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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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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하야 而語仁義한대
공자가 노담을 만나 인의仁義를 이야기하였다.
老聃曰
노담이 말했다.
하면 則天地四方 易位矣 리니
“무릇 키질하다 날린 겨가 눈에 들어가게 되면 천지 사방이 자리가 뒤바뀌어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모기나 등에가 살을 물면 밤새 잠들지 못하지요.
하야하나니 亂莫大焉이니라
인의仁義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자비하게 해독을 끼쳐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니 천하를 어지럽힘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소박함을 잃지 않도록 하려면 당신 또한 바람 부는 대로 따라 움직이며 자연自然을 잘 잡고 서 있어야 할 터인데 또 어찌하여 억지로 애쓰면서 마치 큰 북을 짊어지고 북소리를 울려대면서 집 나간 자식을 찾는 것처럼 소동을 벌이시나요.
무릇 백조는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검으니, 생득적生得的흑백黑白에 대하여는 새삼 검다 희다 떠들어 댈 것이 없으며, 명예라는 껍데기[外形]는 새삼 널리 알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오.
泉涸커든 魚 相與處於陸하야 相呴以濕하며 相濡以沫하나니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물 마른 진흙땅 위에서 서로 습기를 뿜어내며 서로 거품으로 적셔 주지요.
하지만 그것은 큰 강 넓은 호수에서 〈자유롭게 물 마시며〉 서로를 잊고 지내느니만 못한 것이오.”
孔子 見老聃하고하야 三日 하신대 弟子 問曰
공자가 노담을 만나 보고 돌아와 3일 동안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는데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다.
夫子 見老聃하사 잇고
“선생님께서는 노담을 만나 보시고 무엇을 가지고 그를 바로잡아 주셨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여기에서 용을 보았다.
그 용은 가 합치면 형체를 이루고 가 흩어지면 아름다운 문채를 이루어 구름을 타고 음양이기陰陽二氣 사이를 마음껏 날아다닌다네.
이라 又何規老聃哉리오
나는 〈그걸 보고〉 입을 벌린 채 다시 다물지를 못했는데 내가 또 어떻게 노담을 바로잡아 줄 수 있었겠느냐.”
子貢曰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 가운데에는 참으로 신주神主처럼 조용히 있다가 용처럼 변환 자재하게 출현하며, 우레와 같은 큰 소리를 내다가 깊은 연못처럼 침묵을 지켜 발동發動이 천지와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요?
저도 그런 분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으로 見老聃한대
마침내 공자의 소개로 노담을 뵈었다.
老聃 方將倨堂而應微하야
노담이 그때 막 마루 한가운데에 걸터앉아 있다가 〈자공의 인사에〉 가느다란 소리로 응답했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 늙었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나를 가르치려 하는가.”
子貢曰
자공이 말했다.
“저 삼황오제가 천하를 다스린 방법은 같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세상에 명성을 떨친 것은 같습니다.
而先生 獨以爲非聖人 如何哉
그런데 선생께서는 유독 그들을 성인이 아니라고 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老聃曰
노담이 말했다.
小子
“젊은 친구여!
少進하라
이쪽으로 가까이 오라.
何以謂不同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삼황오제의 치세법이 같지 않다고 하는가?”
對曰
자공이 대답했다.
하야시늘 하고 文王 順紂而不敢逆하야늘 武王 逆紂而不肯順할새 曰不 同이라하노라
에게 천자의 지위를 물려주고 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치수治水인력人力을 사용해서 천하의 를 일으키고 무력武力을 사용해서 하걸夏桀방벌放伐하고 문왕文王주왕紂王에게 공순恭順하고 감히 반역하지 아니하였는데, 무왕武王주왕紂王에게 반역하여 그에게 기꺼이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까닭에 같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老聃曰
노담이 말했다.
小子
“젊은 친구여!
少進하라
조금 더 가까이 오라.
余 語汝之治天下호리라
내가 그대에게 삼황오제가 천하를 다스린 진상眞相을 말해 주겠노라.
그 옛날 황제黃帝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차별 없이 하나로 통일했는지라 백성들 중에 자기 어버이가 죽었는데 하지 않는 자가 있어도 당시의 백성(사람)들은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을 가까운 사람을 친애하도록 하였다.
民有爲其親하야 하니라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자기 어버이를 위해, 자기 어버이를 죽인 자를 죽이는 자가 있어도 백성들이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이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에게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임산부가 10개월 만에 자식을 낳으며, 태어난 아이는 겨우 5개월 만에 말을 할 줄 알게 되어 웃을 줄 아는 데 이르지 아니하고서도 벌써 낯을 가리게 되었으니 이렇게 하여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요절하는 이가 생기게 되었다.
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켜서 사람들이 이기심을 갖게 되고 무기를 사용하는 일까지 정당하게 여겼으며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하여 자기 자신이 천하에서 제일 근본이 되는 존재라고 여기고서 잘난 체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천하가 크게 놀라 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 일을 시작했던 때에는 그래도 도리道理에 합당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부녀자들의 시끄러운 다툼이 되고 말았으니 여기에 무슨 말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삼황오제가 천하를 다스린 진상眞相을 말해 주겠노라.
名曰治之 而亂莫甚焉하니라
명목은 다스렸다고 하지만 어지러움이 그보다 심함이 없었다.
