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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2)

공자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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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祭期 洪武元年 定以仲春秋上丁日하고 降香遣官하여 祭孔子于國學이라
四年이라 進士釋褐하고 詣學釋菜 更定하여 各置高案호대 籩豆簠簋登鉶 悉用磁器하고 牲用熟하며
樂舞生 擇監生及文武大臣子弟在學者하여 預敎習之하다 後用大常樂舞生이라
七年이라 仲春上丁 日食하여 改用次丁하다
二十六年이라 頒大成樂器于天下府學하고 令州縣如式製하다
二十九年이라 黜揚雄從祀하고 進漢董仲舒하다 後遇登極이어든 皆遣官하여 祭告闕里하고 駕幸太學하여 行釋菜儀하다
永樂八年이라 正文廟繪塑衣冠하여 令合古制하다
正統元年이라 刊定從祀名爵位次하여 頒行天下하다 進胡安國蔡沈眞德秀從祀하다
三年이라 令祭丁 品物非其土産이어든 鹿以羊代하고 榛栗以所産菓品代하다
八年이라 追封元吳澄하여 爲臨川郡公하고 從祀하다
成化二年이라 封董仲舒하여 爲廣川伯하고 胡安國 建寧伯으로 蔡侵 崇安伯으로 眞德秀 浦城伯으로하다
十二年이라 增樂舞生 爲八佾하고 籩豆 各十二하다
二十二年이라 二月朔 當釋菜 値上丁하여 以次日釋菜하다
景泰六年이라 奏准以兩廡祭品儉薄으로 增豕四隻하다 棗栗 各五十斤이요 黍稷 各一斗 形鹽 五十斤이라
弘治九年이라 封宋楊時하여 爲將樂伯하고 從祀하다
嘉靖九年이라 釐正祀典하여 始爲木主하고 題曰 至聖先師孔子神位라하다 大成殿 爲先師廟하고 殿門 爲廟門하다
四配 稱復聖顔子宗聖曾子述聖子思子亞聖孟子之位하며 十哲以下門弟子 皆稱先賢某子之位하고
左丘明以下 稱先儒某子之位하다 申黨 卽申棖이니 今革하여 存棖이라
公伯寮秦冉顔何荀況戴聖劉向賈逵馬融何休王肅王弼杜預吳澄十三人 罷祀하고
林放蘧伯玉鄭衆盧植鄭玄服虔范寗七人 各祀于其鄕하고 后蒼王通歐陽脩胡瑗陸九淵許衡 增入從祀하다
凡籩豆樂舞之數 皆更定焉하고 內臣降香 亦罷
隆慶五年이라 以本朝薛瑄從祀하다
萬曆十二年이라 以本朝王守仁陳章胡居仁從祀하다
東廡 英廡侯曾點 泗水孔鯉 改入啓聖祠하여 從祀하고 西廡 曲阜侯顔無繇 改入啓聖祠하여 從祀하다
一 齋戒
一 省牲이라
牛一注+今二山羊五注+今北羊이라豕九注+今十四 鹿一 兎五注+今一이라
一 陳設이라
正壇 犢一羊一豕一登一鉶二 籩豆各十이요 簠簋各二 帛一이라
共設酒尊三爵一篚一于壇東南하고 西向하며 文案一于壇西
四配位 每位 羊一豕一登一鉶二 籩豆各十簠簋各一이요 爵二帛一篚一이라
十哲位 東五壇 每位 豕一分五하고 帛一篚一爵三鉶一이요 籩豆各四簠簋各一이요 酒盞이라 西五壇同이라
東廡 五十三位 共十三壇이러니 今四十七位 分十六壇이라
每壇 豕一分三하고 帛一篚一爵一이요 籩豆各四簠簋各一이요 酒盞四
西廡 五十二位 共十三壇이러니 今四十八位 分十六壇이라 陳設同上이라
正祭 典儀하여 行迎神이어든 皆四拜 樂章只取六章이라 讀祝時 衆官皆跪하고
終獻後飮福 亦竝跪 執事 以爵進이어든 飮福하고 以胙進이어든 受胙하고 復位再拜
徹饌而送神이어든 四拜 讀祝官 捧祝하고 掌祭官 捧帛하여 詣望瘞位하여 禮畢이라
祝文이라 維洪武年歲次朔日 皇帝 遣某官某하여 致祭于大成至聖文宣王注+하노이다
惟王注+嘉靖禮曰 惟師라하다 德配天地하고 道冠古今하며 刪述六經하고 垂憲萬世일새
謹以牲帛醴齊粢盛庶品으로 祗奉舊章하여 式陳明薦하고
以兗國復聖公注+顔子 嘉靖禮曰 復聖顔子라하다 郕國宗聖公注+曾子 嘉靖禮曰 宗聖曾子라하다 沂國述聖公注+子思子 曰述聖子思子라하다 鄒國亞聖公注+孟子 曰亞聖孟子라하다으로하노니 尙享하소서


대명회전사의
모든 제사 시기는 원년(1368)에 仲春(2월)과 仲秋(8월)의 上丁日로 정하고, 향을 하사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國學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4년, 進士하고 국학에 나아가 를 지냈다. 다시 개정하여, 각기 높은 상을 두고, , 은 모두 사기 그릇을 사용하며, 희생은 익힌 것을 썼다.
