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而美者는 人與之鑑하나니 不告則不知其美於人也하리라
若知之하고 若不知之하며 若聞之오 若不聞之라도 其可喜也도 終無已며 人之好之도 亦無已하리니 性也라
聖人之愛人也도 人이 與之名하나니 不告 則不知其愛人也하리라
若知之오 若不知之하며 若聞之오 若不聞之라도 其愛人也終無已며 人之安之도 亦無已하리니 性也라
夫聖人은 未始有天하며 未始有人하며 未始有始하며 未始有物하니 與世偕行而不替하여 所行之備而不洫하나니 其合之也면 若之何리오
하야 爲之傅之
하야 하야 得其隨成
하고 爲
이어늘 하니
성인聖人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일에 통달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一體]을 두루 다 구명究明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줄 알지 못하니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명으로 돌아가 고요하게 있거나 성대하게 움직일 때 자연自然을 스승으로 삼아 그것을 따를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뒤따라가 〈성인聖人이다 뭐다 하고〉 이름 붙인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하는 일이 늘 어느 때고 멈추는 일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예를 들어〉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사람은 남이 그에게 거울을 주어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어보게 할 것이니 〈만일 남이 그의 아름다움을〉 일러주지 않으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혹 그것을 알거나 혹 그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혹 그것을 듣거나 듣지 못했건 간에 자기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이 그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가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니 만일 사람들이 그에게 일러주지 않으면 자기가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인聖人이 혹 그것을 알거나 혹 그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혹 그것을 듣거나 듣지 못했건 간에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끝내 그만둘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서 유랑하는 사람은〉 고국의 옛 국도國都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크게 기쁨이 일어날 것이니 비록 언덕이나 초목에 열에 아홉이 가려 조금만 보이더라도 오히려 크게 기쁨이 일어날 것인데 하물며 〈성城 안으로 들어가〉 옛날에 보던 것을 보고 옛날에 듣던 것을 듣는 경우이겠는가.
열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여러 사람 사이에 매달아놓은 것처럼 분명할 것이다.
옛날 제왕 염상씨冉相氏는 고리 가운데를 얻어서 만물의 생성 변화에 그대로 맡겨 사물과 더불어 끝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기일期日도 없고 때도 없이 함께 하였으니 매일매일 사물事物과 더불어 변화해 가는 자는 실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니 어찌 시험 삼아 이러한 경지에 몸을 두지 않을 것인가.
무릇 억지로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그것을 따라가려 하면 결국 자연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지라 외계의 사물과 함께 모두 희생되고 말 것이니 이런 생각으로 일을 하려 한다면 어찌 할 것인가.
무릇 성인聖人은 본시 자연(天)도 없고 인위도 없으며 시작도 없으며 사물의 존재도 따르지 않았으니 세상과 함께 추이推移하면서 포기하지 않아서 행동이 완비되어 한계가 없으니 그에게 부합하려 하면 어찌 할 것인가.
옛날 탕임금이 사어司御이자 문윤門尹이었던 등항登恒을 등용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아 따르기는 했지만 그에게 속박되지는 아니하여 만물의 생성 변화에 맡길 수 있었고 명칭을 부여하는 일을 맡아서 그 이름으로 인해 〈없는 게 오히려 나을〉 군더더기의 방법이 생겨나서 결국 이름과 방법 두 가지가 나타나게 되었다.
중니仲尼도 그것을 극진히 생각하여 남의 스승 노릇을 했다.
“하루하루를 제하면 일 년은 성립되지 않고 내면의 나(자아)가 없으면 외면의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