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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1)

장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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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有하니이니
知人之死生存亡 禍福壽夭하야 若神할새
鄭人 見之하고 하더니
하야 歸以告
壺子曰
明日 列子與之見壺子한대
子之先生 死矣
弗活矣로소니 로다
列子入하야 하야 以告壺子하대 壺子曰
嘗又與來하라하야늘
明日 又與之見壺子한대
出而謂列子曰
幸矣
全然有生矣로다
列子入하야 以告壺子한대 壺子曰
鄕吾하니
嘗又與來하라하야늘
明日 又與之見壺子한댄
出而謂列子曰
子之先生 吾無得而相焉이로다
試齊하야든 且復相之호리라
列子入하야 以告壺子한대 壺子曰
吾鄕示之以호니
是殆見吾 하도다
이며 止水之審爲淵이며 流水之審爲淵이니 하니 하니라
嘗又與來하라하야늘
明日 又與之見壺子한대
하야 커늘
壺子曰
追之하라
列子追之不及하야하야 以報壺子하야
已滅矣이며
已失矣
吾弗及已호이다
壺子曰
이라 不知其誰何하야 하며 逃也하도다
然後에야 列子이라하야 而歸하야 三年 不出하야 하며 하며 이오 하야 하니 하야 하니라


나라에 미래의 일을 귀신처럼 잘 맞추는 무당이 있었는데 계함季咸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사생존망死生存亡, , 장수長壽요절夭折 등의 운세를 정확히 알아서, 연월年月과 상순, 하순 등의 날짜까지 맞추는 것이 꼭 귀신 같았다.
그래서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면 모두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열자列子가 그를 만나보고는 심취하여 돌아와서 호자壺子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선생님의 를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또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호자壺子가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해 껍데기는 다 전수해 주었지만, 그 알맹이는 아직 다 전해주지 않았는데, 너는 참으로 도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는가?
암탉이 아무리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또 어떻게 알을 부화할 수 있겠는가?
너는 도의 껍데기를 가지고 세상과 겨루어서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려 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너의 관상을 쉽게 알아맞히게 한 것이다.
어디 시험삼아 그를 데려와서 나를 그에게 보여 보거라.”
다음 날에 열자가 계함과 함께 호자를 만나 뵈었다.
〈계함이 호자의 관상을 보고 난 뒤〉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그대의 선생은 죽을 것이다.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선생에게서 괴이한 조짐을 보았는데, 젖은 재의 모습을 보았다.”
열자列子가 들어와 옷섶을 적시며 울면서 그 말을 호자壺子에게 전하자 호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나는 그에게 대지의 무늬를 보여 주었다.
멍하니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았으니 그는 아마도 나의 생기生機가 막혀 버린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시험삼아 또 데리고 와 보거라.”
다음 날에 또 계함季咸과 함께 호자를 뵈었다.
〈계함이 호자의 관상을 보고 난 뒤〉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다.
그대의 선생은 나를 만난 덕에 병이 다 나았다.
완전히 생기가 회복되었다.
〈어제는〉 내가 〈그대의 선생에게서〉 생기가 막혀 버린 모습을 보았다.〈그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열자列子가 들어와 그 말을 호자壺子에게 전하자 호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나는 그에게 하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명칭이나 실제가 들어갈 수 없는데 생기生氣가 발뒤꿈치에서 발생하니 그는 아마도 나의 생기生機를 보았을 것이다.
시험삼아 또 데리고 와 보거라.”
다음 날에 또 계함季咸과 함께 호자壺子를 뵈었다.
〈계함이 호자의 관상을 보고 난 뒤〉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선생의 관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관상을 볼 수가 없다.
어디 한번 일정하게 잡아주면 그때 다시 관상을 보겠다.”
열자가 들어와 그 말을 호자에게 전하자 호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나는 그에게 더없이 허무하고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아마도 나의 음양의 가 평형을 이룬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고래가 이리저리 헤엄치는 깊은 물도 연못이며, 고요히 멈추어 있는 깊은 물도 연못이며, 흘러가는 깊은 물도 연못이니, 연못에는 아홉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이번에 계함季咸에게 보여 준 것은 세 가지에 해당한다.
시험삼아 또 데리고 와 보거라.”
다음 날에 또 계함과 함께 호자를 뵈었다.
선 채로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계함이 얼이 빠져 달아났다.
호자가 말했다.
“쫓아가 잡아라.”
열자가 그를 따라갔지만 미치지 못하고 돌아와 호자에게 말했다.
“벌써 사라졌습니다.
이미 놓쳤습니다.
