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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3)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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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貴者 하야 하나니 其爲形也 亦疏矣
人之生也 與憂俱生이어늘 하나니
其爲形也 亦遠矣
이라하나니
不爭이면 名亦不成하나니
今俗之所爲 與其所樂 又未知樂之果樂邪 果不樂邪
吾觀夫俗之所樂한댄 하나니
로니 又俗之所大苦也로다
라하나니라
請嘗試言之하노라


천하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가 없는가.
내 몸을 편안히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는가.
이제 무엇을 하고 무엇을 그만두고, 무엇을 피하고 무엇에 머물며, 무엇에 나아가고 무엇을 떠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해야 하는가.
무릇 천하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부귀富貴와 장수와 명예이고, 좋아하는 것은 몸이 편안한 것과 맛있는 음식과 예쁜 옷과 미색과 음악이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빈천貧賤과 요절과 악평이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몸이 편안하지 못하며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며 몸에 예쁜 옷을 걸치지 못하며 눈으로 미색을 보지 못하며 귀로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 이런 것들을 가지고 몸을 기르는 것은 또한 어리석은 짓이다.
무릇 부자富者는 몸을 괴롭히고 재빠르게 일하여 재물財物을 많이 축적蓄積하지만 다 쓰지도 못하니 그 몸을 기르는 방법치고는 또한 빗나간 짓이다.
무릇 신분이 귀한 자는 밤으로 낮을 이어서 쉴 틈도 없이 정치政治의 선악을 따지느라 마음을 썩이니 그것을 가지고 몸을 기르는 것은 또한 소원疏遠한 일이다.
사람의 삶은 근심과 함께 살아가는데 장수하는 사람은 정신이 흐린 상태에서 오래도록 근심하면서 죽지도 않으니, 이 무슨 괴로움인가.
그것을 가지고 몸을 기르는 것은 또한 멀리 빗나간 일이다.
열사烈士는 천하 사람들로부터 하다고 평가를 받지만 자신의 몸을 살리지는 못하였으니, 나는 알 수 없구나.
〈세상에서 말하는〉 이라는 명예가 정말로 인가 아니면 참으로 이 아닌 것인가.
만일 그것을 이라고 한다면 〈이라는 것이〉 자신의 몸조차 살리기에 부족한 것이 되고, 만일 그것을 불선不善이라고 한다면 〈불선不善이란 것이 자신의 몸을 살리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을 족히 살린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군주에게〉 충간忠諫을 했을 때 군주가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뒷걸음쳐 물러나 임금과 다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오자서伍子胥는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억지로 을 강요하여 그 결과 자신의 몸을 해쳤다.
만약 그때 을 강요하여 다투지 않았더라면 〈열사烈士라는〉 명예가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이란 진실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지금 세속 사람들의 행동과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살펴볼 때〉 나는 또 알지 못하겠구나. 그 즐거움이란 것이 과연 즐거운 것인가, 아니면 과연 즐겁지 아니한 것인가.
내가 저 세속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것을 살펴볼진댄 온 세상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려가는 것이 죽을 둥 살 둥 마치 장차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 없어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겁다’고 하는 것을, 나는 그게 즐거운 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해서 또한 그것을 즐겁지 않은 줄도 모르겠으니 과연 정말 즐거움이란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는 생각건대 무위無爲라야만 참으로 즐거울 것이니, 이 무위無爲는 또 세속 사람들은 크게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고 최고의 명예는 명예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하의 시비是非에 관한 판단은 결국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무위無爲의 태도를 지켜야만 비로소 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니 지극한 즐거움은 자신의 몸을 살릴 수 있으니 오직 무위를 지켜야만 거의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
하늘은 무위無爲하는지라 그로써 맑음을 유지하고, 땅은 무위無爲하는지라 그 때문에 〈요동 없이〉 편안하다.
그 때문에 하늘과 땅, 이 둘의 무위無爲가 서로 합쳐야만 비로소 만물이 모두 생성 변화하여 황홀한 가운데 어디서부터 생성되어 나오는지 알 수 없으며, 홀황惚恍한 가운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만물이 무성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 모두 무위無爲로부터 번식한다.
그 때문에 말하기를, 천지는 무위無爲함으로써 무슨 일이든 해낸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그 누가 무위無爲할 수 있을 것인가.


역주
역주1 有至樂 無有哉 : 천하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가 없는가. 이 세상에 절대의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가설해서 묻는 말. 至樂은 지극한 기쁨, 최고의 즐거움. 至는 지극함[極]이고 樂은 기쁨[歡]이다(陸德明). 成玄英은 “가설해서 묻는 말[假問之辭].”이라고 풀이했다.
