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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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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3章
13章
하며하며하니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유형의 인간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하는 유형의 인간과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유형의 인간이 있다.
所謂暖姝者 學一先生之言 則暖暖姝姝而私自說也하야 自以爲足矣
이른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민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학설을 배우게 되면 곧 부드럽고 요상하게 스스로를 꾸며 스스로 자기만족에 빠져버린다.
而未知未始有物也하나니
그리고 본시 이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是以 謂暖姝者也라하나니라
그래서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濡需者 是也니라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한다는 것’은 돼지 몸에 붙은 이가 바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
돼지의 거칠고 긴 털을 가려서 그 사이에 머물러 그것을 스스로 넓은 궁궐, 큰 마당이라고 생각하며 돼지의 굽이 갈라진 사이, 다리가 꼬부라진 모퉁이 사이와 젖통 사이,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그것을 스스로 안전한 방, 편리한 거처라고 생각하여
도살자가 어느 날 팔을 걷어붙이고 마른 풀을 깔고 불을 지펴 〈돼지를〉 구워먹으려고 불태우면 곧 자기 자신도 돼지와 함께 모두 타버리게 될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나아가고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물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안일함을 탐하는 자’이다.
卷婁者 舜也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다는 것’은 〈고인 가운데〉 과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羊肉 不慕蟻 蟻慕羊肉하나니 羊肉 羶也일새니라
양고기는 개미에 대해 사모하는 기분이 전혀 없는데 〈다만〉 개미가 양고기를 사모하고 따르니 그것은 양고기가 노린내를 풍기기 때문이다.
일새 百姓 悅之하니
순임금은 노린내 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하였다.
하야 而十有萬家러니
그 때문에 세 번 사는 곳을 옮겼는데 그 주위에 도시가 이루어져서 의 옛 터에 이르러서는 십여만 나 되는 대도시가 출현하였다.
堯聞舜之賢하고 하야하노라
요임금이 순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불모지에서 등용하면서 이르기를 ‘그가 와서 은택을 베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순이 불모지에서 등용될 때 나이가 많았고 총명이 쇠퇴했는데도 돌아가서 쉬지를 못했으니 이른바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자’에 해당한다.
是以 하나니
이 때문에 신인神人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사람이 오게 되면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고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이롭지 못하다.
無所甚親하며 無所甚疏 하나니 此謂眞人이니라
그 때문에 너무 가까이함도 없고 너무 멀리함도 없이 자연의 덕을 품고 하늘의 조화로운 기운을 배양하여 천하 사람들을 따르니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하야 以目으로 視目하며 以耳 聽耳하며 以心으로 復心하니
진인眞人은〉 개미가 된 경우에는 양고기를 사모하는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가 된 경우에는 강호에서 서로 잊고 자유로이 헤엄치는 계책을 몸에 붙이고, 양이 되어서는 노린내를 풍겨서 개미를 모으는 의도를 버리고서, 눈으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며 귀로는 귀에 들리는 대로 들으며 마음으로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돌아간다.
若然者 其平也繩이오 其變也循이니라
그 같은 이는 그 평탄한 심경은 먹줄을 친 것처럼 반듯하고, 변화할 때에는 자연의 이법을 그대로 따른다.
옛날의 진인은 자연[天] 그대로 사물을 대하는지라 인위적으로 자연[天]에 끼어들지 아니하며 옛날의 진인은 자연[天]을 얻으면 태어나고 자연[天]을 잃으면 죽으며 인위에 빠지면 죽고 인위에서 벗어나면 살아났다.
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약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씀바귀, 도라지, 가시연, 저령(시령) 따위이다.