삼황의 지혜는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과 어긋나며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와 어긋나며 중간으로는 사계절의 운행과 동떨어져 그 지혜가 여채蠣蠆(전갈)의 꼬리보다 무자비한지라 작은 벌레들까지도 본성本性 그대로의 생명을 온전히 다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성인이라고 자부하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其無恥也
그 부끄러워할 줄 모름이여.”
子貢 立不安이러라
자공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하여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없었다.
역주
역주1 孔子見老聃 : 공자가 노담을 만남. 見자의 음은 제5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 공자가 노자를 만나 禮를 물은 이야기에 대한 해설은 池田知久의 註解가 상세하다. 그의 주해의 說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禮를 물었다는 기록은 《史記》의 〈孔子世家〉와 〈老子列傳〉에 보인다. 이후 이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어 《禮記》 〈曾子問〉편과 같은 구체적인 서술도 창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책 《莊子》에 보이는 것처럼 《史記》에 선행하는 古文獻 중에 나타난 공자와 노자의 만남에서 禮에 관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戰國策》 〈楚策〉의 ‘노래자가 공자에게 군주를 섬기는 것에 대해 가르쳤다[老萊子之敎孔子事君].’라고 한 기록도 禮에 관한 기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池田知久는 이상과 같은 기록을 근거로 개략적이나마 司馬遷이 儒家와 道家를 종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종래 주로 道家의 입장에서 공자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져 왔던 설화의 軌道를 修正하여 禮에 통달했다는 식으로 老子를 儒敎化함으로써 兩者의 관계를 平衡되게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주2 播穅眯目 : 키질하다 날린 겨가 눈에 들어감. 播는 簸의 가차자로 키를 ‘까부르다’는 뜻. 馬叙倫이 “簸는 쌀알을 날려 겨를 제거하는 것이다[簸 揚米去穅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랐다. 眯는 《字林》에 “이물질이 눈에 들어가 병이 됨이다[物入眼爲病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3 蚊虻噆膚 則通昔不寐矣 : 모기나 등에가 살을 물면 밤새 잠들지 못함. 蚊은 모기. 虻은 등에. 噆은 깨물다, 문다는 뜻. 司馬彪가 “깨묾이다[齧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昔은 陸德明이 “밤이다[夜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夕으로 표기된 판본(王叔岷)과 인용문이 있으며(馬叙倫, 王叔岷), 宵 또는 夜로 표기된 인용문도 있다(王叔岷). 王念孫은 《春秋穀梁傳》에 ‘夜’를 昔으로 표기한 예를 들어 여기의 ‘昔’을 夕의 假借字라고 주장했는데, 昔者→夕者→夜者로 풀이하여 ‘밤중에’라는 뜻으로 보았다. 이 외에 林希逸도 “昔은 곧 夕이다. 《春秋左氏傳》에 머물게 되면 하룻밤 동안의 호위를 갖추었다[昔 卽夕也 左傳曰 居則備一昔之衛].”라고 했다고 고증했으며, 郭慶藩 또한 “살펴보건대 昔은 夕과 같으니 通昔은 通宵와 같다[案昔猶夕 通昔猶通宵也].”라고 고증했다. 〈齊物論〉편의 “昔者 莊周夢爲蝴蝶”에서도 같은 고증이 있었지만 〈齊物論〉의 경우에는 昔을 그대로 저녁으로 두어도 무난하지만 여기서는 夜의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寐자는 잠잘 매 字인데 이것이 寢으로 표기된 인용이 있다(王叔岷, 池田知久).
역주4 仁義憯然 : 인의는 무자비함. 憯은 ‘무자비하다, 慘酷하다’는 뜻. 宣穎은 慘과 같다고 풀이했다. 林希逸은 “憯然은 독한 상태이다[憯然 毒之狀也].”라고 풀이했는데 이는 《說文解字》에서 “慘은 독함이다[慘 毒也].”라고 풀이한 것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池田知久). 〈庚桑楚〉편에 “사람을 해치는 무기 가운데 제일 참혹한 것은 사람의 〈모진〉 마음이다[兵莫僭于志].”라고 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福永光司).
역주5 憒吾心 : 내 마음을 어지럽힘. 底本(《莊子集釋》)에는 憒자가 憤자로 표기되어 있으나 憒로 바로잡는다. 陸德明도 어떤 판본에는 憒로 표기되어 있다고 했는데, 모양이 비슷해서 誤字가 되었다는 王念孫의 지적처럼 憒가 옳다. 따라서 여기서도 憒로 고침. 《說文解字》에서는 “憒는 어지러움이다[憒 亂也].”라고 풀이했다(馬叙倫).
역주6 吾子使天下無失其朴 : 당신이 만일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소박함을 잃지 않도록 하려면. 吾子는 그대, 당신의 뜻. 그런데 이 이하의 몇 구절은 〈天道〉편 제7장에 나오는 “夫子若欲使天下 無失其牧乎인댄”으로 시작되는 문장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그 뒤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池田知久). 〈天道〉편에서는 朴이 牧으로 되어 있어 이 牧의 해석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설이 있다. 하나는 여기 〈天運〉편의 이 句와 마찬가지로 읽기 위해 牧을 朴의 가차자로 보아 “그대가 만일 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순박함을 잃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면”으로 읽을 수도 있고, 牧자의 뜻을 그대로 살려 “그대가 만일 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길러짐[牧]을 잃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면(즉 天下 모든 사람들이 生을 충분히 享受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면)” 이라고 읽기도 한다.
