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2)

장자(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黃帝 立爲天子
황제黃帝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지 19년.
令行天下어늘 在於하고 故往見之하야
그의 정령政令은 천하에 시행되고 있었는데 광성자廣成子공동산空同山 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 만나 보고 이렇게 말했다.
聞吾子 達於至道라호니
“나는 선생께서 지극한 도에 도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敢問하노라
감히 묻습니다. 지극한 도의 정수가 무엇입니까?
吾 欲取天地之精하야 以佐五穀하야 以養民人하며 吾又하노니 爲之奈何
나는 천지의 정기精氣를 가져다가 오곡五穀의 생장을 도와 백성들을 기르고, 또 나는 음양陰陽을 다스려 뭇 생명을 이루게 하고자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廣成子曰
광성자廣成子는 이렇게 말했다.
所欲問者 所欲官者 니라
“당신이 묻고자 하는 것은 사물事物본성本性이지만 당신이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사물을 해치는 것이다.
自而 治天下 하며 하며 日月之光 로소니 온(이니)
당신이 천하를 다스린 뒤로 구름은 충분히 모이기도 전에 비가 되어 내리고, 초목은 잎이 누렇게 변하기도 전에 떨어졌으며 해와 달의 빛도 더욱 황폐해졌으니 당신은 말만 잘하는 천박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지극한 도를 일러 주기에 충분하겠는가.”
黃帝 退하야 하고 하야 閒居三月에야 한대
황제黃帝는 물러나 천하를 잊고 홀로 머무는 집을 짓고 흰 띠풀로 자리를 깔고 석 달 동안 조용히 머문 다음에 다시 찾아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廣成子 어늘 黃帝하야 再拜稽首而問하야
광성자廣成子는 머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었는데 황제가 아래쪽에서 무릎으로 기어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물었다.
曰 聞吾子 達於至道호니 敢問하노이다
“저는 선생께서 지극한 도에 이르렀다고 들었으니 감히 묻겠습니다.
治身 奈何라야 而可以長久잇고
몸을 어떻게 닦아야 장생구시長生久視할 수 있겠습니까?”
廣成子 而起하야
광성자廣成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라
이리 오시오.
吾 語女至道호리라
내 당신에게 지극한 도를 말씀드리지요.
하며 하니 하야 抱神以靜하면 形將自正하리니
지극한 도의 정수精髓는 그윽하고 어두우며 지극한 도의 극치는 모습도 없고 소리도 없으니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말고 정신을 지켜서 고요함을 유지하면 몸도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고요하고 반드시 깨끗함을 지켜서 당신의 몸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당신의 정신을 흔들어 대지 않아야만 비로소 장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目無所見하며 耳無所聞하며 心無所知하야 女神 將守形하여야 形乃長生하리라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말고 귀로 아무것도 듣지 말고 마음으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아서 당신의 정신이 몸을 지킬 수 있어야 몸이 비로소 장생長生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안에 있는 정신을 삼가 지키며 당신의 밖으로 향하는 지각을 닫으십시오.
지각하는 것이 많아지면 실패할 것입니다.”
하며 爲女하야 入於窈冥之門矣 至彼至陰之原也하노라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해나 달 같은 커다란 광명이 있는 하늘 위에 올라 저 지양至陽의 근원에 이르며, 당신을 위해 그윽하고 어두운 문에 들어가 지음至陰의 근원에 갔다 오겠습니다.
하늘과 땅은 맡아서 다스리는 것이 있고 음과 양은 간직하고 있는 작용이 있으니 당신의 몸을 삼가 지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생장할 것입니다.
나는 순일純一한 도를 지켜서 조화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몸을 닦은 지 1,200년이 흘렀는데도 내 몸이 아직 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黃帝 再拜稽首하야
황제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광성자廣成子 선생이야말로 하늘이라고 일컬을 만합니다.”
廣成子 曰
광성자가 말했다.
하리
“이리 오시오.