 簠 簋 登 鉶 簠 簋 登 鉶
國子監 생도와 국학에 재학 중인 문무 대신의 자제를 뽑아서 미리 가르쳐 익히도록 하였다. 후에 을 썼다.
7년, 仲春 上丁日에 일식이 있어서 다음 丁日로 바꾸었다.
26년, 를 천하의 府學에 나누어주고 주‧현에서 그 방식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29년, 黜祀하고 나라 從祀하였다. 이후로 황제가 등극하면 모두 闕里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 아뢰었고, 태학에 행차하여 釋菜 의식을 행하였다.
8년(1410), 文廟의 그림과 塑像의 의관을 바로잡아 옛 제도와 부합하도록 하였다.
원년(1436), 從祀者功名爵祿과 위치의 순서를 간행하여 천하에 반포하였다. 를 종사하였다.
3년, 상정일의 제사를 지낼 때 물품이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다면 사슴은 양으로 대신하고 개암과 밤은 그 지역 산출의 과실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8년, 원나라 臨川郡公에 추봉하고 종사하였다.
2년(1466), 동중서를 廣川伯에, 호안국을 建寧伯에, 채침을 崇安伯에, 진덕수를 浦城伯에 봉하였다.
12년, 악무생을 八佾로 증원하였고 는 각기 12개로 늘렸다.
22년, 2월 초하루에 釋菜를 드려야 하나 상정일이었으므로 다음날 석채를 드렸다.
6년(1455), 兩廡의 제사 물품이 검박하므로 돼지 4마리를 늘려야 한다고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대추와 밤은 각기 50근, 수수와 기장은 각 1두, 은 50근 늘렸다.
9년(1496), 나라 將樂伯에 봉하고 종사하였다.
9년(1530), 제사의 儀典을 바로잡아 처음으로 나무 신주를 만들어 ‘至聖先師孔子神位’라고 쓰고, 대성전은 先師廟라 하고 대성전의 殿門廟門이라 하였다.
四配는 ‘復聖顔子之位’, ‘宗聖曾子之位’, ‘述聖子思子之位’, ‘亞聖孟子之位’라 칭하였다. 十哲 이하 문하 제자는 모두 ‘先賢某子之位’라고 칭하고,
이하는 ‘先儒某子之位’라 칭하였다. 申黨은 곧 이니 〈신당과 신정을 모두 종사하던 것을〉 지금 혁파하여 신정만 남겼다.
7인은 각기 그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을 종사에 증원하였다.
, 樂舞의 수를 모두 다시 정하였다. 內臣을 통해 향을 하사하는 일 역시 그만두었다.
5년(1571), 본조(명나라) 을 종사하였다.
12년(1584), 본조 을 종사하였다.
동무에 있던 英廡侯 泗水侯 를 바꾸어 啓聖祠에 종사하고, 서무에 있던 曲阜侯 를 바꾸어 계성사에 종사하였다.
1. 재계한다.
1. 희생을 살핀다.