역주7 放風而動 : 바람 부는 대로 따라 움직임. 司馬彪는 “放은 따름이니 무위의 바람에 따라 움직임이다[放依也 依無爲之風而動也].”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林希逸은 “바람을 따라 순리대로 변화함이다[放風 順化也].”라고 풀이했고, 王敔는 “자연의 바람에 따름이다[依風之自然].”라고 풀이한 것도 거의 같은 견해이다. 王叔岷은 “바람은 풍속과 같다[風猶俗也].”라고 풀이했는데 적당치 않은 견해이다(池田知久). 放이 따른다는 뜻으로 쓰인 예는 《論語》 〈里仁〉편에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放於利而行 多怨].”로 한 데서도 볼 수 있다.
역주8 總德 : 자연의 덕을 잡음. 總은 붙잡는다는 뜻. 古逸叢書本에는 總자가 緫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글자이다. 郭象은 “잡음이다[秉].”라고 풀이했고, 林希逸 또한 “붙잡음이다[執也].”라고 풀이했다.
역주9 又奚傑然 若負建鼓 而求亡子者邪 : 또 어찌하여 억지로 애쓰면서 마치 큰 북을 짊어지고 북소리를 울려대면서 집 나간 자식을 찾는 것처럼 소동을 벌이시나요. 池田知久는, 唐寫本과 趙諫議本,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張君房본에는 傑然이 傑傑然으로 표기되어 있고, 武延緖, 馬叙倫, 于省吾, 劉文典, 王叔岷, 楊明照 등이 또 이를 근거로 傑傑然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經典釋文》과 成玄英 疏를 따라 그대로 둔다고 하고 있다. 傑然은 억지로 애쓰는 모양. 成玄英이 “힘쓰는 모양이다[用力貌].”라고 풀이한 것이 자연스럽다. 負는 북을 등에 짊어짐. 建鼓는 북을 친다는 뜻. 成玄英이 “建은 침이다[建 擊].”라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宣穎은 “建鼓는 큰 북이다[建鼓 大鼓也].”라고 풀이했는데 이 해석을 따른다. 林希逸이 “세워 놓은 북이다[言所建之鼓也].”라고 풀이한 것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만약 唐寫本과 趙諫議本, 張君房本 등의 표기를 따라 傑然을 傑傑然으로 표기하고 또 傑傑然의 뜻을 林希逸이 自高之貌로 풀이한 것을 채택하고, 아울러 劉師培와 王叔岷, 福永光司, 金谷治 등의 견해를 따라 揭仁義를 보충하면 “又奚傑傑然 揭仁義 若負建鼓 而求亡子者邪”가 되고 번역 또한 “어찌하여 잘난 체하면서 인의를 내걸고 마치 큰 북을 짊어지고 북소리를 울려대면서 집나간(도망간) 자식을 찾는 것처럼 소동을 벌이시나.”로 해야 한다.
역주10 鵠 不日浴而白 : 백조는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흼. 鵠은 흰 새. 陸德明은 鶴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했고, 唐寫本에는 鶴으로 표기한 인용문도 있다(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池田知久).
역주11 烏 不日黔而黑 :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검음. 黔은 ‘검은 칠을 하다’는 뜻. 司馬彪는 “검은색이다[黑也].”라고 풀이했는데 成玄英이 “검은 물을 들이는 것을 黔이라 한다[染緇曰黔].”라고 한 것이 정확하다. 한편 武延緖는 黕과 통한다고 했는데 같은 뜻이다.
역주12 黑白之朴 不足以爲辯 : 흑백의 본바탕은 그것을 검다 희다 떠들어 댈 것도 없다.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백조가〉 희고 〈까마귀가〉 검은 것은 生得的인 것이니, 生得的인 흑백을 새삼 검다 희다 떠들어 댈 것이 없다는 뜻이다. 朴은 본바탕, 生得的인 것을 말한다. 辯은 成玄英이 “이기고 짐을 가림이다[別其勝負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승부를 가릴 듯이 떠들어 댐을 말한다.
역주13 名譽之觀 不足以爲廣 : 명예라는 껍데기는 새삼 널리 알릴 만한 가치가 없음. 觀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껍질[外形]. 武延緖, 馬叙倫, 福永光司, 赤塚忠 등은 司馬彪본에 ‘讙’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觀을 讙으로 보고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옳지 않다.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文章之觀”이란 유사한 표현이 〈逍遙遊〉편 제3장에 이미 나온 바 있다. 廣은 넓게 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널리 알리다, 널리 퍼뜨리다’는 뜻.
역주14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若相忘於江湖 :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물 마른 진흙땅 위에서 서로 습기를 뿜어내며 서로 거품으로 적셔 주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강 넓은 호수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물 마시며〉 서로를 잊고 지내느니만 못할 것이다. 涸은 마르다, 다하다[竭]는 뜻이고, 呴는 토해 낸다는 뜻. 呴는 吻(문:입맞춤)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大宗師〉편 제1장에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로 같은 문장이 나온다. 특히 ‘相忘於江湖’라는 표현은 〈大宗師〉편에만 두 차례가 나온다. 그런데 〈大宗師〉편의 경우는 堯임금을 찬양하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둘 다 잊고 道와 일체가 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인 반면 여기서는 넓은 강물이나 호수의 넉넉한 물 속에서 서로를 잊고 자유롭게 놀지를 못하고 물 마른 진흙땅 위에서 물고기들이 구차스럽게 서로 적셔 주는 그 부질없음을 仁義의 부질없음에 비유하고 있다. ‘不若相忘於江湖’의 내용은 같지만 비유하고자 하는 뜻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역주15 不談 : 대화를 나누지 않음. 談은 대화. 陸德明은 不談이 不言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했다.