이것들이 그때그때의 병 증세에 따라 주약主藥이 되는 것을 어찌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늘 唯種也能知亡之所以存호대
옛날 나라 왕 구천句踐이 군사 삼천을 끌고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가 농성하였는데 〈그러다가 결국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항복하여 모두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으나〉 오직 대부大夫 (文種)만이 지금 월나라의 멸망이 〈장래 월나라가〉 존속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대부大夫 (文種)도 〈월나라가 다시 흥한 뒤에 참언讒言을 당하게 되어 구천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월나라가 다시 일어난 것)이 자신의 근심이 되는 원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올빼미의 눈은 그 나름대로 적합함이 있고 학의 다리 또한 나름대로의 적절함이 있는데 눈과 다리를 제거해버리면 올빼미와 학이 슬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曰 風之過河也 有損焉하며 日之過河也 有損焉하니 請只風與日 相與守河하니
또 그래서 이르기를 ‘바람이 하수河水 위를 지나가면 하수가 줄어들고 해가 하수 위를 지나가면 하수가 줄어들지만 도리어 바람과 해로 하여금 함께 하수를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하수는 애초부터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 여기지 않으니 하수는 근원根源에 의지해서 흘러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흐름은 토지의 고저高低형상形狀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그림자가 사람의 형체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어떤 사물은 또 다른 사물에 의지함이 긴밀하다.
그러므로 눈이 밝게 보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귀가 분명하게 듣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마음이 지혜로움만 생각하면 위태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은 그 기관의 역할에 국한되면 위태로우니, 이미 위태로움이 이루어지고 나면 고치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하는지라, 가 커져서(화가 화를 불러) 점점 더 많이 모이게 된다.
其反也 緣功이오 其果也 待久어늘 而人 以爲己寶하나니 不亦悲乎
〈이렇게 화가 더 많아졌을 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성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위태롭기만 한 이목耳目총명聰明, 마음의 영지英知를〉 자기의 보물로 여기고 있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有亡國戮民 無已 不知問是也니라
그러므로 군주로서 나라를 망치는 자와 백성으로서 주륙을 당하는 자가 끊임없이 속출續出하는 것은 이것을 물어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발이 땅을 직접 밟는 부분은 협소하지만 직접 밟지 않은 땅을 믿은 뒤라야 넓게 걸어 다닐 수 있다.
人之於知也少하니
인간의 지식은 〈천지 우주의 한없는 광대함에 비하면〉 매우 적다.
비록 적으나 알지 못하는 바를 믿은 뒤라야 자연[天]이 가르치는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며하며하며하며하며하며 至矣
대일大一을 알고 대음大陰을 알고 대목大目을 알고 대균大均을 알고 대방大方을 알고 대신大信을 알고 대정大定을 알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大一 通之하고 大陰 解之하고 大目 視之하고 大均 緣之하고 大方 體之하고 大信 稽之하고 大定 持之하나니라
대일大一은 이것을 통하게 하고, 대음大陰은 이것을 분해하고, 대목大目은 이것을 보고, 대균大均은 있는 그대로를 따르고, 대방大方은 이것을 체득하고, 대신大信은 이것을 생각하고, 대정大定은 이것을 유지한다.
이 일곱 가지를 극진히 하면 천도天道가 현현하고, (自然)을 따르면 밝게 비추는 지혜가 있게 되고, 지혜가 작용하지 않는 데에서 명합冥合하면 추요樞要가 있게 되고, 우주의 시원에 저 가 있게 된다.
則其解之也 似不解之者하며 其知之也 似不知之也
그러니 이 를 이해하고 있는 자는 도리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 그 를 알고 있는 것도 도리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不知而後에야 知之니라
그러니 알지 못하고서 그런 뒤라야 비로소 참으로 를 알게 되는 것이다.
其問之也 不可以有崖 而不可以無崖로다
누군가가 에 관해 물으면 그것을 무엇이라 한정지어 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런 한정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는〉 위에 있다가 아래에 있다가 또 이리 변하고 저리 돌아서 붙잡을 수 없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이며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변함없이 존속해서 훼손할 수 없으니 세계를 크게 싸안은 커다란 테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어찌하여 또한 이것(道)을 물어보지 않는고?