역주2 有可以活身者 無有哉 : 내 몸을 편안히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는가. 可以活身의 道가 있는지 없는지 묻는 내용이다. 成玄英은 “우주 안에 지극한 환락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내 목숨을 편안하게 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말한 것이다[言寰宇之中 頗有至極歡樂 可以養活身命者無有哉].”고 풀이했다.
역주3 今奚爲奚據 : 이제 무엇을 하고 무엇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奚는 何와 같다. 《列子》 〈力命〉편에는 “어디를 떠나고 어디로 나아가며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즐거워하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까[奚去奚就 奚哀奚樂 奚爲奚不爲].”로 되어 있다. 따라서 奚爲의 爲와 奚據의 據는 상반되는 의미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4 奚避奚處 奚就奚去 奚樂(요)奚惡(오) : 무엇을 피하고 무엇에 머물며, 무엇에 나아가고 무엇을 떠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해야 하는가. 避와 處, 就와 去, 樂와 惡는 각각 상반된 뜻으로 의미는 앞의 ‘奚爲奚據’와 대동소이하다.
역주5 富貴壽善 : 富貴와 장수와 명예. 成玄英은 “천하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부유하여 재물과 보배가 충분한 것, 신분이 귀하여 영화를 극진히 누리는 것, 수명이 긴 것, 아름다운 명성이 영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天下所尊重者 無過富足財寶 貴盛榮華 壽命遐長 善名令譽].”고 풀이했다. 王叔岷은 《說文解字》에서 “美와 善은 같은 뜻이다[美與善同意].”고 풀이한 것을 따라 善을 美와 같다고 풀이했다. 참고로 말하면, 중국인의 전통적인 幸福觀을 표시하는 《書經》 〈洪範〉의 ‘五福’의 개념과도 연관되는 것이 이 ‘富貴壽善’이다.
역주6 身安厚味美服好色音聲 : 몸이 편안한 것과 맛있는 음식과 예쁜 옷과 미색과 음악. 身安은 四肢의 安逸을 의미한다.
역주7 所下者 : 하찮게 여기는 것. 사람들이 아래로 여기는 바의 것, 즉 賤視하고 싫어하는 것.
역주8 貧賤夭惡 : 貧賤과 요절과 악평. 惡은 악평. 王叔岷은 《漢書》 顔師古 注를 인용하여 “讒毁”라고 풀이했다.
역주9 身不得安逸 口不得厚味 形不得美服 目不得好色 耳不得音聲 : 몸이 편안하지 못하며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며 몸에 예쁜 옷을 걸치지 못하며 눈으로 미색을 보지 못하며 귀로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 厚味는 맛있는 음식. 好色은 미색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뜻한다. 好色을 ‘아름다운 색채’라고 번역하는 역주서도 있으나 취하지 않는다. 音聲은 아름다운 음악소리.
역주10 若不得者 : 만약 얻지 못하면. 者는 여기서는 假定 또는 條件을 나타내는 助字로 처리함이 좋다.
역주11 大憂以懼 :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함. 王叔岷은 以는 且와 같다고 풀이했다.
역주12 其爲形也 亦愚哉 : 이런 것들을 가지고 몸을 기르는 것은 또한 어리석은 짓임. 其는 앞에 나온 安逸, 厚味, 美服, 好色, 音聲 따위를 지시한다.
역주13 苦身疾作 : 몸을 괴롭히고 재빠르게 일함. 疾作은 재빠르게 일한다는 뜻. 王叔岷은 疾을 力과 같은 뜻으로 보아 疾作을 힘써 일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그 또한 무난한 견해이다. 成玄英도 이미 “勞神苦思하고 身力을 내달리게 한다[勞神苦思 馳騁身力].”고 하여 心身을 酷使하면서 노력한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
역주14 多積財而不得盡用 : 재물을 많이 축적하지만 다 쓰지도 못함.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면서도 스스로 다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뜻.
역주15 其爲形也 亦外矣 : 그 형체를 가진 자기 몸을 다스리는 방법은 또한 빗나간 것임. 外는 핵심과 어긋난 그릇된 행위라는 뜻으로 亦外矣는 아래의 亦疏矣, 亦遠矣와 같은 뜻임(王叔岷, 方勇‧陸永品). 外矣는 內矣의, 疏矣는 密矣의, 遠矣는 近矣의 反義語이다.
역주16 夜以繼日 : 밤으로 낮을 이음. 밤낮없이 일한다는 뜻.
역주17 思慮善否(비) : 선악을 따짐. 끊임없이 일이 잘 될지 안 될지를 따진다는 뜻. 善은 일이 잘 성사된다는 뜻이고, 否 즉 惡(악)은 그 반대의 뜻이다(方勇‧陸永品). 부정한다는 뜻으로 쓰는 否는 惡의 뜻으로 쓸 때는 音 ‘비’.