역주16 亦將何規哉 : 무엇을 가지고 그를 바로잡아 주셨습니까. 將은 ‘가지고’의 뜻. 宣穎이 ‘以’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規는 바로잡아 줌. 林希逸이 “잘못된 것을 말림이다[諫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成玄英은 “바로잡고 가르쳐 줌이다[規誨].”라고 풀이했고, 羅勉道도 “바로잡아 줌이다[正也].”라고 풀이했다. 王敔는 “그를 모방함이다[模倣之].”라고 풀이했고, 福永光司는 “상대를 평가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적절치 않다(池田知久).
역주17 孔子曰 : 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池田知久 등은 이 아래에 數十字의 脫文이 있는 것 같다고 추정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훨씬 앞서 王應麟도 《太平御覽》과 現行本의 異同에 대해 언급했다(池田知久).
역주18 吾乃今於是乎見龍 :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여기에서 용을 보았다. 《史記》 〈老子列傳〉은 이하의 기술을 이용하여 “용에 이르러서는 나는 알 수가 없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 보았더니 그는 용과 같았다[至於龍吾不能知 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는 식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인물을 용에 비유한 경우는 《詩經》에도 보인다(赤塚忠).
역주19 龍合而成體 散而成章 : 용은 氣가 합치면 형체를 이루고 氣가 흩어지면 아름다운 모양을 이룸. 合과 散의 주어는 氣이다(赤塚忠). 〈知北遊〉편의 “사람의 탄생은 기가 모이는 것이다. 기가 모이면 태어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는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세계의 質料因이라고 할 수 있는 氣와 그 合散에 의한 만물의 생성 소멸을 龍(老聃)에 비유한 표현이다(池田知久). 散而成章의 成章은 《論語》 〈公冶長〉편의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다[斐然成章].”를 참조할 것(福永光司). 章은 文彩의 뜻.
역주20 乘雲氣而養乎陰陽 : 구름을 타고 陰陽二氣 사이를 마음껏 날아다님. 乘자의 아래에 乎자가 있는 판본도 있다. 養은 ‘날아다닌다’는 뜻. 劉師培가 “날갯짓 함이다[翔].”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逍遙遊〉편 제3장의 神人과 〈齊物論〉편 제3장의 至人의 묘사에 유사한 표현이 보인다.
역주21 口張而不能嗋 : 입을 벌린 채 다시 다물지를 못함. 張은 열다는 뜻. 成玄英이 ‘開’로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嗋은 입을 다묾. 噏으로 표기된 인용문이 있고(馬叙倫, 王叔岷), 翕으로 표기된 인용문(王叔岷)도 있으나 세 글자는 통용하기 때문에 현행본의 嗋자를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爾雅》 〈釋詁〉편에 “翕은 합함이다[翕 合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 또한 “합함이다[合也].”라고 풀이했다. 또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江南古藏本에는 이 아래에 “혀를 높이 들고 말하지 못한다[舌擧而不能訒].”는 한 구절이 있다. 또 〈秋水〉편 제4장에도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를 높이 들고 내리지 못한다[口呿而不合 舌擧而不下].”는 표현이 나오는데 모두 상대의 위대함에 몹시 놀라는 모양이다. 한편 池田知久에 의하면, 奚侗, 馬叙倫, 劉文典, 王叔岷 등은 江南古藏本과 〈秋水〉편을 근거로 ‘舌擧而不能訒’ 여섯 글자를 보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原文 수정에 신중을 期하자는 의견(池田知久)에 따라 여기서도 우선 현행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였다.
역주22 然則人 :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 가운데에는.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江南古藏本에는 人자의 위에 至자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근거로 劉文典, 王叔岷 등은 至자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역시 그대로 둔다(池田知久).
역주23 尸居而龍見 雷聲而淵黙 : 神主처럼 조용히 있다가 용처럼 변환 자재하게 출현하며, 우레와 같은 큰 소리를 내다가 깊은 연못처럼 침묵을 지킴. 〈在宥〉편 제1장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나온다(陸樹芝). 尸는 ‘신주’인데, 尸童은 제사 때 신주 대신으로 그 자리에 앉히던 어린아이를 말한다. 이 문구에서는 尸와 龍, 雷와 淵이 모두 副詞的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見은 음이 ‘현’이다.
역주24 固有……發動如天地者乎 : 참으로……發動이 천지와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요? 乎는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張君房본에는 哉자로 표기되어 있으며, 또 敦煌본에는 乎哉로 되어 있다(池田知久).
역주25 賜亦可得而觀乎 : 저도 또한 그런 분을 可히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 분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는 뜻. 陸德明은 “어떤 판본에는 亦자가 也자로 표기되어 있다.”라고 했는데(池田知久), 그러면 賜亦은 賜也가 되어 也는 이름 아래 붙은 助字에 불과하다. 賜는 공자 제자 子貢의 이름. 姓은 端木이다.