奚惑然爲리오
어찌하여 미혹되어 이 지경이 되었는가.
미혹되지 않은 밝은 로 미혹을 풀어서 미혹되지 않은 경지로 돌아가면 이것이 크게 미혹되지 않은 경지에 가까울 것이다.
역주
역주1 暖姝(훤주)者 :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유형의 인간. 陸德明은 “暖은 부드러운 모양이고 姝는 요상한 모양이다[暖 柔貌 姝 妖貌].”라고 했다. 이 밖에 얕은 소견으로 스스로 기뻐함(김달진), 남의 학설에 사로잡힌 자(安東林), 비굴하게 아첨하는 인물(福永光司) 등의 풀이가 있다.
역주2 濡需者 :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하는 유형의 인간. 陸德明은 “잠깐 동안 구차하게 편안하기를 다툼을 말함이다[謂偸安須臾之頃].”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자랑하는 모양이다[矜誇之貌].”라고 풀이했고, 呂惠卿은 “濡는 떠나지 못함이고 需는 의지함이다[濡則不去 需則有待].”라고 풀이했는데 呂惠卿의 풀이가 적절하다. 林希逸, 羅勉道, 赤塚忠, 金谷治도 이와 비슷하다(池田知久). 이 외에 권세와 이익을 탐내며 집착하는 것이라는 견해(김달진)도 있다.
역주3 卷婁者 :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유형의 인간. 陸德明은 卷婁를 “구속되고 얽매임과 같다[猶拘攣也].”고 풀이했다.
역주4 豕蝨(슬) : 돼지 몸에 붙은 이. 돼지 몸에 붙어 기생하는 이처럼 타인에게 의존하는 자라는 뜻이다.
역주5 擇疏鬣(렵) 自以爲廣宮大囿 : 돼지의 거칠고 긴 털을 가려서 그 사이에 머물러 그것을 스스로 넓은 궁궐, 큰 마당이라고 생각함. 鬣은 돼지의 갈기이고 疏는 그 속의 성긴 틈. 따라서 擇疏鬣은 돼지의 거친 갈기털 사이에 끼어서 머문다는 뜻이다.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張君房본에는 擇疏鬣 아래에 長毛 두 글자가 있는데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이 옳을 듯하다. 곧 ‘擇疏鬣長毛’가 되는데 그럴 경우 疏鬣은 ‘거친 갈기’, 長毛는 ‘긴 털’로 ‘거친 갈기와 긴 털을 가려서 그 사이에 머문다’는 의미가 된다.
역주6 奎蹏曲隈 乳間股脚 自以爲安室利處 : 돼지의 굽이 갈라진 사이, 다리가 꼬부라진 모퉁이 사이와 젖통 사이,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그것을 스스로 안전한 방, 편리한 거처라고 생각함. 奎蹏의 奎는 본래 ‘가랑이 사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蹏자와 함께 쓰였기 때문에 ‘굽이 갈라진 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曲隈는 다리가 구부러진 모퉁이, 곧 숨겨져 있는 부분이라는 뜻이다. 乳間은 젖통 사이. 股脚은 다리 사이.
역주7 不知屠者之一旦鼓臂 布草操煙火 而己與豕俱焦也 : 도살자가 어느 날 팔을 걷어붙이고 마른 풀을 깔고 불을 지펴 〈돼지를〉 구워먹으려고 불태우면 곧 자기 자신도 돼지와 함께 모두 타버리게 될 줄을 알지 못함. 鼓臂는 팔을 움직임. 곧 팔을 걷어붙이고 돼지를 잡으러 나선다는 뜻이다.
역주8 此 以域進 此 以域退 : 이것은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나아가고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물러나는 것임. 스스로 좋은 자리를 가려서 머물 곳을 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돼지의 몸뚱이 안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域은 돼지의 몸뚱이를 가리킨다(方勇‧陸永品).
