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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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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0章
悲夫
世人 以形色名聲으로 爲足以이라하나니
夫形色名聲 이니
이어늘 하다가 釋椎鑿하고하야
敢問하노이다
公曰
聖人之言也
聖人 在乎
公曰
已死矣니라
寡人 讀書 輪人 安得議乎리오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 觀之호니
하니 하며 臣之子 亦不能受之於臣이라
是以 斲輪호이다
然則君之所讀者 인저


10章
세상 사람들이 라 하여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서책書冊이지만 이 서책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말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중시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意味內容]이다.
뜻에는 따르는 것이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말을 중시하여 서책을 전하니 세상에서 비록 그것을 중시하지만 중시하기에는 오히려 부족한 것이니 그 중시하는 것이 참으로 중시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양과 색깔뿐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소리일 뿐이다.
슬프구나.
세상 사람들은 모양과 색깔, 이름과 소리만으로 충분히 저 도의 실정實情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양과 색깔, 이름과 소리로는 틀림없이 도의 실정을 알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환공桓公이 당상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윤편輪扁이 당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내려놓고 위로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다.”
윤편이 말했다.
“성인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이미 죽었다.”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로군요.”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글을 읽고 있는데 수레기술자 따위가 어찌 논의하는가.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이 하는 일로 살펴보겠습니다.
수레바퀴를 여유 있게 깎으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너무 꼭 맞게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으니 여유 있게 깎지도 않고 너무 꼭 맞게 깎지도 않는 것은 손에서 터득하여 마음으로 호응하는 것이어서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교묘한 기술이 그 사이에 있으니 신도 그것을 신의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신의 자식도 그것을 신에게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칠십에 이르러 늙을 때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을 함께 가지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따름입니다.”


역주
역주1 世之所貴道者書也 : 세상 사람들이 道라 하여 귀하게 여기는 것은 書冊임. 즉 세속사람들은 서책을 바로 道라고 여겨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敦煌본에는 道자가 없으며 書자 아래에 있는 也자도 없다(王重民, 池田知久).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책[世之所貴者書].”이라는 뜻이 되는데 成玄英이 道자를 ‘言說’로 풀이한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차라리 道자가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장이므로 敦煌본이 옳을 가능성이 많다. 林希逸은 “책은 도를 실을 수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지만 중시하는 것은 도에 있는 것이지 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書能載道 世所貴之 然貴在道 而不在書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陸長庚, 宣穎, 陳壽昌, 阮毓崧 등의 해석도 좋다(池田知久). 또한 池田知久에 의하면, 서책의 의미를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주제의 글로 참고할 만한 것은 《韓非子》 〈喩老〉편, 《淮南子》 〈道應訓〉편에 나오는 王壽의 설화를 들 수 있다(陳祥道).
역주2 書不過語 : 서책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韓非子》에는 “서책은 말이다[書者言也].”라고 한 부분이 있고 《淮南子》에는 “서책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書者言之所出也].”라고 한 것이 보인다(池田知久).
역주3 語有貴也 : 말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앞뒤의 文句와 연결하면 “서책은 말한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말 속에는 귀한 것(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로 이어지게 된다.
역주4 語之所貴者 意也 : 말이 중시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意味內容]이다. 池田知久의 註解를 참고하면, 《韓非子》에는 “말은 앎에서 나온다[言生於知].”라고 한 부분이 있고, 《淮南子》에는 “말은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言出於知者].”라고 한 언급이 보인다. 〈外物〉편에서 “말이란 뜻을 전하는 데 있으니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어도 된다[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라고 한 부분을 참고할 만하다(陸長庚). 또 《呂氏春秋》 〈離謂〉편에서 “무릇 말이란 뜻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 껍데기만 보고 뜻을 버린다면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뜻을 얻고 나면 말은 버렸다[夫辭者 意之表也 鑒其表而棄其意 悖 故古之人 得其意則舍其言矣].”라고 한 부분도 참고할 만하다(赤塚忠). 《周易》 〈繫辭上傳〉에 나오는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 한 언급은 象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므로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역시 참고할 만할 것이다. 이 부분의 原文의 구체적인 뜻을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 위의 池田知久의 주석에서 援用해 온 것과 다소 중복되는 것이 있음을 무릅쓰고 福永光司의 說을 다음에 소개한다. “ ‘語’는 ‘言’과 같으니 말이라는 뜻. ‘言’ 또는 ‘語’와 ‘意’와의 관련에 대하여는 《周易》 〈繫辭傳 上〉에 ‘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 言及되어 있어 고대로부터 관심을 불렀던 命題이다. 이 경우 ‘書’는 書面言語, ‘言’은 口頭言語를 가리킨다. 쓰여진 말은 대화의 말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고 대화의 말은 생각하는 것(뜻)을 충분히 표출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종의 言語不信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 《莊子》에서는 雜篇 〈外物〉편에 ‘得意忘言’의 論이 있다. 禪家의 ‘不立文字’의 사상과도 관련한다.”
