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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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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子曰
其德하니라
하며 立德明道하린 非王德者邪
이어든 而萬物 從之乎인댄 此謂王德之人이니라
하며 神之又神이오 而能精焉하나니
其與萬物 接也 至無而供其求하나니 컨댄 이로다


선생이 말했다.
“도는 깊은 못처럼 고요히 머물러 있으며 맑은 물처럼 깨끗하다.
쇠붙이나 돌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그 때문에 쇠붙이나 돌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질이 있지만 도에 맞추어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을 것이니 만물 중에서 누가 그것을 일정하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왕자王者을 갖춘 사람은 타고난 소박함을 지켜 만물의 변화에 따라가면서 세속의 잡사雜事에 능통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며, 사물의 본원本原를 확립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통한다.
그 때문에 그 이 광대하다.
그 마음이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다른 사물이 먼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을 말미암는다.
그 때문에 형체는 가 아니면 생성되지 못하고, 이렇게 생성된 사물事物이 아니면 밝게 빛나지 못한다.
형체를 가진 사물을 사물로 존재케 하고 만물이 각기 삶을 끝까지 누리게 하며 을 이루고 를 밝힌 사람이, 왕자王者의 덕을 갖춘 이가 아니겠는가.
광대廣大하구나.
홀연히 나와 발연勃然히 움직이면 만물이 모두 그것을 따르니 이런 사람을 일러 왕자의 덕을 갖춘 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서 보며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귀 기울이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새벽빛을 보며 소리 없는 정적 속에서 홀로 커다란 화음和音을 듣는다.
그 때문에 깊이 하고 또 깊이 해서 만물을 만물로 존재케 하고 신묘하고 또 신묘하게 해서 만물이 정묘精妙하게 한다.
그 때문에 만물과 접촉할 때에 스스로 완전한 이면서 만물의 각기 다른 요구에 이바지할 수 있으니 나그네가 때때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잠잘 곳을 찾는 것처럼 대소장단에 맞추어 마침내 영원한 곳에 이르기까지 만물이 쉴 곳을 찾아 준다.”


역주
역주1 淵乎其居也 : 깊은 못처럼 고요히 머묾. 淵은 못처럼 깊음을 비유. 居는 움직이지 않는다, 靜止하고 있다는 뜻. 林希逸은 “居란 움직이지 않음이니 안정함이다[居者 不動也 定也].”라고 풀이했고, 羅勉道는 “居는 멈춤이다[居 止也].”라고 풀이했다. 道 즉 만물을 만물로서 존재케 하는 窮極根源의 實體는 그윽하고 깊은 못처럼 고요히 머물고 있다는 뜻. 《老子》 제4장에 보이는 ‘淵兮似萬物之宗’을 참조할 것.
역주2 漻乎其淸也 : 맑은 물처럼 깨끗함. 漻는 깨끗한 모양.
역주3 金石不得 無以鳴 : 쇠붙이나 돌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낼 수 없음. 금석은 악기의 재료로 쇠붙이와 돌 등으로 만든 鐘이나 磬 등의 악기를 가리키는데 이른바 八音인 金石絲竹匏土革木의 맨 앞에 배열된 두 가지를 악기의 대표로 삼아서 표현한 것. 郭象이 “소리는 고요한 道로부터 드러난다[聲由寂彰].”라고 풀이한 것이 간명하다. ‘그것을 얻지 못하면[不得이면]’은 鐘이나 磬 등의 악기가 ‘道를 얻지 못하면, 즉 도와 맞지 않으면’의 뜻이다.
역주4 金石有聲 不考不鳴 : 쇠붙이나 돌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질이 있지만 도에 맞추어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음. 考는 ‘두드리다’의 뜻. 成玄英은 “考는 擊이다[考 擊也].”라고 풀이했다. 王叔岷은 《淮南子》 〈詮言訓〉편에 “金石有聲 不叩不鳴”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여기의 考를 叩와 같다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5 萬物孰能定之 : 만물 중에서 누가 그것을 일정하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郭象은 “감응에 일정한 방향이 없음이다[應感无方].”라고 풀이했는데 만물의 감응에 일정함이 없으므로 누구도 그것을 규정할 수 없고 바로 뒤에 등장하는 王德을 가진 사람만이 그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맥락이다.
