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3)

장자(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古之人하야 하니
옛사람들은 구별이 없는 혼돈渾沌 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염담적막恬淡寂漠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본래의 조화를 얻어 고요하며, 귀신도 사람들을 동요시키지 아니하며, 사계절의 운행이 절도에 맞으며, 만물이 손상되지 아니하며, 모든 생물生物이 요절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록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쓸 필요가 없었으니, 이런 때를 일컬어 만물일체가 실현된 시대(至一의 시대)라 한다.
當是時也하야 하더니라
이 시대에는 아무도 억지로 함이 없고 늘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었다.
그러다가 쇠퇴衰頹하여 수인씨燧人氏복희씨伏羲氏가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렀다.
是故 하니라
이 때문에 사람들은 순종하기는 했지만, 서로 일체가 되지 못했다.
德又下衰하야 及神農黃帝 始爲天下
이 또 더욱 쇠퇴하여 드디어 신농씨神農氏황제黃帝가 비로소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렀다.
是故 하니라
이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편안해지긴 했지만 서로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德又下衰하야 始爲天下
이 또 더욱 쇠퇴하여 드디어 도당씨陶唐氏(堯)와 유우씨有虞氏(舜)가 비로소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치와 교화의 흐름을 일으켜 사람들의 순후淳厚한 진심을 천박하게 하고 소박素朴한 본성을 소산消散시켜 를 떠나 엉뚱한 것을 이라 하며, 을 위태롭게 만들어 그것을 실행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사람들은 소박한 본성을 버리고 사심私心을 따라 사심私心사심私心과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식이 발달하더라도 그들의 지식으로 천하를 안정시키기에는 부족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쓸데없는 껍데기를 갖다 붙이고 박식이라는 꾸밈을 보태서, 껍데기[文]가 바탕[質]을 없애버리고 박식이 인간의 마음을 탐닉케 하였다.
然後에야 民始惑亂하야 하니라
그런 뒤에 백성들은 비로소 미혹되고 혼란에 빠져 자기 본성의 진실한 모습으로 돌아가 처음의 상태인 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由是觀之컨대 世 喪道矣 道 喪世矣
이로써 살펴본다면 세상은 참된 를 잃어버리고, 또 참된 도 그 를 실현할 세상을 잃어버렸는지라.
세상과 가 서로 상대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를 체득한 성인聖人이 있다 한들 어떻게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겠으며, 세상 또한 어떻게 그 에 의지해 일어날 수 있겠는가.
道 無以興乎世 世 無以興乎道 이니라
가 세상에 일어날 수 없고 세상이 에 의지해 일어날 수 없다면 성인이 비록 〈일부러〉 산림 속에 몸을 감추지 않더라도 그 은 이미 숨겨진 것이니, 이미 숨겨져 있는 까닭에 스스로 숨지 않는다.
옛날 이른바 은둔한 선비들은 자기 몸을 엎드려서 보이지 않게 한 것이 아니며 말문을 닫아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지혜를 속에 감추어서 밖으로 공표公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일새니라
시운時運이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시운을 만나 천하에 크게 시행함에는 사람들을 하나로 돌아가게 하되 자취를 남김이 없고 시운을 만나지 못해 천하에서 크게 곤궁할 때에는 뿌리를 깊이 박고 지극한 도를 편안히 여기며 때를 기다렸으니 이것이 몸을 보존하는 도리이다.
역주
역주1 混芒之中 : 일체의 구별이 없는 渾沌 상태. 混芒은 천지가 아직 분화되지 않았을 때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 崔譔은 “混芒은 混混芒芒함이니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때이다[混芒 混混芒芒 未分時也].”고 풀이했다.
역주2 與一世而得澹漠焉 :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恬淡寂漠의 삶을 누림. 一世는 一世之人으로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을 지칭. 澹漠의 澹은 앞에 나온 恬淡, 漠은 寂漠. 고요하고 담박하며 적막한 삶을 의미한다.
