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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2)

장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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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4章
14章
효자는 어버이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임금에게 아유阿諛하지 않는다.
臣子之盛也니라
이것이 신하된 자와 자식된 자로서 가장 훌륭한 태도이다.
어버이가 말하면 어떻게 말하든 그렇다고 긍정하고 어버이가 행하면 어떻게 하든 좋다고 아첨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그를 불초한 자식이라 하며, 임금이 말하면 어떻게 말하든 그렇다고 긍정하고 임금이 행하면 어떻게 하든 좋다고 아첨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그를 못난 신하라 한다.
而未知
알지 못하겠구나.
이것이 반드시 그러한가.
세속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그렇다고 긍정하고 세속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아첨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속이 참으로 어버이보다도 존엄하고 군주보다도 존귀한가.
〈누군가〉 자기를 아첨꾼이라고 말하면 발끈 성을 내어 얼굴빛을 붉히고 자기를 아부꾼이라 하면 역시 발끈하여 얼굴빛을 붉히면서도 〈세론世論에 대해서만은〉 종신토록 아첨꾼과 아부꾼 노릇을 한다.
비유를 사용하고 말을 꾸며 대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만 종시終始본말本末이 불안하다.
번드레한 옷을 걸치고 교양 있게 행동하고 용모容貌를 꾸며서 세상에 아첨하면서도 스스로 아첨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속의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옳고 그름을 함께 하고서도 스스로를 중인衆人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지극히 어리석다.
자기가 어리석음을 아는 자는 크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며 자기가 미혹됨을 아는 자는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혹된 자는 종신토록 깨닫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자는 종신토록 영명해지지 못한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갈 때 한 사람만 길을 잃으면 가려고 하는 곳에 그래도 이를 수 있을 것이니 길 잃은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길을 잃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니 길 잃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되어 있는지라 내 비록 바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훌륭한 음악은 촌사람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절양折楊이나 황과皇荂 같은 속악俗樂은 환성을 지르며 웃어 대고 좋아한다.
이런 까닭으로 훌륭한 말은 중인衆人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지언至言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세속의 비속鄙俗한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늘 而今也 以天下이러니 予雖有祈嚮인들 리오
세 사람 중 두 사람의 발이 길을 잃어도 가려는 곳에 이를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은 온 천하 사람이 미혹迷惑되었으니 내 비록 바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이루려고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미혹迷惑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대로 놔두고 억지로 미루어 나가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억지로 미루어 나가지 않으면 공연히 나와 함께 근심하고 괴로워할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문둥이가 한밤중에 자식을 낳고 허둥지둥 등불을 들고 자식을 들여다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오직 그 아이가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역주
역주1 孝子不諛其親 忠臣不諂其君 : 효자는 어버이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임금에게 阿諛하지 않음. 諛와 諂은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漁父〉편에 “다른 사람의 뜻을 살펴서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을 諂이라 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말하는 것을 諛라 한다[希意道言謂之諂 不擇是非而言謂之諛].”라고 한 것을 보면 諂은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여 입발림 소리 하는 것이고 諛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편의상 阿諂과 阿諛로 구분하여 번역하였다.
역주2 親之所言而然 所行而善 則世俗 謂之不肖子 : 어버이가 말하면 어떻게 말하든 그것을 그렇다고 긍정하고 어버이가 행하면 어떻게 하든 그것을 좋다고 아첨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그를 불초한 자식이라 함. 而 이하의 然이 술어 동사이고 而 앞의 親之所言이 목적어이다. 마찬가지로 所行而善의 所行은 목적어이고 善이 술어 동사이다. 이 같은 구문은 《孟子》 〈梁惠王 上〉의 “어찌 어진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 그물질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焉有仁人在位 罔民而可爲也].”라고 한 데서 罔民이 목적어이고 可爲가 술어 동사로 활용된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孟子》의 현토본에서 “罔民을 而可爲也리오”라고 읽었듯이 이 부분도 세밀히 현토하면 ‘親之所言을 而然하며 所行을 而善이어든’이 된다. 所行은 親之所行. 不肖子는 어버이를 닮지 못한 자식이라는 뜻.
