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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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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小識 傷德하고 小行 傷道하나니라
曰 正己而已矣라하니 니라
러니 今之所謂得志者 軒冕之謂也
軒冕 在身 非性命也 니라
無憂而已矣니라


옛날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했던 사람은 말재주로 자신의 지혜를 꾸미지 않았으며, 지혜로 천하天下 만상萬象을 다 알아내려 하지 않았으며, 또 지혜로 궁구窮究하지 아니하고 홀로 자신의 자리에 똑바로 서 있으면서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밖에 또 무엇을 했겠는가.
는 본시 자잘한 행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은 본시 자잘한 지식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자잘한 지식은 을 해치고 자잘한 행실은 를 해친다.
그래서 “내 몸을 바로잡을 뿐이다.”고 말하는 것이니, 즐거움이 온전해지는 것을 일러 뜻을 얻었다고 일컫는다.
옛날의 이른바 뜻을 얻었다는 것은 〈수레를 타고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높은 벼슬아치가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즐거움도 더 보탤 것이 없는 경지를 말할 따름이었는데, 오늘날의 이른바 뜻을 얻었다는 것은 〈수레를 타고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높은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가령 〈수레나 면류관 따위의〉 높은 벼슬이 내 몸에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여天與의 본성이 아니고, 〈벼슬이라는〉 외물이 우연히 밖에서 들어와 내 몸에 기생寄生한 것일 뿐이다.
외물이 밖에서 들어와 기생하는 경우,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가는 것을 붙들 수도 없다.
그 까닭에 〈옛날 뜻을 얻었던 사람은 수레를 타고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해서 뜻을 멋대로 부리지 아니하며 곤궁 빈핍하다고 해서 세속에 영합하지 않아서 그것을 이것과 똑같이 즐겼다.
그 때문에 마음속에 근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기생했던 외물이 떠나면 곧 앙앙불악怏怏不樂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비록 〈높은 벼슬이 찾아와〉 즐거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본연의 즐거움은 망실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외물外物에 잃어버리고 세속에 끌려 자기의 본성을 상실한 자, 이런 사람을 일러 본말本末전도顚倒된 인간이라 한다.”


역주
역주1 古之行身者 : 옛날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했던 사람. 底本인 《莊子集釋》본에는 行身의 行이 世德堂본에서는 存으로 되어 있다고 注하고 있다. 여기서도 行身을 자기 몸을 보존한다는 뜻으로 위의 存身之道의 存身과 같은 것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褚伯秀, 林雲銘, 陳壽昌, 池田知久, 方勇‧陸永品이 모두 存身이 옳다고 하였다.
역주2 不以辯飾知 : 말재주로 자신의 지혜를 꾸미지 않음. 〈天下〉편에서 “惠施는 날마다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변론하였다[惠施日以其知與人之辯].”고 했는데 ‘以辯飾知’란 바로 혜시와 같은 경우를 지칭한다(王叔岷).
역주3 不以知窮天下 : 지혜로 天下萬象을 다 알아내려 하지 않음. 窮은 窮究한다는 뜻. 成玄英은 “窮은 곤궁하게 하고 얽맴을 말함이니 함부로 지혜를 부려 해독을 끼쳐 창생을 곤고하게 하지 않음이다[窮者 困累之謂也 不縱知毒害以困苦蒼生也].”고 풀이하여 窮을 ‘困窮하게 하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적절치 않다. 한편 錢穆은 ‘下’자를 衍文으로 보고 不以知窮天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앞의 ‘不以辯飾知’와 바로 뒤의 ‘不以知窮德’과의 對句를 고려한 듯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여기의 天下는 《周易》 〈繫辭傳 上〉편에 보이는 “감응하면 마침내 천하 사사물물의 연고를 안다[感而遂通天下之故].”고 할 때의 ‘天下’와 같이 천하의 事事物物의 이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역주4 不以知窮德 : 지혜로 德을 窮究하지 아니함. 郭象은 “자신의 德을 지킬 뿐이다[守其自德而已].”라고 풀이했다. 또 成玄英은 “지식을 자기 분수에 맞게 멈추어서 끝없는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터득한 德을 얽매지 않음이다[知止其分 不以無涯而累其自得也].”고 풀이했는데 窮을 ‘얽매다’는 뜻으로 본 것은 앞에서 밝혔듯이 적절치 않다.
역주5 危然處其所 而反其性已 : 홀로 자신의 자리에 똑바로 서 있으면서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갔을 뿐임. 危然은 홀로 똑바로 선 모양. 朱駿聲은 《廣雅》에서 “危는 올바름이다[危 正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正’으로 풀이했다. 郭象은 “危然은 홀로 올바로 선 모양이다[危然 獨正之貌].”라고 풀이했고, 成玄英은 “危는 獨과 같다. 홀로 난세의 한가운데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머물러서도 있는 곳을 편안하고 즐겁게 여기고 움직일 때 고요함을 해치지 않고 늘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감을 말한 것이다[危 猶獨也 言獨居亂世之中 處危而所在安樂 動不傷寂 恆反自然之性].”라고 풀이했다.
역주6 又何爲哉 : 그밖에 또 무엇을 했겠는가.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라 움직일 뿐 無爲함을 말한 것이다. 成玄英은 “본성을 따라 움직이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무위함을 말한 것이다[率性而動 復何爲之哉 言其無爲也].”고 풀이했다. 王叔岷은 앞의 反其性已의 已가 己로 표기된 판본이 있는 것을 근거로 앞의 문장을 ‘危然處其所 而反其性’으로 마무리하고 이 구의 앞에 己자를 붙여 ‘己又何爲哉’로 절구하고 “자기가 또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의미로 풀이했는데 참고삼아 밝혀 둔다.