역주3 陰陽和靜 鬼神不擾 : 陰陽二氣가 본래의 조화를 얻어 고요하며, 귀신도 사람들을 동요시키지 아니함. 陰陽和靜은 음과 양이 서로 짝이 되어 서로를 밀치지 않는다는 뜻. 鬼神不擾는 귀신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뜻. 擾는 祟와 같다(方勇‧陸永品).
역주4 四時得節 萬物不傷 : 사계절의 운행이 절도에 맞고, 만물이 손상되지 아니함.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 인용하고 있는 張君房본에는 得자가 應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知北遊〉편에 “음양과 사계절이 운행함에 각각 차례를 얻었다[陰陽四時運行 各得其序].”고 한 대목이 보인다. 또 《淮南子》 〈本經訓〉편에도 “사계절이 차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四時不失其敍].”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5 群生不夭 : 모든 生物이 요절하지 않음. 群生은 衆生과 같고 夭는 비명에 죽는 것을 말하는데 일찍 죽는다는 뜻이 殀와 통용한다(方勇‧陸永品).
역주6 人雖有知 無所用之 : 사람들이 비록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쓸 필요가 없었음. 《淮南子》 〈俶眞訓〉편에는 “비록 羿같이 뛰어난 지혜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쓸 데가 없었다[雖有羿之知 而無所用之].”고 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 구절을 토대로 작성한 듯하다(王叔岷).
역주7 此之謂至一 : 이런 때를 일컬어 만물일체가 실현된 시대(至一의 시대)라 함. 林希逸은 “온 세상이 모두 純粹完全하고 道에 비추어볼 때 빠지거나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至一이라 했다[擧世皆純全而於道無所欠闕 故曰至一].”고 풀이했다.
역주8 莫之爲而常自然 : 아무도 억지로 함이 없고 늘 자연을 따랐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위의 덕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단지 자연에 맡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方勇‧陸永品). 王念孫은 《廣雅》에서 “然은 이루어짐이다[然 成也].”고 한 풀이를 따라 然을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보고 自然을 自成, 곧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보고 《大戴禮》 〈武王踐阼〉편의 “그 재앙이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其禍將然].”, 《楚辭》 〈遠遊〉의 “저것은 장차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彼將自然].”고 한 글귀를 근거로 제시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孟子》 〈萬章 上〉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이며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저절로 오는 것은 명이다[莫之爲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라고 하여 王念孫이 제시한 부분과 유사한 표현이 나오며 이 문장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老子》 제51장의 ‘夫莫之命而常自然’이라 한 대목 또한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늘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하여 然자를 成자로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常自然을 ‘늘 자연을 따른다’는 의미로 번역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포괄할 수 있기 때문에 自然을 굳이 自成으로 바꾸지는 않고 본래 글자 그대로 번역하였다.
역주9 逮德下衰 : 德이 衰頹함에 미침. 逮는 미침[及]. 下와 衰는 모두 ‘쇠퇴하다’는 뜻. 郭象은 “무릇 덕이 쇠퇴하게 되는 까닭은 성인이 대를 이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자 군주의 자리에 있는 이가 스스로 무위를 실천하지 못하고 무위의 자취만 선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게 된 것이다[夫德之所以下衰者 由聖人不繼世 則在上者不能無爲而羨無爲之跡 故致斯弊也].”고 풀이했다.
역주10 燧人伏羲始爲天下 : 燧人氏와 伏羲氏가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림. 爲는 다스린다는 뜻으로 治와 같다(王叔岷). 燧人氏와 伏羲氏는 모두 고대 전설상의 제왕이자 문화영웅. 燧人氏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고 伏羲氏는 처음으로 書契 文字를 만들고 팔괘를 만든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해친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成玄英은 “옛날에는 짐승의 털을 먹고 피를 마시고 사슴들과 무리 지어 함께 살았는데 燧人氏에 이르러 비로소 날것을 바꾸어 익혀 먹었으며, 伏羲氏에 이르러서는 소를 길들이고 말을 타며 푸줏간을 처음 만들고 팔괘를 그어 문자를 제정하고 거미를 모방하여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다. 이미 사사로운 지혜가 싹트게 되자 嗜欲이 점차 자라나 순박한 마음을 천박하게 하고 無爲의 도를 흩어버렸으니 덕이 쇠퇴하자 비로소 천하를 다스렸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古者茹毛飮血 與麋鹿同群 及至燧人始變生爲熟 伏羲則服牛 乘馬 創立庖廚 畫八卦以制文字 放蜘蛛而造密網 旣而智詐萌矣 嗜欲漸焉 澆淳樸之心 散無爲之道 德衰而始爲天下 此之謂乎].”라고 풀이했다.