역주5 意有所隨 意之所隨者 不可以言傳也 : 뜻에는 따르는 것이 있으니 뜻이 따르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다. 隨는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뜻이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곧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뜻이 아니라 뜻보다 중요한 道를 따라감을 말한다. 大意는 成玄英이 “뜻이 나오는 것은 도를 따라 나온다. 도는 이미 색깔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기 때문에 말로 전할 수 없다[意之所出 從道而來 道旣非色非聲 故不可以言傳說].”라고 한 것을 따르는 것이 좋다(池田知久).
역주6 世因貴言傳書 : 세상에서는 말을 중시하여 서책을 전한다. 세상에서는 말을 중시하는 까닭에(말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서책을 전한다는 뜻이다. 因은 ‘…을 말미암음’ ‘…하는 까닭에’의 뜻임.
역주7 世雖貴之哉 猶不足貴也 : 세상에서 비록 그것을 중시하지만 중시하기에는 오히려 부족함. 哉자가 없는 판본이 있으므로 哉자를 끼어든 문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王叔岷은 哉자가 없는 판본이 있고, 我로 표기된 판본이 있는데 世자와 對句가 되므로 我자로 보는 것이 옳다고 했지만 오히려 哉자든 我자든 없는 것이 낫다. 더욱이 감탄형 종결사로 쓰이는 哉자가 있을 곳은 아니다.
역주8 爲其貴非其貴也 : 그 중시하는 것이 참으로 중시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임. 敦煌본에는 “爲非其貴者也”로 표기되어 있다(王重民).
역주9 視而可見者 形與色也 聽而可聞者 名與聲也 :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양과 색깔 뿐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름과 소리일 뿐임. 道에 대한 형용으로는 《老子》 제14장의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希라 하고 붙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따져서 나눌 수 없다. 그 때문에 섞어서 하나로 삼는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라고 한 내용과 제35장의 “보아도 보기에 부족하고 들어도 듣기에 부족하다[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라고 말한 부분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福永光司). 〈達生〉편에 “무릇 모양과 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사물이다[凡有貌象聲色者 皆物也].”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形色과 名聲은 事物의 속성이고 道는 이런 것을 초월한 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池田知久).
역주10 得彼之情 : 저 도의 實情을 알 수 있음. 彼는 道를 가리킨다. 成玄英이 “이름과 말과 소리와 색깔로 도의 실정을 다 알 수 있다고 말함이다[謂名言聲色 盡道情實].”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林希逸도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宣穎은 “彼는 道를 지칭하고 情은 實이다[彼 指道 情 實].”라고 풀이했는데 王先謙과 阮毓崧도 宣穎의 견해에 동의했다. 〈齊物論〉편 제1장에서 “〈사람들이〉 그 道의 실상[情]을 알든 알지 못하든 간에 그것은 참다운 존재[眞]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如求得其情與不得 無益損乎其眞].”라고 한 말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福永光司, 池田知久).
역주11 果不足以得彼之情 : 틀림없이 도의 실정을 알기에 부족함. 果는 必과 같이 ‘틀림없이’의 뜻으로 쓰였다. 林希逸은 ‘斷’으로 풀이했는데 ‘결단코’의 뜻으로 ‘必’과 비슷한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阮毓崧은 ‘終’으로 ‘끝내’라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맥락이 약간 다르다. 池田知久도 지적했듯이 兪樾과 章炳麟이 不자를 衍文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한편 우리나라 현토본에서는 이 문구로부터 다음 문구 ‘則知者不言……’으로 넘어가는 이음 吐를 ‘…인댄’으로 달았는데 이것은 번역문에 맞춰서 ‘…이니’로 고치는 것이 可할 것 같다.