소 1마리,注+지금은 2마리를 쓴다. 산양 5마리,注+지금은 을 쓴다. 돼지 9마리,注+지금은 14마리를 쓴다. 사슴 1마리, 토끼 5마리의注+지금은 1마리를 쓴다. 희생을 살핀다.
1. 陳設한다.
正壇에는 송아지 1마리, 양 1마리, 돼지 1마리, 1개, 2개, 각 10개, 각 2개, 비단 1필을 진설한다.
正壇陳設正壇陳設
酒尊 3개, 1개, 광주리 1개를 정단의 동남쪽에 함께 진설하고 서쪽을 향하게 한다. 文案 1개를 정단 서쪽에 진설한다.
四配位에는 神位마다 양 1마리, 돼지 1마리, 등 1개, 형 2개, 변과 두 각 10개, 보와 궤 각 1개, 작 2개, 비단 1필, 광주리 1개를 진설한다.
四配陳設四配陳設
十哲位에는 동쪽 5개 의 신위마다 돼지 1마리를 다섯으로 나누어 놓고 비단 1필, 광주리 1개, 작 3개, 형 1개, 변과 두 각 4개, 보와 궤 각 1개, 酒盞 1개를 진설한다. 서쪽 5개의 단도 마찬가지이다.
十哲陳設十哲陳設
東廡는 53위에 모두 13개의 단이었는데, 지금은 47위에 16개의 단을 나누어 설치한다.
매 단에 돼지 1마리를 셋으로 나누어 놓고, 비단 1필, 광주리 1개, 작 1개, 변과 두 각 4개, 보와 궤 각 1개, 주잔 4개를 진설한다.
西廡는 52위에 모두 13개의 단이었는데, 지금은 48위에 16개의 단을 나누어 설치한다. 진설은 위와 같다.
兩廡陳設兩廡陳設
正祭에는 典儀을 하여 迎神을 행하면 모두 四拜한다. 악장은 6장만을 연주한다. 축문을 읽을 때 제관들은 모두 무릎을 꿇는다.
종헌 후에 음복할 때도 나란히 무릎을 꿇는다. 집사가 을 올리면 이 음복하고 祭肉을 올리면 찬이 祭肉을 받고, 자리로 돌아가 재배한다.
음식을 거두고 신을 전송할 때 사배한다. 讀祝官은 축문을 받들고 掌祭官은 폐백을 받들어 望瘞位로 나가면, 예가 끝난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洪武 ○○년 세차 ○ ○일, 황제께서 아무개 관 아무개를 보내 大成至聖文宣王께 제사를 드립니다.注+嘉靖 연간의 에는 ‘至聖先師孔子’라고 하였다.
생각하옵건대, 문선왕께서는注+가정 연간의 예에는 ‘생각하옵건대 스승[]께서는’이라고 하였다. 덕이 천지에 짝하고 도가 고금에 으뜸이며, 六經을 산삭하고 찬술하며 가르침을 만세에 드리우셨습니다.
삼가 희생과 폐백, 술과 곡식의 여러 제물로써 공손히 옛 典章을 받들어 공경히 진설하여 밝게 올립니다.
兗國復聖公,注+안자이다. 가정 연간의 예에는 ‘復聖顔子’라고 하였다. 郕國宗聖公,注+증자이다. 가정 연간의 예에는 ‘宗聖曾子’라 하였다. 沂國述聖公,注+자사자이다. 가정 연간의 예에는 ‘述聖子思子’라고 하였다. 鄒國亞聖公注+맹자이다. 가정 연간의 예에는 ‘亞聖孟子’라 하였다. 배향합니다. 흠향하옵소서.”


역주
역주1 洪武 : 明 太祖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2 大明會典祀儀 : ≪大明會典≫에 실린 공자 제례 의식에 관한 기록을 뽑아놓은 것이다. ≪大明會典≫은 明나라의 행정법규와 제도를 집대성한 일종의 행정법전이다. 弘治 10년(1497) 180권으로 편찬되었고, 嘉靖 연간 두 차례의 증보를 거치고 萬曆 연간에 다시 修訂을 더해 重修本 228권이 이루어졌다. ≪大明會典祀儀≫는 ≪大明會典≫ 권91에 실린 ‘群祀’ 항목 가운데 ‘先師孔子’에 실린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하는 泰仁本을 底本으로 하였다.
