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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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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대 何也
로라
南伯子葵曰
道可得學邪
리오
吾欲以敎之하노니 인저
하니 參日而後 能外天下어늘 호니 七日而後 已外物矣어늘 吾又守之호니 九日而後 已外生矣而後하고 朝徹而後 見獨而後 無古今而後하니라
攖寧也者 니라
南伯子葵曰
聞諸호라
副墨之子 聞諸하고 洛誦之孫 聞之하고 瞻明 聞之 聶許 聞之하고 需役 聞之하고 於謳 聞之하고 玄冥 聞之하고 參寥 聞之하니라


남백자규南伯子葵여우女偶에게 물었다.
“당신의 나이는 상당히 많은데 안색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나는 를 들었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라는 것이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아!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복량의卜梁倚 같은 사람은 성인의 재능은 가지고 있지만 성인의 는 없고, 나는 성인의 는 지니고 있지만 성인의 재능은 없다.
그래서 내가 복량기에게 〈성인의 도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데, 바라노니 그가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인의 도를 성인의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일러 주는 것은 또한 쉬운 일이다.”
“나는 그래도 차근차근히 지켜보면서 그에게 일러 주었는데, 3일이 지난 뒤에 천하를 잊어버렸고, 이미 천하를 잊어버리자 내가 또 그를 지켜보니 7일이 지난 뒤에 모든 사물事物을 잊어버렸고, 이미 모든 사물을 잊어버리자 내가 또 그를 지켜보니 9일이 지난 뒤에 자기의 삶을 잊어버렸고 이미 삶을 잊어버린 이후에 아침 햇살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였고, 아침 햇살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 이후에는 홀로 우뚝 선 를 볼 수 있었고, 홀로 우뚝 선 도를 본 뒤에는 시간의 흐름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이후에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을 사멸死滅시키는 존재는 그 자신이 사멸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을 생성하는 존재는 그 자신이 생성되지 않는다.
사물을 보내지 아니함이 없고 맞이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허물지 않음이 없고 이루지 않음이 없으니 그 이름을 영녕攖寧이라 한다.
영녕이라고 하는 것은 어지럽게 어울린 뒤에 〈대상 사물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남백자규南伯子葵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홀로 어디에서 그런 것을 들으셨습니까?”
여우女偶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부묵副墨의 아들에게서 들었다.
부묵의 아들은 그것을 낙송洛誦의 손자에게서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그것을 첨명瞻明에게서 들었고, 첨명은 그것을 섭허聶許에게서 들었고, 섭허는 그것을 수역需役에게서 들었고, 수역은 그것을 오구於謳에게서 들었고, 오구는 그것을 현명玄冥에게서 들었고, 현명은 그것을 참료參寥에게서 들었고, 참료는 그것을 의시疑始에게서 들었다.”


역주
역주1 南伯子葵 : 인명. 李頤는 “葵는 마땅히 綦가 되어야 하니 音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葵當爲綦 聲之誤也].”라고 풀이했다. 〈齊物論〉편의 南郭子綦와 〈人間世〉편, 〈徐無鬼〉편의 南伯子綦는 모두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나 〈齊物論〉편의 南郭子綦나 〈人間世〉편과 〈徐無鬼〉편의 南伯子綦는 이미 도를 터득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여기의 南伯子葵는 아직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齊物論〉편 제1장의 역주 참조.
역주2 女偊(우) : 인명. 成玄英은 ‘옛날 道를 품고 있었던 사람[古之懷道人]’이라고 풀이했고, 陳景元은 ‘옛날 道를 지니고 있었던 여인[古之有道女人]’이라고 풀이했다.
역주3 子之年長矣 : 그대의 나이가 많음. 子는 2인칭. 年長은 나이가 많다는 뜻.
역주4 色若孺子 :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음. 色은 顔色. 孺子는 어린아이. 李頤는 어린아이[弱子]로 풀이했다.
