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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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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於老聃曰
辯者 有言曰 라하나니 若是則可謂聖人乎잇가
老聃曰


선생(공자)이 노담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도를 닦는데 세상의 상식과 서로 어긋나 옳지 않은 것을 옳다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합니다.
변론가들이 말하기를 ‘단단하고 흰 것을 둘로 나누되 마치 처마 끝에 매달아 보여 주는 것처럼 분명하다.’고 하니 이 같은 사람은 성인이라 할 만합니까?”
노담老聃이 말했다.
“그런 사람은 잡일이나 담당하며 기술에 얽매이는 자들인지라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할 뿐이니 〈예를 들면〉 살쾡이 잡는 사냥개가 사냥에 동원되고 민첩한 원숭이가 산림山林에서 붙잡혀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
내 그대에게 그대가 들을 수 없는 것과 그대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일러 주겠다.
무릇 머리가 있고 발이 있어도 마음이 없고 귀가 없는 존재가 많고, 형체를 가진 존재 중에서 무형무장無形無狀와 일체가 되어 다 함께 존속存續하는 존재는 전연 없다.
형체가 있는 것들은 움직임과 그침, 삶과 죽음, 폐지되고 일어남이 있으니 또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스리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만물萬物을 잊고 자연의 까지도 잊는 것은 그 이름을 자기를 잊는 것이라 한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자연)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일컫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夫子 : 선생. 뒤에 이름이 丘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공자를 가리킨다. 이하 설화의 등장인물은 孔子와 老聃이고, 문답의 내용은 〈應帝王〉편에 보이는 陽子居와 老聃의 문답과 大同小異한데, 人知를 사용하는 有爲의 정치를 배척하고 無爲自然의 정치를 찬미하고 있다(福永光司). 참고로 〈應帝王〉편 제4장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부기한다. 陽子居가 老耼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주 민첩하고 굳세며, 만물을 잘 꿰뚫고 만사를 분명히 알며, 도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明王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이런 사람은 성인과 비교하면 잡일이나 담당하며 기술에 얽매이는 자들인지라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졸일 뿐이다. 게다가 호랑이와 표범의 아름다운 무늬는 사냥꾼을 불러들이고, 원숭이의 민첩함과 살쾡이를 잡는 개는 우리를 불러오는 법이니 이 같은 사람을 明王에 견줄 수 있겠는가.” 양자거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고 말했다. “감히 명왕의 다스림에 대해 여쭙습니다.” 노담이 대답했다. “명왕의 다스림은 功이 천하를 뒤덮어도 자기가 한 일로 여기지 않고, 敎化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이 느끼지 못하며, 베풂이 있는데도 아무도 그 이름을 일컫지 않으며,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뻐하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초월적인 경지에 서서 아무 것도 없는 근원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陽子居見老耼曰 有人於此 嚮疾彊梁 物徹疏明 學道不勌 如是者 可比明王乎 老耼曰 是 於聖人也 胥易技係 勞形怵心者也 且曰虎豹之文 來田 猨狙之便 執斄之狗 來藉 如是者 可比明王乎 陽子居 蹴然曰 敢問明王之治 老耼曰 明王之治 功蓋天下而似不自己 化貸萬物而民不恃 有莫擧名 使物自喜 立乎不測而遊於无有者也].”
역주2 有人治道 : 도를 닦은 사람이 있음. 治道는 修道와 같다. 褚伯秀는 ‘先王之治道’라 했고 ‘羅勉道는 所治之道’라 했지만 모두 옳지 않고, 阮毓崧이 “治는 修와 같다. 도를 닦은 사람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治 同修也 言有修道者].”라고 풀이한 것이 정확하다(池田知久).
역주3 若相放 : 세상의 상식과 서로 어긋남. 放은 어긋난다는 뜻으로 논쟁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거스르는 것이다. 郭象은 “마치 서로 본받는 것과 같음이다[若相放效].”라고 풀이하여 放을 擬倣의 倣과 같은 뜻으로 보고 褚伯秀, 朱得之, 林雲銘, 陸樹芝, 阮毓崧, 焦竑, 羅勉道, 宣穎, 陳壽昌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만 錢穆이나 于省吾가 相背逆의 뜻으로 본 것이 적절하다(池田知久). 한편 馬叙倫은 謗의 假借字로 보았는데 이 또한 放을 어긋난다는 뜻으로 본 것이다. 赤塚忠은 放을 《孟子》 〈梁惠王 下〉 제4장에 “명령을 어기고 백성들을 학대한다[方命虐民].”라고 했을 때의 方과 같은 뜻이라 했는데 이 또한 于省吾의 견해와 같다.