역주9 舜有羶行 : 순임금은 노린내 나는 행동을 함. 仁義를 실천한답시고 노린내를 풍겼다는 뜻이다.
역주10 三徙成都 : 세 번 사는 곳을 옮겼는데 그 주위에 도시가 이루어짐. 成玄英은 “순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피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세 차례 도망하여 이사를 하여 피했지만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따르는 이가 십만에 이르렀고 머물렀던 곳에 저절로 도시가 이루어졌다[舜避丹朱 又不願衆聚 故三度逃走 移徙避之 百姓慕德 從者十萬 所居之處 自成都邑].”고 풀이했고, 《史記》 〈五帝本紀〉에는 “일 년 만에 순이 머물렀던 곳에 취락이 이루어졌고, 이 년만에 고을을 이루었으며, 삼 년 만에 도시를 이루었다[一年而所居成聚 二年成邑 三年成都].”는 기록이 있다.
역주11 鄧之墟 : 등의 옛 터. 鄧은 지명. 《說文解字》에는 南陽에 있다고 했다.
역주12 擧之童土之地 : 불모지에서 그를 등용함. 童土는 불모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땅이라는 뜻에서 어리다는 뜻인 童자를 붙인 것이다. 向秀는 “童土는 땅에 초목이 없음이다[童土 地無草木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3 冀得其來之澤 : 그가 와서 은택을 베풀기를 바람. 王先謙은 “순이 와서 은혜를 베풀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云望得舜來而施澤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4 年齒長矣 聰明衰矣 而不得休歸 所謂卷婁者也 : 순이 불모지에서 등용될 때 나이가 많았고 총명이 쇠퇴했는데도 돌아가서 쉬지를 못했으니 이른바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자’에 해당한다. ‘不得休歸’는 돌아가 쉬지 못했다는 뜻인데, 王叔岷은 이 구절을 두고 〈逍遙遊〉편에서 許由가 堯임금에게 “돌아가 쉬십시오, 임금이시여. 나는 천하를 위해 쓰일 곳이 없습니다[歸休乎君 予無所用天下爲].”라고 했으며 여기의 舜은 천하에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 쉬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역주15 神人惡衆至 : 신인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싫어함. 郭象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지 〈舜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해서 부른 것이 아니다[衆自至耳 非好而致也].”라고 풀이하여 舜임금을 神人으로 이해한 듯하지만, 이 구절은 ‘신인은 舜처럼 仁義의 냄새를 풍겨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지 않는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므로 郭象의 견해는 옳지 않다.
역주16 衆至則不比 不比則不利也 : 많은 사람이 오게 되면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고 서로 친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이롭지 못함. 比는 親比의 뜻으로 화목하다는 의미. 陳壽昌은 “比는 和睦함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불화하기 마련인데 불화한 상태에서 화목하기를 추구하게 되면 정신을 다하고 육체를 피로하게 한다. 그 때문에 불리하다[比 和也 衆聚則不和 不和而求其和 殫精勞形 故不利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7 抱德煬和 以順天下 : 자연의 덕을 품고 하늘의 조화로운 기운을 배양하여 천하 사람들을 따름. 抱德의 德은 자연의 덕성. 煬和는 養和, 곧 天和之氣를 기름. 奚侗은 煬을 養의 가차자라고 풀이했다.
역주18 於蟻棄知 於魚得計 於羊棄意 : 개미가 된 경우에는 양고기를 사모하는 지혜를 버리고, 물고기가 된 경우에는 강호에서 서로 잊고 자유로이 헤엄치는 계책을 몸에 붙이고, 양이 되어서는 노린내를 풍겨서 개미를 모으는 의도를 버림. 林希逸은 “개미는 지극히 미천한 동물이지만 여전히 완전히 무지하지 못하고 양은 지극히 어리석은 동물이지만 여전히 완전히 의도가 없지는 못하다. 오직 진인만이 무지하고 의지가 없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개미의 경우에는 지를 버리고 양의 경우에는 의도를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유유히 스스로 만족스러워하기 때문에 진인이 스스로를 위해 계책을 세울 때 단지 물고기처럼 할 뿐이다[蟻 至微之物也 而猶未盡能無知 羊 至愚者也 而猶未盡能無意 唯眞人則無知矣 無意矣 故曰 於蟻棄知 於羊棄意 魚之在水 悠悠自得 眞人之自爲計 但如魚然].”라고 풀이했다.