역주3 君之所言而然 所行而善 則世俗 謂之不肖臣 : 임금이 말하면 어떻게 말하든 그것을 그렇다고 긍정하고 임금이 행하면 어떻게 하든 그것을 좋다고 아첨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그를 못난 신하라 함. 이 구절에서 이 편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시대 후기의 孝와 忠 관념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부분의 孝 관념은 《孝經》 〈諫諍章〉에서 “不義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 자식은 어버이에게 간쟁하지 않으면 안 되고 신하는 군주에게 간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불의한 일을 저지르면 간쟁하여야 하니 〈그런 경우에〉 어버이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어찌 효가 될 수 있겠는가[當不義 則子不可以不爭於父 臣不可以不爭於君. 故當不義則爭之 從父之令又焉得爲孝乎].”라고 한 내용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4 未知此其必然邪 : 이것이 반드시 그러한지 알지 못함. 어버이나 군주에게 아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할 줄 알면서도 세속의 여론에 아첨하는 행위는 비판할 줄 모른다고 비판하는 내용.
역주5 世俗之所謂然而然之 所謂善而善之 則不謂之道諛之人也 : 세속의 이른바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그렇다고 긍정하고 세속의 이른바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아첨꾼이라고 말하지 않음. 세속을 하나의 인격체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이채롭지만 특정인의 행위를 두고 비평하는 세속의 논의를 역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고대의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논의이다. 세속의 기준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대다수의 대중추수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글쓰는 주체이기 십상인 여론이나 비판자 자체의 권력화를 경계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池田知久에 의하면, 道는 導로 표기된 판본과 引用이 있으나(馬叙倫, 王叔岷) 《經典釋文》에 道를 揭出해서 ‘音은 導’라고 하고 있기도 하여 道字가 옳다고 한다. 王念孫에 의거, 道諛는 諂諛의 音轉으로 보는 것이 옳다(馬叙倫, 王叔岷, 楊樹達의 《莊子拾遺》‧池田知久). 그래서 여기서는 道를 諂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郭慶藩도 “道人은 곧 諂人이다[道人 卽諂人也].”라고 풀이했다.
역주6 然則俗 故嚴於親而尊於君邪 : 그렇다면 세속이 참으로 어버이보다도 존엄하고 군주보다도 존귀한가. 실제로 세속의 논의보다 어버이와 군주가 더 존엄하고 존귀한데도 세속의 비난이 두려워 어버이와 군주에게 간쟁한다는 뜻으로 어버이와 군주에게 간쟁하는 행위 자체가 위선적 요소가 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故는 ‘진실로’의 뜻으로 固와 같고(吳汝綸, 馬叙倫, 王叔岷 등) 固로 된 판본도 있다(王叔岷).
역주7 謂己道人 則勃然作色 謂己諛人 則怫然作色 : 자기를 아첨꾼이라고 말하면 발끈 성을 내어 얼굴빛을 붉히고 자기를 아부꾼이라 하면 역시 발끈하여 얼굴빛을 붉힘. 여기서 아첨의 대상은 어버이와 군주이다. 곧 어버이와 군주에게 아첨하는 자라고 남들이 규정하면 화를 낸다는 뜻. 勃然과 怫然은 모두 발끈하고 성을 내는 모양이다. 勃然을 벌떡 일어나는 모양으로 보는 견해(王念孫, 王叔岷 등)가 있으나 作色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이 바로 이어져 있으므로 발끈하는 얼굴 표정과 달리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기서도 역시 道人은 ‘아첨꾼’이다.
역주8 終身道人也 終身諛人也 : 〈世論에 追隨하는 限〉 그들은 종신토록 아첨꾼이요 종신토록 아부꾼이다. 곧 〈세론에 대해서만은〉 종신토록 아첨꾼과 아부꾼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어버이와 군주에게조차 아첨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世論에 대해서만은 종신토록 아첨한다는 뜻. 세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종을 경계하는 말.
