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莊子(3)

장자(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장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夫子 有乎
其無有乎
光曜不得問而孰視其狀貌하니 窅然空然하야 러라
光曜曰
至矣
其孰能至此乎리오


광요光曜무유無有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있습니까?
아니면 있음도 없습니까?”
광요는 더 물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무유無有 선생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 모습은 멀고 텅 빈 듯하여 종일토록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들어보아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손으로 만져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광요光曜가 말했다.
“지극하구나.
그 누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가 있는 경지까지만 도달할 수 있고 조차 없는 경지에는 도달하여 무무無無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光曜問乎無有 : 光曜가 無有에게 물음. 光曜와 無有는 인명이지만 모두 허구의 인물이다. 成玄英은 “光曜는 볼 줄 아는 智이고 無有는 보이는 경계이다. 智는 비추어 살필 줄 알기 때문에 光曜라는 이름을 빌렸고 경계의 형체는 텅 비고 고요하기 때문에 無有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다[光曜者 是能視之智也 無有者 所觀之境也 智能照察 故假名光曜 境體空寂 故假名無有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 終日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 搏之而不得也 : 종일토록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들어보아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손으로 만져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음. 이 구절 또한 《老子》 제14장에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微라 한다[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라고 한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다.
역주3 予能有無矣而未能無無也 及爲無有矣 何從至此哉 : 나는 無가 있는 경지까지만 도달할 수 있고 無조차 없는 경지에는 도달하여 無無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能有無의 경지는 有無, 곧 없다고 함이 있는 것으로 無를 대상화한 표현으로 無가 ‘있는’ 경지이고 能無無의 경지는 없다고 하는 것조차도 없다는 것으로 無를 無로서 의식하는 것조차 없는 경지, 즉 無와 하나가 된 경지를 뜻한다. 한편 焦竑, 吳汝綸, 武延緖, 劉文典 등은 《淮南子》에 의거하여 無有를 無無로 고치고, 馬叙倫, 楊樹達, 王叔岷, 安東林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으나 옳지 않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