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故
로 丘山
은 積卑而爲高
하며 江河
는 合水而爲
하나니라
라 故
로 歲成
하며 五官殊職
하나 君不私
라 故
로 國治
하며 文武
를 大人
이 不賜
라 故
로 德備
하며 萬物殊理
하나 道不私
라 故
로 無名
하며 無名
이라 故
로 無爲
하니 無爲而無不爲
니라
에 百材皆度
하며 觀於大山
에 호니 此之謂丘里之言
이니라
是故로 天地者는 形之大者也요 陰陽者는 氣之大者也요 道者는 爲之公이니라
安危相易하며 禍福이 相生하며 緩急이 相摩하야 聚散이 以成하나니
隨序之相理와 橋運之相使 窮則反하고 終則始하나니 此物之所有라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향촌이란 열 개의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과 백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풍속을 형성하고 있는 집합체이다.
다른 것을 합하여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을 분산시켜 다른 것이 되니 지금 말[馬]의 백체百體를 각각 따로 지적하여 명명命名하면 말이 될 수 없겠지만 눈앞에 매어져 있는 말의 백체百體를 총체적으로 모아서 말하면 그것을 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이나 산은 낮은 토지가 쌓여서 높게 된 것이고, 장강長江과 황하黃河는 작은 물이 모여서 크게 된 것이고, 대인大人은 만물의 ‘사私’를 하나로 병합하여 공평하게 베푼 것이다.
그리하여 〈대인大人은〉 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들을 때 〈스스로의 마음속에〉 주관을 확립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는 않으며, 안에서 밖으로 말을 발출할 때 올바름을 지키지만 거부당하지는 않는다.
춘하추동의 사시四時는 한서寒暑의 기氣를 달리하나 자연[天]은 그중 어느 한 계절에만 혜택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일 년이 이루어지며, 나라의 다섯 관직은 각각 직무를 달리하나 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한 관직만을 사사로이 중시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문사文事[知]와 무사武事[力]는 각각 그 기능이 다르나 대인大人은 그 어느 하나에만 마음을 주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대인大人은〉 문무文武를 겸비하며, 만물은 각각 속성을 달리하나 도道는 그중 어느 하나만 사사로이 사랑하지 않는지라 그 까닭에 〈도道는〉 이름이 없으며, 이름이 없으므로 무위無爲하니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때에는 끝과 시작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의 추이推移가 있다.
그리하여 화禍와 복福은 유행반복流行反覆해서 나타나는지라 마음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맞는 경우도 있으며, 각자가 자기 생각을 쫓아 행동하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른지라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게 된다.
비유하자면 커다란 연못에 있는 여러 가지의 소재素材가 모두 그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인 것과 같고, 큰 산을 볼 때 나무와 돌이 똑같이 산을 이루는 기반인 것과 같으니 이 같은 것을 일러 향촌의 말[丘里之言]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것[丘里之言]을 도道라고 말해도 좋겠습니까?”
지금 사물의 수數를 헤아려 보면 그 수가 일만一萬에 그치지 않거늘, 그런데도 그것을 만물이라고 대략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수 가운데 많은 숫자인 ‘만萬’을 가지고 불러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 가운데 제일 큰 것이고, 음양이라는 것은 기氣 중에서 제일 큰 것이고, 도道라는 것은 이것들을 다 포괄하는 보편자[公]이다.
도道가 크다고 하는 데 말미암아 이것을 〈도道 또는 대大라고〉 통칭해서 말하면 우선 괜찮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이름 붙여진 도道가 이미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이름 붙여진 도道를 가지고 장차 참다운 도道에 견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만일 이름 붙여진 도道를 가지고 변론을 해나간다면, 그것은 비유하자면 도道를 개나 말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과 같을 것이니 참다운 도道에는 미치지 못함이 한참 멀다.”
“동서남북 사방의 지상세계와 상하사방[六合]의 무한한 우주 속에서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음양의 이기二氣가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거나 서로 도와주며,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서로 교대하여 서로 다음 계절을 낳고 서로 앞의 계절을 소거消去하는 순환을 계속하는데, 애증호오愛憎好惡의 감정과 그에 따른 진進과 퇴退의 운동이 이에 번갈아 일어나며, 〈음양의 조화를 구하는〉 암컷과 수컷, 남녀의 결합이 여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의 생활환경은〉 안락과 위난이 번갈아 바뀌고 〈우리의 운명은〉 재난과 행복이 서로 인과가 되어 생기고 〈우리의 시대상황은〉 완만함과 급박함이 서로 겨루어 다가와서 여기에 모임(국가사회의 흥륭興隆)과 흩어짐(쇠망)이 성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명名(명칭)과 실實(형체)의 전부(현상세계의 모든 현상)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묘함과 미세함의 전부이다.
만물의 순환변화의 순서가 서로 조정하여 어지러워지지 아니함과 번갈아 일어나는 운동이 서로 소장消長을 이루는 모든 현상이 궁극에까지 가면 곧 다시 돌아오고 마치면 곧 다시 시작하니 이것이 물物에 갖추어진 성질이다.
그러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지知로 다 아는 것은 〈기껏〉 만물의 성질을 구명究明한 것일 따름이다.
참다운 도道를 통찰하는 사람은 만물이 사멸死滅해가는 이 세상 밖의 것을 추수追隨하지 않고 만물이 생성해 나오는 기원起源을 탐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논의論議가 멈추어야 할 영역이다.”
“계진季眞이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막위莫爲설’과 접자接子가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혹사或使설’, 이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사실에 맞고 어느 쪽이 도리에 벗어난 것일까요?”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과 같은 일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비록 큰 지혜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전화轉化해 온 것인지 언어로 말할 수는 없으며 또 그것이 장차 무엇으로 전화轉化하게 될지 뜻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을 분석해나가면 작기로는 견줄 것이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크기로는 둘러쌀 수 있는 것이 없는 극대極大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주재자가 있다는 주장과 그렇게 하도록 시킨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주장은 〈현상에 얽매인〉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결국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접자接子의 주장처럼 ‘시키는 것이 있다.’고 하면 실實이 되고 계진季眞의 주장처럼 ‘주재자가 없다.’고 하면 곧 허虛에 빠지고 만다.
명칭이 있고 실질이 있으면 이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명칭도 없고 실질도 없으면 사물이 공허함에 떨어지고 마니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뜻으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나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더욱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는 것을〉 싫다고 기피할 수 없으며, 이미 죽고 난 뒤에 〈죽는 것을 싫다고〉 거부할 수 없으니, 생사生死의 문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도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의심한 끝에 도달한 가설假說에 불과하다.
내가 〈만물 생성의〉 근원을 관찰해보건대 그것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한이 없고, 또 〈만물 전개의〉 끝을 추구해보건대 그 미래의 시간은 멈춤이 없다.
〈생성 변화의 이법理法이〉 이처럼 무궁무한하니, 말이 없게 되어야만 만물과 더불어 생멸 변화의 이법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언어言語를 근본으로 생겨난 표현이니 사물과 더불어 마쳤다 시작했다 하는 것이다.
참다운 도道란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도道라는 명칭도 〈실은〉 빌려서 통용通用하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 시켰다는 주장이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물의 일부분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을 가지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대도大道를 닦을 수 있겠는가.
만일 말로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서 도道를 다 구명究明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말로 부족하다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겨우 물物이나 다 구명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니 도道는 만물의 근원이요 궁극적인 것인지라 언어나 침묵이 그것을 싣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언어에 의한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한 침묵도 아닌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궁극의 경지에까지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