역주12 則知者不言 言者不知 : 그야말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老子》 제56장과 《莊子》의 〈知北遊〉편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역주13 世豈識之哉 :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겠는가의 그것[之]은, 道의 言表不可能을 뜻하는 대명사.
역주14 桓公讀書於堂上 : 환공이 당상에서 글을 읽음. 桓公은 齊나라 桓公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李頤도 “제나라 환공이니 이름이 소백이다[齊桓公也 名小白].”라고 풀이했다. 池田知久의 注를 보면, “제 환공은 춘추시대 제후들의 맹주격인 春秋五覇 중의 으뜸으로 그가 등장하는 이 문답은 韓嬰의 《韓詩外傳》 卷5와 劉安의 《淮南子》 〈道應訓〉편 등에도 실려 있다. 다만 《韓詩外傳》에는 齊나라 桓公이 아니라 楚나라 成王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무래도 당시 농민보다 하층의 身分으로 대우받았던 미천한 기술자인 輪扁에게서 독서를 통해서는 道를 파악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大國의 大君主 쪽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이 보인다. 王叔岷은 桓公 위에 齊자가 붙어 있는 인용문을 소개하고 있다. 敦煌본에는 ‘讀書於堂上’이 ‘讀書堂上’으로 표기되어 於자가 없다(王重民). 姚鼐는 桓公 以下의 내용을 위 문장과 따로 끊어서 별도의 章으로 독립시켰는데 吳汝綸의 지적처럼 앞의 내용이 말이나 글을 통해서는 道의 본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총론격의 해설에 해당하므로 따로 나누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역주15 輪扁斲輪於堂下 : 輪扁이 당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음. 輪扁은 인명이지만 수레 바퀴를 깎는 기술자 扁이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쓰이고 있다. 《漢書》 〈古今人表〉에는 輪邊으로 되어 있다(吳汝綸). 司馬彪는 “수레바퀴를 깎는 사람인데 이름이 扁이다[斲輪人也 名扁].”라고 풀이했다. 수레바퀴를 깎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扁이란 이름의 인물로 〈養生主〉편 제2장에 등장하는 庖丁이나 〈人間世〉편 제4장의 匠石, 〈騈拇〉편 제4장의 盜跖 등과 같은 방식의 호칭법이다(福永光司). 다만 庖丁의 丁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을 헤아리는 단위인 人丁의 뜻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호칭 방식이 약간 다르며 輪扁을 그런 식으로 바꾸면 輪人이 되는데 輪人 또한 여러 문헌에 보인다. 輪人은 《墨子》 〈天志 上〉, 《禮記》 〈雜記 下〉, 《周禮》 〈考工記〉 등에 보이고, 또 유사한 職名으로는 車匠, 輪匠, 車人 등이 있다. 斲은 成玄英이 “깎음이다[雕斫也].”라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敦煌본에는 輪자 아래의 於자가 빠져 있다.
역주16 上問桓公 : 위로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음. 윤편이 당 아래에 있기 때문에 당상에 있는 환공에게 물을 때 위로 쳐다보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지만 윗사람에게 물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馬叙倫은 ‘上問’이 ‘觀之’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고 했다.
역주17 公之所讀爲何言邪 :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어떤 말입니까? 爲자가 者자로 표기된 판본(馬叙倫, 王叔岷, 王重民)과 인용문이 있고(王叔岷), 言자가, 書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馬叙倫). 또 ‘公之所讀爲何言邪’를 ‘公所讀之書何言也’로 표기한 인용문도 있다(劉文典).
역주18 君之所讀者 : 임금께서 읽고 계시는 것. 어떤 글을 읽고 있느냐는 물음. 君자가 公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고(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劉文典은 公자가 맞다고 했지만 굳이 고칠 것까지는 없다(池田知久).