호리라
내 당신에게 말해 주겠소.
이어늘 而人 皆以爲有終이라하며 이라하나다
라고 하는 것은 영원 무궁한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저 라고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得吾道者 커든 失吾道者 하나니라
그러나 나의 도를 체득한 사람은 위로는 이 되고 아래로는 이 될 수 있지만 나의 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위로는 해나 달의 빛을 받는 동식물이나 되고 아래로는 흙덩어리 따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今夫하나니
“지금 세상에서 왕성하게 생장하는 만물은 모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고 入無窮之門하야 호리라
그 때문에 나도 이제 곧 당신을 떠나 무궁한 문으로 들어가 끝없이 광대한 들판에서 노닐고자 합니다.
나는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천지와 함께 영원할 것이니 사람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라도 어지러워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나만 홀로 남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十九年 : 黃帝立爲天子十九年은 황제가 임금이 된 지 19년이란 뜻. 19년은 《莊子》에서 오랜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福永光司의 《莊子》에 자세하다. 예컨대 〈養生主〉편의 庖丁과 〈德充符〉편의 申徒嘉 등이 수련한 기간도 19년이다. 이에 대하여는, 池田知久의 註解에 의하면 呂惠卿의 주석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주2 廣成子 : 인명. 《經典釋文》에는 “어떤 사람은 바로 노자라 했다[或云 卽老子也].”라고 했는데 兪樾이 지적한 것처럼 《神仙傳》의 기록에 근거한 듯하다. 여기서는 池田知久의 견해와 같이 作者가 만들어 낸 理想적인 인물로 보기도 한다. 즉 道를 의인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呂惠卿은 “넓은 것은 땅과 짝하고 이룸은 시종을 완전히 한 것이니 광성은 도에 이르러 자신을 완전하게 한 사람이다[廣則配地 成則終始之全 廣成者則至於道而全也].”라고 寓意를 추측했다. 《淮南子》 〈詮言訓〉편에도 廣成子가 인용되어 있는데 아마도 《莊子》의 이 부분으로부터 취한 것일 터이다(池田知久).
역주3 空同之上 : 空同은 산 이름. 崆峒 또는 空橦으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王叔岷). 《經典釋文》에서는 司馬彪가 “북두성 아래를 떠받치고 있는 산[當北斗下山也].”이라 했다고 소개하고, 《爾雅》를 인용하여 “북쪽으로 북두성을 이고 있는 것이 공동산이다[北戴斗極爲空同].”라고 풀이했다. 또 일설에는 “양나라 우성 동쪽 30리 지역에 있다[在梁國虞城東三十里].”라고 하는 등 장소에 관한 고증이 많지만 呂惠卿이 “공은 어떤 사물도 없다는 뜻이고 동은 크게 뚫렸다는 뜻이므로 공동산 위라고 말한 것은 아무 사물도 없이 크게 소통되어서 어떤 것도 올려놓을 수 없는 곳이다[空則無物 同則大通 空同之上 則無物大通 而無以加之之處也].”라고 寓意를 설명한 것이 적절하다. 上자가 山으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王叔岷).
역주4 至道之精 : 지극한 도의 정수. 馬叙倫은 精을 ‘性命之情’과 같은 것으로 眞相의 뜻이라고 했지만 부적절하다(池田知久). 精髓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가 간명하다(池田知久). 바로 이어지는 ‘天地之精’은 精氣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赤塚忠).
역주5 欲官陰陽以遂群生 : 음양을 다스려 뭇 생명을 이루게 하고자 함. 官은 成玄英이 “음양을 본떠 관직을 만든다[象陰陽設官分職].”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遂는 완수하게 한다는 뜻인데 王叔岷이 育으로 풀이한 것도 적절하다.