제가 미치지 못했습니다.”
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아직 나의 근본에서 떠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그를 대했더니 그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고, 따라서 무엇이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무엇인가 노도怒濤처럼 물결쳐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열자列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가 삼 년 동안 집 밖에 나오지 않고, 자기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으며, 돼지를 먹이되 사람에게 먹이듯 하였으며, 매사에 더불어 친소親疏를 따짐이 없었고, 인위人爲를 깎아 버리고 쪼아 없애서 소박한 데로 돌아가, 아무런 감정없이 외로이 홀로 서서 어지러이 만물과 뒤섞였는데, 한결같이 이런 태도를 지키면서 일생을 마쳤다.


역주
역주1 神巫 : 귀신처럼 잘 맞추는 무당. 神은 귀신처럼 잘 맞춘다는 뜻.
역주2 季咸 : 인명. 李頤는 “여자무당을 巫라 하고, 남자무당을 覡이라 한다. 季咸은 이름이다[女曰巫 男曰覡 季咸 名].”라고 풀이했는데, 이 견해에 의하면 季咸은 女性이다. 그러나 兪樾, 陳壽昌의 주장처럼 男性을 巫라 부르기도 했고, 또 男女를 通稱해서 巫라고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여성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池田知久). 이 설화는 《列子》 〈黃帝〉편에도 보인다.
역주3 期以歲月旬日 : 年月과 상순, 하순 등의 날짜까지 맞춤. 期는 期約하다, 預言하다, 맞추다의 뜻.
역주4 皆棄而走 : 모두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고 도망감. 曹礎基, 張黙生, 安東林 등은 《列子》 〈黃帝〉편에 棄가 避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그를 피해서 도망치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빨리 도망치기 위해 방해가 되는 물건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이해하는 것이 맥락상 더 적절하고, 〈山木〉편의 “林回가 천금의 구슬을 버리고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도망쳤다[林回棄千金之璧 負赤子而趨].”고 한 표현에 그런 경우가 보이므로 본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도망치는 이유를 郭象은 자기가 죽는 날짜를 듣는 것을 기뻐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았다[不憙自聞死日也].
역주5 列子見之而心醉 : 열자가 그를 만나보고 심취함. 열자가 계함에게 매료되었다는 뜻. 成玄英은 心醉를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고 우러러보아 황홀하여 취한 듯함이다[中心羨仰 恍然如醉].”로 풀이했다. 《詩經》 〈黍離〉의 ‘中心如醉’와 유사한 표현(池田知久).
역주6 壺子 : 인명. 司馬彪는 “이름은 林이고 정나라 사람이며, 列子의 스승이다[名林 鄭人 列子師].”라고 했다. 《呂氏春秋》 〈下賢〉편에는 鄭나라의 子産이 壺丘子林의 弟子로 入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說話는 《淮南子》 〈精神訓〉과 《列子》 〈黃帝〉편에도 그대로 나온다. 한편 池田知久는 “이 설화에서 壺子가 季咸에게 승리하는 맥락은 《莊子》를 시작으로 하는 道家의 思想이 民間宗敎가 아님은 물론,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哲學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해설했다.
역주7 始吾以夫子之道爲至矣 則又有至焉者矣 : 처음에 저는 선생님의 도를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또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始는 처음에, 지금까지의 뜻. 則은 이제 와서 보니의 뜻. 王叔岷은 吳昌瑩이 “則은 今과 같다[則猶今也].”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養生主〉편에 ‘始也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와 비슷한 句法이라고 보았는데 이 견해를 따랐다. 至는 지극한 데 이르다의 뜻. 焉은 於此와 같으며 여기서는 선생님보다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8 吾與汝 : 나는 너를 위해서. 與는 王引之가 《經傳釋詞》에서 “爲와 같다[猶爲也(此爲字讀去聲)].”고 풀이한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다(池田知久). 成玄英은 주다[授]는 의미로 보았고 張黙生, 曹礎基, 安東林도 같은 견해이지만 구문이 어색하여 따르지 않는다. 뒤의 ‘旣其文 未旣其實’에서 旣를 盡의 뜻으로 파악할 경우 왕인지의 견해를 따라 爲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한편 王叔岷은 《論語》 〈公冶長〉의 ‘吾與汝弗如也’를 인용하면서 與를 許與하다, 인정하다는 뜻으로 보았는데, 이 견해를 따르면 “호자는 열자가 도의 껍데기를 얻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직 알맹이를 얻었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王引之의 견해만큼 간명하지 못하다.
