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昌宮 안에 가득한 대나무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 없으니 다발로 묶어 놓은 듯하네.
또 담장머리에는 千葉의 碧桃 있으니
바람 불자 꽃 떨어져 붉은 꽃잎 나부끼네.
궁궐 가의 노인 나를 보고 울며 말하되
소년 시절 뽑혀 일찍이 궁중에 들어갔었는데
上皇(玄宗)이 바로 望仙樓에 계시니
太眞이 함께 난간에 기대어 섰습니다.
누 위와 누 앞 모두 진주와 비취로 장식하니
현란하고 휘황하여 天地에 비추었습니다.
돌아오니 꿈인 듯 또 바보가 된 듯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궁중의 일 자세히 말하였겠습니까.
처음으로 일백 오일 지나 寒食이 되니
注+冬至 뒤에 105일이 지나면 한식이 된다.가게와 집에 연기 없어 궁중의 나무 더욱 푸르렀습니다.
한밤중 달이 높이 떴는데 거문고 소리 울리니
樂工 賀懷知가 비파 타며 場屋을 정하였습니다.
高力士가 전하여 고함쳐 念奴
注+念奴는 天寶 연간에 가무를 잘하던 유명한 기생이다.찾으니
念奴는 몰래 樂工들과 짝하여 자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찾아내고 또 연달아 재촉하니
特命으로 길거리에 촛불 밝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리따운 자태 눈 가득히 붉은 비단 이불에서 자다가
구름같은 머리 빗질하고 곧바로 단장하여 띠를 묶고는
九天으로 날아올라 한 소리로 노래하니
二十五郞이 노래에 맞추어 피리 불었습니다.
어느덧 大徧 梁州曲 다 연주하니
여러 가지 龜玆曲 연이어 울렸습니다.
李謨는 젓대 잡고 궁중의 담 옆에 있으면서
새로 작곡한 몇 개의 곡조 훔쳐 베꼈습니다.
注+明皇이 上元날 밤에 몰래 등불 아래에서 놀았는데, 홀연히 누대 위에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들으니, 전날 저녁에 새로 지은 곡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크게 놀라 은밀히 피리부는 자를 잡아다가 힐문하니, 말하기를 “어젯밤에 몰래 천진교 위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궁중에서 연주하는 곡조를 듣고는 마침내 다리 기둥에다 손톱으로 악보를 그려 기억하였다.” 하였다. 그의 성명을 물으니 李謨라 하였다. 명황은 기이하게 여겨 물건을 하사해 주고 가게 하였다.平明에 大駕 行宮을 출발하니
수많은 사람들 길 가운데에서 북 치며 춤추었습니다.
百官과 의장행렬 岐王과 薛王 피하였고
楊氏의 자매들 바람과 싸우며 수레 몰아 갔습니다.
明年 시월 洛陽이 격파되니
임금 다니시던 길 남아 安祿山이 지나갔습니다.
백성들 몰아 宿食을 제공하게 하여 감히 감추지 못하니
백성들 소리 없이 남몰래 눈물 떨어구었습니다.
長安과 洛陽 평정된 후 육칠 년만에
나는 다시 집 찾아 行宮 앞으로 왔습니다.
莊園은 불타 없어지고 마른 우물만 남았으며
行宮의 문에는 나무만 완연하였습니다.
그후 서로 여섯 황제 전해오니
注+明皇 뒤로 또 肅宗ㆍ代宗ㆍ德宗ㆍ順宗ㆍ憲宗의 여섯 황제를 전하였다.離宮에는 이르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궁문 닫혀 있었지요.
오가는 소년들 長安의 일 말하는데
玄武樓는 이루어지고 花萼樓는 폐지했다 하였습니다.
注+옛날 궁궐 서쪽에 化萼相輝樓를 창건하였는데, 뒤에 또다시 玄武樓를 세우고 마침내 化萼樓를 폐하였다.지난해 勅使가 대나무 베러 와서
우연히 문 여는 날 만나 잠시 서로 따라갔답니다.
가시나무와 개암나무 즐비하여 못 메웠고
여우와 토끼 교만한 듯 어리석은 듯 나무사이에 뛰놀았습니다.
춤추던 누대 기울었으나 터는 아직 남아 있고
꽃무늬 창 그윽하나 깁은 아직도 푸르렀습니다.