역주6 物之質也 : 사물의 올바른 본성. 郭象, 林希逸, 陸長庚 등은 至道‧本然의 긍정적인 의미로 보고 있고, 成玄英, 陳景元 등은 形質의 의미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 成玄英, 陳景元 등은 애초 황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의도 혹은 대상[物之質]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吾欲取天地之精 以佐五穀 以養民人’이 묻고자 하는 것[所欲問者] 곧 物之質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스리고자 하는 것[所欲官者] 곧 物之殘也에 포함되는 것인지에 따라 묻고자 하는 내용[所欲問者]에 대한 긍정‧부정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崔大華).
역주7 物之殘也 : 사물을 해침. 物之質과 物之殘은 林希逸이 “사물의 본연을 質이라 한 것이니 바로 앞서 말한 至道이다. 物之殘이라 한 것은 사물을 해치는 일을 말함이다[物之本然者曰質 卽前言至道也 物之殘者 言害物之事也].”라고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池田知久). 〈馬蹄〉편에서 “무릇 통나무를 해쳐서 그릇을 만든 것은 기술자들의 죄이고, 도덕을 훼손하여 인의를 만들어 낸 것은 성인의 과실이다[夫殘樸以爲器 工匠之罪也 毁道德以爲仁義 聖人之過也].”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 福永光司는 物之質의 質은 渾然一體가 된 사물의 본질 또는 根源을 의미하고, 物之殘의 殘은 分散되고 解體된 사물의 形而下的인 모습이라고 주석하고 있는데, 이것도 크게 참고할만한 해석이다.
역주8 雲氣不待族而雨 : 구름은 충분히 모이기도 전에 비가 되어 내림. 族자가 簇으로 된 인용이 있다(王叔岷). 《經典釋文》의 司馬彪는 “族은 모임이니 모이지 못하고 비로 내리는 것이니 적셔 줌이 적음을 말한 것이다[族 聚也 未聚而雨 言澤少].”라고 풀이했다. 馬叙倫은 族을 湊자의 假借로 보았다.
역주9 草木不待黃而落 : 초목은 잎이 누렇게 변하기도 전에 떨어짐. 《經典釋文》의 司馬彪는 “살기(秋冬의 寒氣)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言殺氣多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0 益以荒矣 : 더욱 황폐해짐. 《經典釋文》의 崔譔은 益을 蓋자로 썼고 赤塚忠은 협애하다는 뜻의 隘자로 보고 널리 비치는 日月의 빛마저 좁아졌다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있는 그대로 더욱의 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福永光司는 荒은 散漫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빛에 光輝가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고 있다.
역주11 而佞人之心翦翦者 : 당신은 말만 잘하는 천박한 사람이다. 翦翦者는 말만 잘하는 천박한 모양. 翦翦이 剪剪으로 표기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而佞人之心翦翦者의 而는 앞에 보이는 而所欲問者, 而所欲官者, 自而治天下 등의 而와 마찬가지로 ‘너’ 즉 you의 뜻. 而佞人之心翦翦者는 逐字譯을 하면 ‘당신은 말만 잘하는 사람의 마음이 천박한 사람이다’가 된다. 《經典釋文》의 郭象과 司馬彪는 “말을 잘함[善辯也].”이라 했고, 일설에는 “말재주를 부리는 모양[侫貌].”이라 했다. 王先謙은 譾譾의 가차자로 보았는데 모두 일리가 있지만 《經典釋文》에서 李頤가 “식견이 얕고 지식이 짧은 모양[淺短貌].”으로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林希逸은 이 견해를 따라 “淺淺과 같다[猶淺淺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2 奚足以語至道 : 어찌 지극한 도를 일러 주기에 충분하겠는가. 至자 아래에 哉자가 있는 인용이 있다(劉文典).
역주13 捐天下 : 천하를 방기함. 천하를 잊어버렸다는 뜻. 구체적으로 천자의 자리를 버리고(捐=棄) 천하의 支配를 포기하였다는 뜻임.