역주9 旣其文 未旣其實 : 껍데기는 다 전수해 주었지만, 그 알맹이는 아직 다 전해주지 않음. 文과 實은 상대되는 의미로 文은 외형, 형식, 허상, 껍질 등의 의미라면, 實은 내면, 내용, 실상, 알맹이 등의 의미이다. 旣는 통상 이미라는 뜻의 부사로 아직~하지 않는다는 未와 상대되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未旣의 경우에서 보듯 다한다는 의미의 술어동사로 쓰였다. 곧 旣는 다 전해주었다는 뜻이고 未旣는 아직 다 전해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李頤는 旣를 다한다[盡]는 뜻으로 풀이했다.
역주10 而固得道與 : 너는 참으로 도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는가? 而는 2인칭.
역주11 衆雌而無雄 而又奚卵焉 : 암탉이 아무리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또 어떻게 알을 부화할 수 있겠는가? 司馬彪는 “네가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으니 마치 암탉은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알을 부화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言汝受訓未熟 故未成 若衆雌無雄則無卵也].”라고 풀이했고, 陳壽昌은 雌는 文을, 雄은 實을, 卵은 得道를 비유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屈復은 “암탉이 알을 부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수탉이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수탉이 없으면 암탉이 어떻게 알을 부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의 관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내가 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니 마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어찌 관상을 볼 수 있겠는가[雌所以能卵者 皆雄始其機 無雄則雌奚卵焉 人所以能相者 皆我示以心 無心則人奚相焉].”로 풀이하여 卵을 관상보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方勇‧陸永品 등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바로 뒤의 내용이 得道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관상을 간파당했다고 列子를 질책하는 내용이므로 陳壽昌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다. 衆雌而無雄의 而는 ‘~하고’에 해당하는 접속사이고, 而又奚卵焉의 而는 則과 같이 ‘~면’에 해당하는 접속사.
역주12 而以道與世亢 必信夫 : 너는 도의 껍데기를 가지고 세상과 겨루어서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려 했다. 而는 2인칭. 成玄英은 而를 너[汝]라고 풀이했다. 한편 池田知久는 而를 접속사로 보고 그런데도의 뜻으로 보았지만 바로 앞문장이 ‘衆雌而無雄而又奚卵焉’으로 而가 접속사로 두 차례 나오는데 다시 같은 종류의 접속사가 연결되는 구조는 구문상 어색하다. 또 ‘又奚卵焉’에서 내용이 일단락되기 때문에 焉을 종결사로 처리하고 而를 새로 시작하는 문장의 주어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而를 2인칭으로 보더라도 앞문장과의 연결을 위해 그런데도의 의미를 덧붙여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의 道는 사람들의 信을 얻기 위한 도구, 수단을 의미하므로 참된 도가 아니라 도의 껍데기를 뜻한다. 겉(껍데기)만의 道를 의미함. 亢은 對抗하다, 겨루다는 뜻. 必信夫는 郭象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얻으려 한다[必信於世].”는 뜻으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郭慶藩의 《莊子集釋》본에는 陸德明의 《經典釋文》과 崔譔의 독법을 따라 ‘必信 夫故’로 絶句하였지만, 여기서는 武延緖, 劉文典이 《列子》를 참고하여 ‘必信夫’로 絶句한 견해를 따랐다. “너는…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려 했다.”를 “너는…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려 하는가.”로 읽는 독법도 가능하다.
역주13 使人得而相女 :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너의 관상을 쉽게 알아맞히게 함. 相은 관상을 보다는 뜻. 而는 의미없이 붙은 虛辭. 《孟子》 〈離婁 上〉의 ‘民不可得而治矣’, 《中庸》 제20장의 ‘民不可得而治矣’에 동일한 용례가 보인다. 女는 그대로도 ‘너’라는 뜻이 되나 世德堂本 등에 의거 汝로 고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14 嘗試與來 : 시험삼아 그를 데려옴. 嘗과 試는 모두 시험해본다는 뜻. 與來는 데리고 오다, 함께 오다의 뜻.
역주15 以予示之 : 나를 그에게 보여 보라. 자신의 관상을 보게 하라는 의미.
역주16 出而謂列子 : 나와서 열자에게 말함. 《太平御覽》 871에는 이 내용과 동일한 《列子》 〈黃帝〉편의 설화를 재인용하고 있는데 出앞에 咸字가 있다(劉文典, 《莊子補正》).
역주17 : 아! 탄식하는 소리.
역주18 不以旬數矣 : 열흘을 넘기지 못함. 旬은 十日, 곧 열흘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뜻. 《太平御覽》 871의 재인용 부분에는 ‘不可以旬數矣’로 되어 있고, 《列子》 〈黃帝〉편에도 ‘不可以旬數矣’로 되어 있다(劉文典).
