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鼓를 읊은 노래
한유
歐陽文忠公이 말하기를 “石鼓는 岐山 남쪽에 있다.” 하였고 韋應物은 “文王의 북이니 宣王 때에 이르러서 詩를 새겼다.” 하였고 韓退之는 “곧바로 宣王의 북이다.” 하였는 바, 지금 鳳翔의 孔子 사당 가운데에 있다. 북이 열 개가 있었는데 먼저는 들에 흩어져 버려졌다. 鄭餘慶이 이것을 사당에 가져다 놓으면서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宋나라 皇祐 4년에 向傳師(상전사)가 민간에서 구하여 찾아내어 열 개의 북이 마침내 갖추어졌다. 글자는 알 수 있는 것이 465字이고 마멸되어 알기 어려운 것이 반이 넘는다.
張生이 손에 石鼓文 가지고 와서
注+孫氏는 “張生은 張籍이다.” 하였다.
〇 石鼓文 중에 글자를 알 수 있는 것은 대략 그 가사에 말하기를 “내 수레를 이미 수리하였고 내 말을 또한 같은 색으로 구비하였다.[我車旣攻 我馬旣同]” 하였고, 또 “내 수레가 이미 똑같고 내 말이 똑같다. 군자가 이에 사냥하니 사냥하며 놀도다. 사슴들이 빨리 달리니 군자가 구한다.[我車旣如 我馬旣騊 君子員獵 員獵員游 麋鹿速速 君子求之]” 하였고, 또 “물고기는 무엇인가? 연어와 잉어로다. 무엇으로 꿰는가? 버드나무와 수양버들이다.[其魚維何 維鱮維鯉 何以貫之 維楊維柳]” 하였다.나에게 한 번 石鼓歌 지으라고 권하네.
少陵 같은 사람 없고 謫仙도 죽었으니
재주 부족한 내가 장차 어찌 石鼓歌 짓겠는가.
周나라 紀綱 침체하여 四海가 물끓듯 하니
宣王이 분발하여 하늘의 창 휘둘렀네.
크게 明堂 열고 朝賀를 받으니
제후들의 칼과 패옥 서로 부딪쳐 울렸다오.
岐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영웅과 준걸들 달리게 하니
만리의 금수들 모두 길을 막고 그물로 잡았도다.
공을 새기고 성공 기념하여 萬世에 알리려
돌 깎아 북 모양 만드느라 높은 바위 무너뜨렸네.
시종하는 신하들 才藝가 모두 제일인데
선발하여 글 지어 새겨서 山阿에 남겼도다.
오랜 세월 비에 젖고 햇볕 쬐고 들불에 타니
鬼物이 수호하여 번거롭게 물리치고 꾸짖었네.
公은 어느 곳에서 이 拓本 얻었는가
털끝만한 획도 모두 갖추어져 어긋남이 없구려.
文章이 엄정하고 뜻이 치밀하여 읽어도 알기 어렵고
글자체는 隷書와 蝌蚪文字와도 같지 않다네.
年度가 깊으니 어찌 망가진 획이 있음 면할까
예리한 칼로 산 교룡과 악어 잘라 놓은 듯하네.
筆勢는 난새와 봉황이 날아 신선들 내려오는 듯하고
珊瑚와 璧玉나무 가지 서로 엉켜 있는 듯하누나.
금줄과 쇠사슬 얽어매어 놓은 듯 웅장하고
옛솥에 끓는 물인 듯 용으로 변해 날아간 북인 듯.
고루한 학자들 詩를 엮을 때에 편입하지 않았으니
大雅와 小雅도 좁고 궁박하여 여유가 없다오.
孔子는 서쪽에 갔지만 秦나라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별은 주워 모았으면서 羲娥
注+孫氏는 말하기를 “희화는 日御이고 항아는 月御이다.” 하였다.는 버렸구나.
아! 나는 옛것 좋아하나 너무 늦게 태어나니
이것을 대함에 눈물 흘러 두 줄기 쏟아지네.
기억하건대 저 옛날에 처음 博士의 부름 받으니
그해에 처음 元和라 개칭하였다오.
注+韓愈는 元和 원년(806)에 부름을 받고 국자박사가 되었다.故人이 從軍하여 右輔에 있으면서
나를 위해 헤아려서 石鼓 놓을 자리 파 놓았네.
나는 冠을 세탁하여 쓰고 목욕하고는 祭酒에게 아뢰기를
이와 같은 지극한 보물 남아 있는 것이 어찌 많겠습니까.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아 오면 당장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石鼓 단지 몇 마리의 낙타면 실어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太廟에 올려 郜鼎과 나란히 둔다면
注+《春秋》桓公 2년에 “노나라가 고땅의 큰 솥을 宋나라에서 취하여 太廟에 넣었다.” 하였다.빛과 값이 어찌 백 배만 더할 뿐이겠습니까.