역주6 王德之人 : 王者의 德을 갖춘 사람. 林希逸의 “天下에 王 노릇 할 덕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言有王天下之德也].”는 주가 可하다. 福永光司는 王자를 성대하다는 뜻인 旺으로 보았고, 方勇‧陸永品 등도 이 견해를 따라 王德之人을 盛德之人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이 편 제2장에 王天下라는 말이 나오고 이 편 전체에 유가적 색채가 강한 것을 감안하여 여기서는 王者의 德을 갖춘 사람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7 素逝 : 타고난 소박함을 지켜 만물의 변화에 따라감. 素는 소박하다는 뜻으로 無爲自然의 道를 형용한 것이고 逝는 간다, 만물의 변화에 따라간다는 뜻. 〈山木〉편의 ‘與之偕逝’ ‘體逝’의 逝와 같을 것이다(蘇輿, 池田知久). 成玄英도 “素는 眞이고 逝는 감이다[素 眞也 逝 往也].”라고 풀이했는데,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難解한 대목이다.
역주8 恥通於事 : 세속의 雜事에 능통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김. 事는 세속의 雜事. 王先謙은 蘇輿의 견해를 인용하여 “通於事와 通於神이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恥자는 잘못 들어간 것 같다[通於事 與通於神 對文 恥字疑誤].”라고 하여 通於事를 ‘사리에 능통하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풀이했지만, 王叔岷의 지적처럼 여기의 通於事는 〈逍遙遊〉에서 “누가 수고스럽게 애쓰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따위를 일삼겠는가[孰弊弊焉 以天下爲事].”라고 한 것과 “누가 세상일 따위를 기꺼이 일삼으려 하겠는가[孰肯以物爲事].”라고 한 의미와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므로 취하지 않는다.
역주9 立之本原而知通於神 : 사물의 本原인 道를 확립하여 智가 神妙한 경지에 통함. 本原은 사물의 근본, 곧 道를 지칭한다. 知는 智와 같다. 陸德明은 “知는 智로 읽어야 한다[知音智].”라고 풀이했다. 王叔岷은 “立之本原의 之는 於와 같다. 그 본원을 확립하면 智가 신묘함과 통한다[之猶於也 謂立其本原則智通於神妙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0 其心之出 有物採之 : 그 마음이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다른 사물이 먼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을 말미암음. 採는 구한다는 뜻. 郭象은 “다른 사물이 구한 뒤에 마음을 드러낼 뿐이고 사물보다 앞서 唱導하지 않음이다[物採之而後出耳 非先物而唱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採는 구한다는 뜻이다. 성인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다른 사물이 먼저 요구하는 것을 말미암는다[採 求也 聖心之出 良由物採].”라고 풀이했다. 有는 由와 같다. 王叔岷은 成玄英이 有를 由로 풀이한 것을 근거로 이 책 〈至樂〉편의 ‘種有幾’의 有도 由자와 같은 의미라고 풀이하면서 成玄英의 해석을 가장 옳다고 하였다.
역주11 形非道不生 生非德不明 : 형체는 道가 아니면 생성되지 못하고, 이렇게 생성된 事物은 德이 아니면 밝게 빛나지 못함. 成玄英은 《老子》 제51장을 인용하면서 “《노자 도덕경》에 이르기를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고 했다[老經曰 道生之 德畜之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풀이라 할 만하다.
역주12 存形窮生 : 형체를 가진 사물을 사물로 존재케 하고 만물이 각기 삶을 끝까지 누리게 함. 王叔岷은 ‘窮生’을 “천수를 다함[盡其天年].”으로 풀이했다.
역주13 蕩蕩 : 광대한 모양. 王叔岷은 《漢書》 顔師古 注를 인용하여 “蕩蕩은 廣大한 모양[蕩蕩 廣大貌].”이라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른다. 成玄英은 “너그럽고 공평함을 이름함[寬平之名].”이라고 풀이했으나 광대한 모양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論語》 〈泰伯〉편에도 “위대하시다. 堯의 임금 노릇 하심이여! ……넓고 커서 백성들이 무엇이라 형용하지 못하는구나[大哉 堯之爲君也……蕩蕩乎 民無能名焉].”라고 한 말이 보인다(福永光司, 池田知久). 朱子 注에는 “蕩蕩 廣遠之稱也”라 하였다.