역주3 釋褐 : 賤者의 옷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진사가 처음 급제하여 관직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4 釋菜 :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의 일종이다. 희생 및 춤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채소 등을 올리는 의식으로, 釋奠보다 간략한 의식이다.
역주5 簠와 簋 : 祭享 때, 기장과 피를 담는 그릇으로 보와 궤가 짝을 이루어 사용되었다. 보는 밖은 네모지고 안은 둥글며, 궤는 밖과 안이 모두 둥글다. 모두 銅으로 만든다.
역주6 登과 鉶 : 登(鐙)은 제기의 일종으로, 조미하지 않은 담박한 국인 大羹을 담는 그릇이고, 鉶은 五味를 갖추어 조미한 和羹을 담는 그릇이다. 등과 형은 짝을 이루어 사용되었다.
역주7 樂舞生 : 樂生과 舞生의 병칭이다. 제사 때 雅樂의 연주와 佾舞를 담당하였다.
역주8 太常樂舞生 : 太常寺에서 선발한 樂舞生을 가리킨다. 樂舞生은 釋奠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樂生과 八佾을 추는 舞生을 병칭한 말이다. 明나라 초기에는 수도하는 어린 동자를 선발하였으나 후에는 군민의 준수한 자제를 선발하여 충당하였다.
역주9 大成樂器 : 釋奠의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를 가리킨다. 金, 石, 絲, 竹, 匏, 土, 革, 木의 팔음을 내는 악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金에 해당되는 악기는 大鐘, 鎛鐘, 特鐘, 編鐘, 石은 特磬, 編磬, 絲는 琴, 瑟, 琵琶, 三絃, 鼓絃, 鐘絃, 提絃, 竹은 笛, 簫, 管, 箎(지), 雙管, 匏는 笙, 土는 塤(훈), 革은 大鼓, 建鼓, 應鼓, 鼖鼓(분고), 搏拊(박부), 木은 柷(축), 敔(어)이다.
역주10 揚雄 : B.C.53~18. 前漢의 학자로, 자는 子雲이다. 四川 成都 출신이다. 司馬相如의 영향을 받았으며, 문장력을 인정받아 成帝 때 궁정 문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太玄經≫과 ≪法言≫ 등이 있다.
역주11 董仲舒 : B.C.179~B.C.104. 前漢의 학자로, 廣川縣 출신이다. 일찍부터 ≪春秋公羊傳≫을 공부하여, 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 武帝가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董子文集≫, ≪春秋繁露≫ 등을 남겼다. 明나라 憲宗 때 廣川伯에 봉해졌다.
역주12 永樂 : 明 成祖의 연호로, 1403년부터 1424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13 正統 : 明 英宗의 연호로, 1436년부터 1449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14 胡安國 : 1074~1138. 北宋 때의 학자이다. 자는 康侯, 시호는 文定이며, 福建 崇安 출신이다. 程頤를 私淑하여 居敬窮理의 학문을 중히 여겼다. ≪春秋胡氏傳≫, ≪資治通鑑擧要補遺≫ 등을 남겼다. 명나라 헌종 때 建寧伯에 봉해졌다.
역주15 蔡沈 : 1167~1230. 南宋 때 학자이다. 자는 仲默, 호는 九峰先生, 시호는 文正이다. 蔡元定의 둘째 아들로, 젊어 가학을 이었고, 朱熹에게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道州로 유배를 갔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九峰에 은거하면서, 주희의 명령으로 ≪尙書≫에 주를 달아, ≪書集傳≫을 완성했다. ≪洪範皇極≫, ≪蔡九峰筮法≫ 등을 남겼다. 명나라 헌종 때 崇安伯에 봉해졌다.