역주14 築特室 : 特室을 지음. 特室은 잡다한 일을 피해 홀로 재계하는 집. 陳壽昌은 齋宮(天子가 大廟에서 제사 지내기 前에 재계하는 별궁)이라 했다. 福永光司는 “特室은 훗날 道敎에서 ‘靖室’과 같은 것으로 고려되는 것이 좋다. 또한 六朝시대 이후 天子가 道士를 초빙할 때, 館舍를 건축하여 齋戒하는 형식을 채택한 것은 이 문장에 근거한다.”라고 했고, 赤塚忠은 “특실을 세우고 흰 띠풀을 까는 것[築特室 席白茅]은 재계하며 반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築特室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기 위해 별도로 방 하나를 만들어 그곳에서 두문불출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는데 모두 참고할 만하다.
역주15 席白茅 : 흰 띠풀로 자리를 깔다. 席이 籍로 된 인용이 있다(王叔岷). 白茅는 하얀 띠풀로 고대 중국에는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어서 神에게 바치는 공물도 띠풀을 아래에 까는 습관이 있었다(福永光司). 席白茅는 띠[茅]의 하얀 줄기로 짠 깔개에 앉는 것으로 白茅의 깔개는 본디 신에게 바치는 물건 밑에 깔거나 높은 사람에게 올리는 물건 밑에 깔거나 했다. 사람이 白茅에 앉는다는 것은 자신을 신에게 바친다는 뜻이며 또 의미가 바뀌어서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儀禮로 생각되었던 듯하다(赤塚忠).
역주16 復往邀之 : 다시 찾아가 요구함. 邀는 《經典釋文》에서 陸德明이 풀이한 것처럼 “요구하다[要也].”는 뜻. 王先謙은 “邀는 요청함이다[邀 求請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7 南首而臥 : 머리를 남쪽으로 하고 눕다. 福永光司가 “廣成子를 南面하는 사람[帝王]에 비긴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赤塚忠은 “南面은 본디 천자가 政務를 볼때의 禮이다. 그런데 南面한 채 잠을 잔다는 것이니 상식적인 禮를 무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는데 이 또한 참고할 만하다.
역주18 順下風 膝行而進 : 아래쪽에서부터 무릎으로 기어 나아감. 順자가 從자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王叔岷). 馬叙倫은 順을 循의 假借字로 보았다. 風은 李勉이 方의 뜻으로 풀이한 것을 따른다. 李勉은 “風은 方이다. 옛날에는 風과 方의 音이 통했다. 그 때문에 두 글자를 통용하게 된 것이다[風 方 古風方通音 故二字通用].”라고 풀이했다. 〈天運〉편에도 “수놈이 위쪽에서 울면 암놈이 아래쪽에서 응답한다[雄鳴於上風 雌應於下風].”라고 했고, 〈天地〉편에도 “우임금이 종종걸음으로 아래쪽으로 나아갔다[禹趨就下風].”라고 했으며, 〈漁父〉편에도 “몰래 선생님 아래쪽에서 기다리다가[竊待於下風].”라고 했는데 모두 風이 方의 뜻으로 쓰인 예이다.
역주19 蹶然 : 벌떡 일어나는 모양. 《經典釋文》에서 陸德明은 “놀라 일어남이다[驚而起也].”라 했고, 司馬彪는 “빨리 일어나는 모양[疾起貌].”이라 했다.
역주20 善哉問乎 : 좋은 질문입니다. 郭象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수양하고 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에 훌륭하게 평가한 것이다[人皆自修而不治天下 則天下治矣 故善之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을 다스리게 하면 사물이 어지러워지고 각각 자신을 다스리게 하면 천하가 청정해진다. 그 때문에 훌륭하게 평가한 것이다[使人治物 物必攖煩 各各治身 天下淸正 故善之].”라고 풀이했는데 郭象의 견해와 큰 차이가 없다.