역주9 合譬 飾辭 聚衆也 : 비유를 사용하고 말을 꾸며 대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임. 合譬는 비유를 이리저리 갖다 붙여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함. 飾辭는 말을 화려하게 꾸며서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聚衆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도록 함이다.
역주10 是 終始本末 不相坐 : 終始와 本末이 支離滅裂하여 논리가 불안함. 처음과 끝, 근본과 지말의 논리가 맞지 않음. 不相坐는 서로 맞지 않고 모순된다는 뜻이다. 곧 어버이와 군주에게 아첨하는 것은 비난하면서 세론에 아첨하는 것은 똑같은 아첨인데도 비난하지 않으므로 처음의 입장과 모순된다는 뜻이다. 郭象이 坐를 죄에 걸리다[罪坐]는 뜻으로 주해한 이래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坐를 죄에 걸리다는 뜻으로 보고 아첨하는 자라는 비난에 전혀 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金谷治, 安東林) 옳지 않다. 여기서는 馬其昶이 “坐는 지킨다는 뜻이다. 군주와 어버이에게 아첨하는 것은 나무라면서도 대중에게 아첨하는 것은 나무라지 않는 것은 앞뒤의 태도가 다르다[坐猶守也 譏諛君親而不譏諛衆 是前後異操].”라고 풀이한 것과 錢穆이 嚴復의 말을 인용하여 “요즘 사람들이 모순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猶今人言矛盾].”라고 한 견해를 따른다.
역주11 垂衣裳 設采色 動容貌 以媚一世 而不自謂道諛 : 번드레한 옷을 걸치고 교양 있게 행동하고 容貌를 꾸며서 세상에 아첨하면서도 스스로 아첨한다고 생각하지 않음. 의상을 걸친다는 뜻의 垂衣裳은 번드레한 옷을 걸친다는 의미이고, 아름다운 채색을 설치한다는 뜻의 設采色은 교양 있게 행동한다는 의미이고, 動容貌는 용모를 꾸민다[動]는 뜻. 《孟子》 〈盡心 下〉에서 “세속과 같아져서 더러운 세상과 영합하여 가만히 있을 때에는 忠信과 비슷하고 움직일 때는 청렴과 비슷하여 대중이 모두 좋아하고 스스로 옳다 여기지만 함께 요순의 道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한다[同乎流俗 合乎汚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 德之賊也].”라고 하여 鄕原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다. 《孟子》의 같은 곳에 향원을 묘사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음험하게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향원이다[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라고 하여 여기의 ‘以媚一世’와 유사한 표현도 나온다. 垂衣裳은 《周易》 〈繫辭傳 下〉에 “黃帝와 堯‧舜은 옷만 잘 걸치기만 하고 〈無爲이면서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라고 보이고(成玄英, 福永光司, 池田知久), 動容貌는 《論語》 〈泰伯〉편에도 보인다(赤塚忠, 池田知久).
역주12 與夫人之爲徒 通是非 而不自謂衆人 愚之至也 : 세속의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옳고 그름을 함께 하고서도 스스로를 衆人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지극히 어리석음. ‘與夫人之爲徒’는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었다는 뜻으로 〈人間世〉편의 ‘與人爲徒’와 비슷한데 다만 여기는 夫人이 彼人의 뜻으로 세속의 아첨배들을 지칭하는 것이 다소 다르다. 이처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人間世〉편에서는 ‘與人爲徒’를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사람들 또한 비난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일러 사람과 더불어 같은 무리가 되었다고 한다[爲人之所爲者 人亦無疵焉 是之謂與人爲徒].”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하다. 衆人은 아첨배들을 지칭한다.