역주16 眞德秀 : 1178~1235. 南宋 때 학자이다. 자는 景元 또는 希元인데, 나중에 景希로 고쳤다. 호는 西山, 시호는 文忠이며, 建寧府 浦城 출신이다. 1199년 진사로 급제하였고, 泉州와 福州의 知州‧戶部尙書‧翰林學士‧參知政事 등을 역임했다.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時政에 대해 자주 건의했고, 奏疏는 수십만 자에 이르렀다. 저서에 ≪大學衍義≫, ≪唐書考疑≫, ≪西山讀書記≫, ≪文章正宗≫, ≪西山甲乙稿≫, ≪西山文集≫ 등이 있다. 명나라 헌종 때 浦城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7 吳澄 : 1249~1333. 元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幼淸 또는 伯淸, 호는 草廬先生, 시호는 文正이며, 撫州 崇仁 출신이다. 원나라 武宗이 즉위하자 國子監丞이 되었다. 翰林學士‧經筵講官 등을 역임하였다. ≪英宗實錄≫ 편찬을 마치고 귀향했다. 許衡, 劉因과 더불어 원나라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된다. ≪五經纂言≫, ≪吳文正集≫ 등을 남겼다.
역주18 成化 : 明 憲宗의 연호로, 1465년부터 1487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19 景泰 : 明 景宗의 연호로, 1450년부터 1457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20 形鹽 :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소금으로, 범 모양으로 만들어 籩에 담아 올렸다.
역주21 弘治 : 明 孝宗의 연호로, 1488년부터 1505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22 楊時 : 1053~1135. 北宋 때의 학자이다. 자는 中立, 호는 龜山, 福建의 將樂 출신이다. 程顥‧程頤 형제에게 수학하였다. 이들의 도학을 전파하여 洛學의 大宗으로 추앙받았다. ≪龜山集≫, ≪龜山語錄≫, ≪二程粹言≫ 등을 남겼다. 明나라 孝宗 때 將樂伯에 봉해졌다.
역주23 嘉靖 : 明 世宗의 연호로, 1522년부터 1566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24 左丘明 : ?~? 공자와 같은 무렵의 노나라 사람이다. ≪春秋左氏傳≫과 ≪國語≫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宋나라 徽宗이 中都伯에 봉하였다.
역주25 申棖 : ?~? 자는 子周,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이름이 申黨, 자가 周로 되어 있고,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申績이라고 하였으며, ≪論語≫ 〈公冶長〉에는 申棖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송 이래로 申棖, 申黨 두 사람을 종사하여 오다가 명나라 때 신당의 신위를 철거하고 신정만을 남겼다. 宋나라 眞宗 때 文登侯에 봉해졌고, 明나라 世宗 때 ‘先賢申子’로 칭해졌다.
역주26 公伯寮 : ?~? 자는 子周이며, 이름이 僚, 繚 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子路와 함께 노나라 계씨의 가신으로 있었다.
역주27 秦冉 : ?~? 자는 子開, 춘추시대 채나라 출신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나 ≪공자가어≫에는 실려 있지 않다. 송나라 진종 때 新息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秦子’로 칭해졌다.
역주28 顔何 : ?~? 자는 子冉,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가어≫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송나라 진종 때 堂邑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29 荀況 : B.C.313~B.C.238. 전국시대의 학자이다. 조나라 출신으로 자는 卿이다. 제나라에 유학하였고, 후에 참소를 받아 제나라를 떠나 春申君의 천거로 蘭陵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된 후, 벼슬에서 물러나 문인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맹자의 性善說을 비판하여 性惡說을 주장했으며, 禮를 강조하는 유학 사상을 발달시켰다.
역주30 戴聖 : ?~? 전한 때의 학자로, 자는 次君이다. 숙부 戴德과 함께 后蒼에게 배웠고, 小戴로 불린다. 今文禮學인 小戴學의 개창자다. ≪小戴禮記≫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禮記≫이다. 南宋 度宗 때 考城伯에 봉해졌다.
역주31 劉向 : B.C.77~B.C.6. 전한의 학자이다. 자는 子政, 한나라 종실 출신이다. 宣帝 때 諫大夫에 기용되어, 수십 편의 賦頌을 지었다. 재차 선제에게 기용되어 石渠閣에서 五經을 강의하였다. ≪說苑≫, ≪新序≫, ≪列女傳≫, ≪戰國策≫, ≪別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역주32 賈逵 : 30~101. 후한의 학자이다. 자는 景伯, 陝西 平陵 출신이다. ≪左氏傳解詁≫, ≪國語解詁≫를 저술하여 明帝에게 헌상하였다. ≪經傳義詁≫, ≪論難≫ 등을 저술하였다. 古文經學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주33 馬融 : 79~166. 후한의 학자이다. 자는 季長, 扶風 茂陵 출신이다. 校書郞‧南郡太守‧議郞을 역임하였다. 梁冀가 李固를 탄핵할 때 글의 초안을 잡았고, 또 〈西第頌〉을 지어 찬양하여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제자만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盧植과 鄭玄 등도 포함되어 있다. ≪孝經≫, ≪論語≫, ≪詩經≫, ≪尙書≫, ≪周易≫, 三禮 등을 주석하였다.