역주21 至道之精 窈窈冥冥 : 지극한 도의 精髓는 그윽하고 어두움. 窈자가 杳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王叔岷). 窈窈冥冥은 그윽하고 어두운 모습. 《老子》 제21장의 “도라고 하는 것의 됨됨이는……그윽하고 어둡다[道之爲物……窈兮冥兮].”라고 한 내용은 이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呂惠卿은 “窈는 깊고 그윽함이고 冥은 어두움이니 그 모습을 진실로 볼 수 없다[窈則深窈 冥則玄冥 則其形固不得而見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2 至道之極 昏昏黙黙 : 지극한 도의 극치는 모습도 없고 소리도 없음. 昏昏은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黙黙은 소리를 내지 않아서 들리지 않는다는 뜻. 馬叙倫은 《說文解字》에서 “昒은 여전히 어두움이다[昒 尙冥也].”라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黙을 昒의 假借라고 했는데 지나친 견해이다. 李勉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呂惠卿은 “알 수 있어서 말로 표현하면 그 극치가 아니니 모습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바로 도의 극치가 되는 것이다. 어두우면 알아볼 수 없고 소리가 없으면 말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도의 본체를 말한 것이다. 도의 본체를 안 뒤에 함께 도에 들어갈 수 있다[可知而言 則非其極也 則昏昏黙黙 乃所以爲道之極也 昏則無知 黙則無言 此則言道之體也 知道之體 而後可與入道也].”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3 無視無聽 :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마라. 郭象은 “보는 것을 잊어버리면 저절로 보이고 듣는 것을 잊어버리면 저절로 들리니 정신이 동요하지 않고 육체가 부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忘視而自見 忘聽而自聞 則神不擾而形不邪也].”라고 풀이했다. 〈人間世〉편 顔回와 孔子의 心齋問答 중에서 “너는 뜻을 한결같이 해서 사물의 소리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또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 들어야 한다[若一志 无聽之以耳 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 而聽之以氣].”라고 한 내용을 응용한 것이다(赤塚忠).
역주24 必靜必淸 : 반드시 고요하게 하고 반드시 깨끗하게 함. 心靜神淸으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馬叙倫은 靜을 靖의 假借로 淸을 瀞의 가차라 하지만 글자 그대로 읽어도 의미가 자연스럽게 통하므로 굳이 따르지 않는다.
역주25 無勞女形 無搖女精 乃可以長生 : 당신의 몸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당신의 정신을 흔들어 대지 않아야만 비로소 장생할 수 있을 것임. 女자가 爾자로 된 인용이 있고 以자가 없는 인용이 있다(王叔岷).
역주26 愼女內 閉女外 : 당신의 안에 있는 정신을 삼가 지키며 당신의 밖으로 향하는 지각을 닫으라. 閉자가 閑으로 된 本이 있지만 王叔岷의 지적처럼 閉의 잘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成玄英은 “시청을 끊고 분수를 지킴이다[絶視聽 守分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7 多知爲敗 : 지각하는 것이 많아지면 실패하게 됨. 〈養生主〉편에서 “우리의 생명은 한계가 있지만, 지식은 무한하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게 되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知를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위태로울 뿐이다[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養生主〉편 해당 부분의 郭象 注에 “앎에 끝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다[知無崖 故敗].”