역주4 可不可 然不然 : 옳지 않은 것을 옳다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함. 呂惠卿이 “옳지 않은 것을 옳다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함은 만물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일로 삼는 것이다[可不可 然不然 則以齊物爲事者也].”라고 풀이했는데 郭象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이 견해를 따른다. 林雲銘은 “治道 중에는 가한 것과 불가한 것이 있고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言於治道之中 有可與不可 有然與不然].”라고 풀이했고 王夫之, 宣穎, 陸樹芝 등이 이 견해를 따르지만 적절치 않다(池田知久). 이 명제는 이미 〈齊物論〉편 제4장에 나오는 瞿鵲子와 長梧子의 문답에 나온다. 또 〈秋水〉편에 나오는 公孫龍과 魏牟의 문답도 이와 유사하다.
역주5 離堅白 若縣㝢 : 단단하고 흰 것을 둘로 나눔이 마치 처마 끝에 매달아 보여 주는 것처럼 분명함. 離堅白은 ‘단단하고 흰 돌[堅白石]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주장하는 詭辯으로 〈齊物論〉, 〈德充符〉, 〈騈拇〉, 〈胠篋〉편 등에 이미 나왔다. 단단하다는 개념과 희다는 개념을 사물과 분리시켜서 이해함으로써 사물의 내적 연관을 부정한 논변이다. 若縣㝢의 㝢는 陸德明이 宇로 읽은 것이 적절하다. 司馬彪가 若縣㝢를 “변론의 명백함이 마치 집에 매달아 사람들 앞에 보여 주는 것과 같다[辯明白 若縣室在人也].”라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陳景元도 “견백을 나누어 변론함이 마치 처마 높이 매달아 놓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함이다[離堅白之辯 若縣宇高空 使衆昭然也].”라고 풀이했고 陸樹芝와 阮毓崧 등의 견해도 비슷하다. 成玄英은 “웅변을 분명하게 함이 마치 한 곳에 해와 달을 매달아 놓은 것과 같음이다[雄辯分明 如縣日月於區者].”라고 풀이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대의에 큰 차이는 없다. 한편 赤塚忠은 若縣㝢는 명확하게 분리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縣㝢는 차별이 현저한 것을 표현한 것이어야 하므로 ‘縣’은 一國 中의 一縣이고 ‘㝢’는 宇와 같아서 宇內와 같다고 보고 현격하게 차이가 남이 마치 ‘일국 중의 一縣과 우주 전체’의 차이처럼 명백하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다소 무리한 견해이다.
역주6 胥易技係 : 잡일이나 담당하며 기술에 얽매이는 자들. 胥는 胥吏의 胥로 하급 관리를 뜻하며 易는 다스린다는 뜻으로 雜役의 뜻. 技係는 기술에 얽매인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기술자의 잔재주를 의미한다.
역주7 勞形怵心者也 :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것임.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졸일 뿐임. ‘勞形’은 몸을 지치게 한다는 뜻이고 ‘怵心’은 “마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다.”는 뜻. 成玄英은 怵을 두려워한다[怵惕]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그 마음이 벌벌 떠는 것을 말한다[言其心恐恐然也].”라고 풀이했다.
역주8 執狸之狗成思(來田) 猿狙之便 自山林來 : 〈예를 들면〉 살쾡이 잡는 사냥개가 사냥에 동원되고 민첩한 원숭이가 山林에서 붙잡혀 오는 것과 같음. 吳汝綸, 奚侗, 章太炎 등은 모두 〈應帝王〉편에 근거하여 成思는 來田의 잘못이라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다만 〈應帝王〉편에는 ‘虎豹之文來田 猨狙之便 執斄之狗 來藉’으로 되어 있어 “호랑이와 표범의 아름다운 무늬는 사냥꾼을 불러들이고 원숭이의 민첩함과 살쾡이 잡는 개는 우리를 불러온다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지만 여기의 執狸之狗는 사냥개를 의미하므로 ‘사냥꾼을 불러온다.’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치 않기 때문에 來田을 ‘사냥에 동원된다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모두 자신이 가진 재능 때문에 화란을 자초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執留之狗成思 猿狙之便 自山林來”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묶여 있는 개[執留之狗]는 이리저리 머리 굴려 생각하고[成思] 원숭이의 민첩함[猿狙之便]은 山林 속에서 살던 버릇에서 由來한다[自山林來].”라고 번역하면서, 여기 ‘成思’를 〈應帝王〉편 등에 의거해서 ‘來由’ 등으로, 文字를 고쳐서 해석하는 註解의 不可함을 지적한 見解(池田知久)도 있으나 여기서는 취하지 않는다.