역주19 古人之糟魄已夫 :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夫는 감탄을 나타내는 종결사. 古人 두 글자가 聖人으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李頤는 “糟는 술찌끼이다[糟 酒滓也].”라고 풀이했다. 司馬彪는 魄을 “썩은 밥을 魄이라 한다[爛食曰 魄].”라고 풀이했고, 陸德明이 “어떤 사람은 혼백이라 했다[或爲魂魄也].”라고 하는 등 제설이 분분하지만 司馬彪본에 본래 粕으로 되어 있다 하고(郭慶藩), 또 粕으로 표기한 인용문도 많으므로(王叔岷), 粕의 가차자일 것이다.(馬叙倫, 池田知久). 여기의 古人之糟魄과 같은 생각은 〈天運〉편 제4장에서 “선왕들이 이미 써먹었던 풀 강아지이다[先王已陳芻狗].”라고 말한 것, 그리고 제7장에서 “육경은 선왕들의 자취이다[夫六經 先王之陳迹也].”라고 말한 것과 비슷한 관념이다(福永光司). 또 《墨子》 〈耕柱〉편에도 “지금 사람들을 놔두고 선왕을 칭송하는 것은 말라 버린 뼈다귀를 칭송하는 것이다[舍今之人而譽先王 是譽槁骨也].”라고 했는데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역주20 桓公曰 : 《淮南子》에는 桓公과 曰자 사이에 “발끈하며 얼굴빛을 붉히고 성을 내면서[悖然作色而怒].”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그렇게 보면 뜻이 더 분명해진다(王叔岷).
역주21 有說則可 無說則死 :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임. 可자가 已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역주22 斲輪 :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 道에 견주어서 비유한 말이다. ‘斲輪之法’ 또는 ‘夫斲之道’로 표기한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역주23 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 수레바퀴를 여유 있게 깎으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너무 꼭 맞게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음. 林希逸이 “甘은 매끄러움이고 苦는 빡빡함이고 徐는 헐거움이고 疾은 뻑뻑함이다. 헐거우면 매끄러워서 쉽게 들어가지만 견고하지 못하고 뻑뻑하면 빡빡해서 들어가기 어렵다[甘 滑也 苦澁也 徐 寬也 疾 緊也 寞則甘滑易入而不堅 緊則澁而難入].”라고 풀이한 것이 친절하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甘과 徐, 苦와 疾이 거의 같은 뜻이 되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까다롭다. 司馬彪가 “甘은 느슨함이고 苦는 빡빡함이다[甘者 緩也 苦者 急也].”로 풀이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丁展成은 徐를 “바퀴 구멍을 크게 깎음이다[斲輪孔大].”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固자와 入자 아래에 각각 矣자가 붙어 있는 인용문이 있다(吳汝綸).
역주24 不徐不疾 : 여유 있게 깎지도 않고 너무 꼭 맞게 깎지도 않음. 不疾不徐로 표기하고 있는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역주25 得之於手 而應於心 : 손에서 터득하여 마음으로 호응함. 敦煌본에는 之자가 없고(王叔岷), 應자의 아래에 之자가 붙어 있는 인용문이 있다(劉文典, 王叔岷). 王叔岷은 手자와 心자를 바꿔 놓은 인용문, 곧 ‘得之於心 而應於手’로 보는 것이 正文이라 했지만 그대로 두어도 뜻이 무리 없이 통하므로 굳이 바꿀 것까지는 없다(池田知久).
역주26 口不能言 : 입으로 말할 수 없음. 敦煌본은 言의 아래에 也가 있으며(王重民), 또 也가 있는 인용이 있다(王叔岷).
역주27 有數存焉於其間 : 교묘한 기술이 그 사이에 있음. 數는 陸德明이 기술[術]로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敦煌본에는 焉於 두 글자가 乎 한 글자로 표기되어 있다(王重民, 池田知久).
역주28 臣不能以喩臣之子 : 신도 그것을 신의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음. 臣不의 위에 而가 있는 인용문이 있고(王叔岷), 喩자를 敎자나 傳자로 표기한 인용문이 있다(劉文典, 王叔岷). 대의는 〈天運〉편 제5장의 ‘使道而可獻’ 이하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池田知久).
역주29 行年七十而老 : 나이가 칠십에 이르러 늙을 때까지. 《淮南子》에서는 而老가 거꾸로 老而로 되어 있는데 王叔岷은 그것이 옳다고 했다(池田知久). 나이 먹은 햇수를 行年으로 표현한 것은 이곳을 필두로 〈天運〉편의 ‘孔子行年五十’, 〈達生〉편의 ‘單豹……行年七十’ ‘張毅……行年四十’, 〈則陽〉편의 ‘蘧伯玉行年六十’, 〈寓言〉편의 ‘孔子行年六十’ 등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나온다.
역주30 古之人與其不可傳也 死矣 : 옛사람도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을 함께 가지고 죽었을 것임. 也자가 者자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다(馬其昶, 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역주31 古人之糟魄已夫 : 옛사람의 찌꺼기일 따름임. 敦煌본에는 已夫가 已矣로 표기되어 있다(王重民, 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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