역주26 以孔子聲 : 공자의 소개로. 羅勉道는 “聲은 일컬음이다[聲 稱也].”라고 풀이했는데 공자를 일컬으면서 노자를 찾았다는 뜻이다. 또 王敔는 “聲은 이름을 소개함이다[聲 通名也].”라고 했는데 적절한 풀이이다. 成玄英은 “공자의 가르침으로[以孔子聲敎].”라고 풀이했는데 다소 무리한 견해이다(池田知久).
역주27 方將倨堂而應微曰 : 막 마루 한가운데에 걸터앉아 있다가 〈자공의 인사에〉 가느다란 소리로 응답함. 倨는 걸터앉음. 踞로 표기된 판본이 있으나(寺岡龍含) 오류이다(池田知久). 成玄英이 “걸터앉음이다[踞也].”라고 풀이한 것이 정확하다(池田知久). 堂은 마루. 馬叙倫이 침상을 뜻하는 牀의 가차자라 한 것은 잘못이고, 赤塚忠이 “倨堂은 禮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이다.”라고 풀이한 것은 참고할 만하다(池田知久). 應微는 가느다란 소리로 응답함. 成玄英이 應자를 위에 붙이고 微曰 두 글자를 따로 끊은 것은 적당치 않고, 林希逸이 “문답하는 소리가 아주 가늚을 말한 것이다[言其問答之聲甚微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池田知久).
역주28 予年運而往矣 :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 늙었음. 運은 行과 같은 뜻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뜻, 곧 늙었다는 뜻이다. 王先謙은 行으로 풀이했고, 成玄英는 “때가 됨이다[時也].”라고 풀이했다. 往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뜻. 予는 余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역주29 子將何以戒我乎 : 그대가 무엇으로 나를 가르치려 하는가. 戒는 경계함. 馬叙倫은 誡를 생략한 글자라 했다(池田知久).
역주30 三王五帝之治天下不同 : 三皇五帝가 천하를 다스린 방법은 같지 않았으나. 三王은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는 三皇으로 되어 있어, ‘삼황’으로 번역하였다. 《莊子闕誤》에 인용된 江南古藏本에는 天下의 아래에 也자가 있다.
역주31 其係聲名一也 : 그들 모두 세상에 명성을 떨친 것은 마찬가지임. 係聲名은 명성이 걸려 있다, 명성에 연계되어 있다는 뜻으로 명성을 떨치고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敦煌본에는 係聲名에서 聲자가 없으며 대의는 宣穎이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이 떠받들고 칭송한다[古今同推稱之].”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고, 비슷한 표현으로 〈人間世〉편 제1장에 ‘禹舜之所紐也’라고 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池田知久).
역주32 堯授舜 舜授禹 : 堯가 舜에게 천자의 지위를 물려주고 舜은 禹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줌. 여기는 마땅히 ‘堯與而舜受’(敦煌본)로 되어 있어야 할 것이, 〈天地〉편 제7장에 ‘堯授舜 舜授禹’로 되어 있는 것에 끌려 그대로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池田知久의 주석에 보이는 于省吾, 王叔岷, 楊明照의 說이 그것인데, 지금은 池田知久의 말대로 우선 그대로 두고 번역하였다.
역주33 禹用力 : 禹가 힘을 씀. 곧 禹가 治水에 人力을 사용했다는 뜻. 陸樹芝가 “禹임금을 두고 힘을 썼다고 한 것은 아마도 묵가의 주장일 것이다[以禹爲用力 蓋卽墨氏之說].”라고 풀이한 것이 正答일 것이다(池田知久). ‘堯授舜 舜授禹’는 자식이 아닌 賢者에게 물려주는 禪讓이었으나 禹의 경우는 民力을 사용해서 治水에 성공한 대신 天子 자리의 계승은 자식에게 계승하는 ‘傳子’이어서, 여기서 ‘傳賢’의 전통이 깨졌다.
역주34 湯用兵 : 殷의 湯王이 무력을 사용해서 夏의 桀王을 放伐한 것을 말함. 兵은 武力. 여기에서 武力으로 易姓革命하는 전통이 생겼다.
역주35 三皇五帝 : 底本(《莊子集釋》)에 있는 그대로 三皇五帝로 한다. 이 三皇이 世德堂本 등에는 三王으로 되어 있어 池田知久는 三王을 三代의 聖王으로 보고 있으나, 福永光司의 번역에서는 원문은 三王으로 쓰고서도 번역은 三皇으로 하고 있는 등 異說이 제법 있다. 여기서는 원문‧번역 양쪽에서 모두 三皇으로 보기로 한다.
역주36 黃帝之治天下 :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 陳景元의 《莊子闕誤》에서 인용한 江南古藏本에는 黃자의 위에 昔자가 붙어 있다. 또 天下 아래에 也자가 붙어 ‘黃帝之治天下也’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王叔岷). 여기에서 黃帝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는데, 우리 人類의 타락이 바로 이 황제에서 시작되었다고 老聃은 본 것이다.