역주34 何休 : 129~182. 後漢의 학자이다. 자는 邵公, 任城 樊縣 출신이다. 太傅 陳蕃에 연좌되어 10여 년 동안 금고 생활을 하였고, 금고가 풀리자 司徒府屬吏를 거쳐 諫議大夫까지 올랐다. ≪春秋公羊解詁≫를 완성했다. 그의 공양학은 董仲舒를 이은 것으로 청나라 말에 이르러 今文公羊學으로 발전하였다.
역주35 王肅 : 195~256. 삼국시대 위나라의 학자이다. 자는 子雍, 시호는 景侯이며, 散騎黃門侍郞‧侍中‧太常‧中領軍 등을 역임하였다. 賈逵, 馬融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鄭玄에 대해 ≪聖證論≫을 지어 논박했다. ≪孔子家語≫에 注를 달았고, ≪馬王易義≫, ≪周易注≫, ≪尙書王氏注≫, ≪毛詩王氏注≫, ≪禮記王氏注≫, ≪論語王氏注≫, ≪國語章句≫, ≪王子正論≫ 등을 남겼다.
역주36 王弼 : 226~249. 삼국시대 위나라의 학자이다. 자는 輔嗣, 山陰 출신이다. 何晏 등에게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尙書郞에 등용되었으나, 司馬氏가 정권을 잡자 면직되었다. 何晏, 夏侯玄 등과 함께 玄學淸談의 풍조를 열었다. ≪老子注≫와 ≪周易注≫를 남겼다.
역주37 杜預 : 222~284. 西晉의 학자이다. 자는 元凱, 京兆 杜陵 출신이다. 魏나라에서 尙書郞을 지냈다. 晉 武帝가 즉위한 후 河南尹‧度支尙書‧鎭南大將軍‧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吳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春秋左氏經傳集解≫, ≪春秋釋例≫, ≪春秋長歷≫ 등을 남겼다.
역주38 林放 : ?~? 자는 子邱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史記≫와 ≪孔子家語≫에는 이름이 실려 있지 않으며, 임방이 예를 묻는 내용이 ≪論語≫ 〈八佾〉에 보인다. 송나라 진종 때 長山侯에 봉해졌다. 명나라 때 鄕祀로 내려 보냈다가 청나라 때 다시 공자묘에 입사되어, ‘先賢林子’로 칭해졌다.
역주39 蘧伯玉 : ?~? 이름은 瑗, 자는 伯玉이다. 춘추시대 衛나라 대부로, 세 公을 섬겼다. 공자가 존경하던 벗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도가에서는 ‘無爲而治’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시호는 成子이다. 원나라 때 內黃侯에 봉해졌다.
역주40 鄭衆 : ?~83.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仲師, 河南 開封 출신이다. 中郞將과 大司農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鄭興의 春秋左氏學을 계승하였으며, ≪周易≫과 ≪詩經≫, ≪周禮≫, ≪國語≫ 및 曆算에도 밝았다. ≪周禮鄭司農解詁≫, ≪鄭衆春秋牒例章句≫, ≪鄭氏婚禮≫, ≪國語章句≫ 등을 남겼다. 송나라 진종 때 中牟伯에 봉해지고 文廟에 종사되었다.