역주18 壽者惛惛 久憂不死 : 장수하는 사람은 정신이 흐린 상태에서 오래도록 근심하면서 죽지도 않음. 惛惛은 이 책의 底本인 《莊子集釋》본 등 몇몇 판본에 惽惽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으나(王叔岷, 馬叙倫) 여기서는 알기 쉬운 通行本 등을 따라 惛惛으로 고쳤다. 惛惛은 昏昏과 같은, 어둡다는 뜻으로 정신이 흐린 모습, 또렷하지 못한 모양을 나타낸다.
역주19 何苦也 : 이 무슨 괴로움인가. 何其苦也와 같다(章炳麟, 王叔岷).
역주20 烈士 : 節義에 몸을 바친 사람. 列士로 표기된 판본도 있으나 底本 대로 ‘烈士’로 함이 옳다.
역주21 爲天下見善矣 : 천하 사람들로부터 선하다고 평가받음. 爲天下所善矣와 같다(方勇‧陸永品). 곧 천하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 見은 被와 같다. 被動을 나타내는 助字로도 쓰임.
역주22 未足以活身 : 자신의 몸을 살리기에는 부족함. 身은 뒤의 人과 상대되는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지칭한다.
역주23 吾未知 : 나는 알 수 없구나. 未知는 不識과 마찬가지로 뒤 구절과 연결하여 어떤 사실을 확신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역주24 善之誠善邪 誠不善邪 : 善이라는 명예가 정말로 善인가 아니면 참으로 善이 아닌 것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善이 정말 善인지 아니면 善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역주25 若以爲善矣 不足活身 : 만일 그것을 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몸조차 살리기에 부족한 것이 됨. 善이라 하자니 그런 행위가 자신의 몸조차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는 善이라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26 以爲不善矣 足以活人 : 만일 그것을 不善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을 족히 살린 것이 된다. 不善이라고 규정하자니 그런 행위가 비록 자신의 몸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는 不善이라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27 忠諫不聽 蹲循勿爭 : 忠諫을 했을 때 군주가 듣지 않으면 뒷걸음쳐 물러나 임금과 다투지 말아야 함. 蹲循은 뒷걸음쳐 물러남. 逡巡과 같다(王念孫, 郭慶藩, 王叔岷).
역주28 子胥爭之 以殘其形 : 伍子胥는 〈吳王 夫差에게〉 억지로 善을 강요하여 그 결과 자신의 몸을 해쳤음. 爭之의 爭은 말을 듣지 않는 吳王 夫差와 善을 요구하며 諫爭하였다는 뜻. 殘은 해친다는 뜻. 오자서는 이름은 員, 子胥는 字.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였던 伍奢의 둘째 아들. 오자서에 관한 이야기는 〈胠篋〉편에 나왔고, 〈外物〉편에도 나온다.
역주29 誠有善 無有哉 : 善이란 진실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참다운 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뜻.
역주30 擧群趣者 : 온 세상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려감. 擧는 皆와 같고(王叔岷), 온 세상 사람들[擧世之人]이라는 뜻(方勇‧陸永品). 趣는 달려간다는 뜻으로 趨와 같다(方勇‧陸永品).
역주31 誙誙然如將不得已 : 가는 것이 죽을 둥 살 둥 마치 장차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 없어서 하는 것 같음. 誙誙은 세상 사람들이 앞 다투어 즐거움을 찾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赤塚忠은 “곧장 앞으로 달려가 그치지 않는 모양이다[直前不止貌].”라고 풀이했다. 成玄英은 誙誙을 “죽음으로 달려 나아가는 모양[趣死貌]”이라고 註解하였는데 이 成玄英 疏를 따르더라도 번역문은 역시 ‘죽을 둥 살 둥’으로 可하다.
역주32 而皆曰樂者 吾未之樂也 亦未之不樂也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겁다’고 하는 것을, 나는 그게 즐거운 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해서 또한 그것을 즐겁지 않은 줄도 모르겠음. 여기서 未之樂, 未之不樂의 ‘樂’은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뜻. 王叔岷은 陳景元의 《莊子闕誤》를 인용하여 未자 아래에 知자가 붙어 있다고 했는데 그 견해를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方勇‧陸永品). 곧 ‘吾未之樂也 亦未之不樂也’는 ‘吾未知之樂也 亦未知之不樂也’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成玄英 또한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겠고 또한 그것이 즐겁지 않은 줄도 알지 못하겠다[不見其樂 亦不見其不樂也].”고 풀이한 것으로 보아 知자가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역주33 吾以無爲誠樂矣 : 나는 생각건대 無爲라야 참으로 즐거울 것임. 여기서 ‘以’字는 한 글자만으로 ‘생각건대’의 뜻이 된다.