역주19 吾見怪焉 : 괴이한 조짐을 봄. 怪는 괴이한 조짐. 阮毓崧은 “괴이한 징조이니 濕灰를 말한 것이다[卽怪徵 謂濕灰].”라고 풀이했다.
역주20 見濕灰焉 : 젖은 재의 모습을 봄. 濕灰는 생기라곤 전혀 없는 모습을 젖은 재에 비유한 표현이다. 林雲銘은 “죽은 재는 그래도 간혹 불이 타오를 때가 있지만, 젖은 재는 그럴 수 없다. 그 때문에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는 모습이다[死灰尙有或燃之時 濕灰則不能 所以爲死而弗活之象].”라고 설명했는데 阮毓崧과 陳鼓應도 같은 견해이다. 〈齊物論〉편의 ‘말라버린 나무와 죽은 재[枯木死灰]’의 死灰와 유사한 의미이지만, 死灰가 불꺼진 재라면 濕灰는 불꺼진 재가 다시 물에 젖어서 더 이상 타오를 가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사멸의 상태를 좀 더 강조한 표현이다.
역주21 泣涕沾(첨)襟 : 옷섶을 적시며 눈물을 흘림. 泣涕는 눈물 흘리며 운다는 뜻. 沾襟은 옷섶을 적심.
역주22 : 아까. 지난 번에. 向 또는 嚮과 같이 쓰인다. 馬叙倫은 曏(접때 향)을 생략한 글자라고 풀이했다.
역주23 示之以地文 : 대지의 무늬를 그에게 보여 줌. 地文은 대지의 무늬. 崔譔은 “文은 理와 같다[文猶理也].”고 풀이했는데 이때의 理는 ‘결’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向秀는 “마치 흙덩어리 같았다[塊然若土也].”고 풀이했고, 陳景元은 “땅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모습으로 삼는다[地以不動爲文].”고 풀이했는데 이들의 견해가 적절하다. 한편 羅勉道는 “산천초목이 대지의 무늬이다[山川草木 地之文也].”라고 했고, 陸樹芝는 “地文은 땅의 무늬이니 초목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地文者 地之文 如草木之類 是也].”라고 풀이했지만, 본문의 내용은 살아날 가망이 없는 모습을 地文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山川草木을 비유한 것이 地文이라는 이들의 견해는 옳지 않다.
역주24 萌乎不震不正(止) : 멍하니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음. 萌乎는 멍한 모습으로 〈齊物論〉 편에 나오는 ‘芒乎’와 같다. 張之純, 阮毓崧 등은 芒乎의 假借라고 했다. 震은 動으로 《周易》 〈說卦傳〉에서 震卦를 動으로 풀이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따라서 不震不止는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는 뜻. 《莊子集釋》 본에는 不震不正으로 되어 있으나 崔譔本과 《列子》, 그리고 兪樾의 주장에 근거하여 ‘正’을 ‘止’로 고쳐 번역하였다. 陳景元 또한 江南古藏本에 근거하여 止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역주25 是殆見吾杜德機也 : 그는 아마도 나의 生機가 막혀 버린 모습을 보았을 것임. 是는 季咸을 지칭하는 대명사. 殆는 추측을 나타내는 부사로 아마도, 틀림없이의 뜻. 杜는 막(히)다의 뜻. 成玄英은 塞으로 풀이했다. 德은 生과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周易》 〈繫辭傳 下〉의 “천지의 대덕을 생이라 한다[天地之大德曰生].”고 한 맥락과 유사하다. 機를 幾로 보고 조짐이나 전조의 뜻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장자에 나오는 機자는 모두 기계적인 의미의 메카니즘에 가까운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成玄英은 機를 움직임[動]으로 풀이했고, 林希逸은 德機를 生意라고 풀이했는데 이 두 견해를 절충하여 德(生氣)을 발동시키는 기틀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生機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秋水〉편의 ‘天機之所動’과 같은 구절을 참고할 때 機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라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근원적인 무엇을 지칭한다. 따라서 林希逸이 生意로 풀이한 것이 본래의 의미에 가장 가깝다.
역주26 幸矣 子之先生遇我也 有瘳(추)矣 : 다행이다. 그대의 선생은 나를 만남이여! 병이 다 나았다. 자신을 만난 덕분에 호자의 병이 낫게 되었다는 뜻.