역주11 順而不一 : 사람들은 순종하기는 했지만, 서로 일체가 되지 못함. 不一은 ‘道와 일체가 되지 못함’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成玄英은 “일반 백성들의 마음을 순종케 하기는 했지만 차별 없이 지극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順黎庶之心 而不能混同至一也].”고 풀이했다.
역주12 安而不順 : 사람들의 삶은 편안해지긴 했지만 서로 순종하지 않음. 여기서도 不順을 ‘道를 따르지 않았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成玄英은 “德化가 더욱 쇠퇴하게 되자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 그 때문에 신농씨 때에는 共工을 정벌하는 전쟁이 있었고 황제 때에는 치우의 전쟁이 있어서 祅氣가 그치지 않고 전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 때문에 포악한 이를 죽이고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지은 자에게 죄를 물어 구차하게 천하를 안정시키기는 하였으나 뭇 생명들을 순종하게 하지는 못했다[夫德化更衰 爲弊增甚 故神農有共工之伐 黃帝致蚩尤之戰 祅氣不息 兵革屢興 是以誅暴去殘 弔民問罪 苟且欲安於天下 未能有順於群生者也].”고 풀이했다.
역주13 唐虞 : 唐은 요임금이 다스린 나라 이름. 虞는 순임금이 다스린 나라 이름. 堯와 舜을 각각 陶唐氏와 有虞氏라고 일컫는다.
역주14 興治化之流 𣻏淳散朴 : 정치와 교화의 흐름을 일으켜 사람들의 淳厚한 진심을 천박하게 하고 素朴한 본성을 消散시킴. 治化는 敎化와 같다. 成玄英은 “순후함과 소박함을 훼손하여 거짓을 꾸미고 질박함을 흩어서 화려한 거짓을 꾸며 댔다[毁淳素以作澆訛 散樸質以爲華僞].”고 풀이했다. 𣻏는 얇다[澆薄]는 뜻의 澆와 같은 字. 여기서는 흩어버린다, 천박하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음.
역주15 離道以善 險德以行 : 道를 떠나 엉뚱한 것을 善이라 하며, 德을 위태롭게 만들어 그것을 실행함. 《淮南子》 〈俶眞訓〉편에는 ‘雜道以僞 儉德以行’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王念孫에 의하면 《莊子》의 이 구절을 근거로 ‘雜’을 ‘離’로 고치고 ‘儉’을 ‘險’으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離道以善’을 《淮南子》에서는 ‘離道以僞’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한편 王叔岷은 《淮南子》를 근거로 ‘離道以善’의 ‘善’을 ‘僞’로 고쳐야 하며 ‘僞’는 ‘爲’와 같다고 보고 이 구절을 ‘離道以爲’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어지는 ‘險德以行’의 ‘行’과 對文이 자연스러우므로 일리는 있지만 우선 본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였다. 異說이 자못 분분한 문장이다.
역주16 去性而從於心 : 소박한 본성을 버리고 私心을 따름. 去性은 자연의 본성을 방기한다는 뜻. 從於心은 사심을 따른다는 뜻. 成玄英은 “자연의 본성을 버리고 분별하는 마음을 따르게 되었다[去自然之性 從分別之心].”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자연의 본성을 버리고 유위의 마음을 따랐다. 그 때문에 본성을 버리고 私心을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去其自然之性而從其有爲之心 故曰去性而從於心].”고 풀이했다.