역주14 忽然出 勃然動 : 忽然히 나와 勃然히 움직임. 문득 나타나고 盛하게 활동함을 말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무심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郭象은 “忽과 勃은 모두 무심히 대응하는 모양이다[忽勃 皆无心而應之貌].”라고 풀이했다.
역주15 視乎冥冥 聽乎無聲 :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서 보며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귀 기울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曉와 和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밝은 빛과 커다란 和音이다. 視乎冥冥 聽乎無聲에 대하여는 《老子》 제14장‧제21장에 근거한 설명들이 많으나 異說도 없지 않다.
역주16 冥冥之中 獨見曉焉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새벽빛을 봄. 曉는 밝은 빛. 昭와 같다. 《呂氏春秋》 〈離謂〉편에는 ‘冥冥之中 有昭焉’이라 한 부분이 있고, 《淮南子》 〈俶眞訓〉편에는 ‘視於冥冥 聽於無聲 冥冥之中 獨見曉焉 寂漠之中 獨有照焉’이라 한 부분이 있는데 모두 《莊子》의 이 대목에서 비롯된 글이다(池田知久).
역주17 無聲之中 獨聞和焉 : 소리 없는 정적 속에서 홀로 커다란 和音을 들음. 和는 和音으로 도의 소리를 뜻한다.
역주18 深之又深 而能物焉 : 깊이 하고 또 깊이 해서 만물을 만물로 존재케 함. 深之又深의 之는 위 문장에 보이는, 홀로 새벽빛을 보고 홀로 和音을 듣는 獨見 獨聞의 능력을 의미하는 대명사이다. 郭象은 “근원을 궁구한 뒤에 만물을 만물로 존재하게 할 수 있고 순응을 극진히 한 뒤에 정묘함을 극진히 할 수 있다[窮其原而後能物物 極其順而後能盡妙].”라고 풀이했다. 한편 錢穆은 “《老子》에서는 휘황하고 홀연한데 그 가운데 사물이 있고 고요하고 어두운데 그 가운데 정묘함이 있다고 했다[老子曰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라고 하여 《老子》를 인용하고 있으며 王叔岷은 이를 근거로 삼아 能자를 有자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참고할 만하다.
역주19 時騁而要其宿 : 나그네가 때때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잠잘 곳을 찾듯이 함. 要는 구한다, 찾다의 뜻. 王叔岷은 要가 會의 뜻으로 쓰이는 용례를 들면서 ‘要其宿’을 “돌아갈 곳으로 모인다[會其歸].”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했는데 본래 郭象이 “궁극처로 모이게 할 따름이다[會其所極而已].”라고 한 주석에서 착안한 것으로 참고할 만하나, 宿은 만물이 머무르는 곳(赤塚忠)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역주20 大小長短脩遠 : 대소장단에 맞추어 마침내 영원한 곳에 이르기까지 만물이 쉴 곳을 찾아 줌. 脩遠의 脩는 長자와 같은 의미인데 大小가 사물의 물리적 크기를 나타내고, 장단이 사물의 물리적 길이를 의미한다면 脩遠은 시간의 흐름이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異說이 분분한 대목이다. 郭象은 “모두 마음대로 하게 맡겨서 궁극처로 모이게 할 따름이다[皆恣而任之 會其所極而已].”라고 풀이했고, 吳汝綸은 姚鼐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빠진 글자가 있을 것이라 했고, 王叔岷은 郭象의 주석이 잘못 끼어든 것이라 했는데 그렇게 보면 郭象 注는 ‘大小長短脩遠 皆恣而任之 會其所極而已’로 맥락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선 郭象의 주석으로 보지 않고 본문의 맥락을 따라 번역하였다. 脩遠의 脩에 대하여는 馬叙倫의, 近의 뜻으로 보는 주석을 취하는 說도 있고, 林希逸은 “脩遠은 當作遠近”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취하지 않는다.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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