역주9 予 告若而所不能聞 與而所不能言 : 내 그대에게 그대가 들을 수 없는 것과 그대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일러 주겠다. 若과 而는 모두 2인칭(成玄英).
역주10 凡有首有趾 無心無耳者 衆 : 무릇 머리가 있고 발이 있어도 마음이 없고 귀가 없는 존재가 많음, 머리 있고 발이 있음은 곧 五體가 具足함을 말한다. 이처럼 五體가 멀쩡하면서도 〈無形‧無聲의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뜻이다. 王先謙은 “몸뚱이를 갖추어서 사람이 되었지만 지각이 없고 견문이 없는 자는 모두 이에 해당한다[具體爲人 而無知無聞者皆是].”라고 풀이했다.
역주11 有形者 與無形無狀而皆存者 盡無 : 형체를 가진 존재 중에서 無形無狀의 道와 일체가 되어 다 함께 存續하는 존재는 전혀 없음. 無形無狀은 道를 가리키며(林雲銘, 池田知久), 이 道와 함께하여 다 함께 存續하는 存在란 道와 함께 영원한 生命을 누리는 자란 뜻이다. 郭象은 “형체를 가진 것은 잘 변하기 때문에 무형무상의 도와 함께 존속할 수 없음을 말한 것[言有形者善變 不能與無形無狀者幷存也].”이라고 풀이했다.
역주12 其動止也 其死生也 其廢起也 此又非其所以也 : 형체가 있는 것들은 움직임과 그침, 삶과 죽음, 폐지되고 일어남이 있으니 또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 所以의 以는 爲와 같다. 郭象은 用이라 했고, 阮毓崧은 爲와 같다고 했는데 후자가 옳다. 《論語》 〈爲政〉에 “그가 하는 것을 보며 그가 말미암는 까닭을 살피며 편안해 하는지를 살핀다[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라고 한 데서도 以가 爲의 뜻으로 쓰인 용례가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有形의 存在가 動하고 止하고, 死하고 生하고, 廢하고 起함에 있어 그것이 그 有形의 존재 스스로의 作用의 결과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주13 有治在人 : 다스리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음. 성인은 부득이 천하를 다스릴 일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맡겨서 스스로 다스리게 한다는 뜻(方勇‧陸永品). 福永光司는 이 아래에 ‘無治在天’의 한 句를 보충하면 의미가 한층 분명해질 것이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秋水〉편에도 이와 유사한 ‘德在乎天’이라는 구절이 있다.
역주14 忘乎物 忘乎天 其名爲忘己 : 萬物을 잊고 자연의 천까지도 잊는 것은 그 이름을 자기를 잊는 것이라 함. 郭象은 “天과 物을 모두 잊어버렸으니 자기 자신만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다시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天物皆忘 非獨忘己 復何有哉].”라고 풀이했다. ‘忘己’는 〈大宗師〉편 제7장에 나오는 坐忘과 유사한 표현. 〈逍遙遊〉편 제1장과 〈在宥〉편 제6장에 나오는 ‘無己’를 좀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池田知久).
역주15 忘己之人 是之謂入於天 : 자기를 잊어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天[자연]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일컬음. 〈大宗師〉편 제1장에 ‘入於廖天一’이라고 있고, 〈徐无鬼〉편에 ‘不以人入天’이라고 있음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福永光司, 池田知久). 郭象은 “사람이 잊기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인데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렸으니 또 무엇을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알지도 않고 지각하지도 않으면서 자연과 冥合하는 것이다[人之所不能忘者 己也 己猶忘之 又奚識哉 斯乃不識不知而冥於自然].”라고 풀이했다. 成玄英도 郭象의 注를 따라 “入은 만남이다. 천하에서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인데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렸으니 천하의 어떤 사물이 족히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대상과 나를 모두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자연의 도에 명합할 수 있다[入 會也 凡天下難忘者 己也 而己尙能忘 則天下有何物足存哉 是知物我兼忘者 故冥會自然之道也].”라고 풀이했다.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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