역주5 聞道 : 道를 들음. 王叔岷은 이 구절을 두고 “〈知北遊〉편에서 ‘道는 들을 수 없으니 들을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도를 들었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도는 귀로 들을 수 없다. 귀는 듣는 데에 그칠 뿐이다. 마땅히 마음으로 들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氣로 들어야 한다. 〈人間世〉편에서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또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 들어야 한다.……氣는 마음을 비워서 物을 기다리는 것이다. 道는 오직 마음을 비우는 곳에 응집된다.’고 한 것이 이 뜻이다[案知北遊篇 道不可聞 聞而非也 此言聞道 何也 蓋道不可以耳聞 耳止於聽而已 當聽之以心 進而聽之以氣 人間世篇 無聽之以耳 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 而聽之以氣……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是也].”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6 惡(오)惡(오)可 : 아! 어찌 되겠는가. 도를 배워서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이지만, 뒤의 ‘子 非其人也’를 보면 사람에 따라 도를 배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앞의 惡는 상대의 의견을 반박하는 뜻의 감탄사. 뒤의 惡는 어찌.
역주7 子非其人也 :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님. 道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
역주8 卜梁倚(기) : 인명. 李頤는 卜梁은 姓이고 倚는 이름이라고 풀이했다. 成玄英은 ‘卜梁은 姬姓이고 倚는 이름[卜梁姬姓 倚名也]’이라고 풀이했는데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역주9 有聖人之才 而無聖人之道 : 성인의 才能은 있지만 성인의 道는 없음. 才는 道와 상대되는 말로 才能 또는 才質의 뜻. 成玄英은 “복량기에게 밖에 쓰이는 才는 있지만 안에 응집되는 道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梁有外用之才 而無內凝之道].”라고 풀이했다.
역주10 有聖人之道 而無聖人之才 : 성인의 도는 있지만 성인의 재능은 없음. 成玄英은 “女偊에게 虛淡의 道는 있지만 明敏한 才는 없음을 말한 것이다[女偊有虛淡之道 而無明敏之才].”라고 풀이했다.
역주11 庶幾其果爲聖人乎 : 바라노니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표현.
역주12 以聖人之道 告聖人之才 亦易(이)矣 : 성인의 도를 성인의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일러 주는 것은 또한 쉬움. 성인의 道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도를 일러 주는 것은 쉽다는 뜻. 成玄英은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非知之難 行之難也].”를 말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3 猶守而告之 : 그래도 차근차근히 지켜보면서 일러 줌. 卜梁倚가 성인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복량기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차근차근히 道에 관해 일러 주었다는 뜻. 守而告之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지만 《論語》 〈子罕〉편의 ‘循循然善誘人’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곧 “道를 곧바로 일러주지 않고 제자가 수행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르치는 차례를 따라 차근차근히 일러주었다.”는 뜻이다. 聞一多는 ‘告而守之’로 보아야 한다고 했지만 근거없는 주장이며, 王先謙은 ‘守而不去’로 풀이했지만 의미가 불분명하다. 또 安東林은 ‘신중히 대하다’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역시 불충분하다. 여기서는 뒤에 ‘吾又守之’가 두 차례나 나오는 것을 근거로 삼아서 女偊가 복량기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차례를 따라 차근차근히 도를 일러주었다는 의미로 보았다. 곧 女偊는 外天下→外物→外生→朝徹→見獨→無古今→入於不死不生에 이르는 단계별 수행과정을 따라 道를 전수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단계별 수행은 〈寓言〉편의 ‘一年而野 二年而從 三年而通 四年而物 五年而來 六年而鬼入 七年而天成 八年而不知死 不知生 九年而大妙’라는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역주14 外天下 : 천하를 도외시함. 外는 도외시함, 잊어버리다는 뜻. 천하의 어지러운 人間事를 잊어버렸다는 뜻.
역주15 吾又守之 : 내가 또 지켜봄. 吾又守而告之의 줄임이다.
역주16 外物 : 모든 사물(만물)을 度外視함. 뒤의 外生과 상대하여 외부의 모든 사물을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역주17 外生 : 삶을 도외시함. 자기의 삶마저 잊어버렸다는 뜻. 앞의 外物에 비해 더 어려운 경지를 의미한다.