역주27 吾見其杜權矣 : 〈어제는〉 내가 〈그대의 선생에게서〉 생기가 막혀 버린 모습을 보았다. 杜權 두 글자는 매우 難解하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본문의 번역은 郭象의 풀이를 따른 것이다. 林希逸은 “杜權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權은 機와 같다. 다만 機는 隱微하지만 權은 드러나 있다. 닫히고 막힌 가운데에 움직임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杜權 不動之動也 權與機同 但機微 而權則露矣 於杜閉之中 動機已露].”라고 풀이하여 杜權을 막힌 가운데에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옳지 않다. 또 羅勉道의 경우도 “닫혀지고 감춰진 속에 도리어 權變이 있으니, 어제 본 것과 대략 같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閉藏之中 却有權變 覺與昨日所見 略不同也].”라고 풀이하여 林希逸과 마찬가지로 杜權을 생기가 움직이는 의미로 풀이하였고, 池田知久나 方勇‧陸永品 등도 같은 견해이지만 모두 옳지 않다. 무엇보다 權과 機를 같은 의미로 풀이하면서 앞의 杜德機는 생기가 막힌 모습으로 풀이하고 여기의 杜權을 정반대의 의미로 풀이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다만 機變과 權變이 같은 의미로 쓰이므로 機와 權을 같은 것으로 풀이한 것은 정확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곽상이 “權은 機이다. 이제야 비로소 어제 본 것을 깨달은 것이니 생기가 막힌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權機也 今乃自覺昨日之所見 見其杜權 故謂之將死也].”라고 하여 杜權을 앞의 杜德機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계함이 어제 호자에게서 보았던 상을 이제서야 깨닫고 말한 것으로 풀이한 견해를 따른다. 成玄英도 “전날 한번 보았을 때는 젖은 재와 같아서 機權이 막혀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데 오늘 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완전한 생기를 얻게 되었다[前時一覩 有類濕灰 杜塞機權 全無應動 今日遇我 方得全生].”고 풀이하여 곽상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다만 郭象의 견해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곽상은 계함이 이제 비로소 어제 본 모습을 깨달은 것이라고 했지만, 이 구절은 계함이 어제는 호자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가 오늘은 다시 살게 되었다고 예언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뒤집게 된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한 말로 보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뒤에 관상 보기를 포기하면서 “당신 선생의 관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관상을 볼 수 없다.”고 변명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오늘 비로소 어제 본 모습을 안 것이 아니라 어제는 생기가 막힌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오늘 보니 생기가 완연하기 때문에 살 것이라고 말한 것이므로 어제 본 모습을 이제서야 알았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역주28 示之以天壤 : 하늘의 모습을 보여줌. 天壤은 天相, 곧 天象과 같다(高亨). 壤을 땅[地]의 뜻으로 보고 天壤을 天地로 보는 풀이(司馬彪, 向秀, 成玄英, 陳壽昌, 方勇‧陸永品, 安東林 등)가 많지만, 여기의 天壤은 高亨과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앞의 地文과 對句이므로 天地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天文地理라고 할 때의 文과 理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여기의 壤도 文과 같은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高亨이 “곧 天相이고, 또한 天象이다[卽天相 亦卽天象也].”고 풀이한 견해를 따른다. 한편 赤塚忠은 “壤은 술을 빚어낸다는 뜻인 釀의 假借字이다.”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29 名實不入 : 명칭이나 실제가 들어갈 수 없음. 곧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내용을 알 수도 없다는 뜻. 관상의 기준으로 天壤을 어떤 상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고 내용을 규정할 수도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郭象은 名實을 名利로 보았고, 成玄英도 “명예나 진실 따위가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없다[名譽眞實 曾不入於靈府也].”고 풀이하여 名實을 名譽와 眞實로 보았지만, 《장자》에 나오는 名實은 대부분 명칭과 실제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는 陸樹芝가 “그 가운데에서 명칭을 붙이려 하고 실제를 찾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欲於其中 指其名 求其實 則不可得矣].”고 풀이한 것을 따라 명칭과 실제로 본다. 池田知久도 같은 입장인데 그에 의하면 ‘名實不入’은 ‘명칭과 실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채로’의 뜻이 된다.
역주30 機發於踵 : 生氣가 발뒤꿈치에서 발생함. 機는 앞에 나온 德機, 곧 生機를 말한다. 踵은 발뒤꿈치. 〈大宗師〉편에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라고 유사한 내용이 나왔다. 林希逸은 “그 기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 오는데 隱微하여 볼 수가 없다. 그 때문에 機라 한 것이다[言其氣自下而上 微而不可見 故曰機].”라고 풀이했고, 宣穎은 “한조각 생기가 발뒤꿈치로부터 발생한다[一段生氣自踵而發].”고 풀이했다.