역주7 道固不小行 德固不小識 : 道는 본시 자잘한 행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德은 본시 자잘한 지식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님. 道와 德은 자잘한 행실로 도달하거나 자잘한 지식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郭象은 “道는 탄탄한 길에서 노닌다[遊於坦途].”고 풀이했는데 이는 小行을 작은 길로 보고 풀이한 듯한데 다소 미흡하다. 成玄英은 “작은 성취는 도를 숨기니 참으로 자잘한 행실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小成隱道 固不小行矣].”고 풀이했는데 〈齊物論〉편에서 “道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는다[道隱於小成].”고 한 내용에 착안한 것으로 적절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역주8 樂全之謂得志 : 즐거움이 온전해지는 것을 일러 뜻을 얻었다고 일컬음. 郭象은 “스스로 뜻을 얻어서 홀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슬픔이나 즐거움이 없게 하니 이것이 즐거움이 온전한 것이다[自得其志 獨夷其心 而無哀樂之情 斯樂之全者也].”고 풀이했다.
역주9 古之所謂得志者 非軒冕之謂也 : 옛날의 이른바 뜻을 얻었다는 것은 수레를 타고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처지가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님. 곧 높은 벼슬아치가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軒은 수레, 冕은 면류관으로 모두 벼슬아치들의 사치스런 물건을 뜻한다. 成玄英은 “軒은 수레이고 冕은 冠이다[軒 車也 冕 冠也].”고 풀이했다.
역주10 謂其無以益其樂而已矣 : 그 어떤 즐거움도 더 보탤 것이 없는 경지를 말할 따름임. 郭象은 “내면을 완전하게 하면 만족함이다[全其內而足].”라고 풀이했다. 益은 보탠다는 뜻. 成玄英은 “益은 보탬이다[益 加也].”라고 풀이했다.
역주11 物之儻來寄者也 : 벼슬이라는 외물이 우연히 밖에서 들어와 내 몸에 寄生한 것일 뿐임. 儻은 우연, 요행의 뜻. 崔譔본에는 儻자가 黨으로 표기되어 있고 ‘衆’의 뜻으로 풀이했지만 옳지 않다. 成玄英이 “儻이란 의외로 갑자기 오는 것일 따름이다[儻者 意外忽來者耳].”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역주12 寄之 其來不可圉 其去不可止 : 외물이 밖에서 들어와 기생하는 경우,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가는 것을 붙들 수도 없음. 외물은 기필할 수 없다는 뜻이다. 郭象은 “외물에 달려 있을 뿐이니 득실을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在外物耳 得失之非我也].”고 풀이했는데 간명하고 적절한 견해이다. 陸德明은 ‘圉’자가 ‘御’자로 표기된 판본도 있다고 했는데 막는다는 뜻인 ‘禦’의 가차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13 不爲軒冕肆志 不爲窮約趨俗 : 〈옛날 뜻을 얻었던 사람은〉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해서 뜻을 멋대로 부리지 않았으며 곤궁 빈핍하다고 해서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음.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孟子》 〈滕文公 下〉에서 “뜻을 얻어서는 백성들과 함께 올바른 도리를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해서는 홀로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 부귀가 타락시킬 수 없으며 빈천이 뜻을 바꾸게 할 수 없으며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 한다[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고 한 대목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역주14 其樂彼與此同 : 그것을 이것과 똑같이 즐김. 彼는 軒冕, 곧 높은 벼슬아치가 됨이고 此는 窮約한 처지가 됨을 말한다. 높은 벼슬아치가 되건 곤궁하게 사는 처지가 되건 똑같이 道를 즐겼다는 뜻이다.
역주15 今 寄去則不樂 :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기생했던 외물이 떠나면 곧 怏怏不樂함. 寄는 우연히 찾아와서 기생했던 외물, 곧 軒冕으로 대표되는 높은 벼슬을 말한다.
역주16 雖樂 未嘗不荒〈亡〉也 : 비록 〈높은 벼슬이 찾아와〉 즐거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본연의 즐거움은 망실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임. 荒은 荒亡으로 亡失의 뜻이다. 阮毓崧은 “수레와 면류관을 즐거워할 때 외물을 내면의 즐거움과 바꾸었으니 자연의 본성은 반드시 망실되었을 것이다[當樂軒冕時 以外易內 其性必已荒亡].”라고 풀이했고, 馬叙倫은 “荒은 亡의 假借이다[荒 借爲亡].”라고 풀이했는데 이들의 견해를 따랐다.
역주17 喪己於物 失性於俗者 : 자기를 外物에 잃어버리고 세속에 끌려 자기의 본성을 상실한 자. 物은 우연히 찾아온 높은 벼슬 따위이고 俗은 세속적 가치로 높은 벼슬을 추구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역주18 謂之倒置之民 : 이런 사람을 일러 本末이 전도된 인간이라 함. 倒置는 本末과 輕重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뜻으로 바로 위의 ‘喪己於物 失性於俗’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기보다 외물을 중시하고 본성보다 세속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본말이 전도된 경우를 가리킨다. 崔譔은 “성명을 거슬러 따르지 않음이다[逆其性命而不順也].”고 풀이했고, 向秀는 “외물을 가지고 내면과 바꾸었으니 倒置라고 말할 만하다[以外易內 可謂倒置].”고 풀이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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