역주18 朝徹 : 아침 햇살과 같은 경지. 어둠을 꿰뚫는 아침 햇살과 같이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는 뜻으로 도를 깨우쳤음을 형용한 표현. 李頤와 兪樾 등은 朝를 早로 보고 일찍의 뜻으로 풀이했지만 적절치 않다. 奚侗은 《說文解字》에서 ‘朝는 旦이고 旦은 밝음[朝旦也 旦明也]’이라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여기의 朝徹을 明徹로 풀이했는데, 朝와 明은 갑골문의 글자 형태도 비슷하기 때문에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적절하다. 徹은 通徹의 뜻으로 밝게 안다는 의미.
역주19 見獨 : 홀로 우뚝 선 도를 봄. 林希逸은 “자신은 보지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함이다[自見而人不見也].”로 풀이했는데 통상적인 문법에 어긋나는 풀이일 뿐만 아니라 見의 대상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여기의 獨은 《老子》 제25장에 나오는 ‘獨立不改’의 獨으로 道의 절대성을 형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方勇‧陸永品은 馮友蘭이 《中國哲學史新編》에서 “이른바 見獨은 바로 道와 서로 만났다는 뜻이다. 莊周는 道는 絶對이기 때문에 그것과 서로 對立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獨이라고 일컬은 것이다.”라고 분석한 것을 인용하면서 獨을 ‘우뚝하게 홀로 선 至道[卓然獨立的至道]’라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른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殺生者 不死 生生者 不生’과 같이 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이 견해가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역주20 無古今 : 고금을 잊어버림. 곧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렸다는 뜻. 宣穎은 “고금을 한가지로 여긴다[古今一也].”고 풀이했다. 〈知北遊〉편에 ‘古猶今也 無古無今’이라는 유사한 표현이 보인다(王叔岷).
역주21 入於不死不生 : 不死不生의 경지에 들어감. 곧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道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 〈寓言〉편의 ‘不知死 不知生’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22 殺生者 不死 生生者 不生 : 살아 있는 것을 사멸시키는 존재[道]는 그 자신이 사멸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을 생성하는 존재는 그 자신이 생성되지 않음. 무엇에 의해 사멸되거나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 도의 절대성을 표현한 말. 殺生者와 生生者는 각각 사물을 죽이는 존재[殺物者]와 사물을 생성시키는 존재[生物者]를 의미하며 道를 지칭한다.
역주23 其爲物 : 사물에 대해서. 其於物과 같다. 成玄英은 ‘道의 물됨[道之爲物]’, 곧 道의 구체적인 성질이라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여기서는 王叔岷이 ‘爲는 於와 같다[爲猶於也]’고 풀이한 견해를 따랐다. 뒤의 ‘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毁也 無不成也’는 모두 道, 또는 道를 터득한 사람이 사물에 대해 지니는 편견 없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其爲物을 其於物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應帝王〉편에는 이 구절과 유사한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경우 “至人의 마음 씀씀이는 마치 거울과 같아서, 〈사물을〉 보내지도 아니하고 〈사물을〉 맞이하지도 아니하며, 비추어 주기만 하고 모습을 간직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므로 역시 도를 터득한 사람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역주24 無不將也 無不迎也 : 보내지 아니함이 없고 맞이하지 아니함이 없음. 곧 사물이 가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사물이 오면 맞이한다는 뜻이다. 郭象은 “스스로 가게 놓아두기 때문에 보내지 않음이 없고, 스스로 맞이하게 놓아두기 때문에 맞이하지 않음이 없다[任其自將 故無不將 任其自迎 故無不迎].”고 풀이했다. 표현은 다르지만 〈應帝王〉편의 ‘不將不迎’과 같은 맥락이다.
역주25 無不毁也 無不成也 : 허물지 않음이 없고 이루지 않음이 없음. 허물어지는 것은 허물어지게 놓아두고 이루어지는 것은 이루어지게 내버려 두어서 인위적인 편견으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 郭象은 “스스로 허물어지게 놓아두기 때문에 허물지 않음이 없고, 스스로 이루어지게 놓아두기 때문에 이루지 않음이 없다[任其自毁 故無不毁 任其自成 故無不成].”고 풀이했다.