역주31 殆見吾善者機也 : 아마도 나의 生機를 보았을 것임. 善은 生, 곧 앞의 덕과 같다. 宣穎은 善을 生意로 풀이했는데, 林希逸이 德機를 生意로 풀이한 것과 같다. 善者機也의 구문에 대해서는 아직 定說이 없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거나 언급한 경우에도 근거가 박약하다. 聞一多의 경우 者善機也의 잘못이라고 보고 殆見吾者善機也로 보았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근거가 박약하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의 者는 之나 施와 같이 인명이나 지명 사이에 의미없이 붙는 虛辭(之의 경우는 〈齊物論〉편 제4장 麗之姬의 역주 참조, 施의 경우는 《孟子》 〈公孫丑 上〉에서 孟舍를 孟施舍라고 한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거나, 본래 ‘殆~者也’의 문장형식으로 ‘아마도 ~일 것’이라는 뜻의 추측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곧 善者機也는 善機者也의 잘못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앞의 殆見吾杜德機也와 뒤의 殆見吾衡氣機也의 경우 者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확정하기는 어렵다.
역주32 不齊 : 가지런하지 않음. 곧 관상이 일정하지 않다는 뜻. 齊를 재계한다[齋]는 뜻으로 보는 견해(陸德明)도 있지만, 向秀, 郭象, 兪樾의 견해를 따라 본래 글자 그대로 보는 것이 옳다.
역주33 太沖莫勝(짐) : 허무하고 흔적이라곤 전혀 없음. 兪樾에 의거 《列子》 〈黃帝〉편에 ‘太沖莫朕’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勝을 朕으로 본다. 章炳麟, 王叔岷, 赤塚忠, 池田知久 등도 모두 같은 견해. 郭象과 成玄英 등은 勝負의 勝으로 풀이했지만 옳지 않다. 福永光司도 역시 莫勝을 ‘일체의 대립과 상극이 超克된 상태’로 보았는데 역시 부적당하다. 陳鼓應은 “太沖은 곧 太虛이고, 莫勝은 곧 無朕이니 太沖莫勝은 太虛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역주34 衡(형)氣機也 : 氣機가 평형을 이룸. 곧 陰陽의 氣가 치우침 없이 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앞의 地文이 陰氣를 보여 준 것이고, 다음의 天壤이 陽氣를 보여 준 것이라면 여기의 太沖莫勝은 陰陽의 氣가 고르게 조화된 상태를 보여 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衡은 平衡을 이루었다는 뜻(成玄英). 林雲銘은 “음양의 두 기가 고르게 되면 屈伸往來하는 어느 순간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道이다[陰陽二氣旣平 屈伸往來 有不可執 非生非死之道].”라고 풀이했다.
역주35 鯢(예)桓之審爲淵 : 고래가 이리저리 헤엄치는 깊은 물이 연못임. 司馬彪는 鯢桓을 두 물고기 이름[二魚名也]이라고 했지만, 《列子》 〈黃帝〉편에 ‘鯢旋之潘爲淵’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옳지 않다. 盤桓과 盤旋은 같은 뜻이므로 鯢는 고래이고 桓은 盤桓으로 이러저리 오가는 모습으로 풀이한 簡文帝의 견해가 옳다. 成玄英 역시 “鯢는 큰 물고기이다. 桓은 도는 것이다[鯢大魚也 桓盤也].”라고 풀이했다. 審은 깊다[深]는 뜻(奚侗, 李勉). 곧 물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깊은 물을 모두 연못[淵]이라고 일컫는다는 뜻이다.
역주36 淵有九名 : 연못에는 아홉 가지 명칭이 있음. 곧 아홉 가지 종류가 있다는 뜻. 《列子》 〈黃帝〉편에는 ‘鯢旋之潘爲淵 止水之潘爲淵 流水之潘爲淵 濫水之潘爲淵 沃水之潘爲淵 氿水之潘爲淵 雍水之潘爲淵 汧水之潘爲淵 肥水之潘爲淵 是爲九淵焉’으로 九淵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역주37 此處三焉 : 이것은 세 가지에 해당함. 곧 이번에 계함에게 보여 준 것은 아홉 가지 중에서 세 가지에 해당한다는 뜻. 세 개의 淵이 윗 문장의 地文, 天壤, 太沖莫勝의 相을 비유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淵이 어느 相에 맞는지에 대해서는 古來로 일치한 견해가 없다(池田知久). 成玄英은 鯢桓은 衡氣機(太沖莫勝)이고, 止水는 杜德機(地文)이며, 流水는 善者機(天壤)라고 풀이했다. 陳壽昌, 福永光司, 金谷治 등도 같은 견해이다.