역주37 使民心一 民有其親死不哭 而民不非也 : 백성들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차별 없이 하나로 통일했는지라 백성들 중에 자기 어버이가 죽었는데 哭하지 않는 자가 있어도 당시의 백성들은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墨家의 억지 박애주의를 빗대서 비판한 내용으로 백성들이 자기의 어버이와 길 가는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게 되어 결국에는 어버이가 죽었을 때 길 가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곡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 郭象은 “만약 비난하게 되면 억지로 곡하게 될 것이다[若非之則强哭].”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삼황이 도를 베풀자 인심이 순일해져서 자기 어버이만 친애하거나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어버이가 죽었는데 곡하지 않아도 세속에서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三皇行道 人心淳一 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故親死不哭而世俗不非].”라고 하여 황제의 치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판단했고 이 입장에 서서 풀이하는 주석가들도 많이 있지만 다소 무리한 견해이다. 물론 《莊子》에서는 대체로 다른 군왕에 비해 황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 문장에서도 다른 시대에 비해 황제의 시대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길 가는 사람을 자기 어버이처럼 사랑하는 박애의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라 자기 어버이를 길 가는 사람처럼 방치하는 억지 행위를 정당화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문장의 후반부에 황제의 시대까지 통틀어서 삼황오제를 “명목은 다스렸다고 하지만 어지러움이 그보다 심함이 없었다[名曰治之 而亂莫甚焉].”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장자가 황제를 포함한 삼황오제의 시대를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역주38 堯之治天下 使民心親 : 堯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을 가까운 사람을 친애하도록 함. 差別愛의 情緖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在宥〉편 제1장에서 “옛날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즐기게 했다[昔堯之治天下也 使天下欣欣焉 人樂其性].”라고 한 내용과 〈天道〉편 제6장 전체의 기술과 유사하다(福永光司).
역주39 殺其殺(살기살) 而民不非也 : 자기 어버이를 죽인 자를 죽이는 자가 있어도 백성들이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음. 劉文典, 王孝魚는 唐寫本에 殺其服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王叔岷). 또 寺岡龍含은 唐寫本에는 殺을 煞로 표기하여 其殺 두 글자가 없다고 했고, 王叔岷은 〈天道〉편 제5장의 “隆殺之服”에 근거하여 殺其服이 옳다고 하나 근거가 박약하다(池田知久). 殺其殺을, 이처럼 喪服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는 成玄英, 林希逸, 褚伯秀, 羅勉道, 馬叙倫 , 福永光司, 金谷治 등을 들 수 있는데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이 註解는 근거가 박약하여 취하지 않기로 한다. 참고로 이 주석을 따른 번역문을 소개하면 “어버이의 喪에 服하기 위해 〈상복에〉 친소의 차등을 설정하는 자가 있어도 백성(사람)들은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福永光司)가 되는데, 이때의 위의 殺는 ‘던다, 차등을 둔다’이고 아래의 殺는 縗(최, 喪服)의 가차자이다. 그런데 郭象은 앞의 殺는 낮춤이다[降也]라고 보고, 뒤의 殺는 관계가 소원한 사람으로 보았다. 이 주석은 陸長庚, 宣穎, 陸樹芝, 李勉, 池田知久 등이 지지하고 安炳周도 일단은 이 주석에 동의하였으나, 田好根의 생각을 따라 이 주석을 따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단 이 郭象의 주를 따른 해석을 소개하면 “〈백성들 가운데 자기 어버이를 위하여, 즉 자기 어버이에게 특별히 잘하기 위하여〉 疏遠한 자에게 소홀히 대하는 자가 있어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가 된다. 殺其殺의 앞의 殺는 소홀히 대한다는 동사이고, 뒤의 殺는 소원한 사람이라는 명사가 된다. 그런데 여기의 글의 내용은, 黃帝의 경우 자기 어버이와 다른 사람을 극단적으로 똑같이 여겨서 자기 어버이가 죽어도 哭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행위인 것처럼 받아들여진 반면, 堯임금 시대에는 자기 어버이만을 극단적으로 친애하도록 하여 자기 어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하든 정당하게 받아들여졌음을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殺其殺의 뒤의 殺은 ‘자기 어버이를 죽인 자’이고 앞의 殺은 그런 자를 죽인다는 동사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곧 자기 어버이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조차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親親이 강조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보복을 정당시하는 이런 분위기는 《孟子》 〈盡心 下〉에서 “내 이제야 남의 어버이 죽이는 일의 중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도 또한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도 또한 내 형을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父兄을 죽인 것이 아니지만 직접 죽인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吾今而後知殺人親之重也 殺人之父 人亦殺其父 殺人之兄 人亦殺其兄 然則非自殺之也 一間耳].”라고 한 맹자의 말과 《禮記》 〈曲禮 上〉에서 “어버이의 원수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지 않으며 형제의 원수는 병기를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병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원수를 만나면〉 바로 찔러 죽인다[父之讎 弗與共戴天 兄弟之讎 不反兵].”라고 한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해석을 취해서 앞의 句 ‘民有爲其親’에 연결시켜 해석하면 “백성들 가운데 자기 어버이〈를 해친 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 자기 어버이 죽인 자를 죽이는 자가 있어도 백성(사람)들이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가 된다. ‘民’은 때로는 ‘人’과 통용된다.
역주40 舜之治天下使民心競 : 舜이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에게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함. 〈騈拇〉편 제4장에서 “순임금이 인의를 내세워 천하를 어지럽힌 때부터 천하 사람들이 인의로 달려가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自虞氏招仁義以撓天下也 天下莫不奔命於仁義].”라고 한 내용과 같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陸長庚은 “순임금은 어진 사람을 숭상했기 떄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게 하였다[虞帝尙賢 故使民爭].”라고 하여 《老子》 제3장에 입각하여 풀이하고 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競은 다툰다는 뜻. 陸德明은 ‘爭’으로 풀이했다. 武延緖가 ‘彊’의 뜻이라고 한 것은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부적당하다.