聖上의 은혜로 만약 太學에 보관하도록 허락된다면
諸生들 講解하여 학문을 갈고 닦을 것입니다.
鴻都門에 石經
注+漢나라 靈帝 희평 4년(175)에 여러 儒者들에게 명하여 五經의 문자를 수정하고 議郞인 蔡邕에게 명하여 古文(蝌蚪文字)과 篆書와 隷書의 세 가지 서체로 쓰게 하여 돌에 새겨서 太學의 문밖에 세웠다. 구경하느라 오히려 길을 메웠으니
온 나라가 파도처럼 달려옴 앉아서 볼 것입니다.
石鼓의 이끼 깎아 내고 후벼 내어 마디와 모를 드러내고
편안히 두어 평평하고 기울지 않게 하며
큰 집에 깊은 처마로 덮고 가려 준다면
오랜 세월 지나도록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大官들 일에 노련하여 게으르니
어찌 즐겨 감격하겠는가 한갓 우물쭈물할 뿐이라오.
목동들 부싯돌 쳐 불을 일으키고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을 대어 소중히 어루만질까.
나날이 지워지고 다달이 없어져 매몰되어 가니
육 년 동안 서쪽 바라보며 부질없이 한숨만 나오네.
王羲之의 속된 글씨는 모양의 아름다움 따랐는데도
몇 장의 종이로 오히려 흰 거위와 바꿀 수 있었는데
周나라 이어 八代의 王朝에 전쟁이 그쳤으나
수습하는 이 없으니 그 이유 어째서인가.
지금은 태평시대라 아무 일 없으니
儒學을 높여 쓰고 孔孟을 높인다오.
어이하면 이것을 의논하는 대열에 올릴까.
懸河처럼 말 잘하는 입 빌렸으면 하네.
石鼓의 노래 여기에서 그치니
아! 나의 뜻 이루지 못하리라.
賞析이 시는《韓昌黎集》5권에 실려 있는 바, 石鼓의 유래를 서술하고 겸하여 감개를 읊은 것이다. 石鼓는 周 宣王이 사냥한 내용을 史籒(사주)가 頌으로 지은 다음 북처럼 생긴 열 개의 돌에 새긴 것으로 중국 최고의 金石文字로 꼽힌다. 석고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周 文王 때에 만들었다고도 하고 周 成王 때에 만들었다고도 하며, 혹은 北周가 만든 것이라고도 하고 또 後世의 僞作이라고도 한다. 그 중에서도 周 宣王 때의 유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석고에 대한 기록 또한 여러 기록에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살펴보면, 석고는 처음에 陳倉의 들판에 흩어져 있었다. 韓文公이 博士가 되자 祭酒에게 청하여 수레에 실어 太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고, 鄭餘慶이 마침내 鳳翔縣(지금 陝西)의 孔子廟로 옮겼다가 元나라 말기에 燕京의 國子監으로 옮겨 놓았다 한다.
宋時烈〈1607(선조 40)-1689(숙종 15)〉의《宋子大全》147권의〈書石鼓帖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고금에 석고에 대해 논한 자들이 많다. 송나라 皇祐 연간에는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465字였는데, 蘇東坡 때에 이르러서는 오직 24字만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承旨 趙庭堅이 중국에 갔을 때에 가져온 印本은 ‘維楊與柳’ 네 자만이 분명하고 그 나머지는 해독할 수 없었다. 周나라 宣王으로부터 韓文公까지는 거의 2천 년의 기간인데도 오히려 상세히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그 뒤 겨우 수백년 사이에 磨滅됨이 이와 같았으니, 아마도 만물의 이치는 운수가 반쯤 기울면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것처럼 급속도로 쇠락하는 것인가 보다.”
崔錫鼎〈1646(인조 24)-1715(숙종 41)〉의《明谷集》11권에〈石鼓銘〉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너를 돌이라 하자니 배가 아름답고 북통이 불룩하여 보면 북이요, 너를 북이라 하자니 재질이 딱딱하고 몸체가 굳어서 두드려보면 돌이다. 어찌하여 북이란 명칭을 붙였는가? 군사들을 모아놓고 무예를 익힌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돌을 소재로 하였는가? 먼 후세에 보여주어 없어지지 않게 하려한 때문이 아니겠는가.[以汝爲石乎 則賁其腹而隆其呂 視之則鼓也 以汝爲鼓乎 則其質硜硜而其體鑿鑿 叩之則石也 奚取於鼓 不爲其輯士而講武乎 奚取於石 不爲其示遠而不泐乎]”
徐命膺〈1716(숙종 42)-1787(정조 11)〉의《保晩齋集》1권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