역주38 立未定 : 선 채로 아직 앉지도 않음. 定은 坐定의 뜻.
역주39 自失而走 : 얼이 빠져 달아남. 徐邈은 失의 音을 일[逸]로 표기하고 있는데 逸 또한 달아난다는 뜻이므로 의미에 큰 차이가 없지만, 陸德明이 《列子》의 《釋文》에서 본래 글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달아났다[喪失精神而走].”고 풀이한 것이 보다 적절하다.
역주40 示之以未始出吾宗 : 그에게 아직 나의 근본에서 떠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줌. 吾宗의 宗은 도를 의미하며, 未始出吾宗은 근본인 도에서 떠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德充符〉편의 ‘守其宗也’, 〈天下〉편의 ‘不離於宗’의 宗과 같은 맥락.
역주41 與之虛而委蛇(이) : 마음을 비우고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그를 대함. 與之의 之는 계함을 지칭하는 대명사. 虛는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 陳鼓應은 陳啓天의 말을 인용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고 의도를 드러냄도 없다[無所執着 無所表示].”로 풀이했다. 委蛇는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 陸德明은 ‘지극히 順한 모습[至順之貌]’으로 풀이했다. 《詩經》 〈召南 羔羊〉에 ‘委蛇委蛇’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의젓하여 아무런 욕심이 없는 모습’을 뜻한다. 朱熹는 《詩經集傳》에서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自得之貌]’이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委蛇는 욕심이 전혀 없이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역주42 因以爲弟靡 : 따라서 무엇이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함. 弟靡의 경우 靡를 무너지다, 쓰러지다의 뜻으로 보는 데에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지만, 弟에 대해서는 異說이 분분하다. 徐邈은 弟의 音을 頹로 붙이고 丈回의 反切로 표기하여 무너진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聞一多가 이 견해를 지지했지만, 方勇‧陸永品의 지적처럼 어디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다. 또 《列子》 〈黃帝〉편에는 茅靡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옳다고 보는 견해(高亨, 方勇‧陸永品, 安東林)도 있지만, 두 글자가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弟를 잘못 쓴 것이라는 馬敍倫의 반박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馬敍倫은 披의 가차로 보았고 池田知久는 《說文解字》의 段玉裁注에서 柀靡를 흩어져서 떨어지는 모양[分散下垂之貌]으로 풀이한 것에 근거하여 柀靡로 보았는데 뜻풀이는 적절하지만 역시 근거가 완전하지 않다. 한편 奚侗과 朱桂曜는 夷의 잘못이라고 보고 무너지다[夷]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현재로서는 이 견해가 가장 따를 만하지만, 夷의 잘못으로 보기보다는 荑(제)의 잘못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荑字에는 ‘제’와 ‘이’ 두 音이 있고 각각 풀 이름과 베어낸다는 뜻으로 쓰인다. 《孟子》 〈告子 上〉의 ‘不如荑稗’, 《詩經》 〈邶風 靜女〉의 ‘自牧歸荑’, 《周易》 大過卦의 ‘枯楊生荑’의 경우는 모두 ‘제’로 읽으며 풀 이름 또는 어린 싹을 뜻한다. 그런데 《周易》의 ‘枯楊生荑’는 ‘枯楊生稊’로 된 판본도 있기 때문에 荑와 稊가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周禮》 〈地官 稻人〉의 ‘夏以水殄草而芟荑之’의 경우에는 荑를 ‘이’로 읽으며 베어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같은 말인 芟荑가 《春秋左氏傳》 隱公 6年條의 ‘芟夷薀崇之’에는 芟夷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荑와 夷가 통용됨을 알 수 있다. 또 甲骨文과 金文의 弟字는 篆文의 夷字로 혼동할 정도로 字形이 一致한다. 이처럼 荑는 두 가지 音과 두 가지 유사한 字形 때문에 弟 또는 夷와 통용되었고 夷에 무너지다[陵夷]는 뜻이 있기 때문에 音과 訓이 혼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弟靡는 곧 荑靡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무너지고 쓰러진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역주43 因以爲波流 : 따라서 무엇인가 노도처럼 물결쳐 온다고 생각함. 波流는 물결치는 모습. 崔譔本에는 波隨로 되어 있다.
역주44 自以爲未始學 : 스스로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함. 未始는 未曾과 같다.
역주45 爲其妻爨(찬) : 자기 아내를 위해 밥을 지음. 爨은 불을 때서 밥을 짓는다는 뜻.