역주17 心與心識 : 私心이 私心과 분별하게 됨. 피차간에 사심을 가지고 사심을 엿본다는 뜻. 林希逸은 “識은 서로 살핌이다. 여기의 心자와 같은 것은 모두 機心이다[識 相識察也 似此心字皆機心也].”라고 여기의 心을 〈天地〉편의 機心과 같다고 풀이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郭象 注와 成玄英 疏를 따라 識에서 絶句하였는데, 淸의 兪樾은 아래 句의 知를 위로 붙여 識知를 衍文으로 보고 있다(池田知久). 여기서는 兪樾의 설을 따르지 않았다.
역주18 知而不足以定天下 : 지식이 발달하더라도(知하더라도) 〈그들의 지식으로〉 천하를 안정시키기에는 부족하게 됨. 그러므로 여기의 知는 지식이 발달한 堯와 舜의 지식을 지칭한다. 方勇‧陸永品은 이 구절을 두고 堯와 舜의 지식이 사람들의 私心에 간파되어 그들의 지식만으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없게 되자 쓸데없는 껍데기를 갖다 붙이고 박식이라는 꾸밈을 보태게 되었다는 의미로 풀이했는데, ‘본성에 맡기지 않고 지식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천하를 안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라는 전래의 해석을 뛰어넘는 탁견이라고 평가할 만하기에 이 견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19 附之以文 益之以博 : 쓸데없는 껍데기[文]를 갖다 붙이고 박식이라는 꾸밈을 보탬. 여기의 文과 博은 각각 뒤의 質과 心에 상대되는 외형적인 가식을 의미한다.
역주20 文滅質 博溺心 : 껍데기[文]가 바탕[質]을 없애버리고 박식이 인간의 마음을 탐닉케 함. 文과 質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논의는 《論語》에 자세하다. 특히 〈雍也〉편에서 공자가 “質이 文을 이기면 촌스러워지고 文이 質을 이기면 고루해진다. 文과 質이 균형을 갖춘 뒤라야 君子다울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고 한 유가적 논의가 文과 質의 균형 상태인 文質彬彬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여기의 비판은 그런 균형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비판하는 것이므로 유가적 논의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역주21 無以反其性情而復其初 : 자기 본성의 진실한 모습으로 돌아가 처음의 상태인 道로 돌아갈 수 없게 됨. 郭象은 “初는 성명의 근본을 말함이다[初 謂性命之本].”고 풀이했다.
역주22 世喪道矣 道喪世矣 世與道交相喪也 : 세상은 참된 道를 잃어버리고, 또 참된 道도 그 道를 실현할 세상을 잃어버려 세상과 道가 서로 상대를 잃어버림. 道와 世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가 사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어지는 문장에서 “道가 세상에 일어날 수 없고 세상이 道에 의지해 일어날 수 없다[道無以興乎世 世無以興乎道].”고 한 표현은 세상은 오직 도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수 있다는 표현으로 유가의 治道와 다를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뒤의 〈讓王〉편에서 “道의 진수를 가지고 자기 몸을 다스리고 남은 실마리를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고 찌꺼기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린다[道之眞以治身 其緖餘以爲國家 其土苴以治天下].”고 한 것처럼 외부세계를 다스리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도를 낮추어 본 것과는 달리 도와 세상의 관계를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큰 폭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역주23 道之人 何由興乎世 世亦何由興乎道哉 : 道를 체득한 聖人이 있다 한들 어떻게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겠으며, 세상 또한 어떻게 그 道에 의지해 일어날 수 있겠는가. 道之人은 有道之人, 또는 體道之人으로 도를 지닌 사람을 뜻한다. 다만 奚侗은 道之人의 之人 두 글자가 잘못 끼어든 문자라 했는데 일리가 있는 견해이지만 成玄英 疏에 이미 ‘懷道聖人’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道之人을 有道之人, 또는 體道之人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24 雖聖人不在山林之中 其德隱矣 : 성인이 비록 〈일부러〉 산림 속에 몸을 감추지 않더라도 그 德은 이미 숨겨짐. 呂惠卿은 “세상과 도가 서로 일으켜 주면 성인이 일어나 만물이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과 도가 서로를 잃어버리게 되면 성인이 세속에서 노닐더라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니 참으로 이미 숨겨진 것이니 어찌 스스로 산림 속에 숨는 일을 하겠는가[世與道交相興 則聖人作而萬物睹 世與道交相喪 則聖人游乎世俗而莫之知 固已隱矣 奚以自隱於山林間爲哉].”라고 풀이했는데 참으로 적절한 견해라 할 만하다.
