다(池田知久). 物의 大小를 差라 하고 物의 有無를 功(작용, 功能)이라 하고, 物의 然非를 趣라 한 것일 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褚伯秀, 王夫之, 池田知久).
역주97 因其所大而大之 則萬物莫不大 因其所小而小之 則萬物莫不小 : 사람들이 각자 크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어떤 사물을 크다고 하면 만물이 크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작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어떤 사물을 작다고 하면 만물이 작지 않은 것이 없음. 각자의 기준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절대적인 大나 小의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뜻.
역주98 知天地之爲稊米也 知毫末之爲丘山也 則差數 覩矣 : 천지가 돌피알처럼 작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고, 毫末이 언덕이나 산처럼 큰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차별의 이치[差數]를 볼 수 있게 될 것임. 천지보다 큰 것을 무한히 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천지가 가장 작은 것이 될 수 있고, 털 끄트머리보다 작은 것들과 비교하면 털 끄트머리가 가장 큰 사물이 될 수 있다는 뜻. 福永光司는 “知毫末之爲丘山也”를 〈齊物論〉편 제1장의 “천하에 가을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太山은 가장 작은 사물이다[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太山爲小].”와 같은 사상이라고 하여 〈齊物論〉편을 참고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역주99 以功觀之 : 效用이란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功은 功用 곧 效用의 뜻. 功은 郭象이 功을 各人, 各物의 功能, 功績의 뜻으로 한 이래, 이것이 정설이 되어 있으나 적절치 않다(池田知久).
역주100 知東西之相反 而不可以相無 則功分定矣 : 東과 西가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서로 없어서는 아니 됨을 알면 사물 각각의 효용성이 명확하게 될 것이다. 池田知久는 이 부분을 “成玄英 이래의 通說처럼, 東西가 서로 의존해가며 함께 있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有無가 東西처럼 物自體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밖으로부터 가지고 온 相互 규정적인 대립개념이니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上下文에서 물자체에 大小, 然非가 없다고 하고 있는 것과 整合하지 않는다.”라고 註解하고 있다. 功分의 分에 대하여는 ‘本分, 本質’을 뛰어난 譯語로 보아 ‘功分定矣’를 “효용을 나누는 名分이 분명히 결정될 것이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취하지 않는다.
역주101 以趣觀之 : 취향을 기준으로 살펴봄. 王先謙은 “중인들의 취향[衆人之趣向].”이라고 풀이했고, 王夫之는 “사람들이 달려가는 것[人之所趣嚮].”으로 풀이했다. 이 외에 宣穎은 “사람의 마음이 향하는 것[人心所向也].”이라고 풀이했는데 비슷한 견해로 큰 차이는 없다. 劉文典과 池田知久는 〈天地〉편 제15장과 이 장에 나오는 趣舍의 趣와 같다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102 因其所然而然之 則萬物莫不然 因其所非而非之 則萬物莫不非 : 각자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그렇지 않을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 만물이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 없게 됨. 然은 그렇다고 여김. 곧 옳다고 여긴다는 뜻. 成玄英이 풀이한 것처럼 是와 같다. 〈齊物論〉편 제1장에 “모든 物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物은 진실로 可한 바가 있으니 어떤 物이든 그렇지 않은 바가 없으며 어떤 物이든 可하지 않은 바가 없다[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라고 하고 있는 것이 참고가 된다.
역주103 知堯桀之自然而相非 則趣操覩矣 : 그래서 堯와 桀이 자기를 그렇다고(옳다고) 하고 상대방을 그렇지 않다고(그르다고) 여기는 것을 알게 되면 취향의 근거를 볼 수 있을 것임. 自然而相非는 자신은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하는 것. 趣操는 취향의 기준, 근거를 뜻한다. 成玄英은 操를 志操로 풀이했는데 어떤 행동을 지조 있는 태도라고 생각하여 그쪽으로 달려간다는 뜻이다. 覩는 본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알게 된다, 明白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104 堯舜 讓而帝 之噲讓而絶 : 堯와 舜은 임금 자리를 사양함으로써 제왕이 되었는데, 燕의 宰相 子之와 燕王 子噲는 같은 방법으로 나라를 멸망시킴. 之噲의 之는 연나라 재상이었던 子之, 噲는 연나라 임금 子噲를 지칭한다. 司馬彪는 “연나라 왕 쾌가 계책을 쓰는데 어리석어서 소대의 유세를 따라 요순이 선양한 것을 본받아 재상이었던 子之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했다가 3년 만에 연나라가 어지러워졌다[燕王噲拙於謀 用蘇代之說 效堯舜讓位與子之 三年而國亂].”라고 풀이했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武內義雄의 〈六國年表訂誤〉와 錢穆의 《先秦諸子繫年》에 의하면 燕王噲나 子之가 죽은 것은 기원전 314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 앞에 ‘昔者’라고 붙여 서술하고 있는 이 문장은 빨라도 戰國 末期의 작품이다. 따라서 姚鼐의 《莊子章義》에서 ‘자지와 자쾌는 장자와 동시대이므로 昔者라고 말할 수 없다[之噲莊子同時 必不曰昔者].’라고 풀이하고 錢穆과 李勉이 姚鼐의 견해를 그대로 따른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역주105 湯武 爭而王 白公爭而滅 : 湯王과 武王은 무력으로 다툼[放伐함]으로써 왕이 되었는데, 楚나라의 白公은 같은 방법으로 다투고서 살해당해 자멸함. 白公은 《經典釋文》에 “이름은 勝이고, 楚 平王의 손자이다. 白縣의 尹으로 公을 僭稱하다가 亂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일이 《春秋左氏傳》 哀公 16年條에 보인다[名 勝 楚平王之孫 白縣尹 僭稱公 作亂而死 事見左傳哀公十六年].”라고 풀이했다.
역주106 爭讓之禮 堯桀之行 貴賤有時 未可以爲常也 : 다툼[放伐]과 선양의 禮나 堯와 桀의 행동은 어떤 것을 貴한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을 賤하게 여김이 때에 따라 다른지라 그 어느 하나를 일정한 법칙으로 삼을 수 없음. 朱得之는 禮를 擧의 잘못이라 했는데 일리가 있는 견해이지만 글자를 그대로 두고도 무리 없는 해석이 가능하므로 굳이 따르지 않는다. 陸樹芝는 “위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면 귀천의 차별이 있게 됨을 말했고, 여기서는 천하의 일은 본래 일정한 귀천이 없으므로 한 가지를 고집하여 상례로 삼을 수 없음을 말했다[上言偏執己見 則有貴賤 此言天下事本無一定之貴賤 未可執而常例也].”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