역주46 食(사)豕如食(사)人 : 돼지 먹이기를 사람 먹이듯 함. 사람과 짐승의 구별을 잊어버렸다는 뜻. 食는 먹인다는 뜻의 사역동사로 ‘사’로 읽는다. 豕는 돼지.
역주47 於事無與親 : 매사에 더불어 親疏를 따짐이 없음. 누구를 사사로이 친애하여 대상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뜻. 成玄英은 “親疏를 구분하지 않았다[無親疏也].”고 풀이했다. 無與親은 〈齊物論〉편의 ‘吾誰與爲親’, 〈天運〉편과 〈庚桑楚〉편의 ‘至仁無親’, 《老子》 제5장의 ‘天地不仁’, 제79장의 ‘天道無親’ 등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48 雕琢復(복)朴 : 雕琢하여 朴으로 돌아감. 곧 인위를 깎아 버리고 쪼아 없애서 소박한 데로 돌아간다는 뜻. 《古逸叢書》본에는 彫琢으로 되어 있고(池田知久), 《列子》 〈黃帝〉편에는 雕瑑으로 되어 있다. 雕琢은 새기고 쪼아대는 인위적인 행위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정반대로 그런 행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雕琢復朴은 “인위를 깎아 버리고 쪼아 없애서 본래의 소박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復은 돌아간다는 의미의 동사. 朴은 樸과 같다(馬敍倫). 이 구절과 유사한 표현이 〈山木〉편에 ‘旣雕旣琢 復歸於朴’으로 나온다.
역주49 塊然 : 아무런 감정없이 외로이 있는 모양. 成玄英은 “塊然은 감정이 없는 모양이다. 밖으로는 꾸밈을 없애고 안으로는 心智를 버려서 마른 나무의 모습처럼 외로이 짝이 없다[塊然 無情之貌也 外除彫飾 內遺心智 槁木之形 塊然無偶也].”고 풀이했고, 朱桂曜는 ‘홀로 있는 모양[獨處貌]’이라고 풀이했다. 池田知久는 朱桂曜와 福永光司, 赤塚忠 등의 견해를 따르면서, 成玄英이 無情之貌로 풀이한 것은 부적당하다고 했지만, 成玄英 또한 ‘塊然無偶’라는 풀이를 덧붙이고 있으므로 大意에 차이가 없다. 따라서 두 견해를 절충하여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50 獨以其形立 : 홀로 섬. 일체의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자유로운 道의 경지에 자신을 세웠음을 비유. 《老子》 제25장에서 道를 ‘獨立不改 周行而不殆’로 표현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역주51 紛而封哉(戎) : 어지러이 만물과 뒤섞임. 곧 萬物과 일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物과 我, 是와 非 등 일체의 대립을 모조리 싸 안는 혼돈의 세계에서 노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紛而는 어지러운 모양(崔譔). 張君房본에는 紛然而로 되어 있고(陳景元), 《列子》 〈黃帝〉편에는 㤋然而로 되어 있다. 吳汝綸, 張之純, 馬敍倫 등은 而를 如, 또는 然으로 보았는데 그대로 두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封戎은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모습. 《莊子集釋》본에는 ‘封哉’로 되어있지만, 陸德明은 崔選本에는 封戎으로 되어 있고 散亂의 뜻으로 풀이하였다고 했으며, 《列子》 〈黃帝〉편에도 封戎으로 되어 있다. 郭象이 紛而封哉를 그대로 두고 “비록 움직여도 本眞은 흩어지지 않는다[雖動而眞不散也].”고 풀이한 이래, 세상일이 어지럽게 밀려들어도 경계[封]를 두어 거기에 흔들리거나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成玄英, 安東林)가 있으나, 李楨, 宣穎, 章炳麟, 武延緖, 朱桂曜, 馬敍倫 등은 모두 封戎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 중 李楨이 바로 뒤에 나오는 以是爲終의 終과 紛而封戎의 戎이 叶韻이므로 戎이 옳다고 고증한 내용이 정밀하다. 따라서 李楨의 고증을 따라 封戎으로 고쳐서 어지럽게 뒤섞인 모습[散亂, 雜亂]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52 : 戎
역주53 一以是終 : 한결같이 이런 태도를 지키면서 일생을 마침. 林希逸은 “죽을 때까지 늘 이와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言其終身常如此也].”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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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장(1)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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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5장(2)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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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5장(3)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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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5장(4)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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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5장(5)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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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5장(6)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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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5장(7)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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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5장(8)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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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5장(9)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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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5장(10) 141

장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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