역주19 以天待之 不以人入天 : 자연[天] 그대로 사물을 대하는지라 인위적으로 자연[天]에 끼어들지 아니함. 以天待之는 자연 그대로 인사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 인용하고 있는 張君房본에는 待之의 之가 人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方勇․陸永品은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之자를 그대로 두고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바꾸지 않는다.
역주20 得之也生 失之也死 得之也死 失之也生 : 자연[天]을 얻으면 태어나고 자연[天]을 잃으면 죽으며 인위에 빠지면 죽고 인위에서 벗어나면 살아났다. 앞의 두 之자는 자연을 지칭하고 뒤의 두 之자는 인위를 지칭한다. 다만 林希逸은 “生死와 得失에 한결같이 자연을 따르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을 얻었다고 말해도 옳고 죽은 것을 얻었다고 말해도 옳으며 태어나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해도 옳고 죽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해도 옳다[生死得失 一聽自然 生而曰得亦可 死而曰得亦可 生而曰失亦可 死而曰失亦可].”라고 풀이했는데 네 之자를 모두 자연의 뜻으로 본 듯하다.
역주21 藥也 其實 菫也 桔梗也 鷄雍也 豕零也 : 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약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씀바귀, 도라지, 가시연, 저령(시령) 따위이다. 거론한 약재들은 대체로 흔한 것들로 귀한 약재가 아니지만 특정 병증을 치료할 때에는 가장 중요한 약재가 되기도 한다는 맥락이다.
역주22 是 時爲帝者也 何可勝言 : 이것들이 그때그때의 병 증세에 따라 主藥이 되는 것을 어찌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是는 앞에서 거론한 흔한 약재들을 지칭한다. 흔한 약재들이 특정의 병증을 치료할 때는 帝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인간사도 이와 같아서 처지의 변화에 따라 賢도 되고 愚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郭象은 “필요한 때를 만나게 되면 천한 것이 없게 되고 쓰일 때가 아니면 귀한 것이 없다. 귀천은 때가 있는 법이니 누가 늘 귀할 수 있겠는가[當其所須則無賤 非其時則無貴 貴賤有時 誰能常也].”라고 풀이했는데 이 대목의 맥락을 정확히 간파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역주23 句踐也 以甲楯三千 棲於會稽 : 구천이 군사 삼천을 끌고 회계산에 들어가 농성함. 오나라 왕 부차와 싸우다 대패하여 살아남은 군사 삼천을 끌고 회계산으로 도망친 일을 말한다. 棲는 산에 올라가 농성했다는 뜻. 李頤는 “산에 올라가는 것을 棲라 한다[登山曰 棲].”고 풀이했다.
역주24 唯種也能知亡之所以存 唯種也不知其身之所以愁 : 오직 大夫 種(文種)만이 지금 월나라의 멸망이 〈장래 월나라가〉 존속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大夫 種(文種)도 〈월나라가 다시 흥한 뒤에 讒言을 당하게 되어 구천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월나라가 다시 일어난 것)이 자신의 근심이 되는 원인이었음을 알지는 못함.