라고 풀이한 내용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주28 我爲女遂於大明之上矣 : 〈그리하여 당신이 내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을 잘하면〉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해나 달 같은 커다란 광명이 있는 하늘 위에 올라갈 것임. 女는 2인칭. 汝로 된 판본이 있다(馬叙倫). 我爲女는 사람이 虛靜을 이룬다면 道가 저절로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趣向의 표현일 것이다(池田知久). 遂는 奚侗의 견해를 따라 올라간다[登進]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大明은 《管子》를 근거로 日月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池田知久의 견해이고, 여기서는 그것을 따랐으나 한편 福永光司는 大明과 달[月]을 구별해서 “大明은 동쪽에서 生하고 月은 서쪽에서 生한다.”는 《禮記》 〈禮器〉편의 글을 근거로 大明을 太陽이라고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역주29 至彼至陽之原也 : 저 지극한 양의 근원에 이름. 〈田子方〉편에 “지음은 고요하고 차가우며 지양은 밝고 성대하다[至陰肅肅 至陽赫赫].”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30 天地有官 陰陽有藏 : 하늘과 땅은 맡아서 다스리는 것이 있고 음과 양은 간직하고 있는 작용이 있음. 官이 宮으로 된 인용이 있다(馬叙倫). 馬叙倫은 館의 뜻으로 보았는데 옳지 않다. 成玄英이 “천관은 日‧月‧星‧辰을 말함이니 사방을 비추어 만물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官이라 일컬은 것이다. 지관은 金‧木‧水‧火‧土를 말함이니 동식물을 유지하고 여러 품물을 싣고 있으니 또한 官이라 일컫는다[天官 謂日月星辰 能照臨四方 綱維萬物 故稱官也 地官 謂金木水火土 能維持動植 運載羣品 亦稱官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德充符〉편 제1장에도 “천지를 마음대로 부리고 만물을 어루만진다[官天地 府萬物].”는 표현이 나온다.
역주31 愼守女身 物將自壯 : 당신의 몸을 삼가 지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생장할 것임. 앞구절과 마찬가지로 女가 汝로 된 판본이 있다(馬叙倫). 《經典釋文》의 陸德明은 “만물이 저절로 자랄 것이라는 말은 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만물이 모두 스스로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니 스스로의 뜻대로 움직이면 자라나게 된다[物將自壯 謂不治天下 則衆物皆自任 自任而壯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2 守其一 以處其和 : 純一한 도를 지켜 조화 속에 머묾. 《老子》 제10장에 ‘抱一’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22장에는 ‘執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역주33 修身千二百歲矣 吾形未常衰 : 몸을 닦은 지 1,200년이 흘렀는데도 내 몸이 아직 쇠약해지지 않음. ‘千二百歲’는 道라고 하는 존재의 영원성과 생명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池田知久). 常은 嘗의 뜻. 常자가 嘗으로 된 판본도 있다(馬叙倫).
역주34 廣成子之謂天矣 : 광성자야말로 하늘이라고 일컬을 만함. 逐字譯을 하면 廣成子를 당신을[之]天이라 할 만하다[謂天矣]가 될 것이다. 成玄英은 “검푸른 하늘과 덕이 부합될 만하다[可與玄天合德也].”라고 풀이했으며, 馬其昶은 “존경하는 사람을 들어서 공경을 표시한 것이다. 하늘이라고 일컫는 것 또한 이와 같다[擧所尊者以爲敬也 稱天亦猶此矣].”라고 풀이했다.
역주35 余語女 : 내가 당신에게 말해 주겠다. 역시 女자가 汝로 된 판본이 있다(馬叙倫, 池田知久).