역주26 其名爲攖寧 : 그 이름을 攖寧이라 함. 攖은 외부의 사물과 어지럽게 얽히고설켜서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고, 寧은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의 사물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郭象은 攖을 縈으로 보고 “사물이 어지러우면 나 또한 함께 어지러워져서 편안하지 않음이 없다[物縈亦縈 未始不寧也].”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가 옳다. 福永光司는 不死不生의 道와 자기가 하나로 抱擁하면서 실현되는 편안한 경지라 하고 이것을 莊子의 絶對世界, 장자의 解脫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成玄英이 “비록 외부의 사물이 어지러워도 성인의 마음은 편안하다[雖攖而寧].”고 풀이한 이래 ‘어지러움 속의 평온’(오강남) 등으로 이 견해를 따르는 주석가들이 많지만 攖寧은 바로 앞의 ‘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毁也 無不成也’를 攖寧이라는 명칭으로 설명한 것이고, 바로 뒤의 본문에 ‘攖而後 成者也’라는 풀이가 나오기 때문에 攖과 寧을 대립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역주27 攖而後 成者也 : 사물과 어지럽게 어울린 뒤에 편안한 관계를 이룸. 成은 앞의 寧과 같은 뜻으로, 《春秋左氏傳》 隱公 1년의 ‘公立而求成焉(은공이 즉위하여 송나라와 우호를 맺고자 했다)’의 成과 같이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곧 대상 사물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역주28 子獨惡乎聞之 : 그대는 홀로 어디에서 그런 것을 들었는가. 왕숙민은 獨을 乃와 같다고 풀이했는데 여기의 獨은 홀로의 뜻이 약하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29 副墨之子 : 부묵의 아들. 副墨은 인명이지만 여기서는 문자를 쓰는 도구인 먹[墨]을 擬人化한 표현이다. 따라서 부묵의 아들은 먹으로 쓰여진 문자를 지칭하며 道를 전달하는 보조수단을 상징한다. 成玄英은 “副는 이차적인 보조수단이고 墨은 翰墨으로 文字를 뜻한다[副副貳也 墨翰墨也 翰墨文字也].”고 풀이했다. 副墨之子 이하 9명은 실재의 인물이 아니고 어떤 철학적 槪念의 擬人化이다. 곧 道의 淵源이 深遠함을 寓意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역주30 洛誦之孫 : 낙송의 손자. 洛誦 또한 인명이지만 여기서는 문자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말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곧 낙송의 손자는 말로 전해지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成玄英은 洛을 羅洛으로 풀이했고, 李頤는 苞洛으로 풀이했으며, 王先謙은 絡의 가차자로 풀이했는데, 모두 줄줄이 이어져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誦은 暗誦하다는 뜻. 따라서 洛誦은 책을 보지 않고 줄줄 외우는 것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成玄英은 “책을 보고 읽는 것을 부묵이라 하고 책을 등지고 암송하는 것을 낙송이라 한다[臨本謂之副墨 背文謂之洛誦].”고 풀이했다.
역주31 瞻明 : 인명. 눈으로 직접 道를 보고 분명히 안 사람이라는 뜻으로 앞의 부묵의 아들과 낙송의 손자가 도를 문자나 말 따위의 이차적인 도구를 통해 불완전하게 이해한 것이라면, 여기의 첨명은 도를 직접 보았다는 뜻으로 도에 더 가까이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瞻은 보다는 뜻이고 明은 눈이 밝다는 뜻. 곧 도를 분명히 보았다는 뜻이다. 李頤는 ‘神明이 洞徹함[神明洞徹也]’이라고 풀이했다. ‘보고서 분명히 아는 것[視而明之也]’이라 한 朱桂曜의 풀이가 簡易直截하다.