역주25 隱故不自隱 : 이미 숨겨져 있는 까닭에 스스로 숨지 않음. 林希逸은 “세상이 온통 道를 알지 못하게 되면 성인이 비록 눈앞에 있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니, 성인이 비록 스스로 숨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숨으려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숨고 있는 것이다[擧世皆不知道 則聖人雖在目前亦不知矣 非聖人自隱也 人不知之 不求隱而自隱矣].”라고 풀이했다. 한편 錢穆은 馬其昶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故’는 ‘固’와 같다고 풀이하고 ‘不’ 또한 ‘非’와 같다고 했는데 만약 이 견해를 따른다면 ‘隱故不自隱’을 ‘隱固非自隱’으로 표기하고 “숨겨진 것이지 본디 스스로 숨은 것이 아니다.”고 번역하여야 하겠지만 王叔岷의 지적처럼 不자와 非자는 활용에 차이가 있으므로 우선 본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였다. 錢穆의 주석대로 읽으면 현토도 ‘隱이 故(固)不自隱이니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역주26 非伏其身而弗見(현)也 非閉其言而不出也 非藏其知而不發也 : 자기 몸을 엎드려서 보이지 않게 한 것이 아니며 말문을 닫아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지혜를 속에 감추어서 밖으로 公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 王叔岷은 成玄英 疏에는 弗見이 不見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아래의 ‘不出’, ‘不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不見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見은 現과 통한다.
역주27 時命大謬(무)也 : 시운이 크게 어긋났기 때문에 不見, 不出, 不發하였던 것이다. 時命은 時運, 나누어서 말하면 世道가 흥기와 쇠퇴하는 시기를 말한다. 成玄英은 “유도의 시대를 만난 경우[時逢有道]”와 “무도한 시대를 만난 경우[時遭無道]”로 나누어서 풀이했는데, 합쳐서 말하면 時運 한마디로 포괄할 수 있다. 곧 時運을 만나는 것은 좋은 때를 만남이고 時運을 만나지 못함은 좋지 못한 때를 만남을 말한다. 大謬는 크게 어긋남. 謬는 毫釐之差 千里之謬의 謬와 같다.
역주28 當時命而大行乎天下 則反一無迹 : 時運을 만나 천하에 크게 시행함에는 사람들을 하나로 돌아가게 하되 자취를 남김이 없음. 當時命은 좋은 때를 만났다는 뜻. ‘大行乎天下’는 道가 天下에 널리 통행함을 말함이다. 反一無迹은 완전하게 통일된 경지 또는 至上의 道의 세계로 돌아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 林雲銘은 “至一의 상태로 돌아가 有爲의 자취를 보이지 않음이다[反於至一而不見有爲之迹也].”고 풀이했다.
역주29 不當時命而大窮乎天下 則深根寧極而待 : 시운을 만나지 못해 천하에서 크게 곤궁할 때에는 뿌리를 깊이 박고 지극한 도를 편안히 여기며 때를 기다림. 深根은 뿌리를 깊이 한다는 뜻으로 자연의 근본을 견고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寧極은 지극한 본성을 편안하게 지킨다는 뜻. 成玄英은 “자연의 근본을 아주 견고하게 하고 지극한 본성을 편안하게 보존한다[深固自然之本 保寧至極之性].”고 풀이했다.
역주30 此存身之道也 : 이것이 몸을 보존하는 도리임. 存身은 自然의 性命을 보존한다는 뜻(方勇‧陸永品). 郭象은 “자기 몸을 보존하고서 세상을 흥기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未有身存而世不興者也].”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곤궁하게 살면서도 늘 道를 즐기고 위험한 곳에 머물면서도 편안하게 살며 시대에 따라서 나아가 道를 실행하기도 하고 거두어 道를 간직하기도 한다면 몸을 보존하는 도리라고 일컬을 만하다[在窮塞而常樂 處危險而安寧 任時世之行藏 可謂存身之道也].”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