역주13 知其愚者 非大愚也 知其惑者 非大惑也 : 자기가 어리석음을 아는 자는 크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며 자기가 미혹됨을 아는 자는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님. 자신을 모르는 자야말로 크게 어리석고 미혹된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역주14 大惑者 終身不解 大愚者 終身不靈 : 크게 미혹된 자는 종신토록 깨닫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자는 종신토록 깨우치지 못함. 解와 靈은 모두 깨우침. 司馬彪는 “靈은 깨우침이다[靈 曉也].”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解는 깨달음이고 靈은 앎이다[解 悟也 靈 知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5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 猶可致也 :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갈 때 한 사람만 길을 잃으면 가려고 하는 곳에 그래도 이를 수 있음. 惑은 길을 잃음. 所適者는 가려고 하는 목적지를 뜻한다. 成玄英은 “適은 간다는 뜻이고 致는 이른다는 뜻이다[適 往也 致 至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6 二人惑則勞而不至 : 두 사람이 길을 잃으면 애를 써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함. 勞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는 뜻. 至는 앞에 나온 猶可致也의 致와 협운이다.
역주17 惑者 勝也 : 길 잃은 사람이 더 많음. 세론은 늘 다수 의견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다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뜻. 勝은 수가 많기 때문에 이긴다는 뜻. 勝자가 多자로 된 인용문이 있다(王叔岷).
역주18 今也以天下惑 :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되어 있음. 王叔岷은 “以는 則과 같다[以猶則也].”라고 풀이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19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 : 내 비록 바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祈는 求와 같다. 司馬彪는 “祈는 구한다는 뜻이다[祈 求也].”라고 풀이했다. “내 비록 바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는 곧 “내가 비록 실현하고 싶은 理想이 있다 하더라도”의 뜻인데, 여기에도 異說이 없지 않다. 兪樾은 “祈자에는 뜻이 없다. 司馬彪는 祈가 구한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予雖祈嚮이라고 해도 충분〈할 것인데 予雖有祈嚮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祈자는 所자의 잘못인 듯하다. 곧 천하가 모두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비록 갈 곳이 있다 하더라도 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祈자와 所자는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일 뿐이다[祈字無義 司馬云 祈 求也 則但云 予雖祈嚮 足矣 祈疑所字之誤 言天下皆惑 予雖有所嚮往 不可得也 祈所字形相似 故誤耳].”라고 주장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이 외에 祈자가 報자로 쓰이는 용례를 들어 祈를 ‘報告하다’, ‘일러 주다’의 뜻으로 풀이하는 견해(章太炎) 등이 있으나 취하지 않는다.
역주20 大聲 不入於里耳 : 훌륭한 음악은 촌사람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음. 大聲은 훌륭한 음악. 司馬彪는 “咸池나 六英의 음악을 일컬음이다[謂咸池六英之樂也].”라고 풀이했다. 里耳는 촌사람의 속된 귀. 里는 俚의 뜻. 俚로 된 인용문도 있다.
역주21 折楊皇荂 則嗑然而笑 : 折楊이나 皇荂 같은 俗樂은 환성을 지르며 웃어 대고 좋아함. 折楊과 皇荂는 모두 옛 歌曲(李頤).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속의 음악을 대표하는 악곡 명칭이다. 皇荂는 皇華로 된 인용문이 있다. 嗑然은 ‘하하’하고 환성을 지르며 소리 내어 웃는 모양(李頤).
역주22 高言 不止於衆人之心 : 훌륭한 말은 衆人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음. 高言은 수준 높은 말. 衆人之心은 중인들의 속된 마음. 止는 上으로 되어 있는 텍스트가 있다. 不止나 不上 모두 不進 즉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 不止를 글자 그대로 보아 머물지 않는다고 해석해도 좋다.
역주23 至言不出 俗言勝也 : 至言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세속의 鄙俗한 말이 너무 많기 때문. 至言은 지극한 이치를 담고 있는 말로 앞의 高言과 같다. 俗言은 세속의 저열한 말.