成玄英은 “種은 월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당시 구천이 대패하여 오직 삼천의 군사를 끌고 회계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이 멀지 않았지만 대부 종이 은밀하게 계획하고 깊은 지혜를 발휘하여 멸망에 가까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거짓으로 오나라와 화친하고 그 뒤 이십 년 만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민첩한 토끼가 죽고 나면 좋은 사냥개라도 삶아 먹히고 적국이 멸망하고 나면 충신이 죽게 되는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오나라를 평정한 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강호에서 노닐며 이름과 성을 바꾸고 지혜를 숨기고 자취를 없앴으니 도주공이 바로 그이다. 〈그러나〉 대부 종은 떠나지 못했다가 구천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단지 나라가 망할 때 보존할 계책만 알았고 자기 몸의 근심거리로 인해 필경 죽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種 越大夫名 其時句踐大敗 兵唯三千 走上會稽山 亡滅非遠 而種密謀深智 亡時可存 當時矯與吳和 後二十年而滅吳矣 夫狡免死 良狗烹 敵國滅 忠臣亡 數其然也 平吳之後 范蠡去越而游乎江海 變名易姓 韜光晦跡 卽陶朱公是也 大夫種不去 爲句踐所誅 但知國亡而可以存 不知愁身之必死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5 鴟(치)目 有所適 鶴脛 有所節 解之也悲 : 올빼미의 눈은 그 나름대로 적합함이 있고 학의 다리 또한 나름대로의 적절함이 있는데 눈과 다리를 제거해버리면 올빼미와 학이 슬퍼할 것임. 올빼미의 눈은 밤에 사물을 밝게 보는 데 적합함이 있고 학의 다리는 늪지대를 걷는 데 적절함이 있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낮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길다 하여 눈과 다리를 제거해버리면 올빼미와 학이 슬퍼할 것이라는 뜻. 〈騈拇〉편에서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주면 슬퍼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잘라내면 슬퍼한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고 한 취지와 같다. 鴟는 올빼미.
역주26 請只風與日 相與守河 而河 以爲未始其攖也 : 바람과 해로 하여금 함께 하수를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하수는 애초부터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 여기지 않음. 하수는 바람과 해가 불고 쬐고 하더라도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연의 도를 지키는 사람은 외물이 어지럽힐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수는 도를 지키는 진인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27 恃源而往者也 : 하수는 根源에 의지해서 흘러가는 존재임. 福永光司는 이 황하의 물흐름이야말로 道, 곧 근원적 진리를 근거로 하여 살아가는 眞人의 모습이라고 풀이했다.
역주28 水之守土也審 影之守人也審 物之守物也審 : 물흐름은 토지의 高低․形狀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그림자가 사람의 형체에 의지함이 긴밀하며, 어떤 사물은 또 다른 사물에 의지함이 긴밀함. 물은 흙 위에 꼭 붙어서 흐르고 그림자는 사람에게 꼭 붙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사물과 사물은 서로 긴밀하게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역주29 目之於明也殆 耳之於聰也殆 心之於殉也殆 : 눈이 밝게 보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귀가 분명하게 듣는 것만 추구하면 위태로우며, 마음이 지혜로움만 생각하면 위태로움. 殉은 侚(순)의 가차로 재빠른 인간의 英知. 成玄英은 “쫓아감이다[逐也].”라고 풀이했고 方勇․陸永品 등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옳지 않다. 章炳麟이 侚 또는 睿의 假借字라고 풀이한 것이 옳다(馬叙倫).
역주30 凡能 其於府也殆 : 인간의 모든 능력은 그 기관의 역할에 국한되면 위태로움. 府는 위에 말한 耳目과 心의 기관을 말한다. 林希逸은 胸腑로 풀이했지만 꼭 가슴만 지칭한 것은 아니다.
역주31 殆之成也 不給改 : 위태로움이 이루어지고 나면 고치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함. 給은 及과 같다.
역주32 禍之長也玆萃 : 禍가 커져서(화가 화를 불러) 점점 더 많이 모이게 됨. 玆는 점점 불어남. 滋와 같다. 萃는 모임.