먼지는 분 바른 벽 덮었는데 옛 꽃비녀 보였고
까마귀는 風磬 쪼아 옥 부서지는 소리 났답니다.
上皇은 섬돌 가의 꽃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옛모습 그대로 예전의 御榻 뜰에 임하여 비껴 있었습니다.
뱀은 제비집에서 나와 斗栱에 서려 있고
버섯은 香案에 나 집무실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寢殿이 端正樓와 서로 연해 있는데
太眞이 누대 위에서 머리 빗고 씻던 곳이었습니다.
새벽빛 나오지 않아 발 그림자 침침하였는데
지금까지 산호 갈고리 뒤집혀 걸려 있었습니다.
옆 사람 향해 가리키며 인하여 통곡하고
다시 궁문 나와서도 눈물이 서로 이어졌습니다.
이 뒤로 다시 궁문 닫히니
밤마다 여우와 살쾡이들 문과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나는 이 말 듣고 마음과 뼛골 슬퍼지니
태평을 이룬 것 누구이며 나라를 어지럽힌 것 누구인가.
노인 말하기를 촌늙은이가 무엇을 분별하겠습니까마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 그대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姚崇과 宋璟이 相公이 되어서는
注+姚崇과 宋璟은 모두 명황의 어진 재상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上皇에게 권하고 간하는 말 간절하였습니다.
陰陽을 조화롭게 다스려 벼와 기장 풍년 들고
中外를 조화시켜 병란이 없었습니다.
장관들 청렴하고 공평하며 태수들 훌륭하니
인물을 선발함 모두 相公에게 말미암는다고 말했습니다.
開元 말엽에 姚崇과 宋璟이 죽으니
조정은 점점 양귀비에게 말미암게 되었습니다.
注+唐나라가 혼란해진 階梯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安祿山이 궁중에 들어와 養子 되었고
注+天寶 10년(751)에 安祿山을 불러 궁중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楊貴妃가 궁녀들로 하여금 그를 채색 가마에 태우게 하였다. 임금이 후궁들이 떠들고 웃는 이유를 묻자, 좌우의 사람들은 양귀비가 아이를 씻겨 주어서라고 대답하니, 임금은 기뻐하여 양귀비에게 洗兒錢(아이를 씻기는 돈)을 하사하였다.虢國夫人 문 앞은 시장처럼 시끄러웠습니다.
注+楊貴妃의 언니가 虢國夫人에 봉해지니, 형세와 기염이 찌를 듯하여 사람들이 모두 아부해서 그 문이 시장과 같았다.권력을 농간한 재상 이름 기억할 수 없으나
어렴풋이 楊氏와 李氏로 기억합니다.
조정의 계책 전도되어 四海가 흔들리니
오십 년 이래 큰 상처되었습니다.
今皇께서 神聖하고 승상 현명하니
조서 내리자 吳와 蜀이 평정되었으며
官軍이 또 淮西의 역적 사로잡으니
이 역적 또한 제거되자 천하가 평화로워졌습니다.
해마다 連昌宮 앞의 길에 밭갈아 심었는데
금년에는 자손 보내어 밭갈지 않았습니다.
이 늙은이의 뜻 皇帝가 오시기 깊이 바라서이니
부디 조정의 계책 잘 세워 用兵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連昌宮은 唐나라 황제의 行宮 중의 하나로 高宗 顯慶 3년(658)에 지어졌는데, 지금의 河南省 宜陽縣 서쪽 19리 지점에 있었다. 元和 13년(818) 원진이 通州司馬였을 때에 이 유명한 장편 敍事詩를 지었는데, 연창궁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安史(安祿山과 史思明)의 亂을 전후로 한 唐나라 정치의 治亂의 원인을 탐색하였다.
崔演( ?-? )의《艮齋集》1권〈連昌宮〉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빚어지게 된 시대적인 상황을 서술한 다음 “아 처음은 있으나 잘 끝마침이 드무니 임금의 마음이 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있네.[嗟有初而鮮終 在一心之聖狂]”라 하고 “돌아보건대 시군과 세주는 어찌하여 이것을 거울삼아 징계하지 않는가.[顧時君與世主 盍監此而懲創]”라고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