역주32 聶許 : 인명. 道를 들으면 바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뜻. 聶은 귀를 붙잡고 일러 준다는 뜻이고, 許는 일러 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이해한다는 뜻. 앞의 瞻明은 道의 체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여기의 聶許는 道의 체득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곧 聶은 瞻과, 許는 明과 상대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朱桂曜가 瞻明을 視而明之也로 풀이한 방식을 따르면 聶許는 ‘듣고서 바로 이해한다[聽而許之也]’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成玄英은 聶을 ‘귀에 대고 사사로이 일러주는 것[附耳私語]’으로 풀이했고 許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私自許當]’으로 풀이했다. 陳景元은 “눈으로 理를 본 것을 첨명이라 했고, 귀에 대고 일러주는 것을 섭허라 했다[見理曰瞻明 耳告曰聶許].”고 풀이했고, 釋德淸은 ‘소리를 들으면 마음 속으로 이해하는 것[聲入心通]’으로 풀이했고, 陳壽昌은 ‘들으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聽之而心許]’이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참고할 만하다. 한편 李頤는 聶을 攝으로, 許를 與로 보고 “거두어들여서 보존하기만 하고 베풂이 없다[攝而保之 無所施與也].”고 풀이했는데 부적절하다.
역주33 需役 : 인명. 기다렸다가 道를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 需는 《周易》 需卦의 彖傳에서 “需는 기다림이다[需須也].”로 풀이한 것처럼 기다리다[須 또는 待]는 뜻이고, 役은 기른다는 뜻. 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지만, 役은 쓰다[用], 또는 실천하다[行]는 뜻으로 보는 견해(成玄英, 林希逸, 宣穎)와 부림을 당하다[爲役]는 뜻으로 보는 견해(李頤)가 있지만, 여기서는 王叔之가 기르다[亭毒]는 뜻으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役을 실천하다는 일반적인 뜻으로 보게 되면 이것을 ‘실천적인 試圖를 하는 사람’, ‘실천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역주34 於(오)謳 : 인명. 道를 즐겨서 감탄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 林希逸은 “於謳는 말로 부족해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고, 於는 감탄하는 것이니 스스로 도를 얻은 것을 즐거워함을 말한 것이다[於謳者 言之不足而詠歌之也 於 嗟嘆也 言其自得之樂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5 玄冥 : 인명. 깊고 어두워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 玄과 冥은 모두 깊고 어둡다는 뜻으로 道와 일체가 되어서 人智로는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형용한 표현이다. 向秀와 郭象은 ‘無이면서 無가 아님을 일컬은 것[所以名無而非無也]’이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玄은 깊고 멂을 일컬음이고 冥은 그윽하고 고요함을 일컬음[玄者 深遠之名也 冥者幽寂之稱]’이라고 풀이했다. 〈秋水〉편에는 “玄冥에 시작해 大通으로 돌아간다[始於玄冥 反於大通].”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때의 현명과 대통은 모든 것을 깨우쳐 도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인명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역주36 參寥(참료) : 인명. 텅 비어 있는 道에 참여하는 사람, 또는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參은 참여하다[參合]는 뜻(羅勉道)이고, 寥는 空虛의 뜻(王叔岷). 곧 아무런 작용이 없는 道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형용한 표현이다. 宣穎은 參을 깨우치다[參悟]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羅勉道의 견해와 유사하다. 成玄英은 參을 삼(三)으로 읽고 寥를 끊어버리다는 뜻으로 보고, 세 가지를 끊어버린 경지[絶有 絶無 非有非無]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풀이했지만 천착에 가까운 견해이다. 또 參을 높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李頤)와, 槮의 假借字로 높은 모양을 뜻한다는 견해(朱駿聲, 王叔岷)가 있지만 앞의 玄冥이나 뒤의 疑始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다.
역주37 疑始 : 인명. 시작을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 道는 스스로를 근본으로 삼기[自本自根] 때문에 그 시작을 추측할 수 없다는 뜻(方勇‧陸永品). 宣穎이 “疑始란 시작이 있는 듯하지만 시작이 없는 것이다[疑始者 似有始而未嘗有始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한편 池田知久는 疑를 王闓運, 赤塚忠의 견해에 근거하여 凝의 뜻으로 보아, 疑始란 ‘世界의 根源에 凝佇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참고할 만하기에 一說로서 언급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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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장(1)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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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장(2)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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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장(3)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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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2장(4) 282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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