역주34 至樂無樂 至譽無譽 : 최대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고 최대의 명예는 명예가 없음. 至樂은 세속의 즐거움이 없고, 지극한 명예는 세속적인 명예가 없다는 뜻.
역주35 天下是非 果未可定也 : “천하의 是와 非에 관한 판단은 결국은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의 뜻. 이 天下是非 이하 구절의 뜻은 〈齊物論〉편 제3장의 뒷부분에 “내 입장에서 살펴보건대 仁義의 단서와 是非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서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 구별을 알 수 있겠는가[自我觀之 仁義之端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의 글이다.
역주36 無爲 可以定是非 : 無爲의 태도를 지켜야만 비로소 是와 非를 결정할 수 있음. 시비를 잊어버려야만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
역주37 至樂活身 : 지극한 즐거움은 자신의 몸을 살릴 수 있음. 成玄英은 “무릇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지라 늘 마음에 꼭 맞아서 근심이 없어 몸과 마음을 기르고 살릴 수 있으니 천수를 끝까지 누릴 수 있다[夫至樂無樂 常適無憂 可以養活身心 終其天命].”고 풀이했다.
역주38 唯無爲 幾存 : 오직 무위를 지켜야만 거의 보존될 수 있음. 幾는 ‘거의’. 成玄英은 ‘~에 가깝다[近也].’는 뜻으로 보았는데 의미의 차이는 거의 없다. 存은 생존, 보존의 뜻. 成玄英은 “무위하기 때문에 실패도 없다[無爲故無敗].”고 풀이했다.
역주39 天無爲 以之淸 地無爲 以之寧 : 하늘은 無爲하는지라 그로써 맑음을 유지하고, 땅은 無爲하는지라 그 때문에 편안함. 寧은 동요하지 않고 편안하다는 뜻. 《老子》 제39장에서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음을 유지하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함을 유지한다[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고 한 말과 거의 비슷한 맥락이다. 郭象은 “모두 저절로 맑고 편안한 것이지 무엇을 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皆自淸寧耳 非爲之所得].”고 풀이했다.
역주40 兩無爲 相合 萬物皆化 : 둘의 無爲가 서로 합쳐야만 비로소 만물이 모두 생성 변화함. 陳景元의 《莊子闕誤》에 인용된 江南古藏本에는 萬物皆化 아래에 生자가 붙어 있는데, 王叔岷은 ‘生’자는 위 문장 天無爲以之淸의 ‘淸’과 地無爲 以之寧의 ‘寧’과 같은 운이므로 生자가 붙어 있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타당한 견해이다.
역주41 芒乎芴乎 : 無爲의 도가 황홀한 모습. 황홀해서 구체적인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老子》 제21장에서 “道의 모습은 황홀하다[道之爲物 惟恍惟惚].”고 표현한 것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芒은 亡 또는 茫의 가차자로 恍과 같은 뜻으로 어두워 분명히 알기 어려운 모습이고, 芴은 勿 또는 忽의 가차자인데 惚은 본시 忽의 俗字이다. 흐리멍덩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습.
역주42 無從出乎 : 無는 從出 즉 어디로부터[從] 생성되어 나오는지[出] 확실한 모습이 없다는 뜻. 곧 어디서부터 생성되어 나오는지 알 수 없음이니 역시 천지 무위의 도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알 수 없다는 뜻. 成玄英은 “어디서 나오는지를 찾아봐도 그 유래하는 곳을 알 수 없다[尋其從出 莫知所由].”고 풀이했다. 乎는 무의미한 助字. 無有象乎의 乎도 같다.
역주43 無有象乎 : 모습이 보이지 않음. 무위의 변화는 황홀하기 때문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 宣穎은 “무위의 변화는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言無爲之化 不可測識].”고 풀이했다.
역주44 萬物職職 : 만물이 무성하게 퍼져 나감. 職職은 繁植하는 모양(李頤). 宣穎은 “많은 모양[多貌].”으로 풀이했다.
역주45 皆從無爲殖 : 모두 無爲로부터 번식함. 殖은 번식의 뜻이다. 林希逸은 “殖은 生殖함이다. 만물은 모두 자연에서 생성된다. 그 때문에 모두 무위에서 생식한다고 말한 것이다[殖 生也 萬物皆在自然中生 故曰皆從無爲殖].”고 풀이했다.
역주46 天地無爲也 而無不爲也 : 천지는 無爲함으로써 무슨 일이든 해냄. 《老子》 제37장에서 “道는 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고 한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다.
역주47 人也 孰能得無爲哉 : 사람은 그 누가 無爲할 수 있을 것인가. 세속 사람들은 무위를 체득할 수 없고, 오직 道를 체득한 聖人이라야 비로소 무위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 《老子》 제2장에는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는 문장이 있다.

장자(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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