역주36 彼其物無窮 : 저 도라고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함. 成玄英은 “죽고 사는 변화 속에 물리가 무궁한데 속인들은 어리석어서 처음과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死生變化 物理無窮 俗人愚惑 謂有終始].”라고 하여 彼其物의 物을 事物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옳지 않다. 呂惠卿 등이 풀이한 것처럼 道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역주37 彼其物無測 而人皆以爲有極 : 저 도라고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 無測은 헤아릴 수 없음. 곧 인간이 다할 수 없다는 뜻. 郭慶藩은 “도는 본래 다함이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다함이 있다고 여긴다[道本無盡 而人以爲有盡].”라고 하여 無測을 無盡의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38 上爲皇 而下爲王 : 위로는 황이 되고 아래로는 왕이 됨. 上과 下는 시대의 先後, 곧 上古시대와 後代를 뜻한다. 皇과 王은 成玄英의 풀이를 따라 皇은 伏羲와 神農(羲‧農)이고 王은 湯王과 武王(湯‧武)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39 上見光 而下爲土 : 위로는 해나 달의 빛을 받는 동식물이 되고 아래로는 흙덩어리 따위가 됨. 成玄英이 “무위의 도를 잃어버리고 욕망에 빠지게 되면 살아서는 광명을 보지만 죽어서는 흙덩어리가 된다. 생사에 잘못 집착해서 삶과 죽음을 균등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이 있게 된 것이다[喪無爲之道 滯有欲之心 生則覩於光明 死則便爲土壞 迷執生死 不能均同上下 故有兩名也].”라고 주석한 이래 上下를 生死로 풀이한 견해가 많지만 위 문장의 상하는 시간의 선후를 나타내고 여기의 상하는 공간적인 상하, 곧 위아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간명하다. 한편 赤塚忠은 廣成子는 一元의 精氣를 비유한 것으로 廣成子의 道를 잃은 자는 혼백이 분리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禮記》 〈祭義〉편에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鬼라 한다. 인간의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된다. 그런데 그 氣는 하늘에 올라 밝게 빛난다. 쑥을 태워 냄새를 피워 올리면 사람들이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니 이것은 온갖 사물의 精이며 神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 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라고 한 내용과 연관짓고 있는데 이어지는 ‘百昌’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40 百昌 : 만물. 《經典釋文》에서 司馬彪가 “백물과 같다[猶百物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于鬯과 馬叙倫 등은 昌을 菖의 가차로 보았는데 池田知久가 不可하다고 하였듯이 맥락상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글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위 문장에 나온 物將自壯의 壯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赤塚忠).
역주41 生於土 而反於土 :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감. 《老子》 제14장의 “무물로 돌아간다[復歸於無物].”, 제16장의 “근본으로 돌아간다[復歸其根].”, 제28장의 “무극으로 돌아간다[復歸於無極].”라고 한 내용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42 余將去女 : 내 곧 당신을 떠날 것임. 일정한 한계를 가진 상대를 떠나 무궁한 곳으로 간다는 뜻. 女자가 汝로 된 판본이 있다(馬叙倫).
역주43 以遊無極之野 : 끝없이 광대한 들판에서 노닒. 遊자 아래에 乎자가 있는 인용이 있다(王叔岷).
역주44 吾與日月參光 吾與天地爲常 : 나는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천지와 함께 영원할 것임. 參은 참여하다, 곧 함께하다는 뜻. 成玄英은 “參은 함께함이다[參 同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5 當我緡乎 遠我昏乎 :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라도 어지러워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것임. 緡은 어지러운 모양. 郭象은 緡을 뒤섞임[混合也]이라 풀이했고, 馬叙倫은 惛의 假借, 赤塚忠은 泯의 假借로 보았는데 대의에 큰 차이는 없다. 昏은 어둡다는 뜻. 《經典釋文》에서 陸德明은 “어두움이다[暗也].”라고 풀이했다. 司馬彪는 “緡과 昏은 모두 무심함을 일컬음이다[緡昏 並無心之謂也].”라고 했는데 이처럼 광성자를 주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福永光司는 세상 사람들[世人]을 주어로 보았는데 참고할 만하다. 《老子》 제14장에서 “뒤따라가도 그 뒷모습을 볼 수 없고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다[隨而不見其後 迎而不見其首].”라고 한 내용과 비슷한 취향이다(赤塚忠).
역주46 人其盡死 而我獨存乎 :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나만 홀로 남을 것임. 이 편 제5장에 “홀로 가고 홀로 올 것이니 이것을 일러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 하니 홀로 존재하는 사람을 일러 지극히 귀한 존재라고 한다[獨往獨來 是謂獨有 獨有之人 是謂至貴].”라고 한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또 《老子》 제25장의 “홀로 서서 변하지 않는다[獨立而不改].”라고 道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赤塚忠은 有形의 인간은 멸망하지만 道를 체득한 자는 不滅함을 말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