역주41 盧植 : ?~192.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子幹, 涿縣 출신이다. 靈帝 때 博士가 되었고, 九江太守, 北中郞將, 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董卓이 少帝를 폐위할 것을 거론하자 귀향하여, 上谷에 은거했다. ≪尙書章句≫, ≪三禮解詁≫ 등을 저술하였으나 일실되었고 ≪小戴禮記注≫가 전한다. 송나라 진종 때 良鄕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42 鄭玄 : 127~200. 후한의 학자이다. 자는 康成이며, 北海 高密 출신이다. 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로 있었으나, 낙양에 올라가 太學에 입학하였다. 馬融 등에게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44세에 ‘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평생을 학문에 바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訓詁學‧經學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周易≫, ≪尙書≫, ≪毛詩≫, ≪周禮≫, ≪儀禮≫, ≪禮記≫, ≪論語≫, ≪孝經≫ 등을 주석하였다. 송나라 때 高密伯에 봉해졌다.
역주43 服虔 : ?~?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子愼이며, 河南 滎陽 출신이다. 孝廉으로 천거되어 九江太守를 지냈다. ≪春秋左氏傳解≫를 저술하여, 그의 주석이 東晉 및 남북조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滎陽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44 范寗 : 339~401. 동진의 학자이며, 자는 武子이다. 孝武帝 때 中書侍郞이 되었으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학교를 세우고 경학에 힘썼다. ≪春秋穀梁傳≫의 집해를 저술하였다. 송나라 때 新野伯에 봉해졌다.
역주45 后蒼 : ?~? 전한의 학자이다. 夏侯始昌, 孟卿 등에게 배웠다. 한 무제 때 박사가 되었고 관직이 少府에 이르렀다. ≪시경≫과 예학에 통달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다.
역주46 王通 : 584~617. 수나라의 학자이다. 자는 仲淹, 시호는 文中子이며, 絳州 龍門 출신이다. 당나라 王勃의 조부로, 강학에 힘을 쏟아 薛收와 房喬, 李靖, 魏徵, 房玄齡 등을 배출했다. 文帝 때 〈太平十策〉을 상주했는데, 채택되지 않은 것을 알고 河汾 일대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文中子≫, ≪元經≫ 등을 남겼다.
역주47 歐陽脩 : 1007~1072.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永叔, 호는 醉翁‧六一居士이며, 廬陵 출신이다. 仁宗 때 진사에 급제하여 館閣校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范仲淹이 재상 呂夷簡에 의해 좌천되자 이에 불복하다가 夷陵의 令으로 좌천되었다. 1043년 知諫院에 임명되자 글을 올려 범중엄 등을 기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시 정적으로부터 기피 대상으로 몰려 11년 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龍圖閣直學士‧禮部侍郞兼翰林侍讀學士‧樞密副使‧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梅堯臣‧蘇舜欽 등과 함께 古文을 제창하였고, 종래의 ‘西崑體’를 비판하였다. 詩文 혁신운동의 기수로 꼽힌다. ≪歐陽文忠公集≫을 남겼다.
역주48 胡瑗 : 993~1059.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翼之, 호는 安定先生, 泰州 海陵 출신이다. 經術로 范仲淹의 초빙을 받아 蘇州府學 敎授를 지냈다. 太學博士‧國子監直講‧太常博士 등을 역임했다. 孫復, 石介와 함께 仁義禮樂을 제창하여 ‘宋初三先生’이라 불렸다. 性命에 대한 견해를 개진하여 송나라 理學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論語說≫, ≪洪範口義≫, ≪周易口義≫, ≪春秋口義≫, ≪皇祐新樂圖記≫ 등을 남겼다.
역주49 陸九淵 : 1139~1192.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子靜, 호는 存齋‧象山翁, 시호는 文安이며, 撫州 金溪 출신이다. 朱熹와 이름을 나란히 했지만 견해는 대립하여 학계를 양분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하였다. 주희와 서신으로 논쟁하면서 鵝湖에서 만나 변론을 벌였으나, 학문을 존중하여 도의적 교유는 변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王守仁이 그의 사상을 계승해 陸王學派를 형성했다. ≪象山先生全集≫을 남겼다.