역주24 以二垂踵惑 而所適不得矣 : 세 사람 중 두 사람의 발이 길을 잃어도 가려는 곳에 이를 수 없음. 垂踵은 원 본문에는 缶鍾으로 되어 있으나 《經典釋文》에 의거, 垂踵으로 고쳐 읽음. 垂踵은 발을 들어 옮기다는 뜻. 곧 二垂踵惑은 두 사람이 발을 잘못 놓는 것을 말한다. 垂踵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지만 따르지 않고 두 가지 설만 소개한다. 安東林은 馬叙倫의 《莊子義證》이 馬其昶 《莊子故》의 說을 따라 “二垂(岐路)에 의해 迷惑이 증가됨[踵=緟].”이라 하는 해석을 취해 二垂踵惑을 “두 갈래 길에서 망설임이 많아지면……”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다른 한 설은 池田知久가 취한 해석으로 그는 그것을 최신의 ‘거의 決定解’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垂를 ‘3분의 1’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高亨이 그의 《諸子新箋》 속에 수록한 《莊子新箋》(1935년 출판)에서 제시한 설이 바로 그 ‘거의 決定解’인데 高亨은 《淮南子》 〈道應訓〉편의 “文王이 德과 政治를 갈고 닦아서 三年이 되자 天下의 二垂(3분의 2)가 그에게 歸服하였다[文王砥德修政 三年而天下二垂歸之].” 등을 근거로 “옛날에는 3분의 1을 垂라 하였다[古謂三分之一爲垂].”라고 結論하였다. 이 해석을 따르면 이 부분의 내용은 “세 사람 중 3분의 2 즉 두 사람의 발[踵=足]이 길을 잃어도 가려는 곳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역주25 其庸可得邪 :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庸은 어찌. 王叔岷은 “庸은 何와 같다[庸猶何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6 知其不可得也 而强之 又一惑也 : 그것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이루려고 한다면 이 또한 迷惑임. 이 부분은 《論語》 〈憲問〉편에서 石門의 은자 晨門이 공자를 두고 “안 되는 줄 알면서 억지로 하는 자[知其不可而爲之者].”라고 비판한 맥락과 유사하다. 안 되는 것을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태도임을 비유.
역주27 莫若釋之而不推 : 그러므로 그것을 그대로 놔두고 억지로 미루어 나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음. 釋之는 그대로 놔둔다는 뜻이고 不推는 억지로 미루어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의 대의는 世論을 따라가면서 영합하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世論을 거슬러 무리할 것도 없다는 뜻으로 〈養生主〉편에서 “善을 행하되 명예에 가까이 가지는 말며, 惡을 행하되 형벌에 가까이 가지는 말고, 中의 경지를 따라 그것을 삶의 근본원리로 삼아야 한다[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라고 한 인생관과 유사하다.
역주28 不推 誰其比憂 : 억지로 미루어 나가지 않으면 누가 나와 함께 공연히 근심하고 괴로워할 것인가. 곧 무리한 推究를 하지 않으면 〈나의 근심이 전염되어〉 공연히 나와 함께 괴로워할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는 뜻. 比憂는 나란히 근심함, 또는 나와 더불어 근심함. 나의 憂患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지 않는다는 의미. 成玄英은 “比는 함께함이다[比 與也].”라고 풀이했다.
역주29 厲之人 夜半 生其子 : 문둥이가 한밤중에 자식을 낳음. 厲(라)는 癩(라). 두 글자 모두 本音은 뢰. 곧 厲之人은 나병 환자(王先謙). 夜半은 夜之半. 곧 한밤중.
역주30 遽取火而視之 : 허둥지둥 등불을 들고 자식을 들여다봄. 遽는 허둥지둥하면서 급히 서두는 모양.
역주31 汲汲然唯恐其似己也 : 불안한 마음으로 오직 그 아이가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함. 汲汲은 불안해 하는 모양. 이 대목은 世論과 다른 나의 근심과 괴로움이 자식에게까지 전염되지나 않았을까 두려워함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연히 근심하고 두려워할 것 없이 自然에 맡겨 장자의 無爲自然의 大道에 말미암을 따름이다.

장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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