역주41 民孕婦十月生子 : 임산부가 10개월 만에 자식을 낳음. 馬叙倫은 民을 끼어든 글자로 보았고 孕婦를 婦孕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池田知久). 十月의 아래에 而가 있는 인용문이 있으며(劉文典, 王叔岷), 劉文典은 而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池田知久) 뒤의 五月而能言 등에 而자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만 꼭 맞출 필요는 없다.
역주42 子生五月而能言 : 태어난 아이는 겨우 5개월 만에 말을 할 줄 알게 됨. 于鬯은 言이 笑의 뜻이라 했지만(池田知久) 그렇게 하면 뒤의 不至乎孩而始誰와 상충되므로 옳지 않다.
역주43 不至乎孩而始誰 : 웃을 줄 아는 데 이르지 아니하고서도 벌써 낯을 가리게 됨. 孩는 웃는다는 뜻. 陸德明이 孩를 “《說文解字》에서는 웃는 것이라 했다[說文云 笑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林希逸은 孩를 《孟子》 〈盡心 上〉에 나오는 ‘웃을 줄 알고 손잡고 다닐 만한 어린아이[孩提之童]’로 보고 “아직 웃거나 손잡고 다닐 만한 때에 이르지 않음이다[未至於孩提].”라고 풀이했으며, 또 王敔는 “세 살 된 아이를 孩라 한다[兒三歲曰孩].”라고 풀이했는데, 池田知久는 林希逸의 해석은 그래도 可하나 王敔의 주석은 부적절하게 보고 있다. 林希逸은 始를 ‘早也’로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誰는 낯을 가린다는 뜻. 郭象은 “사람을 구분한다는 뜻이다[別人之意也].”라고 풀이했는데 이것이 옳다. 또 林希逸은 “물음이다……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물음이니 誰는 誰何(누구냐)와 같다[問也……問人爲誰也 誰猶誰何].”라고 했는데 이것도 ‘누구냐고 물을 줄 아는 것’을 ‘낯을 가릴 줄 안다.’ 또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와 비슷하게 이해하면 맞는 註解라 할 수 있으나 엄밀하게 보면 郭象 注가 더 정확하다.
역주44 禹之治天下 使民心變 : 禹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킴. 民心이 크게 악화됨을 말한다. 이 부분은 池田知久도 지적하고 있듯이, 〈天地〉편 제7장에서 “지금 당신은 賞을 내리고 罰을 주는데도 백성들은 오히려 不仁을 저지릅니다. 〈타고난 자연 그대로의〉 德이 이로부터 쇠퇴하고 〈인위적인〉 刑罰이 이로부터 확립되었으며, 후세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今子賞罰 而民且不仁 德自此衰 刑自此立 後世之亂 自此始矣].”라고 禹를 비판한 내용과 유사한 맥락이다. 다만 〈天地〉편이 堯舜과 禹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여기에서는 堯舜과 禹 모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變은 옛것을 바꾸었다는 뜻. 成玄英은 ‘禍變’이라고 풀이하여 變亂의 뜻으로 보았지만 그보다는 林希逸이 “옛것을 바꿈이다[變於古也].”라고 풀이한 것이 좋고, 陸長庚도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池田知久).
역주45 人有心而兵有順 : 사람들이 이기심을 갖게 되고 병기를 사용하는 일까지 정당하게 여김. 心은 사심, 곧 이기심을 말한다. 于省吾는 위 문장의 ‘使民心變’을 받는다고 하였으며, 成玄英은 心을 “유위하는 마음[有爲之心].”으로 풀이하였으며, 林希逸은 “사람들마다 사심을 갖게 되었다[人人各有私心也].”라고 풀이하였으며, 陸長庚은 “각자 기심을 갖게 되었다[各有機心].”라고 풀이하였다. 兵有順은 병기를 사용하는 것도 순리라고 여겼다는 뜻. 林希逸이 “무력을 사용하는 일까지 순리에 맞는 일이라고 여김이다[以用兵爲順事也].”라고 풀이했다.