역주50 許衡 : 1209~1281. 원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仲平, 호는 魯齋, 시호는 文正이며, 懷孟 河內 출신이다. 蘇門에 살면서 姚樞와 함께 강습하면서 도학을 실천하였다. 憲宗 4년 忽必烈의 초빙으로, 京兆提學과 國子祭酒 등의 요직을 맡았다. 集賢殿大學士‧領太史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讀易私言≫, ≪魯齋心法≫, ≪魯齋遺書≫, ≪許文正公遺書≫, ≪許魯齋集≫ 등을 남겼다. 元나라 仁宗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51 隆慶 : 明 穆宗의 연호로, 1567년부터 1572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52 薛瑄 : 1389?~1464. 명나라 때의 학자이다. 자는 德溫, 호는 敬軒, 시호는 文淸이며, 山西 河津 출신이다. 魏希文과 范汝舟에게 理學을 배웠다. 山東提學僉事로 있을 때, 白鹿洞學規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직접 강의하여, 사람들이 薛夫子라 불렀다고 한다. 大理寺丞‧禮部右侍郞 겸 翰林院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程朱의 학설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從政錄≫, ≪讀書錄≫, ≪薛文淸集≫ 등을 남겼다.
역주53 萬曆 : 明 神宗의 연호로, 1573년부터 1620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54 王守仁 : 1472~1529. 명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伯安, 호는 陽明, 시호는 文成이며, 浙江 餘姚 출신이다. 刑部主事‧右僉都御使‧南贛巡撫 등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반란 사건을 진압하였다. 49살 때 처음으로 致良知의 설을 제창하고 강학에 힘써 문하의 제자가 더욱 융성해졌다. 陸象山의 사상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유학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이를 양명학이라 한다. 그의 사상은 ‘知行合一’, ‘靜座法’, ‘致良知’ 등을 원리로 한다. ≪傳習錄≫, ≪王文成公全書≫를 남겼다.
역주55 陳獻章 : 1428~1500. 명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公甫, 호는 白沙先生‧石齋‧石翁이며, 廣東 新會 출신이다. 吳與弼에게 理學을 배우고 돌아와, 陽春臺를 쌓고 독서하였다. 1483년 翰林檢討에 임명되었으나, 終養을 위해 귀향했다. 陸象山의 학풍을 계승했으며, 天理와의 일체를 주장하였다. ≪白沙詩敎解≫와 ≪白沙集≫을 남겼다.
역주56 胡居仁 : 1434~1484. 명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叔心, 호는 敬齋이며, 江西 餘幹 출신이다.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고, 吳與弼 문하에 들어가 程朱學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忠信을 위주로 하면서 放心을 구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白鹿書院과 洞源書院의 초청을 받아 강의했고, 淮王의 초청으로 ≪周易≫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居業錄≫, ≪敬齋集≫, ≪易象鈔≫, ≪胡文敬公集≫ 등을 남겼다.
역주57 曾點 : ?~? 자는 子晳, 춘추시대 노나라 南武城 출신이다. 아들 曾子와 함께 공자의 문하에 있었다. 唐나라 玄宗 때 宿伯에 봉해졌고, 宋나라 眞宗 때 萊蕪伯에 봉해졌으며, 南宋 度宗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明나라 英宗 때 공의 작위를 받았다.
역주58 孔鯉 : B.C.532~B.C.481. 자는 伯魚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魯 昭公이 잉어를 보내와 ‘鯉’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아들이자 述聖 孔伋의 아버지이므로, 송나라 휘종이 泗水侯에 봉하였다.
역주59 顔無繇 : B.C.545~? 자는 路이며, 顔路라고 부르기도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며, 顔回의 아버지이다. 부자가 모두 공자의 문하에 있었다. 元나라 文宗 때 杞國公에 봉해졌다.
역주60 (憲)[獻] : 저본에는 ‘憲’으로 되어 있으나, ≪大明會典≫에 의거하여 ‘獻’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1 北羊 : 양의 한 종류이다. 韓榮國의 ≪迂書≫ 권1 〈附金相堉甲申上疏〉에 “양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北羊은 털이 아름다우나 성질이 불같기 때문에 火羊이라고 하고 南羊은 털이 연하고 성질이 유순하기 때문에 綿羊이라고 한다.[羊有二種 北羊毛美而性燥 故謂之火羊 南羊毛脆而性柔 故謂之綿羊]”라고 하였다.
역주62 [一] : 底本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大明會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63 嘉靖禮至聖先師孔子 : 底本에는 ‘惟’ 다음에 위치하여 있으나 문맥에 따라 옮겼다.

공자가어(2) 책은 2020.11.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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