역주33 足之於地也踐 雖踐 恃其所不蹍 而後 善博也 : 사람의 발이 땅을 직접 밟는 부분은 협소하지만 직접 밟지 않은 땅을 믿은 뒤라야 넓게 걸어 다닐 수 있음. 成玄英은 踐과 蹍은 모두 ‘밟는다’는 뜻이라 했는데 兪樾은 ‘淺의 잘못’이라고 했다. 글자의 모양과 소리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혼용된 듯하다. 바로 뒤의 ‘人之知也少 雖少’라는 구절을 참고할 때 둘 다 淺자가 되어야 한다는 兪樾의 견해가 옳은 듯하지만 踐이 되든 淺이 되든 해석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따질 것이 없다.
역주34 恃其所不知 而後 知天之所謂也 : 알지 못하는 바를 믿은 뒤라야 자연[天]이 가르치는 진리를 알 수 있음. 사람이 밟지 않은 땅을 믿은 뒤라야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의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하면 알고 있는 것조차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역주35 大一 : 혼돈 상태인 道를 지칭한다. 陸西星은 “혼륜하여 아직 판별되지 않음을 말한다[渾淪未判之謂也].”고 풀이했다.
역주36 大陰 : 고요한 상태. 大一 이후의 고요한 상태를 지칭한다. 陸西星은 “大陰이란 지극히 고요하여 감응이 없음을 말함이다[大陰者 至靜無感之謂也].”라고 풀이했다.
역주37 大目 : 커다란 조목. 大陰 이후에 만물이 움직여서 여러 가지 명칭이 있게 된 상태를 말한다.
역주38 大均 : 大目이 있게 된 뒤에 천지가 만물을 차별 없이 고르게 화육하는 것을 이른 말. 전혀 차별함이 없이 고르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大均이라 한 것이다.
역주39 大方 : 大均 이후에 만물이 천지 사이에 가득한 상태를 지칭한다(方勇․陸永品).
역주40 大信 : 만물에 구체적인 실질이 있는 것을 일컬음이다. 信은 實의 뜻(方勇․陸永品).
역주41 大定 : 만물에 각각 올바른 위치, 분수가 있게 된 것을 말함이다. 胡文英은 “大定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음이다[大定 不出其位].”라고 풀이했다.
역주42 盡有天 循有照 冥有樞 始有彼 : 이 일곱 가지를 극진히 하면 天道가 현현하고, 天(自然)을 따르면 밝게 비추는 지혜가 있게 되고, 지혜가 작용하지 않는 데에서 冥合하면 樞要가 있게 되고, 우주의 시원에 저 道가 있게 됨. 冥有樞는 冥合하면 樞要가 있게 된다는 뜻으로 冥合은 아무 말 없이 뜻이 서로 부합함을 말한다.
역주43 頡滑有實 古今不代 而不可以虧 : 〈道는〉 위에 있다가 아래에 있다가 또 이리 변하고 저리 돌아서 붙잡을 수 없지만 實在하는 것이며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변함없이 존속해서 훼손할 수 없음. 頡은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모습이고, 滑은 이리저리 유동하는 모양이다. 陸西星은 “頡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함이고 滑은 이리저리 흘러다님이다[頡 謂升降上下 滑 謂流動旋轉].”라고 풀이했다.
역주44 可不謂有大揚搉乎 闔不亦問是已 : 세계를 크게 싸안은 커다란 테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어찌하여 또한 이것(道)을 물어보지 않는고? 大揚搉은 커다란 테두리. 곧 道를 말한다. 闔은 盍의 가차자. ‘어찌~하지 않는가(何不)’라는 뜻이다.
역주45 以不惑解惑 復於不惑 是尙大不惑 : 미혹되지 않은 밝은 知로 미혹을 풀어서 미혹되지 않은 경지로 돌아가면 이것이 크게 미혹되지 않은 경지에 가까울 것임. 본래 미혹되지 않은 밝은 본성으로 미혹을 풀어서 본성으로 돌아가면 크게 미혹되지 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尙은 ‘~에 가깝다’는 뜻. 林希逸은 “尙은 가까움이다[尙 庶幾也].”라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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