역주46 殺盜非殺人 :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여김. 底本(《莊子集釋》)에서는, 郭慶藩이 非殺에서 絶句하고 있으나, 非殺人에서 절구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 ‘殺盜非殺人’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非殺에서 絶句하는 것은 본시 郭象도 그랬으나 孫詒讓, 武延緖, 馬叙倫, 阮毓崧, 劉文典, 王叔岷 등은 殺人까지도 絶句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다. 또 이 편의 作者가 墨子의 주장을 禹와 관계지어서 서술한 것은 《莊子》 〈天下〉편, 《淮南子》 〈要略訓〉편 등에 보이는 것처럼 墨家의 사상이 禹의 治道를 조술한 것이라는 이해가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실제로 《묵자》에 그런 내용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池田知久). 殺盜非殺人은 곧 도둑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 아니라고 여겨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역주47 自爲種而天下耳 : 자기 자신이 천하에서 제일 근본이 되는 존재라고 여기고서 잘난 체하기에 이름. 自爲種은 스스로 씨앗이라고 여김. 곧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여겼다는 뜻. 郭象이 “만물을 크게 齊一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따로 구별되었다[不能大齊萬物而人人自別].”라고 풀이한 이래 成玄英, 林希逸, 羅勉道, 陸長庚, 王敔, 林雲銘 등이 같은 견해를 제시하는 등, 郭象의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적절치 않다(池田知久). 李勉이 種을 ‘근본[本]’으로 보아 “스스로 근본이라 여김을 말함이니 곧 스스로 높임이다[謂自爲本 卽自尊].”라고 풀이한 것이 옳다(池田知久). 而天下耳의 而에 대하여 朱得之는 而자를 於자의 오류라 했고, 宣穎은 於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 두 說을 따르면 自爲種而天下耳는 ‘自爲種於天下耳’가 된다. 池田知久의 이 부분의 해석은 “스스로를 근본으로 여겨 내가 있고서 天下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면서도 李勉이나 宣穎의 ‘而二於’說은 잘못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이 명확해지려면 아무래도 朱得之나 宣穎의 설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福永光司는 郭象의 注와 王先謙이 “각자 당파를 만들었다[自爲黨類].”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멋대로 자기 黨派를 만들어 온 천하가 물들어 버렸다.”라고 해석하는 등 이 문구는 참으로 異說이 분분하다. 耳는 爾와 같다.
역주48 是以天下大駭儒墨皆起 : 이 때문에 천하가 크게 놀라 儒와 墨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남. 〈在宥〉편 제2장에 유사한 표현이 있다.
역주49 其作始有倫而今乎婦女 : 처음 일을 시작했던 黃帝 때에는 그래도 道理에 합당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부녀자들의 시끄러운 다툼이 되고 말았다. 作始의 始가 구체적으로 언제를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여기서는 이 모든 군왕들이 처음 시작할 때로 보고 번역하였다. 池田知久는 〈人間世〉편 제2장에서 “시작할 때에는 간단했던 일이 마칠 때에는 반드시 중대한 일이 되고 만다[其作始也簡 其將畢也必巨].”라고 한 내용과 유사하다고 했다. 倫은 ‘道理’. 郭象과 成玄英 모두 ‘理’로 풀이했다. ‘今乎婦女’는 〈外物〉편 제9장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시끄럽게 소리 내어 다툰다[婦姑勃].”라고 한 내용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朱得之는 “처첩의 도리가 아님이 없다[莫非妻妾之道矣].”라고 풀이했고, 王先謙은 “지금 행하는 것은 장부이면서 부녀자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今所行 丈夫而有婦女之道].”라고 풀이했는데 모두 적절한 견해이다. 한편 郭象, 成玄英, 林希逸, 羅勉道, 陸長庚, 林雲銘, 宣穎 등은 “혼인하는 일[婚姻之事].”이라고 풀이했지만 池田知久의 지적대로 적절치 않다.
역주50 余語汝三皇五帝之治天下 : 내가 그대에게 삼황오제가 천하를 다스린 眞相을 말해주겠노라. 敦煌본에는 五帝가 없다(寺岡龍含). 劉文典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池田知久).
역주51 上悖日月之明 下睽山川之精 中墮四時之施 其知憯於蠣蠆之尾 :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과 어긋나며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와 어긋나며 중간으로는 사계절의 운행과 동떨어져 그 지혜가 蠣蠆(전갈)의 꼬리보다 무자비함. 悖는 어긋난다, 反한다는 뜻이고, 睽도 어긋난다, 등돌린다는 뜻. 墮는 무너뜨린다, 질서를 파괴한다는 뜻이고, 四時之施의 施는 옮아간다는 移와 같은 뜻인데 여기서는 운행의 뜻이다. 憯은 참혹함. 成玄英은 “독함이다[毒也].”라고 풀이했고, 陸樹芝, 馬叙倫, 阮毓崧은 “참혹함[慘].”으로 풀이했다. 蠣蠆는 蠣자와 蠆자 모두 전갈이다. 林希逸은 “바로 벌 종류이니 그 꼬리에 독이 있다[卽蜂類也 其尾有毒].”라고 했는데 꼬리에 독이 있다는 것만 취하고 벌이라는 주장은 따르지 않는다. 知의 해독이 전갈 꼬리의 해독보다도 참혹하다는 뜻이다.
역주52 鮮規之獸 莫得安其性命之情者 : 작은 벌레들까지도 本性 그대로의 생명을 온전히 다할 수 없음. 鮮規之獸의 鮮規는 작은 벌레. 陸德明이 “어떤 사람은 작은 벌레라 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짐승이라 했다[一云 小蟲也 一云 小獸也].”라고 한 것을 따른다. 安은 편안히 지내면서 온전히 다한다는 뜻이고 性命之情은 자연의 본성의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本性 그대로의 생명으로 번역하였다. 〈在宥〉편 제1장에 이미 나왔다(福永光司).
역주53 不可恥乎 : 부끄럽지 아니한가. 王叔岷은 不자 아래에 亦자가 붙어 있는 인용문이 있다고 했다.
역주54 蹴蹴然 : 두려워하는 모양.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함. 蹴蹴은 成玄英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양이다[驚悚貌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蹴然은 〈德充符〉편 제2장과 〈大宗師〉편 제7장, 〈應帝王〉편 제4장에 이미 나왔다(池田知久).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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